- 삼엄한 포위망 속 전교생 시위 동참
- 나가면 너희들 다 죽어!
- 한 달 가까이 신출귀몰, 외로운 싸움
< 신흥고 5.27 시위>
80년 5월 27일 새벽, 신흥고 정옥동 교감에게 도교육위원회 장학사의 전화가 걸려 온다. 학생들 동태가 심상치 않으니, 일찍 출근해 대책을 세우라는 것이다. 교사들은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해 학급마다 학생들을 살폈지만 아무 이상이 없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학교에는 장학사와 담당 형사가 급파돼 있었다. 이런 움직임을 모른 채 등교한 학생들은 쪽지를 통해 교실마다 행동계획을 전한다. 아침 예배시간, 목이 터져라 부르는 학생들의 찬송소리는 평소와 달리 격정적이고 우렁차서, 이미 학교 상공을 맴도는 헬기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기도 순서가 되자, 교실마다 통성 기도가 터져 나왔다. 학생들의 표정은 격앙돼 있었다. 당초, 교사들이 교무회의를 하는 동안에 나갈 계획이었지만, 신호가 될 8시 1교시 시작종은 울리지 않았다. 이미 학교측은 유종철 교목과 생활지도부장, 교련교사 등이 3학년 반장과 학도호국단 간부 20여명을 신흥중 과학실에 불러 설득 중이었다. 교실에 갑자기 교사들이 들어오고 3학년 방송수업이 시작되자, 먼저 문과 반 학생들이 급히 교실 문을 박차고 나온다. 3학년 2반에서는 이성호가, 담임 강명수 선생을 밀치고 나오고, 3학년 1반 박일규는 방송실로 곧장 뛰어가, 방송수업 중이던 문봉길 선생의 마이크를 나꿔챈다.
(평소 사회 현실에 관한 발언으로 학생들로부터 존경받던 문 선생은, 이 순간 순순히 마이크를 넘겨줬다) 이어 이과 반 학생들이 뛰쳐나와 3학년 모두 운동장에 모이고, 몇몇 학생들은 1, 2학년생을 불러내 순식간에 신흥고생 1천5백여 명 전체가 집결, '오 자유!' 등의 노래를 부르고 '비상계엄 철폐', '유신잔당 척결' 등 구호를 외친다. 3학년 고 석은 마이크를 잡고 '애국신흥인에게 고함'이라는 유인물을 낭독하고 "우리를 말리는 선생님들은 역사의 반역자가 될 것"이라고 연설한다. 헬기가 상공을 맴도는 학교 주변은 군인과 경찰 5백여 명이 총을 겨눈 채 둘러쌌고, 다가교 옆에 페퍼포그 차량 2대가 서 있었다.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돌다 교문을 향해 달려가지만, 교문 옆 느티나무 쪽에 서 있던 교사들이 가로막았다. 몇몇 교사는 막대기를 휘두르며 "나가면 너희들 다 죽어!" 외치며 결사적으로 막았고, 어떤 교사는 '군의 발포명령'소식을 전해 주며 자제를 당부했다. 이때 주임교사 강규원 선생은 제자들에게 밀려 넘어졌는데, 나중에 "교사생활 중 이렇게 기분 좋았던 적이 없었다"고 학생들 앞에서 회고했다 한다.
시위대열은 결국 교문을 돌파하지 못하고 운동장으로 발길을 돌려, 다시 스크럼을 짜고 1시간 반 동안이나 시위를 한다. 3학년생 이찬규는 자작시를 방송으로 낭송하기도 했다. 이들은 당초 9시 10분 안에 다가교를 건너 시내로 나갈 계획을 세웠지만, 시간은 벌써 9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당시, 다가공원에 경찰 병력이 배치되는 시각이 9시 반쯤이었다.) 전주천 변에 사람들이 몰려 서서 건너다보고 있었고, 교문 밖에서 대검이 반짝 반짝 빛나는 게 보였다.
바로 옆 기전여고와 신흥중 건물에서는 학생들이 쫑긋이 고개를 내밀고 지켜보고 있었으며, 더러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도 보였다. 집회 도중 전원이 차단돼 방송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되자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는 듯 했지만, 한 학생이 단상에 올라 기도를 시작하자 모든 학생이 통성기도를 한다. 학생대표들은, 시국공청회를 하며 현 시국의 진실을 알리자고 결정, 10시 30분쯤 강당으로 들어간다. 강당 안에서 집회를 하는 동안, 정양 선생 등 교사 2명은 바깥 상황을 학생들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도교육위원회와 도경 간부들이 앞장선 학생 몇(배을섭, 이성호 등)과 협상하는 사이, 학도호국단 간부들과 반장들은 교사들의 설득으로 반 별로 의견을 모은다. 학생들은 교사들의 설득 속에 의견이 분분하고, 3학년 대표들이 다시 모이지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결국 12시쯤 자진 해산한다. 정옥동 교감은 경찰 측에 병력을 철수해 학생들을 맘놓고 귀가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오후 1시쯤 1, 2학년부터 하교를 시작한다. 그러나 몇몇 경찰이 남아 주동학생을 연행할 기미를 보이자, 주동 학생들은 1, 2학년 틈에 끼어 먼저 가거나, 신흥중학생들과 교복 윗도리를 바꿔 입고 교문을 나섰다. 몇몇은 기전여고 쪽 산으로 넘어 갔다.
시위 이후 신흥고는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휴업을 하고, 양영옥 교장은 시위사태가 재발하면 모든 책임을 지기로 계엄사령부와 타협해, 경찰에 불려 가 조사 받은 주동학생들도 모두 훈방된다. 그러나 개교 이후로도 교내 여기저기서 낙서가 발견되는 등 긴장감이 돌고, 결국 6월 17일 징계위원회가 열려 모두 25명을 징계한다.
*Mini Box <당시 신흥고 징계 내용>
휴학: 3학년 박영화(이후 자퇴)
무기정학: 3학년 박일규, 고 석, 채범석, 김인수, 이재유, 허천일, 2학년 허민,
3주 정학: 3학년 박현수, 김의신, 2학년 차춘남
2주 정학: 3학년 조인구, 조영진, 유건영, 김용선, 김진길, 신영재, 김남규, 이중길, 배을섭, 이정우, 최이천, 전정철
1주 정학: 강원국, 황찬규
*징계학생 외에 3학년 이성호가 자퇴했고, 교사 중 문봉길, 최용식 선생이 구속, 해직 당한다. 또, 이들에게 성지야학으로부터 유인물을 전달하려던 한일신학교 김명희는 붙잡힌 뒤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완산여상 교사 이상호는 징역 1년을 선고받는다.*
<이강희, 이우봉의 유인물 배포사건>
휴교기간이 끝나고 다시 등교를 하게 되었으나, 학생들의 표정은 침울했다. 신흥고 3학년 이강희는 친구 이우봉에게 "시위가 무산됐는데 다시 시작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둘은 다른 친구들에게 의사를 타진해봤으나 쉽지 않아 결국 둘만이 외로운 싸움을 결행하기로 한다. 광주의 참담한 사태가 이미 막을 내린 뒤라, 둘은 광주에 가기도 하고, 목회자들을 만나 간접적인 조언을 받기도 하면서 행동을 준비한다.
이들은 먼저 광주항쟁을 전 학교에 알리기 위해 낙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페인트를 사 들고 전주 시내 전 고등학교를 밤마다 며칠에 걸쳐 돌며 "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이 광주시민 2천명을 학살했다" "고등학생들이여 총궐기하자" 등 구호를 벽과 시멘트 바닥에 적고 다녔다. 도중에 성심여고에서는 경비에게 들키기도 했다. 신흥고에도 구호를 적어 놓고 다음날 등교해 보니, 학교측에서 구호 위에다 페인트로 덧칠을 해서 글자가 희미해졌지만 학생들은 술렁대기 시작하였다. 이강희, 이우봉은 이제 유인물 작업을 하기로 했다.
등사기와 철펜 등은 이강희가 다니던 중앙교회에서 핑계를 둘러대 빌렸고, 유인물을 쓸 기초내용은 교회 선배인 이광영에게서 유인물 한 뭉치를 얻어 왔다. 유인물을 인쇄할 종이는 보충수업비, 참고서 구입비를 쏟아 붓고 모자라, 정학 당한 친구들에게서 갹출해 사들였다. 둘은, 밤을 새워 이강희 방에서 가리방을 긁어 "전주시내 고등학생들에게 드리는 글-고등학생들이여 총궐기하자"는 제목의 유인물을 찍었다.
다음날 밤 각자 한 학교씩을 맡아 교실, 화장실, 복도 등 고등학교 전역에 유인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 낙서사건 덕분인지 학교경비는 갈수록 강화됐고, 다음날 등교해보면 대부분 수거되고 학생들 손에는 불과 몇 장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사정은 어려워진다. 3학년 보충수업이 끝나고 밤 11시를 넘어 유인물을 들고 나가, 학교 근처 숲이나 건물옥상에 숨어 경비가 순찰 도는 주기를 계산해 보면, 날이 갈수록 그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이들은 결국 시내 주택가에 유인물을 배포하기로 하고 "전주시민에게 드리는 글-전주시민이여 총 궐기합시다"라는 제목으로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해 광주시민 2천명을 참혹하게 학살했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만들었다. 이들은 밤새 건물 안에 숨어 있다가 통행금지가 풀리는 시간부터 주택가에 배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유창훈이 가세해, 이강희와 함께 다니며 유인물을 뿌렸다. 밤을 꼬박 새워 유인물을 찍고, 새벽 4시부터 배포한 뒤 등교하는 일정이 며칠동안 이어지다 보니 십대의 체력도 한계가 드러났다. 6월말이 되자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배포하고, 징계를 당한 친구들이 등교하면 다른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러나 마지막 배포에 나선 이강희, 유창훈이 어느 아파트에서 경비에게 들켜 남은 유인물을 갖고 돌아오자, 이우봉이 자신이 사는 교동에 배포하겠다며 갖고 나갔다가 경찰에 연행되고 만다. 당시 경찰은 "거의 한달 가까이 신출귀몰해 큰 조직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고 있었는데 잡고 보니 애숭이"라며 배후조직을 캔다고 이들을 모질게 다루며 추궁했다. 이강희, 이우봉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 퇴학당하고, 유창훈은 훈방, 선배 이광영은 전주 35사단 헌병대까지 갔다가 훈방된다.(다음 호에 이어짐) 김수돈 기자 Pen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