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치 안산시 일동 555번지. 수인산업도로에서 일동으로 빠지는 교차로로 내려서서 수인산업도로와 나란한 이면도로에서 부곡동 쪽으로 직진하다 보면 우측에 나지막한 구릉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이익 선생의 묘소이다.
▷ 구조 봉분의 규모는 600×550×220cm이다. 석물은 묘비 및 상석·향로석·망주석 등이 있다. 묘비의 재질은 오석(烏石)이며 선생 사후 204년이 되는 1967년에 건립된 것으로 옥개석 90×60×50cm, 비신 146×57×26cm, 기대석 100×62×20cm의 규모이다. 전면에 “星湖先生李公諱瀷之墓贈貞夫人高靈申氏 左贈貞夫人泗川陸氏꿴丹굡箚 적혀 있다. 상석은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으며 규모는 121×83×58cm이며 향로석은 39×28×39cm, 망주석은 165cm이다. 두향은 북향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 역사 및 유래 조선 시대 실학의 대가 이익(李瀷) 선생의 묘소로 선생의 자(字)는 자신(自新), 호는 성호(星湖)이며 본관은 여주이다. 숙종 31년(1705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이듬해 당쟁으로 형 잠(潛)이 희생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낙향하여 한평생 학문에 정진하여 실학의 대가가 되었다. 그는 일생을 안산 첨성촌(瞻星村)에서 기거하며 유형원(柳馨遠;1622~1673년)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의 중조로 추앙받았으며 그의 학문은 안정복·이가환·이중환 등의 실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이익 선생은 천문·지리·의학·재정·지방제도·과거제도·학제·병제·관제 등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비판과 이상 및 사상을 담은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비롯하여 「곽우록(藿憂綠)」·「성호문집(星湖文集)」 등을 남겼다. 1763년(영조 39년)에 83세로 운명하였으며 이조판서로 추서되었다.
.
사진 4-1 성호 이익 선생 묘소 전경. 일동 555번지에 있으며, 1997년 경기도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되었다
▷ 특기 사항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되었으며, 묘소 우측에는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다.
(2) 별망성지(別望城址)
▷ 위치 안산시 초지동 656번지.
▷ 구조 기본적인 구조는 석축성(石築城)이다. 바다에 인접해 있는 해발 49m, 65.9m인 야산의 능선을 연결하여 석축을 쌓고 성벽을 해안까지 연접시켜 선박의 출입이 가능하도록 한 해안 평산성(平山城)이다. 1942년 발간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원래 석축성의 높이는 1.2~2.1m, 둘레는 1040m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성벽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1988년에 길이 225m, 높이 1.45m, 상부폭 2.4m, 하부폭 10m 정도로 복원하였다.
▷ 출토 유물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기와인 파상문(波狀文)과 무문(無文)의 기와편들과 자기편들이 출토되었다. 대부분의 유물들이 성벽 안쪽의 평탄한 대지에서 출토되고 있어 이곳에 군영지(軍營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4-2 별망성지. 초지동 656번지에 있으며, 1997년 경기도 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되었다.
▷ 역사 및 유래 별망성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문종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남아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汝串:在郡西南三十里一名草芝有水軍萬戶守禦”라는 기록이 있고, 「문종실록」에는 이곳에 있던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이 갯벌로 인해 출입이 어려워지자 사곶(沙串)으로 영을 옮겼다가 문종 때 소릉(昭陵)이 인근 목내리에 있게 되고 바다가 다시 깊어져 선박의 출입이 가능해지자 다시 영(營)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곳에 있던 초지양영(草芝梁營)이 효종 7년(1656년)에 강화로 옮겨가 성의 옛터만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별망성은 15세기 초에 축조되어 17세기 중엽에 폐성되기까지 약 250년 동안 서해안의 방어를 위한 중요한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호(萬戶)는 고려 후기~조선 초기의 관직이며, 만호부는 왜구의 침입이 잦은 해안지역에 설치한 병영이다. 따라서 이 성은 남양만을 통해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특기 사항 이 성은 해안선 방어를 위해 수군만호가 주둔하던 영(營)이지만 육상전투까지 대비해 배후의 산능선까지 연결하여 비교적 큰 규모로 축조한 것이 특징이다. 간혹 별망성을 고려 시대의 삼별초 항쟁과 연관시키는 해석도 있으나 문헌자료와 출토 유물들로 볼 때 축조 시기가 조선 시대 이전으로 올라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1979년 9월 3일 경기도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되었다.
(3) 안탄대(安坦大) 선생 묘
▷ 위치 안산시 성곡동 615-1번지.
▷ 구조 봉분은 쌍분으로 직경 350cm, 높이 150cm이다. 석물로는 묘갈(墓碣)·상석·향로석·망주석·문인석 등이 있다. 묘갈의 비신은 142×55×23cm, 기대석은 99×60×15cm이며 재질은 흰대리석이다. 전면에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安公之墓贈貞敬夫人黃氏뀜㎕굡箚 쓰여 있다. 상석은 150×94×50cm로 재질은 화강암이다. 향로석은 32×25×42cm, 망주석은 190cm, 문인석은 175cm이다.
▷ 역사 및 유래 조선 시대 중종의 빙장(聘丈)이며 선조의 진외증조부(陳外曾祖父)인 안탄대 선생의 묘소이다. 안탄대의 딸인 창빈안씨(昌嬪安氏)는 중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2남 1녀를 생산하였는데 장남이 영양군(永陽君)이고 2남이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며 딸은 정신옹주(靜愼翁主)이다. 조선왕조 25대 선조가 덕흥대원군의 아들로 안탄대의 외손이다. 그는 정7품의 벼슬을 지냈으며 사후 우의정에 추서되었다. 안탄대 선생은 집안이 몹시 가난했음에도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일에는 결코 눈을 돌리는 일이 없었으며, 성품이 매우 온순하고 부드러워 다른 사람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안공은 딸이 빈이 된 다음부터는 더욱 몸가짐을 조심하였으며 화를 내거나 남의 성미를 돋우는 일이 없었다 한다. 특히 창빈이 아들은 낳은 후에는 문밖 출입을 삼가하는 등 왕자의 외가로서의 처신을 조심하였다 한다. 그의 묘비문에 따르면 효종 때 왕명으로 비문을 지으면서도 안산 안씨만을 밝혔을 뿐 그의 선조와 가계를 밝히지 않았으니 그의 자나 호는 물론 출생일·사망일조차 전해지지 않고 있다.
사진 4-3 안탄대 선생 묘소 전경. 성곡동 615-1번지에 있으며, 1985년 경기도기념물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4-4 안탄대 선생 묘비. 왕명으로 비문을 지었 으나 선조와 가계는 안 밝히고 안산 안씨만을 밝혔다.
▷ 특기 사항 안탄대 선생의 소생은 무남독녀인 창빈안씨(昌嬪安氏)뿐이었기 때문에 그 묘소를 관리하는 후손이 없어 폐허화된 것을 효종(孝宗) 때 인조(仁祖)의 셋째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 등의 상소에 의하여 왕명으로 선생의 묘소를 확장·복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손봉사(外孫奉祀)케 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외손인 전주 이씨 영양군파(永陽君派) 종중에서 매년 정성스럽게 시제를 지내며 묘소를 관리하고 있다. 안탄대 선생의 묘소는 1985년 9월 20일에 경기도기념물 제83호로 지정되어 보존·관리되고 있으며, 묘소 바로 아래쪽에 선생의 외현손(外玄孫)이며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을 지낸 이잠(李潛)의 무덤이 있다.
(4) 고송정지(古松亭址)
▷ 위치 안산시 화정동 산 58번지.
▷ 구조 원래 이곳에 있던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굴도리집으로 각주하였으며 겹처마에 팔작지붕이었다. 1992년에 전면 보수하였다.
▷ 역사 및 유래 조선왕조 세조 2년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했다가 참화를 당한 김문기(金文起)의 손(孫)인 김충주(金忠柱)가 살던 자리이다. 김충주는 조부 김문기, 부친 김현석(金玄錫)이 참화를 당하자 밤중에 도성을 탈출하여 여려 곳을 전전하다가 화정동에 숨어 살았다고 하는데, 풀을 엮어 집을 짓고 숯을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했으며 스스로 호를 탄옹(炭翁)이라 칭하고 평생 고기와 술을 먹지 않고 베옷에 평립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단종에 대한 마음이 변할 때마다 단종의 묘소가 있는 영월을 바라보며 통곡하였으며 조부와 부친이 비명에 간 것을 애통해하여 눈물을 흘렸는데, 그의 이러한 눈물에 소나무조차 말라죽었다고 한다. 그 말라 죽은 소나무가 있던 자리가 바로 고송정으로 순조 27년(1827년)에 그의 9세손인 진사 김처일(金處一)이 이곳에 고송정(枯松亭)을 지었다 한다. 정자 왼편에 탄옹고지(炭翁古址)라고 암각한 바위가 있고, 주변에 수령 5백여 년 된 느티나무와 향나무가 있다.
.
사진 4-5 고송정. 화정동 산 58번지에 있으며, 1988년 경기도기념물 제10 호로 지정되었다
▷ 특기 사항 1988년 3월 21일 경기도기념물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5) 안산읍성 및 관아터
▷ 위치
안산시 수암동 산 26-4,27번지. 수원에서 수인산업도로를 타고 가다 수암을 지나자마자 동쪽을 바라보면 수암봉(秀巖峰) 앞에 작은 구릉처럼 보이는 곳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안산읍성이다.
읍성은 수암봉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려와 소금절이골과 작은골 사이에 형성된 해발 1백여 미터의 산능선을 이용하여 남쪽으로 평지를 감싸안도록 축성된 평산성이다. 성의 남쪽은 민가가 들어서 있어 거의 파괴된 상태이며, 성돌로 보이는 다듬어진 돌들이 민가의 담으로 이용되고 있다. 성 안에는 고려 말~조선 초기의 무장(武將)인 김정경(金定卿;1345~1419년)의 사저와 망해정(望海亭)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젖소의 축사가 자리하고 있을 뿐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김정경이 심었다고 하는 수령 6백여 년 된 은행나무 한 그루만 남아 있다.
읍성 주변에서는 조선 시대의 기와편이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성의 남쪽에는 조선 시대의 안산 관아로 사용되다가 일제 시대에 수암면사무소로 이용되던 건물 터가 남아 있다. 안산읍성은 자연 능선과 평지를 연결하여 쌓은 평산성인데, 이는 우리 나라 성곽의 특징으로서 산성과 평지성의 절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의 형태는 장방형으로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각 모서리가 약간 둥글게 처리된 말각 사각형이다.
사진 4-6 안산읍성터. 수암동 산 26-4, 27번지 일대에 위치하며 성의 남쪽은 파괴되어 성돌만 남아 있다.
읍성 전체의 둘레는 772.2m인데 그 중 동벽은 180.6m, 서벽은 174.7m, 남벽은 197.5m, 북벽은 219.4m이다. 성 내부의 면적은 대략 36,000m²(12,000평) 정도 된다. 이 읍성의 주된 방어지역은 서쪽과 북쪽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자연지형을 이용한 성벽 아래쪽은 매우 가파르고 높은 몇 개의 단으로 형성되어 있다. 성벽은 대체로 자연능선 정상부를 이용하여 바깥 면은 삭토하고 안쪽은 보축하는 방법으로 축조하였으나 남쪽과 북문지 부분은 가운데에 잡석을 쌓고 그 위에 흙을 쌓은 석심토축의 방법으로 쌓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읍성의 동벽은 해발 108m의 구릉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내려 왔는데, 정상부로부터 절반 정도는 성벽이 잘 남아 있으나 남쪽은 무덤과 도로 등으로 매우 훼손되어 있다. 또한 이곳은 5~10년생의 잡목과 잡초가 우거져 있으며 성벽의 기단부로 보이는 장대석들이 남북으로 길게 노출되어 있다.
지표에 윗부분만 노출되어 있는 장대석들을 시굴·조사해 본 결과 생토층 위에 길이 1m, 폭과 두께 50~80cm에 달하는 장대석들이 남북 방향으로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고 그 안쪽에는 20~30cm 크기의 돌들이 쌓여 있었다. 이 성돌들의 재질은 화강편마암이며, 장대석을 제외하고는 치석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장대석들을 기단부에 쌓아 윗부분의 토축 붕괴를 방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장대석 안쪽에는 할석들을 폭 2.5m, 두께 0.5m 정도로 장대석을 따라 길게 쌓았고, 할석을 쌓은 안쪽에는 흙을 다져서 쌓았는데 성벽의 다진 흙 층의 깊이는 현재의 표토에서 생토층까지 136cm이며 모두 6개의 토층으로 구분되었다. 각각의 토층은 삼국 시대의 토성처럼 정교하게 판축된 것이 아니라 모래가 섞인 황토를 대강 다져 놓은 것처럼 압착 상태가 치밀하지 못하였다. 6개의 층위 중 바닥을 1층으로 할 때 그 층위 구분은 표 4-1과 같다.
이 성벽은 현재의 자연 경사면을 고려할 때 성벽의 하단부 폭은 7m 정도이고 토성의 경사도는 45도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원래의 성벽 높이는 대략 3~4m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벽은 남쪽의 평지 부분으로 내려오면서 훼손 상태가 심한데 그 중간 지점은 민묘를 쓰느라 거의 파괴된 상태였고, 그 아래쪽은 경작지로의 개간과 도로의 개설로 겨우 흔적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북벽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연결되는 수암봉의 능선을 이용하여 쌓았는데, 성벽의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성벽은 능선의 정상부에 보축하는 방법으로 쌓았는데, 능선의 윗부분을 폭 4m 정도로 평평하게 다듬고 그 위에 30~50cm 크기의 돌을 이등변삼각형 모양으로 10단 정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흙으로 덮었다. 이렇게 보축한 성벽으로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높이 1.8m, 하단부 폭 3m 정도이다.
서벽은 북서쪽 정상부를 감싸안으며 90도 각을 이루며 남쪽으로 꺾여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이곳에는 조림한 향나무와 아카시아 등의 잡목이 우거져 있다. 성벽의 기단부에는 성벽의 안과 밖으로 3단의 기단석이 노출되어 있다. 서벽은 성벽 안쪽이 바깥쪽보다 1m 정도 높은 완만한 경사면에 만들어졌는데 하단부의 폭은 7m, 현재의 높이는 2m 정도이다.
성벽의 경사각은 약 30도로 매우 완만한데 본래의 경사도가 45도 정도였을 것으로 가정하면 원래의 성벽의 높이는 4m에 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45도는 토성을 쌓을 경우 오랫동안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최대의 경사도라고 할 수 있다. 성벽의 양쪽 하단부에는 흙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크기 30~40cm, 높이 10~15cm의 돌로 3단을 쌓아 놓았다. 이 서벽의 남쪽 부분은 경작 등으로 훼손되어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남벽은 서쪽 능선 말단부에서 낮은 평지를 가로지르도록 축조되어 가장 파괴가 심하다. 동쪽 부분은 후대에 관아의 뒷담장으로 이용된 높이 2m 정도의 단이 남아 있으나, 서쪽은 민가가 들어서면서 대부분 파괴되어 흔적을 찾기 어렵다. 단지 성벽의 석심이나 기단부를 쌓는 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성돌들만 민가의 축대나 담으로 이용되어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읍성 내의 구조물로 대표적인 것이 행정시설이다. 조선 시대 읍성의 경우로 볼 때 성내의 행정시설로는 객사와 동헌, 그리고 여러 가지 부속 건물이 있다. 이 읍성 안에서는 구조물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전혀 없으나 여러 동의 건물이 있었을 것이며 성문 시설과 북서쪽 정상부에는 장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문지(門址)로 추정되는 곳은 북문지·동문지·남문지 등 3곳이 있다. 그 중 남문은 이 읍성의 주된 통로로 보이는데 현재 파괴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동문지는 사실상 좀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현재 통로가 있는 지점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중 잘 남아 있는 것이 북문지이다. 북문지는 성 안쪽에서 소금절이골로 넘어가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는데 이곳은 성벽이 절단되어 단면이 노출되어 있으며 약 40도 정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V자형으로 된 문지의 상부 간격은 9m 정도이며, 가장 낮은 곳에서 윗부분까지의 높이는 3m 정도이다. 이러한 북문지의 평면 형태는 토성에서 많이 보이는 개방형식으로 성문에는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장대는 성 북서쪽 정상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30여 평의 넓고 평탄한 대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곳곳에 예비군들이 파 놓은 참호가 있다. 여기저기 20~30cm 정도의 돌들이 노출되어 있어 건물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장대지 중심에 대한 시굴 조사 결과 깊이 50cm 지점에서 생토층이 나타났으며, 특별한 유구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고려 시대의 토기편이 여러점 출토되었다.
건물의 초석이 발견된 곳은 없으나 성내에서 많은 양의 기와편이 발견되고 있어 성내에 여러 동의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성의 남서쪽 중간 지점에서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어골문와(魚骨文瓦)가 많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현재 무덤 혹은 밭으로 변해 있다.
성 안에는 그 밖에 조선 초기의 무장인 연성군 김정경과 관련된 유구가 남아 있다. 표식적인 것으로는 관아터에서 성으로 들어오면서 성의 안쪽에 김정경이 심었다고 하는 3그루의 은행나무 중 한 그루가 남아 있다. 이 은행나무는 높이 20m, 둘레 6m인데 수령은 6백여 년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거처였다고 하는 곳은 현재 민가가 들어서 있어 흔적을 찾기 어렵다.
▷ 출토 유물 지표 조사를 통해 성내에서 채집된 유물은 와편이 대부분이고, 기타 토기편과 자기편 등도 상당량 발견되었다. 유물은 관아터에서 북문지로 넘어가는 소로 주변의 밭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기와는 주로 무문와이나 어골문와도 많이 있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기와들은 여단터나 사직단터에서 발견되는 기와들과는 양상이 다르다. 여단이나 사직단에서 발견되는 기와들은 전형적인 조선 시대 기와로 파상문이 주종을 이루며 투박하고 회청색의 단단한 느낌을 주는 반면, 이곳에서 발견되는 것은 파상문보다는 어골문이나 변형 어골문 계통이 많으며 부드러운 느낌을 주어 성 안에서 발견되는 기와들의 제작 시기가 훨씬 이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어골문와나 변형 어골문기와는 고려 시대에 많이 쓰이던 등문양이며, 조선 시대에는 대체로 파상문이 주류를 이루었다.
토기편들은 흑회색의 경질 항아리편이 대부분인데, 기벽은 얇고 구연부는 심하게 외반하고 있으며 구연부의 직경은 14m, 21cm, 30cm, 40cm 등 매우 다양하다. 소성(燒成) 방법이나 형태 등으로 볼 때 고려 후기~조선 시대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자기류로는 분청사기와 백자편들이 있는데 분청사기 안쪽은 빽빽하게 꽃무늬가 있으며 제작 수법이 상당히 정교하다. 반면 백자는 투박하며 색이나 소성 상태가 뛰어나지 못하다.
▷ 역사 및 유래 읍성은 본래 지방행정부가 있는 고을에 축성되며 성 안에 관가와 민가가 함께 있어 군사적인 기능과 행정적인 기능 모두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읍성은 대체로 평산성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평산성이란 산성과 평지성의 절충형으로 배후의 산이나 구릉에 의지하여 평지를 감싸안도록 쌓은 성을 말한다. 이러한 형태상의 특성은 우리 나라 지방도시들이 배후에 진산을 두고 발달한 데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대부분의 우리 나라 성(城)은 산성의 형태이나 읍성의 형태가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삼국 시대부터이다. 그러나 읍성이 본격적으로 축성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후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이를 방어하기 위해 해안지역부터 본격적으로 읍성을 쌓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전란에 대비하여 고을 주민을 수용하기 위한 읍성의 축조가 더욱 활발히 진행되었다. 성종 때의 예를 보면 전국의 행정구역 수가 330개소인데 당시의 읍성 수가 190개소나 되었다. 이들 읍성 중 원형에 가깝게 보존된 성은 동래읍성·수원성·해미읍성 등 9개소이고, 일부라도 남아 있는 읍성은 63개소 정도이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조선 시대 축성된 것이거나 조선 시대 석성으로 개축된 것이기 때문에 안산읍성처럼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고려 시대의 읍성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안산 지역은 대중국 무역로인 남양만의 관문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서해를 통한 수도권으로의 칩입을 방어하는 데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조선 시대 초기에는 이곳의 초지진에 수군만호부를 두어 해안 방어에 주력하였다. 만호란 고려 말~조선 초에 있었던 관직으로 대체로 정4품관이 임명되었으며, 만호부는 주로 왜구의 침입이 잦은 지역에 설치되던 병영이었다.
「고려사」에 보면 우왕 1년(1375년) 2월에 왜가 안산·검주·부평·인주에 침입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우왕 2년에도 왜가 안산군에 침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곳은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지역으로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축성이 불가피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지역은 고려 시대 덕종(德宗)·정종(靖宗)·문종(文宗)이 탄생한 고을이라 하여 충렬왕 34년(1308)에는 안산군으로 승격이 될 만큼 중요시되던 지역이었다. 이 안산 읍성에 대한 문헌 자료로는 정확하게 조사·기록된 것은 없지만 개괄적인 상황이라도 기록해 놓은 문헌 자료가 있다. 우선 광무(光武) 4년(1900년)에 발간된 「안산군읍지(安山郡邑誌)」에는 “城堡遺墟在於客舍衙舍之後”라고 하여 관사와 객사 뒤에 성터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연성산에 낮은 토루가 있는데 둘레가 약 2백 칸 정도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연성군(蓮城君)의 거성이며 후에 장항구현(獐項口縣)을 이곳에 옮겼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연성군은 고려 말~조선 초기(태종)의 무장인 김정경(金定卿;1345~ 1419년)의 시호이다. 그는 안산 출신으로 삼국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정종 2년(1400년) 박포(朴苞)의 난을 평정하여 좌명공신에 오르고 연성군에 봉군되었다. 「안산군읍지」의 기록에 의하면 연성군의 거처는 바로 이 읍성 안에 있었다고 한다.
한편 지표조사를 통해 채집된 유물 중에서도 고려 시대 후기의 기와편들이 상당량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문헌자료와 유물을 통해서 볼 때 이 성은 최소한 조선 초기 이전에 축성된 것임이 확실하다. 그것은 당대에 아무리 힘이 있던 김정경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의 사저를 이렇게 축성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성은 김정경이 이곳에 기거하기 이전에 축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조선 초기에 실권을 장악한 김정경이 고려 시대의 읍성터를 장악하여 사저로 사용했다고 생각된다.
물론 김정경이 실권을 잡기 전인 고려 말기에 이 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정말 안산읍성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의 여지는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성의 축성 방법이나 지정학적인 위치 등으로 볼 때 안산읍성으로서의 가능성이 매우 크다. 우선 이 성은 주요 방어 대상이 서해 쪽이며, 축성 방법이 석심토축으로 긴박한 상황에서 급조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성이 고려 시대의 안산읍성이었다는 또 다른 증거로는 안산의 별호인 연성(蓮城)에 관한 것이다. 연성은 조선 시대에 안산의 별호로 그 유래에 대해 「안산군읍지」에서는 강희맹(姜希孟;1424~1483년)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경의 전당지(餞唐池)에 들러 연꽃 씨를 얻어 와 퍼뜨린 데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강희맹이 중국에서 연꽃 씨를 가지고 온 것이 1467년인 데 반해 김정경이 연성군에 봉군된 것은 그보다 70여 년이나 앞선 1400년이다. 따라서 연성이라는 별호를 강희맹과 결부시키는 것은 후대에 견강부회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봉군의 명칭은 주로 살고 있는 지역과 결부된 것이 많음을 볼 때 연성군 김정경의 연성은 바로 그가 거성으로 삼아 거주했던 곳의 명칭이었다고 생각된다. 때문에 이 안산읍성의 원래 명칭은 연성으로서 안산 지역의 중심이 되는 성이었음을 추론할 수가 있다.
1) 안산군청터
위치는 경기도 안산시 수암동 256-1번지로, 안산읍성의 성벽 남쪽과 접해 있다.
2) 안산군청지는 안산군의 관아가 있었던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으로 안산군이 시흥군에 흡수·통합되면서 1922년경 건물을 신축하여 1965년까지 수암면사무소로 사용되었다. 그후 건물이 거의 붕괴되자 1972년 10월경 헐렸는데 목재의 일부는 안산초등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사진 4-7 안산군청터. 수암동 256-1 번지에 위치하며 안산군의 관아와 수암면사무소가 있던 곳이다.
어느 고을을 막론하고 공해(公F)로서의 기본 건물로 객사와 아사(衙舍)· 관청 등이 있었고, 부속 건물로 문묘·사직단·여단·옥사(獄舍)·창사(倉舍) 등이 있었다. 객사는 일명 객관이라고도 하는데, 실질적인 기능은 중앙으로부터 온 사신의 숙소였으나 이곳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하여 절을 올리곤 하였다. 객사는 보통 한 고을의 가장 중심 되는 지점이나 가장 경관이 뛰어난 곳에 배치하였는데, 객사 건물은 일반적으로 솟을지붕 형태로 건립하였으며 중앙칸을 높여 좌우익칸과 달리하였다. 안산 객사는 관아의 동편에 있었는데 이곳은 현재 경작지로 변해 있어 그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관아의 정문은 평근루였으나 이 역시 이미 훼철되었다.
그 다음 중요 시설의 하나로는 동헌(東軒)이 있었는데 이를 일명 정청이라고 하였다. 동헌은 고을 수령이 공사를 처리하는 곳으로 객사와 더불어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현재 동헌은 완전히 파괴되어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사(衙舍)는 수령이 거주하던 곳으로 현재 초석이 도리간(道理間;정면칸)에 10개, 양간(梁間;측면칸)에 4개가 남아 있어 이 건물이 9칸×3칸의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초석과 초석 간의 거리는 도리간과 양간 모두 평균 245 cm로, 조선 시대의 황종척(약 31cm)으로 8자를 한 칸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도리간 전체의 길이는 72자(22.05m)이고 양간은 24자(7.35m)이다.
초석은 잘 다듬은 장주초(長柱礎)로 원형 초석과 사각형의 초석을 사용하였는데 원형 초석은 직경 40cm에 높이 35cm이며, 4각초석은 35×35×35cm이다. 건물지의 바닥은 건물을 개축하면서 발라 놓은 시멘트가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초석 주변에는 기단과 장대석이 둘러져 있었다. 아사의 정면 방향은 계좌정향(癸座丁向)으로 북북동-남남서향이었다. 옥사는 관아의 남서쪽에 있었는데 그 터에는 현재 새마을유아원이 들어서 있다.
농업이 경제의 기반인 사회에서는 물화가 재산의 바탕이므로 이를 보존·관리하기 위한 창고는 일찍부터 축조되었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중앙과 지방에 많은 창고가 축조되었다. 안산 창고는 56칸에 달하는 큰 건물로 관아의 남쪽에 있었는데 이 역시 훼손되어 장대석과 와편만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안산 관아의 전체적인 규모는 당시의 관원들 수를 살펴봄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다. 이곳에는 음서(蔭敍) 4품 군수가 있었고, 그 휘하에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8명, 아전 22명, 통인 8명, 사령 12명, 관노 8명, 관비 5명, 객사직이 1명, 향교직 1명, 옥감고 1명 등 모두 70명이 상주하였다. 그 외에도 정조의 수원행행시 호위에 필요한 병력과 자체의 병력을 합하여 8백여 명의 인력 동원이 가능하였다. 「경기각읍신정사례(京畿各邑新定事例)」에서는 1894년 이들 관원들에 대한 1년 급료로 4천 냥을 지급하였다고 되어 있다.
조선 시대 안산군의 읍치가 이곳에 있게 된 것은 현종 10년(1669년)부터이다. 이에 대한 기록으로는 우암 송시열의 「송자대전」에 <안산현관사중건기(安山縣官舍重建記)>가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주자는 관사와 역참은 반드시 증식하라고 「소학」의 가르침에 썼다. 그러나 그가 동안주부(同安主簿)가 되어 정사한 지 3년이 되매 사람들이 그에게 관사가 낡아 우선 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청하였다. 그러나 봄을 넘기도록 관사를 수리하지 못하고 마침내 건물이 무너지려 하매 민가의 집을 빌려 거처를 삼았다. 대개 오래 된 것을 수리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의 어려움은 이와 같다. 우리 동방의 군읍은 사세가 조잔하며 경기는 더욱 심하다. 난리를 겪은 이래 흉황이 이어져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그 독에 해를 입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니 수령된 이가 어느 겨를에 공역과 수리하는 일에 신경을 쓸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오직 임시로 탈없이 임기만 채우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관사를 여관같이 여기므로, 관사가 낡은 옷과 해진 신발을 꿰매고 덧댄 것처럼 되어 끝내 볼품이 없게 되었다.
안산 현감 이제두가 부임하여 여러 건물이 무너지고 퇴락한 것을 보고 면모를 일신하리라 생각하였다. 구 관아의 동쪽에 있는 터를 살펴보니 앞은 트였고 나머지는 둘러싸여 있어 형승이 갖추어져 있으나 공사 물자가 부족한 것이 걱정이었다. 이에 선혜청 당상인 김좌명에게 고하자 공이 미포와 철물을 원조하여 무신년(1668년, 현종 9년) 가을부터 땅을 재고 터를 닦기 시작하였다.
대개 창고는 곡물을 보관하는 곳이나 전에는 무너져서 훔쳐 가거나 물에 젖는 것을 막기 어려웠고, 감옥은 간원(姦寃)을 금찰하는 곳이나 소결(疏缺)하여 때로 담을 넘어서 도망하는 일도 있었다. 이 몇 가지는 해마다 겪는 어려움으로 백성들은 더욱 곤란하게 여겼다. 사직·성황·여단의 위는 국가가 신지를 경건하게 여겨 상서로움을 이끌어 내고 재앙을 물리치는 것이나, 전에는 위패를 임시로 곡물을 보관하는 곳에 놓아 먼지를 뒤집어 쓰니 업신여기고 무람함이 심하였다.
먼저 창고와 관청 및 감옥을 짓고 다음에 명제를 건립하여 대신을 봉안하고 신위를 내린 연후에 드디어 관아를 건립하였다. 관아는 금년 기유년(1669년) 2월 8일 기공하여 3월 27일 마쳐 겨우 50일이 걸렸다. 4월에는 경내 노인들을 널리 모아 낙성식을 거행하자 읍인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제두가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국은을 입어 고위직이 끊이지 않았고 나는 오로지 근기지방의 읍들만 맡아 부모님을 봉양할 수 있는 특별한 배려를 받아 매번 성은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실하다. 하지만 내가 사람됨이 보잘것없고 재주가 적어서 보답할 길이 없었다. 오직 관사에 힘쓰고 감히 스스로의 편리를 도모하지 않았으며, 관사의 나머지를 가지고 자신을 살찌우려 하지 않으므로 아침 저녁으로 휴식과 조금의 사사로움도 없었다. 드디어 제반 공사가 대략 완성되었다. 이는 바라던 바이다.’ 하였다.
내가 듣고 탄식하기를 이 같이 하다니 주자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구나. 주자가 동안에서 집을 빌려 거하기까지 한 것이 어찌 자신이 읍좌인 까닭에 스스로 오로지 하지 못하여서이겠는가. 오히려 높은 동헌을 지어 편안히 쉬는 장소를 삼았고 남강에서는 마침 흉년을 만나 원중에 쑥이 자라도 사람이 없어서 제거하지 못했으나 수조해야 할 곳은 오히려 모두 폐하지 않았다. 성현의 마음씀이 대개 이와 같았다.
이 안산현은 이제두 덕분에 구비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부임해 올 이는 오늘날 공역의 어려움을 알아 잘 관리하여 퇴락하지 않도록 하면 매우 다행이겠다. 이후가 나를 친하다고 하여 그 일을 써 주기를 청하면서 ‘이는 모두 김공이 물자를 하사한 덕분이다.’ 하였다. 내가 그 노고와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뜻을 가상히 여겨 약서하여 보낸다. 이해 10월 은진 사람 송시열이 쓰다.”
이 기록에 따르면 1669년 이전의 안산 관아는 현재의 서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안산김씨족보」의 내용이 참조가 된다. 이 족보에는 “……이 고을 관아는 본래 산 서쪽 바다 가까이에 있었는데 본조 정통 정유년(1441년)에 옛 소릉의 화소(火巢)로 편입되어 관부를 우리 선조의 유허로 옮긴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보면 조선 초기의 관아는 소릉지 부근인 지금의 안산시 목내동 성안마을 일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441년에서 「송자대전」에 기록된 1669년까지의 228년 동안 안산 관아는 ‘우리 선조의 유허로 옮겼다.’는 기록 내용으로 보아 현재의 관아가 있는 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50m 지점인 읍성 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지리지」 권148 <안산군조>에 “안산군의 진산은 취암이다.”라고 기록된 것도 안산군의 관아가 취암 아래쪽 지금의 읍성터 부근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조선 시대 안산 관아는 처음에는 목내동 일대에 있다가 소릉의 영조로 인하여 1441년 현재의 읍성 부근으로 옮겨가고, 1669년에 다시 수암동의 현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후 일제 시대부터 1965년까지 이곳에는 수암면사무소가 있었다.
관아를 이곳으로 옮기게 된 것은 <안산현관사중건기>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땅이 밝고 시원해서인데, 이곳은 풍수지리적으로 비봉혈(飛鳳穴)에 해당한다고 한다. 비봉혈은 성인군자가 배출되는 곳이라 하여 예로부터 읍터로 정해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아무리 지세가 비봉을 닮았다고 하더라도 봉황이 날아가면 읍이 멸망하기 때문에 봉황이 좋아하는 대나무를 심어 봉황이 영구히 있게 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안산관아터에도 관아 앞 지대석 바로 밑에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4)
2) 여단지
안산시 수암동 산 1-3번지 지장골 뒷산의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5) 이곳은 안산 관아의 북쪽에 해당되는 곳으로 관아에서 직선거리로 약 0.5km 정도 된다. 여단의 형태는 정방형에 가까우며 토단으로 된 단의 윗부분과 주변에 잡목들이 많이 들어차 있다. 토단은 많이 무너져 내리기는 했지만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여단의 네 모서리는 각각 동·서·남·북 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며 규모는 토단 윗부분의 한 면이 11.1m 정도여서 면적은 121m³(40평) 정도이다. 토단의 높이는 1.3m 정도로 바닥에서 약 60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고, 여단 윗면은 북쪽이 남쪽보다 약간 높다. 단 위에서 많은 양의 기와편이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단 위에 건물이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산군읍지」의 지도에도 여단에 건물 모습이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진 4-8 여단지의 기와편. 대부분이 회청색의 경질 무문와로 투박하고 견고한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기와편들은 무문와가 약 80% 정도 차지하고 있으며 파상문와도 발견된다. 기와는 대체로 회청색의 경질와이며 투박하고 견고한 느낌을 준다. 제작 수법이나 문양 등으로 볼 때 이것들은 대체로 조선 시대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여단은 여제단의 준말로 제사를 못 받는 귀신이나 못된 돌림병으로 죽은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단이다. 1899년에 발간된 「안산군읍지」에 따르면, 여단은 안산군 일대에서 발생하는 염병의 전염을 막고 결혼 적령기에 죽은 처녀·총각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단을 설치하고 군의 수령이 직접 제를 올렸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에서 드리는 제사 중 대사(大祀)에 속하는 것으로는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제사하는 사직단(社稷壇)과 천신에게 제사하는 원구단(圓丘壇)이 있었다. 중사(中祀)에 속하는 것으로는 기우제를 드리는 우사단(雩祀壇)이 동교에 있었고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은 남교에 있었으며, 그 외에 동쪽에 선잠단(先蠶壇)과 선농단(先農壇)이 있었다. 소사(小祀)에 속하는 것으로서 영성단(靈星壇)·노인성단(老人星壇)·사한단(司寒壇)이 남쪽에 있었고, 마조·선목·사마·마보단이 동쪽에 있었으며, 마제단은 동북쪽에 있었다. 그리고 여단은 북쪽에 있었으며 명산대천단은 국내 각처의 명산에 있었다. 이러한 제사의 규례는 이미 삼국 시대에 정형화되기 시작한 것으로서 그 중 특히 사직단과 여단은 각 고을에도 설치되어 고을 단위로 제사를 지냈다.
3) 우사단지(雩祀壇址) 안산시 수암동의 원당사지 뒷편에 이 제단이 있었다.6) 「안산군읍지」에는 읍치의 동편 수리산 아래에 원당사지가 있고 그 뒤편에 우사단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는 현재 탄약폭파처리장이 있어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며, 유적 주변은 수목이 우거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다. 우사단은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으로 풍운뇌우단·선농단·선잠단과 함께 중사에 속하는 제단으로 관아의 동쪽에 위치했으며 단의 넓이는 보통 4장이었다. 구망(句芒)·축융(祝融)·후토(后土)·욕수(?收)·현명(玄冥)·후직(后稷)의 신좌는 모두 남향이었다.
기우제는 나라와 민간에서 비 오기를 기원하는 제사로 우리 나라는 옛날부터 3~4년에 한 번씩 한재를 당했으므로 삼국 시대부터 조정과 지방관청, 민간을 막론하고 가뭄에 대처하여 기우제를 많이 지냈다. 나라에서는 왕이 정치를 잘못한 천벌이라 하여 스스로가 몸을 정결히 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식음을 전폐하고 거처를 초가로 옮겼으며 죄인을 석방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민가에서는 산 꼭대기나 냇가 등에 제단을 쌓고 신역을 정하여 정결히 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제주는 마을의 장이나 지방 관원의 장이 맡았으며 제물로는 돼지·닭·술·과일·떡·밥·포 등을 올리고 때로는 무녀의 가무까지 행하였다.
「용재총화」에 의하면 서울에서는 기우제로 종묘사직과 흥인·숭례·돈의·숙정의 사대문에서 제사했고 오룡제를 동·서·남·북 사교와 중앙의 종각 앞에서 거행하였다. 「연려실기술」에는 모화관·경회루·춘당대·선농단 및 한강변 등에서 기우제를 거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안산 우사단은 대부분의 안산군 읍지에 기술되어 있지 않으며 지도에도 위치 표시가 없다. 따라서 사직단이나 여단보다 먼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4) 김정경(金定卿) 세거지
안산시 수암동 253번지 일대로 추정된다. 이곳은 고려 시대 읍성과 조선 시대 안산군 관아가 있었던 곳이다. 「안산군읍지」를 보면 “관사의 뒤에 토체형지가 있는데 이곳은 연성군(蓮城君) 김정경의 세거지이다. 은행나무 3주 역시 그가 직접 심은 것이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는 현재 수령이 6백 년 정도된 것으로 보이는 은행나무 3그루가 있는데, 가운데 있는 것은 불에 타서 몸통의 일부만 남아 있다. 집터가 있었다고 하는 관사의 뒤쪽에는 곳곳에 넓고 평탄한 대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현재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회화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인데 중국에서는 회화나무를 괴수[槐樹(훼나무 괴, 나무 수)]라 하며 길상목(吉祥木)의 하나로 귀하게 여겼다. 그 기원은 중국의 주(周)나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삼괴국극(三槐九棘)이라 하여 조정의 뜰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우리나라로 하면 3정승(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에 해당하는 삼공[三公 ; 태사(太師), 태전(太傳), 태보(太保)]이 마주보고 앉도록 하였다는데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벼슬을 기원하고 의미하는 것으로 발전해나가면서 회화나무를 심어서 출세(出世)하거나 또는 출세의 시작인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회화나무를 심어 기념하였던 것이다. 회화나무의 노수(老樹)들은 대개가 고궁, 서원, 문묘, 당대 명문대가들의 뜰에 심어져 있으며,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괴(槐)는 허정(虛精)의 정(精)으로서 노괴(老槐:오래된 회나무)는 불(火)을 잘 만들어 신선(神仙)이 깃들어 있어서 그 신기함이 귀히여겨야 한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옛날에 판관(判官)이 송사를 들을 때 반드시 회화나무를 가지고 재판에 임했다고 하니 회화나무의 정(精:정할 정)으로 하여 진실에 이르도록하고자 함에 그 뜻이 있었고, 훗날 회화나무 3그루를 집 정문 안에 심어두면 그집에 행복이 찾아오고 자녀들이 출세한다라고 생각하며 즐겨심는 정원수로 자리잡은 민속의 나무이기도 하다.
김정경은 정종 2년(1400년)에 박포(朴苞)의 난을 평정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오르고 연성군(蓮城君)에 봉군되었다. 조선 시대 안산군의 별호가 연성(蓮城)이었는데 그 기원에 대해서 대체로 「안산군읍지」 등에서는 강희맹(姜希孟)의 관곡지(官谷池)와 관련시키고 있다. 즉 강희맹이 중추원부사로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중국 남경에 갔다 오는 길에 중국의 전당(錢塘)에서 연꽃 씨를 구해다가 이곳에 심어 널리 퍼졌는데 그후부터 안산의 칭호를 연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정경이 연성군으로 봉군된 것은 이보다 60여 년 전의 일로서 봉군되는 명칭은 보통 공훈의 성격이나 그가 사는 지역명을 따서 붙이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김정경이 살았던 이 지역의 이름이 연성(蓮城)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이곳에는 둘레가 900m 정도인 성의 흔적이 완연한데, 이 성을 사가의 담장으로 축조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연성이라는 명칭은 이곳에 남아 있는 성의 명칭이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고려 시대 안산읍성이었다고 생각된다.
연성군 묘(위정공 김정경), 정경부인 화혜택주 개성왕씨 묘, 위정각 (재실)
* 택주 : 군(君)부인 호칭
위정각 정문 추충문
(위정각 : 하남시 감북동 소재, 위정사 : 충북 괴산군 장연면 소재)
위정사 :충북 괴산군 장연면 광진리 291
1994년 1월 7일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1667년(숙종 8) 김정경(金定卿)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된 사당이다. 매년 음력 7월 15일과 10월 29일 2차례 향사한다.
연성군 김정경 묘 (하남시 감북동)
(6) 오정각(五旌閣)
▷ 위치 안산시 화정동 29번지.
▷ 구조 초익공(初翼工) 양식의 맞배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건립되었다.
▷ 역사 및 유래 조선왕조 세조 2년(1456년) 단종 복위의 모의에 가담하였다가 실패하여 사육신과 함께 참형을 당한 충의공 김문기(金文起)의 충절과 공의 자(子) 현석(玄錫)의 충신정문(忠臣旌門), 손(孫) 충주(忠柱), 증손(曾孫) 경남(景南), 현손(玄孫) 약전(約前)의 효자정문이 각각 봉안되어 있어 오정각이라 불린다. 고종 7년(1870년)에 명정(命旌)하여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김문기의 영정이 경남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718번지에 거주하는 그의 후손 김진두(金鎭斗) 씨 댁에 보존되어 있으며, 현재 오정각에 모셔져 있는 영정은 최근에 그린 것이다. 김문기는 조선 세종 8년(142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정언, 함길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 특기 사항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4-9 오정각. 화정동 29번지에 있으며, 1983년 경기도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7)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
▷ 위치 안산시 와동 151번지.
▷ 구조 도리간(정면칸) 3칸, 양간(측면칸) 2칸인 목조건물로 4각기둥의 주심포양식 팔작지붕이다. 벽면은 시멘트로 시공하였으며 통기와 채광을 위하여 나무창살문을 설치하였다. 건물 안은 2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우측 방은 마룻바닥이고 좌측방은 맨바닥이다. 우측 방에는 액자 2개가 걸려 있고 좌측 방에는 4세열녀(四世烈女)의 이름을 써 놓았다. 건물 주위에는 1.6m의 담장이 둘러져 있고,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이라고 쓴 목판은 건물 입구에 걸려 있다. 1971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중수하였으며 1983년에 경기도에서 보수하였다.
▷ 역사 및 유래 사세충렬문은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 장군과 함께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장의공 김여물 및 병자호란 때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김여물의 4대에 걸친 고부(姑婦)의 애국 충정과 열녀 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하사한 정문(旌門)이다. 김여물의 후실인 평산(平山) 신씨(申氏), 아들 김류의 처 진주(晋州) 유씨(柳氏), 손자 김경징의 처 고령(高靈) 박씨(朴氏), 증손자 김진표의 처 진주 정씨(鄭氏) 등 4세 고부들은 오랑캐의 포로가 되어 욕을 당하느니 자결할 것을 결심하여 강화도 앞바다에 다 함께 몸을 던져 죽음으로 정절을 지켰다. ▷ 특기 사항
.
사진 4-10 사세충렬문. 와동 151번지에 있으며, 1993년 경기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1983년 경기도지정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
사진 4-11 한응인 선생 묘역과 신도비. 사사동 산18-6번지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8) 한응인(韓應寅) 선생 묘역과 신도비
▷ 위치 안산시 사사동 산 18-6번지.
▷ 구조 신도비는 비신과 우진각 지붕형의 가첨석(加添石)과 기대(基臺)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모는 비신이 79×23×179cm, 가첨석이 143×95×58cm, 기대가 145×100×59cm이다. 비문은 김류가 찬하고 한인급(韓仁及)이 글씨를 썼으며 김광현이 전액(篆額)을 하여 1642년에 건립하였다. 이 신도비의 양식적 특징은 가첨석의 하단부 건물에 기둥 석부와 지붕 사이에 있는 공포(貢包)의 형상을 조각해 놓음으로써 압박감을 덜어 주어 안정감을 유지하였다는 데 있다.
▷ 역사 및 유래 한응인(1554~1614년, 명종 9년~광해군 6년)은 부사직 경남(敬男)의 아들로 태어나 선조 시대에 활약했던 문신으로서 초서에 뛰어난 선조유교칠신(宣祖儒敎七臣)의 한 사람이었으며 자는 춘경, 호는 백졸재(百拙齋)였다. 본관은 청주이고 시호는 충정이며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이다. 24세에 알성문과 병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육조판서와 우의정에 올랐으며, 52세 때인 1605년에 부원군에 올랐으며 54세에 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그 다음 해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을 보호하라는 유교를 받았으나 광해군조(光海君朝)가 되자 계축옥사(癸丑獄事;1613년)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해 전리방귀에 처해져 광주에서 지내다가 61세에 운명하였다.
▷ 특기 사항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4-12 한응인 선생 영정. 17세기에 그려진 초상화로, 경기도유형 문화재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9) 한응인(韓應寅) 영정 및 유물
▷ 위치 안산시 사사동.
▷ 구조 36cm 폭의 비단을 3폭 꿰어 만든 화폭에 금채를 가미한 채색초상화이다. 17세기 도화서 서원들에 의해 그려진 초상화로서, 이 시기의 일반적인 공신도와는 달리 높은 사모를 썼고 흉배 역시 목단화 바탕 대신에 파도 위에 쌍학이 나는 형상을 금채를 가해 묘사하여 화려한 분위기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안면은 세필로 섬세하게 그렸으며 눈썹과 수염 부분은 운영법을 구사하여 표현하였다. 건장한 체구, 넓은 얼굴, 날카로운 눈매를 갖춘 한응인의 근엄하고 당당한 풍모가 느껴지는 수작으로 살아 있는 듯한 안면 묘사, 꼼꼼한 필치에 의한 관복과 채전의 표현 수법, 안정감 있는 구도로 그린 17세기 초 공신도 성격의 초상화로 그 가치가 높다.
▷ 특기 사항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 4-13 팔곡리 향나무. 팔곡 1동 59-3번지에 있는 6백여 년 된 고목으로 경기도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10) 팔곡리 향나무
▷ 위치 안산시 팔곡 1동 59-3번지.
▷ 구조 이 향나무는 높이 9m,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 3m에 이른다. 수령 6백여 년이라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향나무는 본래 높이 23m 정도, 가슴높이의 줄 둘레 3m 이상까지 자라는 늘 푸른 나무로서, 가지가 위와 아래로 뻗는 특징이 있다. 잎은 바늘 모양인 것과 비늘 모양인 것이 있어서 7~8년생 이상인 것은 주로 비늘 모양의 잎이 달리지만 맹아(萌芽)에서는 바늘 모양의 잎이 돋는다. 수형이 아름답고 수세가 왕성한 것이 특징이다. ▷ 특기사항 경기도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안산시 향토유적
2. 안산시 향토유적
(1) 잿머리성황당과 성황제
▷ 위치 성황당의 위치는 안산시 성곡동 산 76번지에 있다. 안산시 서북쪽 끝이 성곡동인데 이곳은 반월공업단지가 있는 곳이다. 반월공업단지의 공단전망대를 지나 북쪽으로 가면 안산하수종말처리장이 있고 조금 더 가면 돌안말이라는 곳에 다다르는데 이곳에서 해봉산 정상이 보인다. 이 해봉산 건너편에 잿머리성황당이 위치해 있다. ▷ 구조 성황당 면적은 15평, 성황당지는 30여 평이다. 당집에는 홍씨부인 영정, 안씨부인 영정, 관음장군 영정, 대신영정, 마태장군 영정, 용궁칠성 영정, 성황기 등이 보관되어 있다.
사진 4-14 잿머리성황당과 성황제. 성곡동 산 76번지에 있으며, 매년 잿머리성황제를 올린다.
▷ 역사 및 유래 안산시 성곡동에 위치한 잿머리성황당은 다른 여러 지방에 있는 성황당과는 달리 발생 유래가 특이하다. 일반적인 성황당이 한 마을 단위만의 제액초복(除厄招福)을 기원하는 신당으로 발생한데 반해 잿머리성황당은 발생 설화가 독특하다.
고려 제6대 성종(982~997년) 때 내부시랑 서희(徐熙)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잿머리연안(현재 당집이 있는 아래)에서 배를 타려고 했을 때 갑자기 잠잠하던 바다에 폭풍우가 몰아쳐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서희가 장도(壯途)를 비는 제를 지내고 잠이 들었을 때 꿈에 소복을 한 두 여인이 나타나 “우리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김부대왕)의 비 홍씨와 친정어머니 안씨인데 경순왕과 결혼 후 나라가 망하고 비명에 죽은 것이 한이 되어 모녀 혼령이 안주하지 못하고 이렇게 배회하고 있으니 저희의 거처라도 마련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그러자 서희는 그러마고 약속하고 이튿날 그곳에 작은 성을 쌓고 사당을 지은 후 화공을 불러 꿈에 본 영정을 그려 모신 후 위령제를 지냈다. 그러자 신기하게 바다가 잔잔해져 서희는 아무 탈 없이 송나라로 건너가 막중한 외교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다.
이 설화에서도 나타났듯이 잿머리성황당은 왕비의 원혼을 위로하여 항로를 트고 외교 임무를 완수한 역사적 의미를 담은 성황당이다. 그후부터 중국을 드나드는 사신은 물론 이곳 백성들도 이 사당에 제물을 차려 놓고 극진히 정성을 드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지금도 당집이 있는 산에는 서희가 쌓은 성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매년 잿머리성황제를 지내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사묘(祠廟)조>의 기록에 의하면 “성황사가 2개 있는데, 하나는 군의 서쪽 21리에 있고, 하나는 군의 서쪽 32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한편 1894~5년경에 쓰여진 「기전읍지(畿甸邑誌)」의 안산군편에 실려 있는 지도에 읍내로부터 20리 떨어져 있는 군자산(君子山)에 성황당이 있으며, 또 한 곳의 성황당은 성두(城頭)를 30리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곳이 잿머리성황당임이 틀림없다.
이곳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과 칠월칠석에 칠성맞이 행사를, 시월에는 도당굿을 올리고 있다. 또한 3년마다 1번씩 시월부터 정월까지 유가를 올린다. 음력 정월 보름 안에 집안이 평안하고 우환이 없기를 기원한다거나 특히 결혼날짜가 잡혔을 때 복을 기원하는 칠성맞이 행사를 당집에서 개인적인 차원으로 행하고 있으며, 음력 칠월칠석에도 자손의 장수를 기원하는 치성을 개인적으로 드리기도 한다.
도당굿은 마을 전체는 물론이고 인근의 원시동·신길동·목내동 주민들이 함께 매년 10월 1일부터 3개월간 거행한다. 현재는 ‘잿머리성황제’라는 이름으로 안산시 전체의 축제로 승화시켜 매년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그러나 10월 1일이 뱀날이나 용날이면 일진이 좋지 않다고 하여 다음날로 연기한다. 그리고 선택한 날이 털을 가진 짐승날, 예를 들면 쥐·호랑이·소·토끼날 등은 모두 좋으나 특히 말[馬]날이 제일 좋다고 한다. 한편 초상이나 출산 또는 부정한 일이 생기면 다음달로 연기한다.
이때의 도당굿은 신곡맞이 도당굿이라고 하여 3개월간 마을을 돌며 집집마다 굿을 하는데 이것을 유가라고 한다. 이때에는 당주와 함께 무당·풍물잡이들이 함께 따른다. 이웃과 친선과 협동을 도모하기 위해 3개월간 10여 개의 마을을 돌며 온 주민들이 치성을 드린다. 또 장군놀이·신장놀이·상산대감놀이·전당주대신놀이·줄타기 등이 함께 행해져 무속에 바탕을 둔 민속놀이의 축제로서 특징을 드러낸다.
(2) 선부동 지석묘군 ▷ 위치 안산시 선부동 산 27번지 선부동 정수장 근처. ▷ 구조 1호:130×75×25cm 2호:135×60×17cm 3호:110×60×17cm 4호:150×130×30cm 5호:160×140×30cm
사진 4-15 선부동 지서묘군. 선부동 산 27번지 소재하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 역사 및 유래 1991년 1월 5일 한국수자원공사에서 시화지구 정수장 건설지에 대한 지표조사를 경기도에 의뢰하였는데, 이때 동년 2월 25일 청동기 시대 지석묘 유적을 발견하였다. 4월 23일부터 5월 30일까지 시흥시 관내(가)지구 4기, 안산시관내(나)지구 7기 등 총 11기가 발굴·완료되었는데 이 중 1기는 경기도 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이전 복원했고 나머지는 성호공원에 이전 복원했다. 정수장 건설지를 벗어난 곳에 있는 5기의 지석묘는 발굴 대상에서 제외하였으나 정수장 및 도로에서 10m 정도 근접해 있다. 1~4호 지석묘는 10m 반경 안에 모여 있고 제5호 지석묘는 약 200m 남동쪽으로 떨어져 있는데, 1~5호기 모두 기반식으로 1호·4호에서 치석 흔적이, 2·5호에서 성혈이 확인되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3) 강징(姜澄) 선생 묘 및 신도비(神道碑) ▷ 위치 안산시 양상동 산 16-3번지. 신갈-안산고속도로의 안산 IC 부근이 양상동인데, 안산 IC에서 빠져나와 우회전하면 양상동 방향이다. 양상동 쪽으로 향하다 보면 아랫보대라는 곳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윗보대 쪽으로 가다 보면 우측으로 정언벽 선생의 묘갈과 묘역이 보인다. 정언벽 선생의 묘역을 지나 윗보대를 지나면 바로 강징 선생의 묘와 신도비가 나타난다. 봉분 160×600cm, 비신 136×75×20cm, 이수 85×50×20cm 규모이다. 특이한 것은 기단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석인 바위를 파고 신도비를 세워 놓았으며 옥개석 대신 이수가 올려져 있다.
사진 4-16 강진 선생 묘. 양상동 16-3번지에 위치하며, 안산시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4-17 강징 선생 신도비. 이 비는 인조25년(1647년)에 건립되었으며 조상우가 글을 썼다.
▷ 역사 및 유래 강징은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자는 언심(彦深), 호는 소제(少薺)·심재(深薺), 본관은 진주이다. 성종 25년(1494년)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제학을 거쳐 연산군 10년(1504년)에 우부승지로 재직하였으나 당시 왕에게 사냥을 삼갈 것을 간했다가 낙안으로 유배되었고 연산군 12년(1506년) 복세암(福世庵)의 이건(移建)을 반대하여 투옥되었다. 그후 중종 반정으로 석방되어 강원도관찰사가 되고 중종 3년(1508년)과 중종 16년(1521년)에 각각 성절사(聖節使)와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전주 경주부윤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그는 중종이 제작한 병풍의 글씨와 명신들의 시문 홍문관에서 올린 정명도의 잠(箴)을 쓰니 당대의 명필이란 소리를 들었다. 이 밖에 글씨로 ‘정익혜공난종신도비명(鄭翼惠公蘭宗神道碑銘)’이 있다. 이 신도비는 인조 25년(1647년)에 건립되었으며 정사룡이 찬하고 조상우가 글을 썼으며 윤덕준이 전액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4) 김여물(金汝) 장군 묘 및 신도비(神道碑) ▷ 위치 안산시 와동 141번지. 안산자동차면허시험장 부근이 와동으로 이곳에 수암성당이 있는데, 김여물 장군 묘소는 수암성당 근처에 위치해 있으며 바로 밑에 사세충렬문이 있다. ▷ 구조 비의 규모는 이수 86×38×76cm, 비신 159×73×26cm, 기대석 140×90×70cm이다. 이수와 비신은 하나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수에는 앞뒷면에 용이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희롱하는 장면을 조각하였는데 역동감이 넘친다. 기대석에는 초문이 음각되어 있다.
사진 4- 18 김여물 장군 묘. 와동 141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4-19 김여물 장군 신도비. 현종 3년에 세웠으며, 이수와 비신이 하나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 역사 및 유래 김여물은 조선 시대의 충신으로 자는 사수(士秀), 호는 외암(畏菴), 본관은 순천이다.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훈(壎)의 아들이며 영의정 류의 부친이다. 김여물은 20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30세에 대과에 합격하였다. 각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선조 25년 의주목사로 있을 때 서인 정철의 당으로 몰려 파직되었다가 선조 26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과 함께 왕의 특명을 받고 충주의 방어에 나섰다. 김여물은 신립에게 새재의 고수를 주장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았고 마침내 왜적에게 새재를 내주고 말았다. 김여물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다 탄금대에서 투신하였는데 이때 공의 나이 45세였다.
이듬해 의관을 거두어 안산 동장리에 장사 지내고 정려를 세웠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시호는 장의이다. 김여물의 신도비에는 이런 공의 우국충정을 기려 “무릇 충신열사가 나라를 섬김은 국난을 당했을 때 목숨을 바쳐 인을 이루는 데 있다. 하늘의 명 또한 위훈(偉勳)과 환업(宦業)으로써 그 자손은 반드시 창성하게 하니, 그것은 마치 상하가 서로 주고 받으면서 보답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치는 크게 밝아 조그마한 착오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니 군자는 이로써 천리(千理)가 없다고 탄식하는 말을 함부로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라는 글귀로 시작하여 그의 대인으로서의 공평무사한 행적과 애국의 단성(丹誠)이 새겨져 있다. 현종 3년(1536년)에 제작되었으며 김상헌이 찬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
(5) 신점(申點) 선생 묘 ▷ 위치 안산시 신길동 산 9-2. 안산시를 가로지르는 중앙로를 따라가면 전철 종점인 안산역이 나오는데 안산역에서 시화공단 쪽으로 직진하면 원곡역이 나온다. 원곡역을 지나 신길역 쪽으로 향하면 좌회전하는 곳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에서 좌회전하면 능길마을이다. 이곳에 신점 선생의 묘가 위치해 있다. ▷ 구조 봉분 500×180×740cm, 신도비 158×74×26cm ▷ 역사 및 유래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자는 성여(聖與), 호는 척재,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명종 19년(156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禮曺佐郞) 등을 지내고 상례에 있어서 대상(大祥) 후의 입제(笠制)에 백립(白笠)을 통용하도록 하였다.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원병을 파견하도록 힘썼다. 귀국하여 동부승지가 되고 형조·병조·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후 판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에 이르렀다. 선무공신 2등과 영의정 및 평성부원군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사진 4-20 신점 선생 묘. 신길동 산 9-2번지에 있으며, 안산 시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되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되었다.
(6) 홍명원(洪命元) 선생 묘 ▷ 위치 안산시 성곡동 산 78. 이곳은 반월공업단지가 있는 곳인데 반월공업단지의 공단전망대를 지나 북쪽으로 가면 안산 하수종말처리장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돌안말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해봉산 정상이 보인다. 이 해봉산 자락에 홍명원 묘가 있으며 길 건너편으로는 잿머리성황당이 위치하고 있다. ▷ 구조 성곡동의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서쪽 경사면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홍명원을 비롯해 효녀 홍소저·홍우악 등 모두 5기의 무덤이 있다. 홍명원의 무덤은 남쪽의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데 묘의 석물은 묘비 2기를 비롯해 상석·향로석·동자석 등이 있다. 봉분은 쌍분으로 446×145cm이다. 묘갈은 상석 좌측에 2기가 있는데 좌측의 것은 구비이고 우측의 것은 이 구비의 내용을 새로 적어서 만든 신비이다. 구비는 비신이 143×64×20cm, 기대석은 106×63×20cm로 초화문이 음각되어 있다. 신비는 옥개석이 90×64×60cm, 비신은 169×67×28cm이다. 상석은 화강암재로 150×100×40cm이고, 향로석은 36×40×40cm, 동자석은 상석 좌우에 배치되어 있으며 크기는 95cm이다.
▷ 역사 및 유래 홍명원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낙부(樂夫), 호는 해봉(海峯),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진사 영필의 아들이다. 선조 30년(159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를 거쳐 선조 33년 검열(檢閱)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와 사서(司書)·수찬(修撰)·헌납(獻納)이 되었으나 권신들을 탄핵하던 끝에 미움을 사서 함경도 도사로 좌천되었다. 그후 선조 36년(1603년) 예조정랑으로 훈련도감낭청(訓鍊都監郎廳)을 겸했고 죽주부사로 죽주산성을 쌓고 돌아와 수찬(修撰)·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장령 등을 역임했고, 도체찰사(道體察使) 이항복의 종사관으로 평안도와 황해도를 거쳐 동부승지·좌승지를 역임했으며, 광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푼 끝에 표리를 하사받고 가선대부로 승계되었다. 광해군 7년(1615년) 인목대비에 대한 페모론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고향인 해곡으로 내려갔으나 광해군 14년(1722년) 광해군 초 후금(後金)과 수교한 사실이 명나라에 알려져 양국관계가 미묘해지자 급고사(急告使)로 명나라에 가서 이를 무마하였고 후금의 위협에 강경론을 주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시와 문장에도 뛰어나 특히 한대(漢代)의 문장과 당대(唐代)의 시에 정통하였다. 저서로는 「해봉집(海峯集)」을 남겼다. 홍명원의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을 썼다. 묘갈의 전면에는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연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官大提學五衛都摠部都總管行嘉善大夫京畿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開城府留守永平大都護府使洪諱命元之墓貞敬夫人坡平尹氏깹굡箚 쓰여 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4-21 홍명원 선생 묘. 성곡동 산 78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65호로 지정되었다.
(7) 김류 초상 ▷ 위치 안산시 와동 102-10번지. ▷ 구조 명문에 쓰여진 내용 중 촬형상(撮形像)이란 전신 중에서 일부분만을 묘사하는 화법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특히 목 위로 치켜올려진 단령의 형태 등이 당시 공신도상(功臣圖像)의 특징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지본설채(紙本設彩)인 이 초상화는 부분적이기는 하나 어깨의 선 처리 등에서도 17세기 초상화의 양식적인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역사 및 유래 김류는 조선 중기의 공신으로 자는 관옥(冠玉)이며 호는 북저(北渚),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김여물의 아들이다.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으로 안면 윤곽은 진한 갈색선으로 잡고 주조색은 밝고 엷은 살빛으로 강약을 주어 명암을 나타내었다. 이 초상화는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록될 당시 그려진 것을 모본으로 하여 영의정에 올랐을 때 모사한 화첩본으로 보인다. 좌측에 “仁祖大王反正一等功臣領議政昇平府院君金g大臣撮形像”이라는 명문이 쓰여 있다.
사진 4-22 김류 선생의 초상화. 와동 102-10번지에 소재하며, 17세기 초 상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었다.
(8) 최정걸(崔挺傑) 장군 묘 ▷ 위치 안산시 사동 산 92번지. 상록수 전철역에서 한양 아파트 쪽으로 향하다 보면 본오초등학교가 나오는데, 본오초등학교 뒤편 본오동 벌이 내려다보이는 안산시 사동 산우물 근처에 자리잡고 있다. ▷ 구조 봉분 155×520cm, 비석 198×53×24cm ▷ 역사 및 유래 최정걸 장군은 양주 최씨 시조 억(億)의 12세손으로 조선 인조 15년(1637년)에 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추증받았으며 충장(忠壯)의 시호를 받은 충절공신(忠節功臣)이다. 최정걸 장군은 등무과 출신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까지 지낸 후 귀향(안산시 사동 감자골)하여 효양우애(孝養友愛)하고 있던 중,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심을 알고 50세의 나이로 남한산성 행궁(行宮)으로 달려가니 조정은 주화파가 득세하여 바야흐로 국치를 당할 판국이었다. 장군은 적진으로 단신 출격하여 적의 머리 칠급(七級)을 베어 인조 어전에 바치니 인조는 크게 감동하고 그 충용을 포상하여 어주(御酒)를 내렸다. 그러나 조정은 강대한 호세에 눌려 치욕적인 강화로 기우니 장군은 이튿날 다시 적의 대군 중으로 돌진하여 분전 끝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인조 14년 (1636년 12월 29일)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장군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가선대부병조참판(嘉善大夫兵曹參判)을 추증하고 향리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후히 장사 지내게 하고 정문(旌門)을 내리며 사패(賜牌)·봉록(俸祿)하였다.
사진 4-23 최정걸 장군 묘역. 사동 산 92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었다
(9) 정언벽(丁彦璧) 선생 묘 및 묘갈 ▷ 위치 안산시 양상동 산 7번지에 위치해 있다. 신갈-안산고속도로의 안산 IC 부근이 양상동인데, 안산 IC에서 빠져나와 우회전하면 양상동 방향이다. 양상동 쪽으로 향하다 보면 아랫보대라는 곳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윗보대 쪽으로 가다 보면 우측으로 정언벽 선생의 묘갈과 묘역이 보인다. 건너편에 군부대가 위치해 있다. ▷ 구조 봉분 172×540cm, 묘갈 287×75×27cm, 묘표 124×60×21cm ▷ 역사 및 유래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계홍(季弘),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관찰사 호선(好善)의 아들이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5대조부이다. 인조 22년(1644년) 생원(生員)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박사(博士)를 지냈고,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 겸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設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예조(禮曺)·병조좌랑(兵曹佐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헌납 때 왕자 징(徵)의 죄가 논의되자 이를 변호하여 무사케 하였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었다.
(10) 최혼(崔渾) 선생 묘 ▷ 위치 안산시 사동 83-8. 전철 상록수역에서 한양대학교 쪽으로 향하다 보면 수인선 철도가 있던 곳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을 지나 바로 좌회전하면 속칭 감자골이라는 곳이 나온다. 최혼 선생의 묘는 이곳 감자골에 위치해 있다. ▷ 구조 155×520cm 외 12기.
사진 4-25 최흔 선생 묘역. 사동 83-8번지 감자골에 있으며, 안산시향토 유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 역사 및 유래 양주 최씨의 중시조 독선당(獨善堂) 혼(渾)이 연산군 5년(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피해 부(父)인 자준(自濬), 조부(祖父)인 담(潭)을 모시고 현 안산시 사동 감자골로 입향한 이래 이곳에서 별세한 6대 13기(27명)의 무덤과 시조로부터 상계(6세<世>까지) 7명의 제단이 보존되어 있는 안산시 소재 최대 규모의 묘역이다. 서기 1500년대 초 감자골로 입향한 양주 최씨는 7~9세(독선당 혼<渾>)의 후손 두 계파가 490여 년 동안 28세(世)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으며 매년 10월 1일 이곳 묘역에서 시향제(時享祭)를 지냄으로써 전통적 유교식 집성촌의 법도를 지켜 왔는 바 1976년 이래 반월공단 신도시개발로 광대했던 묘역의 상당 지역이 당국에 의해 수용(收用)·삭실(削失)되었다. 양주 최씨의 시조 억(億)은 고려 때 태사(太師)로 천거되어 공민왕 2년(1352년)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한 문경공(文敬公)으로 양주군으로 봉작되었으며 2세 연(淵)은 판도판서(判圖判書), 3세 숙(淑)은 병조전서(兵曹典書), 4세 경운(慶雲)은 공조전서, 5세 항(沆)은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냈고, 6세 정안은 우정언부사직(右正言副司直)을 역임했으며, 정연은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지냈는 바 이들 일곱 분은 선영제단에 비를 세웠다. 이들 7세부터 12세까지의 거의 모두가 이곳 묘역에 봉분이 유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비석·상석·망주석 등의 석물도 보전 가치가 매우 크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1) 이인현(李仁賢) 선생 묘 ▷ 위치 안산시 고잔동 산 87번지. 안산 시청에서 안산자동차면허시험장으로 향하다 보면 고잔초등학교와 올림픽생활기념관이 나오는데 이곳의 길 건너편 야산에 이인현 선생의 묘가 있다. ▷ 구조 봉분 151×40cm, 묘비 182×52×22cm
사진 4-26 이인현 선생 묘역. 고잔동 산87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 유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 역사 및 유래 전주 이씨 봉성군 후손은 5백여 년째 안산시 고잔동을 주축으로 살고 있다. 고잔동 산 87, 85에는 50여 기의 묘가 있었으나 1차 도시개발로 철거되고 현재 12기가 남아 있다. 이인현 묘는 12기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공원화계획으로 철거 대상에 들어 있다. 이인현 선생은 통훈대부(通訓大夫)·문화현감(文化縣監)·충양위(忠A衛)를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 강도에서 순절하였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12) 유석(柳碩) 선생 묘 및 신도비(神道碑)
▷ 위치 안산시 부곡동 산 5-1번지. 수인산업도로 안산에서 인천 쪽으로 향하다 보면 신갈`-`안산고속도로와 교차하는 곳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에서 우측으로 보면 유석 선생의 묘소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이고 소로를 따라 올라가면 유석 선생의 묘역이 나타난다.
▷ 구조 봉분 128×370cm, 비신 212×96×38cm인데 신갈-안산고속도로 건설공사로 인해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이동된 상태이다. 묘역의 석물로는 상석·향로석을 비롯하여 동자석·문신석·망주석이 각 한 쌍씩 있고, 장명등이 중앙에 있었으나 1980년대에 도난당하여 지금은 빈 자리만 남아 있다.
사진 4-27 유석 선생 묘역. 부곡동 산 5-1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4-28 유석 선생 신도비. 그는 지조가 높고 강직했으며 문장이 뛰어났다고 신도비에 기록되어 있다.
▷ 역사 및 유래 묘소는 효종 6년(1655년)에 조성되었으나 비의 건립 연대는 숙종 16년(1690년)으로 조경(趙絅)이 비문을 짓고 허목(許穆)이 글을 썼다. 유석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덕보(德甫), 호는 개산(皆山),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시회(時會)의 아들로 조부 격(格)은 정언을 지냈고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다. 인조 3년(1625년) 강원도 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에 이르렀는데 그는 천성이 강직하고 지조가 있어 인조를 30년 동안 받들었고 효종도 7년이나 섬겼는데 두 임금 모두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의 신도비에는 “공은 인품이 강직하고 방정했으니 그것은 타고난 천성이다. 그리고 특립독행(特立獨行)의 지조가 있었으며 문장을 하는 것도 그 위인과 같았다. 선배에 남곽·박동열 같은 이가 있어 공의 변려문은 소장공(蘇長公;東坡)의 당에 들어갈 만하다.”고 칭찬하는 글이 씌어 있다. 공의 저서로는 「개산집(皆山集)」이 전해지고 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13) 홍처윤(洪處尹) 선생 묘 및 묘갈
▷ 위치 안산시 선부동 산 112-2번지. 안산시를 가로지르는 중앙로를 따라 시화 쪽으로 향하다 보면 전철 안산선의 종점인 안산역이 나오는데, 안산역에서 우회전하여 신갈-안산고속도로의 서안산 IC 쪽으로 향하다 보면 선부동이 나온다. 홍처윤 선생 묘는 선부동 근로자임대아파트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다.
▷ 구조 이곳에는 홍처윤(洪處尹)을 비롯하여 홍수기(洪受箕)·홍수서(洪受敍) 등의 무덤이 있는데, 홍처윤의 무덤은 그 중 가장 위쪽에 있으며 방향은 곤좌(坤坐;서남향)이다. 무덤의 석물로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상석의 좌우에 망주석이 하나씩 있다. 또한 묘역의 우측에는 행적비가 있고 좌측에는 묘갈이 있다. 봉분의 크기는 460×450×120cm, 상석은 화강암으로 157×90×32cm이다. 또한 향로석은 31×28×34cm이며 망주석의 높이는 179cm이다. 행적비는 1987년에 건립한 것으로 재질은 오석이며 규모는 150×103×28cm이다. 묘갈은 귀부(龜趺)와 이수가 잘 남아 있는데 귀부는 규모가 180×110×60cm이며 균형 잡힌 몸매에 섬세하고 세련된 모양을 하고 있다. 이수는 옥개석의 형태로 하단부에 용의 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며 윗부분은 보주형 꼭지에 팔작지붕 형태인데 규모는 110×90×50cm이다. 비신은 140×56×33cm이다.
사진4-29 홍처윤 선생 묘역. 선부동 산 112-2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4-30 홍초윤 선생 묘갈. 귀부와 이수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몸매가 섬세하고 세련되어 있다.
▷ 역사 및 유래 홍처윤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지임(之任), 호는 안분재(安分齋),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관찰사 명원(明元)의 아들이다. 1639년 인조 17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1641년 검열(檢閱)을 거쳐 1646년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과제(科題)에 문제가 있어 파방(罷榜)되자 삭직(削職)당했다.
그후 1648년 복적되어 정언(正言) 수찬(修撰)을 지내고 1650년(효종 1년) 응교(應敎)로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 해 지평(持平)으로 영의정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였다. 이에 교리(校理)가 되고 왕이 당쟁의 폐해를 지적하자 그 무해(無害)함을 진술하여 삭직되었다가 백천군수로 기용되고 1655년 보덕(輔德)에 승진 사인(舍人)을 거쳐 1659년 수찬 겸 보덕 등을 지냈다.
이해 효종이 죽자 빈전도감도청(殯殿都監道廳)이 되고 이어 사간(司諫)을 지낸 후 이듬해 형조참의(刑曹參議)·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였고 1661년(현종 2년)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고 황해도 관찰사를 거쳐 1663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예조참의(禮曺參議)에 이르렀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추증받았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
(14) 정정옹주(貞正翁主) 묘
▷ 위치 안산시 부곡동 산 50-40번지. 수인산업도로 안산에서 인천방향으로 가다보면 시흥-안산간 고속도로와 신갈-안산간 고속도로의 안산분기점이 나오고 정재초등학교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우회전하는 샛길을 통해 진입하면 부곡동이다. 정재초등학교를 지나 제일스포츠센터 쪽으로 향하다 보면 정정옹주 묘의 표지판과 만날 수 있다.
▷ 구조 봉분 200×540cm
▷ 역사 및 유래 선조의 후궁 정빈(貞嬪) 홍씨(洪氏)의 소생으로 선조의 아홉째딸이다. 선조 37년 정정옹주로 봉해지고 광해군 2년 진안위(晋安尉) 유적(柳Z)에게 출가하였다.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이 강화도에서 증살(蒸殺)되었고 이어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모하려 하자 지아비와 더불어 이를 반대하였다. 후에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인조는 광해군 치하에서 진안위가 정의롭게 처신하였다 하여 추증하고 정정옹주에게도 두터운 예로 대우하였다. 후사가 없어 시동생 영(潁)의 아들 명전(命全)을 양자로 삼았으나 명전도 문과에 급제한 지 2년 만에 요절하였다. 이후 2년 만에 옹주도 타계하니 현종은 정사를 폐하고 장례 비용을 후사하였으며 스스로 빈소에 나아가 진안위 묘에 합장하도록 하였다.
사진 4-31 정정옹주 묘역. 부곡동 산50-40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되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되었다.
(15) 윤강(尹絳) 선생 묘 및 신도비(神道碑)
▷ 위치 안산시 선부동 산 17-2번지. 안산에서 부천 쪽으로 가다 보면 좌측의 군자봉으로 꺾여지는 소로가 나오는데, 이곳에 다다르기 전에 군부대 있는 곳에서 진덕사 쪽으로 우회전해 가다가 다시 우산리라는 곳으로 우회전해 내려가면 좌측으로 윤강 선생의 묘역이 보인다.
▷ 구조 비개(碑蓋) 181×108×87cm, 비신 270×111×48cm, 기대 186×126×59cm의 규모이다. 비신의 높이가 270cm에 달하는 큰 규모에 속한다. 비개는 팔작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비신의 우측 하단부 일부가 파괴되어 콘크리트로 붙여 놓았으나 현재는 안전을 위해 보강시설을 해 놓은 상태이다.
사진 4-32 윤강 선생 묘역. 선부동 산 17-2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 유적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4-33 윤강 선생 신도비. 1709년(숙종 35년)에 세워졌으며, 비개는 팔작지붕으로 되 있다.
▷ 역사 및 유래 윤강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자준(子駿), 호는 무곡(無谷)이며 본관은 파평이다. 인조 2년(162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인조 4년 검열을 거쳐 봉교·정언·교리 등을 지냈고 인조 20년(1642년) 사은 겸 진주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라 승지·대사헌·도승지·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효종 8년(1657년)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예조판서로 빈전도감 제조가 되어 장례를 치렀다. 이 해 판의금부사·이조판서를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현종 5년(1664년) 민유중의 탄핵으로 관직을 사직한 후 향리인 안산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마쳤다. 신도비는 송시열이 찬하고 윤지인이 썼으며 윤덕준이 전액하였으며 숙종 35년(1709년)에 건립하였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되었다.
(16) 부계팔경도(釜溪八景圖)
▷ 위치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가(柳文馨家).
▷ 구조 총 8폭으로 그림 31.2×24.8cm, 병풍 150×560cm
▷ 역사 및 유래 부계팔경도는 안산시 부곡동 일원의 팔경을 그림으로 묘사한 병풍이다. 8폭으로 각 경관마다 화제(畵題)가 있고 독특한 필치로 산수와 전원 또는 기암괴석을 묘사하였다. 특히 전경도에는 지형·산세·지명까지 기록되어 있어 지명 연구 등 향토사적 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작가인 유원성(柳遠聲)은 호가 모산(帽山)이며 1851년 안산 부곡동에서 출생하여 개천군수의 관직에 올랐으나 일제강점 이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고향을 지키며 부곡 땅을 화폭에 담았고, 1945년 한맺힌 일제의 패망을 보고 9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사진 4-34 부계전도.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가 소장. 조상의 묘소와 종토의 위치를 그린 지도로서 안산시 향토유적 제17호로 지정되었다.
▷ 특기 사항 1920년대 부곡 지방의 지형 구조가 어떻게 변모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17) 부계전도(釜溪全圖)
▷ 위치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가(柳文馨家).
▷ 구조 그림 72.2×133cm, 족자 120×180cm
▷ 역사 및 유래 경성당(竟成堂) 주인 모산(帽山) 유원성(柳遠聲)이 조상의 묘소와 종토의 위치를 정확히 표기하여 후손들이 잘 지키도록 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서편에서 부감법으로 부곡동을 사실적으로 그린 지도이다. 그러나 단순히 조선 시대의 다른 지도와는 달리 대단히 사실적인 필치로서 일종의 진경산수라고 할 수 있다. 세필로 각 지역의 특징을 잘 표현하였으며 중요한 지점들은 세필로 상세히 표시하였고 중요 지점에 대해서는 한자로 지명을 명기하였다. 그리고 산소가 있는 곳은 붉은 점을 찍어 표시하고 땅은 자신의 것과 타인 소유를 글씨를 적어 표시하였다. 지형도의 위에 후손에게 부곡동의 토지와 산소를 철저하게 수호할 것을 염원하는 발문을 적고 있으며 제작한 연기와 작자를 정확히 명기하고 있다. 개발 이전의 안산의 모습을 원형대로 볼 수 있는 자료일 뿐 아니라 명기된 지명들은 이 지역의 지명을 고증하는 중요한 근거 자료라고 할 수 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17호로 지정되었다.
(18) 최용신(崔容信) 선생 묘
▷ 위치 안산시 본오동 879-4번지. 전철 안산선 상록수역에서 하차하면 그곳이 본오동인데 상록수역 건너편은 우성 아파트이다. 우성 아파트와 마주한 아파트단지가 태영 아파트인데 최용신 선생의 묘는 태영 아파트와 인접한 천곡교회내에 위치해 있다.
▷ 구조 봉분 240×97cm, 유적지 3728평
▷ 역사 및 유래 심훈이 「상록수」에서 청석골이라 부른 마을이 바로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의 샘골마을이다. 또한 농촌의 문맹 퇴치를 위해서 야학에 온 힘을 기울인 채영신이란 여자 주인공은 일생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한 최용신(崔容信)이라는 실제 인물이다. 최용신은 서기 1909년 8월 함경남도 원산읍 두남리에서 최창희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최용신은 대단히 곤궁한 생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그러한 생활 가운데서도 그녀는 신앙심이 깊어 열심히 교회에 다녔으며, 루씨(樓氏)여자보통학교와 루씨여자고등학교를 나왔다.
그후 그녀는 서울에 있는 감리교 협성신학교 졸업을 1년 앞둔 1931년 10월 샘골마을로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내려왔다.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농촌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봉사정신과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조그만 예배당 천곡교회를 빌어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한 것은 10월 2일이었다.
지원생은 많았고 장소는 협소하여 오전·오후·저녁 3부제로 밤늦도록 가르쳤다. 처음에는 주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냉대도 많이 받았으나 차츰 동네 사람들의 환심을 얻어 최용신은 이 지방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그후 최용신은 계속 이 마을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다가 1934년 일본 고베 신학교로 유학을 갔으나 신병으로 귀국하였고, 샘골 마을에서 요양하면서 농촌계몽활동에 전념하였으나 유학 중 얻은 병과 과로가 겹쳐 학생들과 학부모, 그리고 샘골 마을 주민들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1935년 1월 23일 27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사진 4-35 최용신 선생 묘역. 본오동 879-4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18호로 지정되었다.
그후 지난 1974년 11월 30일 루씨 동문과 천곡교회에서 상록수 최용신 선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를 세웠으며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특히 시흥군 하북면 흑석리 출신의 작가 심훈이 그녀가 별세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크게 감동하여 그녀의 희생적인 농촌봉사활동을 참고하여 그의 대표작 「상록수」를 집필함에 있어 최용신 선생을 여주인공 채영신의 모델로 삼았다. 현재 안산시에서는 최용신 선생의 묘소 근처 전철역 이름을 상록수역으로 명명하여 선생의 높은 정신을 기리고 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19) 홍정희(洪貞羲) 효자문
▷ 위치 안산시 남동 748번지. 대부동사무소 앞에서 좌회전하여 비포장도로를 따라서 대남초등학교 쪽으로 향하다 보면 홍정희 효자문의 안내판이 보이는데 이곳에서 약 1km 정도 소로를 따라가면 목표하는 곳이 나타난다.
▷ 구조 정면 3.20m, 측면 1.35m의 팔작지붕에 양기와를 올린 홑처마 건물이다. 벽은 시멘트로 근래에 개수하였다. ▷ 역사 및 유래 효자 홍정희(洪貞羲) 선생은 조선 후기인 1880년대 초 대부도 남도에서 태어난 이름난 효자로서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온순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정성을 다해 봉양했으며 그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특히 부친이 별세하자 그는 깊이 애통해하며 묘소 앞에 조그마한 여막(廬幕)을 짓고 그곳에서 3년 동안 생활하였는데, 그는 육식을 입에 대지 않고 소찬(素饌)으로 일관했으며 한 번도 자신의 집에 내려오지 않는 등 선친의 묘소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의 뛰어난 효행과 마음가짐은 마침내 조정에까지 알려져 고종(高宗) 30년(1893년) 6월 효자 정문(旌門)이 이곳에 건립되었고 만인의 귀감이 되었다.
사진 4-36 홍정희 효자문. 남동 748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19호로 지정되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19호로 지정되었다.
(20) 대부도 자선비(慈善碑) ▷ 위치 안산시 남동 85-11번지. ▷ 구조 자선비의 석재는 화강암이며 대석은 시멘트로 건립되었다. 규모는 높이 140cm, 폭 34.5cm, 두께 15cm이다.
사진 4-37 대부도 자선비. 남동 85-11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20호로 지정되었다.
▷ 역사 및 유래 이찬(李燦) 선생은 한말에서 1920년대 초까지 생존했던 이 지방의 덕망 있는 재산가이자 유지로서 본관은 경주이다. 선생은 일찍이 부농(富農)의 아들로 태어나 그가 생존해 있을 당시만 해도 남동 일원의 토지는 거의 그의 소유라 할 만큼 대지주였으며 대부분의 농토는 많은 소작인들에 의해 경작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평소 마음이 소박하고 인정이 두터워 스스로 가난한 민중의 처지를 깊이 헤아려 일부의 땅은 가난한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빚과 소작료를 탕감해 주는 등 범인이면 생각할 수 없는 큰 덕량(德量)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 뒤 선생이 별세하자 은혜를 입은 마을 사람들이 거향적(擧鄕的)으로 장례를 치러 주고 생전의 고마운 마음씨와 그 뜻을 기리기 위하여 현 남4동에 위치한 선생의 묘소 앞에 자선비(慈善碑)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선생의 가세(家勢)와 후사(後嗣)가 영락(零落)하고 비를 돌보는 이가 없어 자주 쓰러져 1980년 4월 5일 남1동·남3동 중간 도로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20호로 지정되었다.
통훈대부(정3품) 사재감정 김맹전 묘
사재정공 휘 맹전 지묘 : 연성군 김정경 손자 * 묘소 : 안산시 선부동 석수골
숙인 경주이씨 묘소 : 광주(廣州) 현천리(玄川里)
= 하남시 감북동(위정공 묘소 우측 안장)
숙인 선산김씨 묘소 사재정공 맹전 합장
선부동(仙府洞)
옛날에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던 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선부리(그 우물을 '석수골 우물'이라 함) 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대월면 선부리와 달산리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군자면 선부리로 개칭 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거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安山市 仙府洞)으로 되었다.선부동은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관내에서 최초로 장시(산대장)가 섰을
만큼적대던 곳이었다. 특히, 안산의 곽적성씨중 안산 김씨 후손중에 김맹전 (金孟銓)의 묘를 석수골에
쓴 후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안산에 안산 성씨의 뿌리를 내렸다 한다.
석수골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조선조 태종때 좌명공신으로
연성군에 봉해진 김정경(1345~1419)의 손자인 김맹전의 묘를 쓸 때 묘 앞에 설치할 비석을 배에 싣고 와서 석공이 돌을 깎아 석물을 세웠다 하여 석수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으로 개의 아들이다. 자는 극유로 강희안의 사위이다. 성종(世宗) 14년(1483) 춘당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감에 이르렀다. 안산시 원곡동에 묘가 있었으나 안산 신도시 건설로 인하여 충청도로 이장되었다.
본관은 안산으로 교감 맹강의 아들이다. 자는 자수, 호는 모기재로 김식의 문인이다. 중종(中宗) 14년(1519)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이 되었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처벌받았으며,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안산시 원곡동에 묘소가 있었으나 신도시 건설로 인하여 충청도로 이장되었다.
제2절 비지정문화재
1. 선사·역사 유적 및 유물
(1) 별망패총(別望貝塚)
▷ 위치 안산시 초지동 2동. 별망패총은 별망성이 있는 해발 49m의 야산 근처인 남사면 바닷가 부근에 형성되어 있었으나 개발로 인하여 1978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 이후 완전히 파괴되었다. 현재는 공장건물이 들어서 있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명지대학교의 보고에 따르면 폐수처리장 부근에 약간의 패각층이 있다고 보고된 바 있으나 정확한 것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 유적의 환경 원래 이 일대는 갯벌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발굴 당시에는 개간으로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당시의 환경을 복원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부근의 정왕리 토탄층에서 얻어진 자료를 토대로 선사 시대의 식생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토탄층은 지표하 400cm의 깊이까지 묻혀 있었으며 전체 5개 층으로 나누어지는데 바닥층, 즉 5층에서 연대가 2290±90년 전으로 나왔다. 이 층에서는 오리나무와 참나무 등의 목본식물과 함께 화본과 식물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현재의 훼손되지 않은 자연식생과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신석기 시대에도 전체적인 식생은 이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패총에서 발견된 조개의 종류를 보면 굴·토굴·대고둥·점박이고둥·좁쌀무늬고둥·뿔고둥·떡조개·반지락·백합·새꼬막·비단가리비·가무락조개·소라, 그리고 주름감생이 등이 포함되어 있다.
사진 4-38 별망패총이 발견된 별망성지 원경. 바다와 인접한 부근에서 발굴되었으나 현재는 흔적조차 없다.
▷ 층위 및 유구 발굴에서 드러난 층위는 표토층·패각층·즐문토기산포층, 그리고 바닥의 생토층으로 나누어진다. 패각층은 지점에 따라 적갈색·흑갈색·황갈색조로 나누어지는데 패각층 아래에 점토층이 있고 그 아래에 신석기 시대의 생활 면이라고 할 수 있는 층이 있다. 신석기 시대 생활 면에는 토기편들이 잡석과 함께 나타나는데 바닥이 점토로 된 지점에서는 이들이 엉켜서 대단히 단단하게 나타난다. 한편 대형의 원형 노지가 발견되었는데 직경이 약 1.6m 정도의 규모이고 약 60cm의 깊이이다. 이 노지의 주변에는 재가 넓게 깔려 있고 노지의 내부에는 목탄과 재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내부의 주변으로 잡석을 돌려 놓고 있었다. 또한 50cm×70cm의 규모로 25cm 깊이의 구덩이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기능은 확실하지가 않다.
▷ 출토 유물 신석기 시대의 즐문토기와 원삼국 시대의 김해식(金海式) 토기가 출토되는 2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즐문토기는 환저(丸底)나 첨저(尖底)의 장난형·반난형의 기형이 대부분이며 태토(胎土)는 점토에 사립이나 조개분을 보강재로 섞어 강도를 강화시켰다. 윤적법(輪積法)·수날법(手捏法)·권상법(捲上法) 등의 방법으로 성형하였으며 기벽은 6~12mm 내외이고 문양은 점선열문·단사선문·횡주어골문·조문 등이 음각으로 시문되었다. 토기는 패각층 출토의 것과 바닥층 출토의 것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바닥층에서는 선을 그어 횡주어골문은 시문한 것이 없는 것이 구별된다.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의 시문 양식은 구연부와 몸통부가 각각 다른 문양을 시문한 것과 동일 문양을 시문한 것으로 대별되고, 시문의 방식은 단치구나 다치구를 써서 긁거나 찍어서 시문한 것들이다. 원삼국 시대의 김해식 토기는 즐문토기에 비해 그 출토량이 빈약하다. 승문·격자문·승석문·무문의 연질 적갈색 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기형은 호형·옹형·발형이 대부분이다. 태토가 거칠고 표면이 조잡한 것이 특징이다.
▷ 특기 사항 별망패총의 신석기 문화는 그 연대가 B.C. 1500년경으로 추정되는데, 서해안 지역의 신석기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서 인접한 오이도 패총과의 비교 연구를 통해 종합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2) 흘곶패총
▷ 위치 구 대부면 소재지에서 흘곶으로 가는 도로변 남4리 마을회관에서 약 100m 정도 떨어진 도로의 비탈면에서 북향으로 패총이 발견되었다. 도로를 내면서 단면이 노출되었는데 이곳은 해발 약 44m의 구릉지이다.
▷ 구조와 내용 도로면에서 드러난 패총지의 길이는 약 17m였는데 전체적인 규모는 확인이 불가능하였다. 패각층은 지표하 20cm에서 시작되었고 그 두께는 약 40~60cm 정도였다. 패각은 90% 이상이 굴껍질이었으며 그 속에서 빗살무늬 계통의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층위는 3개층으로 구분되었으나 층위 간의 문화적인 차이는 아직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토기는 단사선문이 시문된 편들과 어골문이 시문된 것들이 포함되었으며 기타 격자문을 시문한 것도 있었다. 한편 무문의 토기편들은 빗살무늬토기의 시문되지 않은 파편들로 판단되었고, 토기의 태토는 석영과 장석, 그리고 가는 모래가 섞인 것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3) 말부흥패총
▷ 위치 말부흥 부락의 도로가 끝나는 곳에 있는 어린이놀이터 바로 뒤편, 해발 40m 정도 구릉의 약 7부능선쯤에 바다를 면해 패총이 남아 있다.
▷ 구조와 유물 원래는 해안지대에 널리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닭 사료용으로 파내어 많은 부분이 훼손된 상태였다. 대부분이 굴껍질인데 두터운 곳은 약 110 cm 정도의 두께로 남아 있었다. 유물은 타제석기 1점만이 수습되었는데 백색의 규암제 냇돌의 끝부분과 옆부분을 깨트려 만든 것이었다.
(4) 월피동(月陂洞) 지석묘군(支石墓群)
▷ 위치 월피동 안산천변.
▷ 구조 1978년에 경희대학교 박물관팀에 의해 2기가 조사되었고, 1983년도에는 한양대학교 박물관팀에 의해 4기가 확인되었으나 현재는 경지정리 등 개발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1978년도에 경희대학교에서 조사한 지석묘는 상석(床石)의 크기가 282×186×44cm, 210×160×44cm이었는데 장축의 방향은 남-북 방향이었다(표 4-2). 지석묘의 하부구조는 지석 없이 토광을 묘실로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양식은 이 지역 지석묘 양식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호 지석묘의 상석에는 39개의 성혈이 있었다고 보고되었다. 따라서 이를 통해 지석묘가 단순한 무덤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예배장소의 기능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83년도에 한양대학교에서 조사한 4기는 이미 조사 당시 3기는 훼손된 상태였고 나머지 1기는 240×130×50cm의 규모로 논 한가운데 남아 있었다고 한다. 표 4-2 경희대학교 박물관팀이 조사한월피동 지석묘 현황(1978년)
구분
1호
2호
상식
282x186x44㎝
210x160x44㎝
묘실
형태
장방형
타원형
장축x폭x깊이
?x65x68㎝
178x98x55㎝
장축 방향
남-북
남-북
출토유물
석기2점,무문토기편
특......징
성혈39개
▷ 출토 유물 무문토기 파편 일부 외에는 출토 유물이 거의 없었으며, 1978년 조사시 석기 2점이 출토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 특기 사항 출토 유물이 빈약하여 정확한 축조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서해안 지석묘사회의 이해를 위한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분별한 개발로 인하여 파괴되어 더 이상 조사가 불가능하여 안타깝다.
(5) 양상동(楊上洞) 지석묘군(支石墓群)
▷ 위치 양상동 안산천 주변.
▷ 구조 1978년 경희대학교와 건국대학교 박물관팀에 의해 조사된 지석묘군으로, 그 중 매장 유구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2기로 전해진다. 상석의 크기는 332×240×100cm, 198×200×70cm로 비교적 소형에 속한다. 지석묘의 하부구조는 장방형의 토광으로 일반적인 지석묘의 하부구조인 석실구조와 비교되는 매우 특징적인 양식이다. 상석의 표면에는 2개의 성혈(性穴)이 있었는데, 성혈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돌을 문질러 생긴 구멍으로 주로 지석묘의 상석이나 큰 바위에서 발견된다.
▷ 출토 유물 무문토기편 일부가 출토되었다.
▷ 특기 사항 1호 지석묘의 상석이 이중상석이라는 점이 특이하며, 하부구조인 토광에 시신을 안치하고 흙을 덮은 뒤 약 370cm 범위로 10cm 정도의 자갈돌을 깔아 놓았다.
(6) 양상동(楊上洞) 적석토광묘(積石土壙墓)
▷ 위치 양상동과 월피동 경계의 관모봉 서쪽 능선.
▷ 구조 길이 197cm 폭 83cm 깊이 48cm의 토광묘이다. 토광에 시신을 안치한 후 흙으로 덮은 뒤 그 위에 작은 돌을 60cm 정도의 두께로 쌓아 놓은 독특한 형태의 적석토광묘이다.
▷ 출토 유물 무문토기 1점, 유구석부(有溝石斧) 1점.
▷ 특기 사항 1978년 경희대학교 박물관팀에서 조사한 것으로, 주변에 같은 형태의 적석토광묘가 1기가 인접해 있었고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와 지석묘의 존재도 확인되어 지석묘와 같은 시기의 매장 형태일 가능성이 높았다. 향후의 재검토가 필요한 유적이다.
(7) 성곡동(城谷洞) 성지(城址) ▷ 위치 안산시 성곡동 해봉산(海峯山) 정상. ▷ 구조 산 정상부에 평탄한 대지가 있고 경순왕을 모시는 성황당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현재 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정확한 성의 규모와 구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 출토 유물 해봉산 정상부와 주변 지역에서 다수의 토기편과 기와편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상당수가 삼국 시대의 토기편이었다. ▷ 역사 및 유래 해봉산은 바다에 면한 해발 48m의 야산으로 생김새가 게의 발 모양이라 하여 해봉산(蟹峯山)이라고도 하며 혹은 성두산(城頭山)이라고도 부른다. 「안산읍지」에는 “城頭高峰上有城堡遺墟……”라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성두산에 둘레가 약 2백 칸(360m 정도)인 토루(土壘)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구전에 의하면 고구려 장항구현의 폐지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이곳은 남양만과 당성이 있는 송산면 일대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서해안 지역을 수비하는 데 중요한 길목이며 현재도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한편 「동국여지지」에 “獐項口縣;在郡西三十里”라는 기록이 있는데, 군 서쪽 30리 지점은 바로 성곡동 일대이다. 위의 문헌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성곡동의 해봉산 일대에 성이 있었음은 거의 확실하며, 고구려의 장항구현의 치소와도 관계된 곳임을 알 수 있다. ▷ 특기 사항 현재 장항구현의 치소는 장상동의 노리울 일대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 정확한 위치를 규명하기 위해 종합적인 학술조사가 요구되는 지역이다. 현재는 군부대가 위치하고 있어 조사가 어려운 실정이다.
(8) 목내동(木內洞) 성지(城址) ▷ 위치 안산시 목내동. ▷ 구조 1978년 단국대학교 박물관팀에서 발굴·조사한 기록에 의하면 토축성으로 목내동과 초지동 사이의 야산의 산능선들을 연결하는 천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성벽의 높이는 2~3m, 폭은 상부가 2m 하부가 5m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현재는 성벽의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도로 건설로 인한 능선의 절단면에 성벽으로 보이는 2m 높이의 토축만이 남아 있다. ▷ 출토 유물 삼국 시대의 토기편 다수, 통일신라 시대의 인화문 토기편, 고려·조선 시대의 와편과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 역사 및 유래 목내성을 지칭하는 정확한 명칭이 남아 있는 정확한 문헌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안산 김씨 족보에는 조선 시대 안산군의 읍치가 바다에 가까운 목내동에 있었는데 이곳이 소릉지(昭陵址)로 결정되면서 읍치는 현재 군청터가 남아 있는 수암동 일대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이 성벽의 남쪽은 소릉이 있었던 능안마을이고 북쪽은 성안마을이다. 안산 김씨의 족보 기록과 지명 고찰을 통해 볼 때 이곳에 성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 특기 사항 이 성의 정확한 구조 및 축조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삼국 시대 이후 후대까지 해안의 경비를 담당하는 기능을 가진 성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9) 일동(一洞) 고분(古墳) ▷ 위치 안산시 일동. ▷ 구조 고려 시대의 고분으로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1978년 반월공업기지개발계획을 위한 발굴 조사를 통해 그 구조가 확인되었다. 풍화 암반을 파고 들어가 동서 260cm, 남북 110cm, 깊이 266cm의 장방형 토광을 만들고 바닥에 약 12cm 두께로 숯을 깔았으며 그 위에 다시 백토(白土)를 1cm 두께로 고르게 깐 다음 그 위에 목관을 안치했다. 목관의 두께는 5.6cm 내외이며 좌우에 각 2개씩 모두 4개의 철제 관고리가 달려 있다. 묘광의 둘레에는 폭 110~196cm, 길이 8.6m, 동벽 7.6m, 남벽 8.3m이며 凹형을 이루는 곡장(曲墻)이 있다. ▷ 출토 유물 관 안에서 4개의 동전을 비롯 총 42점의 동전과 발치 쪽에서 청동수저 1벌이 출토되었다. 동전은 치평원보(治平元寶)·원우통보(元祐通寶)·대관통보(大觀通寶) 등 4종류로 1063~1125년 사이에 중국에서 사용된 동전들이다. 이를 토대로 고분의 축조 연대를 상한 12세기 초, 하한 12세기 말로 추정할 수 있다. ▷ 특기 사항 이 고분은 시대가 비교적 확실한 고려 시대의 고분으로 묘광과 목관 사이의 공간도 모두 숯으로 채워 넣었으며 묘광에 백토와 숯을 번갈아 까는 등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침향(枕向)은 동침(東枕)이며 고려 시대 고분의 특징인 곡장이 있어 고려 시대의 고분 연구가 미흡한 현 실정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10) 현덕왕후릉지(顯德王后陵址) 출토 유물
1) 석호(石虎) 한 쌍
▷ 위치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 구조 석재는 회백색의 화강암이며 높이 각각 95cm와 97cm, 길이 155cm와 160cm, 폭 40~36cm이며 대석은 160×62×34cm, 190×65cm×18cm이다. 앞발을 세우고 앉은 형태를 하고 있으며 배 밑 부분을 깎아 내어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얼굴을 치켜들고 앞을 바라보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커다란 눈과 코, 그리고 크게 벌린 입과 가지런한 이빨은 해학이 넘치며 목과 몸통은 구분이 없어 둔중하게 보이나 몸의 중량을 융기시켜 표현한 등뼈 등 당당한 양감(量感)을 느끼게 한다. 코의 일부는 결실된 상태이다.
왕릉이나 왕후의 능에 배치되는 석물(石物)은 각 4마리씩의 석호(石虎)·석양(石羊)·망주석(望柱石)·장명등(長明燈)·문신석(文臣石)·무신석(武臣石)·석마(石馬) 등인데 그 중 석호상은 능의 북쪽에 2개, 동쪽과 서쪽에 하나씩 머리가 바깥쪽을 향하도록 배치하게 되어 있다. 이 한 쌍의 석호가 그 중 어느 쪽에 위치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덕왕후를 소릉(昭陵)에 장사지낸 1441년 9월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지며 「세종실록」의 오례의(五禮儀)에 준해서 제작한 조선 초기 석조조각을 대표할 수 있는 걸작품이다. ▷ 역사 및 유래 현덕왕후 안동 권씨는 문종비(文宗妃)로서 단종(端宗)의 생모이다. 세종 23년(1441년) 세자빈으로 왕손인 단종을 출산한 지 이틀 만에 24세의 젊은 나이로 죽으니 세종대왕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시켜 장지를 물색한 결과 안산군 목내리(木內里)를 택하여 장사를 지냈다. 그후 문종이 즉위한 후에 현덕왕후(顯德王后)로 추봉되고 능을 소릉(昭陵)이라 하였다. 그러나 세조(世祖)가 즉위 3년(1457년)에 능을 파헤쳐 유골을 바닷가에 묻고 소릉을 폐능하였는데, 그 56년 후인 중종 8년(1513년)에 유골을 찾아 동구능(東九陵)의 현릉(顯陵) 문종의 능 옆에 안장하여 소릉을 복원하면서 소릉이라는 칭호는 버렸다.
▷ 특기 사항 마을 주민들이 폐릉지에서 유물을 파내었는데 현재 이화여대자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사진 4-40 현덕왕후 폐릉지에서 발굴된 석양. 왕릉이나 왕후의 능에 배치되는 중요 석물이다. 전형적인 조선 시대의 능묘 호석이다.
사진 4-39 현덕왕후 폐릉지에서 발굴된 난간석주.
2) 난간석주(欄干石柱)
▷ 구조 길이 161cm, 폭 64cm, 두께 32cm이며 상단은 보주형(寶珠形)이고 하단에는 지대석 원공(圓孔)에 꽂도록 촉이 돌출되어 있는 전형적인 조선 시대 능묘호석인 난간석주이다. 난간석주는 능 주위에 돌릴 난간을 걸쳐 놓는 석주를 말한다. 중간 부분에 좌우의 난간을 걸치게 홈대가 마련되었고 밑 부분도 대석에 얹히도록 평평하게 다듬었다. 상단에는 양연과 복연을 새기고 난간(竹石)을 올려 놓는 부위에는 자방이 있는 4엽 연화문(蓮花文)을 새겨 놓았다
▷ 특기 사항 1978년 단국대학교에서 발굴하였으며, 현물은 안산시 근로청소년복지회관 후원에 보존되어 있다.
(11) 명안공주(明安公主) 묘 및 관련 유물 명안공주는 조선왕조 18대 현종의 셋째딸이자 숙종의 누이동생으로서 1679년 오태주(吳泰周)에게 출가하였다. 이 묘역은 명안공주와 함께 그 시어머니인 상주 황씨, 남편인 해창위(海昌尉) 오태주, 그리고 아들인 오원(吳瑗)의 묘가 열을 이루며 배열되어 있다. 묘역은 서남쪽에서 동북 방향으로 흘러내리는 작은 구릉의 끝 부분 능선을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능선의 자락이 끝나는 부분에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연못에서 동북편 약 50m 떨어진 곳에 재실(齋室)이 남아 있었는데 1997년 6월 원인모를 화재로 소실되었다.
사진 4-41 명안공주 묘역. 명안공주는 조선왕조 18대 임금인 현종의 셋째딸이자 숙종의 누이동생이다.
1) 묘역 묘역은 능선을 따라 높은 곳에서부터 명안공주의 시어머니인 상주 황씨의 묘가 맨 위에 자리잡고 있고 그 아래에 명안공주와 그 남편인 해창위 오태주의 묘가 하나의 봉분으로 합장되어 있다. 이 두 단계의 묘는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아래편에 오태주와 명안공주의 양자인 오원의 묘가 있다.
① 정경부인 상주(尙州) 황씨 묘 ▷ 묘역의 구조 묘역의 크기는 봉분의 직경이 805cm이고 높이가 157cm이다. 전면에 상석과 묘갈이 있고 좌우에 한 쌍의 망주석이 있다. ▷ 묘갈 묘갈은 “판서증 영의정충절공배정경부인상주황씨지묘”라고 예서로 상단에 가로로 돌아가며 새기고 비의 사면에 행서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회백색 화강석인데 돌이 치밀하고 고르다. 그래서 비의 현재 상태가 매우 좋다. 특히 비는 사각대 위에 있는데 비의 개석이 대단히 정교하게 한옥 지붕을 묘사하여 만들었다. 비개석은 평면이 정방형을 이루고 지붕의 전체 모습은 사각지붕인데 팔각지붕처럼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에 용을 배치하고 지붕의 꼭대기에는 연화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두었다. 처마는 다포식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 구조를 세밀히 묘사하고 있어 목재 건축미를 나타내려 하였다. 대단히 아름다운 비개석으로 조선 중기 석조 조각의 수준을 보여 주는 것이다. 비신은 사면의 폭이 거의 같은데 글은 사위인 이조정랑 최창대가 지었고, 글씨는 당시에 글씨로 이름이 있었던 아들 오태주가 썼다.
② 조선국 명안공주 묘 및 해창위 오태주 묘
부부합장묘로 봉분의 직경이 800cm이고 높이는 155cm이다. 묘의 아랫단에 상석과의 사이에 1단의 지대석을 심어 두었다. 묘를 향하여 우측에 묘비가 있고 좌측에는 숙종이 지은 제문비가 있다. 중심에는 상석이 네 귀에 북 모양의 받침을 하고 놓여 있고 그 전면에는 사각의 장명등이 있다. 장명등과 비슷한 위치에 묘의 양측으로 문인석이 하나씩 서 있다.
▷ 묘비 전면에 “朝鮮國王女明安公主之墓 崇祿大夫海昌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吳公泰周道長之墓”라고 굵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는 사각인데 사면에 해태를 조각하고 있고 전면과 후면에는 해태 두 마리가 대칭으로 마주보고 있으며 측면에는 한 마리를 조각하였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가면서 인동초로 장식하였다. 비개석은 사각 맞배지붕 모양을 하고 있는데 별다른 장식 없이 지붕 모양만 만들었다.
▷ 숙종어제제문비 숙종이 명안공주의 죽음을 슬퍼하여 지은 제문과 오태주가 죽었을 때 지은 제문을 새긴 비석으로 크기가 110×49×19cm이며 기대석은 88×57×30cm이다. 비석은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원두로 개석이 없는데 방석기단 위에 있다. 대리석이어서 마모가 심하여 일부의 글씨는 읽을 수가 없는데 그 내용은 대략 명안공주가 명성왕후의 셋째로 뒤의 두 누이들이 모두 일찍 죽었는데 또한 일찍 죽어서 슬프다는 내용이며 누이에 대한 그리움을 적은 것이다. 오태주의 제문에도 그의 재주를 기리고 일찍 죽었음을 아쉬워하는 내용이다. 상세한 내용은 강릉박물관 소장의 어제문에서 볼 수 있다.
▷ 석인 석인은 대단히 잘 남아 있는데 큰 편이며 몸통 전면을 균형 있게 다듬었다. 자연미는 없지만 표정이나 의습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③ 오원묘
▷ 묘역의 구조 제일 아랫단에 있는 묘로 양쪽에 망주석이 있고 향좌 측에 비석이 있다. 전면 중앙에 상석과 향로석이 있다. 봉분의 규묘는 직경이 860cm이고 높이가 110cm이다. 이 묘의 아래쪽은 경사가 급하게 떨어지면서 연못 있는 지점으로 연결되어 있다. ▷ 묘갈 오석에 해서로 새겼는데 남유용(南有容)이 지었고 아들인 재소(載紹)가 예서와 해서로 썼다. 비의 개석은 팔작지붕 모양으로 다듬었으며 사각 대석 위에 서 있다. 비는 승정원 개원 후 3을축에 세웠다고 되어 있다.
2) 묘막 겸 제실 제실은 묘를 향하여 좌측편 연못에서 동북쪽으로 약 5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는데, 본채는 곡자집으로 전면은 마루 2칸을 포함하여 전면 4칸, 측면 2칸이며 동편에는 부엌이 있다. 그리고 일자로 지은 대문채가 있는데 3칸으로 되어 있다. 대문간이나 본채는 화강석 장대석으로 단을 만들었고 주초도 화강석으로 다듬어 만들었다. 재목의 상태로 보아 일부는 당시에 재건한 것으로 보이는데, 왕가의 공주의 묘막으로 지었던 것인 만큼 격식을 갖춘 가옥으로서 18세기 상류가옥의 건축양식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제실에는 공주와 관련된 간찰·서화·생활용품 등 다량의 유물이 보관되었으나 1979년 훼손·산실되었는데, 이 중 일부가 강릉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45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공주의 묘막 건물은 이러한 유물과 함께 당시의 궁중생활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것이지만 1997년 6월 관리 소홀로 화재를 입었다.7)
3) 제실 소장 유물 현재 45점이 보물 122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명안공주의 아버지인 현종의 어필들이 포함되어 있고 그 외에 숙종의 어필 및 그림과 의복 및 생활도구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현종·명성왕후·숙종·명안공주 사이에 오간 편지는 당시의 왕족과 상류가족 간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며, 당시 한글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용품들은 그 연유가 분명한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조선 중기 누대를 거친 생활용구라는 점에서 당시 생활상의 이해나 변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8)
(12) 목련경(目蓮經) 및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지형(紙型) 화림선원(華林禪院)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 절의 고명인 약수암의 주지였던 진호(震湖) 스님이 소화(昭和) 11년, 즉 1936년 찍었던 활판용 지형으로 본문이 4면 27매, 표지용 지형이 3매가 포함되어 있다. 당시 성북구 성북동 183-37에 있던 법륜사(法輪社)에서 제작하였고 판매는 정가 75전으로 만상회(卍商會)에서 담당하였다. 지형은 각 매가 37.8cm, 27.4cm 크기로 각 매 4쪽의 내용을 담고 있다. 마지막 장은 40.0cm×20.4cm로 정조대왕의 옥쇄를 영인하여 놓았다. 이것은 「부모은중경」과 「목련경」이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복간한 것이기 때문에 넣은 것으로 보인다.
(13) 선학사(禪學史) 지형(紙型) 화림선원에 보관되어 있는 도서 인쇄용 활판 지형이다. 총 10면 16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의 크기는 50cm×32cm이며 각 장에 10쪽의 분량이 들어 있다. 한자와 한글의 혼용체이며 한문이 압도적으로 많다. 안동상로강술(安東相老構述)로 되어 있으며 인도·중국, 그리고 조선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선종이 성립되는 과정을 논한 책이다.
(14) 용만가회사마동방록(龍彎佳會司馬同榜錄) ▷ 위치 진주 유씨(柳氏) 차종가(次宗家) 유문형가(柳文馨家) 소장. ▷ 구조 전체 5쪽의 첩으로 첫장은 압록강변 의주(義州) 청심당(淸心堂)의 전경과 연회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 계회도이고, 제2쪽은 다섯 동기생들이 연배에 따라 순차적으로 관직명·자(字)·호(號)·생년·관향, 그리고 을축년 사마시를 거친 이후 등과한 연기(年紀)가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에는 이들이 모였음을 기리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고, 그 말미에는 만력(萬曆) 임인(壬寅;1602년) 5월 12일이라고 기록해 확실한 제작 연대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화첩을 보관한 유해엽(柳海曄;1910~1996년)이 기록한 발문이 들어 있다. 중앙에 청심당에 앉아 연회를 즐기는 5인의 선비를 우측에 4인, 좌측에 1인을 그렸고 당의 중앙에는 춤추는 기녀를, 당의 앞으로는 연회 참가자를 그렸다. 그리고 주위의 풍경으로 강 너머 중국의 원산을 희미하게 그렸다. 원근법 없이 사물을 대소로 표시하였고 당의 측벽이나 측면 담장의 경우는 평면으로 표시하였다. 길이 33.7cm, 폭 28.5cm으로 진채(眞彩)로 그렸다. ▷ 역사 및 유래 이 화첩은 선조 35년(160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평안북도 의주 지방에 있는 용만(龍彎)의 청심당에서 선조 22년 기축사마시(己丑司馬試)에 합격한 동기생들인 당시 용천군수 유시회(柳時會), 어사 홍경신(洪慶臣), 의주부 판관 홍유의(洪有義), 서장관 윤안국(尹安國), 평안도 도사 이호의(李好義) 등이 자신들의 모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5개의 동일한 화첩 중의 하나이다. 이 화첩은 안산 부곡동의 유시회의 문중에 전해 오는 것으로 동일본이 2부가 있다. 아마도 당시 5부를 만들어 각각 하나씩 지녔으나 무슨 연유인지 한 사람이 두 본을 가지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다섯 사람 중에 윤안국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 도중에 배가 뒤집혀 순직하였고, 이호의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왕조실록의 중간을 위하여 기주관(記註官)을 하였던 인물이다.
사진 4-42 용만가회사마동방록. 유문형가에서 소유하고 있는 화첩으로, 1602년(선조 35년)에 제작되었다.
▷ 특기 사항 모두 다섯 본이었을 화첩 중 현존하는 것은 유문형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이 유일본으로 이 화첩의 끝 부분에는 용천군수 유시회의 8세손 유원성(柳遠聲)의 발문이 추가되어 있다.
(15) 고행록(苦行錄) 2점(點)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가.
1) 한산 이씨 고행록
진주 유씨 제18세손 유명천(柳命天;1633~1705년)의 삼취 정경부인 한산 이씨(1659~1727년)의 한글 수필본이다. 내용은 이씨 부인이 시집온 1676년부터 별세한 1727년까지 50여 년간 남편인 유명천의 여러 차례의 유배생활과 겹치는 집안의 우환으로 인한 생활의 괴로움을 유려한 궁체로 기록한 수필이다. 한산 이씨의 아버지는 수빈(壽賓), 조부는 진사인 부(阜), 증조부는 판서를 지낸 경전(慶全), 고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산해(山海)이다.
남편 퇴당(退堂) 유명천은 167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1675년 이조좌랑, 1678년에 부제학·대사성 등을 지내고 1680년 이조참판 재임 중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몰락하자 충북 음성에 유배되었으나 1683년에 풀려나 1688년에 강계부사를 지냈다. 그는 남론으로 뛰어나 남인의 중심 역할을 하였고, 특히 탁남(濁南)으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공조판서·예조판서를 지냈으나 1694년에 갑술옥사로 다시 파직되어 그의 아우인 이조판서 정재(靜齋) 유명현(柳命賢)과 함께 각각 강진과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699년에 방귀된 지 2년 후 1701년에 다시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3년 후(1704년)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우인 유명현은 결국 유배지인 남해도에서 별세하였다. 이 고행록은 현재 두루마리로 되어 있는데 유려한 문체로 조선 중기 수필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을 만하며, 또한 한글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세로 34cm, 길이 557cm이다.
2) 한산 이씨 고행록 안동 권씨 필사본
이 고행록은 한산 이씨의 8대손이던 화은(華隱) 유해엽(柳海曄;1910~1996년)의 부인 안동 권씨 태임(1908~1967년)이 18세 되던 해인 1926년에 이씨 부인의 고행록을 그의 시할아버지인 모산(帽山) 유원성(柳遠聲)이 다시 구술하는 것을 받아 적어 남긴 것이다. 원전인 한산 이씨본과 약 2백 년의 차이가 나는데, 한글의 변천 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 특기 사항 본 고행록은 17세기 조선 시대의 풍속과 사대부의 생활상을 밝히는 민속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수필문학을 연구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더욱이 2백 년 전후의 어휘 변화, 철자 변화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어 1996년 교육학술진흥기금에 의한 연구 프로젝트로 선정되어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김영배 교수 외 5인의 학자가 3년여에 걸쳐 연구한 결과가 출판사 태학사(太學社)에 의하여 출간될 예정으로 있다.
(16) 박창규(朴昌珪) 낙화산수 8곡병풍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 씨 소장. ▷ 구조 8폭 병풍으로 각 장의 그림 크기는 70.0cm×37.4cm이다
사진 4-43 박창규 낙화산수 8곡병풍. 부곡동 유문형 씨의 소장품으로, 조선 중기의 산수 경향을 잘 나타내었다
▷ 역사 및 유래 장지를 인두로 지져 산수를 그렸는데 그림은 박창규(1783~?)가 그리고 화제는 어시자(於是子)와 기제(杞薺)라는 사람이 붙였다. 각 장의 내용은 오른편부터 산수-누각산수-한가산수-우중조어-누각산수-누각산수-도선도-기로노인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풍은 조선 중기의 산수 경향을 그대로 나타낸 것으로, 지극히 정교하고 붓으로 그린 것보다도 더 생동감이 넘친다. 각 장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적은 글들이 낙서로 남아 있다. 박창규는 정조 7년(1783년)에 태어났으나 죽은 해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함양인으로 자는 성민(聖玟), 호는 수산(遂山), 그리고 화화도인(火畵道人)이라고 하였으며 낙화로 당시의 제일이라 하였다.9)
(17) 사군자 8곡병풍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 씨 소장.
사진 4-44 사군자 8곡병풍. 유문형 씨의 소장품으로 매화ㆍ난초ㆍ국화ㆍ소나무가 수묵으로 그려져 있다.
▷ 구조 각 장의 길이 53.5cm, 폭 32.8cm이며 견본에 수묵으로 그린 8곡병풍이다.
▷ 역사 및 유래 병풍에는 표암 강세황의 작품으로 되어 있지만 화풍이 표암의 것과는 거리가 있고 그 시대가 더 오래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작품이다. 병풍의 표암 운운 제목은 소장해 온 유씨 집안에서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매화 1폭, 난초 2폭, 국화 2폭, 소나무 1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원래 병풍이 아니라 낱장으로 전해 오던 것을 근래에 표구하였다 하므로 원래 10곡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암벽의 처리나 냇물을 그리는 기법에서 조선 중기 이전의 화풍이 남아있는 작품들로서 한 사람의 솜씨로 여겨진다.
(18) 개천군 전도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 씨 소장. ▷ 구조 길이 114.5cm, 각 장의 폭 35.7cm로서 비단에 갈필 수묵이다.
사진 4-45 개천군 전도 병풍. 유문형씨의 소장품으로, 모산 유원상이 개천군수로 있을 때 제작한 것이다.
▷ 역사 및 유래 모산 유원성이 개천군수로 있을 때 제작토록 한 지도로 청해후인(淸海後人) 이재하(李在夏)가 그렸다. 첫 번째 폭에는 ‘조양군지지주록’이라는 제하에 이 지도를 그린 연유를 적었고, 나머지 7폭에는 개천군의 전경을 연결하여 그렸다. 상부에 청천강을 배치하고 중앙에 개천군을 두었으며 중심에 개천군의 나루인 관진을, 그리고 개천군의 중심에 조양관을 두고 마을을 포진시켰다. 산이나 집은 간략히 세필로 표현하였지만 상대적인 위치는 정확히 표현하였고 길은 붉은 주선으로 표시하였다. 당시의 개천 지방을 살펴볼 수 있는 지도로서 매우 중요하며, 당시의 마을생활이나 개천의 교통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 민속자료라고 할 수 있다. 광무 11년(1906년) 작이다.
(19) 목판일괄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 씨 소장. ▷ 규격
죽매문 목판:14.1×5.4cm
매난국죽 백초향목판:18.7×7.4cm
초문 목판:23.3×7.7cm
파초문목판:25.5×12.6cm. 사변에 초문으로 테를 둘렀다.
죽문:23.5×13.3cm. 여친구우 문한제(如親舊雨 文漢薺)명. 세로줄 속에 3가지의 대나무를 각하였다.
부적판:39.3×20.3cm
괘지목판:36.8×20.3cm
책보목판:23.5×13.3cm. 뇌문이 주위에 있고 중심은 사선문을 교대로 배열하였다.
능화문책보판
(20) 소나무궤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 씨 소장. ▷ 구조 소나무 판목 궤짝으로 크기가 작아 돈궤 혹은 잡동사니 궤로 추측된다. 위로 열리는 뚜껑은 상면의 절반을 덮게 되는데 꽃 모양으로 오린 무쇠 장식이 붙어 있다. 폭이 46.8cm, 너비 29.0cm, 높이 31.2cm이다.
(21) 연상(硯床)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 씨 소장. ▷ 규격 돌배나무로 만든 것으로 폭 41.0cm, 너비 23.8cm, 높이 31cm이다. ▷ 유래 모산 유원성 이전부터 사용하던 것이라고 전하므로 족히 1백 년 이상은 된 것으로 추측된다. 다리는 개다리를 뒤집은 방향으로 만들었고 상면은 연상, 그리고 그 아래에는 작은 서랍이 붙어 있는데 반달 모양의 백동 손잡이를 만들어 붙였다.
(22) 부계서화첩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 씨 소장. ▷ 규격 전책이 30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크기는 22.5cm×15.5cm이다. 화문전지를 사용하였다. ▷ 역사 및 유래 모산공 유원성이 서문과 그림을 넣고 그림에 대한 제(題)는 조카인 유혁수가 붙였다. 모산공이 자신이 살고 있던 지역의 8명승을 담채로 그렸으며 말미에는 부계도를 시점을 달리하여 그렸다. 이 그림은 유씨 일가가 안산에 자리잡게 된 가장 먼 조상의 묘가 있는 시랑동의 그림 등 유씨 집안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지점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서화첩 말미에는 허헌의 글이 붙어 있다.
8편의 그림에는 화제가 붙어 있지는 않지만 첫 번째 그림은 화모봉(華帽峰)인데 자신의 호가 이 산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두 번째는 진천(眞川)·지로평(芝老坪)·만수동(萬樹洞)·망해암(望海岩)·부계일산정(釜溪一傘亭)·병암일휴정(屛岩一休亭)·응암(鷹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의 그림이 단아하고 섬세하며 각 풍경의 특성을 문기 있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중요한 여러 지명을 기입해 넣었다.
(23) 경성당 ‘선대교승서간첩’ 간찰첩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 씨 소장. ▷ 규격 책자의 크기는 길이 41.8cm, 폭이 28.5cm이다. ▷ 유래 진주 유씨 문중에서 누대에 걸쳐 교류하였던 간찰 모음 책자로 총 20매가 들어 있다. 이 중에는 안정복·강세황·이후원·구운·정유악·강세구·권유·이서우·오시복·심완·이담명·이태화·홍중정·홍수보·박도상·강인·김상정·홍준·홍의호·강노 등의 간찰이 포함되어 있다.
(24) 모산공 교승서간첩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 씨 소장. ▷ 규격 책자의 길이 40.0cm, 폭은 31.9cm이다 ▷ 역사 및 유래 모산공 유원성이 받았던 간찰을 모은 것으로 이 속에는 김사준·박기양·주석면·김가진·이하영·성기운·이경하·이기동·강경희·정문섭·민영선·함태영·조종필·이수면·정현석·박제순·박의양 등 여러 인사의 간찰이 총 23매 포함되어 있다.
(25) 쌍계사(雙溪寺) 현왕탱화(現王幀畵) 1803년에 제작된 탱화로 대부동의 쌍계사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 도성암(道成庵) 노전(爐殿)에서 조성된 불화이나 언제 어떠한 연유로 이곳 쌍계사에 모셔졌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람은 죽어 목숨이 끊어지면 몸 속의 영혼은 중천을 떠돌다가 삼일째 되는 날에 현왕여래(現王如來)가 주재하는 심판에 따라 영원히 거처할 곳을 결정받게 된다. 즉 죽은 자의 영혼은 저승사자의 안내로 현왕여래 앞에 이르러 살아 생전에 쌓은 업보(業報)에 따라 극락으로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고 한다. 현왕여래(現王如來)란 명계(冥界)의 염라대왕과 같은 성격의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현왕탱화이다.
병풍을 둘러친 도상의 중앙에 홀(笏)을 들고 붉은 도포를 입은 현왕여래가 호피를 깔아 놓은 의자에 경책을 이용한 관을 쓰고 정좌해 있는데, 그 형상이 괴이하고 위엄 서린 얼굴의 긴 수염이 위협적이다.
현왕 좌우 상단에는 파초선과 일산을 든 동자가, 아래쪽 좌우 보처에는 대륜성왕(大輪聖王)과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묘사되어 있으며, 맨 왼쪽에는 판관(判官)과 녹사(錄事)가 죄의 기록이 담긴 두루마리와 장책을 들고 있다. 그리고 나뭇결이 아름다운 책상 위에는 문방사우를 비롯해 결재에 쓰이는 어피 인궤함이 놓여 있다. 혼령을 심판하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이 탱화는 안정된 구도에 채색이나 필선이 매우 세련된 불화이다.
조선 후기에 성행하였던 현왕탱화로서 현존하는 것 중에서는 경북 수다사(水多寺;1782년)의 현왕탱화가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 상주 남장사(1788년), 금릉 금용사(1803년), 서울 봉은사(1844년), 양주 불암사(1846년) 등의 현왕탱화가 유명하다.대부동 쌍계사의 현왕탱화는 경기도 지역에서는 시대가 가장 올라가는 불화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이 탱화의 하단에는 다음의 명문이 담겨 있다.
(26) 쌍계사 신중탱화(神衆幀畵) 1803년에 제작된 것으로 크기는 세로 136cm, 가로 104cm이다. 신중탱화는 불교의 호법신(護法神)으로 사찰 도량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선신으로 법당의 좌우벽이나 요사채의 신중단에 모셔지는 불화의 일종이다. 신중탱화에 등장되는 호법신들은 중국이나 우리 나라의 재래의 토속신들이 많이 등장되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재래 토속신앙이 불교의 전래 과정에서 불교에 습합되어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중탱화는 그 어떠한 탱화보다도 고유의 특성을 지닌 민족의 여러 신앙 형태를 포용하고 있다.
화엄신중신앙을 근간으로 형성된 신중탱화는 가경(嘉慶) 8년(1803년)에 도성암(道成庵) 노전(爐殿)에서 조성되었는데 이 그림은 금어(金魚) 유선(宥善) 스님에 의해 그려졌다. 불화를 그리는 스님을 금어(金魚) 또는 화사(畵師)·화원(畵員)·양공(良工) 등으로 부른다.
사진 4-46 쌍계사 신중탱화. 불교의 호법신으로 법당의 좌 우벽이나 요사채의 신중단에 모셔진다.
사진 4-47 대부동 쌍계사.
도성암에 봉안되어 있던 불화가 언제 어떤 연유에서 이곳에 옮겨 모셔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작 장소·시기·크기, 사찰의 여건 등에 따라 명문과 관계없이 이동·봉안되는 경우가 많다. 원래 신중탱화에 등장하는 신(神)들은 39위(位)였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불교가 차츰 민간신앙과 강하게 결합되면서 104위까지 늘어나는 경향이 나타났다.
단순하게 상·하 2단구도로 구성되어 있는 쌍계사 신중탱화는 위쪽 머리에 화관을 쓴 제석천왕(帝釋天王)·대범천왕(大梵天王)과 의관 위에 경책이 있는 일궁천자(日宮天子)·월궁천자(月宮天子)가 있으며, 또한 아래쪽 투구에 무장을 하고 두 손을 합장한 동진보살(童眞菩薩)·용신(龍神)·호계대신(護戒大神)·산신(山神) 등이 버티고 서 있다. 상단과 하단 중간은 구름으로 분리하였고, 천동(天童)·천녀(天女) 두 쌍이 좌우에서 유자·석류 등의 과일 그릇을 받쳐들고 공양을 올리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일반적인 신중탱화에 비하여 핵심적이며 대표적인 신상만을 나열한 아주 간략한 내용의 신상도이나 신중단으로서의 역할이나 그림의 짜임새·채색·필선 등이 완벽한 수준급의 고급 탱화이다. 머리 부분의 녹색 두광이 있는 동진보살과 제석·법천·일월궁천자는 천상세계의 명계중(冥界衆)을 나타내고, 용신·산신·호법신은 지상의 사바세계를 담당하는 신중들이다.
얼굴에 용의 수염이 있고 머리에는 여의주, 손에는 용의 뿔을 쥐고 있는 의인화된 용신과 백발의 긴 수염에 투명한 두건을 쓰고 용의 형상인 긴 지팡이를 짚은 산신은 어깨 부분과 허리 부분에 나뭇잎을 장식하였다. 특히 산신은 단군의 초상화나 산신탱화에서 흔히 보이는 위엄이 서려 있고, 점잖은 얼굴로 신단수 잎을 몸에 두르고 있어 신령스러움과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장군 복장에 키보다 더 큰 칼을 들고 검은 얼굴을 한 호법신장과 관복 차림에 홀을 들고 머리에 경책관을 쓴 천자 등은 민간신앙 계통의 신상들이다. 한편 신선의 선계에서나 있을 법한 천진무구한 동자들의 영특하고 귀여운 얼굴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평화롭고 불심 충만하게 한다. 특히 두 동자의 얼굴을 겹쳐 그린 다정한 모습은 이 불화를 그린 스님의 심성이 동심에 깃들어 있어 조화롭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된 느낌이다.
(27) 쌍계사 아미타후불탱화(阿彌陀後佛幀畵) 제작 연대는 미상이지만 쌍계사에서는 약 2백여 년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불화는 용주사 주지로 있었던 어느 스님이 화성의 어떤 절에서 이곳으로 가져 온 것이라고 한다.
아미타 신앙은 아미타불을 지극정성으로 염불 독송하면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우리 나라 정토신앙의 근본 경전을 주제로 한 불교의 주된 한 신앙이다. 아미타불과 극락정토의 장엄을 설하는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는 ① 극락세계의 아름다운 모습과 삼악도(三惡道)가 없음을 설하고, ② 부처님의 광명과 수명의 무량함과 그곳에 있는 사람은 죽음이 없으며, ③ 만약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듣고 1~7일 동안 일심으로 염불하면 임종할 때에 아미타불의 영접을 받아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음을 설하고 있다.
이미 신라 시대에 활발했던 아미타 신앙은 고려 시대에도 크게 성행하였고, 조선 시대 후기 새로운 불교 중흥기를 맞아 사원의 중심 신앙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하여 사찰의 무량수전(無量壽殿)·미타전(彌陀殿)·극락본전(極樂本殿) 등의 주존불은 반드시 아미타불을 모시는 도량이었다. 쌍계사의 주법당인 극락보전에도 목조아미타불상이 모셔져 있고 불상의 뒤편에는 아미타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는데, 근간에 중건한 협소해진 현재의 법당에 비하여 아미타후불탱화가 크고 여러 차례 중창 불사를 거치는 동안 약간의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다행히 현재는 새로 온 주지스님에 의하여 더는 파손될 염려가 없을 만큼 깨끗하게 표구가 되어 요사채 큰 방의 안전한 곳에 모셔져 있다. 대형 탱화를 무리하게 적은 법당에 모심으로써 불화의 하단부가 파손되어 명문이 완전 손실되어 아쉬운 점이 있지만 조선 시대 후불탱화 중 뛰어난 작품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아미타후불탱화는 아미타여래가 서방정토에서 무량한 설법을 하고 있는 광경을 도설화한 아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를 말한다. 아미타극락회상도는 그림 중앙의 연화대좌 위에 가부좌한 좌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사천왕, 4보살, 십대제자와 성문중들이 엄격한 좌우 대칭 구도로 도설되어 있는데, 큼직한 키의 신광과 두광을 갖춘 아미타불의 우측에 관세음보살·문수보살·금강장보살·미륵보살·가섭존자를 포함한 5대제자, 북방천왕·도장애보살·지장보살·아난존자를 포함한 5대 제자, 서방천왕·남방천왕 등이 아미타불을 원형으로 둘러서 있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두광이 표현된 8대보살을 포함한 아미타 9존도 이러한 형식에 속하는 그림이다. 법문을 경청하는 자세로 중앙의 아미타불을 향하여 반쯤 몸을 돌려서 모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있다. 머리에 화불이 새겨진 백의관음보살과 연꽃을 받쳐든 대세지보살 사이에는 대체로 법을 청하는 청법 자세의 사리불존자가 있었으리라 생각되지만 결손된 부분의 내용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유난히 크게 그려진 주존불은 역삼각형의 광배, 정면을 향한 다부진 얼굴, 파도 문양처럼 보이는 검은 두발, 높은 육계에서 좌우로 흐르는 듯 피어오른 서기(瑞氣), 상단 중앙의 반쯤 보이는 연화문 등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 시대 후불탱화 중 시대적으로 앞선 전형적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화면 상단 공간에 늘어진 비단의 치장과 적색·녹색·군청색의 주조색 바탕에 화사하면서도 차분한 색채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특히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세필의 인물 묘사와 안정된 화면은 매우 뛰어난 수작의 불화임을 말해 준다.
이러한 유형의 탱화는 청주 보살사 영산회상탱화(1649년), 구례 화엄사 영산회상괘불도(1653년), 하동 쌍계사의 아미타극락회상도(1687년),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장곡사 아미타극락회상도(1708년), 통도사 극락전 아미타후불탱화(1740년) 등에서 나타나는 17세기 말이나 18세기 초에 유행하던 조선 후기 불화의 성숙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쌍계사의 아미타후불탱화는 특히 충청 이북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뛰어난 문화재급 유물로서 마땅히 수정·보안 처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28) 쌍계사 지장탱화(地藏幀畵) 이 지장탱화의 제작 연대는 1919년이고 크기는 세로 142.5cm, 가로 196.5cm인데, 현왕탱화(現王幀畵)와 더불어 원래는 명부전에 봉안되지만 소규모의 사찰에서는 큰 법당의 좌우측에 함께 모셔진다. 지장보살은 4세기경부터 인도에서 처음 숭배되기 시작했으며, 중국·한국·일본 등지에서는 인간의 사후세계를 담당하는 명부신앙의 대상으로 널리 숭배되어 왔다. 지장보살은 억압받는 자, 죽어가는 자, 나뿐 꿈에 시달리는 자 등을 구원하는 보살로서, 지옥으로 떨어져 무서운 벌을 받게 되는 모든 사자의 영혼을 다 구제할 때까지 자신의 임무를 쉬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구제만을 담당하는 보살이다.
사진 4-48 쌍계사 지장탱화. 지장보살은 인간의 사후세계를 담당 하는 명부신앙의 대상이다.
쌍계사의 지장탱화는 지장보살을 가장 가운데 두고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그렸고, 염라대왕을 포함한 10대왕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녹사·판관·동자 등이 표현되어 있다. 즉 시왕과 판관·사자·현왕 등 명부계의 모든 탱화 내용을 한자리에 함축시킨 탱화로 볼 수 있다. 이 지장탱화의 명문에는 이추담 스님의 시주로 아미타불 1위, 관세음보살 1위, 중단탱화 1축을 그렸다고 되어 있는데, 이 시기에 큰 불사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大正 七年(1919년) 戊午 陰 四月 十四日 神供 五月 ○ 日點眼奉安于大金山雙溪寺 蓮花所秩 證明比丘 田兩運 持殿比丘 李○○ 誦呪比丘 曺月峰 供司信女 李廣川 主持兼化主比丘 李秋潭 阿彌陀佛 一位 觀世音菩薩 一位 中壇幀畵 一軸 大施主秩 京畿道 富川郡 大阜面堂前洞 居住 乾命庚申生 鉉源 坤命丙申年 李氏 坤命丙戌年 崔氏 女息壬子生 阿只 次女乙卯生 阿只 三女乙卯生 阿只
(29) 쌍계사 독성탱화(獨聖幀畵) 제작 연대는 19세기로 알려져 있고 크기는 세로 99cm, 가로 53.5cm이다. 독성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고 석가모니불의 수기를 받아 남인도의 천태산(天台山)에 머무르다 말세 중생의 복덕을 위하여 출현하였다고 한다. 깊은 산속 계곡 속에 홀로 앉아 있는 괴팍스럽고 고집스런 얼굴로 표현되었지만 중생들의 간절한 기도를 잘 받아 주며, 특별히 복을 희구하는 신도들의 경배 대상이다. 춤추는 듯 서 있는 소나무 아래 보름달처럼 둥근 후광이 있고, 한 손에는 염주를 들고 한 손으로는 긴 눈썹을 추스리고 있다. 독성탱화는 수독성탱(修獨聖幀)·나반존자(那畔尊者)라고도 부르는데 16나한과 같은 구도법이다. 쌍계사 극락보전에 모셔진 독성탱화는 명문이 없지만 1945년 해방 전후 시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약간은 탁한 채색이며 무거운 필선으로 표현되었다.
(30) 쌍계사 산신탱화(山神幀畵) 제작 연대는 19세기로 추정되며 크기는 세로 99cm, 가로 53.5cm이다. 오래 전부터 전해 오던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신앙 가운데 하나인 산신신앙은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불교에 습합되어 호법신으로 포용되었다. 특히 조선 시대에 성행하였던 불가의 도량 수호신을 담당하는 신중탱화(神衆幀畵)의 하단에 등장하는 만덕고승성개한적주산신(萬德高勝性皆閑寂主山神)으로 자리를 잡았다. 신중탱화 속의 산신은 17~18세기 불교가 대중화되는 새로운 혁신 과정에서 한 단계 성장하여 독립된 신앙 체계를 갖추게 되자 사찰 안에 따로 산신각을 짓고 산신탱화나 산신상을 봉안하게 되었다. 근래 전국의 사찰 내에는 산신을 모시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은 민간신앙이다.
산신령의 역할은 가람의 수호는 물론 중생들의 길흉화복·수명장수·재복·자식점지 등의 소원을 잘 들어 주는 기복신앙의 표상물이다. 사찰의 산신각·칠성각·독성각 등에 산신·독성·칠성이 한 장소에 함께 모셔지는데, 모두 종래의 불교 속에 등장하는 예배의 대상과는 달라 건물명에 전(殿)을 사용하지 않고 각(閣)을 사용한다. 두루마리 형태인 종이 바탕에 채색으로 그려진 쌍계사의 산신탱화는 명문이 없어 제작 시기나 작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산신은 근엄하고 인자한 얼굴에 눈썹까지 흰 수염이 난 백발노인으로, 머리에는 청색 두건이 돌려 있고 적색 도포를 입은 채 청태 낀 괴석 위에 정좌해 있는데, 한 손에는 부채를 든 자세로 불로초를 들고 있고 또 한 손으로는 호랑이의 머리를 정답게 쓰다듬고 있다. 잘 길들여진 귀여운 고양이처럼 산신 곁에 웅크리고 앉은 줄무늬의 참호랑이는 유난히 큰 꼬리를 멋들어지게 휘감고 있다. 오색 구름 사이로 휘늘어진 소나무 가지들이 더불어 있어 깊은 산속의 신령스런 신선을 연상케 한다. 산신의 형태는 선비형·도사형·무관형·불상형 등으로 구분되는데, 쌍계사의 산신도는 도사형으로 경기도 일원에서 많이 보이는 유형이다.
사진 4-49 쌍계사 산신탱화. 원래는 민속신앙이지만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산신각을 짓고 봉안하게 되었다.
(31) 고잔동(古棧洞) 태봉(胎封)
▷ 위치 안산시 고잔동 산 18번지.
▷ 구조 태함(胎函)은 도굴된 상태이고 일부는 매몰되어 있는데 약 1.32×0.6m 정도 겉으로 드러나 있다. 비좌(碑座)는 93×57×50cm이다.
▷ 역사 및 유래 태실(胎室)은 일반적으로 태봉(胎封)·태봉(胎峯)·태묘(胎墓) 등으로 불리는데 산모가 태아를 출산하고 난 후에 나오는 태반을 묻는 장소를 말한다. 옛날사람들은 태의 처리가 다음 아이의 출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부정을 타는 것을 꺼려하여 액(厄)이 없는 방향에서 태우거나 매장하였다. 태실은 대개 산이나 구릉상의 가장 높은 지점에 토광을 파고 석함을 넣은 뒤 그 안에 태를 넣은 태항아리를 천으로 싸서 석함 속에 넣고 둥근 돌뚜껑을 덮어 묻은 후 그 옆에 태지석비를 세웠다.
태실을 만드는 것은 대개 왕실의 왕자나 공주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사대부가에서도 태실을 만들기도 하나 대부분의 경우는 태를 태우거나 물에 띄우거나 혹은 땅속에 그냥 묻어 버렸다. 고려 시대 왕자의 태를 묻은 곳이라 하여 태봉이라 전해 오는 곳으로 현재 태를 묻었던 흔적과 비를 세웠던 밑부분만 남아 있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산봉에 태를 담아 매장하였던 솥과 같이 생긴 석조물이 있었는데 이 비가 세워지면서부터 이곳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월피동 부녀자들이 바람이 나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어, 1940년경 이곳 주민들이 비의 윗부분을 산 아래로 굴려 버려 논바닥에 묻혀 있게 되었다고 한다.
사진 4-50 태봉(태실). 고자동 산 18번지에 있으며, 태아를 출산한후에 태반을 묻는 곳을 말한다. ▷ 특기 사항 태봉에서 나온 석함은 현재 안산시 청소년복지회관 뒤뜰에 보관되어 있다.
(32) 진주 유씨 종가:청문당(淸聞堂) 안산에서 가장 오래 된 전통가옥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진주 유씨 16세손인 유시회(柳時會;1562~1635년)가 지었다고 하는데, 유시회는 선조의 부마가 된 어린 조카 적(Z)과 함께 선조가 내린 사패지인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 집은 ㄱ자의 안채와 ㄱ자의 행랑채가 마주 보고 있으며, 현재는 후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일자형의 바깥채가 중앙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10)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이 집 뒤편에 유씨의 사당이 남아 있고 그 옆에 안산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큰 모과나무가 서 있는데 이 모과나무는 이 집이 오래 된 집임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집의 내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이 집 남서편으로 약 30m 떨어진 지점에 있는 네모진 연못이다. 이 연못은 석축을 쌓아 만들었는데 사방이 각각 14~15m 정도 되며 입수구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으나 출수구는 서남쪽 모서리에 있다. 이 연못은 유씨 집안에 전해 오는 화첩에도 보이는 것으로서 당시의 양반사회의 주거문화와 정원문화를 보여 주는 대단히 중요한 문화재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북 모서리에 서 있는 은행나무 또한 안산시 보호수이며 주위로 향나무들이 둘러서 있다.
(33) 경성당(竟成堂) 경성당 당호는 당초 진주 유씨 18세손 유명천(柳命天)·유명현(柳命賢) 형제가 공부하던 서실로 정재골에 있었으나 그후 유원성(柳遠聲)이 차명한 당호로서, 진주 유씨 21세손인 유신(1748~90년)의 아들인 중서(重序;1779~1846년)가 둘째아들인 방(1823~87년)이 살림을 날 때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현재 안채와 누마루가 있는 사랑채로 되어 있다.11) 현재의 안채는 13년 전에 서울의 한옥을 이건한 것이지만 사랑채는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경성당은 청문당만큼 오래 된 한옥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 또한 18~19세기의 안산 지역 양반사회의 주거 양식을 보여 주는 문화재 자료로서 청문당과 함께 중요한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2. 능묘(陵墓)
(1) 정시윤(丁時潤) 묘 ▷ 위치 안산시 양상동. ▷ 구조 묘역의 규모는 140평 정도이며 봉분은 560×150cm이다. 석물은 묘비와 상석·향로석·망주석 등이 있는데 묘비는 옥개석 108×76×47cm, 비신 173×64×26cm, 기대석 105×75×51cm의 규모이며 풍화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상석은 140×83×37cm, 향로석은 33×23×38cm이고 무덤 좌우에 서 있는 망주석은 165cm이다. ▷ 역사 및 유래 묘비는 정조 16년(1792) 9월에 건립했다. 정시윤의 자는 자우(子雨) 호는 두호(斗湖)이며 교리 정언벽의 아들이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5대조부이다. 묘소 옆에 조부 호선(好善)의 재취부인인 정경부인 여산 송씨 묘소가 있다.
(2) 유영(柳穎) 묘 ▷ 위치 안산시 부곡동. ▷ 구조 묘소의 석물로는 묘갈과 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문인석(文人石) 등이 있는데 묘갈의 규모는 147×64×21cm이고 상석은 146×88×58cm이며 문인석의 높이는 100cm이다. ▷ 역사 및 유래 묘갈의 전면에는 “贈嘉善大夫吏曹參判行通訓大夫弘文館應敎柳公諱穎之墓 贈貞夫人全義李氏깹굡 쓰여 있어 이 묘소는 유영과 그의 부인 전의(全義) 이씨(李氏)의 합장 무덤임을 알 수 있다.
(3) 유적(柳Z) 묘 ▷ 위치 안산시 부곡동. ▷ 구조 이 묘역에는 유시행(柳時行) 유영(柳潁) 등의 묘도 함께 있는데 유적의 묘가 가장 상좌에 있다. 석물로는 묘갈과 상석·향로석·망주석·동자석·문인석 등이 있는데 그 규모는 비신이 124×60×19cm, 기대석이 98×61×30cm, 상석이 157×95×64cm이고 동자석·문인석의 높이는 각각 84cm, 172cm이다. ▷ 역사 및 유래 묘갈은 풍화가 심해 비문을 판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묘갈의 전면에는 “贈通憲大夫晉安尉行順義大夫晉安尉柳Z之墓貞正翁主깹굡 쓰여 있어 부인인 정정옹주와 합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유시행(柳時行) 묘 ▷ 위치 안산시 부곡동. ▷ 구조 이 묘역에는 유시행의 묘를 비롯하여 유영·정정옹주의 묘소 등 모두 4기의 봉분이 있는데 그 중 유시행의 묘소는 남서쪽 가장 낮은 곳에 있다. 묘는 쌍분이며 석물로는 묘갈과 상석·향로석이 가운데 있고 상석 좌우에 동자석이 있으며 그 뒤쪽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있다. 묘역 방위는 동남동-서북서향이다. 묘갈은 대리석으로 비신의 풍화가 심한데 묘갈의 규모는 비신이 141×65×16cm, 기대석이 98×60×20cm이다. 상석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그 규모가 160×95×57cm이고 동자석의 높이는 100cm이며, 망주석과 문인석의 높이는 각각 220cm, 280cm이다. ▷ 역사 및 유래 비신의 전면에는 “贈嘉善大夫吏曹參判行通訓大夫弘文館校理柳時行之墓貞夫人李氏깹굡箚 새겨져 있다. 현재 안산에 세거하는 진주 유씨는 당초 충북 괴산 선영하에서 세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1606년 유시행이 죽자 선조는 부마 유적(柳Z)이 한성에서 괴산까지 시묘 다니는 것이 어렵다 하여 한양 근교인 안산에 묘를 조성하고 부곡동 일대를 사폐지로 하사, 유시행의 형인 유시회(柳時會)를 비롯하여 그 일가를 안산으로 이주케 하였다.
(5) 이상신(李尙信) 묘 ▷ 위치 안산시 성포동 점섬. ▷ 구조 묘역은 65평 정도이며 석물로는 묘표석 1기, 상석 1기, 망주석 2기, 문인석 2기 등이 있다. 봉분의 규모는 560×520cm이며, 묘표석은 종형으로 재질은 화강암이다. 규모는 비개·비신·기대석이 각각 73×27×54cm, 106×58×16cm, 110×60×28cm이다. 상석은 화강암으로 규모가 160×101×26cm이고, 문인석의 높이는 183cm, 망주석의 높이는 196cm이다. ▷ 역사 및 유래 묘비의 전면에 “禮曹參判贈吏曺判書李尙信墓貞夫人杞溪兪氏깹굡箚 쓰여 있어 부인 기계 유씨와의 합장묘임을 알 수 있다.
(6) 이우량(李友諒) 묘 ▷ 위치 안산시 성포동 점섬. ▷ 구조 묘역은 약 70평 정도이며 석물로는 묘갈 1기, 상석 1기, 문인석 2기가 있다. 봉분은 460×410cm이며 상석은 134×73×17cm이다. 묘갈은 옥개석 대신에 이수를 얹어 놓은 양식인데 규모는 이수가 72×27×48cm, 비신이 108×60×17cm, 기대석이 97×62×34cm이다. ▷ 역사 및 유래 비신의 전면에는 “敦寧校尉李公友諒之墓宣人德水李氏깹굡箚 새겨져 있어 부인과의 합장묘임을 알 수 있다. 이 묘비는 숙종 42년(1716년)에 세운 것으로 후손인 이국휴(李國休)가 찬하였다.
(7) 이충가(李忠可) 묘 ▷ 위치 안산시 신길동 뱅골마을. ▷ 구조 이 묘역에는 3기의 전의(全義) 이씨(李氏) 무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충가의 묘소는 가장 동쪽에 있다. 묘소의 석물로는 묘갈·상석·향로석·망주석 등이 있다. 봉분의 크기는 직경 4m, 높이 1m 정도이며 비신은 100×47×16cm, 기대석은 70×46×15cm이다. 상석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그 규모는 125×80×33cm이며, 향로석은 24×22×22cm이다. 상석 좌우에 망주석이 있는데 높이는 135cm이다. 전체적인 무덤의 방향은 북동`-남서향이다. ▷ 역사 및 유래 묘갈은 현종 10년(1669년)에 건립되었으며 전면에는 “通訓大夫行軍資監副正李公之墓淑人完山崔氏之墓”라는 기록이 있어 이충가와 부인 완산 최씨의 합장묘임을 알 수 있다.
(8) 이언항(李言恒) 묘 ▷ 위치 안산시 신길동 뱅골마을의 이충가 묘소의 좌측. ▷ 구조 이 묘소에는 묘갈·상석·향로석·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묘갈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건립 연대는 현종 11년(1670년)이다. 상석의 규모는 135×87×27cm, 향로석은 28×24×12cm이다. 또한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높이는 130cm이다. ▷ 역사 및 유래 전면에는 “折衝將軍行龍A衛副司果李公之墓淑夫人全州李氏之墓”라고 씌어 있다.
(9) 이경희(李慶禧) 묘 ▷ 위치 안산시 신길동 뱅골마을. ▷ 구조 묘역에는 묘갈·상석·향로석·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상석의 규모는 127×75×20cm, 향로석은 20×18×10cm이다. 상석 좌우에 있는 망주석의 높이는 146cm이다. ▷ 역사 및 유래 이경희의 자는 중응(仲應)이다. 묘갈은 화강암으로 현종 10년(1699년)에 건립되었는데 전면에는 “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行通訓大夫尙瑞院正李公之墓贈淑夫人文化柳氏之墓”라고 씌어 있다. 비문은 이경희의 5대손인 지유(志儒)가 썼다.
(10) 이정제(李廷濟) 묘 ▷ 위치 안산시 신길동 뱅골마을 뒤편. ▷ 구조 이 묘역은 전의(全義) 이씨(李氏) 무덤군에서 북쪽으로 약 70m 지점에 있다. 묘소에는 묘갈·상석·향로석·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의 크기는 400×450×130cm이고 상석은 140×90×53cm, 향로석은 27×22×43cm이다. 상석 좌우에 있는 망주석의 높이는 149cm이다. 묘갈은 화강암으로 숙종 17년(1691년)에 건립되었는데 전면에는 “敦校尉全義李公廷濟之墓恭人驪興李氏뀜㎕굡箚 씌어 있다. 비문은 이정제의 현손(玄孫) 경덕(敬德)이 썼다.
(11) 안동 김씨 분묘(墳墓)와 묘지(墓誌) ▷ 위치 안산시 일동 산 24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었으나 1979년 안산시 도시계획구역 내에 포함되어 온양민속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하여 묘역 일부와 신도비각을 박물관 경내에 복원하였다. ▷ 구조 이곳에는 조선 후기에 세도정치로 유명했던 안동 김씨 가문의 김수근(金洙根)·김병학(金炳學)·김병국(金炳國) 등 모두 8기의 분묘와 재실이 있었다. ▷ 역사 및 유래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곳에 있었던 묘소들은 온양민속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후에 출토된 유물 및 석물들을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발굴·조사 내용은 1989년에 간행된 「안동김씨분묘발굴조사보고서」에 상술되어 있다.
1) 김수근(金洙根)과 부인의 합장묘 김수근과 그의 두 부인(楊州 趙氏, 全州 柳氏)이 합장된 묘이다. 이 묘소는 원래 광주군(廣州郡) 포우리(浦隅理)에 있었으나 1861년 2월에 반월로 이장되었다. 이 묘소는 묘역의 가장 높은 위치에 진좌곤향(辰坐坤向)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묘역도 가장 넓고 봉분(封墳)도 어느 것보다 크다. 계체석도 여기에 맞추어 상석 좌우로 6개씩 배열되어 있다. 봉분 앞 양쪽에 망주석 2개, 양석 2개가 있고 망주석 뒤로 차일석이 놓여있으며, 나머지 2개의 차일석은 봉분 양옆에 놓여 있다. 그리고 12개 계체석의 중간 지점 봉분 앞에 혼유석·상석·향로석이 놓여 있고 상석은 앞에는 2개의 북돌로, 뒤에는 받침돌로 괴어 있다.
비석은 묘 앞에 세우지 않고 일리에서 안골로 향해 나 있는 길 옆에 남향으로 세운 비각 안에 보관되어 있는데, 비각은 화광석으로 된 4개의 주춧돌 위에 4각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을 한 주심포계(柱心包系)의 익공식(翼工式) 건물이다. 비각 전면은 1쌍의 여닫이문을 달았고, 전후좌우 벽면에는 모두 가는 창살을 세로로 박아 처리하였으며, 천장은 우물반자인데 그 중앙으로는 대들보가 전후면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비각 안에는 2개의 비석이 좌우로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오른쪽의 비석은 비신의 전후좌우 4면에 모두 비문이 있다. 전면에는 가첨석 바로 아래 당저어필(곧 철종어필<哲宗御筆>이란 뜻)이라 쓴 두전이 있고, 그 아래에 세로로 5행에 걸쳐 “輔國崇祿大夫兼吏曹判書 奎章閣提學經筵日講官 正文公安東金洙根之墓 贈貞敬夫人楊洲趙氏뀜 贈貞敬夫人全州柳氏뀜㎕굡 새겨 놓았다. 왼쪽의 비석은 전후우측 3면에 비문이 있는데 전면에는 가첨석 바로 아래 오른쪽에서 세로로 당저어필이라 적고 그 왼쪽 옆으로, 즉 비신의 전면 중앙에 세로로 “乙卯特贈領議政”이라 새겨 놓았다.
발굴 당시의 묘에는 양주 조씨를 중심으로 왼편에 전주 유씨가 부장되어 있었고 그 오른쪽으로 김수근이 합장되어 있었는데, 3위의 광중을 덮은 횡대의 크기가 각각 달랐다. 3개의 관 가운데 김수근·양주 조씨·전주 유씨의 순서로 관의 크기가 작았으며 횡대는 소나무로서 각 위 모두 5매씩이었다. 양주 조씨 관 위의 오른쪽 위와 아래에 동심결(同心結)을 맺은 현훈이 삭아 없어진 자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는데, 명정은 붉은 글씨였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김수근의 관상명정:兼吏曹判書 奎章閣提學贈領議謚正文安東金公之柩 양주 조씨의 관상명정:贈貞敬夫人楊洲趙氏之柩 전주 유씨의 관상명정:贈貞敬夫人全州柳氏之柩 김수근의 관 안에서는 옥관자 2개가 발견되었을 뿐 다른 것은 모두 삭아 아무것도 수거할 수 없었다. 그 옆의 두 관에서도 아무것도 수거하지 못하였다. 이 합장묘에서는 3편의 백자 지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이장하면서 만들어 놓은 것으로, 엄격히 말해서 천부지(遷뀝)라고 할 수 있다. 발견 위치는 모두 회곽 위였다.
2) 거창(居昌) 신씨(愼氏) 묘 묘에는 망주석과 양석이 각각 대칭으로 2개, 차일석이 4개, 상석·혼유석·향로석이 계체석과 함께 설치되어 있고 오른쪽으로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묘는 부군인 김수근 묘의 오른쪽 산등성이에 인좌신향(寅坐申向)으로 조성되어 있다. 김수근과 두 부인은 광주 의곡면 포우리에 합장되었다가 1861년 구룡동으로 이장되었으나, 1872년에 사망한 거창 신씨는 처음부터 구룡동에 단장으로 묻혔는데 장례를 치른 1년 뒤에 세운 비석의 전면에는 “兼吏曹判書贈議政府領議政謚正文安東金公洙根 配貞敬夫人居昌愼氏之墓”라고 3행으로 씌어 있다. 족손(族孫) 김세균(金世均)이 제술하고 후손이 보관해 오는 문헌인 「거창신씨묘지명(居昌愼氏墓誌銘)」에 의하면, 거창 신씨는 1799년 정월 20일에 태어나 20세 되던 1818년에 한 살 위인 김수근과 혼인하였는데 이때는 김수근의 제2처인 전주 유씨가 사망한 다음 해였다. 1850년에 김수근이 공조판서에 오름으로써 정경부인의 봉작을 받았는데, 1830년에 시어머니 신씨의 상을 당하였고 56세 되던 해에는 김수근을 잃었으며, 본인은 1872년 9월 29일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발굴시 지석이 회곽 위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지석은 문헌으로 전해 오는 「거창신씨묘지명」과는 그 내용이 다르다. 이 묘지명 첫 쪽에는 “九龍洞 寅坐 誌石 埋置于 墓左階?石下”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그 분량도 16쪽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며 제술 연도도 “崇禎紀元後五丙子孟春”으로 장례 치른 임신년과는 다르다. 묘에서 출토된 지석은 말각방형(抹角方形)의 백자판으로서 회회청의 붓글씨로 “貞夫人居昌愼氏之墓 壬申十一月初二日辰時葬于 廣州聲串面九龍洞寅坐之原”이라는 내용을 싣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원지(原誌)로서 장례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문헌으로 전해 오는 「거창신씨묘지명」은 속지(續誌)로서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속지의 내용을 적은 지석은 발견되지 않았다. 봉분을 파헤치고 5개의 횡대을 제거하자 관이 노출되었는데, 관 위에는 금니(金泥)로 “貞敬夫人居昌愼氏之柩”라는 관상 명정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관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3) 김병학(金炳學)과 부인의 합장묘 김병학과 3부인(1配 坡平尹氏, 2配 坡平尹氏, 3配 星州李氏)이 합장된 묘이다. 김병학은 김수근과 그의 3배인 거창 신씨와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그의 백부인 김준근(金浚根)에게 입양되었다. 그러나 사후에는 생부의 묘소가 있는 구룡동에 묻혔다. 이 묘에는 망주석과 양석이 각각 2개, 차일석이 4개 있고, 상석은 혼유석과 향로석 사이에 받침돌과 2개의 복돌 위에 얹혀져 있다. 또 상석 좌우에 6개씩의 계체석이 놓여 있으며 비석은 오른쪽에 서쪽을 향해 서 있다. 묘표석은 장례 1개월쯤 후에 세운 것인데 거기에는 “領議政贈謚文獻安東金公炳學之墓 贈貞敬夫人坡平尹氏之뀜 配贈貞敬夫人坡平尹氏뀜㎕굡箚 씌어 있으며 3면에 걸쳐 음기가 새겨져 있다. 또한 상석에는 “三配 貞敬夫人 李氏 籍星州 父敎尙 庚子四月十三日生 戊辰閏二月十四日卒越一旬行꾑?ポ斃앨掌?[16]搏잰崑? 不肖男昇圭泣血謹識”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계자 승규(昇圭)가 김병학의 3배인 성주 이씨를 이곳에 이장하면서 추기한다는 내용이다.
묘의 봉분을 파헤치니 4개의 회곽이 드러났는데, 맨 왼쪽에 있는 회곽은 지석 없이 중앙이 약간 볼록하고 네 귀를 낮추어 둥그스름하였고, 그 옆 회곽에는 김병학의 지석편이 편편한 회곽 위에 놓여 있었다. 이 지석편은 세로 3행에 15개씩 도합 45개였다. 김병학의 회곽 오른쪽에 있는 회곽(이 아래에 2개의 관이 묻혀 있음) 위에서도 각기 1개씩의 지석이 발견되었다. 이 2개의 지석은 모두 “贈貞敬夫人 坡平尹氏之墓”로 시작하여 대부분의 내용이 같았다. 다만 김병학의 회곽 바로 옆에 있는 지석 끝에는 “自德莊洞移緬”으로, 그 옆의 것에는 “自任里移緬”으로 되어 있어 원 장지만 차이가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공통 부분의 내용은 “壬申十二月 初八日 辰時葬于廣州 聲串面 九龍洞 寅坐申向之原”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지석은 천부지라고 할 수 있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誌)」에 의하면 덕장동은 과천에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나 임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병학의 졸년이 기묘년(1879년)이므로 사망 7년 전인 임신년(1872년)에 손수 이장하고 자신도 이곳에 묻힐 생각으로 묘터를 정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병학의 초배인 파평 윤씨는 기묘년에 태어나 1853년에 고종(告終)하였고, 후배인 파평 윤씨는 그 19년 후인 무술년에 사망한 뒤 14년 후에 이장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때 두 부인의 묘를 동시에 이장했으므로 회곽을 하나로 만들고 그 위에 천부지인 지석 2개를 만들어 각각 회곽 위에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병학이 1879년 8월 15일에 사망하여 10월 7일에 이곳에 합장될 때에 앞에서 나타난 지석편과 회곽을 설치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마지막으로 그의 3배인 정경부인 성주 이씨가 후사 없이 1928년에 사망했을 때도 이곳에 부례하여 한 묘 안에 4명이 3개의 회곽 속에 묻혔음을 알 수 있다.
김병학의 지석편은 회와 흙을 섞어 만든 회토편으로 글씨를 음각하고 그 안에 숯가루를 이겨 넣었는데 그 내용은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 事謚文獻安東金公炳學之墓寅坐之原”이었다. 그리고 두 파평 윤씨의 지석은 방형의 백자판으로 글씨는 회회청의 붓글씨였다. 횡대는 왼쪽 성주 이씨는 7개, 김병학은 5개, 그리고 두 파평 윤씨는 각각 5개였는데 성주 이씨의 횡대에는 아무런 글씨가 없었으나 김병학의 첫 번째 횡대에는 ‘上’자가, 두 파평 윤씨의 첫 번째 횡대에는 각각 ‘上壹’ 자가 씌어 있었으며, 이하 모두 횡대 하나씩에 ‘貳參肆伍’자가 씌어 있었다.
김병학의 관은 주칠로 잘 칠해져 있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했는데 그 위의 관상명정은 “議政府領議政原任大提學贈謚文獻安東金公之柩”라고 금니로 씌어 있었고, 관의 오른쪽에는 청홍의 현훈 흔적이 남아 있었다. 두 파평 윤씨의 관은 옻칠이 되어 있었고 관상명정은 주칠로 “贈貞敬夫人 坡平尹氏之柩”라고 씌어 있었으며, 관의 오른쪽에는 현훈 자리가 남아 있었다.
4) 김병국(金炳國)과 부인의 합장묘 김병국과 그의 3부인(1配 韓山李氏, 2配 豊川任氏, 3配 坡平尹氏)이 합장된 묘이다. 이 묘는 망주석과 양석이 각각 2개, 차일석이 4개, 그리고 11개의 계체석으로 꾸며졌고, 봉분 앞에 상석·혼유석·향로석이 설치되어 있으며 오른쪽으로 비석이 있다. 김병국의 장례시 여러 사항을 기록한 「충문공신종록(忠文公愼終錄)」에 “石物巳備舊山所而碑石新立”이라는 기록이 있음을 보아 비석을 제외한 석물은 이미 죽은 세 부인의 합장묘에 있던 것을 그대로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領議政奉 朝賀勳一等 贈謚忠文安東金公炳國之墓 贈 貞敬夫人韓山李氏꿴 贈 貞敬夫人豊川任氏뀜 貞敬夫人坡平尹氏뀜㎕굡箚 씌어 있다. 그리고 다른 3면에는 김병국 자신이 쓴 비문과, 손자 김용진(金容鎭)의 추기와 왕이 김병국의 생전과 사후에 내린 소가 종자 승규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묘의 봉분이 해체되어 회곽이 드러나자 지석편이 나타났다. 그러나 김병국의 지석은 발견되지 않고 맨 왼쪽에 정경부인 파평 윤씨, 하나 건너 증정경부인 한산 이씨, 그 옆에 증정경부인 풍천 임씨의 지석이 각각 세로 1줄로 놓여 있었다. 지석편의 숫자는 파평 윤씨의 것이 11개, 한산 이씨와 풍천 임씨의 것이 각각 12개였다. 지석은 흙과 회를 섞어서 만든 것이었다. 「충문공신종록」에 보면 “사지석번조(砂誌石燔造)”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원래는 지석이 있었으나 도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부장의 위치가 비석 전면에 새겨진 내용과 어긋난다는 사실이다. 비문에는 한산 이씨가 부우로, 파평 윤씨가 부좌로 되어 있는데 발굴 결과 그 반대로 나타난 것이다. 김병국의 회곽은 다른 부인의 것보다 약간 높고 조금 더 길게 만들어졌고 횡대 또한 다른 것들보다 약 10cm 정도 낮게 놓여 있었다. 횡대의 수는 모두 5매씩 이었고 횡대 위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파평 윤씨의 관 위에는 “貞敬夫人坡平尹氏之柩”라고 붉은 칠로 씌어져 있었다. 김병국의 관 뚜껑에는 명정이 덮였던 흔적이 보이고 백회로 쓴 명정 글씨가 판독 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었고 양편 뒤쪽에 현훈 자국이 있었다. 관 위의 명정에는 “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官春秋館觀象監事領三軍府事侍講院師原任奎章閣提學致任奉朝賀勳一等贈謚忠文安東金公之柩”라고 씌어 있었다.
한편 관상 명정은 “領議政奉朝賀勳一等贈謚忠文安東金公炳國之柩”라고 씌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충문(忠文)’ 두 글자는 금종이로 덮여 있었다. 관은 왕이 하사한 동원부기(東園副器)였다. 한산 이씨와 풍천 임씨의 횡대를 들어냈을 때 관 뚜껑 위에는 현훈 자국이 동심결의 흔적과 함께 남아 있었으며 “貞敬夫人 韓山李氏之柩 贈貞敬夫人 豊川任氏之柩”라는 내용의 관상 명정이 씌어 있었다.
5) 김해 허씨 묘 김해(金海) 허씨(許氏)의 묘는 2개의 망주석, 10개의 계체석, 그리고 상석과 향로석 및 혼유석과 비석으로 꾸며져 있다. 비석의 앞면에는 “右議政 自號穎漁 副室金海許氏墓”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해 허씨는 을미년(1835년)에 태어나 1851년 김병국의 부실로 들어와 살다가 1878년 4월 4일 사망하였는데, 같은 해 4월 24일 광주 성호에 안장되었다가 이듬해인 기묘년에 구룡동으로 이장되었다.
이 묘는 손좌건향(巽坐乾向)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묘의 봉분을 제거하자 이장할 때 만든 회토편의 지석이 나타났는데 “議政府右議政金炳國副室金海許氏之墓廣州聲串面九龍洞巽坐原”이라고 씌어 있었다. 회곽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회곽과 상석의 중간 지점에서 백자의 지석합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는 회회청으로 쓴 11매의 지석이 들어 있었다. 결국 김해 허씨의 묘에는 두 종류의 지석이 묻혀 있었던 것이다. 관을 노출시키니 뚜껑에 금박으로 관상명정이 씌어 있었고 명정의 좌우로 현훈이 놓였던 자국이 남아 있었다. 관상명정은 “議政府右議政金炳國副室 金海許氏之柩”였다. 관 안에서는 염습의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6) 김정규(金貞圭)와 부인의 합장묘 이 묘에는 망주석·양석·상석·혼유석·향로석·차일석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오른편에 비석이 있는데, 비석의 앞면에는 “嘉善大夫吏曹參判 安東金公貞圭之墓 配貞夫人韓山李氏뀜㎕굡箚 새겨져 있다. 1915년에 부인 한산 이씨가 죽은 다음 1917년에 비석을 세웠다. 이 묘는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서 1895년에 조성되었다가 1915년에 부인이 합장됨으로써 완성되었다.
성토의 중간 지점에서 김정규의 지석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有明朝鮮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安東金諱貞圭學道如之墓乙未八月十八日巳時 葬于廣州聲串面 九龍洞先塋下 癸坐”였고 백자 도판에 회회청의 붓글씨였다. 그러나 한산 이씨의 지석은 발견되지 않았다. 「한산이씨신종록(韓山李氏愼終錄)」에 백옥석 지석을 묻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도굴된 것으로 생각된다.
봉분을 제거하고 회곽을 해체하자 4개씩의 횡대가 나왔는데 한산 이씨 횡대는 김정규의 것보다 5cm 정도 높게 놓여 있었다. 김정규의 관 위 좌우에는 현훈 자국이 뚜렸하였고 관상 명정은 “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原任侍講院司書安東金公貞圭之柩”라고 되어 있었다. 한편 오른쪽 한산 이씨의 횡대를 들어내자 명정이 덮여 있었고 그 아래로는 “貞夫人韓山李氏之柩”라는 금박 관상 명정이 나타났다. 한산 이씨의 관 속 염습의는 대부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7) 김용진(金容鎭)과 부인의 합장묘 김병국의 손자인 동지돈령원사(同知敦寧院事)를 지낸 김용진과 부인 은진 송씨가 함장된 묘이다. 1945년 먼저 세상을 뜬 은진 송씨의 묘를 조성하고 그후 김용진이 91세의 나이로 1968년에 사망함에 따라 부인의 묘에 합장하였다. 묘의 좌향은 임좌병향(壬坐丙向)이다.
이 묘에는 양석이 없고 망주석·상석·혼유석·향로석·차일석·비석 및 계체석으로 꾸며져 있다. 비석 전면에는 “有韓同知敦寧院事穎雲 先生安東金公容鎭之墓 貞夫人恩津宋氏깹굡遮 내용이 새겨져 있고, 옆면에는 ‘영운선생장례위원회(穎雲先生葬禮委員會)’ 임원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석은 사후 2개월 뒤에 세워졌는데 묘의 봉분을 해체하자 김용진의 지석편이 나타났다. 지석의 회편은 모두 41개였는데 몇 개는 원형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다. 내용은 “華城 半月里 九龍洞 一九六八戊申一月十六日卒大韓嘉善同知敦寧院事安東人戊寅生金公容鎭月日葬嗣子舜漢”으로 추정된다. 다른 묘와 달리 지석편을 4~7개로 쌓아 9묶음으로 묻어 놓았다.
봉분을 제거하고 회곽을 해체하자 횡대가 노출되었는데 왼쪽의 김용진의 횡대에는 아무 표시가 없었으나 오른쪽 은진 송씨의 횡대에는 1에서 5까지의 숫자가 씌어 있었다. 김용진의 관 위에는 좌우로 현훈이 놓여 있었으나 관상 명정은 없었다. 관 속에서는 등근 벼루와 붓, 담배 파이프가 수습되었다.
8) 여흥(驪興) 민씨(閔氏) 묘 김용진의 아들 순한(舜漢)의 부인인 여흥 민씨의 묘이다. 여흥 민씨는 기해년(1899년) 생으로 계유(1933년)에 고종(告終)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부군 김순한은 화장하였기에 단당이다. 이 묘에는 양석이 없고 망주석·상성·혼유석·향로석·차일석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계체석에 계절이 갖추어져 있다. 묘의 좌향은 계좌정향(癸坐丁向)이다.
봉분을 해체하고 회곽을 들어내자 5개의 횡대가 나타났는데 황대에는 위에서부터 차례로 ‘일이삼사오(壹貳參肆伍)’라고 씌어 있었다. 횡대를 걷어 내자 관 위에 삭은 명정 글씨가 남아 있었으며 좌우에는 삭은 현훈도 있었다. 명정은 “孺人驪興閔氏之”까지만 남아 있었는데 구(柩)자는 접어서 관 아래쪽에 넣어 썩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관 속에서는 보공으로 덮은 비단과 수의 몇 종류가 썩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3. 옛터[舊址]
(1) 안산향교터[安山鄕校址] ▷ 위치 안산시 수암동 351, 352, 356. ▷ 구조 당시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초석(礎石) 및 와편만 산재해 있다. ▷ 역사 및 유래 안산관아지의 정남쪽으로 안산시 수암동 351, 352, 356번지에 있는데 351번지(1737평)와 356번지(213평)는 개인 소유이고, 352번지(942평)만 안산군 향교 소유로 되어 있다. 향교가 있던 곳은 현재 평탄한 밭(?)으로 변해 있고 향나무 등이 심어져 있다. 바로 뒤편(동남)에는 삼성의 창업주인 이병철의 형 이병각(李秉珏)의 묘가 있다. 이곳에는 윗부분과 아랫부분에 단을 이룬 건물터로 보이는 평지가 있는데, 윗부분은 26.6×12.4m이고, 아랫부분은 34.6×13.5m에 이른다. 아랫단에는 30×60m 정도의 다듬은 돌로 쌓아 놓은 두세 단의 석축단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양의 기와편이 발견되고 있는데 대부분이 무문와이며, 간혹 와전(瓦塼)도 발견된다.
사진 4-51 안산향교터. 건물은 흔적도 없고 초석과 와편만이 남아 있다.
안산향교가 이곳에 건립된 것은 조선 선조 때(1569년)로 알려지고 있다. 즉 조선 중기의 문신인 취죽(醉竹) 강극성(姜克誠;1526~1576년)이 쓴 「안산신교기(安山新校記)」에 의하면, 유(劉)모가 선조 1년(1568년) 안산군수에 부임한 후 처음 1년 간은 정사(政事)를 보다가 이듬해(1569년) 누추한 계곡 사이에 있는 안산향교가 너무나 허술하고 주변이 깨끗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안산관아 남쪽 양지바른 이곳에 자리를 잡고 농한기를 이용하여 고을 사람들을 부역시켰고, 경비는 안산관아에 있는 곡식과 고을의 덕망 높고 연로한 인사들로부터 충당했으며, 자재는 한강 어귀에서 배로 수송하였다.
「안산군읍지(安山郡邑誌)」(1899년)에 의하면 안산향교는 축좌(丑座)에 미향(未向)으로 북북동-남남서향이다. 「안산군읍지」 ‘관직조’에 의하면 안산군의 관원 중 향교직(鄕校職)이 한 명 있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이 향교는 1944년 1군 1 향교의 제도에 따라 안산·시흥·과천의 3향교가 시흥향교(始興鄕校)로 통합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케 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향교가 교육기관이라 하여 교육청의 관할로 들어갔으나, 관리비와 낡은 건물에 대한 보수 비용이 없어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 안산국민학교가 화재로 소실되자 임시학교 교사로 사용되다가 그후 철거되어 목재의 일부는 수암동 노인회관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현재 새마을회관 앞마당 주변에 향교에서 가져다 놓은 초석과 장대석들이 많이 남아 있다. 향교는 지방에 있는 문묘(文廟)와 이에 딸린 교궁(校宮)을 말하는 것으로, 공부자(孔夫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들에 석전(釋奠)하는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하여 유학을 강론하는 명륜당 등을 일괄하여 일컫는 말이다.
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제주에 조서(詔書)를 내려 학교를 세워 가르치는 길을 넓혔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 완비된 제도로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향교의 교육은 조교가 담당하였고 중앙에서 파견한 박사가 그 교육을 조언·감독한 듯한데, 교과 내용은 국자감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의종 이후 국정이 문란하고 학정(學政)도 따라서 퇴폐하였으나 충숙왕 때에 이르러 향교를 진흥시켜 부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향교제도는 조선조에 그대로 계승되고 확장되었고, 학당은 국자감 향교와 더불어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관학이었다. 각 주(州)·군(郡)에까지 설립된 조선 시대의 향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경기도 지역의 향교 실태는 38개의 향교에 모두 38명의 선생과 1860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안산향교의 경우 훈도(訓導) 1명과 50명의 학생이 있었다.
현재 안산향교는 1950년대에 파괴되었으나 이곳에서 공부를 한 인사가 다수 생존해 있고, 또 훼철되기 이전의 건물을 목도한 인사가 있어 원형 복원을 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다음 글은 「진산세고(晉山世稿)」에 실려 있는 강극성의 「안산신교기(安山新校記)」 역본이다.
“공손히 생각하니 우리 나라는 문교(文敎)를 숭상하여 서울에는 태학(太學;성균관), 지방에는 향교가 있어 모두 공자(孔子)를 받들어 제사한다.
다만 한(恨)스러운 것은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서는 혹 공자의 가르침을 받드는 데 미진하여 성전(聖殿)이 잡초에 묻히고 제물이 미비하니 성스러운 세상에 잘못된 일이다. 많은 선비가 우렁차게 글을 읽으면서 그래서 되겠는가? 비록 조정에서는 겨를이 없어 일일이 검열을 못 하지만 그 임무를 담당한 자가 보기를 본분 밖의 일로 생각하니 참 개탄스럽다. 진실로 군자(君子)가 능히 자기 일로 생각하고 떨치고 일어나 일반인에 섞이지 않는다면 유교(儒敎)가 흥거할 수 있을 것이며, 능하지 못한 자도 보고는 감동될 터인데 애석하게도 그런 사람이 없다.
안산군은 경기 지방에서 가장 취약한 지역으로 모든 일에 소홀하고 문교정책에 더욱 소홀하다. 무진년에 유학(儒學) 선생인 유모씨(劉某氏)가 안산군수로 부임하여 풍속의 이롭고 병된 것을 풀어서 이로운 것은 더욱 인도(引導)하고 해로운 것은 제거하는데, 먼저 성묘(聖廟;孔子 사당)를 참배하고서 좌우를 돌아보고는 슬픈 얼굴을 지으며 말하기를 ‘아! 너무 게으르도다. 사당이 더럽고 학교가 허술하니 이러고서 어찌 성령(聖靈)을 편히 모시며 유생(儒生)이 스승을 곁에서 모시겠는가? 내가 개선하리라.’ 하고 뜻을 세웠으나, 시기가 맞지 아니하여 즉시 착수하지 못하고 1년간 정사(政事)를 보고 농한기를 이용하여 부역을 시키고 세금을 적게 거두고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하니 백성에겐 힘의 여유가 있고 창고에는 곡식이 남아 있었다.
그런 후에 결단을 하고 기사년 봄에 공사(工事)를 시작하여 옛 향교가 누추한 계곡(溪谷) 사이에 있던 것을 읍(邑) 남동쪽 공간 양지바른 곳의 토질이 건조하고 위치 또한 높고 반듯한 자리에 지리에 맞도록 선정하니 사람들이 모두 좋은 터를 얻었다고 하였다. 자금을 모으는 데는 창고에 남은 곡식 몇 섬을 내어 놓고 마을에서 덕망이 높고 성실하며 연로한 사람을 선발하고 고을에 유능한 아전[胥吏]에게 맡기어 자재(資材)는 고가(高價)도 염가(廉價)도 아닌 것으로 하고, 또 수송의 수고로움을 근심하여 바다를 이용하여 배로 서울에 가고 한강 어귀에서 물건을 싣고 들어오니 소로 운반하는 것보다 인력도 적게 들었다. 공사를 하는 데는 놀고 있는 사람을 부리니 농민을 번거롭게 아니하였지만, 농민 중에 현명한 자는 즐겨 일어나고 어리석은 자도 수줍어하면서 힘을 쏟아 몇 달 안 되어서 공사를 끝냈다.
정전(正殿)에는 의젓한 스승을 거처하게 하고 유생들이 거처할 집도 있었다. 유생을 모으는 날 원근에서 모여 와서 보고는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다른 곳에서 이사온 아무씨는 소문을 듣고 탄식하기를, 옛날 사람을 부러워했는데 옛날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하였다. 나도 마을 늙은이이다. 조정에 있을 때 이 고을을 다스린 사람이 많았다고 들었다. 견책(譴責)을 듣고 시골에 있으면서 시정(施政) 득실이 또 적지 않음을 보았다. 성묘(聖廟)의 헐어 더러워진 문과 담장을 보고 더욱 개탄하였으나 더러운 것은 버렸는데, 지금은 그전에 보지 못하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어찌 감격하지 않으리오? 모든 읍민(邑民)의 심정도 나와 같으리라. 옛날 우강 이구의 원주학기(袁州學記)를 지었는데 그 일이 서로 같다. 그러나 실정(實情)은 이것이 나을 것이다. 내가 그 실정을 쓰고, 또 이구의 원주대중에게 알린 말을 안산선비에게 말하여 스스로 힘쓰도록 하노라. -「시흥의 문화재와 유적」, 1995, 이승언.
(2) 사직단터[社稷壇址] ▷ 위치 시흥시 장하동 벌말 뒷산. ▷ 구조 사직단은 정방형으로 한 면의 길이는 13.5m, 높이는 1.5m 정도이다. 외형상 토축(土築)으로 보이지만 사직단의 내부가 외곽부보다 30~50cm 정도 함몰되어 있다. 외곽부 안쪽에 부분적으로 정연하게 쌓은 석축이 노출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흙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폭 1m 정도의 석심(石心)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다져 쌓은 것으로 추측된다. 사직단의 각 면은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으나 전체적인 방향은 약 20정도 틀어진 상태이다. 사직단 각면의 중간부에 2m 폭의 함몰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네 방향에서 정상부로 올라가는 흙으로 된 계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사직단 위에는 잡초와 잡목이 우거져 있는데, 곳곳에서 와편(瓦片)이 발견되고 있어 윗부분에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4-52 사직단터. 장하동 벌말 뒷산에 있으나 잡초와 잡목이 우거져있고 와편만이 간혹 보인다.
▷ 출토 유물 이곳에서 수습되는 와편들은 대체로 황갈색을 띠고 있으며 점토 성분이 강하다. 두께는 2cm 정도인데 대부분 표면은 무문(無文)이고 이면에는 포문(布文)이 있는 조선 시대의 기와들이다. ▷ 역사 및 유래 벌말에서 방화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위에서 남서쪽으로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해발 170m인 산 정상부에 이르는데 이곳이 사직단터이다. 이 산은 마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려온 지류로서 경사가 완만하며 정상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바닷가가 내려다 보인다. 사직은 토지신(土地神)과 오곡신(五穀神)을 모시고 제사 드리는 곳으로서 두 신위(神位)를 함께 단(壇)을 쌓고 봉사(奉社)하기 때문에 사직단이라고 한다. 토지와 오곡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 되는 것이니 만큼 국가에서는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기원하고 보우(保佑)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국사단(國社壇)과 국직단(國稙壇)을 설치하였고 각 지방관청 단위로 지방 사직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렸다. 국사단과 국직단은 현재 서울의 사직동에 복원되어 있으나 지방의 사직단은 대부분 훼파되어 이처럼 원형이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 안산사직단에서 장하동 벌말 주민들이 매년 7월 1일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위하여 우물제[井祭]를 지내고 있다. ▷ 특기 사항 이 사직단은 1988년 시흥시 이승언(시흥시 향토사료실 전문위원) 씨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3) 성황당(城隍堂) ▷ 위치 안산시 성곡동 해봉산 정상에 잿머리성황당이 복원되어 매년 안산시 주관으로 성황제를 올리고 있으며, 또 하나는 안산시 군자동 군자봉 정상에 제단을 쌓고 시흥시 주관으로 매년 성황제를 올리고 있다. ▷ 역사 및 유래 「안산군읍지」의 단묘(壇廟)조에 보면 성황사(城隍祠)가 2군데 있는데 하나는 군 서쪽 21리에 있고, 다른 하나는 군 서쪽 32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산천조에서는 군 서쪽 20리 지점에 성황사가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전자는 군자봉에 있는 것을, 후자는 해봉산(海峯山)에 있는 것을 지칭했다고 볼 수 있다. 성황은 서낭이라고도 하는데 토지의 부락(富樂)을 수호하는 신이다. 대개 길가의 큰 나무가 이 성황신의 거처가 되는 경우가 많으나 산 정상부에 사당을 지어 놓는 경우도 있다. 이 성황신이 있는 곳에서는 침을 뱉거나 돌을 하나씩 던져 놓고 지나가는데 이는 토지수호신인 성황신에게 재난을 멀리하고 복을 빌며 여행의 피로를 풀고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 서낭의 기원은 중국 고대의 성지신(城地神)에서 유래된 것으로, 6조(六朝) 시대 이후부터 서낭이라 하였는데 당대를 거쳐 송대에 크게 성행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그 기원이 확실치 않으나 조선 시대에는 중사(中祀)의 하나로 남쪽에 그 제단이 있었으며, 세종 시대에 이르러 풍운(風雲)·뇌우(雷雨)·산천(山川)·성황(城隍)이 한군데에 모셔지기도 하였다. 제단(祭壇)의 축조는 토축(土築)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토축단은 장마철에는 무너져 내리거나 황폐해지기 쉬워 석축으로 쌓기도 하였다. 해봉산의 성황당은 신라 경순왕을 모신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군자봉의 성황당은 고려 때부터 있었으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4) 관곡지(官谷池) ▷ 위치 안산시 하중동 관곡 마을. ▷ 구조 연못의 규모는 가로 23m, 세로 18.5m이며 장방형이다. 연못에는 연이 무성하며 연당 한가운데에는 조산(造山)을 해 놓은 뒤에 관상소나무를 심어 놓았다. ▷ 역사 및 유래 이 연못은 조선 시대 전기의 명신이며 농서(農書)인 「금양잡록(衿陽雜錄)」의 저자로 이름이 높은 강희맹(姜希孟)과 인연이 깊은 연못이다. 그는 중국 남경에서 돌아올 때 전당연(錢塘連)이라는 연꽃 종자를 가지고 귀국하여 고향인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험 재배를 해 점차 널리 퍼졌다고 한다. 「경기지」에 보면 이러한 연고로 안산의 읍호(邑號)를 연성(連城)이라 하고 이 관곡지를 전당지(錢塘池)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안산의 별호인 연성에 대한 기록은 이보다 앞선 정종 2년(1400년) 김정경(金定卿)이 연성군(蓮城君)에 봉군되는 것으로 보아 전당지와 연성은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이 관곡지는 최근에 정비·보수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으며 1984년 이승언의 저서 「왜 안산시이어야 하는가」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5) 오취언터[烏嘴堰址] ▷ 위치 안산시 선부동. ▷ 구조 오취언의 규모는 둘레 1560척, 길이 491척, 폭 375척이었고 깊이는 7척이며 수통이 1개 있었다. 오취언 주위에는 나무가 2643주 있었고, 이 제언(堤堰)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전답의 규모는 대략 2천 석락(石落)이었으며, 이곳에는 감독관 1명과 색리 1명이 있었다고 한다. ▷ 역사 및 유래 「안산군읍지」에서는 이 제언을 진휼청(賑恤廳)에서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진휼청은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던 관청이었다. 조선 시대 초기에는 구황청(救荒廳)으로 불리다가 인조 4년(1626년)에 진휼청이라 고쳐 선혜청(宣惠廳)에 붙여 상평청(常平廳)과 통합하였다. 주로 지방의 빈민을 구제하였는데 백성을 구제할 때는 진휼청이라 하고 진휼이 끝나면 상평청이라 하였다. 이 오취언의 축조를 진휼청에서 주관하였다는 것은, 이 제언을 쌓아 흉년의 피해를 최소화시킴으로써 백성들을 사전에 구제하는 방편으로 실시된 토목공사(土木工事)였임을 알 수 있다. 오취언의 위치는 산대장터 건너편이었다는 「안산군읍지」의 기록으로 미루어 현재 도일저수지가 있는 곳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6) 망해정터[望海亭址] ▷ 위치 안산시 수암동. ▷ 역사 및 유래 망해정은 연성군 김정경이 건립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안산군읍지」에서는 읍치의 서쪽 언덕에 있다고 하였으며, 연성군 김정경이 바로 그 아래에서 생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지지자료」에서도 옛날 김정경의 처소 가까운 곳에 그 터가 있다고 하여 읍지들과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안산김씨족보」에는 “지금의 사직단은 망해정의 옛터”라는 기록이 있어 그 위치 비정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망해정이라는 정자의 명칭이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이므로 정자의 위치는 평지가 아닌 구릉에 있었다고 생각되며 안산읍성 안쪽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망해정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7) 사옹원(司饔院) 분원터[分院址] ▷ 위치 안산시 신길동. ▷ 구조 건물 안에는 조기를 잡아 저장하던 70~80평 규모의 저장고가 남쪽과 동쪽에 1개씩 있었으며, 깊이는 3m 정도이고 원형이었다 한다. ▷ 역사 및 유래 이 지역의 특산물인 조기를 잡아 진상하던 곳이다. 사옹원을 살막이라고도 불렀는데 건물은 일제 시대 초기에 없어졌다고 한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어살을 설치하여 조기를 잡고 살막제 밑에서 얼음을 얼려 조기를 냉동시켰다고 한다. 진상을 위한 조기를 잡던 어살은 일제 때 개인살로 되었다가 1986년 시화지구 건설로 인하여 폐지되었다. 사옹원 건물지는 현재 흔적을 찾기 어렵다. 「안산군읍지」에 보면 어부 75명이 선혜청으로부터 돈을 받고 그물로 고기를 잡아 사옹원 전관(專管)에게 진공하였으며 이를 얼음창고에 보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특기 사항 이 분원터는 1989년 이승언에 의해 발견되었다.
(8) 쌍록원터[雙鹿院址] ▷ 위치 쌍록원은 시흥시 장하동 원뒤(원후) 마을 북쪽 당채봉 아래의 막둑목장 동북쪽 200m 지점에 있었다. ▷ 역사 및 유래 「안산군읍지」에는 군에서 남쪽으로 5리 되는 곳에 있었으나 이미 폐하여 없어졌다 하였다. 이곳은 고려와 조선 시대 때 남양과 안산 등지에서 개성을 왕래하던 주요 교통로였다. 원(院)이란 고려·조선 시대에 출장여행 중인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각 요로(要路)나 인가가 드문 곳에 설치하였던 숙박소였다. 이 원의 유지를 위해 고려 공민왕 때에 이미 원위전(院位田)을 주었으나 이것이 어느 정도 정비되기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부터였다. 세종 27년(1445년)에는 부근에 살던 사람 중에서 뽑아 원주(院主)로 삼고 이를 관리케 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원주에게 대로면 1결 35부, 중로면 90부, 소로면 45부를 주어 원을 유지하게 하였다고 한다. 원은 한때 크게 번성하였으나 그 사용자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후기에는 점차 쇠퇴하였다. ▷ 특기 사항 이 터는 1986년 이승언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9) 봉황대터 ▷ 위치 위치 미상. ▷ 역사 및 유래 「안산군읍지」를 보면 적길리(현 안산시 신길동 만해와 능길 사이) 헤인에 봉황대가 있었고 그 아래에 사옹원이 있어 조기를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은 현재 아무런 흔적도 없으나 본래 이곳 정상부에는 1.5~2m 정도 높이의 흙으로 된 단이 있어 이곳에서 봉수(烽燧)를 올렸다고 한다. 봉수제는 역제(驛制)와 더불어 전통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연락수단으로 중앙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국경 해안지방의 정황이나 소식을 왕경의 병조에 전달하는 데 이용되었다. 「만기요람」에 보면 평상시에는 횃불 하나를, 적이 나타나면 횃불 둘을, 적이 국경 가까이 다가오면 횃불 셋을, 국경을 침입하면 횃불 넷을, 그리고 교전상태로 접어들면 횃불 다섯을 올렸다고 한다. 조선 시대의 봉수로는 크게 다섯으로 구분되는데 안산 지역을 지나는 서해안도 그 중의 하나이다. 봉황대의 봉수는 남양 해운산에서 전달받아 인천 성산 봉수로 연결되었는데 세종 때 설치되었다가 곧 폐지되고 정왕산 봉수가 그 기능을 대신하였다.
(10) 정왕산(正往山) 봉수터[熢燧址] ▷ 위치 시흥시 정왕동. ▷ 구조 봉수대가 있는 정왕산은 해발 115m의 산봉(山峰)으로서 이곳에서 주변을 관망해 볼 때 해운산(海雲山)과 성산(城山)을 남북으로 바라볼 수 있어 안개등의 기후적인 여건에도 불구하고 전달이 가능한 곳이다. 현재 이곳 정왕산 봉수터에서는 5곳의 연대(烟臺)가 확인되었는데 연대 5곳은 위급한 상황에 따라서 거화(擧火)하였던 봉로(烽爐)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배열 상태를 보면 건물지를 중심으로 120cm 간격으로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각각의 규모는 가로 580cm, 세로 420cm 정도이며 연대의 높이는 확인할 수 없다. 연대의 상부에는 산 정상의 천연적인 암반을 이용하여 건물을 축조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건물은 병기와 기타 기물을 보관하는 창고의 기능을 지님과 아울러 봉수의 기능을 원활히 하기 위한 봉루(烽樓)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의 규모는 850cm×620cm이고 높이는 230cm이다. 봉수의 축조 방법은 산 정상부의 암반을 이용하여 그 위에 20~ 80cm 정도의 돌을 축대처럼 쌓아 올리고 연대를 만들었다. ▷ 출토 유물 조선 시대의 기와편. ▷ 역사 및 유래 정왕산 봉수는 전라·충청 해안으로부터 올라오는 정황을 한성에 전달하는 봉수의 기능을 유지했으나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전국의 봉수제를 폐지함에 따라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건물지에서는 조선 시대의 와편과 토기면이 발견되고 있다. 이 정왕산 봉수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대동지지」·「경기읍지」·「안산읍지」 등 많은 기록에서 나타나는데, 「여지도서」의 군병조에 보면 봉수군의 규모를 봉수군 25명, 별장감관 6명 등 총 31명으로 밝히고 있다. 또한 「안산군읍지」에서는 별장 1명, 감관 5명, 봉수군 25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경기읍지」에서는 토지 5결과 봉보라 할 수 있는 인원 75명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 말기에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던 조선 정부의 봉수제의 강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정왕산 봉수 전후의 봉수로를 살펴보면 흥천산(興天山;수원)-염불산(念佛山;남양)-해운산(海雲山;남양)-정왕산(正往山;안산)-성산(城山;인천)-유곶(杻串;부평)-백석산(白石山;김포)-냉정산(冷井山;김포)-개화산(開花山;양천)-목멱산(木覓山;한성)으로 연결되었다.
(11) 석곡역터[石谷驛址] ▷ 위치 석곡역터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본래 시흥시 거모동 도일에 있었다가 후에 안산시 양상동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 역사 및 유래 「안산군읍지」에는 서쪽 7리 지점에 석곡역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말이 8필 있었고 노비가 33명 있었는데 당시에 이미 폐해져 있었다고 전한다. 역제는 조선 시대의 중요한 교통제도로 전국의 주요 도로에 역을 설치하였다. 「만기요람」에 보면 역마를 이용하는 대상은 대체로 아뢸 것이 있다든가 진상할 것이 있는 사람, 제주자제(濟州子弟), 공물을 운송하는 사람, 진장(鎭將)·역관(驛官)·연변의 가족을 대동하지 못한 수령, 긴급한 군사 사정이 있는 사람, 각 능의 제물을 운반하는 사람, 비변사의 회람·공문을 전달하는 낭청(郎廳), 군졸을 징집하는 공문을 휴대한 장교, 각신(閣臣)으로서 휴가를 받아서 가는 사람 등이었다. 역에는 대로·중로·소로의 구별이 있어서 국왕의 명을 받은 사절 이하는 길을 구별하여 왕래하였으며, 이를 위반하는 자는 관찰사가 규찰하여 조정에 보고토록 하였다.
(12) 수암사터[秀岩寺址] ▷ 위치 안산시 수암동 산 4번지 일대. ▷ 역사 및 유래 이곳은 수암동의 안산과 수암봉 간의 중턱으로 주위에 샘터가 하나 남아 있을 뿐 모두 경작지화되어 절터를 확인할 수 없다. 「안산군읍지」 사찰조에 의하면 정수암은 읍치 뒤 위 수리산에 있었는데 이미 폐하였다고 한다. 그후 산봉이 수암봉으로 개칭되면서 정수암을 수암사라 고쳐 부른 것으로 추측된다.
(13) 원당사터[元堂寺址] ▷ 위치 안산시 수암동 산 13번지 일대.
사진 4-53 원당사지. 수암동 산 13번지 일대에 있으며, 초석 몇 개와 석불 좌상 2구만이 남아 있다.
▷ 역사 및 유래 이곳은 수리산 아래에 해당되는데 축대의 일부와 초석 몇 개, 그리고 석불좌상(石佛坐像) 2구만 남아 있다. 1구는 결가부좌에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보이고 왼손은 파손되었으며, 머리 부분은 목이 부러진 것을 올려 놓았다. 다른 1구는 육계가 있고 목 아래 부분을 둥글게 돌출시켜 의문(衣文)을 선각시켰다. 「안산군읍지」 사찰조에서는 “원당사가 읍치 동쪽 수리산 아래에 있는데 원당사 뒤편에는 우단(雨壇)이 있으며 뜰에는 작은 탑이 있는데 ‘천희원년(天禧元年)’이라는 4글자가 새겨져 있어 삼국 시대에 창건된 절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나타나는 ‘천희’라는 연호는 중국 송(宋)나라와 서요(西遙)에서 사용된 연호로 그 연대는 1017~1021년, 1168~1201년 또는 1177~1211년으로 나타나므로 이 절의 창건은 고려 초기까지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사지에서 발견되는 기와 문양으로 볼 때 조선 시대 말기까지 사용되다가 폐사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14) 소릉터[昭陵址] ▷ 위치 안산시 목내동 산 47번지의 속칭 능산의 상복부(上腹部)에 위치. ▷ 역사 및 유래 이 산은 현재 정순철(鄭醇喆) 씨의 소유로 정씨 문중의 묘소로 되어 있다. 이 소릉(昭陵)은 조선 문종(文宗)의 왕비이며 단종(端宗)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 안동(安東) 권씨(權氏)의 처음 능이다. 현덕왕후는 세종 23년 7월 단종을 낳은 다음날 세상을 떠나 당시의 행정구역상 안산군인 이곳에 장사를 지냈고, 문종이 왕위에 올라 왕후로 추봉(追封)된 후 소릉(昭陵)이라 하였다. 단종(端宗)이 왕이 되자 친제(親祭)까지 지내면서 보호하였다. 그러나 단종이 세조(世祖)에게 양위하고 급기야 죽임까지 당한 뒤인 세조 2년(1456년),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네가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고 하였다. 세조가 놀라 일어나 보니 그때 곧 동궁(東宮)이 죽었다는 기별이 왔다. 이 일이 있은 후 소릉은 파헤쳐지고 주변의 석물들은 땅속에 묻히게 되었다. 그후 중종 8년(1513년) 왕명에 의하여 현덕왕후의 시신을 찾아 경기도 양주의 현릉(顯陵)에 문종과 함께 합장하였다. 소릉은 1978년 단국대에서 부분적으로 발굴하였고 그후 경희대 박물관에서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현실(玄室)을 확인하였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석호(石虎) 2점과 단국대에서 발굴한 난간석조(欄干石柱) 2점이 있으며, 경희대에서 발굴한 석양 1점과 석물 20여 점 등은 안산시 근로청소년회관 후원에 보관되어 있다. 본래 왕이나 왕후의 능에는 호석(護石)과 난간석(欄干石), 4개의 석호(石虎)와 4개의 석양(石羊), 망주석(望柱石)·장명등(長明燈)·상석(床石)·문신석(文臣石)·무신석(武臣石)·석마(石馬) 등이 배치되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발견된 석물 외에 많은 유물들이 아직 능 주변에 묻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15) 김병국 재실터[齋室址] ▷ 위치 안산시 일동 172번지 일대. ▷ 역사 및 유래 김병국(金炳國) 재실은 19세기 말경에 건립된 것으로 전체 규모는 99칸이었으나 30칸 정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나머지 부분은 계속 남아 있었으나 1979년 신도시 개발로 인하여 건물이 헐려 무덤과 묘비 등은 현재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내 고장 전통문화」에 기록된 자료에 따르면 이 건물은 주변의 나지막한 뒷산에 자리잡고 있는 안동 김씨 가묘를 배경으로 산기슭 평지에 있었으며, 정남향의 ㅁ자 건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래의 ㅁ자집 동쪽에 사랑채와 행랑채가 더 연결되어 ㄷ자집이 되었었다고 한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8칸 크기의 전형적 ㅁ자 집으로 안채에서 안방과 대청이 일자로 배치되는 평면 방식을 택하고 있는 단층 기와집이었다. 지붕처리 수법은 안채의 경우 동쪽은 박공, 서쪽은 합각으로 처리하고 전면 행랑은 맞배(세마루 연등청정이란 뜻) 박공으로 하였으며, 양 익랑은 겹친 지붕으로 층층이 내려와 전면 행랑과 만나는 부분에 합각이 생기지 않고 바로 맞닿아 회청만이 발생하도록 하였다.
안채는 세벌대 화강암 지대 위에 집을 앉혔으며 높은 마루와의 사이에는 또 하나의 디딤돌을 놓고 주초(柱礎)는 네모뿔대 모양의 높은 주초이고 기둥은 네모였다. 도리는 납도리이고 장혀는 쓰지 않았으며 상도리에만 장혀와 헛창방을 보내고 사이에 소로를 끼웠다. 대공은 판대공으로 둥근 기분이 나는 사다리꼴이고 종보와 대들보는 거의 맞닿게 처리하였다. 서까래는 4겹으로 부연이 없고 서쪽은 합각 처리, 동쪽은 박공 처리를 하였다. 전면 행랑은 세마루 집인에 4단 위에 올라와 있고 대공은 판대공이고 장혀소로는 없으며 겹서까래 홑처마였다. 좌의 익랑 역시 행랑과 같은데 다만 초석이 약간 높고 안마당과의 사이 기단이 한 단 차이밖에 나지 않으며 대공은 동자주 모양이고 지붕이 층단으로 겹쳐 있었다.
한편 우리 나라 대부분의 집들의 정원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듯하게 처리하는 것이 대부분이나 이 집만은 안마당에 정원을 만들어서 화강석 받침대 위에 괴석을 놓는 등 정원 시설물이 지금은 비록 파괴되었다고 하지만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집은 당대의 권력가의 재실답게 정교하게 지은 집으로 당시 건축의 전모는 밝힐 수 없다 하더라도 당시 건축 기술의 정수를 발휘한 우수한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건물에서 우수한 것은 건물의 상세 처리에 있으며,정원도 수목과 석물 등을 배치하여 19세기 정원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16) 산대장터[山垈場址] ▷ 위치 안산시 선부동.
사진 4-54 산대장터. 산대 시장에서는 주로 토산물을 교역 하였으며, 흔히 장날이면 씨름판이 열리곤 하였다.
▷ 역사 및 유래 원래 안산군 대월면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시흥군 군자면 선부리라 불리우다가 안산시로 편입되었다. 신길동 강명현 씨의 증언에 의하면 산대장터의 위치는 안산·군자·소래로 갈라지는 세 갈래 지점의 동쪽 산기슭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안산군읍지」에 보면 읍의 서남쪽 20리 지점에 산대장이 있는데 외딴곳이어서 통화는 별로 없으나 토산물로써 교역을 하였다고 한다. 이 지역의 토산물은 주로 어류로서 수어·민어·진어·노어·병어·소어·전어·홍어·설어·오징어·대하·세하·석화·토화·대합·소라·낙지 등이었다. 특히 이 지역의 조기는 사옹원 분원을 통해 진상이 될 만큼 유명하였다. 산대 시장은 장날이면 씨름판이 열려 씨름장으로도 유명했으며 산대장 앞에는 오취언(烏嘴堰)이라는 저수지가 있었다.
(17) 안산장시터[安山場市址] ▷ 위치 안산시 수암동 개다리 수암농협 주변 일대 ▷ 역사 및 유래 안산장시는 조선왕조 말엽에 형성된 장시로서 처음에는 3일 8일에 섰다가 그 다음 4일 9일로 바뀌었으며 뒤에는 5일 10일에 열렸다. 주요 거래 품목은 일반 생활필수품이었고 상권은 수암면 일원과 화성군 반월면 일부 지역이었다. 일명 수암시장 또는 읍내장이라고 불렸던 이 시장은 1960년대에 이르러 도시화 추세에 밀려 폐장되었다.
사진 4-55 삼거리 시장터. 한때 번창했으나 군자시장이 생기고 한국전쟁 이후 쇠퇴하여 폐시되였다.
▷ 역사 및 유래 삼거리 시장은 능곡동 출신 박경선 씨가 토지를 희사하여 1938년 9월 30일 재개장된 소시장이었다. 개장은 5일 10일에 열렸고 한때 제법 번창하였으나 군자시장이 생기고 또 1·4후퇴 이후로 점차 쇠퇴 일로를 걷다가 끝내는 폐시되고 말았다.
(19) 방축장터[防築場址] ▷ 위치 시흥시 광석동. ▷ 역사 및 유래 방축장은 조선 시대 말기에 산대장시·안산시장과 함께 시흥군 내에 소재했던 3개 시장 중의 하나였다. 이곳은 당시에는 초산면 광석리였으므로 광석시장(廣石市場)이라고도 불렸다. 이 방축장시는 1920년대에 삼거리 시장으로 되어 처음은 3,8일장으로, 뒤에는 5,10일 장으로 개장하다가 1930년대 후기에 삼거리장이라 불렸다. 그후 1956년 12월 28일에 능곡시장이 되었으나 현재는 폐시되었고 그 자리는 현재 농경지가 되었다.
(20) 광석리(廣石里) 주막터[酒幕址] ▷ 위치 시흥시 광석동.
사진 4-56 월입피 주막터. 고정뿌리 동북쪽 길가에 있었으나 신도시 개발과 더불어 자취를 감추었다.
▷ 역사 및 유래 이 주막터는 물왕저수지에서 서쪽으로 월곶선을 따라가다가 얼미 입구 3거리 지점에 있었다. 「안산군지」를 보면 광석리 주막터는 읍에서 10리 떨어져 있는데 행인이 적으며 봄·가을로 소금상인이 간혹 들리기 때문에 이것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기가 곤란하다고 하였다.
(21) 월입피(月入陂) 주막터[酒幕址] ▷ 위치 안산시 월피동. ▷ 역사 및 유래 「안산군읍지」에 의하면 읍에서 10리쯤 떨어져 월입피 주막이 있었으나 손님은 물길 행인이나 소금장수 정도여서 생업이 넉넉하지 못했다고 한다. 월입피 주막은 1970년대 말 신도시개발과 함께 없어졌다고 하는데 원위치는 고정뿌리(부리) 동북쪽 길가에 있었다. 고정뿌리는 광덕산의 한 줄기가 마을을 가로질러 내려와 용혈(龍穴)을 이루고 있는 능선에 있던 정자목이다. 이 정자목은 1984년에 베어졌다고 하는데 이 용혈 또는 용두(龍頭)가 있는 구릉은 상여가 절대 지나지 못하고 멀리 우회하여 지나갔다고 한다.
4. 지석(誌石)
(1) 청주 한씨 묘지(墓誌) ▷ 위치 안산시 양상동 산 5번지 일대. ▷ 구조 이 청주(淸州) 한씨(韓氏) 묘역에서는 4기의 회곽분이 발굴되었으며 총 71장의 묘지(墓誌)가 출토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묘지의 크기는 11×11×5cm이며 묘지 하나에 한 글자씩 음각하고 숯으로 채워 넣었다. 재질은 석회·세사·황토 등의 삼물이다. 이런 종류의 묘지는 조선 시대의 분묘에서 일반적으로 많이 발견되는 형태이다. 71호분에서는 모두 19개의 지석이 발견되었고, 이 분묘의 동쪽에 붙어 있는 회곽에서 회곽 위에 일렬로 배치된 9개의 지석이 발견되었다. 2호분은 1호분에서 서쪽으로 약 10m 지점에 있었다. 역시 회곽분(灰槨墳)으로 회곽 위에는 12개의 지석이 회곽의 중앙을 따라 일렬로 놓여 있었다. 3호분은 2호분에서 서쪽으로 3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회곽 위에는 14×14×5cm 크기의 묘지 30개가 놓여 있었다.
▷ 역사 및 유래 마산(麻山)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줄기의 끝 부분에 양상동 아랫보대 마을이 있는데, 고분은 이 마을 뒷산의 해발 50m 정도의 젖소사료용 초지 안에 있었다. 이 유적은 신갈`-`반월순환고속도로 건설공사의 일환으로 실시된 지표조사에서 발견되어 1988년 한양대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그 결과 고분은 모두 3기의 조선 시대 분묘로 당시의 가장 일반적인 묘제인 회곽분(灰槨墳)임이 밝혀졌다. 출토 유물은 회곽 위에서 여러 장의 지석이 발견되었는데 이 지석을 통해 이 무덤들의 피장자들은 청주 한씨와 그 가족들임이 밝혀졌다. 1호분에서 출토된 19장의 지석은 머리 방향인 북쪽에서부터 회곽의 장축을 따라 중심부에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그 내용은 “通訓大夫行○○○○淸州韓公諱鎔基之○”였고 글씨는 해서체였는데, 가운데 관직에 해당하는 4개의 글자는 판독이 어려웠다.
1호분의 동쪽에 붙어 있는 또 하나의 회곽에서 9개의 지석이 발견되었는데 역시 회곽 위에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그 내용은 “淑人迎日鄭氏之墓坐”였다. 숙인(淑人)은 조선 시대의 종3품인 문무관의 처에게 주던 봉작(封爵)으로 영일 정씨는 좌측 한용기의 부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2호분은 1호분에서 서쪽으로 약 10m 지점에 있었는데 역시 회곽분(灰槨墳)으로 회곽 위에는 12개의 지석이 회곽의 중앙을 따라 일렬로 놓여 있었다. 그 내용은 “淑夫人靑松沈氏之墓꽈毗─굻눼. 부좌(뀜)라는 것은 부부를 합장했을 때 아내를 남편의 왼쪽에 묻는다는 뜻인데 이것으로 보아 남편의 무덤은 그 오른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간좌(艮坐)라는 것은 무덤의 방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동북향임을 말해 주고 있다.
3호분은 2호분에서 서쪽으로 3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회곽위에는 역시 14×14×5cm 크기의 묘지 30개가 놓여 있었다. 회곽의 중간 부분에 우측에서부터 8장씩 4열로 놓여 있었는데 그 내용은 “通政大夫行朔州都護府使兼朔州鎭兵馬檢節制使淸州韓公之墓辰坐原”이었다.
묘지를 만드는 방법은 1,2호와 같이 하나의 묘지에다 해서체로 한 자씩을 음각으로 새기고 그 음각한 곳에다 숯으로 채워 넣었다. 묘지에는 관직은 비교적 자세하게 나타내고 있으나 피장자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피장자가 역임했던 병마첨절제사는 태종 9년(1409년)에 설치된 관직으로 각 진영(鎭營)에 속했던 무관직(武官織) 절도사(節度使)의 아래에 있던 직책이었다. 마지막의 ‘원(原)’자는 묘지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 3호분의 피장자는 2호분인 청송 심씨의 남편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지석들은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이는 것들이지만 정식의 학술조사를 통해 이처럼 완전한 묘지가 출토된 것은 매우 중요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이는 조선 시대 분묘 축조 양식 및 청주 한씨 가문의 묘지 매장 방법도 알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2) 윤종영(尹鍾永) 묘지(墓誌) ▷ 위치 안산시 초지동에 있었으나 반월공단이 들어서면서 이장하게 되어 1977년 겨울 후손들에 의해 개장(開葬)되어 유골은 화장되었다.
▷ 구조 윤종영 묘에서 출토된 지석은 모두 26장으로 각각의 크기는 19×17×6cm였고 형태는 직육면체이며 석회·세사·황토의 삼물을 잘 배합하여 만든 것으로 단단하였다. 표면은 전체적으로 0.1cm 정도의 두께로 적색의 점토를 발라 주황색을 띠고 있었다. 글씨는 앞면과 뒷면에 새겨 넣었는데 해서체의 글씨를 음각으로 새기고 그 안에 두텁게 먹을 칠해 놓았다. 앞면에는 피장자의 관직과 이름을 지석 1개당 글자 한 자씩을 새겼으며 뒷면에는 우측에서부터 종서로 세 글자씩 세 줄을 새겨 지석 하나당 9자의 글자를 새겨 놓았다.
윤종영 부인의 무덤에서도 10장의 지석이 발견되었다. 이 지석은 크기가 17×17×7cm이며 역시 삼물로 만들고 표면에 진흙의 슬립(Slip)을 발라 놓았는데, 앞면과 뒷면에 음각 글자를 새겼고 그 안에 먹으로 두텁게 칠해 놓았다. 역시 앞면은 글자 한 자씩, 그리고 뒷면은 우측에서부터 종서로 세 글자씩 세 줄을 써 모두 아홉 자를 새겨 놓았다.
▷ 역사 및 유래 지석은 무덤을 개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는데 모두 회곽 위에 놓여있었다. 앞면에 새겨진 글자는 “大韓從二品嘉善大夫行掌禮院少卿坡平尹公諱鐘永之墓亥坐”였고, 뒷면은 이 내용을 좀더 보완하는 것이었는데 그 내용은 “公坡平尹氏諱鐘永字稚世號貞石始祖諱幸達高麗太師八世祖諱趾完號東山右議政謚曾祖諱○郡守曾吏曺參議祖諱榮厚贈秘書院丞考諱琓進士曾內部協辨碑女比曾貞夫人昌寧成氏監贈內部協辨諱載崇女公生於憲廟己亥八月十七日甲戌進士辛卯大科癸巳陞通政辛丑嘉善修撰副校理正言掌令南學敎授工曹參議敦寧府都正同副承旨議官特進官掌禮院少卿洪州郡守順川郡守卽公內外職踐歷也光武九年六月二十日卒用七月什四日葬于草芝親山下亥原配貞夫人海州吳氏學生諱成默女育一男一女男承茂女適參奉徐丙宙早均承茂有三女長適李錫圭二幼”으로서 피장자인 윤종영의 가계와 약력이었다.
이에 따르면 윤종영은 자가 치세(稚世)이고 호는 정석(貞石)이다. 진사(進士) 완(琬)의 아들로 태어나 고종 28년(1891년) 신묘대과(辛卯大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정언(正言)·공조참의(工曺參議)·홍천군수·순천군수 등을 역임하고 광무 9년(1905년)에 죽었다는 내용이다.
윤종영 부인의 무덤에서 발견된 지석의 앞면 내용은 “貞夫人海州吳氏之墓亥坐”이고 뒷면은 “從二品少卿坡平尹公鍾永配海州吳氏考成默 延安李氏父校理尙愚舅進士琬姑昌寧成氏父監役載崇憲宗戊戌三月十一日生壬子十二月六日卒二十四日合定于草芝男承茂孫東哲幼”이었다. 그 내용을 약술하면 윤종영 부인인 해주 오씨는 헌종 4년(1838년)에 태어나 1912년에 죽었으며 초지리에 있는 부군과 합장하였다는 것이다.
(3) 경덕국사(景德國師) 묘지(墓誌) ▷ 위치 국립중앙박물관. ▷ 구조 점판암에 음각을 한 것으로 크기는 37×75×5cm이다. ▷ 역사 및 유래 고려 시대 왕사(王師)요 도승통(都僧統)이었던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이다. 제작 연대는 고려 문종 20년(1066년)이다. 글씨는 앞면에만 해서체 종서(縱書)로 한 줄에 13자씩 모두 261자를 새겼다. 그 원문 내용은 “九龍山福興寺故王師都僧統贈謚京德國師墓誌幷書國師諱爛圓俗性金氏其先安山郡人也故尙書左僕射諱兢弼祖也故檢校太師上柱國謚安平公諱殷傳父也故安孝國大夫人李氏 故中○使兵部尙書忠贊兄也故首座弘[ ]師也師自削周羅脫身于豪戚間遭遇累朝歷揚○주귀급순이보위왕사지혜화과자연성취찬위인중지사자의오호평이감옹이년병오종십월팔일시”였다.
경덕국사는 이름이 난원(爛圓)이고 성은 김씨로 그의 선계가 안산군(安山郡) 사람이다. 50세에 왕사(王師)가 되었으며 문종 20년(1066년)에 69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임시로 오룡산의 남쪽 기슭에 장사를 지냈다가 구룡산의 복흥사에 비탑(碑塔)을 세웠다. 경덕국사의 제자로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과 낙진(樂眞) 스님이 있고, 승도(僧徒)로는 창원(昶元)·준조(俊조)·응천(應闡) 등이 있다. 이 경덕국사의 묘지는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고려 시대의 묘지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경덕국사(景德國師)
고려 목종 2년(999) ~ 문종 20년(1066)
고려 시대의 왕사(王師). 본관은 안산(安山). 속성은 김(金), 속명은 난원(爛圓). 안산현(安山縣;현 안산시 장상동) 출신으로 아버지는 호부상서 김은부(殷傅), 형은 병부상서 충찬, 할아버지는 안산김씨 시조 상서좌복야 긍필이고 문종의 외숙부이며, 대각국사 의천의 스승이다.
문종 12년(1058)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왕사가 되었고, 도승통(都僧統)을 역임하였다. 문종 19년 5월 문종의 아들인 후(煦;의천, 대각국사)를 중이 되게 하였고 화엄교관(華嚴敎觀)을 가르쳤다.
구룡산(九龍山) 복흥사(福興寺) 주지를 지냈다. 죽은 후에 복흥사에 비를 세우고 시호로 경덕(景德)을 내리고 국사(國師)로 추존하였다. 그의 묘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사는 머리를 깎고 호척(豪戚) 사이에서 몸을 빼어낸 이후 여러 대에 걸쳐 계속 승계(僧階)를 높여나갔다. 예순에 이르러 왕사(王師)가 되었으니, 지혜의 꽃과 과실이 스스로 무르익어 사람 중의 스승이라는 찬상을 받았다.
아, 함옹(咸雍) 2년 병오년(문종 20, 1066) 10월 8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68세이고, 승랍은 57세이다. 매우 슬퍼하여, 모두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신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곧 그 달에 조칙을 내려 장례일을 돌보게 하여 오룡산(五龍山) 남쪽 언덕에 임시로 모셔두었다가, 다시 임자년(壬子年? : 문종 26, 1072 ) 10월에 비와 탑을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서북쪽 모퉁이[乾隅]에 세우고, 영해(靈骸)를 받들어 이 곳으로 이장하여 모셔두었으니, 순리에 따른 것이다.
문하의 제자들이 위업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이에 묘지(墓誌)를 짓는다.
구룡산(九龍山), 산 중에 빼어나고 경덕국사(景德國師), 스승 중에 으뜸이시다. 저 사찰에서 이미 성불(成佛)의 진리를 깨우쳤으니
이 영혼의 터전에서 또 평안히 하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5. 기타 유적-선정비군(善政碑群)
▷ 위치 안산시 안산동사무소 정문 앞에 세워져 있다. ▷ 구조 모두 4기인데 이 중 1기는 관찰사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이고 나머지는 군수 선정비이다. ▷ 역사 및 유래 이 비들은 원래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약 300m 지점인 옛 안산군 관아 입구의 도로변에 있었으나 1988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 군수 임세량(林世良) 선정비 ▷ 위치 선정비군의 가장 서쪽에 위치. ▷ 구조 화강암으로 만든 비신의 크기는 190×75×30cm이고 기대는 70×126×20cm이다. 비신에 몇 군데 총상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상태가 양호하다. 비개(碑蓋)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결실되었다. ▷ 역사 및 유래 비신의 전면에는 “郡守林公世良淸德愛民善政碑”라 적혀 있다. 이 비석은 숙종 31년(1705년)에 세워졌다.
(2) 관찰사 박종기(朴宗琦) 영세불망비 ▷ 위치 임세량 선정비 동쪽에 위치. ▷ 구조 비신의 크기는 135×52×21cm, 기대의 크기는 64×90×25cm이다. 역시 비신에 총상 흔적이 있다. ▷ 역사 및 유래 앞면에 “觀察使朴公宗琦永世不忘碑”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순조 27년(1827년)으로 추정된다.
(3) 군수 김철순(金徹淳) 선정비 ▷ 위치 박종기 영세불망비의 동쪽에 위치. ▷ 구조 비신의 재질은 화강암이고 크기는 135×52×21cm이다. 기대의 크기는 52×89×20cm이며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으나 조잡하다. ▷ 역사 및 유래 비석의 앞면에는 “郡守金候徹淳愛民善政碑”라 적혀 있고 뒷면에는 “丁亥十月 日立(1707년?)”이라 적혀 있다.
(4) 군수 이겸진(李謙鎭) 선정비 ▷ 위치 비군의 가장 동쪽에 위치. ▷ 구조 비신의 상태가 양호하며 크기는 128×44×17cm이다. 기대는 85×60×25cm인데 비신과 대좌의 홈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짝이 아니다. ▷ 역사 및 유래 비신의 전면에는 “郡守李公謙鎭淸德愛民善政碑”라 적혀 있고 뒷면에는 “崇禎紀元後三癸酉(1813년) 十一月 日立”이라 적혀 있다.
▷ 위치 안산시 일동 555번지. 수인산업도로에서 일동으로 빠지는 교차로로 내려서서 수인산업도로와 나란한 이면도로에서 부곡동 쪽으로 직진하다 보면 우측에 나지막한 구릉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이익 선생의 묘소이다.
▷ 구조 봉분의 규모는 600×550×220cm이다. 석물은 묘비 및 상석·향로석·망주석 등이 있다. 묘비의 재질은 오석(烏石)이며 선생 사후 204년이 되는 1967년에 건립된 것으로 옥개석 90×60×50cm, 비신 146×57×26cm, 기대석 100×62×20cm의 규모이다. 전면에 “星湖先生李公諱瀷之墓贈貞夫人高靈申氏 左贈貞夫人泗川陸氏꿴丹굡箚 적혀 있다. 상석은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으며 규모는 121×83×58cm이며 향로석은 39×28×39cm, 망주석은 165cm이다. 두향은 북향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 역사 및 유래 조선 시대 실학의 대가 이익(李瀷) 선생의 묘소로 선생의 자(字)는 자신(自新), 호는 성호(星湖)이며 본관은 여주이다. 숙종 31년(1705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이듬해 당쟁으로 형 잠(潛)이 희생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낙향하여 한평생 학문에 정진하여 실학의 대가가 되었다. 그는 일생을 안산 첨성촌(瞻星村)에서 기거하며 유형원(柳馨遠;1622~1673년)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의 중조로 추앙받았으며 그의 학문은 안정복·이가환·이중환 등의 실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이익 선생은 천문·지리·의학·재정·지방제도·과거제도·학제·병제·관제 등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비판과 이상 및 사상을 담은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비롯하여 「곽우록(藿憂綠)」·「성호문집(星湖文集)」 등을 남겼다. 1763년(영조 39년)에 83세로 운명하였으며 이조판서로 추서되었다.
.
사진 4-1 성호 이익 선생 묘소 전경. 일동 555번지에 있으며, 1997년 경기도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되었다
▷ 특기 사항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되었으며, 묘소 우측에는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다.
(2) 별망성지(別望城址)
▷ 위치 안산시 초지동 656번지.
▷ 구조 기본적인 구조는 석축성(石築城)이다. 바다에 인접해 있는 해발 49m, 65.9m인 야산의 능선을 연결하여 석축을 쌓고 성벽을 해안까지 연접시켜 선박의 출입이 가능하도록 한 해안 평산성(平山城)이다. 1942년 발간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원래 석축성의 높이는 1.2~2.1m, 둘레는 1040m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성벽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1988년에 길이 225m, 높이 1.45m, 상부폭 2.4m, 하부폭 10m 정도로 복원하였다.
▷ 출토 유물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기와인 파상문(波狀文)과 무문(無文)의 기와편들과 자기편들이 출토되었다. 대부분의 유물들이 성벽 안쪽의 평탄한 대지에서 출토되고 있어 이곳에 군영지(軍營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4-2 별망성지. 초지동 656번지에 있으며, 1997년 경기도 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되었다.
▷ 역사 및 유래 별망성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문종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남아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汝串:在郡西南三十里一名草芝有水軍萬戶守禦”라는 기록이 있고, 「문종실록」에는 이곳에 있던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이 갯벌로 인해 출입이 어려워지자 사곶(沙串)으로 영을 옮겼다가 문종 때 소릉(昭陵)이 인근 목내리에 있게 되고 바다가 다시 깊어져 선박의 출입이 가능해지자 다시 영(營)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곳에 있던 초지양영(草芝梁營)이 효종 7년(1656년)에 강화로 옮겨가 성의 옛터만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별망성은 15세기 초에 축조되어 17세기 중엽에 폐성되기까지 약 250년 동안 서해안의 방어를 위한 중요한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호(萬戶)는 고려 후기~조선 초기의 관직이며, 만호부는 왜구의 침입이 잦은 해안지역에 설치한 병영이다. 따라서 이 성은 남양만을 통해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특기 사항 이 성은 해안선 방어를 위해 수군만호가 주둔하던 영(營)이지만 육상전투까지 대비해 배후의 산능선까지 연결하여 비교적 큰 규모로 축조한 것이 특징이다. 간혹 별망성을 고려 시대의 삼별초 항쟁과 연관시키는 해석도 있으나 문헌자료와 출토 유물들로 볼 때 축조 시기가 조선 시대 이전으로 올라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1979년 9월 3일 경기도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되었다.
(3) 안탄대(安坦大) 선생 묘
▷ 위치 안산시 성곡동 615-1번지.
▷ 구조 봉분은 쌍분으로 직경 350cm, 높이 150cm이다. 석물로는 묘갈(墓碣)·상석·향로석·망주석·문인석 등이 있다. 묘갈의 비신은 142×55×23cm, 기대석은 99×60×15cm이며 재질은 흰대리석이다. 전면에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安公之墓贈貞敬夫人黃氏뀜㎕굡箚 쓰여 있다. 상석은 150×94×50cm로 재질은 화강암이다. 향로석은 32×25×42cm, 망주석은 190cm, 문인석은 175cm이다.
▷ 역사 및 유래 조선 시대 중종의 빙장(聘丈)이며 선조의 진외증조부(陳外曾祖父)인 안탄대 선생의 묘소이다. 안탄대의 딸인 창빈안씨(昌嬪安氏)는 중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2남 1녀를 생산하였는데 장남이 영양군(永陽君)이고 2남이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며 딸은 정신옹주(靜愼翁主)이다. 조선왕조 25대 선조가 덕흥대원군의 아들로 안탄대의 외손이다. 그는 정7품의 벼슬을 지냈으며 사후 우의정에 추서되었다. 안탄대 선생은 집안이 몹시 가난했음에도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일에는 결코 눈을 돌리는 일이 없었으며, 성품이 매우 온순하고 부드러워 다른 사람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안공은 딸이 빈이 된 다음부터는 더욱 몸가짐을 조심하였으며 화를 내거나 남의 성미를 돋우는 일이 없었다 한다. 특히 창빈이 아들은 낳은 후에는 문밖 출입을 삼가하는 등 왕자의 외가로서의 처신을 조심하였다 한다. 그의 묘비문에 따르면 효종 때 왕명으로 비문을 지으면서도 안산 안씨만을 밝혔을 뿐 그의 선조와 가계를 밝히지 않았으니 그의 자나 호는 물론 출생일·사망일조차 전해지지 않고 있다.
사진 4-3 안탄대 선생 묘소 전경. 성곡동 615-1번지에 있으며, 1985년 경기도기념물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4-4 안탄대 선생 묘비. 왕명으로 비문을 지었 으나 선조와 가계는 안 밝히고 안산 안씨만을 밝혔다.
▷ 특기 사항 안탄대 선생의 소생은 무남독녀인 창빈안씨(昌嬪安氏)뿐이었기 때문에 그 묘소를 관리하는 후손이 없어 폐허화된 것을 효종(孝宗) 때 인조(仁祖)의 셋째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 등의 상소에 의하여 왕명으로 선생의 묘소를 확장·복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손봉사(外孫奉祀)케 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외손인 전주 이씨 영양군파(永陽君派) 종중에서 매년 정성스럽게 시제를 지내며 묘소를 관리하고 있다. 안탄대 선생의 묘소는 1985년 9월 20일에 경기도기념물 제83호로 지정되어 보존·관리되고 있으며, 묘소 바로 아래쪽에 선생의 외현손(外玄孫)이며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을 지낸 이잠(李潛)의 무덤이 있다.
(4) 고송정지(古松亭址)
▷ 위치 안산시 화정동 산 58번지.
▷ 구조 원래 이곳에 있던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굴도리집으로 각주하였으며 겹처마에 팔작지붕이었다. 1992년에 전면 보수하였다.
▷ 역사 및 유래 조선왕조 세조 2년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했다가 참화를 당한 김문기(金文起)의 손(孫)인 김충주(金忠柱)가 살던 자리이다. 김충주는 조부 김문기, 부친 김현석(金玄錫)이 참화를 당하자 밤중에 도성을 탈출하여 여려 곳을 전전하다가 화정동에 숨어 살았다고 하는데, 풀을 엮어 집을 짓고 숯을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했으며 스스로 호를 탄옹(炭翁)이라 칭하고 평생 고기와 술을 먹지 않고 베옷에 평립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단종에 대한 마음이 변할 때마다 단종의 묘소가 있는 영월을 바라보며 통곡하였으며 조부와 부친이 비명에 간 것을 애통해하여 눈물을 흘렸는데, 그의 이러한 눈물에 소나무조차 말라죽었다고 한다. 그 말라 죽은 소나무가 있던 자리가 바로 고송정으로 순조 27년(1827년)에 그의 9세손인 진사 김처일(金處一)이 이곳에 고송정(枯松亭)을 지었다 한다. 정자 왼편에 탄옹고지(炭翁古址)라고 암각한 바위가 있고, 주변에 수령 5백여 년 된 느티나무와 향나무가 있다.
.
사진 4-5 고송정. 화정동 산 58번지에 있으며, 1988년 경기도기념물 제10 호로 지정되었다
▷ 특기 사항 1988년 3월 21일 경기도기념물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5) 안산읍성 및 관아터
▷ 위치
안산시 수암동 산 26-4,27번지. 수원에서 수인산업도로를 타고 가다 수암을 지나자마자 동쪽을 바라보면 수암봉(秀巖峰) 앞에 작은 구릉처럼 보이는 곳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안산읍성이다.
읍성은 수암봉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려와 소금절이골과 작은골 사이에 형성된 해발 1백여 미터의 산능선을 이용하여 남쪽으로 평지를 감싸안도록 축성된 평산성이다. 성의 남쪽은 민가가 들어서 있어 거의 파괴된 상태이며, 성돌로 보이는 다듬어진 돌들이 민가의 담으로 이용되고 있다. 성 안에는 고려 말~조선 초기의 무장(武將)인 김정경(金定卿;1345~1419년)의 사저와 망해정(望海亭)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젖소의 축사가 자리하고 있을 뿐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김정경이 심었다고 하는 수령 6백여 년 된 은행나무 한 그루만 남아 있다.
읍성 주변에서는 조선 시대의 기와편이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성의 남쪽에는 조선 시대의 안산 관아로 사용되다가 일제 시대에 수암면사무소로 이용되던 건물 터가 남아 있다. 안산읍성은 자연 능선과 평지를 연결하여 쌓은 평산성인데, 이는 우리 나라 성곽의 특징으로서 산성과 평지성의 절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의 형태는 장방형으로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각 모서리가 약간 둥글게 처리된 말각 사각형이다.
사진 4-6 안산읍성터. 수암동 산 26-4, 27번지 일대에 위치하며 성의 남쪽은 파괴되어 성돌만 남아 있다.
읍성 전체의 둘레는 772.2m인데 그 중 동벽은 180.6m, 서벽은 174.7m, 남벽은 197.5m, 북벽은 219.4m이다. 성 내부의 면적은 대략 36,000m²(12,000평) 정도 된다. 이 읍성의 주된 방어지역은 서쪽과 북쪽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자연지형을 이용한 성벽 아래쪽은 매우 가파르고 높은 몇 개의 단으로 형성되어 있다. 성벽은 대체로 자연능선 정상부를 이용하여 바깥 면은 삭토하고 안쪽은 보축하는 방법으로 축조하였으나 남쪽과 북문지 부분은 가운데에 잡석을 쌓고 그 위에 흙을 쌓은 석심토축의 방법으로 쌓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읍성의 동벽은 해발 108m의 구릉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내려 왔는데, 정상부로부터 절반 정도는 성벽이 잘 남아 있으나 남쪽은 무덤과 도로 등으로 매우 훼손되어 있다. 또한 이곳은 5~10년생의 잡목과 잡초가 우거져 있으며 성벽의 기단부로 보이는 장대석들이 남북으로 길게 노출되어 있다.
지표에 윗부분만 노출되어 있는 장대석들을 시굴·조사해 본 결과 생토층 위에 길이 1m, 폭과 두께 50~80cm에 달하는 장대석들이 남북 방향으로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고 그 안쪽에는 20~30cm 크기의 돌들이 쌓여 있었다. 이 성돌들의 재질은 화강편마암이며, 장대석을 제외하고는 치석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장대석들을 기단부에 쌓아 윗부분의 토축 붕괴를 방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장대석 안쪽에는 할석들을 폭 2.5m, 두께 0.5m 정도로 장대석을 따라 길게 쌓았고, 할석을 쌓은 안쪽에는 흙을 다져서 쌓았는데 성벽의 다진 흙 층의 깊이는 현재의 표토에서 생토층까지 136cm이며 모두 6개의 토층으로 구분되었다. 각각의 토층은 삼국 시대의 토성처럼 정교하게 판축된 것이 아니라 모래가 섞인 황토를 대강 다져 놓은 것처럼 압착 상태가 치밀하지 못하였다. 6개의 층위 중 바닥을 1층으로 할 때 그 층위 구분은 표 4-1과 같다.
이 성벽은 현재의 자연 경사면을 고려할 때 성벽의 하단부 폭은 7m 정도이고 토성의 경사도는 45도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원래의 성벽 높이는 대략 3~4m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벽은 남쪽의 평지 부분으로 내려오면서 훼손 상태가 심한데 그 중간 지점은 민묘를 쓰느라 거의 파괴된 상태였고, 그 아래쪽은 경작지로의 개간과 도로의 개설로 겨우 흔적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북벽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연결되는 수암봉의 능선을 이용하여 쌓았는데, 성벽의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성벽은 능선의 정상부에 보축하는 방법으로 쌓았는데, 능선의 윗부분을 폭 4m 정도로 평평하게 다듬고 그 위에 30~50cm 크기의 돌을 이등변삼각형 모양으로 10단 정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흙으로 덮었다. 이렇게 보축한 성벽으로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높이 1.8m, 하단부 폭 3m 정도이다.
서벽은 북서쪽 정상부를 감싸안으며 90도 각을 이루며 남쪽으로 꺾여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이곳에는 조림한 향나무와 아카시아 등의 잡목이 우거져 있다. 성벽의 기단부에는 성벽의 안과 밖으로 3단의 기단석이 노출되어 있다. 서벽은 성벽 안쪽이 바깥쪽보다 1m 정도 높은 완만한 경사면에 만들어졌는데 하단부의 폭은 7m, 현재의 높이는 2m 정도이다.
성벽의 경사각은 약 30도로 매우 완만한데 본래의 경사도가 45도 정도였을 것으로 가정하면 원래의 성벽의 높이는 4m에 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45도는 토성을 쌓을 경우 오랫동안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최대의 경사도라고 할 수 있다. 성벽의 양쪽 하단부에는 흙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크기 30~40cm, 높이 10~15cm의 돌로 3단을 쌓아 놓았다. 이 서벽의 남쪽 부분은 경작 등으로 훼손되어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남벽은 서쪽 능선 말단부에서 낮은 평지를 가로지르도록 축조되어 가장 파괴가 심하다. 동쪽 부분은 후대에 관아의 뒷담장으로 이용된 높이 2m 정도의 단이 남아 있으나, 서쪽은 민가가 들어서면서 대부분 파괴되어 흔적을 찾기 어렵다. 단지 성벽의 석심이나 기단부를 쌓는 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성돌들만 민가의 축대나 담으로 이용되어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읍성 내의 구조물로 대표적인 것이 행정시설이다. 조선 시대 읍성의 경우로 볼 때 성내의 행정시설로는 객사와 동헌, 그리고 여러 가지 부속 건물이 있다. 이 읍성 안에서는 구조물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전혀 없으나 여러 동의 건물이 있었을 것이며 성문 시설과 북서쪽 정상부에는 장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문지(門址)로 추정되는 곳은 북문지·동문지·남문지 등 3곳이 있다. 그 중 남문은 이 읍성의 주된 통로로 보이는데 현재 파괴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동문지는 사실상 좀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현재 통로가 있는 지점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중 잘 남아 있는 것이 북문지이다. 북문지는 성 안쪽에서 소금절이골로 넘어가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는데 이곳은 성벽이 절단되어 단면이 노출되어 있으며 약 40도 정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V자형으로 된 문지의 상부 간격은 9m 정도이며, 가장 낮은 곳에서 윗부분까지의 높이는 3m 정도이다. 이러한 북문지의 평면 형태는 토성에서 많이 보이는 개방형식으로 성문에는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장대는 성 북서쪽 정상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30여 평의 넓고 평탄한 대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곳곳에 예비군들이 파 놓은 참호가 있다. 여기저기 20~30cm 정도의 돌들이 노출되어 있어 건물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장대지 중심에 대한 시굴 조사 결과 깊이 50cm 지점에서 생토층이 나타났으며, 특별한 유구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고려 시대의 토기편이 여러점 출토되었다.
건물의 초석이 발견된 곳은 없으나 성내에서 많은 양의 기와편이 발견되고 있어 성내에 여러 동의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성의 남서쪽 중간 지점에서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어골문와(魚骨文瓦)가 많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현재 무덤 혹은 밭으로 변해 있다.
성 안에는 그 밖에 조선 초기의 무장인 연성군 김정경과 관련된 유구가 남아 있다. 표식적인 것으로는 관아터에서 성으로 들어오면서 성의 안쪽에 김정경이 심었다고 하는 3그루의 은행나무 중 한 그루가 남아 있다. 이 은행나무는 높이 20m, 둘레 6m인데 수령은 6백여 년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거처였다고 하는 곳은 현재 민가가 들어서 있어 흔적을 찾기 어렵다.
▷ 출토 유물 지표 조사를 통해 성내에서 채집된 유물은 와편이 대부분이고, 기타 토기편과 자기편 등도 상당량 발견되었다. 유물은 관아터에서 북문지로 넘어가는 소로 주변의 밭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기와는 주로 무문와이나 어골문와도 많이 있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기와들은 여단터나 사직단터에서 발견되는 기와들과는 양상이 다르다. 여단이나 사직단에서 발견되는 기와들은 전형적인 조선 시대 기와로 파상문이 주종을 이루며 투박하고 회청색의 단단한 느낌을 주는 반면, 이곳에서 발견되는 것은 파상문보다는 어골문이나 변형 어골문 계통이 많으며 부드러운 느낌을 주어 성 안에서 발견되는 기와들의 제작 시기가 훨씬 이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어골문와나 변형 어골문기와는 고려 시대에 많이 쓰이던 등문양이며, 조선 시대에는 대체로 파상문이 주류를 이루었다.
토기편들은 흑회색의 경질 항아리편이 대부분인데, 기벽은 얇고 구연부는 심하게 외반하고 있으며 구연부의 직경은 14m, 21cm, 30cm, 40cm 등 매우 다양하다. 소성(燒成) 방법이나 형태 등으로 볼 때 고려 후기~조선 시대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자기류로는 분청사기와 백자편들이 있는데 분청사기 안쪽은 빽빽하게 꽃무늬가 있으며 제작 수법이 상당히 정교하다. 반면 백자는 투박하며 색이나 소성 상태가 뛰어나지 못하다.
▷ 역사 및 유래 읍성은 본래 지방행정부가 있는 고을에 축성되며 성 안에 관가와 민가가 함께 있어 군사적인 기능과 행정적인 기능 모두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읍성은 대체로 평산성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평산성이란 산성과 평지성의 절충형으로 배후의 산이나 구릉에 의지하여 평지를 감싸안도록 쌓은 성을 말한다. 이러한 형태상의 특성은 우리 나라 지방도시들이 배후에 진산을 두고 발달한 데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대부분의 우리 나라 성(城)은 산성의 형태이나 읍성의 형태가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삼국 시대부터이다. 그러나 읍성이 본격적으로 축성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후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이를 방어하기 위해 해안지역부터 본격적으로 읍성을 쌓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전란에 대비하여 고을 주민을 수용하기 위한 읍성의 축조가 더욱 활발히 진행되었다. 성종 때의 예를 보면 전국의 행정구역 수가 330개소인데 당시의 읍성 수가 190개소나 되었다. 이들 읍성 중 원형에 가깝게 보존된 성은 동래읍성·수원성·해미읍성 등 9개소이고, 일부라도 남아 있는 읍성은 63개소 정도이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조선 시대 축성된 것이거나 조선 시대 석성으로 개축된 것이기 때문에 안산읍성처럼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고려 시대의 읍성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안산 지역은 대중국 무역로인 남양만의 관문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서해를 통한 수도권으로의 칩입을 방어하는 데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조선 시대 초기에는 이곳의 초지진에 수군만호부를 두어 해안 방어에 주력하였다. 만호란 고려 말~조선 초에 있었던 관직으로 대체로 정4품관이 임명되었으며, 만호부는 주로 왜구의 침입이 잦은 지역에 설치되던 병영이었다.
「고려사」에 보면 우왕 1년(1375년) 2월에 왜가 안산·검주·부평·인주에 침입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우왕 2년에도 왜가 안산군에 침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곳은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지역으로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축성이 불가피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지역은 고려 시대 덕종(德宗)·정종(靖宗)·문종(文宗)이 탄생한 고을이라 하여 충렬왕 34년(1308)에는 안산군으로 승격이 될 만큼 중요시되던 지역이었다. 이 안산 읍성에 대한 문헌 자료로는 정확하게 조사·기록된 것은 없지만 개괄적인 상황이라도 기록해 놓은 문헌 자료가 있다. 우선 광무(光武) 4년(1900년)에 발간된 「안산군읍지(安山郡邑誌)」에는 “城堡遺墟在於客舍衙舍之後”라고 하여 관사와 객사 뒤에 성터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연성산에 낮은 토루가 있는데 둘레가 약 2백 칸 정도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연성군(蓮城君)의 거성이며 후에 장항구현(獐項口縣)을 이곳에 옮겼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연성군은 고려 말~조선 초기(태종)의 무장인 김정경(金定卿;1345~ 1419년)의 시호이다. 그는 안산 출신으로 삼국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정종 2년(1400년) 박포(朴苞)의 난을 평정하여 좌명공신에 오르고 연성군에 봉군되었다. 「안산군읍지」의 기록에 의하면 연성군의 거처는 바로 이 읍성 안에 있었다고 한다.
한편 지표조사를 통해 채집된 유물 중에서도 고려 시대 후기의 기와편들이 상당량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문헌자료와 유물을 통해서 볼 때 이 성은 최소한 조선 초기 이전에 축성된 것임이 확실하다. 그것은 당대에 아무리 힘이 있던 김정경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의 사저를 이렇게 축성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성은 김정경이 이곳에 기거하기 이전에 축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조선 초기에 실권을 장악한 김정경이 고려 시대의 읍성터를 장악하여 사저로 사용했다고 생각된다.
물론 김정경이 실권을 잡기 전인 고려 말기에 이 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정말 안산읍성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의 여지는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성의 축성 방법이나 지정학적인 위치 등으로 볼 때 안산읍성으로서의 가능성이 매우 크다. 우선 이 성은 주요 방어 대상이 서해 쪽이며, 축성 방법이 석심토축으로 긴박한 상황에서 급조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성이 고려 시대의 안산읍성이었다는 또 다른 증거로는 안산의 별호인 연성(蓮城)에 관한 것이다. 연성은 조선 시대에 안산의 별호로 그 유래에 대해 「안산군읍지」에서는 강희맹(姜希孟;1424~1483년)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경의 전당지(餞唐池)에 들러 연꽃 씨를 얻어 와 퍼뜨린 데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강희맹이 중국에서 연꽃 씨를 가지고 온 것이 1467년인 데 반해 김정경이 연성군에 봉군된 것은 그보다 70여 년이나 앞선 1400년이다. 따라서 연성이라는 별호를 강희맹과 결부시키는 것은 후대에 견강부회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봉군의 명칭은 주로 살고 있는 지역과 결부된 것이 많음을 볼 때 연성군 김정경의 연성은 바로 그가 거성으로 삼아 거주했던 곳의 명칭이었다고 생각된다. 때문에 이 안산읍성의 원래 명칭은 연성으로서 안산 지역의 중심이 되는 성이었음을 추론할 수가 있다.
1) 안산군청터
위치는 경기도 안산시 수암동 256-1번지로, 안산읍성의 성벽 남쪽과 접해 있다.
2) 안산군청지는 안산군의 관아가 있었던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으로 안산군이 시흥군에 흡수·통합되면서 1922년경 건물을 신축하여 1965년까지 수암면사무소로 사용되었다. 그후 건물이 거의 붕괴되자 1972년 10월경 헐렸는데 목재의 일부는 안산초등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사진 4-7 안산군청터. 수암동 256-1 번지에 위치하며 안산군의 관아와 수암면사무소가 있던 곳이다.
어느 고을을 막론하고 공해(公F)로서의 기본 건물로 객사와 아사(衙舍)· 관청 등이 있었고, 부속 건물로 문묘·사직단·여단·옥사(獄舍)·창사(倉舍) 등이 있었다. 객사는 일명 객관이라고도 하는데, 실질적인 기능은 중앙으로부터 온 사신의 숙소였으나 이곳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하여 절을 올리곤 하였다. 객사는 보통 한 고을의 가장 중심 되는 지점이나 가장 경관이 뛰어난 곳에 배치하였는데, 객사 건물은 일반적으로 솟을지붕 형태로 건립하였으며 중앙칸을 높여 좌우익칸과 달리하였다. 안산 객사는 관아의 동편에 있었는데 이곳은 현재 경작지로 변해 있어 그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관아의 정문은 평근루였으나 이 역시 이미 훼철되었다.
그 다음 중요 시설의 하나로는 동헌(東軒)이 있었는데 이를 일명 정청이라고 하였다. 동헌은 고을 수령이 공사를 처리하는 곳으로 객사와 더불어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현재 동헌은 완전히 파괴되어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사(衙舍)는 수령이 거주하던 곳으로 현재 초석이 도리간(道理間;정면칸)에 10개, 양간(梁間;측면칸)에 4개가 남아 있어 이 건물이 9칸×3칸의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초석과 초석 간의 거리는 도리간과 양간 모두 평균 245 cm로, 조선 시대의 황종척(약 31cm)으로 8자를 한 칸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도리간 전체의 길이는 72자(22.05m)이고 양간은 24자(7.35m)이다.
초석은 잘 다듬은 장주초(長柱礎)로 원형 초석과 사각형의 초석을 사용하였는데 원형 초석은 직경 40cm에 높이 35cm이며, 4각초석은 35×35×35cm이다. 건물지의 바닥은 건물을 개축하면서 발라 놓은 시멘트가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초석 주변에는 기단과 장대석이 둘러져 있었다. 아사의 정면 방향은 계좌정향(癸座丁向)으로 북북동-남남서향이었다. 옥사는 관아의 남서쪽에 있었는데 그 터에는 현재 새마을유아원이 들어서 있다.
농업이 경제의 기반인 사회에서는 물화가 재산의 바탕이므로 이를 보존·관리하기 위한 창고는 일찍부터 축조되었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중앙과 지방에 많은 창고가 축조되었다. 안산 창고는 56칸에 달하는 큰 건물로 관아의 남쪽에 있었는데 이 역시 훼손되어 장대석과 와편만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안산 관아의 전체적인 규모는 당시의 관원들 수를 살펴봄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다. 이곳에는 음서(蔭敍) 4품 군수가 있었고, 그 휘하에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8명, 아전 22명, 통인 8명, 사령 12명, 관노 8명, 관비 5명, 객사직이 1명, 향교직 1명, 옥감고 1명 등 모두 70명이 상주하였다. 그 외에도 정조의 수원행행시 호위에 필요한 병력과 자체의 병력을 합하여 8백여 명의 인력 동원이 가능하였다. 「경기각읍신정사례(京畿各邑新定事例)」에서는 1894년 이들 관원들에 대한 1년 급료로 4천 냥을 지급하였다고 되어 있다.
조선 시대 안산군의 읍치가 이곳에 있게 된 것은 현종 10년(1669년)부터이다. 이에 대한 기록으로는 우암 송시열의 「송자대전」에 <안산현관사중건기(安山縣官舍重建記)>가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주자는 관사와 역참은 반드시 증식하라고 「소학」의 가르침에 썼다. 그러나 그가 동안주부(同安主簿)가 되어 정사한 지 3년이 되매 사람들이 그에게 관사가 낡아 우선 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청하였다. 그러나 봄을 넘기도록 관사를 수리하지 못하고 마침내 건물이 무너지려 하매 민가의 집을 빌려 거처를 삼았다. 대개 오래 된 것을 수리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의 어려움은 이와 같다. 우리 동방의 군읍은 사세가 조잔하며 경기는 더욱 심하다. 난리를 겪은 이래 흉황이 이어져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그 독에 해를 입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니 수령된 이가 어느 겨를에 공역과 수리하는 일에 신경을 쓸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오직 임시로 탈없이 임기만 채우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관사를 여관같이 여기므로, 관사가 낡은 옷과 해진 신발을 꿰매고 덧댄 것처럼 되어 끝내 볼품이 없게 되었다.
안산 현감 이제두가 부임하여 여러 건물이 무너지고 퇴락한 것을 보고 면모를 일신하리라 생각하였다. 구 관아의 동쪽에 있는 터를 살펴보니 앞은 트였고 나머지는 둘러싸여 있어 형승이 갖추어져 있으나 공사 물자가 부족한 것이 걱정이었다. 이에 선혜청 당상인 김좌명에게 고하자 공이 미포와 철물을 원조하여 무신년(1668년, 현종 9년) 가을부터 땅을 재고 터를 닦기 시작하였다.
대개 창고는 곡물을 보관하는 곳이나 전에는 무너져서 훔쳐 가거나 물에 젖는 것을 막기 어려웠고, 감옥은 간원(姦寃)을 금찰하는 곳이나 소결(疏缺)하여 때로 담을 넘어서 도망하는 일도 있었다. 이 몇 가지는 해마다 겪는 어려움으로 백성들은 더욱 곤란하게 여겼다. 사직·성황·여단의 위는 국가가 신지를 경건하게 여겨 상서로움을 이끌어 내고 재앙을 물리치는 것이나, 전에는 위패를 임시로 곡물을 보관하는 곳에 놓아 먼지를 뒤집어 쓰니 업신여기고 무람함이 심하였다.
먼저 창고와 관청 및 감옥을 짓고 다음에 명제를 건립하여 대신을 봉안하고 신위를 내린 연후에 드디어 관아를 건립하였다. 관아는 금년 기유년(1669년) 2월 8일 기공하여 3월 27일 마쳐 겨우 50일이 걸렸다. 4월에는 경내 노인들을 널리 모아 낙성식을 거행하자 읍인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제두가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국은을 입어 고위직이 끊이지 않았고 나는 오로지 근기지방의 읍들만 맡아 부모님을 봉양할 수 있는 특별한 배려를 받아 매번 성은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실하다. 하지만 내가 사람됨이 보잘것없고 재주가 적어서 보답할 길이 없었다. 오직 관사에 힘쓰고 감히 스스로의 편리를 도모하지 않았으며, 관사의 나머지를 가지고 자신을 살찌우려 하지 않으므로 아침 저녁으로 휴식과 조금의 사사로움도 없었다. 드디어 제반 공사가 대략 완성되었다. 이는 바라던 바이다.’ 하였다.
내가 듣고 탄식하기를 이 같이 하다니 주자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구나. 주자가 동안에서 집을 빌려 거하기까지 한 것이 어찌 자신이 읍좌인 까닭에 스스로 오로지 하지 못하여서이겠는가. 오히려 높은 동헌을 지어 편안히 쉬는 장소를 삼았고 남강에서는 마침 흉년을 만나 원중에 쑥이 자라도 사람이 없어서 제거하지 못했으나 수조해야 할 곳은 오히려 모두 폐하지 않았다. 성현의 마음씀이 대개 이와 같았다.
이 안산현은 이제두 덕분에 구비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부임해 올 이는 오늘날 공역의 어려움을 알아 잘 관리하여 퇴락하지 않도록 하면 매우 다행이겠다. 이후가 나를 친하다고 하여 그 일을 써 주기를 청하면서 ‘이는 모두 김공이 물자를 하사한 덕분이다.’ 하였다. 내가 그 노고와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뜻을 가상히 여겨 약서하여 보낸다. 이해 10월 은진 사람 송시열이 쓰다.”
이 기록에 따르면 1669년 이전의 안산 관아는 현재의 서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안산김씨족보」의 내용이 참조가 된다. 이 족보에는 “……이 고을 관아는 본래 산 서쪽 바다 가까이에 있었는데 본조 정통 정유년(1441년)에 옛 소릉의 화소(火巢)로 편입되어 관부를 우리 선조의 유허로 옮긴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보면 조선 초기의 관아는 소릉지 부근인 지금의 안산시 목내동 성안마을 일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441년에서 「송자대전」에 기록된 1669년까지의 228년 동안 안산 관아는 ‘우리 선조의 유허로 옮겼다.’는 기록 내용으로 보아 현재의 관아가 있는 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50m 지점인 읍성 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지리지」 권148 <안산군조>에 “안산군의 진산은 취암이다.”라고 기록된 것도 안산군의 관아가 취암 아래쪽 지금의 읍성터 부근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조선 시대 안산 관아는 처음에는 목내동 일대에 있다가 소릉의 영조로 인하여 1441년 현재의 읍성 부근으로 옮겨가고, 1669년에 다시 수암동의 현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후 일제 시대부터 1965년까지 이곳에는 수암면사무소가 있었다.
관아를 이곳으로 옮기게 된 것은 <안산현관사중건기>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땅이 밝고 시원해서인데, 이곳은 풍수지리적으로 비봉혈(飛鳳穴)에 해당한다고 한다. 비봉혈은 성인군자가 배출되는 곳이라 하여 예로부터 읍터로 정해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아무리 지세가 비봉을 닮았다고 하더라도 봉황이 날아가면 읍이 멸망하기 때문에 봉황이 좋아하는 대나무를 심어 봉황이 영구히 있게 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안산관아터에도 관아 앞 지대석 바로 밑에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4)
2) 여단지
안산시 수암동 산 1-3번지 지장골 뒷산의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5) 이곳은 안산 관아의 북쪽에 해당되는 곳으로 관아에서 직선거리로 약 0.5km 정도 된다. 여단의 형태는 정방형에 가까우며 토단으로 된 단의 윗부분과 주변에 잡목들이 많이 들어차 있다. 토단은 많이 무너져 내리기는 했지만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여단의 네 모서리는 각각 동·서·남·북 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며 규모는 토단 윗부분의 한 면이 11.1m 정도여서 면적은 121m³(40평) 정도이다. 토단의 높이는 1.3m 정도로 바닥에서 약 60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고, 여단 윗면은 북쪽이 남쪽보다 약간 높다. 단 위에서 많은 양의 기와편이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단 위에 건물이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산군읍지」의 지도에도 여단에 건물 모습이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진 4-8 여단지의 기와편. 대부분이 회청색의 경질 무문와로 투박하고 견고한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기와편들은 무문와가 약 80% 정도 차지하고 있으며 파상문와도 발견된다. 기와는 대체로 회청색의 경질와이며 투박하고 견고한 느낌을 준다. 제작 수법이나 문양 등으로 볼 때 이것들은 대체로 조선 시대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여단은 여제단의 준말로 제사를 못 받는 귀신이나 못된 돌림병으로 죽은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단이다. 1899년에 발간된 「안산군읍지」에 따르면, 여단은 안산군 일대에서 발생하는 염병의 전염을 막고 결혼 적령기에 죽은 처녀·총각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단을 설치하고 군의 수령이 직접 제를 올렸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에서 드리는 제사 중 대사(大祀)에 속하는 것으로는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제사하는 사직단(社稷壇)과 천신에게 제사하는 원구단(圓丘壇)이 있었다. 중사(中祀)에 속하는 것으로는 기우제를 드리는 우사단(雩祀壇)이 동교에 있었고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은 남교에 있었으며, 그 외에 동쪽에 선잠단(先蠶壇)과 선농단(先農壇)이 있었다. 소사(小祀)에 속하는 것으로서 영성단(靈星壇)·노인성단(老人星壇)·사한단(司寒壇)이 남쪽에 있었고, 마조·선목·사마·마보단이 동쪽에 있었으며, 마제단은 동북쪽에 있었다. 그리고 여단은 북쪽에 있었으며 명산대천단은 국내 각처의 명산에 있었다. 이러한 제사의 규례는 이미 삼국 시대에 정형화되기 시작한 것으로서 그 중 특히 사직단과 여단은 각 고을에도 설치되어 고을 단위로 제사를 지냈다.
3) 우사단지(雩祀壇址) 안산시 수암동의 원당사지 뒷편에 이 제단이 있었다.6) 「안산군읍지」에는 읍치의 동편 수리산 아래에 원당사지가 있고 그 뒤편에 우사단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는 현재 탄약폭파처리장이 있어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며, 유적 주변은 수목이 우거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다. 우사단은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으로 풍운뇌우단·선농단·선잠단과 함께 중사에 속하는 제단으로 관아의 동쪽에 위치했으며 단의 넓이는 보통 4장이었다. 구망(句芒)·축융(祝融)·후토(后土)·욕수(?收)·현명(玄冥)·후직(后稷)의 신좌는 모두 남향이었다.
기우제는 나라와 민간에서 비 오기를 기원하는 제사로 우리 나라는 옛날부터 3~4년에 한 번씩 한재를 당했으므로 삼국 시대부터 조정과 지방관청, 민간을 막론하고 가뭄에 대처하여 기우제를 많이 지냈다. 나라에서는 왕이 정치를 잘못한 천벌이라 하여 스스로가 몸을 정결히 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식음을 전폐하고 거처를 초가로 옮겼으며 죄인을 석방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민가에서는 산 꼭대기나 냇가 등에 제단을 쌓고 신역을 정하여 정결히 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제주는 마을의 장이나 지방 관원의 장이 맡았으며 제물로는 돼지·닭·술·과일·떡·밥·포 등을 올리고 때로는 무녀의 가무까지 행하였다.
「용재총화」에 의하면 서울에서는 기우제로 종묘사직과 흥인·숭례·돈의·숙정의 사대문에서 제사했고 오룡제를 동·서·남·북 사교와 중앙의 종각 앞에서 거행하였다. 「연려실기술」에는 모화관·경회루·춘당대·선농단 및 한강변 등에서 기우제를 거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안산 우사단은 대부분의 안산군 읍지에 기술되어 있지 않으며 지도에도 위치 표시가 없다. 따라서 사직단이나 여단보다 먼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4) 김정경(金定卿) 세거지
안산시 수암동 253번지 일대로 추정된다. 이곳은 고려 시대 읍성과 조선 시대 안산군 관아가 있었던 곳이다. 「안산군읍지」를 보면 “관사의 뒤에 토체형지가 있는데 이곳은 연성군(蓮城君) 김정경의 세거지이다. 은행나무 3주 역시 그가 직접 심은 것이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는 현재 수령이 6백 년 정도된 것으로 보이는 은행나무 3그루가 있는데, 가운데 있는 것은 불에 타서 몸통의 일부만 남아 있다. 집터가 있었다고 하는 관사의 뒤쪽에는 곳곳에 넓고 평탄한 대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현재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회화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인데 중국에서는 회화나무를 괴수[槐樹(훼나무 괴, 나무 수)]라 하며 길상목(吉祥木)의 하나로 귀하게 여겼다. 그 기원은 중국의 주(周)나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삼괴국극(三槐九棘)이라 하여 조정의 뜰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우리나라로 하면 3정승(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에 해당하는 삼공[三公 ; 태사(太師), 태전(太傳), 태보(太保)]이 마주보고 앉도록 하였다는데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벼슬을 기원하고 의미하는 것으로 발전해나가면서 회화나무를 심어서 출세(出世)하거나 또는 출세의 시작인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회화나무를 심어 기념하였던 것이다. 회화나무의 노수(老樹)들은 대개가 고궁, 서원, 문묘, 당대 명문대가들의 뜰에 심어져 있으며,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괴(槐)는 허정(虛精)의 정(精)으로서 노괴(老槐:오래된 회나무)는 불(火)을 잘 만들어 신선(神仙)이 깃들어 있어서 그 신기함이 귀히여겨야 한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옛날에 판관(判官)이 송사를 들을 때 반드시 회화나무를 가지고 재판에 임했다고 하니 회화나무의 정(精:정할 정)으로 하여 진실에 이르도록하고자 함에 그 뜻이 있었고, 훗날 회화나무 3그루를 집 정문 안에 심어두면 그집에 행복이 찾아오고 자녀들이 출세한다라고 생각하며 즐겨심는 정원수로 자리잡은 민속의 나무이기도 하다.
김정경은 정종 2년(1400년)에 박포(朴苞)의 난을 평정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오르고 연성군(蓮城君)에 봉군되었다. 조선 시대 안산군의 별호가 연성(蓮城)이었는데 그 기원에 대해서 대체로 「안산군읍지」 등에서는 강희맹(姜希孟)의 관곡지(官谷池)와 관련시키고 있다. 즉 강희맹이 중추원부사로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중국 남경에 갔다 오는 길에 중국의 전당(錢塘)에서 연꽃 씨를 구해다가 이곳에 심어 널리 퍼졌는데 그후부터 안산의 칭호를 연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정경이 연성군으로 봉군된 것은 이보다 60여 년 전의 일로서 봉군되는 명칭은 보통 공훈의 성격이나 그가 사는 지역명을 따서 붙이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김정경이 살았던 이 지역의 이름이 연성(蓮城)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이곳에는 둘레가 900m 정도인 성의 흔적이 완연한데, 이 성을 사가의 담장으로 축조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연성이라는 명칭은 이곳에 남아 있는 성의 명칭이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고려 시대 안산읍성이었다고 생각된다.
연성군 묘(위정공 김정경), 정경부인 화혜택주 개성왕씨 묘, 위정각 (재실)
* 택주 : 군(君)부인 호칭
위정각 정문 추충문
(위정각 : 하남시 감북동 소재, 위정사 : 충북 괴산군 장연면 소재)
위정사 :충북 괴산군 장연면 광진리 291
1994년 1월 7일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1667년(숙종 8) 김정경(金定卿)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된 사당이다. 매년 음력 7월 15일과 10월 29일 2차례 향사한다.
연성군 김정경 묘 (하남시 감북동)
(6) 오정각(五旌閣)
▷ 위치 안산시 화정동 29번지.
▷ 구조 초익공(初翼工) 양식의 맞배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건립되었다.
▷ 역사 및 유래 조선왕조 세조 2년(1456년) 단종 복위의 모의에 가담하였다가 실패하여 사육신과 함께 참형을 당한 충의공 김문기(金文起)의 충절과 공의 자(子) 현석(玄錫)의 충신정문(忠臣旌門), 손(孫) 충주(忠柱), 증손(曾孫) 경남(景南), 현손(玄孫) 약전(約前)의 효자정문이 각각 봉안되어 있어 오정각이라 불린다. 고종 7년(1870년)에 명정(命旌)하여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김문기의 영정이 경남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718번지에 거주하는 그의 후손 김진두(金鎭斗) 씨 댁에 보존되어 있으며, 현재 오정각에 모셔져 있는 영정은 최근에 그린 것이다. 김문기는 조선 세종 8년(142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정언, 함길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 특기 사항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4-9 오정각. 화정동 29번지에 있으며, 1983년 경기도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7)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
▷ 위치 안산시 와동 151번지.
▷ 구조 도리간(정면칸) 3칸, 양간(측면칸) 2칸인 목조건물로 4각기둥의 주심포양식 팔작지붕이다. 벽면은 시멘트로 시공하였으며 통기와 채광을 위하여 나무창살문을 설치하였다. 건물 안은 2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우측 방은 마룻바닥이고 좌측방은 맨바닥이다. 우측 방에는 액자 2개가 걸려 있고 좌측 방에는 4세열녀(四世烈女)의 이름을 써 놓았다. 건물 주위에는 1.6m의 담장이 둘러져 있고,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이라고 쓴 목판은 건물 입구에 걸려 있다. 1971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중수하였으며 1983년에 경기도에서 보수하였다.
▷ 역사 및 유래 사세충렬문은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 장군과 함께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장의공 김여물 및 병자호란 때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김여물의 4대에 걸친 고부(姑婦)의 애국 충정과 열녀 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하사한 정문(旌門)이다. 김여물의 후실인 평산(平山) 신씨(申氏), 아들 김류의 처 진주(晋州) 유씨(柳氏), 손자 김경징의 처 고령(高靈) 박씨(朴氏), 증손자 김진표의 처 진주 정씨(鄭氏) 등 4세 고부들은 오랑캐의 포로가 되어 욕을 당하느니 자결할 것을 결심하여 강화도 앞바다에 다 함께 몸을 던져 죽음으로 정절을 지켰다. ▷ 특기 사항
.
사진 4-10 사세충렬문. 와동 151번지에 있으며, 1993년 경기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1983년 경기도지정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
사진 4-11 한응인 선생 묘역과 신도비. 사사동 산18-6번지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8) 한응인(韓應寅) 선생 묘역과 신도비
▷ 위치 안산시 사사동 산 18-6번지.
▷ 구조 신도비는 비신과 우진각 지붕형의 가첨석(加添石)과 기대(基臺)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모는 비신이 79×23×179cm, 가첨석이 143×95×58cm, 기대가 145×100×59cm이다. 비문은 김류가 찬하고 한인급(韓仁及)이 글씨를 썼으며 김광현이 전액(篆額)을 하여 1642년에 건립하였다. 이 신도비의 양식적 특징은 가첨석의 하단부 건물에 기둥 석부와 지붕 사이에 있는 공포(貢包)의 형상을 조각해 놓음으로써 압박감을 덜어 주어 안정감을 유지하였다는 데 있다.
▷ 역사 및 유래 한응인(1554~1614년, 명종 9년~광해군 6년)은 부사직 경남(敬男)의 아들로 태어나 선조 시대에 활약했던 문신으로서 초서에 뛰어난 선조유교칠신(宣祖儒敎七臣)의 한 사람이었으며 자는 춘경, 호는 백졸재(百拙齋)였다. 본관은 청주이고 시호는 충정이며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이다. 24세에 알성문과 병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육조판서와 우의정에 올랐으며, 52세 때인 1605년에 부원군에 올랐으며 54세에 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그 다음 해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을 보호하라는 유교를 받았으나 광해군조(光海君朝)가 되자 계축옥사(癸丑獄事;1613년)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해 전리방귀에 처해져 광주에서 지내다가 61세에 운명하였다.
▷ 특기 사항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4-12 한응인 선생 영정. 17세기에 그려진 초상화로, 경기도유형 문화재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9) 한응인(韓應寅) 영정 및 유물
▷ 위치 안산시 사사동.
▷ 구조 36cm 폭의 비단을 3폭 꿰어 만든 화폭에 금채를 가미한 채색초상화이다. 17세기 도화서 서원들에 의해 그려진 초상화로서, 이 시기의 일반적인 공신도와는 달리 높은 사모를 썼고 흉배 역시 목단화 바탕 대신에 파도 위에 쌍학이 나는 형상을 금채를 가해 묘사하여 화려한 분위기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안면은 세필로 섬세하게 그렸으며 눈썹과 수염 부분은 운영법을 구사하여 표현하였다. 건장한 체구, 넓은 얼굴, 날카로운 눈매를 갖춘 한응인의 근엄하고 당당한 풍모가 느껴지는 수작으로 살아 있는 듯한 안면 묘사, 꼼꼼한 필치에 의한 관복과 채전의 표현 수법, 안정감 있는 구도로 그린 17세기 초 공신도 성격의 초상화로 그 가치가 높다.
▷ 특기 사항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 4-13 팔곡리 향나무. 팔곡 1동 59-3번지에 있는 6백여 년 된 고목으로 경기도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10) 팔곡리 향나무
▷ 위치 안산시 팔곡 1동 59-3번지.
▷ 구조 이 향나무는 높이 9m,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 3m에 이른다. 수령 6백여 년이라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향나무는 본래 높이 23m 정도, 가슴높이의 줄 둘레 3m 이상까지 자라는 늘 푸른 나무로서, 가지가 위와 아래로 뻗는 특징이 있다. 잎은 바늘 모양인 것과 비늘 모양인 것이 있어서 7~8년생 이상인 것은 주로 비늘 모양의 잎이 달리지만 맹아(萌芽)에서는 바늘 모양의 잎이 돋는다. 수형이 아름답고 수세가 왕성한 것이 특징이다. ▷ 특기사항 경기도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안산시 향토유적
2. 안산시 향토유적
(1) 잿머리성황당과 성황제
▷ 위치 성황당의 위치는 안산시 성곡동 산 76번지에 있다. 안산시 서북쪽 끝이 성곡동인데 이곳은 반월공업단지가 있는 곳이다. 반월공업단지의 공단전망대를 지나 북쪽으로 가면 안산하수종말처리장이 있고 조금 더 가면 돌안말이라는 곳에 다다르는데 이곳에서 해봉산 정상이 보인다. 이 해봉산 건너편에 잿머리성황당이 위치해 있다. ▷ 구조 성황당 면적은 15평, 성황당지는 30여 평이다. 당집에는 홍씨부인 영정, 안씨부인 영정, 관음장군 영정, 대신영정, 마태장군 영정, 용궁칠성 영정, 성황기 등이 보관되어 있다.
사진 4-14 잿머리성황당과 성황제. 성곡동 산 76번지에 있으며, 매년 잿머리성황제를 올린다.
▷ 역사 및 유래 안산시 성곡동에 위치한 잿머리성황당은 다른 여러 지방에 있는 성황당과는 달리 발생 유래가 특이하다. 일반적인 성황당이 한 마을 단위만의 제액초복(除厄招福)을 기원하는 신당으로 발생한데 반해 잿머리성황당은 발생 설화가 독특하다.
고려 제6대 성종(982~997년) 때 내부시랑 서희(徐熙)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잿머리연안(현재 당집이 있는 아래)에서 배를 타려고 했을 때 갑자기 잠잠하던 바다에 폭풍우가 몰아쳐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서희가 장도(壯途)를 비는 제를 지내고 잠이 들었을 때 꿈에 소복을 한 두 여인이 나타나 “우리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김부대왕)의 비 홍씨와 친정어머니 안씨인데 경순왕과 결혼 후 나라가 망하고 비명에 죽은 것이 한이 되어 모녀 혼령이 안주하지 못하고 이렇게 배회하고 있으니 저희의 거처라도 마련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그러자 서희는 그러마고 약속하고 이튿날 그곳에 작은 성을 쌓고 사당을 지은 후 화공을 불러 꿈에 본 영정을 그려 모신 후 위령제를 지냈다. 그러자 신기하게 바다가 잔잔해져 서희는 아무 탈 없이 송나라로 건너가 막중한 외교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다.
이 설화에서도 나타났듯이 잿머리성황당은 왕비의 원혼을 위로하여 항로를 트고 외교 임무를 완수한 역사적 의미를 담은 성황당이다. 그후부터 중국을 드나드는 사신은 물론 이곳 백성들도 이 사당에 제물을 차려 놓고 극진히 정성을 드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지금도 당집이 있는 산에는 서희가 쌓은 성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매년 잿머리성황제를 지내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사묘(祠廟)조>의 기록에 의하면 “성황사가 2개 있는데, 하나는 군의 서쪽 21리에 있고, 하나는 군의 서쪽 32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한편 1894~5년경에 쓰여진 「기전읍지(畿甸邑誌)」의 안산군편에 실려 있는 지도에 읍내로부터 20리 떨어져 있는 군자산(君子山)에 성황당이 있으며, 또 한 곳의 성황당은 성두(城頭)를 30리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곳이 잿머리성황당임이 틀림없다.
이곳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과 칠월칠석에 칠성맞이 행사를, 시월에는 도당굿을 올리고 있다. 또한 3년마다 1번씩 시월부터 정월까지 유가를 올린다. 음력 정월 보름 안에 집안이 평안하고 우환이 없기를 기원한다거나 특히 결혼날짜가 잡혔을 때 복을 기원하는 칠성맞이 행사를 당집에서 개인적인 차원으로 행하고 있으며, 음력 칠월칠석에도 자손의 장수를 기원하는 치성을 개인적으로 드리기도 한다.
도당굿은 마을 전체는 물론이고 인근의 원시동·신길동·목내동 주민들이 함께 매년 10월 1일부터 3개월간 거행한다. 현재는 ‘잿머리성황제’라는 이름으로 안산시 전체의 축제로 승화시켜 매년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그러나 10월 1일이 뱀날이나 용날이면 일진이 좋지 않다고 하여 다음날로 연기한다. 그리고 선택한 날이 털을 가진 짐승날, 예를 들면 쥐·호랑이·소·토끼날 등은 모두 좋으나 특히 말[馬]날이 제일 좋다고 한다. 한편 초상이나 출산 또는 부정한 일이 생기면 다음달로 연기한다.
이때의 도당굿은 신곡맞이 도당굿이라고 하여 3개월간 마을을 돌며 집집마다 굿을 하는데 이것을 유가라고 한다. 이때에는 당주와 함께 무당·풍물잡이들이 함께 따른다. 이웃과 친선과 협동을 도모하기 위해 3개월간 10여 개의 마을을 돌며 온 주민들이 치성을 드린다. 또 장군놀이·신장놀이·상산대감놀이·전당주대신놀이·줄타기 등이 함께 행해져 무속에 바탕을 둔 민속놀이의 축제로서 특징을 드러낸다.
(2) 선부동 지석묘군 ▷ 위치 안산시 선부동 산 27번지 선부동 정수장 근처. ▷ 구조 1호:130×75×25cm 2호:135×60×17cm 3호:110×60×17cm 4호:150×130×30cm 5호:160×140×30cm
사진 4-15 선부동 지서묘군. 선부동 산 27번지 소재하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 역사 및 유래 1991년 1월 5일 한국수자원공사에서 시화지구 정수장 건설지에 대한 지표조사를 경기도에 의뢰하였는데, 이때 동년 2월 25일 청동기 시대 지석묘 유적을 발견하였다. 4월 23일부터 5월 30일까지 시흥시 관내(가)지구 4기, 안산시관내(나)지구 7기 등 총 11기가 발굴·완료되었는데 이 중 1기는 경기도 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이전 복원했고 나머지는 성호공원에 이전 복원했다. 정수장 건설지를 벗어난 곳에 있는 5기의 지석묘는 발굴 대상에서 제외하였으나 정수장 및 도로에서 10m 정도 근접해 있다. 1~4호 지석묘는 10m 반경 안에 모여 있고 제5호 지석묘는 약 200m 남동쪽으로 떨어져 있는데, 1~5호기 모두 기반식으로 1호·4호에서 치석 흔적이, 2·5호에서 성혈이 확인되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3) 강징(姜澄) 선생 묘 및 신도비(神道碑) ▷ 위치 안산시 양상동 산 16-3번지. 신갈-안산고속도로의 안산 IC 부근이 양상동인데, 안산 IC에서 빠져나와 우회전하면 양상동 방향이다. 양상동 쪽으로 향하다 보면 아랫보대라는 곳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윗보대 쪽으로 가다 보면 우측으로 정언벽 선생의 묘갈과 묘역이 보인다. 정언벽 선생의 묘역을 지나 윗보대를 지나면 바로 강징 선생의 묘와 신도비가 나타난다. 봉분 160×600cm, 비신 136×75×20cm, 이수 85×50×20cm 규모이다. 특이한 것은 기단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석인 바위를 파고 신도비를 세워 놓았으며 옥개석 대신 이수가 올려져 있다.
사진 4-16 강진 선생 묘. 양상동 16-3번지에 위치하며, 안산시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4-17 강징 선생 신도비. 이 비는 인조25년(1647년)에 건립되었으며 조상우가 글을 썼다.
▷ 역사 및 유래 강징은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자는 언심(彦深), 호는 소제(少薺)·심재(深薺), 본관은 진주이다. 성종 25년(1494년)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제학을 거쳐 연산군 10년(1504년)에 우부승지로 재직하였으나 당시 왕에게 사냥을 삼갈 것을 간했다가 낙안으로 유배되었고 연산군 12년(1506년) 복세암(福世庵)의 이건(移建)을 반대하여 투옥되었다. 그후 중종 반정으로 석방되어 강원도관찰사가 되고 중종 3년(1508년)과 중종 16년(1521년)에 각각 성절사(聖節使)와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전주 경주부윤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그는 중종이 제작한 병풍의 글씨와 명신들의 시문 홍문관에서 올린 정명도의 잠(箴)을 쓰니 당대의 명필이란 소리를 들었다. 이 밖에 글씨로 ‘정익혜공난종신도비명(鄭翼惠公蘭宗神道碑銘)’이 있다. 이 신도비는 인조 25년(1647년)에 건립되었으며 정사룡이 찬하고 조상우가 글을 썼으며 윤덕준이 전액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4) 김여물(金汝) 장군 묘 및 신도비(神道碑) ▷ 위치 안산시 와동 141번지. 안산자동차면허시험장 부근이 와동으로 이곳에 수암성당이 있는데, 김여물 장군 묘소는 수암성당 근처에 위치해 있으며 바로 밑에 사세충렬문이 있다. ▷ 구조 비의 규모는 이수 86×38×76cm, 비신 159×73×26cm, 기대석 140×90×70cm이다. 이수와 비신은 하나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수에는 앞뒷면에 용이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희롱하는 장면을 조각하였는데 역동감이 넘친다. 기대석에는 초문이 음각되어 있다.
사진 4- 18 김여물 장군 묘. 와동 141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4-19 김여물 장군 신도비. 현종 3년에 세웠으며, 이수와 비신이 하나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 역사 및 유래 김여물은 조선 시대의 충신으로 자는 사수(士秀), 호는 외암(畏菴), 본관은 순천이다.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훈(壎)의 아들이며 영의정 류의 부친이다. 김여물은 20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30세에 대과에 합격하였다. 각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선조 25년 의주목사로 있을 때 서인 정철의 당으로 몰려 파직되었다가 선조 26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과 함께 왕의 특명을 받고 충주의 방어에 나섰다. 김여물은 신립에게 새재의 고수를 주장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았고 마침내 왜적에게 새재를 내주고 말았다. 김여물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다 탄금대에서 투신하였는데 이때 공의 나이 45세였다.
이듬해 의관을 거두어 안산 동장리에 장사 지내고 정려를 세웠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시호는 장의이다. 김여물의 신도비에는 이런 공의 우국충정을 기려 “무릇 충신열사가 나라를 섬김은 국난을 당했을 때 목숨을 바쳐 인을 이루는 데 있다. 하늘의 명 또한 위훈(偉勳)과 환업(宦業)으로써 그 자손은 반드시 창성하게 하니, 그것은 마치 상하가 서로 주고 받으면서 보답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치는 크게 밝아 조그마한 착오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니 군자는 이로써 천리(千理)가 없다고 탄식하는 말을 함부로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라는 글귀로 시작하여 그의 대인으로서의 공평무사한 행적과 애국의 단성(丹誠)이 새겨져 있다. 현종 3년(1536년)에 제작되었으며 김상헌이 찬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
(5) 신점(申點) 선생 묘 ▷ 위치 안산시 신길동 산 9-2. 안산시를 가로지르는 중앙로를 따라가면 전철 종점인 안산역이 나오는데 안산역에서 시화공단 쪽으로 직진하면 원곡역이 나온다. 원곡역을 지나 신길역 쪽으로 향하면 좌회전하는 곳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에서 좌회전하면 능길마을이다. 이곳에 신점 선생의 묘가 위치해 있다. ▷ 구조 봉분 500×180×740cm, 신도비 158×74×26cm ▷ 역사 및 유래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자는 성여(聖與), 호는 척재,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명종 19년(156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禮曺佐郞) 등을 지내고 상례에 있어서 대상(大祥) 후의 입제(笠制)에 백립(白笠)을 통용하도록 하였다.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원병을 파견하도록 힘썼다. 귀국하여 동부승지가 되고 형조·병조·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후 판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에 이르렀다. 선무공신 2등과 영의정 및 평성부원군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사진 4-20 신점 선생 묘. 신길동 산 9-2번지에 있으며, 안산 시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되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되었다.
(6) 홍명원(洪命元) 선생 묘 ▷ 위치 안산시 성곡동 산 78. 이곳은 반월공업단지가 있는 곳인데 반월공업단지의 공단전망대를 지나 북쪽으로 가면 안산 하수종말처리장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돌안말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해봉산 정상이 보인다. 이 해봉산 자락에 홍명원 묘가 있으며 길 건너편으로는 잿머리성황당이 위치하고 있다. ▷ 구조 성곡동의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서쪽 경사면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홍명원을 비롯해 효녀 홍소저·홍우악 등 모두 5기의 무덤이 있다. 홍명원의 무덤은 남쪽의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데 묘의 석물은 묘비 2기를 비롯해 상석·향로석·동자석 등이 있다. 봉분은 쌍분으로 446×145cm이다. 묘갈은 상석 좌측에 2기가 있는데 좌측의 것은 구비이고 우측의 것은 이 구비의 내용을 새로 적어서 만든 신비이다. 구비는 비신이 143×64×20cm, 기대석은 106×63×20cm로 초화문이 음각되어 있다. 신비는 옥개석이 90×64×60cm, 비신은 169×67×28cm이다. 상석은 화강암재로 150×100×40cm이고, 향로석은 36×40×40cm, 동자석은 상석 좌우에 배치되어 있으며 크기는 95cm이다.
▷ 역사 및 유래 홍명원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낙부(樂夫), 호는 해봉(海峯),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진사 영필의 아들이다. 선조 30년(159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를 거쳐 선조 33년 검열(檢閱)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와 사서(司書)·수찬(修撰)·헌납(獻納)이 되었으나 권신들을 탄핵하던 끝에 미움을 사서 함경도 도사로 좌천되었다. 그후 선조 36년(1603년) 예조정랑으로 훈련도감낭청(訓鍊都監郎廳)을 겸했고 죽주부사로 죽주산성을 쌓고 돌아와 수찬(修撰)·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장령 등을 역임했고, 도체찰사(道體察使) 이항복의 종사관으로 평안도와 황해도를 거쳐 동부승지·좌승지를 역임했으며, 광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푼 끝에 표리를 하사받고 가선대부로 승계되었다. 광해군 7년(1615년) 인목대비에 대한 페모론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고향인 해곡으로 내려갔으나 광해군 14년(1722년) 광해군 초 후금(後金)과 수교한 사실이 명나라에 알려져 양국관계가 미묘해지자 급고사(急告使)로 명나라에 가서 이를 무마하였고 후금의 위협에 강경론을 주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시와 문장에도 뛰어나 특히 한대(漢代)의 문장과 당대(唐代)의 시에 정통하였다. 저서로는 「해봉집(海峯集)」을 남겼다. 홍명원의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을 썼다. 묘갈의 전면에는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연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官大提學五衛都摠部都總管行嘉善大夫京畿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開城府留守永平大都護府使洪諱命元之墓貞敬夫人坡平尹氏깹굡箚 쓰여 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4-21 홍명원 선생 묘. 성곡동 산 78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65호로 지정되었다.
(7) 김류 초상 ▷ 위치 안산시 와동 102-10번지. ▷ 구조 명문에 쓰여진 내용 중 촬형상(撮形像)이란 전신 중에서 일부분만을 묘사하는 화법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특히 목 위로 치켜올려진 단령의 형태 등이 당시 공신도상(功臣圖像)의 특징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지본설채(紙本設彩)인 이 초상화는 부분적이기는 하나 어깨의 선 처리 등에서도 17세기 초상화의 양식적인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역사 및 유래 김류는 조선 중기의 공신으로 자는 관옥(冠玉)이며 호는 북저(北渚),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김여물의 아들이다.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으로 안면 윤곽은 진한 갈색선으로 잡고 주조색은 밝고 엷은 살빛으로 강약을 주어 명암을 나타내었다. 이 초상화는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록될 당시 그려진 것을 모본으로 하여 영의정에 올랐을 때 모사한 화첩본으로 보인다. 좌측에 “仁祖大王反正一等功臣領議政昇平府院君金g大臣撮形像”이라는 명문이 쓰여 있다.
사진 4-22 김류 선생의 초상화. 와동 102-10번지에 소재하며, 17세기 초 상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었다.
(8) 최정걸(崔挺傑) 장군 묘 ▷ 위치 안산시 사동 산 92번지. 상록수 전철역에서 한양 아파트 쪽으로 향하다 보면 본오초등학교가 나오는데, 본오초등학교 뒤편 본오동 벌이 내려다보이는 안산시 사동 산우물 근처에 자리잡고 있다. ▷ 구조 봉분 155×520cm, 비석 198×53×24cm ▷ 역사 및 유래 최정걸 장군은 양주 최씨 시조 억(億)의 12세손으로 조선 인조 15년(1637년)에 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추증받았으며 충장(忠壯)의 시호를 받은 충절공신(忠節功臣)이다. 최정걸 장군은 등무과 출신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까지 지낸 후 귀향(안산시 사동 감자골)하여 효양우애(孝養友愛)하고 있던 중,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심을 알고 50세의 나이로 남한산성 행궁(行宮)으로 달려가니 조정은 주화파가 득세하여 바야흐로 국치를 당할 판국이었다. 장군은 적진으로 단신 출격하여 적의 머리 칠급(七級)을 베어 인조 어전에 바치니 인조는 크게 감동하고 그 충용을 포상하여 어주(御酒)를 내렸다. 그러나 조정은 강대한 호세에 눌려 치욕적인 강화로 기우니 장군은 이튿날 다시 적의 대군 중으로 돌진하여 분전 끝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인조 14년 (1636년 12월 29일)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장군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가선대부병조참판(嘉善大夫兵曹參判)을 추증하고 향리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후히 장사 지내게 하고 정문(旌門)을 내리며 사패(賜牌)·봉록(俸祿)하였다.
사진 4-23 최정걸 장군 묘역. 사동 산 92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었다
(9) 정언벽(丁彦璧) 선생 묘 및 묘갈 ▷ 위치 안산시 양상동 산 7번지에 위치해 있다. 신갈-안산고속도로의 안산 IC 부근이 양상동인데, 안산 IC에서 빠져나와 우회전하면 양상동 방향이다. 양상동 쪽으로 향하다 보면 아랫보대라는 곳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윗보대 쪽으로 가다 보면 우측으로 정언벽 선생의 묘갈과 묘역이 보인다. 건너편에 군부대가 위치해 있다. ▷ 구조 봉분 172×540cm, 묘갈 287×75×27cm, 묘표 124×60×21cm ▷ 역사 및 유래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계홍(季弘),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관찰사 호선(好善)의 아들이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5대조부이다. 인조 22년(1644년) 생원(生員)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박사(博士)를 지냈고,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 겸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設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예조(禮曺)·병조좌랑(兵曹佐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헌납 때 왕자 징(徵)의 죄가 논의되자 이를 변호하여 무사케 하였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었다.
(10) 최혼(崔渾) 선생 묘 ▷ 위치 안산시 사동 83-8. 전철 상록수역에서 한양대학교 쪽으로 향하다 보면 수인선 철도가 있던 곳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을 지나 바로 좌회전하면 속칭 감자골이라는 곳이 나온다. 최혼 선생의 묘는 이곳 감자골에 위치해 있다. ▷ 구조 155×520cm 외 12기.
사진 4-25 최흔 선생 묘역. 사동 83-8번지 감자골에 있으며, 안산시향토 유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 역사 및 유래 양주 최씨의 중시조 독선당(獨善堂) 혼(渾)이 연산군 5년(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피해 부(父)인 자준(自濬), 조부(祖父)인 담(潭)을 모시고 현 안산시 사동 감자골로 입향한 이래 이곳에서 별세한 6대 13기(27명)의 무덤과 시조로부터 상계(6세<世>까지) 7명의 제단이 보존되어 있는 안산시 소재 최대 규모의 묘역이다. 서기 1500년대 초 감자골로 입향한 양주 최씨는 7~9세(독선당 혼<渾>)의 후손 두 계파가 490여 년 동안 28세(世)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으며 매년 10월 1일 이곳 묘역에서 시향제(時享祭)를 지냄으로써 전통적 유교식 집성촌의 법도를 지켜 왔는 바 1976년 이래 반월공단 신도시개발로 광대했던 묘역의 상당 지역이 당국에 의해 수용(收用)·삭실(削失)되었다. 양주 최씨의 시조 억(億)은 고려 때 태사(太師)로 천거되어 공민왕 2년(1352년)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한 문경공(文敬公)으로 양주군으로 봉작되었으며 2세 연(淵)은 판도판서(判圖判書), 3세 숙(淑)은 병조전서(兵曹典書), 4세 경운(慶雲)은 공조전서, 5세 항(沆)은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냈고, 6세 정안은 우정언부사직(右正言副司直)을 역임했으며, 정연은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지냈는 바 이들 일곱 분은 선영제단에 비를 세웠다. 이들 7세부터 12세까지의 거의 모두가 이곳 묘역에 봉분이 유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비석·상석·망주석 등의 석물도 보전 가치가 매우 크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1) 이인현(李仁賢) 선생 묘 ▷ 위치 안산시 고잔동 산 87번지. 안산 시청에서 안산자동차면허시험장으로 향하다 보면 고잔초등학교와 올림픽생활기념관이 나오는데 이곳의 길 건너편 야산에 이인현 선생의 묘가 있다. ▷ 구조 봉분 151×40cm, 묘비 182×52×22cm
사진 4-26 이인현 선생 묘역. 고잔동 산87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 유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 역사 및 유래 전주 이씨 봉성군 후손은 5백여 년째 안산시 고잔동을 주축으로 살고 있다. 고잔동 산 87, 85에는 50여 기의 묘가 있었으나 1차 도시개발로 철거되고 현재 12기가 남아 있다. 이인현 묘는 12기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공원화계획으로 철거 대상에 들어 있다. 이인현 선생은 통훈대부(通訓大夫)·문화현감(文化縣監)·충양위(忠A衛)를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 강도에서 순절하였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12) 유석(柳碩) 선생 묘 및 신도비(神道碑)
▷ 위치 안산시 부곡동 산 5-1번지. 수인산업도로 안산에서 인천 쪽으로 향하다 보면 신갈`-`안산고속도로와 교차하는 곳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에서 우측으로 보면 유석 선생의 묘소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이고 소로를 따라 올라가면 유석 선생의 묘역이 나타난다.
▷ 구조 봉분 128×370cm, 비신 212×96×38cm인데 신갈-안산고속도로 건설공사로 인해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이동된 상태이다. 묘역의 석물로는 상석·향로석을 비롯하여 동자석·문신석·망주석이 각 한 쌍씩 있고, 장명등이 중앙에 있었으나 1980년대에 도난당하여 지금은 빈 자리만 남아 있다.
사진 4-27 유석 선생 묘역. 부곡동 산 5-1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4-28 유석 선생 신도비. 그는 지조가 높고 강직했으며 문장이 뛰어났다고 신도비에 기록되어 있다.
▷ 역사 및 유래 묘소는 효종 6년(1655년)에 조성되었으나 비의 건립 연대는 숙종 16년(1690년)으로 조경(趙絅)이 비문을 짓고 허목(許穆)이 글을 썼다. 유석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덕보(德甫), 호는 개산(皆山),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시회(時會)의 아들로 조부 격(格)은 정언을 지냈고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다. 인조 3년(1625년) 강원도 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에 이르렀는데 그는 천성이 강직하고 지조가 있어 인조를 30년 동안 받들었고 효종도 7년이나 섬겼는데 두 임금 모두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의 신도비에는 “공은 인품이 강직하고 방정했으니 그것은 타고난 천성이다. 그리고 특립독행(特立獨行)의 지조가 있었으며 문장을 하는 것도 그 위인과 같았다. 선배에 남곽·박동열 같은 이가 있어 공의 변려문은 소장공(蘇長公;東坡)의 당에 들어갈 만하다.”고 칭찬하는 글이 씌어 있다. 공의 저서로는 「개산집(皆山集)」이 전해지고 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13) 홍처윤(洪處尹) 선생 묘 및 묘갈
▷ 위치 안산시 선부동 산 112-2번지. 안산시를 가로지르는 중앙로를 따라 시화 쪽으로 향하다 보면 전철 안산선의 종점인 안산역이 나오는데, 안산역에서 우회전하여 신갈-안산고속도로의 서안산 IC 쪽으로 향하다 보면 선부동이 나온다. 홍처윤 선생 묘는 선부동 근로자임대아파트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다.
▷ 구조 이곳에는 홍처윤(洪處尹)을 비롯하여 홍수기(洪受箕)·홍수서(洪受敍) 등의 무덤이 있는데, 홍처윤의 무덤은 그 중 가장 위쪽에 있으며 방향은 곤좌(坤坐;서남향)이다. 무덤의 석물로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상석의 좌우에 망주석이 하나씩 있다. 또한 묘역의 우측에는 행적비가 있고 좌측에는 묘갈이 있다. 봉분의 크기는 460×450×120cm, 상석은 화강암으로 157×90×32cm이다. 또한 향로석은 31×28×34cm이며 망주석의 높이는 179cm이다. 행적비는 1987년에 건립한 것으로 재질은 오석이며 규모는 150×103×28cm이다. 묘갈은 귀부(龜趺)와 이수가 잘 남아 있는데 귀부는 규모가 180×110×60cm이며 균형 잡힌 몸매에 섬세하고 세련된 모양을 하고 있다. 이수는 옥개석의 형태로 하단부에 용의 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며 윗부분은 보주형 꼭지에 팔작지붕 형태인데 규모는 110×90×50cm이다. 비신은 140×56×33cm이다.
사진4-29 홍처윤 선생 묘역. 선부동 산 112-2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4-30 홍초윤 선생 묘갈. 귀부와 이수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몸매가 섬세하고 세련되어 있다.
▷ 역사 및 유래 홍처윤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지임(之任), 호는 안분재(安分齋),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관찰사 명원(明元)의 아들이다. 1639년 인조 17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1641년 검열(檢閱)을 거쳐 1646년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과제(科題)에 문제가 있어 파방(罷榜)되자 삭직(削職)당했다.
그후 1648년 복적되어 정언(正言) 수찬(修撰)을 지내고 1650년(효종 1년) 응교(應敎)로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 해 지평(持平)으로 영의정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였다. 이에 교리(校理)가 되고 왕이 당쟁의 폐해를 지적하자 그 무해(無害)함을 진술하여 삭직되었다가 백천군수로 기용되고 1655년 보덕(輔德)에 승진 사인(舍人)을 거쳐 1659년 수찬 겸 보덕 등을 지냈다.
이해 효종이 죽자 빈전도감도청(殯殿都監道廳)이 되고 이어 사간(司諫)을 지낸 후 이듬해 형조참의(刑曹參議)·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였고 1661년(현종 2년)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고 황해도 관찰사를 거쳐 1663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예조참의(禮曺參議)에 이르렀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추증받았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
(14) 정정옹주(貞正翁主) 묘
▷ 위치 안산시 부곡동 산 50-40번지. 수인산업도로 안산에서 인천방향으로 가다보면 시흥-안산간 고속도로와 신갈-안산간 고속도로의 안산분기점이 나오고 정재초등학교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우회전하는 샛길을 통해 진입하면 부곡동이다. 정재초등학교를 지나 제일스포츠센터 쪽으로 향하다 보면 정정옹주 묘의 표지판과 만날 수 있다.
▷ 구조 봉분 200×540cm
▷ 역사 및 유래 선조의 후궁 정빈(貞嬪) 홍씨(洪氏)의 소생으로 선조의 아홉째딸이다. 선조 37년 정정옹주로 봉해지고 광해군 2년 진안위(晋安尉) 유적(柳Z)에게 출가하였다.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이 강화도에서 증살(蒸殺)되었고 이어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모하려 하자 지아비와 더불어 이를 반대하였다. 후에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인조는 광해군 치하에서 진안위가 정의롭게 처신하였다 하여 추증하고 정정옹주에게도 두터운 예로 대우하였다. 후사가 없어 시동생 영(潁)의 아들 명전(命全)을 양자로 삼았으나 명전도 문과에 급제한 지 2년 만에 요절하였다. 이후 2년 만에 옹주도 타계하니 현종은 정사를 폐하고 장례 비용을 후사하였으며 스스로 빈소에 나아가 진안위 묘에 합장하도록 하였다.
사진 4-31 정정옹주 묘역. 부곡동 산50-40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되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되었다.
(15) 윤강(尹絳) 선생 묘 및 신도비(神道碑)
▷ 위치 안산시 선부동 산 17-2번지. 안산에서 부천 쪽으로 가다 보면 좌측의 군자봉으로 꺾여지는 소로가 나오는데, 이곳에 다다르기 전에 군부대 있는 곳에서 진덕사 쪽으로 우회전해 가다가 다시 우산리라는 곳으로 우회전해 내려가면 좌측으로 윤강 선생의 묘역이 보인다.
▷ 구조 비개(碑蓋) 181×108×87cm, 비신 270×111×48cm, 기대 186×126×59cm의 규모이다. 비신의 높이가 270cm에 달하는 큰 규모에 속한다. 비개는 팔작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비신의 우측 하단부 일부가 파괴되어 콘크리트로 붙여 놓았으나 현재는 안전을 위해 보강시설을 해 놓은 상태이다.
사진 4-32 윤강 선생 묘역. 선부동 산 17-2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 유적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4-33 윤강 선생 신도비. 1709년(숙종 35년)에 세워졌으며, 비개는 팔작지붕으로 되 있다.
▷ 역사 및 유래 윤강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자준(子駿), 호는 무곡(無谷)이며 본관은 파평이다. 인조 2년(162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인조 4년 검열을 거쳐 봉교·정언·교리 등을 지냈고 인조 20년(1642년) 사은 겸 진주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라 승지·대사헌·도승지·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효종 8년(1657년)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예조판서로 빈전도감 제조가 되어 장례를 치렀다. 이 해 판의금부사·이조판서를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현종 5년(1664년) 민유중의 탄핵으로 관직을 사직한 후 향리인 안산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마쳤다. 신도비는 송시열이 찬하고 윤지인이 썼으며 윤덕준이 전액하였으며 숙종 35년(1709년)에 건립하였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되었다.
(16) 부계팔경도(釜溪八景圖)
▷ 위치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가(柳文馨家).
▷ 구조 총 8폭으로 그림 31.2×24.8cm, 병풍 150×560cm
▷ 역사 및 유래 부계팔경도는 안산시 부곡동 일원의 팔경을 그림으로 묘사한 병풍이다. 8폭으로 각 경관마다 화제(畵題)가 있고 독특한 필치로 산수와 전원 또는 기암괴석을 묘사하였다. 특히 전경도에는 지형·산세·지명까지 기록되어 있어 지명 연구 등 향토사적 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작가인 유원성(柳遠聲)은 호가 모산(帽山)이며 1851년 안산 부곡동에서 출생하여 개천군수의 관직에 올랐으나 일제강점 이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고향을 지키며 부곡 땅을 화폭에 담았고, 1945년 한맺힌 일제의 패망을 보고 9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사진 4-34 부계전도.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가 소장. 조상의 묘소와 종토의 위치를 그린 지도로서 안산시 향토유적 제17호로 지정되었다.
▷ 특기 사항 1920년대 부곡 지방의 지형 구조가 어떻게 변모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17) 부계전도(釜溪全圖)
▷ 위치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가(柳文馨家).
▷ 구조 그림 72.2×133cm, 족자 120×180cm
▷ 역사 및 유래 경성당(竟成堂) 주인 모산(帽山) 유원성(柳遠聲)이 조상의 묘소와 종토의 위치를 정확히 표기하여 후손들이 잘 지키도록 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서편에서 부감법으로 부곡동을 사실적으로 그린 지도이다. 그러나 단순히 조선 시대의 다른 지도와는 달리 대단히 사실적인 필치로서 일종의 진경산수라고 할 수 있다. 세필로 각 지역의 특징을 잘 표현하였으며 중요한 지점들은 세필로 상세히 표시하였고 중요 지점에 대해서는 한자로 지명을 명기하였다. 그리고 산소가 있는 곳은 붉은 점을 찍어 표시하고 땅은 자신의 것과 타인 소유를 글씨를 적어 표시하였다. 지형도의 위에 후손에게 부곡동의 토지와 산소를 철저하게 수호할 것을 염원하는 발문을 적고 있으며 제작한 연기와 작자를 정확히 명기하고 있다. 개발 이전의 안산의 모습을 원형대로 볼 수 있는 자료일 뿐 아니라 명기된 지명들은 이 지역의 지명을 고증하는 중요한 근거 자료라고 할 수 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17호로 지정되었다.
(18) 최용신(崔容信) 선생 묘
▷ 위치 안산시 본오동 879-4번지. 전철 안산선 상록수역에서 하차하면 그곳이 본오동인데 상록수역 건너편은 우성 아파트이다. 우성 아파트와 마주한 아파트단지가 태영 아파트인데 최용신 선생의 묘는 태영 아파트와 인접한 천곡교회내에 위치해 있다.
▷ 구조 봉분 240×97cm, 유적지 3728평
▷ 역사 및 유래 심훈이 「상록수」에서 청석골이라 부른 마을이 바로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의 샘골마을이다. 또한 농촌의 문맹 퇴치를 위해서 야학에 온 힘을 기울인 채영신이란 여자 주인공은 일생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한 최용신(崔容信)이라는 실제 인물이다. 최용신은 서기 1909년 8월 함경남도 원산읍 두남리에서 최창희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최용신은 대단히 곤궁한 생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그러한 생활 가운데서도 그녀는 신앙심이 깊어 열심히 교회에 다녔으며, 루씨(樓氏)여자보통학교와 루씨여자고등학교를 나왔다.
그후 그녀는 서울에 있는 감리교 협성신학교 졸업을 1년 앞둔 1931년 10월 샘골마을로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내려왔다.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농촌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봉사정신과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조그만 예배당 천곡교회를 빌어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한 것은 10월 2일이었다.
지원생은 많았고 장소는 협소하여 오전·오후·저녁 3부제로 밤늦도록 가르쳤다. 처음에는 주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냉대도 많이 받았으나 차츰 동네 사람들의 환심을 얻어 최용신은 이 지방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그후 최용신은 계속 이 마을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다가 1934년 일본 고베 신학교로 유학을 갔으나 신병으로 귀국하였고, 샘골 마을에서 요양하면서 농촌계몽활동에 전념하였으나 유학 중 얻은 병과 과로가 겹쳐 학생들과 학부모, 그리고 샘골 마을 주민들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1935년 1월 23일 27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사진 4-35 최용신 선생 묘역. 본오동 879-4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18호로 지정되었다.
그후 지난 1974년 11월 30일 루씨 동문과 천곡교회에서 상록수 최용신 선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를 세웠으며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특히 시흥군 하북면 흑석리 출신의 작가 심훈이 그녀가 별세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크게 감동하여 그녀의 희생적인 농촌봉사활동을 참고하여 그의 대표작 「상록수」를 집필함에 있어 최용신 선생을 여주인공 채영신의 모델로 삼았다. 현재 안산시에서는 최용신 선생의 묘소 근처 전철역 이름을 상록수역으로 명명하여 선생의 높은 정신을 기리고 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19) 홍정희(洪貞羲) 효자문
▷ 위치 안산시 남동 748번지. 대부동사무소 앞에서 좌회전하여 비포장도로를 따라서 대남초등학교 쪽으로 향하다 보면 홍정희 효자문의 안내판이 보이는데 이곳에서 약 1km 정도 소로를 따라가면 목표하는 곳이 나타난다.
▷ 구조 정면 3.20m, 측면 1.35m의 팔작지붕에 양기와를 올린 홑처마 건물이다. 벽은 시멘트로 근래에 개수하였다. ▷ 역사 및 유래 효자 홍정희(洪貞羲) 선생은 조선 후기인 1880년대 초 대부도 남도에서 태어난 이름난 효자로서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온순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정성을 다해 봉양했으며 그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특히 부친이 별세하자 그는 깊이 애통해하며 묘소 앞에 조그마한 여막(廬幕)을 짓고 그곳에서 3년 동안 생활하였는데, 그는 육식을 입에 대지 않고 소찬(素饌)으로 일관했으며 한 번도 자신의 집에 내려오지 않는 등 선친의 묘소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의 뛰어난 효행과 마음가짐은 마침내 조정에까지 알려져 고종(高宗) 30년(1893년) 6월 효자 정문(旌門)이 이곳에 건립되었고 만인의 귀감이 되었다.
사진 4-36 홍정희 효자문. 남동 748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19호로 지정되었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19호로 지정되었다.
(20) 대부도 자선비(慈善碑) ▷ 위치 안산시 남동 85-11번지. ▷ 구조 자선비의 석재는 화강암이며 대석은 시멘트로 건립되었다. 규모는 높이 140cm, 폭 34.5cm, 두께 15cm이다.
사진 4-37 대부도 자선비. 남동 85-11번지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20호로 지정되었다.
▷ 역사 및 유래 이찬(李燦) 선생은 한말에서 1920년대 초까지 생존했던 이 지방의 덕망 있는 재산가이자 유지로서 본관은 경주이다. 선생은 일찍이 부농(富農)의 아들로 태어나 그가 생존해 있을 당시만 해도 남동 일원의 토지는 거의 그의 소유라 할 만큼 대지주였으며 대부분의 농토는 많은 소작인들에 의해 경작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평소 마음이 소박하고 인정이 두터워 스스로 가난한 민중의 처지를 깊이 헤아려 일부의 땅은 가난한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빚과 소작료를 탕감해 주는 등 범인이면 생각할 수 없는 큰 덕량(德量)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 뒤 선생이 별세하자 은혜를 입은 마을 사람들이 거향적(擧鄕的)으로 장례를 치러 주고 생전의 고마운 마음씨와 그 뜻을 기리기 위하여 현 남4동에 위치한 선생의 묘소 앞에 자선비(慈善碑)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선생의 가세(家勢)와 후사(後嗣)가 영락(零落)하고 비를 돌보는 이가 없어 자주 쓰러져 1980년 4월 5일 남1동·남3동 중간 도로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 특기 사항 안산시향토유적 제20호로 지정되었다.
통훈대부(정3품) 사재감정 김맹전 묘
사재정공 휘 맹전 지묘 : 연성군 김정경 손자 * 묘소 : 안산시 선부동 석수골
숙인 경주이씨 묘소 : 광주(廣州) 현천리(玄川里)
= 하남시 감북동(위정공 묘소 우측 안장)
숙인 선산김씨 묘소 사재정공 맹전 합장
선부동(仙府洞)
옛날에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던 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선부리(그 우물을 '석수골 우물'이라 함) 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대월면 선부리와 달산리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군자면 선부리로 개칭 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거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安山市 仙府洞)으로 되었다.선부동은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관내에서 최초로 장시(산대장)가 섰을
만큼적대던 곳이었다. 특히, 안산의 곽적성씨중 안산 김씨 후손중에 김맹전 (金孟銓)의 묘를 석수골에
쓴 후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안산에 안산 성씨의 뿌리를 내렸다 한다.
석수골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조선조 태종때 좌명공신으로
연성군에 봉해진 김정경(1345~1419)의 손자인 김맹전의 묘를 쓸 때 묘 앞에 설치할 비석을 배에 싣고 와서 석공이 돌을 깎아 석물을 세웠다 하여 석수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으로 개의 아들이다. 자는 극유로 강희안의 사위이다. 성종(世宗) 14년(1483) 춘당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감에 이르렀다. 안산시 원곡동에 묘가 있었으나 안산 신도시 건설로 인하여 충청도로 이장되었다.
본관은 안산으로 교감 맹강의 아들이다. 자는 자수, 호는 모기재로 김식의 문인이다. 중종(中宗) 14년(1519)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이 되었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처벌받았으며,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안산시 원곡동에 묘소가 있었으나 신도시 건설로 인하여 충청도로 이장되었다.
제2절 비지정문화재
1. 선사·역사 유적 및 유물
(1) 별망패총(別望貝塚)
▷ 위치 안산시 초지동 2동. 별망패총은 별망성이 있는 해발 49m의 야산 근처인 남사면 바닷가 부근에 형성되어 있었으나 개발로 인하여 1978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 이후 완전히 파괴되었다. 현재는 공장건물이 들어서 있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명지대학교의 보고에 따르면 폐수처리장 부근에 약간의 패각층이 있다고 보고된 바 있으나 정확한 것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 유적의 환경 원래 이 일대는 갯벌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발굴 당시에는 개간으로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당시의 환경을 복원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부근의 정왕리 토탄층에서 얻어진 자료를 토대로 선사 시대의 식생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토탄층은 지표하 400cm의 깊이까지 묻혀 있었으며 전체 5개 층으로 나누어지는데 바닥층, 즉 5층에서 연대가 2290±90년 전으로 나왔다. 이 층에서는 오리나무와 참나무 등의 목본식물과 함께 화본과 식물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현재의 훼손되지 않은 자연식생과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신석기 시대에도 전체적인 식생은 이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패총에서 발견된 조개의 종류를 보면 굴·토굴·대고둥·점박이고둥·좁쌀무늬고둥·뿔고둥·떡조개·반지락·백합·새꼬막·비단가리비·가무락조개·소라, 그리고 주름감생이 등이 포함되어 있다.
사진 4-38 별망패총이 발견된 별망성지 원경. 바다와 인접한 부근에서 발굴되었으나 현재는 흔적조차 없다.
▷ 층위 및 유구 발굴에서 드러난 층위는 표토층·패각층·즐문토기산포층, 그리고 바닥의 생토층으로 나누어진다. 패각층은 지점에 따라 적갈색·흑갈색·황갈색조로 나누어지는데 패각층 아래에 점토층이 있고 그 아래에 신석기 시대의 생활 면이라고 할 수 있는 층이 있다. 신석기 시대 생활 면에는 토기편들이 잡석과 함께 나타나는데 바닥이 점토로 된 지점에서는 이들이 엉켜서 대단히 단단하게 나타난다. 한편 대형의 원형 노지가 발견되었는데 직경이 약 1.6m 정도의 규모이고 약 60cm의 깊이이다. 이 노지의 주변에는 재가 넓게 깔려 있고 노지의 내부에는 목탄과 재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내부의 주변으로 잡석을 돌려 놓고 있었다. 또한 50cm×70cm의 규모로 25cm 깊이의 구덩이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기능은 확실하지가 않다.
▷ 출토 유물 신석기 시대의 즐문토기와 원삼국 시대의 김해식(金海式) 토기가 출토되는 2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즐문토기는 환저(丸底)나 첨저(尖底)의 장난형·반난형의 기형이 대부분이며 태토(胎土)는 점토에 사립이나 조개분을 보강재로 섞어 강도를 강화시켰다. 윤적법(輪積法)·수날법(手捏法)·권상법(捲上法) 등의 방법으로 성형하였으며 기벽은 6~12mm 내외이고 문양은 점선열문·단사선문·횡주어골문·조문 등이 음각으로 시문되었다. 토기는 패각층 출토의 것과 바닥층 출토의 것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바닥층에서는 선을 그어 횡주어골문은 시문한 것이 없는 것이 구별된다.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의 시문 양식은 구연부와 몸통부가 각각 다른 문양을 시문한 것과 동일 문양을 시문한 것으로 대별되고, 시문의 방식은 단치구나 다치구를 써서 긁거나 찍어서 시문한 것들이다. 원삼국 시대의 김해식 토기는 즐문토기에 비해 그 출토량이 빈약하다. 승문·격자문·승석문·무문의 연질 적갈색 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기형은 호형·옹형·발형이 대부분이다. 태토가 거칠고 표면이 조잡한 것이 특징이다.
▷ 특기 사항 별망패총의 신석기 문화는 그 연대가 B.C. 1500년경으로 추정되는데, 서해안 지역의 신석기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서 인접한 오이도 패총과의 비교 연구를 통해 종합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2) 흘곶패총
▷ 위치 구 대부면 소재지에서 흘곶으로 가는 도로변 남4리 마을회관에서 약 100m 정도 떨어진 도로의 비탈면에서 북향으로 패총이 발견되었다. 도로를 내면서 단면이 노출되었는데 이곳은 해발 약 44m의 구릉지이다.
▷ 구조와 내용 도로면에서 드러난 패총지의 길이는 약 17m였는데 전체적인 규모는 확인이 불가능하였다. 패각층은 지표하 20cm에서 시작되었고 그 두께는 약 40~60cm 정도였다. 패각은 90% 이상이 굴껍질이었으며 그 속에서 빗살무늬 계통의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층위는 3개층으로 구분되었으나 층위 간의 문화적인 차이는 아직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토기는 단사선문이 시문된 편들과 어골문이 시문된 것들이 포함되었으며 기타 격자문을 시문한 것도 있었다. 한편 무문의 토기편들은 빗살무늬토기의 시문되지 않은 파편들로 판단되었고, 토기의 태토는 석영과 장석, 그리고 가는 모래가 섞인 것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3) 말부흥패총
▷ 위치 말부흥 부락의 도로가 끝나는 곳에 있는 어린이놀이터 바로 뒤편, 해발 40m 정도 구릉의 약 7부능선쯤에 바다를 면해 패총이 남아 있다.
▷ 구조와 유물 원래는 해안지대에 널리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닭 사료용으로 파내어 많은 부분이 훼손된 상태였다. 대부분이 굴껍질인데 두터운 곳은 약 110 cm 정도의 두께로 남아 있었다. 유물은 타제석기 1점만이 수습되었는데 백색의 규암제 냇돌의 끝부분과 옆부분을 깨트려 만든 것이었다.
(4) 월피동(月陂洞) 지석묘군(支石墓群)
▷ 위치 월피동 안산천변.
▷ 구조 1978년에 경희대학교 박물관팀에 의해 2기가 조사되었고, 1983년도에는 한양대학교 박물관팀에 의해 4기가 확인되었으나 현재는 경지정리 등 개발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1978년도에 경희대학교에서 조사한 지석묘는 상석(床石)의 크기가 282×186×44cm, 210×160×44cm이었는데 장축의 방향은 남-북 방향이었다(표 4-2). 지석묘의 하부구조는 지석 없이 토광을 묘실로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양식은 이 지역 지석묘 양식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호 지석묘의 상석에는 39개의 성혈이 있었다고 보고되었다. 따라서 이를 통해 지석묘가 단순한 무덤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예배장소의 기능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83년도에 한양대학교에서 조사한 4기는 이미 조사 당시 3기는 훼손된 상태였고 나머지 1기는 240×130×50cm의 규모로 논 한가운데 남아 있었다고 한다. 표 4-2 경희대학교 박물관팀이 조사한월피동 지석묘 현황(1978년)
구분
1호
2호
상식
282x186x44㎝
210x160x44㎝
묘실
형태
장방형
타원형
장축x폭x깊이
?x65x68㎝
178x98x55㎝
장축 방향
남-북
남-북
출토유물
석기2점,무문토기편
특......징
성혈39개
▷ 출토 유물 무문토기 파편 일부 외에는 출토 유물이 거의 없었으며, 1978년 조사시 석기 2점이 출토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 특기 사항 출토 유물이 빈약하여 정확한 축조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서해안 지석묘사회의 이해를 위한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분별한 개발로 인하여 파괴되어 더 이상 조사가 불가능하여 안타깝다.
(5) 양상동(楊上洞) 지석묘군(支石墓群)
▷ 위치 양상동 안산천 주변.
▷ 구조 1978년 경희대학교와 건국대학교 박물관팀에 의해 조사된 지석묘군으로, 그 중 매장 유구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2기로 전해진다. 상석의 크기는 332×240×100cm, 198×200×70cm로 비교적 소형에 속한다. 지석묘의 하부구조는 장방형의 토광으로 일반적인 지석묘의 하부구조인 석실구조와 비교되는 매우 특징적인 양식이다. 상석의 표면에는 2개의 성혈(性穴)이 있었는데, 성혈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돌을 문질러 생긴 구멍으로 주로 지석묘의 상석이나 큰 바위에서 발견된다.
▷ 출토 유물 무문토기편 일부가 출토되었다.
▷ 특기 사항 1호 지석묘의 상석이 이중상석이라는 점이 특이하며, 하부구조인 토광에 시신을 안치하고 흙을 덮은 뒤 약 370cm 범위로 10cm 정도의 자갈돌을 깔아 놓았다.
(6) 양상동(楊上洞) 적석토광묘(積石土壙墓)
▷ 위치 양상동과 월피동 경계의 관모봉 서쪽 능선.
▷ 구조 길이 197cm 폭 83cm 깊이 48cm의 토광묘이다. 토광에 시신을 안치한 후 흙으로 덮은 뒤 그 위에 작은 돌을 60cm 정도의 두께로 쌓아 놓은 독특한 형태의 적석토광묘이다.
▷ 출토 유물 무문토기 1점, 유구석부(有溝石斧) 1점.
▷ 특기 사항 1978년 경희대학교 박물관팀에서 조사한 것으로, 주변에 같은 형태의 적석토광묘가 1기가 인접해 있었고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와 지석묘의 존재도 확인되어 지석묘와 같은 시기의 매장 형태일 가능성이 높았다. 향후의 재검토가 필요한 유적이다.
(7) 성곡동(城谷洞) 성지(城址) ▷ 위치 안산시 성곡동 해봉산(海峯山) 정상. ▷ 구조 산 정상부에 평탄한 대지가 있고 경순왕을 모시는 성황당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현재 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정확한 성의 규모와 구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 출토 유물 해봉산 정상부와 주변 지역에서 다수의 토기편과 기와편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상당수가 삼국 시대의 토기편이었다. ▷ 역사 및 유래 해봉산은 바다에 면한 해발 48m의 야산으로 생김새가 게의 발 모양이라 하여 해봉산(蟹峯山)이라고도 하며 혹은 성두산(城頭山)이라고도 부른다. 「안산읍지」에는 “城頭高峰上有城堡遺墟……”라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성두산에 둘레가 약 2백 칸(360m 정도)인 토루(土壘)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구전에 의하면 고구려 장항구현의 폐지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이곳은 남양만과 당성이 있는 송산면 일대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서해안 지역을 수비하는 데 중요한 길목이며 현재도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한편 「동국여지지」에 “獐項口縣;在郡西三十里”라는 기록이 있는데, 군 서쪽 30리 지점은 바로 성곡동 일대이다. 위의 문헌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성곡동의 해봉산 일대에 성이 있었음은 거의 확실하며, 고구려의 장항구현의 치소와도 관계된 곳임을 알 수 있다. ▷ 특기 사항 현재 장항구현의 치소는 장상동의 노리울 일대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 정확한 위치를 규명하기 위해 종합적인 학술조사가 요구되는 지역이다. 현재는 군부대가 위치하고 있어 조사가 어려운 실정이다.
(8) 목내동(木內洞) 성지(城址) ▷ 위치 안산시 목내동. ▷ 구조 1978년 단국대학교 박물관팀에서 발굴·조사한 기록에 의하면 토축성으로 목내동과 초지동 사이의 야산의 산능선들을 연결하는 천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성벽의 높이는 2~3m, 폭은 상부가 2m 하부가 5m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현재는 성벽의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도로 건설로 인한 능선의 절단면에 성벽으로 보이는 2m 높이의 토축만이 남아 있다. ▷ 출토 유물 삼국 시대의 토기편 다수, 통일신라 시대의 인화문 토기편, 고려·조선 시대의 와편과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 역사 및 유래 목내성을 지칭하는 정확한 명칭이 남아 있는 정확한 문헌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안산 김씨 족보에는 조선 시대 안산군의 읍치가 바다에 가까운 목내동에 있었는데 이곳이 소릉지(昭陵址)로 결정되면서 읍치는 현재 군청터가 남아 있는 수암동 일대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이 성벽의 남쪽은 소릉이 있었던 능안마을이고 북쪽은 성안마을이다. 안산 김씨의 족보 기록과 지명 고찰을 통해 볼 때 이곳에 성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 특기 사항 이 성의 정확한 구조 및 축조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삼국 시대 이후 후대까지 해안의 경비를 담당하는 기능을 가진 성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9) 일동(一洞) 고분(古墳) ▷ 위치 안산시 일동. ▷ 구조 고려 시대의 고분으로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1978년 반월공업기지개발계획을 위한 발굴 조사를 통해 그 구조가 확인되었다. 풍화 암반을 파고 들어가 동서 260cm, 남북 110cm, 깊이 266cm의 장방형 토광을 만들고 바닥에 약 12cm 두께로 숯을 깔았으며 그 위에 다시 백토(白土)를 1cm 두께로 고르게 깐 다음 그 위에 목관을 안치했다. 목관의 두께는 5.6cm 내외이며 좌우에 각 2개씩 모두 4개의 철제 관고리가 달려 있다. 묘광의 둘레에는 폭 110~196cm, 길이 8.6m, 동벽 7.6m, 남벽 8.3m이며 凹형을 이루는 곡장(曲墻)이 있다. ▷ 출토 유물 관 안에서 4개의 동전을 비롯 총 42점의 동전과 발치 쪽에서 청동수저 1벌이 출토되었다. 동전은 치평원보(治平元寶)·원우통보(元祐通寶)·대관통보(大觀通寶) 등 4종류로 1063~1125년 사이에 중국에서 사용된 동전들이다. 이를 토대로 고분의 축조 연대를 상한 12세기 초, 하한 12세기 말로 추정할 수 있다. ▷ 특기 사항 이 고분은 시대가 비교적 확실한 고려 시대의 고분으로 묘광과 목관 사이의 공간도 모두 숯으로 채워 넣었으며 묘광에 백토와 숯을 번갈아 까는 등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침향(枕向)은 동침(東枕)이며 고려 시대 고분의 특징인 곡장이 있어 고려 시대의 고분 연구가 미흡한 현 실정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10) 현덕왕후릉지(顯德王后陵址) 출토 유물
1) 석호(石虎) 한 쌍
▷ 위치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 구조 석재는 회백색의 화강암이며 높이 각각 95cm와 97cm, 길이 155cm와 160cm, 폭 40~36cm이며 대석은 160×62×34cm, 190×65cm×18cm이다. 앞발을 세우고 앉은 형태를 하고 있으며 배 밑 부분을 깎아 내어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얼굴을 치켜들고 앞을 바라보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커다란 눈과 코, 그리고 크게 벌린 입과 가지런한 이빨은 해학이 넘치며 목과 몸통은 구분이 없어 둔중하게 보이나 몸의 중량을 융기시켜 표현한 등뼈 등 당당한 양감(量感)을 느끼게 한다. 코의 일부는 결실된 상태이다.
왕릉이나 왕후의 능에 배치되는 석물(石物)은 각 4마리씩의 석호(石虎)·석양(石羊)·망주석(望柱石)·장명등(長明燈)·문신석(文臣石)·무신석(武臣石)·석마(石馬) 등인데 그 중 석호상은 능의 북쪽에 2개, 동쪽과 서쪽에 하나씩 머리가 바깥쪽을 향하도록 배치하게 되어 있다. 이 한 쌍의 석호가 그 중 어느 쪽에 위치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덕왕후를 소릉(昭陵)에 장사지낸 1441년 9월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지며 「세종실록」의 오례의(五禮儀)에 준해서 제작한 조선 초기 석조조각을 대표할 수 있는 걸작품이다. ▷ 역사 및 유래 현덕왕후 안동 권씨는 문종비(文宗妃)로서 단종(端宗)의 생모이다. 세종 23년(1441년) 세자빈으로 왕손인 단종을 출산한 지 이틀 만에 24세의 젊은 나이로 죽으니 세종대왕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시켜 장지를 물색한 결과 안산군 목내리(木內里)를 택하여 장사를 지냈다. 그후 문종이 즉위한 후에 현덕왕후(顯德王后)로 추봉되고 능을 소릉(昭陵)이라 하였다. 그러나 세조(世祖)가 즉위 3년(1457년)에 능을 파헤쳐 유골을 바닷가에 묻고 소릉을 폐능하였는데, 그 56년 후인 중종 8년(1513년)에 유골을 찾아 동구능(東九陵)의 현릉(顯陵) 문종의 능 옆에 안장하여 소릉을 복원하면서 소릉이라는 칭호는 버렸다.
▷ 특기 사항 마을 주민들이 폐릉지에서 유물을 파내었는데 현재 이화여대자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사진 4-40 현덕왕후 폐릉지에서 발굴된 석양. 왕릉이나 왕후의 능에 배치되는 중요 석물이다. 전형적인 조선 시대의 능묘 호석이다.
사진 4-39 현덕왕후 폐릉지에서 발굴된 난간석주.
2) 난간석주(欄干石柱)
▷ 구조 길이 161cm, 폭 64cm, 두께 32cm이며 상단은 보주형(寶珠形)이고 하단에는 지대석 원공(圓孔)에 꽂도록 촉이 돌출되어 있는 전형적인 조선 시대 능묘호석인 난간석주이다. 난간석주는 능 주위에 돌릴 난간을 걸쳐 놓는 석주를 말한다. 중간 부분에 좌우의 난간을 걸치게 홈대가 마련되었고 밑 부분도 대석에 얹히도록 평평하게 다듬었다. 상단에는 양연과 복연을 새기고 난간(竹石)을 올려 놓는 부위에는 자방이 있는 4엽 연화문(蓮花文)을 새겨 놓았다
▷ 특기 사항 1978년 단국대학교에서 발굴하였으며, 현물은 안산시 근로청소년복지회관 후원에 보존되어 있다.
(11) 명안공주(明安公主) 묘 및 관련 유물 명안공주는 조선왕조 18대 현종의 셋째딸이자 숙종의 누이동생으로서 1679년 오태주(吳泰周)에게 출가하였다. 이 묘역은 명안공주와 함께 그 시어머니인 상주 황씨, 남편인 해창위(海昌尉) 오태주, 그리고 아들인 오원(吳瑗)의 묘가 열을 이루며 배열되어 있다. 묘역은 서남쪽에서 동북 방향으로 흘러내리는 작은 구릉의 끝 부분 능선을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능선의 자락이 끝나는 부분에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연못에서 동북편 약 50m 떨어진 곳에 재실(齋室)이 남아 있었는데 1997년 6월 원인모를 화재로 소실되었다.
사진 4-41 명안공주 묘역. 명안공주는 조선왕조 18대 임금인 현종의 셋째딸이자 숙종의 누이동생이다.
1) 묘역 묘역은 능선을 따라 높은 곳에서부터 명안공주의 시어머니인 상주 황씨의 묘가 맨 위에 자리잡고 있고 그 아래에 명안공주와 그 남편인 해창위 오태주의 묘가 하나의 봉분으로 합장되어 있다. 이 두 단계의 묘는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아래편에 오태주와 명안공주의 양자인 오원의 묘가 있다.
① 정경부인 상주(尙州) 황씨 묘 ▷ 묘역의 구조 묘역의 크기는 봉분의 직경이 805cm이고 높이가 157cm이다. 전면에 상석과 묘갈이 있고 좌우에 한 쌍의 망주석이 있다. ▷ 묘갈 묘갈은 “판서증 영의정충절공배정경부인상주황씨지묘”라고 예서로 상단에 가로로 돌아가며 새기고 비의 사면에 행서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회백색 화강석인데 돌이 치밀하고 고르다. 그래서 비의 현재 상태가 매우 좋다. 특히 비는 사각대 위에 있는데 비의 개석이 대단히 정교하게 한옥 지붕을 묘사하여 만들었다. 비개석은 평면이 정방형을 이루고 지붕의 전체 모습은 사각지붕인데 팔각지붕처럼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에 용을 배치하고 지붕의 꼭대기에는 연화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두었다. 처마는 다포식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 구조를 세밀히 묘사하고 있어 목재 건축미를 나타내려 하였다. 대단히 아름다운 비개석으로 조선 중기 석조 조각의 수준을 보여 주는 것이다. 비신은 사면의 폭이 거의 같은데 글은 사위인 이조정랑 최창대가 지었고, 글씨는 당시에 글씨로 이름이 있었던 아들 오태주가 썼다.
② 조선국 명안공주 묘 및 해창위 오태주 묘
부부합장묘로 봉분의 직경이 800cm이고 높이는 155cm이다. 묘의 아랫단에 상석과의 사이에 1단의 지대석을 심어 두었다. 묘를 향하여 우측에 묘비가 있고 좌측에는 숙종이 지은 제문비가 있다. 중심에는 상석이 네 귀에 북 모양의 받침을 하고 놓여 있고 그 전면에는 사각의 장명등이 있다. 장명등과 비슷한 위치에 묘의 양측으로 문인석이 하나씩 서 있다.
▷ 묘비 전면에 “朝鮮國王女明安公主之墓 崇祿大夫海昌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吳公泰周道長之墓”라고 굵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는 사각인데 사면에 해태를 조각하고 있고 전면과 후면에는 해태 두 마리가 대칭으로 마주보고 있으며 측면에는 한 마리를 조각하였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가면서 인동초로 장식하였다. 비개석은 사각 맞배지붕 모양을 하고 있는데 별다른 장식 없이 지붕 모양만 만들었다.
▷ 숙종어제제문비 숙종이 명안공주의 죽음을 슬퍼하여 지은 제문과 오태주가 죽었을 때 지은 제문을 새긴 비석으로 크기가 110×49×19cm이며 기대석은 88×57×30cm이다. 비석은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원두로 개석이 없는데 방석기단 위에 있다. 대리석이어서 마모가 심하여 일부의 글씨는 읽을 수가 없는데 그 내용은 대략 명안공주가 명성왕후의 셋째로 뒤의 두 누이들이 모두 일찍 죽었는데 또한 일찍 죽어서 슬프다는 내용이며 누이에 대한 그리움을 적은 것이다. 오태주의 제문에도 그의 재주를 기리고 일찍 죽었음을 아쉬워하는 내용이다. 상세한 내용은 강릉박물관 소장의 어제문에서 볼 수 있다.
▷ 석인 석인은 대단히 잘 남아 있는데 큰 편이며 몸통 전면을 균형 있게 다듬었다. 자연미는 없지만 표정이나 의습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③ 오원묘
▷ 묘역의 구조 제일 아랫단에 있는 묘로 양쪽에 망주석이 있고 향좌 측에 비석이 있다. 전면 중앙에 상석과 향로석이 있다. 봉분의 규묘는 직경이 860cm이고 높이가 110cm이다. 이 묘의 아래쪽은 경사가 급하게 떨어지면서 연못 있는 지점으로 연결되어 있다. ▷ 묘갈 오석에 해서로 새겼는데 남유용(南有容)이 지었고 아들인 재소(載紹)가 예서와 해서로 썼다. 비의 개석은 팔작지붕 모양으로 다듬었으며 사각 대석 위에 서 있다. 비는 승정원 개원 후 3을축에 세웠다고 되어 있다.
2) 묘막 겸 제실 제실은 묘를 향하여 좌측편 연못에서 동북쪽으로 약 5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는데, 본채는 곡자집으로 전면은 마루 2칸을 포함하여 전면 4칸, 측면 2칸이며 동편에는 부엌이 있다. 그리고 일자로 지은 대문채가 있는데 3칸으로 되어 있다. 대문간이나 본채는 화강석 장대석으로 단을 만들었고 주초도 화강석으로 다듬어 만들었다. 재목의 상태로 보아 일부는 당시에 재건한 것으로 보이는데, 왕가의 공주의 묘막으로 지었던 것인 만큼 격식을 갖춘 가옥으로서 18세기 상류가옥의 건축양식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제실에는 공주와 관련된 간찰·서화·생활용품 등 다량의 유물이 보관되었으나 1979년 훼손·산실되었는데, 이 중 일부가 강릉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45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공주의 묘막 건물은 이러한 유물과 함께 당시의 궁중생활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것이지만 1997년 6월 관리 소홀로 화재를 입었다.7)
3) 제실 소장 유물 현재 45점이 보물 122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명안공주의 아버지인 현종의 어필들이 포함되어 있고 그 외에 숙종의 어필 및 그림과 의복 및 생활도구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현종·명성왕후·숙종·명안공주 사이에 오간 편지는 당시의 왕족과 상류가족 간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며, 당시 한글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용품들은 그 연유가 분명한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조선 중기 누대를 거친 생활용구라는 점에서 당시 생활상의 이해나 변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8)
(12) 목련경(目蓮經) 및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지형(紙型) 화림선원(華林禪院)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 절의 고명인 약수암의 주지였던 진호(震湖) 스님이 소화(昭和) 11년, 즉 1936년 찍었던 활판용 지형으로 본문이 4면 27매, 표지용 지형이 3매가 포함되어 있다. 당시 성북구 성북동 183-37에 있던 법륜사(法輪社)에서 제작하였고 판매는 정가 75전으로 만상회(卍商會)에서 담당하였다. 지형은 각 매가 37.8cm, 27.4cm 크기로 각 매 4쪽의 내용을 담고 있다. 마지막 장은 40.0cm×20.4cm로 정조대왕의 옥쇄를 영인하여 놓았다. 이것은 「부모은중경」과 「목련경」이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복간한 것이기 때문에 넣은 것으로 보인다.
(13) 선학사(禪學史) 지형(紙型) 화림선원에 보관되어 있는 도서 인쇄용 활판 지형이다. 총 10면 16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의 크기는 50cm×32cm이며 각 장에 10쪽의 분량이 들어 있다. 한자와 한글의 혼용체이며 한문이 압도적으로 많다. 안동상로강술(安東相老構述)로 되어 있으며 인도·중국, 그리고 조선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선종이 성립되는 과정을 논한 책이다.
(14) 용만가회사마동방록(龍彎佳會司馬同榜錄) ▷ 위치 진주 유씨(柳氏) 차종가(次宗家) 유문형가(柳文馨家) 소장. ▷ 구조 전체 5쪽의 첩으로 첫장은 압록강변 의주(義州) 청심당(淸心堂)의 전경과 연회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 계회도이고, 제2쪽은 다섯 동기생들이 연배에 따라 순차적으로 관직명·자(字)·호(號)·생년·관향, 그리고 을축년 사마시를 거친 이후 등과한 연기(年紀)가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에는 이들이 모였음을 기리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고, 그 말미에는 만력(萬曆) 임인(壬寅;1602년) 5월 12일이라고 기록해 확실한 제작 연대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화첩을 보관한 유해엽(柳海曄;1910~1996년)이 기록한 발문이 들어 있다. 중앙에 청심당에 앉아 연회를 즐기는 5인의 선비를 우측에 4인, 좌측에 1인을 그렸고 당의 중앙에는 춤추는 기녀를, 당의 앞으로는 연회 참가자를 그렸다. 그리고 주위의 풍경으로 강 너머 중국의 원산을 희미하게 그렸다. 원근법 없이 사물을 대소로 표시하였고 당의 측벽이나 측면 담장의 경우는 평면으로 표시하였다. 길이 33.7cm, 폭 28.5cm으로 진채(眞彩)로 그렸다. ▷ 역사 및 유래 이 화첩은 선조 35년(160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평안북도 의주 지방에 있는 용만(龍彎)의 청심당에서 선조 22년 기축사마시(己丑司馬試)에 합격한 동기생들인 당시 용천군수 유시회(柳時會), 어사 홍경신(洪慶臣), 의주부 판관 홍유의(洪有義), 서장관 윤안국(尹安國), 평안도 도사 이호의(李好義) 등이 자신들의 모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5개의 동일한 화첩 중의 하나이다. 이 화첩은 안산 부곡동의 유시회의 문중에 전해 오는 것으로 동일본이 2부가 있다. 아마도 당시 5부를 만들어 각각 하나씩 지녔으나 무슨 연유인지 한 사람이 두 본을 가지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다섯 사람 중에 윤안국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 도중에 배가 뒤집혀 순직하였고, 이호의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왕조실록의 중간을 위하여 기주관(記註官)을 하였던 인물이다.
사진 4-42 용만가회사마동방록. 유문형가에서 소유하고 있는 화첩으로, 1602년(선조 35년)에 제작되었다.
▷ 특기 사항 모두 다섯 본이었을 화첩 중 현존하는 것은 유문형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이 유일본으로 이 화첩의 끝 부분에는 용천군수 유시회의 8세손 유원성(柳遠聲)의 발문이 추가되어 있다.
(15) 고행록(苦行錄) 2점(點)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가.
1) 한산 이씨 고행록
진주 유씨 제18세손 유명천(柳命天;1633~1705년)의 삼취 정경부인 한산 이씨(1659~1727년)의 한글 수필본이다. 내용은 이씨 부인이 시집온 1676년부터 별세한 1727년까지 50여 년간 남편인 유명천의 여러 차례의 유배생활과 겹치는 집안의 우환으로 인한 생활의 괴로움을 유려한 궁체로 기록한 수필이다. 한산 이씨의 아버지는 수빈(壽賓), 조부는 진사인 부(阜), 증조부는 판서를 지낸 경전(慶全), 고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산해(山海)이다.
남편 퇴당(退堂) 유명천은 167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1675년 이조좌랑, 1678년에 부제학·대사성 등을 지내고 1680년 이조참판 재임 중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몰락하자 충북 음성에 유배되었으나 1683년에 풀려나 1688년에 강계부사를 지냈다. 그는 남론으로 뛰어나 남인의 중심 역할을 하였고, 특히 탁남(濁南)으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공조판서·예조판서를 지냈으나 1694년에 갑술옥사로 다시 파직되어 그의 아우인 이조판서 정재(靜齋) 유명현(柳命賢)과 함께 각각 강진과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699년에 방귀된 지 2년 후 1701년에 다시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3년 후(1704년)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우인 유명현은 결국 유배지인 남해도에서 별세하였다. 이 고행록은 현재 두루마리로 되어 있는데 유려한 문체로 조선 중기 수필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을 만하며, 또한 한글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세로 34cm, 길이 557cm이다.
2) 한산 이씨 고행록 안동 권씨 필사본
이 고행록은 한산 이씨의 8대손이던 화은(華隱) 유해엽(柳海曄;1910~1996년)의 부인 안동 권씨 태임(1908~1967년)이 18세 되던 해인 1926년에 이씨 부인의 고행록을 그의 시할아버지인 모산(帽山) 유원성(柳遠聲)이 다시 구술하는 것을 받아 적어 남긴 것이다. 원전인 한산 이씨본과 약 2백 년의 차이가 나는데, 한글의 변천 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 특기 사항 본 고행록은 17세기 조선 시대의 풍속과 사대부의 생활상을 밝히는 민속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수필문학을 연구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더욱이 2백 년 전후의 어휘 변화, 철자 변화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어 1996년 교육학술진흥기금에 의한 연구 프로젝트로 선정되어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김영배 교수 외 5인의 학자가 3년여에 걸쳐 연구한 결과가 출판사 태학사(太學社)에 의하여 출간될 예정으로 있다.
(16) 박창규(朴昌珪) 낙화산수 8곡병풍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 씨 소장. ▷ 구조 8폭 병풍으로 각 장의 그림 크기는 70.0cm×37.4cm이다
사진 4-43 박창규 낙화산수 8곡병풍. 부곡동 유문형 씨의 소장품으로, 조선 중기의 산수 경향을 잘 나타내었다
▷ 역사 및 유래 장지를 인두로 지져 산수를 그렸는데 그림은 박창규(1783~?)가 그리고 화제는 어시자(於是子)와 기제(杞薺)라는 사람이 붙였다. 각 장의 내용은 오른편부터 산수-누각산수-한가산수-우중조어-누각산수-누각산수-도선도-기로노인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풍은 조선 중기의 산수 경향을 그대로 나타낸 것으로, 지극히 정교하고 붓으로 그린 것보다도 더 생동감이 넘친다. 각 장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적은 글들이 낙서로 남아 있다. 박창규는 정조 7년(1783년)에 태어났으나 죽은 해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함양인으로 자는 성민(聖玟), 호는 수산(遂山), 그리고 화화도인(火畵道人)이라고 하였으며 낙화로 당시의 제일이라 하였다.9)
(17) 사군자 8곡병풍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 씨 소장.
사진 4-44 사군자 8곡병풍. 유문형 씨의 소장품으로 매화ㆍ난초ㆍ국화ㆍ소나무가 수묵으로 그려져 있다.
▷ 구조 각 장의 길이 53.5cm, 폭 32.8cm이며 견본에 수묵으로 그린 8곡병풍이다.
▷ 역사 및 유래 병풍에는 표암 강세황의 작품으로 되어 있지만 화풍이 표암의 것과는 거리가 있고 그 시대가 더 오래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작품이다. 병풍의 표암 운운 제목은 소장해 온 유씨 집안에서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매화 1폭, 난초 2폭, 국화 2폭, 소나무 1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원래 병풍이 아니라 낱장으로 전해 오던 것을 근래에 표구하였다 하므로 원래 10곡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암벽의 처리나 냇물을 그리는 기법에서 조선 중기 이전의 화풍이 남아있는 작품들로서 한 사람의 솜씨로 여겨진다.
(18) 개천군 전도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 씨 소장. ▷ 구조 길이 114.5cm, 각 장의 폭 35.7cm로서 비단에 갈필 수묵이다.
사진 4-45 개천군 전도 병풍. 유문형씨의 소장품으로, 모산 유원상이 개천군수로 있을 때 제작한 것이다.
▷ 역사 및 유래 모산 유원성이 개천군수로 있을 때 제작토록 한 지도로 청해후인(淸海後人) 이재하(李在夏)가 그렸다. 첫 번째 폭에는 ‘조양군지지주록’이라는 제하에 이 지도를 그린 연유를 적었고, 나머지 7폭에는 개천군의 전경을 연결하여 그렸다. 상부에 청천강을 배치하고 중앙에 개천군을 두었으며 중심에 개천군의 나루인 관진을, 그리고 개천군의 중심에 조양관을 두고 마을을 포진시켰다. 산이나 집은 간략히 세필로 표현하였지만 상대적인 위치는 정확히 표현하였고 길은 붉은 주선으로 표시하였다. 당시의 개천 지방을 살펴볼 수 있는 지도로서 매우 중요하며, 당시의 마을생활이나 개천의 교통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 민속자료라고 할 수 있다. 광무 11년(1906년) 작이다.
(19) 목판일괄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 씨 소장. ▷ 규격
죽매문 목판:14.1×5.4cm
매난국죽 백초향목판:18.7×7.4cm
초문 목판:23.3×7.7cm
파초문목판:25.5×12.6cm. 사변에 초문으로 테를 둘렀다.
죽문:23.5×13.3cm. 여친구우 문한제(如親舊雨 文漢薺)명. 세로줄 속에 3가지의 대나무를 각하였다.
부적판:39.3×20.3cm
괘지목판:36.8×20.3cm
책보목판:23.5×13.3cm. 뇌문이 주위에 있고 중심은 사선문을 교대로 배열하였다.
능화문책보판
(20) 소나무궤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 씨 소장. ▷ 구조 소나무 판목 궤짝으로 크기가 작아 돈궤 혹은 잡동사니 궤로 추측된다. 위로 열리는 뚜껑은 상면의 절반을 덮게 되는데 꽃 모양으로 오린 무쇠 장식이 붙어 있다. 폭이 46.8cm, 너비 29.0cm, 높이 31.2cm이다.
(21) 연상(硯床)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 씨 소장. ▷ 규격 돌배나무로 만든 것으로 폭 41.0cm, 너비 23.8cm, 높이 31cm이다. ▷ 유래 모산 유원성 이전부터 사용하던 것이라고 전하므로 족히 1백 년 이상은 된 것으로 추측된다. 다리는 개다리를 뒤집은 방향으로 만들었고 상면은 연상, 그리고 그 아래에는 작은 서랍이 붙어 있는데 반달 모양의 백동 손잡이를 만들어 붙였다.
(22) 부계서화첩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 씨 소장. ▷ 규격 전책이 30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크기는 22.5cm×15.5cm이다. 화문전지를 사용하였다. ▷ 역사 및 유래 모산공 유원성이 서문과 그림을 넣고 그림에 대한 제(題)는 조카인 유혁수가 붙였다. 모산공이 자신이 살고 있던 지역의 8명승을 담채로 그렸으며 말미에는 부계도를 시점을 달리하여 그렸다. 이 그림은 유씨 일가가 안산에 자리잡게 된 가장 먼 조상의 묘가 있는 시랑동의 그림 등 유씨 집안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지점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서화첩 말미에는 허헌의 글이 붙어 있다.
8편의 그림에는 화제가 붙어 있지는 않지만 첫 번째 그림은 화모봉(華帽峰)인데 자신의 호가 이 산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두 번째는 진천(眞川)·지로평(芝老坪)·만수동(萬樹洞)·망해암(望海岩)·부계일산정(釜溪一傘亭)·병암일휴정(屛岩一休亭)·응암(鷹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의 그림이 단아하고 섬세하며 각 풍경의 특성을 문기 있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중요한 여러 지명을 기입해 넣었다.
(23) 경성당 ‘선대교승서간첩’ 간찰첩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 씨 소장. ▷ 규격 책자의 크기는 길이 41.8cm, 폭이 28.5cm이다. ▷ 유래 진주 유씨 문중에서 누대에 걸쳐 교류하였던 간찰 모음 책자로 총 20매가 들어 있다. 이 중에는 안정복·강세황·이후원·구운·정유악·강세구·권유·이서우·오시복·심완·이담명·이태화·홍중정·홍수보·박도상·강인·김상정·홍준·홍의호·강노 등의 간찰이 포함되어 있다.
(24) 모산공 교승서간첩 ▷ 소장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유문형 씨 소장. ▷ 규격 책자의 길이 40.0cm, 폭은 31.9cm이다 ▷ 역사 및 유래 모산공 유원성이 받았던 간찰을 모은 것으로 이 속에는 김사준·박기양·주석면·김가진·이하영·성기운·이경하·이기동·강경희·정문섭·민영선·함태영·조종필·이수면·정현석·박제순·박의양 등 여러 인사의 간찰이 총 23매 포함되어 있다.
(25) 쌍계사(雙溪寺) 현왕탱화(現王幀畵) 1803년에 제작된 탱화로 대부동의 쌍계사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 도성암(道成庵) 노전(爐殿)에서 조성된 불화이나 언제 어떠한 연유로 이곳 쌍계사에 모셔졌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람은 죽어 목숨이 끊어지면 몸 속의 영혼은 중천을 떠돌다가 삼일째 되는 날에 현왕여래(現王如來)가 주재하는 심판에 따라 영원히 거처할 곳을 결정받게 된다. 즉 죽은 자의 영혼은 저승사자의 안내로 현왕여래 앞에 이르러 살아 생전에 쌓은 업보(業報)에 따라 극락으로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고 한다. 현왕여래(現王如來)란 명계(冥界)의 염라대왕과 같은 성격의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현왕탱화이다.
병풍을 둘러친 도상의 중앙에 홀(笏)을 들고 붉은 도포를 입은 현왕여래가 호피를 깔아 놓은 의자에 경책을 이용한 관을 쓰고 정좌해 있는데, 그 형상이 괴이하고 위엄 서린 얼굴의 긴 수염이 위협적이다.
현왕 좌우 상단에는 파초선과 일산을 든 동자가, 아래쪽 좌우 보처에는 대륜성왕(大輪聖王)과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묘사되어 있으며, 맨 왼쪽에는 판관(判官)과 녹사(錄事)가 죄의 기록이 담긴 두루마리와 장책을 들고 있다. 그리고 나뭇결이 아름다운 책상 위에는 문방사우를 비롯해 결재에 쓰이는 어피 인궤함이 놓여 있다. 혼령을 심판하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이 탱화는 안정된 구도에 채색이나 필선이 매우 세련된 불화이다.
조선 후기에 성행하였던 현왕탱화로서 현존하는 것 중에서는 경북 수다사(水多寺;1782년)의 현왕탱화가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 상주 남장사(1788년), 금릉 금용사(1803년), 서울 봉은사(1844년), 양주 불암사(1846년) 등의 현왕탱화가 유명하다.대부동 쌍계사의 현왕탱화는 경기도 지역에서는 시대가 가장 올라가는 불화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이 탱화의 하단에는 다음의 명문이 담겨 있다.
(26) 쌍계사 신중탱화(神衆幀畵) 1803년에 제작된 것으로 크기는 세로 136cm, 가로 104cm이다. 신중탱화는 불교의 호법신(護法神)으로 사찰 도량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선신으로 법당의 좌우벽이나 요사채의 신중단에 모셔지는 불화의 일종이다. 신중탱화에 등장되는 호법신들은 중국이나 우리 나라의 재래의 토속신들이 많이 등장되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재래 토속신앙이 불교의 전래 과정에서 불교에 습합되어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중탱화는 그 어떠한 탱화보다도 고유의 특성을 지닌 민족의 여러 신앙 형태를 포용하고 있다.
화엄신중신앙을 근간으로 형성된 신중탱화는 가경(嘉慶) 8년(1803년)에 도성암(道成庵) 노전(爐殿)에서 조성되었는데 이 그림은 금어(金魚) 유선(宥善) 스님에 의해 그려졌다. 불화를 그리는 스님을 금어(金魚) 또는 화사(畵師)·화원(畵員)·양공(良工) 등으로 부른다.
사진 4-46 쌍계사 신중탱화. 불교의 호법신으로 법당의 좌 우벽이나 요사채의 신중단에 모셔진다.
사진 4-47 대부동 쌍계사.
도성암에 봉안되어 있던 불화가 언제 어떤 연유에서 이곳에 옮겨 모셔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작 장소·시기·크기, 사찰의 여건 등에 따라 명문과 관계없이 이동·봉안되는 경우가 많다. 원래 신중탱화에 등장하는 신(神)들은 39위(位)였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불교가 차츰 민간신앙과 강하게 결합되면서 104위까지 늘어나는 경향이 나타났다.
단순하게 상·하 2단구도로 구성되어 있는 쌍계사 신중탱화는 위쪽 머리에 화관을 쓴 제석천왕(帝釋天王)·대범천왕(大梵天王)과 의관 위에 경책이 있는 일궁천자(日宮天子)·월궁천자(月宮天子)가 있으며, 또한 아래쪽 투구에 무장을 하고 두 손을 합장한 동진보살(童眞菩薩)·용신(龍神)·호계대신(護戒大神)·산신(山神) 등이 버티고 서 있다. 상단과 하단 중간은 구름으로 분리하였고, 천동(天童)·천녀(天女) 두 쌍이 좌우에서 유자·석류 등의 과일 그릇을 받쳐들고 공양을 올리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일반적인 신중탱화에 비하여 핵심적이며 대표적인 신상만을 나열한 아주 간략한 내용의 신상도이나 신중단으로서의 역할이나 그림의 짜임새·채색·필선 등이 완벽한 수준급의 고급 탱화이다. 머리 부분의 녹색 두광이 있는 동진보살과 제석·법천·일월궁천자는 천상세계의 명계중(冥界衆)을 나타내고, 용신·산신·호법신은 지상의 사바세계를 담당하는 신중들이다.
얼굴에 용의 수염이 있고 머리에는 여의주, 손에는 용의 뿔을 쥐고 있는 의인화된 용신과 백발의 긴 수염에 투명한 두건을 쓰고 용의 형상인 긴 지팡이를 짚은 산신은 어깨 부분과 허리 부분에 나뭇잎을 장식하였다. 특히 산신은 단군의 초상화나 산신탱화에서 흔히 보이는 위엄이 서려 있고, 점잖은 얼굴로 신단수 잎을 몸에 두르고 있어 신령스러움과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장군 복장에 키보다 더 큰 칼을 들고 검은 얼굴을 한 호법신장과 관복 차림에 홀을 들고 머리에 경책관을 쓴 천자 등은 민간신앙 계통의 신상들이다. 한편 신선의 선계에서나 있을 법한 천진무구한 동자들의 영특하고 귀여운 얼굴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평화롭고 불심 충만하게 한다. 특히 두 동자의 얼굴을 겹쳐 그린 다정한 모습은 이 불화를 그린 스님의 심성이 동심에 깃들어 있어 조화롭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된 느낌이다.
(27) 쌍계사 아미타후불탱화(阿彌陀後佛幀畵) 제작 연대는 미상이지만 쌍계사에서는 약 2백여 년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불화는 용주사 주지로 있었던 어느 스님이 화성의 어떤 절에서 이곳으로 가져 온 것이라고 한다.
아미타 신앙은 아미타불을 지극정성으로 염불 독송하면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우리 나라 정토신앙의 근본 경전을 주제로 한 불교의 주된 한 신앙이다. 아미타불과 극락정토의 장엄을 설하는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는 ① 극락세계의 아름다운 모습과 삼악도(三惡道)가 없음을 설하고, ② 부처님의 광명과 수명의 무량함과 그곳에 있는 사람은 죽음이 없으며, ③ 만약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듣고 1~7일 동안 일심으로 염불하면 임종할 때에 아미타불의 영접을 받아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음을 설하고 있다.
이미 신라 시대에 활발했던 아미타 신앙은 고려 시대에도 크게 성행하였고, 조선 시대 후기 새로운 불교 중흥기를 맞아 사원의 중심 신앙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하여 사찰의 무량수전(無量壽殿)·미타전(彌陀殿)·극락본전(極樂本殿) 등의 주존불은 반드시 아미타불을 모시는 도량이었다. 쌍계사의 주법당인 극락보전에도 목조아미타불상이 모셔져 있고 불상의 뒤편에는 아미타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는데, 근간에 중건한 협소해진 현재의 법당에 비하여 아미타후불탱화가 크고 여러 차례 중창 불사를 거치는 동안 약간의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다행히 현재는 새로 온 주지스님에 의하여 더는 파손될 염려가 없을 만큼 깨끗하게 표구가 되어 요사채 큰 방의 안전한 곳에 모셔져 있다. 대형 탱화를 무리하게 적은 법당에 모심으로써 불화의 하단부가 파손되어 명문이 완전 손실되어 아쉬운 점이 있지만 조선 시대 후불탱화 중 뛰어난 작품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아미타후불탱화는 아미타여래가 서방정토에서 무량한 설법을 하고 있는 광경을 도설화한 아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를 말한다. 아미타극락회상도는 그림 중앙의 연화대좌 위에 가부좌한 좌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사천왕, 4보살, 십대제자와 성문중들이 엄격한 좌우 대칭 구도로 도설되어 있는데, 큼직한 키의 신광과 두광을 갖춘 아미타불의 우측에 관세음보살·문수보살·금강장보살·미륵보살·가섭존자를 포함한 5대제자, 북방천왕·도장애보살·지장보살·아난존자를 포함한 5대 제자, 서방천왕·남방천왕 등이 아미타불을 원형으로 둘러서 있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두광이 표현된 8대보살을 포함한 아미타 9존도 이러한 형식에 속하는 그림이다. 법문을 경청하는 자세로 중앙의 아미타불을 향하여 반쯤 몸을 돌려서 모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있다. 머리에 화불이 새겨진 백의관음보살과 연꽃을 받쳐든 대세지보살 사이에는 대체로 법을 청하는 청법 자세의 사리불존자가 있었으리라 생각되지만 결손된 부분의 내용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유난히 크게 그려진 주존불은 역삼각형의 광배, 정면을 향한 다부진 얼굴, 파도 문양처럼 보이는 검은 두발, 높은 육계에서 좌우로 흐르는 듯 피어오른 서기(瑞氣), 상단 중앙의 반쯤 보이는 연화문 등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 시대 후불탱화 중 시대적으로 앞선 전형적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화면 상단 공간에 늘어진 비단의 치장과 적색·녹색·군청색의 주조색 바탕에 화사하면서도 차분한 색채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특히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세필의 인물 묘사와 안정된 화면은 매우 뛰어난 수작의 불화임을 말해 준다.
이러한 유형의 탱화는 청주 보살사 영산회상탱화(1649년), 구례 화엄사 영산회상괘불도(1653년), 하동 쌍계사의 아미타극락회상도(1687년),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장곡사 아미타극락회상도(1708년), 통도사 극락전 아미타후불탱화(1740년) 등에서 나타나는 17세기 말이나 18세기 초에 유행하던 조선 후기 불화의 성숙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쌍계사의 아미타후불탱화는 특히 충청 이북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뛰어난 문화재급 유물로서 마땅히 수정·보안 처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28) 쌍계사 지장탱화(地藏幀畵) 이 지장탱화의 제작 연대는 1919년이고 크기는 세로 142.5cm, 가로 196.5cm인데, 현왕탱화(現王幀畵)와 더불어 원래는 명부전에 봉안되지만 소규모의 사찰에서는 큰 법당의 좌우측에 함께 모셔진다. 지장보살은 4세기경부터 인도에서 처음 숭배되기 시작했으며, 중국·한국·일본 등지에서는 인간의 사후세계를 담당하는 명부신앙의 대상으로 널리 숭배되어 왔다. 지장보살은 억압받는 자, 죽어가는 자, 나뿐 꿈에 시달리는 자 등을 구원하는 보살로서, 지옥으로 떨어져 무서운 벌을 받게 되는 모든 사자의 영혼을 다 구제할 때까지 자신의 임무를 쉬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구제만을 담당하는 보살이다.
사진 4-48 쌍계사 지장탱화. 지장보살은 인간의 사후세계를 담당 하는 명부신앙의 대상이다.
쌍계사의 지장탱화는 지장보살을 가장 가운데 두고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그렸고, 염라대왕을 포함한 10대왕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녹사·판관·동자 등이 표현되어 있다. 즉 시왕과 판관·사자·현왕 등 명부계의 모든 탱화 내용을 한자리에 함축시킨 탱화로 볼 수 있다. 이 지장탱화의 명문에는 이추담 스님의 시주로 아미타불 1위, 관세음보살 1위, 중단탱화 1축을 그렸다고 되어 있는데, 이 시기에 큰 불사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大正 七年(1919년) 戊午 陰 四月 十四日 神供 五月 ○ 日點眼奉安于大金山雙溪寺 蓮花所秩 證明比丘 田兩運 持殿比丘 李○○ 誦呪比丘 曺月峰 供司信女 李廣川 主持兼化主比丘 李秋潭 阿彌陀佛 一位 觀世音菩薩 一位 中壇幀畵 一軸 大施主秩 京畿道 富川郡 大阜面堂前洞 居住 乾命庚申生 鉉源 坤命丙申年 李氏 坤命丙戌年 崔氏 女息壬子生 阿只 次女乙卯生 阿只 三女乙卯生 阿只
(29) 쌍계사 독성탱화(獨聖幀畵) 제작 연대는 19세기로 알려져 있고 크기는 세로 99cm, 가로 53.5cm이다. 독성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고 석가모니불의 수기를 받아 남인도의 천태산(天台山)에 머무르다 말세 중생의 복덕을 위하여 출현하였다고 한다. 깊은 산속 계곡 속에 홀로 앉아 있는 괴팍스럽고 고집스런 얼굴로 표현되었지만 중생들의 간절한 기도를 잘 받아 주며, 특별히 복을 희구하는 신도들의 경배 대상이다. 춤추는 듯 서 있는 소나무 아래 보름달처럼 둥근 후광이 있고, 한 손에는 염주를 들고 한 손으로는 긴 눈썹을 추스리고 있다. 독성탱화는 수독성탱(修獨聖幀)·나반존자(那畔尊者)라고도 부르는데 16나한과 같은 구도법이다. 쌍계사 극락보전에 모셔진 독성탱화는 명문이 없지만 1945년 해방 전후 시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약간은 탁한 채색이며 무거운 필선으로 표현되었다.
(30) 쌍계사 산신탱화(山神幀畵) 제작 연대는 19세기로 추정되며 크기는 세로 99cm, 가로 53.5cm이다. 오래 전부터 전해 오던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신앙 가운데 하나인 산신신앙은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불교에 습합되어 호법신으로 포용되었다. 특히 조선 시대에 성행하였던 불가의 도량 수호신을 담당하는 신중탱화(神衆幀畵)의 하단에 등장하는 만덕고승성개한적주산신(萬德高勝性皆閑寂主山神)으로 자리를 잡았다. 신중탱화 속의 산신은 17~18세기 불교가 대중화되는 새로운 혁신 과정에서 한 단계 성장하여 독립된 신앙 체계를 갖추게 되자 사찰 안에 따로 산신각을 짓고 산신탱화나 산신상을 봉안하게 되었다. 근래 전국의 사찰 내에는 산신을 모시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은 민간신앙이다.
산신령의 역할은 가람의 수호는 물론 중생들의 길흉화복·수명장수·재복·자식점지 등의 소원을 잘 들어 주는 기복신앙의 표상물이다. 사찰의 산신각·칠성각·독성각 등에 산신·독성·칠성이 한 장소에 함께 모셔지는데, 모두 종래의 불교 속에 등장하는 예배의 대상과는 달라 건물명에 전(殿)을 사용하지 않고 각(閣)을 사용한다. 두루마리 형태인 종이 바탕에 채색으로 그려진 쌍계사의 산신탱화는 명문이 없어 제작 시기나 작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산신은 근엄하고 인자한 얼굴에 눈썹까지 흰 수염이 난 백발노인으로, 머리에는 청색 두건이 돌려 있고 적색 도포를 입은 채 청태 낀 괴석 위에 정좌해 있는데, 한 손에는 부채를 든 자세로 불로초를 들고 있고 또 한 손으로는 호랑이의 머리를 정답게 쓰다듬고 있다. 잘 길들여진 귀여운 고양이처럼 산신 곁에 웅크리고 앉은 줄무늬의 참호랑이는 유난히 큰 꼬리를 멋들어지게 휘감고 있다. 오색 구름 사이로 휘늘어진 소나무 가지들이 더불어 있어 깊은 산속의 신령스런 신선을 연상케 한다. 산신의 형태는 선비형·도사형·무관형·불상형 등으로 구분되는데, 쌍계사의 산신도는 도사형으로 경기도 일원에서 많이 보이는 유형이다.
사진 4-49 쌍계사 산신탱화. 원래는 민속신앙이지만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산신각을 짓고 봉안하게 되었다.
(31) 고잔동(古棧洞) 태봉(胎封)
▷ 위치 안산시 고잔동 산 18번지.
▷ 구조 태함(胎函)은 도굴된 상태이고 일부는 매몰되어 있는데 약 1.32×0.6m 정도 겉으로 드러나 있다. 비좌(碑座)는 93×57×50cm이다.
▷ 역사 및 유래 태실(胎室)은 일반적으로 태봉(胎封)·태봉(胎峯)·태묘(胎墓) 등으로 불리는데 산모가 태아를 출산하고 난 후에 나오는 태반을 묻는 장소를 말한다. 옛날사람들은 태의 처리가 다음 아이의 출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부정을 타는 것을 꺼려하여 액(厄)이 없는 방향에서 태우거나 매장하였다. 태실은 대개 산이나 구릉상의 가장 높은 지점에 토광을 파고 석함을 넣은 뒤 그 안에 태를 넣은 태항아리를 천으로 싸서 석함 속에 넣고 둥근 돌뚜껑을 덮어 묻은 후 그 옆에 태지석비를 세웠다.
태실을 만드는 것은 대개 왕실의 왕자나 공주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사대부가에서도 태실을 만들기도 하나 대부분의 경우는 태를 태우거나 물에 띄우거나 혹은 땅속에 그냥 묻어 버렸다. 고려 시대 왕자의 태를 묻은 곳이라 하여 태봉이라 전해 오는 곳으로 현재 태를 묻었던 흔적과 비를 세웠던 밑부분만 남아 있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산봉에 태를 담아 매장하였던 솥과 같이 생긴 석조물이 있었는데 이 비가 세워지면서부터 이곳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월피동 부녀자들이 바람이 나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어, 1940년경 이곳 주민들이 비의 윗부분을 산 아래로 굴려 버려 논바닥에 묻혀 있게 되었다고 한다.
사진 4-50 태봉(태실). 고자동 산 18번지에 있으며, 태아를 출산한후에 태반을 묻는 곳을 말한다. ▷ 특기 사항 태봉에서 나온 석함은 현재 안산시 청소년복지회관 뒤뜰에 보관되어 있다.
(32) 진주 유씨 종가:청문당(淸聞堂) 안산에서 가장 오래 된 전통가옥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진주 유씨 16세손인 유시회(柳時會;1562~1635년)가 지었다고 하는데, 유시회는 선조의 부마가 된 어린 조카 적(Z)과 함께 선조가 내린 사패지인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 집은 ㄱ자의 안채와 ㄱ자의 행랑채가 마주 보고 있으며, 현재는 후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일자형의 바깥채가 중앙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10)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이 집 뒤편에 유씨의 사당이 남아 있고 그 옆에 안산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큰 모과나무가 서 있는데 이 모과나무는 이 집이 오래 된 집임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집의 내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이 집 남서편으로 약 30m 떨어진 지점에 있는 네모진 연못이다. 이 연못은 석축을 쌓아 만들었는데 사방이 각각 14~15m 정도 되며 입수구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으나 출수구는 서남쪽 모서리에 있다. 이 연못은 유씨 집안에 전해 오는 화첩에도 보이는 것으로서 당시의 양반사회의 주거문화와 정원문화를 보여 주는 대단히 중요한 문화재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북 모서리에 서 있는 은행나무 또한 안산시 보호수이며 주위로 향나무들이 둘러서 있다.
(33) 경성당(竟成堂) 경성당 당호는 당초 진주 유씨 18세손 유명천(柳命天)·유명현(柳命賢) 형제가 공부하던 서실로 정재골에 있었으나 그후 유원성(柳遠聲)이 차명한 당호로서, 진주 유씨 21세손인 유신(1748~90년)의 아들인 중서(重序;1779~1846년)가 둘째아들인 방(1823~87년)이 살림을 날 때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현재 안채와 누마루가 있는 사랑채로 되어 있다.11) 현재의 안채는 13년 전에 서울의 한옥을 이건한 것이지만 사랑채는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경성당은 청문당만큼 오래 된 한옥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 또한 18~19세기의 안산 지역 양반사회의 주거 양식을 보여 주는 문화재 자료로서 청문당과 함께 중요한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2. 능묘(陵墓)
(1) 정시윤(丁時潤) 묘 ▷ 위치 안산시 양상동. ▷ 구조 묘역의 규모는 140평 정도이며 봉분은 560×150cm이다. 석물은 묘비와 상석·향로석·망주석 등이 있는데 묘비는 옥개석 108×76×47cm, 비신 173×64×26cm, 기대석 105×75×51cm의 규모이며 풍화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상석은 140×83×37cm, 향로석은 33×23×38cm이고 무덤 좌우에 서 있는 망주석은 165cm이다. ▷ 역사 및 유래 묘비는 정조 16년(1792) 9월에 건립했다. 정시윤의 자는 자우(子雨) 호는 두호(斗湖)이며 교리 정언벽의 아들이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5대조부이다. 묘소 옆에 조부 호선(好善)의 재취부인인 정경부인 여산 송씨 묘소가 있다.
(2) 유영(柳穎) 묘 ▷ 위치 안산시 부곡동. ▷ 구조 묘소의 석물로는 묘갈과 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문인석(文人石) 등이 있는데 묘갈의 규모는 147×64×21cm이고 상석은 146×88×58cm이며 문인석의 높이는 100cm이다. ▷ 역사 및 유래 묘갈의 전면에는 “贈嘉善大夫吏曹參判行通訓大夫弘文館應敎柳公諱穎之墓 贈貞夫人全義李氏깹굡 쓰여 있어 이 묘소는 유영과 그의 부인 전의(全義) 이씨(李氏)의 합장 무덤임을 알 수 있다.
(3) 유적(柳Z) 묘 ▷ 위치 안산시 부곡동. ▷ 구조 이 묘역에는 유시행(柳時行) 유영(柳潁) 등의 묘도 함께 있는데 유적의 묘가 가장 상좌에 있다. 석물로는 묘갈과 상석·향로석·망주석·동자석·문인석 등이 있는데 그 규모는 비신이 124×60×19cm, 기대석이 98×61×30cm, 상석이 157×95×64cm이고 동자석·문인석의 높이는 각각 84cm, 172cm이다. ▷ 역사 및 유래 묘갈은 풍화가 심해 비문을 판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묘갈의 전면에는 “贈通憲大夫晉安尉行順義大夫晉安尉柳Z之墓貞正翁主깹굡 쓰여 있어 부인인 정정옹주와 합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유시행(柳時行) 묘 ▷ 위치 안산시 부곡동. ▷ 구조 이 묘역에는 유시행의 묘를 비롯하여 유영·정정옹주의 묘소 등 모두 4기의 봉분이 있는데 그 중 유시행의 묘소는 남서쪽 가장 낮은 곳에 있다. 묘는 쌍분이며 석물로는 묘갈과 상석·향로석이 가운데 있고 상석 좌우에 동자석이 있으며 그 뒤쪽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있다. 묘역 방위는 동남동-서북서향이다. 묘갈은 대리석으로 비신의 풍화가 심한데 묘갈의 규모는 비신이 141×65×16cm, 기대석이 98×60×20cm이다. 상석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그 규모가 160×95×57cm이고 동자석의 높이는 100cm이며, 망주석과 문인석의 높이는 각각 220cm, 280cm이다. ▷ 역사 및 유래 비신의 전면에는 “贈嘉善大夫吏曹參判行通訓大夫弘文館校理柳時行之墓貞夫人李氏깹굡箚 새겨져 있다. 현재 안산에 세거하는 진주 유씨는 당초 충북 괴산 선영하에서 세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1606년 유시행이 죽자 선조는 부마 유적(柳Z)이 한성에서 괴산까지 시묘 다니는 것이 어렵다 하여 한양 근교인 안산에 묘를 조성하고 부곡동 일대를 사폐지로 하사, 유시행의 형인 유시회(柳時會)를 비롯하여 그 일가를 안산으로 이주케 하였다.
(5) 이상신(李尙信) 묘 ▷ 위치 안산시 성포동 점섬. ▷ 구조 묘역은 65평 정도이며 석물로는 묘표석 1기, 상석 1기, 망주석 2기, 문인석 2기 등이 있다. 봉분의 규모는 560×520cm이며, 묘표석은 종형으로 재질은 화강암이다. 규모는 비개·비신·기대석이 각각 73×27×54cm, 106×58×16cm, 110×60×28cm이다. 상석은 화강암으로 규모가 160×101×26cm이고, 문인석의 높이는 183cm, 망주석의 높이는 196cm이다. ▷ 역사 및 유래 묘비의 전면에 “禮曹參判贈吏曺判書李尙信墓貞夫人杞溪兪氏깹굡箚 쓰여 있어 부인 기계 유씨와의 합장묘임을 알 수 있다.
(6) 이우량(李友諒) 묘 ▷ 위치 안산시 성포동 점섬. ▷ 구조 묘역은 약 70평 정도이며 석물로는 묘갈 1기, 상석 1기, 문인석 2기가 있다. 봉분은 460×410cm이며 상석은 134×73×17cm이다. 묘갈은 옥개석 대신에 이수를 얹어 놓은 양식인데 규모는 이수가 72×27×48cm, 비신이 108×60×17cm, 기대석이 97×62×34cm이다. ▷ 역사 및 유래 비신의 전면에는 “敦寧校尉李公友諒之墓宣人德水李氏깹굡箚 새겨져 있어 부인과의 합장묘임을 알 수 있다. 이 묘비는 숙종 42년(1716년)에 세운 것으로 후손인 이국휴(李國休)가 찬하였다.
(7) 이충가(李忠可) 묘 ▷ 위치 안산시 신길동 뱅골마을. ▷ 구조 이 묘역에는 3기의 전의(全義) 이씨(李氏) 무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충가의 묘소는 가장 동쪽에 있다. 묘소의 석물로는 묘갈·상석·향로석·망주석 등이 있다. 봉분의 크기는 직경 4m, 높이 1m 정도이며 비신은 100×47×16cm, 기대석은 70×46×15cm이다. 상석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그 규모는 125×80×33cm이며, 향로석은 24×22×22cm이다. 상석 좌우에 망주석이 있는데 높이는 135cm이다. 전체적인 무덤의 방향은 북동`-남서향이다. ▷ 역사 및 유래 묘갈은 현종 10년(1669년)에 건립되었으며 전면에는 “通訓大夫行軍資監副正李公之墓淑人完山崔氏之墓”라는 기록이 있어 이충가와 부인 완산 최씨의 합장묘임을 알 수 있다.
(8) 이언항(李言恒) 묘 ▷ 위치 안산시 신길동 뱅골마을의 이충가 묘소의 좌측. ▷ 구조 이 묘소에는 묘갈·상석·향로석·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묘갈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건립 연대는 현종 11년(1670년)이다. 상석의 규모는 135×87×27cm, 향로석은 28×24×12cm이다. 또한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높이는 130cm이다. ▷ 역사 및 유래 전면에는 “折衝將軍行龍A衛副司果李公之墓淑夫人全州李氏之墓”라고 씌어 있다.
(9) 이경희(李慶禧) 묘 ▷ 위치 안산시 신길동 뱅골마을. ▷ 구조 묘역에는 묘갈·상석·향로석·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상석의 규모는 127×75×20cm, 향로석은 20×18×10cm이다. 상석 좌우에 있는 망주석의 높이는 146cm이다. ▷ 역사 및 유래 이경희의 자는 중응(仲應)이다. 묘갈은 화강암으로 현종 10년(1699년)에 건립되었는데 전면에는 “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行通訓大夫尙瑞院正李公之墓贈淑夫人文化柳氏之墓”라고 씌어 있다. 비문은 이경희의 5대손인 지유(志儒)가 썼다.
(10) 이정제(李廷濟) 묘 ▷ 위치 안산시 신길동 뱅골마을 뒤편. ▷ 구조 이 묘역은 전의(全義) 이씨(李氏) 무덤군에서 북쪽으로 약 70m 지점에 있다. 묘소에는 묘갈·상석·향로석·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의 크기는 400×450×130cm이고 상석은 140×90×53cm, 향로석은 27×22×43cm이다. 상석 좌우에 있는 망주석의 높이는 149cm이다. 묘갈은 화강암으로 숙종 17년(1691년)에 건립되었는데 전면에는 “敦校尉全義李公廷濟之墓恭人驪興李氏뀜㎕굡箚 씌어 있다. 비문은 이정제의 현손(玄孫) 경덕(敬德)이 썼다.
(11) 안동 김씨 분묘(墳墓)와 묘지(墓誌) ▷ 위치 안산시 일동 산 24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었으나 1979년 안산시 도시계획구역 내에 포함되어 온양민속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하여 묘역 일부와 신도비각을 박물관 경내에 복원하였다. ▷ 구조 이곳에는 조선 후기에 세도정치로 유명했던 안동 김씨 가문의 김수근(金洙根)·김병학(金炳學)·김병국(金炳國) 등 모두 8기의 분묘와 재실이 있었다. ▷ 역사 및 유래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곳에 있었던 묘소들은 온양민속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후에 출토된 유물 및 석물들을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발굴·조사 내용은 1989년에 간행된 「안동김씨분묘발굴조사보고서」에 상술되어 있다.
1) 김수근(金洙根)과 부인의 합장묘 김수근과 그의 두 부인(楊州 趙氏, 全州 柳氏)이 합장된 묘이다. 이 묘소는 원래 광주군(廣州郡) 포우리(浦隅理)에 있었으나 1861년 2월에 반월로 이장되었다. 이 묘소는 묘역의 가장 높은 위치에 진좌곤향(辰坐坤向)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묘역도 가장 넓고 봉분(封墳)도 어느 것보다 크다. 계체석도 여기에 맞추어 상석 좌우로 6개씩 배열되어 있다. 봉분 앞 양쪽에 망주석 2개, 양석 2개가 있고 망주석 뒤로 차일석이 놓여있으며, 나머지 2개의 차일석은 봉분 양옆에 놓여 있다. 그리고 12개 계체석의 중간 지점 봉분 앞에 혼유석·상석·향로석이 놓여 있고 상석은 앞에는 2개의 북돌로, 뒤에는 받침돌로 괴어 있다.
비석은 묘 앞에 세우지 않고 일리에서 안골로 향해 나 있는 길 옆에 남향으로 세운 비각 안에 보관되어 있는데, 비각은 화광석으로 된 4개의 주춧돌 위에 4각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을 한 주심포계(柱心包系)의 익공식(翼工式) 건물이다. 비각 전면은 1쌍의 여닫이문을 달았고, 전후좌우 벽면에는 모두 가는 창살을 세로로 박아 처리하였으며, 천장은 우물반자인데 그 중앙으로는 대들보가 전후면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비각 안에는 2개의 비석이 좌우로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오른쪽의 비석은 비신의 전후좌우 4면에 모두 비문이 있다. 전면에는 가첨석 바로 아래 당저어필(곧 철종어필<哲宗御筆>이란 뜻)이라 쓴 두전이 있고, 그 아래에 세로로 5행에 걸쳐 “輔國崇祿大夫兼吏曹判書 奎章閣提學經筵日講官 正文公安東金洙根之墓 贈貞敬夫人楊洲趙氏뀜 贈貞敬夫人全州柳氏뀜㎕굡 새겨 놓았다. 왼쪽의 비석은 전후우측 3면에 비문이 있는데 전면에는 가첨석 바로 아래 오른쪽에서 세로로 당저어필이라 적고 그 왼쪽 옆으로, 즉 비신의 전면 중앙에 세로로 “乙卯特贈領議政”이라 새겨 놓았다.
발굴 당시의 묘에는 양주 조씨를 중심으로 왼편에 전주 유씨가 부장되어 있었고 그 오른쪽으로 김수근이 합장되어 있었는데, 3위의 광중을 덮은 횡대의 크기가 각각 달랐다. 3개의 관 가운데 김수근·양주 조씨·전주 유씨의 순서로 관의 크기가 작았으며 횡대는 소나무로서 각 위 모두 5매씩이었다. 양주 조씨 관 위의 오른쪽 위와 아래에 동심결(同心結)을 맺은 현훈이 삭아 없어진 자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는데, 명정은 붉은 글씨였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김수근의 관상명정:兼吏曹判書 奎章閣提學贈領議謚正文安東金公之柩 양주 조씨의 관상명정:贈貞敬夫人楊洲趙氏之柩 전주 유씨의 관상명정:贈貞敬夫人全州柳氏之柩 김수근의 관 안에서는 옥관자 2개가 발견되었을 뿐 다른 것은 모두 삭아 아무것도 수거할 수 없었다. 그 옆의 두 관에서도 아무것도 수거하지 못하였다. 이 합장묘에서는 3편의 백자 지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이장하면서 만들어 놓은 것으로, 엄격히 말해서 천부지(遷뀝)라고 할 수 있다. 발견 위치는 모두 회곽 위였다.
2) 거창(居昌) 신씨(愼氏) 묘 묘에는 망주석과 양석이 각각 대칭으로 2개, 차일석이 4개, 상석·혼유석·향로석이 계체석과 함께 설치되어 있고 오른쪽으로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묘는 부군인 김수근 묘의 오른쪽 산등성이에 인좌신향(寅坐申向)으로 조성되어 있다. 김수근과 두 부인은 광주 의곡면 포우리에 합장되었다가 1861년 구룡동으로 이장되었으나, 1872년에 사망한 거창 신씨는 처음부터 구룡동에 단장으로 묻혔는데 장례를 치른 1년 뒤에 세운 비석의 전면에는 “兼吏曹判書贈議政府領議政謚正文安東金公洙根 配貞敬夫人居昌愼氏之墓”라고 3행으로 씌어 있다. 족손(族孫) 김세균(金世均)이 제술하고 후손이 보관해 오는 문헌인 「거창신씨묘지명(居昌愼氏墓誌銘)」에 의하면, 거창 신씨는 1799년 정월 20일에 태어나 20세 되던 1818년에 한 살 위인 김수근과 혼인하였는데 이때는 김수근의 제2처인 전주 유씨가 사망한 다음 해였다. 1850년에 김수근이 공조판서에 오름으로써 정경부인의 봉작을 받았는데, 1830년에 시어머니 신씨의 상을 당하였고 56세 되던 해에는 김수근을 잃었으며, 본인은 1872년 9월 29일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발굴시 지석이 회곽 위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지석은 문헌으로 전해 오는 「거창신씨묘지명」과는 그 내용이 다르다. 이 묘지명 첫 쪽에는 “九龍洞 寅坐 誌石 埋置于 墓左階?石下”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그 분량도 16쪽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며 제술 연도도 “崇禎紀元後五丙子孟春”으로 장례 치른 임신년과는 다르다. 묘에서 출토된 지석은 말각방형(抹角方形)의 백자판으로서 회회청의 붓글씨로 “貞夫人居昌愼氏之墓 壬申十一月初二日辰時葬于 廣州聲串面九龍洞寅坐之原”이라는 내용을 싣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원지(原誌)로서 장례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문헌으로 전해 오는 「거창신씨묘지명」은 속지(續誌)로서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속지의 내용을 적은 지석은 발견되지 않았다. 봉분을 파헤치고 5개의 횡대을 제거하자 관이 노출되었는데, 관 위에는 금니(金泥)로 “貞敬夫人居昌愼氏之柩”라는 관상 명정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관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3) 김병학(金炳學)과 부인의 합장묘 김병학과 3부인(1配 坡平尹氏, 2配 坡平尹氏, 3配 星州李氏)이 합장된 묘이다. 김병학은 김수근과 그의 3배인 거창 신씨와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그의 백부인 김준근(金浚根)에게 입양되었다. 그러나 사후에는 생부의 묘소가 있는 구룡동에 묻혔다. 이 묘에는 망주석과 양석이 각각 2개, 차일석이 4개 있고, 상석은 혼유석과 향로석 사이에 받침돌과 2개의 복돌 위에 얹혀져 있다. 또 상석 좌우에 6개씩의 계체석이 놓여 있으며 비석은 오른쪽에 서쪽을 향해 서 있다. 묘표석은 장례 1개월쯤 후에 세운 것인데 거기에는 “領議政贈謚文獻安東金公炳學之墓 贈貞敬夫人坡平尹氏之뀜 配贈貞敬夫人坡平尹氏뀜㎕굡箚 씌어 있으며 3면에 걸쳐 음기가 새겨져 있다. 또한 상석에는 “三配 貞敬夫人 李氏 籍星州 父敎尙 庚子四月十三日生 戊辰閏二月十四日卒越一旬行꾑?ポ斃앨掌?[16]搏잰崑? 不肖男昇圭泣血謹識”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계자 승규(昇圭)가 김병학의 3배인 성주 이씨를 이곳에 이장하면서 추기한다는 내용이다.
묘의 봉분을 파헤치니 4개의 회곽이 드러났는데, 맨 왼쪽에 있는 회곽은 지석 없이 중앙이 약간 볼록하고 네 귀를 낮추어 둥그스름하였고, 그 옆 회곽에는 김병학의 지석편이 편편한 회곽 위에 놓여 있었다. 이 지석편은 세로 3행에 15개씩 도합 45개였다. 김병학의 회곽 오른쪽에 있는 회곽(이 아래에 2개의 관이 묻혀 있음) 위에서도 각기 1개씩의 지석이 발견되었다. 이 2개의 지석은 모두 “贈貞敬夫人 坡平尹氏之墓”로 시작하여 대부분의 내용이 같았다. 다만 김병학의 회곽 바로 옆에 있는 지석 끝에는 “自德莊洞移緬”으로, 그 옆의 것에는 “自任里移緬”으로 되어 있어 원 장지만 차이가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공통 부분의 내용은 “壬申十二月 初八日 辰時葬于廣州 聲串面 九龍洞 寅坐申向之原”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지석은 천부지라고 할 수 있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誌)」에 의하면 덕장동은 과천에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나 임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병학의 졸년이 기묘년(1879년)이므로 사망 7년 전인 임신년(1872년)에 손수 이장하고 자신도 이곳에 묻힐 생각으로 묘터를 정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병학의 초배인 파평 윤씨는 기묘년에 태어나 1853년에 고종(告終)하였고, 후배인 파평 윤씨는 그 19년 후인 무술년에 사망한 뒤 14년 후에 이장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때 두 부인의 묘를 동시에 이장했으므로 회곽을 하나로 만들고 그 위에 천부지인 지석 2개를 만들어 각각 회곽 위에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병학이 1879년 8월 15일에 사망하여 10월 7일에 이곳에 합장될 때에 앞에서 나타난 지석편과 회곽을 설치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마지막으로 그의 3배인 정경부인 성주 이씨가 후사 없이 1928년에 사망했을 때도 이곳에 부례하여 한 묘 안에 4명이 3개의 회곽 속에 묻혔음을 알 수 있다.
김병학의 지석편은 회와 흙을 섞어 만든 회토편으로 글씨를 음각하고 그 안에 숯가루를 이겨 넣었는데 그 내용은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 事謚文獻安東金公炳學之墓寅坐之原”이었다. 그리고 두 파평 윤씨의 지석은 방형의 백자판으로 글씨는 회회청의 붓글씨였다. 횡대는 왼쪽 성주 이씨는 7개, 김병학은 5개, 그리고 두 파평 윤씨는 각각 5개였는데 성주 이씨의 횡대에는 아무런 글씨가 없었으나 김병학의 첫 번째 횡대에는 ‘上’자가, 두 파평 윤씨의 첫 번째 횡대에는 각각 ‘上壹’ 자가 씌어 있었으며, 이하 모두 횡대 하나씩에 ‘貳參肆伍’자가 씌어 있었다.
김병학의 관은 주칠로 잘 칠해져 있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했는데 그 위의 관상명정은 “議政府領議政原任大提學贈謚文獻安東金公之柩”라고 금니로 씌어 있었고, 관의 오른쪽에는 청홍의 현훈 흔적이 남아 있었다. 두 파평 윤씨의 관은 옻칠이 되어 있었고 관상명정은 주칠로 “贈貞敬夫人 坡平尹氏之柩”라고 씌어 있었으며, 관의 오른쪽에는 현훈 자리가 남아 있었다.
4) 김병국(金炳國)과 부인의 합장묘 김병국과 그의 3부인(1配 韓山李氏, 2配 豊川任氏, 3配 坡平尹氏)이 합장된 묘이다. 이 묘는 망주석과 양석이 각각 2개, 차일석이 4개, 그리고 11개의 계체석으로 꾸며졌고, 봉분 앞에 상석·혼유석·향로석이 설치되어 있으며 오른쪽으로 비석이 있다. 김병국의 장례시 여러 사항을 기록한 「충문공신종록(忠文公愼終錄)」에 “石物巳備舊山所而碑石新立”이라는 기록이 있음을 보아 비석을 제외한 석물은 이미 죽은 세 부인의 합장묘에 있던 것을 그대로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領議政奉 朝賀勳一等 贈謚忠文安東金公炳國之墓 贈 貞敬夫人韓山李氏꿴 贈 貞敬夫人豊川任氏뀜 貞敬夫人坡平尹氏뀜㎕굡箚 씌어 있다. 그리고 다른 3면에는 김병국 자신이 쓴 비문과, 손자 김용진(金容鎭)의 추기와 왕이 김병국의 생전과 사후에 내린 소가 종자 승규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묘의 봉분이 해체되어 회곽이 드러나자 지석편이 나타났다. 그러나 김병국의 지석은 발견되지 않고 맨 왼쪽에 정경부인 파평 윤씨, 하나 건너 증정경부인 한산 이씨, 그 옆에 증정경부인 풍천 임씨의 지석이 각각 세로 1줄로 놓여 있었다. 지석편의 숫자는 파평 윤씨의 것이 11개, 한산 이씨와 풍천 임씨의 것이 각각 12개였다. 지석은 흙과 회를 섞어서 만든 것이었다. 「충문공신종록」에 보면 “사지석번조(砂誌石燔造)”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원래는 지석이 있었으나 도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부장의 위치가 비석 전면에 새겨진 내용과 어긋난다는 사실이다. 비문에는 한산 이씨가 부우로, 파평 윤씨가 부좌로 되어 있는데 발굴 결과 그 반대로 나타난 것이다. 김병국의 회곽은 다른 부인의 것보다 약간 높고 조금 더 길게 만들어졌고 횡대 또한 다른 것들보다 약 10cm 정도 낮게 놓여 있었다. 횡대의 수는 모두 5매씩 이었고 횡대 위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파평 윤씨의 관 위에는 “貞敬夫人坡平尹氏之柩”라고 붉은 칠로 씌어져 있었다. 김병국의 관 뚜껑에는 명정이 덮였던 흔적이 보이고 백회로 쓴 명정 글씨가 판독 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었고 양편 뒤쪽에 현훈 자국이 있었다. 관 위의 명정에는 “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官春秋館觀象監事領三軍府事侍講院師原任奎章閣提學致任奉朝賀勳一等贈謚忠文安東金公之柩”라고 씌어 있었다.
한편 관상 명정은 “領議政奉朝賀勳一等贈謚忠文安東金公炳國之柩”라고 씌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충문(忠文)’ 두 글자는 금종이로 덮여 있었다. 관은 왕이 하사한 동원부기(東園副器)였다. 한산 이씨와 풍천 임씨의 횡대를 들어냈을 때 관 뚜껑 위에는 현훈 자국이 동심결의 흔적과 함께 남아 있었으며 “貞敬夫人 韓山李氏之柩 贈貞敬夫人 豊川任氏之柩”라는 내용의 관상 명정이 씌어 있었다.
5) 김해 허씨 묘 김해(金海) 허씨(許氏)의 묘는 2개의 망주석, 10개의 계체석, 그리고 상석과 향로석 및 혼유석과 비석으로 꾸며져 있다. 비석의 앞면에는 “右議政 自號穎漁 副室金海許氏墓”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해 허씨는 을미년(1835년)에 태어나 1851년 김병국의 부실로 들어와 살다가 1878년 4월 4일 사망하였는데, 같은 해 4월 24일 광주 성호에 안장되었다가 이듬해인 기묘년에 구룡동으로 이장되었다.
이 묘는 손좌건향(巽坐乾向)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묘의 봉분을 제거하자 이장할 때 만든 회토편의 지석이 나타났는데 “議政府右議政金炳國副室金海許氏之墓廣州聲串面九龍洞巽坐原”이라고 씌어 있었다. 회곽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회곽과 상석의 중간 지점에서 백자의 지석합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는 회회청으로 쓴 11매의 지석이 들어 있었다. 결국 김해 허씨의 묘에는 두 종류의 지석이 묻혀 있었던 것이다. 관을 노출시키니 뚜껑에 금박으로 관상명정이 씌어 있었고 명정의 좌우로 현훈이 놓였던 자국이 남아 있었다. 관상명정은 “議政府右議政金炳國副室 金海許氏之柩”였다. 관 안에서는 염습의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6) 김정규(金貞圭)와 부인의 합장묘 이 묘에는 망주석·양석·상석·혼유석·향로석·차일석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오른편에 비석이 있는데, 비석의 앞면에는 “嘉善大夫吏曹參判 安東金公貞圭之墓 配貞夫人韓山李氏뀜㎕굡箚 새겨져 있다. 1915년에 부인 한산 이씨가 죽은 다음 1917년에 비석을 세웠다. 이 묘는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서 1895년에 조성되었다가 1915년에 부인이 합장됨으로써 완성되었다.
성토의 중간 지점에서 김정규의 지석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有明朝鮮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安東金諱貞圭學道如之墓乙未八月十八日巳時 葬于廣州聲串面 九龍洞先塋下 癸坐”였고 백자 도판에 회회청의 붓글씨였다. 그러나 한산 이씨의 지석은 발견되지 않았다. 「한산이씨신종록(韓山李氏愼終錄)」에 백옥석 지석을 묻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도굴된 것으로 생각된다.
봉분을 제거하고 회곽을 해체하자 4개씩의 횡대가 나왔는데 한산 이씨 횡대는 김정규의 것보다 5cm 정도 높게 놓여 있었다. 김정규의 관 위 좌우에는 현훈 자국이 뚜렸하였고 관상 명정은 “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原任侍講院司書安東金公貞圭之柩”라고 되어 있었다. 한편 오른쪽 한산 이씨의 횡대를 들어내자 명정이 덮여 있었고 그 아래로는 “貞夫人韓山李氏之柩”라는 금박 관상 명정이 나타났다. 한산 이씨의 관 속 염습의는 대부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7) 김용진(金容鎭)과 부인의 합장묘 김병국의 손자인 동지돈령원사(同知敦寧院事)를 지낸 김용진과 부인 은진 송씨가 함장된 묘이다. 1945년 먼저 세상을 뜬 은진 송씨의 묘를 조성하고 그후 김용진이 91세의 나이로 1968년에 사망함에 따라 부인의 묘에 합장하였다. 묘의 좌향은 임좌병향(壬坐丙向)이다.
이 묘에는 양석이 없고 망주석·상석·혼유석·향로석·차일석·비석 및 계체석으로 꾸며져 있다. 비석 전면에는 “有韓同知敦寧院事穎雲 先生安東金公容鎭之墓 貞夫人恩津宋氏깹굡遮 내용이 새겨져 있고, 옆면에는 ‘영운선생장례위원회(穎雲先生葬禮委員會)’ 임원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석은 사후 2개월 뒤에 세워졌는데 묘의 봉분을 해체하자 김용진의 지석편이 나타났다. 지석의 회편은 모두 41개였는데 몇 개는 원형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다. 내용은 “華城 半月里 九龍洞 一九六八戊申一月十六日卒大韓嘉善同知敦寧院事安東人戊寅生金公容鎭月日葬嗣子舜漢”으로 추정된다. 다른 묘와 달리 지석편을 4~7개로 쌓아 9묶음으로 묻어 놓았다.
봉분을 제거하고 회곽을 해체하자 횡대가 노출되었는데 왼쪽의 김용진의 횡대에는 아무 표시가 없었으나 오른쪽 은진 송씨의 횡대에는 1에서 5까지의 숫자가 씌어 있었다. 김용진의 관 위에는 좌우로 현훈이 놓여 있었으나 관상 명정은 없었다. 관 속에서는 등근 벼루와 붓, 담배 파이프가 수습되었다.
8) 여흥(驪興) 민씨(閔氏) 묘 김용진의 아들 순한(舜漢)의 부인인 여흥 민씨의 묘이다. 여흥 민씨는 기해년(1899년) 생으로 계유(1933년)에 고종(告終)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부군 김순한은 화장하였기에 단당이다. 이 묘에는 양석이 없고 망주석·상성·혼유석·향로석·차일석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계체석에 계절이 갖추어져 있다. 묘의 좌향은 계좌정향(癸坐丁向)이다.
봉분을 해체하고 회곽을 들어내자 5개의 횡대가 나타났는데 황대에는 위에서부터 차례로 ‘일이삼사오(壹貳參肆伍)’라고 씌어 있었다. 횡대를 걷어 내자 관 위에 삭은 명정 글씨가 남아 있었으며 좌우에는 삭은 현훈도 있었다. 명정은 “孺人驪興閔氏之”까지만 남아 있었는데 구(柩)자는 접어서 관 아래쪽에 넣어 썩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관 속에서는 보공으로 덮은 비단과 수의 몇 종류가 썩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3. 옛터[舊址]
(1) 안산향교터[安山鄕校址] ▷ 위치 안산시 수암동 351, 352, 356. ▷ 구조 당시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초석(礎石) 및 와편만 산재해 있다. ▷ 역사 및 유래 안산관아지의 정남쪽으로 안산시 수암동 351, 352, 356번지에 있는데 351번지(1737평)와 356번지(213평)는 개인 소유이고, 352번지(942평)만 안산군 향교 소유로 되어 있다. 향교가 있던 곳은 현재 평탄한 밭(?)으로 변해 있고 향나무 등이 심어져 있다. 바로 뒤편(동남)에는 삼성의 창업주인 이병철의 형 이병각(李秉珏)의 묘가 있다. 이곳에는 윗부분과 아랫부분에 단을 이룬 건물터로 보이는 평지가 있는데, 윗부분은 26.6×12.4m이고, 아랫부분은 34.6×13.5m에 이른다. 아랫단에는 30×60m 정도의 다듬은 돌로 쌓아 놓은 두세 단의 석축단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양의 기와편이 발견되고 있는데 대부분이 무문와이며, 간혹 와전(瓦塼)도 발견된다.
사진 4-51 안산향교터. 건물은 흔적도 없고 초석과 와편만이 남아 있다.
안산향교가 이곳에 건립된 것은 조선 선조 때(1569년)로 알려지고 있다. 즉 조선 중기의 문신인 취죽(醉竹) 강극성(姜克誠;1526~1576년)이 쓴 「안산신교기(安山新校記)」에 의하면, 유(劉)모가 선조 1년(1568년) 안산군수에 부임한 후 처음 1년 간은 정사(政事)를 보다가 이듬해(1569년) 누추한 계곡 사이에 있는 안산향교가 너무나 허술하고 주변이 깨끗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안산관아 남쪽 양지바른 이곳에 자리를 잡고 농한기를 이용하여 고을 사람들을 부역시켰고, 경비는 안산관아에 있는 곡식과 고을의 덕망 높고 연로한 인사들로부터 충당했으며, 자재는 한강 어귀에서 배로 수송하였다.
「안산군읍지(安山郡邑誌)」(1899년)에 의하면 안산향교는 축좌(丑座)에 미향(未向)으로 북북동-남남서향이다. 「안산군읍지」 ‘관직조’에 의하면 안산군의 관원 중 향교직(鄕校職)이 한 명 있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이 향교는 1944년 1군 1 향교의 제도에 따라 안산·시흥·과천의 3향교가 시흥향교(始興鄕校)로 통합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케 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향교가 교육기관이라 하여 교육청의 관할로 들어갔으나, 관리비와 낡은 건물에 대한 보수 비용이 없어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 안산국민학교가 화재로 소실되자 임시학교 교사로 사용되다가 그후 철거되어 목재의 일부는 수암동 노인회관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현재 새마을회관 앞마당 주변에 향교에서 가져다 놓은 초석과 장대석들이 많이 남아 있다. 향교는 지방에 있는 문묘(文廟)와 이에 딸린 교궁(校宮)을 말하는 것으로, 공부자(孔夫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들에 석전(釋奠)하는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하여 유학을 강론하는 명륜당 등을 일괄하여 일컫는 말이다.
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제주에 조서(詔書)를 내려 학교를 세워 가르치는 길을 넓혔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 완비된 제도로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향교의 교육은 조교가 담당하였고 중앙에서 파견한 박사가 그 교육을 조언·감독한 듯한데, 교과 내용은 국자감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의종 이후 국정이 문란하고 학정(學政)도 따라서 퇴폐하였으나 충숙왕 때에 이르러 향교를 진흥시켜 부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향교제도는 조선조에 그대로 계승되고 확장되었고, 학당은 국자감 향교와 더불어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관학이었다. 각 주(州)·군(郡)에까지 설립된 조선 시대의 향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경기도 지역의 향교 실태는 38개의 향교에 모두 38명의 선생과 1860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안산향교의 경우 훈도(訓導) 1명과 50명의 학생이 있었다.
현재 안산향교는 1950년대에 파괴되었으나 이곳에서 공부를 한 인사가 다수 생존해 있고, 또 훼철되기 이전의 건물을 목도한 인사가 있어 원형 복원을 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다음 글은 「진산세고(晉山世稿)」에 실려 있는 강극성의 「안산신교기(安山新校記)」 역본이다.
“공손히 생각하니 우리 나라는 문교(文敎)를 숭상하여 서울에는 태학(太學;성균관), 지방에는 향교가 있어 모두 공자(孔子)를 받들어 제사한다.
다만 한(恨)스러운 것은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서는 혹 공자의 가르침을 받드는 데 미진하여 성전(聖殿)이 잡초에 묻히고 제물이 미비하니 성스러운 세상에 잘못된 일이다. 많은 선비가 우렁차게 글을 읽으면서 그래서 되겠는가? 비록 조정에서는 겨를이 없어 일일이 검열을 못 하지만 그 임무를 담당한 자가 보기를 본분 밖의 일로 생각하니 참 개탄스럽다. 진실로 군자(君子)가 능히 자기 일로 생각하고 떨치고 일어나 일반인에 섞이지 않는다면 유교(儒敎)가 흥거할 수 있을 것이며, 능하지 못한 자도 보고는 감동될 터인데 애석하게도 그런 사람이 없다.
안산군은 경기 지방에서 가장 취약한 지역으로 모든 일에 소홀하고 문교정책에 더욱 소홀하다. 무진년에 유학(儒學) 선생인 유모씨(劉某氏)가 안산군수로 부임하여 풍속의 이롭고 병된 것을 풀어서 이로운 것은 더욱 인도(引導)하고 해로운 것은 제거하는데, 먼저 성묘(聖廟;孔子 사당)를 참배하고서 좌우를 돌아보고는 슬픈 얼굴을 지으며 말하기를 ‘아! 너무 게으르도다. 사당이 더럽고 학교가 허술하니 이러고서 어찌 성령(聖靈)을 편히 모시며 유생(儒生)이 스승을 곁에서 모시겠는가? 내가 개선하리라.’ 하고 뜻을 세웠으나, 시기가 맞지 아니하여 즉시 착수하지 못하고 1년간 정사(政事)를 보고 농한기를 이용하여 부역을 시키고 세금을 적게 거두고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하니 백성에겐 힘의 여유가 있고 창고에는 곡식이 남아 있었다.
그런 후에 결단을 하고 기사년 봄에 공사(工事)를 시작하여 옛 향교가 누추한 계곡(溪谷) 사이에 있던 것을 읍(邑) 남동쪽 공간 양지바른 곳의 토질이 건조하고 위치 또한 높고 반듯한 자리에 지리에 맞도록 선정하니 사람들이 모두 좋은 터를 얻었다고 하였다. 자금을 모으는 데는 창고에 남은 곡식 몇 섬을 내어 놓고 마을에서 덕망이 높고 성실하며 연로한 사람을 선발하고 고을에 유능한 아전[胥吏]에게 맡기어 자재(資材)는 고가(高價)도 염가(廉價)도 아닌 것으로 하고, 또 수송의 수고로움을 근심하여 바다를 이용하여 배로 서울에 가고 한강 어귀에서 물건을 싣고 들어오니 소로 운반하는 것보다 인력도 적게 들었다. 공사를 하는 데는 놀고 있는 사람을 부리니 농민을 번거롭게 아니하였지만, 농민 중에 현명한 자는 즐겨 일어나고 어리석은 자도 수줍어하면서 힘을 쏟아 몇 달 안 되어서 공사를 끝냈다.
정전(正殿)에는 의젓한 스승을 거처하게 하고 유생들이 거처할 집도 있었다. 유생을 모으는 날 원근에서 모여 와서 보고는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다른 곳에서 이사온 아무씨는 소문을 듣고 탄식하기를, 옛날 사람을 부러워했는데 옛날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하였다. 나도 마을 늙은이이다. 조정에 있을 때 이 고을을 다스린 사람이 많았다고 들었다. 견책(譴責)을 듣고 시골에 있으면서 시정(施政) 득실이 또 적지 않음을 보았다. 성묘(聖廟)의 헐어 더러워진 문과 담장을 보고 더욱 개탄하였으나 더러운 것은 버렸는데, 지금은 그전에 보지 못하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어찌 감격하지 않으리오? 모든 읍민(邑民)의 심정도 나와 같으리라. 옛날 우강 이구의 원주학기(袁州學記)를 지었는데 그 일이 서로 같다. 그러나 실정(實情)은 이것이 나을 것이다. 내가 그 실정을 쓰고, 또 이구의 원주대중에게 알린 말을 안산선비에게 말하여 스스로 힘쓰도록 하노라. -「시흥의 문화재와 유적」, 1995, 이승언.
(2) 사직단터[社稷壇址] ▷ 위치 시흥시 장하동 벌말 뒷산. ▷ 구조 사직단은 정방형으로 한 면의 길이는 13.5m, 높이는 1.5m 정도이다. 외형상 토축(土築)으로 보이지만 사직단의 내부가 외곽부보다 30~50cm 정도 함몰되어 있다. 외곽부 안쪽에 부분적으로 정연하게 쌓은 석축이 노출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흙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폭 1m 정도의 석심(石心)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다져 쌓은 것으로 추측된다. 사직단의 각 면은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으나 전체적인 방향은 약 20정도 틀어진 상태이다. 사직단 각면의 중간부에 2m 폭의 함몰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네 방향에서 정상부로 올라가는 흙으로 된 계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사직단 위에는 잡초와 잡목이 우거져 있는데, 곳곳에서 와편(瓦片)이 발견되고 있어 윗부분에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4-52 사직단터. 장하동 벌말 뒷산에 있으나 잡초와 잡목이 우거져있고 와편만이 간혹 보인다.
▷ 출토 유물 이곳에서 수습되는 와편들은 대체로 황갈색을 띠고 있으며 점토 성분이 강하다. 두께는 2cm 정도인데 대부분 표면은 무문(無文)이고 이면에는 포문(布文)이 있는 조선 시대의 기와들이다. ▷ 역사 및 유래 벌말에서 방화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위에서 남서쪽으로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해발 170m인 산 정상부에 이르는데 이곳이 사직단터이다. 이 산은 마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려온 지류로서 경사가 완만하며 정상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바닷가가 내려다 보인다. 사직은 토지신(土地神)과 오곡신(五穀神)을 모시고 제사 드리는 곳으로서 두 신위(神位)를 함께 단(壇)을 쌓고 봉사(奉社)하기 때문에 사직단이라고 한다. 토지와 오곡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 되는 것이니 만큼 국가에서는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기원하고 보우(保佑)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국사단(國社壇)과 국직단(國稙壇)을 설치하였고 각 지방관청 단위로 지방 사직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렸다. 국사단과 국직단은 현재 서울의 사직동에 복원되어 있으나 지방의 사직단은 대부분 훼파되어 이처럼 원형이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 안산사직단에서 장하동 벌말 주민들이 매년 7월 1일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위하여 우물제[井祭]를 지내고 있다. ▷ 특기 사항 이 사직단은 1988년 시흥시 이승언(시흥시 향토사료실 전문위원) 씨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3) 성황당(城隍堂) ▷ 위치 안산시 성곡동 해봉산 정상에 잿머리성황당이 복원되어 매년 안산시 주관으로 성황제를 올리고 있으며, 또 하나는 안산시 군자동 군자봉 정상에 제단을 쌓고 시흥시 주관으로 매년 성황제를 올리고 있다. ▷ 역사 및 유래 「안산군읍지」의 단묘(壇廟)조에 보면 성황사(城隍祠)가 2군데 있는데 하나는 군 서쪽 21리에 있고, 다른 하나는 군 서쪽 32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산천조에서는 군 서쪽 20리 지점에 성황사가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전자는 군자봉에 있는 것을, 후자는 해봉산(海峯山)에 있는 것을 지칭했다고 볼 수 있다. 성황은 서낭이라고도 하는데 토지의 부락(富樂)을 수호하는 신이다. 대개 길가의 큰 나무가 이 성황신의 거처가 되는 경우가 많으나 산 정상부에 사당을 지어 놓는 경우도 있다. 이 성황신이 있는 곳에서는 침을 뱉거나 돌을 하나씩 던져 놓고 지나가는데 이는 토지수호신인 성황신에게 재난을 멀리하고 복을 빌며 여행의 피로를 풀고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 서낭의 기원은 중국 고대의 성지신(城地神)에서 유래된 것으로, 6조(六朝) 시대 이후부터 서낭이라 하였는데 당대를 거쳐 송대에 크게 성행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그 기원이 확실치 않으나 조선 시대에는 중사(中祀)의 하나로 남쪽에 그 제단이 있었으며, 세종 시대에 이르러 풍운(風雲)·뇌우(雷雨)·산천(山川)·성황(城隍)이 한군데에 모셔지기도 하였다. 제단(祭壇)의 축조는 토축(土築)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토축단은 장마철에는 무너져 내리거나 황폐해지기 쉬워 석축으로 쌓기도 하였다. 해봉산의 성황당은 신라 경순왕을 모신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군자봉의 성황당은 고려 때부터 있었으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4) 관곡지(官谷池) ▷ 위치 안산시 하중동 관곡 마을. ▷ 구조 연못의 규모는 가로 23m, 세로 18.5m이며 장방형이다. 연못에는 연이 무성하며 연당 한가운데에는 조산(造山)을 해 놓은 뒤에 관상소나무를 심어 놓았다. ▷ 역사 및 유래 이 연못은 조선 시대 전기의 명신이며 농서(農書)인 「금양잡록(衿陽雜錄)」의 저자로 이름이 높은 강희맹(姜希孟)과 인연이 깊은 연못이다. 그는 중국 남경에서 돌아올 때 전당연(錢塘連)이라는 연꽃 종자를 가지고 귀국하여 고향인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험 재배를 해 점차 널리 퍼졌다고 한다. 「경기지」에 보면 이러한 연고로 안산의 읍호(邑號)를 연성(連城)이라 하고 이 관곡지를 전당지(錢塘池)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안산의 별호인 연성에 대한 기록은 이보다 앞선 정종 2년(1400년) 김정경(金定卿)이 연성군(蓮城君)에 봉군되는 것으로 보아 전당지와 연성은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이 관곡지는 최근에 정비·보수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으며 1984년 이승언의 저서 「왜 안산시이어야 하는가」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5) 오취언터[烏嘴堰址] ▷ 위치 안산시 선부동. ▷ 구조 오취언의 규모는 둘레 1560척, 길이 491척, 폭 375척이었고 깊이는 7척이며 수통이 1개 있었다. 오취언 주위에는 나무가 2643주 있었고, 이 제언(堤堰)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전답의 규모는 대략 2천 석락(石落)이었으며, 이곳에는 감독관 1명과 색리 1명이 있었다고 한다. ▷ 역사 및 유래 「안산군읍지」에서는 이 제언을 진휼청(賑恤廳)에서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진휼청은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던 관청이었다. 조선 시대 초기에는 구황청(救荒廳)으로 불리다가 인조 4년(1626년)에 진휼청이라 고쳐 선혜청(宣惠廳)에 붙여 상평청(常平廳)과 통합하였다. 주로 지방의 빈민을 구제하였는데 백성을 구제할 때는 진휼청이라 하고 진휼이 끝나면 상평청이라 하였다. 이 오취언의 축조를 진휼청에서 주관하였다는 것은, 이 제언을 쌓아 흉년의 피해를 최소화시킴으로써 백성들을 사전에 구제하는 방편으로 실시된 토목공사(土木工事)였임을 알 수 있다. 오취언의 위치는 산대장터 건너편이었다는 「안산군읍지」의 기록으로 미루어 현재 도일저수지가 있는 곳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6) 망해정터[望海亭址] ▷ 위치 안산시 수암동. ▷ 역사 및 유래 망해정은 연성군 김정경이 건립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안산군읍지」에서는 읍치의 서쪽 언덕에 있다고 하였으며, 연성군 김정경이 바로 그 아래에서 생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지지자료」에서도 옛날 김정경의 처소 가까운 곳에 그 터가 있다고 하여 읍지들과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안산김씨족보」에는 “지금의 사직단은 망해정의 옛터”라는 기록이 있어 그 위치 비정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망해정이라는 정자의 명칭이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이므로 정자의 위치는 평지가 아닌 구릉에 있었다고 생각되며 안산읍성 안쪽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망해정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7) 사옹원(司饔院) 분원터[分院址] ▷ 위치 안산시 신길동. ▷ 구조 건물 안에는 조기를 잡아 저장하던 70~80평 규모의 저장고가 남쪽과 동쪽에 1개씩 있었으며, 깊이는 3m 정도이고 원형이었다 한다. ▷ 역사 및 유래 이 지역의 특산물인 조기를 잡아 진상하던 곳이다. 사옹원을 살막이라고도 불렀는데 건물은 일제 시대 초기에 없어졌다고 한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어살을 설치하여 조기를 잡고 살막제 밑에서 얼음을 얼려 조기를 냉동시켰다고 한다. 진상을 위한 조기를 잡던 어살은 일제 때 개인살로 되었다가 1986년 시화지구 건설로 인하여 폐지되었다. 사옹원 건물지는 현재 흔적을 찾기 어렵다. 「안산군읍지」에 보면 어부 75명이 선혜청으로부터 돈을 받고 그물로 고기를 잡아 사옹원 전관(專管)에게 진공하였으며 이를 얼음창고에 보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특기 사항 이 분원터는 1989년 이승언에 의해 발견되었다.
(8) 쌍록원터[雙鹿院址] ▷ 위치 쌍록원은 시흥시 장하동 원뒤(원후) 마을 북쪽 당채봉 아래의 막둑목장 동북쪽 200m 지점에 있었다. ▷ 역사 및 유래 「안산군읍지」에는 군에서 남쪽으로 5리 되는 곳에 있었으나 이미 폐하여 없어졌다 하였다. 이곳은 고려와 조선 시대 때 남양과 안산 등지에서 개성을 왕래하던 주요 교통로였다. 원(院)이란 고려·조선 시대에 출장여행 중인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각 요로(要路)나 인가가 드문 곳에 설치하였던 숙박소였다. 이 원의 유지를 위해 고려 공민왕 때에 이미 원위전(院位田)을 주었으나 이것이 어느 정도 정비되기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부터였다. 세종 27년(1445년)에는 부근에 살던 사람 중에서 뽑아 원주(院主)로 삼고 이를 관리케 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원주에게 대로면 1결 35부, 중로면 90부, 소로면 45부를 주어 원을 유지하게 하였다고 한다. 원은 한때 크게 번성하였으나 그 사용자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후기에는 점차 쇠퇴하였다. ▷ 특기 사항 이 터는 1986년 이승언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9) 봉황대터 ▷ 위치 위치 미상. ▷ 역사 및 유래 「안산군읍지」를 보면 적길리(현 안산시 신길동 만해와 능길 사이) 헤인에 봉황대가 있었고 그 아래에 사옹원이 있어 조기를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은 현재 아무런 흔적도 없으나 본래 이곳 정상부에는 1.5~2m 정도 높이의 흙으로 된 단이 있어 이곳에서 봉수(烽燧)를 올렸다고 한다. 봉수제는 역제(驛制)와 더불어 전통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연락수단으로 중앙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국경 해안지방의 정황이나 소식을 왕경의 병조에 전달하는 데 이용되었다. 「만기요람」에 보면 평상시에는 횃불 하나를, 적이 나타나면 횃불 둘을, 적이 국경 가까이 다가오면 횃불 셋을, 국경을 침입하면 횃불 넷을, 그리고 교전상태로 접어들면 횃불 다섯을 올렸다고 한다. 조선 시대의 봉수로는 크게 다섯으로 구분되는데 안산 지역을 지나는 서해안도 그 중의 하나이다. 봉황대의 봉수는 남양 해운산에서 전달받아 인천 성산 봉수로 연결되었는데 세종 때 설치되었다가 곧 폐지되고 정왕산 봉수가 그 기능을 대신하였다.
(10) 정왕산(正往山) 봉수터[熢燧址] ▷ 위치 시흥시 정왕동. ▷ 구조 봉수대가 있는 정왕산은 해발 115m의 산봉(山峰)으로서 이곳에서 주변을 관망해 볼 때 해운산(海雲山)과 성산(城山)을 남북으로 바라볼 수 있어 안개등의 기후적인 여건에도 불구하고 전달이 가능한 곳이다. 현재 이곳 정왕산 봉수터에서는 5곳의 연대(烟臺)가 확인되었는데 연대 5곳은 위급한 상황에 따라서 거화(擧火)하였던 봉로(烽爐)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배열 상태를 보면 건물지를 중심으로 120cm 간격으로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각각의 규모는 가로 580cm, 세로 420cm 정도이며 연대의 높이는 확인할 수 없다. 연대의 상부에는 산 정상의 천연적인 암반을 이용하여 건물을 축조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건물은 병기와 기타 기물을 보관하는 창고의 기능을 지님과 아울러 봉수의 기능을 원활히 하기 위한 봉루(烽樓)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의 규모는 850cm×620cm이고 높이는 230cm이다. 봉수의 축조 방법은 산 정상부의 암반을 이용하여 그 위에 20~ 80cm 정도의 돌을 축대처럼 쌓아 올리고 연대를 만들었다. ▷ 출토 유물 조선 시대의 기와편. ▷ 역사 및 유래 정왕산 봉수는 전라·충청 해안으로부터 올라오는 정황을 한성에 전달하는 봉수의 기능을 유지했으나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전국의 봉수제를 폐지함에 따라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건물지에서는 조선 시대의 와편과 토기면이 발견되고 있다. 이 정왕산 봉수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대동지지」·「경기읍지」·「안산읍지」 등 많은 기록에서 나타나는데, 「여지도서」의 군병조에 보면 봉수군의 규모를 봉수군 25명, 별장감관 6명 등 총 31명으로 밝히고 있다. 또한 「안산군읍지」에서는 별장 1명, 감관 5명, 봉수군 25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경기읍지」에서는 토지 5결과 봉보라 할 수 있는 인원 75명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 말기에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던 조선 정부의 봉수제의 강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정왕산 봉수 전후의 봉수로를 살펴보면 흥천산(興天山;수원)-염불산(念佛山;남양)-해운산(海雲山;남양)-정왕산(正往山;안산)-성산(城山;인천)-유곶(杻串;부평)-백석산(白石山;김포)-냉정산(冷井山;김포)-개화산(開花山;양천)-목멱산(木覓山;한성)으로 연결되었다.
(11) 석곡역터[石谷驛址] ▷ 위치 석곡역터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본래 시흥시 거모동 도일에 있었다가 후에 안산시 양상동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 역사 및 유래 「안산군읍지」에는 서쪽 7리 지점에 석곡역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말이 8필 있었고 노비가 33명 있었는데 당시에 이미 폐해져 있었다고 전한다. 역제는 조선 시대의 중요한 교통제도로 전국의 주요 도로에 역을 설치하였다. 「만기요람」에 보면 역마를 이용하는 대상은 대체로 아뢸 것이 있다든가 진상할 것이 있는 사람, 제주자제(濟州子弟), 공물을 운송하는 사람, 진장(鎭將)·역관(驛官)·연변의 가족을 대동하지 못한 수령, 긴급한 군사 사정이 있는 사람, 각 능의 제물을 운반하는 사람, 비변사의 회람·공문을 전달하는 낭청(郎廳), 군졸을 징집하는 공문을 휴대한 장교, 각신(閣臣)으로서 휴가를 받아서 가는 사람 등이었다. 역에는 대로·중로·소로의 구별이 있어서 국왕의 명을 받은 사절 이하는 길을 구별하여 왕래하였으며, 이를 위반하는 자는 관찰사가 규찰하여 조정에 보고토록 하였다.
(12) 수암사터[秀岩寺址] ▷ 위치 안산시 수암동 산 4번지 일대. ▷ 역사 및 유래 이곳은 수암동의 안산과 수암봉 간의 중턱으로 주위에 샘터가 하나 남아 있을 뿐 모두 경작지화되어 절터를 확인할 수 없다. 「안산군읍지」 사찰조에 의하면 정수암은 읍치 뒤 위 수리산에 있었는데 이미 폐하였다고 한다. 그후 산봉이 수암봉으로 개칭되면서 정수암을 수암사라 고쳐 부른 것으로 추측된다.
(13) 원당사터[元堂寺址] ▷ 위치 안산시 수암동 산 13번지 일대.
사진 4-53 원당사지. 수암동 산 13번지 일대에 있으며, 초석 몇 개와 석불 좌상 2구만이 남아 있다.
▷ 역사 및 유래 이곳은 수리산 아래에 해당되는데 축대의 일부와 초석 몇 개, 그리고 석불좌상(石佛坐像) 2구만 남아 있다. 1구는 결가부좌에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보이고 왼손은 파손되었으며, 머리 부분은 목이 부러진 것을 올려 놓았다. 다른 1구는 육계가 있고 목 아래 부분을 둥글게 돌출시켜 의문(衣文)을 선각시켰다. 「안산군읍지」 사찰조에서는 “원당사가 읍치 동쪽 수리산 아래에 있는데 원당사 뒤편에는 우단(雨壇)이 있으며 뜰에는 작은 탑이 있는데 ‘천희원년(天禧元年)’이라는 4글자가 새겨져 있어 삼국 시대에 창건된 절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나타나는 ‘천희’라는 연호는 중국 송(宋)나라와 서요(西遙)에서 사용된 연호로 그 연대는 1017~1021년, 1168~1201년 또는 1177~1211년으로 나타나므로 이 절의 창건은 고려 초기까지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사지에서 발견되는 기와 문양으로 볼 때 조선 시대 말기까지 사용되다가 폐사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14) 소릉터[昭陵址] ▷ 위치 안산시 목내동 산 47번지의 속칭 능산의 상복부(上腹部)에 위치. ▷ 역사 및 유래 이 산은 현재 정순철(鄭醇喆) 씨의 소유로 정씨 문중의 묘소로 되어 있다. 이 소릉(昭陵)은 조선 문종(文宗)의 왕비이며 단종(端宗)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 안동(安東) 권씨(權氏)의 처음 능이다. 현덕왕후는 세종 23년 7월 단종을 낳은 다음날 세상을 떠나 당시의 행정구역상 안산군인 이곳에 장사를 지냈고, 문종이 왕위에 올라 왕후로 추봉(追封)된 후 소릉(昭陵)이라 하였다. 단종(端宗)이 왕이 되자 친제(親祭)까지 지내면서 보호하였다. 그러나 단종이 세조(世祖)에게 양위하고 급기야 죽임까지 당한 뒤인 세조 2년(1456년),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네가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고 하였다. 세조가 놀라 일어나 보니 그때 곧 동궁(東宮)이 죽었다는 기별이 왔다. 이 일이 있은 후 소릉은 파헤쳐지고 주변의 석물들은 땅속에 묻히게 되었다. 그후 중종 8년(1513년) 왕명에 의하여 현덕왕후의 시신을 찾아 경기도 양주의 현릉(顯陵)에 문종과 함께 합장하였다. 소릉은 1978년 단국대에서 부분적으로 발굴하였고 그후 경희대 박물관에서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현실(玄室)을 확인하였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석호(石虎) 2점과 단국대에서 발굴한 난간석조(欄干石柱) 2점이 있으며, 경희대에서 발굴한 석양 1점과 석물 20여 점 등은 안산시 근로청소년회관 후원에 보관되어 있다. 본래 왕이나 왕후의 능에는 호석(護石)과 난간석(欄干石), 4개의 석호(石虎)와 4개의 석양(石羊), 망주석(望柱石)·장명등(長明燈)·상석(床石)·문신석(文臣石)·무신석(武臣石)·석마(石馬) 등이 배치되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발견된 석물 외에 많은 유물들이 아직 능 주변에 묻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15) 김병국 재실터[齋室址] ▷ 위치 안산시 일동 172번지 일대. ▷ 역사 및 유래 김병국(金炳國) 재실은 19세기 말경에 건립된 것으로 전체 규모는 99칸이었으나 30칸 정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나머지 부분은 계속 남아 있었으나 1979년 신도시 개발로 인하여 건물이 헐려 무덤과 묘비 등은 현재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내 고장 전통문화」에 기록된 자료에 따르면 이 건물은 주변의 나지막한 뒷산에 자리잡고 있는 안동 김씨 가묘를 배경으로 산기슭 평지에 있었으며, 정남향의 ㅁ자 건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래의 ㅁ자집 동쪽에 사랑채와 행랑채가 더 연결되어 ㄷ자집이 되었었다고 한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8칸 크기의 전형적 ㅁ자 집으로 안채에서 안방과 대청이 일자로 배치되는 평면 방식을 택하고 있는 단층 기와집이었다. 지붕처리 수법은 안채의 경우 동쪽은 박공, 서쪽은 합각으로 처리하고 전면 행랑은 맞배(세마루 연등청정이란 뜻) 박공으로 하였으며, 양 익랑은 겹친 지붕으로 층층이 내려와 전면 행랑과 만나는 부분에 합각이 생기지 않고 바로 맞닿아 회청만이 발생하도록 하였다.
안채는 세벌대 화강암 지대 위에 집을 앉혔으며 높은 마루와의 사이에는 또 하나의 디딤돌을 놓고 주초(柱礎)는 네모뿔대 모양의 높은 주초이고 기둥은 네모였다. 도리는 납도리이고 장혀는 쓰지 않았으며 상도리에만 장혀와 헛창방을 보내고 사이에 소로를 끼웠다. 대공은 판대공으로 둥근 기분이 나는 사다리꼴이고 종보와 대들보는 거의 맞닿게 처리하였다. 서까래는 4겹으로 부연이 없고 서쪽은 합각 처리, 동쪽은 박공 처리를 하였다. 전면 행랑은 세마루 집인에 4단 위에 올라와 있고 대공은 판대공이고 장혀소로는 없으며 겹서까래 홑처마였다. 좌의 익랑 역시 행랑과 같은데 다만 초석이 약간 높고 안마당과의 사이 기단이 한 단 차이밖에 나지 않으며 대공은 동자주 모양이고 지붕이 층단으로 겹쳐 있었다.
한편 우리 나라 대부분의 집들의 정원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듯하게 처리하는 것이 대부분이나 이 집만은 안마당에 정원을 만들어서 화강석 받침대 위에 괴석을 놓는 등 정원 시설물이 지금은 비록 파괴되었다고 하지만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집은 당대의 권력가의 재실답게 정교하게 지은 집으로 당시 건축의 전모는 밝힐 수 없다 하더라도 당시 건축 기술의 정수를 발휘한 우수한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건물에서 우수한 것은 건물의 상세 처리에 있으며,정원도 수목과 석물 등을 배치하여 19세기 정원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16) 산대장터[山垈場址] ▷ 위치 안산시 선부동.
사진 4-54 산대장터. 산대 시장에서는 주로 토산물을 교역 하였으며, 흔히 장날이면 씨름판이 열리곤 하였다.
▷ 역사 및 유래 원래 안산군 대월면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시흥군 군자면 선부리라 불리우다가 안산시로 편입되었다. 신길동 강명현 씨의 증언에 의하면 산대장터의 위치는 안산·군자·소래로 갈라지는 세 갈래 지점의 동쪽 산기슭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안산군읍지」에 보면 읍의 서남쪽 20리 지점에 산대장이 있는데 외딴곳이어서 통화는 별로 없으나 토산물로써 교역을 하였다고 한다. 이 지역의 토산물은 주로 어류로서 수어·민어·진어·노어·병어·소어·전어·홍어·설어·오징어·대하·세하·석화·토화·대합·소라·낙지 등이었다. 특히 이 지역의 조기는 사옹원 분원을 통해 진상이 될 만큼 유명하였다. 산대 시장은 장날이면 씨름판이 열려 씨름장으로도 유명했으며 산대장 앞에는 오취언(烏嘴堰)이라는 저수지가 있었다.
(17) 안산장시터[安山場市址] ▷ 위치 안산시 수암동 개다리 수암농협 주변 일대 ▷ 역사 및 유래 안산장시는 조선왕조 말엽에 형성된 장시로서 처음에는 3일 8일에 섰다가 그 다음 4일 9일로 바뀌었으며 뒤에는 5일 10일에 열렸다. 주요 거래 품목은 일반 생활필수품이었고 상권은 수암면 일원과 화성군 반월면 일부 지역이었다. 일명 수암시장 또는 읍내장이라고 불렸던 이 시장은 1960년대에 이르러 도시화 추세에 밀려 폐장되었다.
사진 4-55 삼거리 시장터. 한때 번창했으나 군자시장이 생기고 한국전쟁 이후 쇠퇴하여 폐시되였다.
▷ 역사 및 유래 삼거리 시장은 능곡동 출신 박경선 씨가 토지를 희사하여 1938년 9월 30일 재개장된 소시장이었다. 개장은 5일 10일에 열렸고 한때 제법 번창하였으나 군자시장이 생기고 또 1·4후퇴 이후로 점차 쇠퇴 일로를 걷다가 끝내는 폐시되고 말았다.
(19) 방축장터[防築場址] ▷ 위치 시흥시 광석동. ▷ 역사 및 유래 방축장은 조선 시대 말기에 산대장시·안산시장과 함께 시흥군 내에 소재했던 3개 시장 중의 하나였다. 이곳은 당시에는 초산면 광석리였으므로 광석시장(廣石市場)이라고도 불렸다. 이 방축장시는 1920년대에 삼거리 시장으로 되어 처음은 3,8일장으로, 뒤에는 5,10일 장으로 개장하다가 1930년대 후기에 삼거리장이라 불렸다. 그후 1956년 12월 28일에 능곡시장이 되었으나 현재는 폐시되었고 그 자리는 현재 농경지가 되었다.
(20) 광석리(廣石里) 주막터[酒幕址] ▷ 위치 시흥시 광석동.
사진 4-56 월입피 주막터. 고정뿌리 동북쪽 길가에 있었으나 신도시 개발과 더불어 자취를 감추었다.
▷ 역사 및 유래 이 주막터는 물왕저수지에서 서쪽으로 월곶선을 따라가다가 얼미 입구 3거리 지점에 있었다. 「안산군지」를 보면 광석리 주막터는 읍에서 10리 떨어져 있는데 행인이 적으며 봄·가을로 소금상인이 간혹 들리기 때문에 이것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기가 곤란하다고 하였다.
(21) 월입피(月入陂) 주막터[酒幕址] ▷ 위치 안산시 월피동. ▷ 역사 및 유래 「안산군읍지」에 의하면 읍에서 10리쯤 떨어져 월입피 주막이 있었으나 손님은 물길 행인이나 소금장수 정도여서 생업이 넉넉하지 못했다고 한다. 월입피 주막은 1970년대 말 신도시개발과 함께 없어졌다고 하는데 원위치는 고정뿌리(부리) 동북쪽 길가에 있었다. 고정뿌리는 광덕산의 한 줄기가 마을을 가로질러 내려와 용혈(龍穴)을 이루고 있는 능선에 있던 정자목이다. 이 정자목은 1984년에 베어졌다고 하는데 이 용혈 또는 용두(龍頭)가 있는 구릉은 상여가 절대 지나지 못하고 멀리 우회하여 지나갔다고 한다.
4. 지석(誌石)
(1) 청주 한씨 묘지(墓誌) ▷ 위치 안산시 양상동 산 5번지 일대. ▷ 구조 이 청주(淸州) 한씨(韓氏) 묘역에서는 4기의 회곽분이 발굴되었으며 총 71장의 묘지(墓誌)가 출토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묘지의 크기는 11×11×5cm이며 묘지 하나에 한 글자씩 음각하고 숯으로 채워 넣었다. 재질은 석회·세사·황토 등의 삼물이다. 이런 종류의 묘지는 조선 시대의 분묘에서 일반적으로 많이 발견되는 형태이다. 71호분에서는 모두 19개의 지석이 발견되었고, 이 분묘의 동쪽에 붙어 있는 회곽에서 회곽 위에 일렬로 배치된 9개의 지석이 발견되었다. 2호분은 1호분에서 서쪽으로 약 10m 지점에 있었다. 역시 회곽분(灰槨墳)으로 회곽 위에는 12개의 지석이 회곽의 중앙을 따라 일렬로 놓여 있었다. 3호분은 2호분에서 서쪽으로 3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회곽 위에는 14×14×5cm 크기의 묘지 30개가 놓여 있었다.
▷ 역사 및 유래 마산(麻山)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줄기의 끝 부분에 양상동 아랫보대 마을이 있는데, 고분은 이 마을 뒷산의 해발 50m 정도의 젖소사료용 초지 안에 있었다. 이 유적은 신갈`-`반월순환고속도로 건설공사의 일환으로 실시된 지표조사에서 발견되어 1988년 한양대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그 결과 고분은 모두 3기의 조선 시대 분묘로 당시의 가장 일반적인 묘제인 회곽분(灰槨墳)임이 밝혀졌다. 출토 유물은 회곽 위에서 여러 장의 지석이 발견되었는데 이 지석을 통해 이 무덤들의 피장자들은 청주 한씨와 그 가족들임이 밝혀졌다. 1호분에서 출토된 19장의 지석은 머리 방향인 북쪽에서부터 회곽의 장축을 따라 중심부에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그 내용은 “通訓大夫行○○○○淸州韓公諱鎔基之○”였고 글씨는 해서체였는데, 가운데 관직에 해당하는 4개의 글자는 판독이 어려웠다.
1호분의 동쪽에 붙어 있는 또 하나의 회곽에서 9개의 지석이 발견되었는데 역시 회곽 위에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그 내용은 “淑人迎日鄭氏之墓坐”였다. 숙인(淑人)은 조선 시대의 종3품인 문무관의 처에게 주던 봉작(封爵)으로 영일 정씨는 좌측 한용기의 부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2호분은 1호분에서 서쪽으로 약 10m 지점에 있었는데 역시 회곽분(灰槨墳)으로 회곽 위에는 12개의 지석이 회곽의 중앙을 따라 일렬로 놓여 있었다. 그 내용은 “淑夫人靑松沈氏之墓꽈毗─굻눼. 부좌(뀜)라는 것은 부부를 합장했을 때 아내를 남편의 왼쪽에 묻는다는 뜻인데 이것으로 보아 남편의 무덤은 그 오른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간좌(艮坐)라는 것은 무덤의 방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동북향임을 말해 주고 있다.
3호분은 2호분에서 서쪽으로 3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회곽위에는 역시 14×14×5cm 크기의 묘지 30개가 놓여 있었다. 회곽의 중간 부분에 우측에서부터 8장씩 4열로 놓여 있었는데 그 내용은 “通政大夫行朔州都護府使兼朔州鎭兵馬檢節制使淸州韓公之墓辰坐原”이었다.
묘지를 만드는 방법은 1,2호와 같이 하나의 묘지에다 해서체로 한 자씩을 음각으로 새기고 그 음각한 곳에다 숯으로 채워 넣었다. 묘지에는 관직은 비교적 자세하게 나타내고 있으나 피장자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피장자가 역임했던 병마첨절제사는 태종 9년(1409년)에 설치된 관직으로 각 진영(鎭營)에 속했던 무관직(武官織) 절도사(節度使)의 아래에 있던 직책이었다. 마지막의 ‘원(原)’자는 묘지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 3호분의 피장자는 2호분인 청송 심씨의 남편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지석들은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이는 것들이지만 정식의 학술조사를 통해 이처럼 완전한 묘지가 출토된 것은 매우 중요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이는 조선 시대 분묘 축조 양식 및 청주 한씨 가문의 묘지 매장 방법도 알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2) 윤종영(尹鍾永) 묘지(墓誌) ▷ 위치 안산시 초지동에 있었으나 반월공단이 들어서면서 이장하게 되어 1977년 겨울 후손들에 의해 개장(開葬)되어 유골은 화장되었다.
▷ 구조 윤종영 묘에서 출토된 지석은 모두 26장으로 각각의 크기는 19×17×6cm였고 형태는 직육면체이며 석회·세사·황토의 삼물을 잘 배합하여 만든 것으로 단단하였다. 표면은 전체적으로 0.1cm 정도의 두께로 적색의 점토를 발라 주황색을 띠고 있었다. 글씨는 앞면과 뒷면에 새겨 넣었는데 해서체의 글씨를 음각으로 새기고 그 안에 두텁게 먹을 칠해 놓았다. 앞면에는 피장자의 관직과 이름을 지석 1개당 글자 한 자씩을 새겼으며 뒷면에는 우측에서부터 종서로 세 글자씩 세 줄을 새겨 지석 하나당 9자의 글자를 새겨 놓았다.
윤종영 부인의 무덤에서도 10장의 지석이 발견되었다. 이 지석은 크기가 17×17×7cm이며 역시 삼물로 만들고 표면에 진흙의 슬립(Slip)을 발라 놓았는데, 앞면과 뒷면에 음각 글자를 새겼고 그 안에 먹으로 두텁게 칠해 놓았다. 역시 앞면은 글자 한 자씩, 그리고 뒷면은 우측에서부터 종서로 세 글자씩 세 줄을 써 모두 아홉 자를 새겨 놓았다.
▷ 역사 및 유래 지석은 무덤을 개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는데 모두 회곽 위에 놓여있었다. 앞면에 새겨진 글자는 “大韓從二品嘉善大夫行掌禮院少卿坡平尹公諱鐘永之墓亥坐”였고, 뒷면은 이 내용을 좀더 보완하는 것이었는데 그 내용은 “公坡平尹氏諱鐘永字稚世號貞石始祖諱幸達高麗太師八世祖諱趾完號東山右議政謚曾祖諱○郡守曾吏曺參議祖諱榮厚贈秘書院丞考諱琓進士曾內部協辨碑女比曾貞夫人昌寧成氏監贈內部協辨諱載崇女公生於憲廟己亥八月十七日甲戌進士辛卯大科癸巳陞通政辛丑嘉善修撰副校理正言掌令南學敎授工曹參議敦寧府都正同副承旨議官特進官掌禮院少卿洪州郡守順川郡守卽公內外職踐歷也光武九年六月二十日卒用七月什四日葬于草芝親山下亥原配貞夫人海州吳氏學生諱成默女育一男一女男承茂女適參奉徐丙宙早均承茂有三女長適李錫圭二幼”으로서 피장자인 윤종영의 가계와 약력이었다.
이에 따르면 윤종영은 자가 치세(稚世)이고 호는 정석(貞石)이다. 진사(進士) 완(琬)의 아들로 태어나 고종 28년(1891년) 신묘대과(辛卯大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정언(正言)·공조참의(工曺參議)·홍천군수·순천군수 등을 역임하고 광무 9년(1905년)에 죽었다는 내용이다.
윤종영 부인의 무덤에서 발견된 지석의 앞면 내용은 “貞夫人海州吳氏之墓亥坐”이고 뒷면은 “從二品少卿坡平尹公鍾永配海州吳氏考成默 延安李氏父校理尙愚舅進士琬姑昌寧成氏父監役載崇憲宗戊戌三月十一日生壬子十二月六日卒二十四日合定于草芝男承茂孫東哲幼”이었다. 그 내용을 약술하면 윤종영 부인인 해주 오씨는 헌종 4년(1838년)에 태어나 1912년에 죽었으며 초지리에 있는 부군과 합장하였다는 것이다.
(3) 경덕국사(景德國師) 묘지(墓誌) ▷ 위치 국립중앙박물관. ▷ 구조 점판암에 음각을 한 것으로 크기는 37×75×5cm이다. ▷ 역사 및 유래 고려 시대 왕사(王師)요 도승통(都僧統)이었던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이다. 제작 연대는 고려 문종 20년(1066년)이다. 글씨는 앞면에만 해서체 종서(縱書)로 한 줄에 13자씩 모두 261자를 새겼다. 그 원문 내용은 “九龍山福興寺故王師都僧統贈謚京德國師墓誌幷書國師諱爛圓俗性金氏其先安山郡人也故尙書左僕射諱兢弼祖也故檢校太師上柱國謚安平公諱殷傳父也故安孝國大夫人李氏 故中○使兵部尙書忠贊兄也故首座弘[ ]師也師自削周羅脫身于豪戚間遭遇累朝歷揚○주귀급순이보위왕사지혜화과자연성취찬위인중지사자의오호평이감옹이년병오종십월팔일시”였다.
경덕국사는 이름이 난원(爛圓)이고 성은 김씨로 그의 선계가 안산군(安山郡) 사람이다. 50세에 왕사(王師)가 되었으며 문종 20년(1066년)에 69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임시로 오룡산의 남쪽 기슭에 장사를 지냈다가 구룡산의 복흥사에 비탑(碑塔)을 세웠다. 경덕국사의 제자로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과 낙진(樂眞) 스님이 있고, 승도(僧徒)로는 창원(昶元)·준조(俊조)·응천(應闡) 등이 있다. 이 경덕국사의 묘지는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고려 시대의 묘지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경덕국사(景德國師)
고려 목종 2년(999) ~ 문종 20년(1066)
고려 시대의 왕사(王師). 본관은 안산(安山). 속성은 김(金), 속명은 난원(爛圓). 안산현(安山縣;현 안산시 장상동) 출신으로 아버지는 호부상서 김은부(殷傅), 형은 병부상서 충찬, 할아버지는 안산김씨 시조 상서좌복야 긍필이고 문종의 외숙부이며, 대각국사 의천의 스승이다.
문종 12년(1058)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왕사가 되었고, 도승통(都僧統)을 역임하였다. 문종 19년 5월 문종의 아들인 후(煦;의천, 대각국사)를 중이 되게 하였고 화엄교관(華嚴敎觀)을 가르쳤다.
구룡산(九龍山) 복흥사(福興寺) 주지를 지냈다. 죽은 후에 복흥사에 비를 세우고 시호로 경덕(景德)을 내리고 국사(國師)로 추존하였다. 그의 묘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사는 머리를 깎고 호척(豪戚) 사이에서 몸을 빼어낸 이후 여러 대에 걸쳐 계속 승계(僧階)를 높여나갔다. 예순에 이르러 왕사(王師)가 되었으니, 지혜의 꽃과 과실이 스스로 무르익어 사람 중의 스승이라는 찬상을 받았다.
아, 함옹(咸雍) 2년 병오년(문종 20, 1066) 10월 8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68세이고, 승랍은 57세이다. 매우 슬퍼하여, 모두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신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곧 그 달에 조칙을 내려 장례일을 돌보게 하여 오룡산(五龍山) 남쪽 언덕에 임시로 모셔두었다가, 다시 임자년(壬子年? : 문종 26, 1072 ) 10월에 비와 탑을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서북쪽 모퉁이[乾隅]에 세우고, 영해(靈骸)를 받들어 이 곳으로 이장하여 모셔두었으니, 순리에 따른 것이다.
문하의 제자들이 위업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이에 묘지(墓誌)를 짓는다.
구룡산(九龍山), 산 중에 빼어나고 경덕국사(景德國師), 스승 중에 으뜸이시다. 저 사찰에서 이미 성불(成佛)의 진리를 깨우쳤으니
이 영혼의 터전에서 또 평안히 하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5. 기타 유적-선정비군(善政碑群)
▷ 위치 안산시 안산동사무소 정문 앞에 세워져 있다. ▷ 구조 모두 4기인데 이 중 1기는 관찰사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이고 나머지는 군수 선정비이다. ▷ 역사 및 유래 이 비들은 원래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약 300m 지점인 옛 안산군 관아 입구의 도로변에 있었으나 1988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 군수 임세량(林世良) 선정비 ▷ 위치 선정비군의 가장 서쪽에 위치. ▷ 구조 화강암으로 만든 비신의 크기는 190×75×30cm이고 기대는 70×126×20cm이다. 비신에 몇 군데 총상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상태가 양호하다. 비개(碑蓋)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결실되었다. ▷ 역사 및 유래 비신의 전면에는 “郡守林公世良淸德愛民善政碑”라 적혀 있다. 이 비석은 숙종 31년(1705년)에 세워졌다.
(2) 관찰사 박종기(朴宗琦) 영세불망비 ▷ 위치 임세량 선정비 동쪽에 위치. ▷ 구조 비신의 크기는 135×52×21cm, 기대의 크기는 64×90×25cm이다. 역시 비신에 총상 흔적이 있다. ▷ 역사 및 유래 앞면에 “觀察使朴公宗琦永世不忘碑”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순조 27년(1827년)으로 추정된다.
(3) 군수 김철순(金徹淳) 선정비 ▷ 위치 박종기 영세불망비의 동쪽에 위치. ▷ 구조 비신의 재질은 화강암이고 크기는 135×52×21cm이다. 기대의 크기는 52×89×20cm이며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으나 조잡하다. ▷ 역사 및 유래 비석의 앞면에는 “郡守金候徹淳愛民善政碑”라 적혀 있고 뒷면에는 “丁亥十月 日立(1707년?)”이라 적혀 있다.
(4) 군수 이겸진(李謙鎭) 선정비 ▷ 위치 비군의 가장 동쪽에 위치. ▷ 구조 비신의 상태가 양호하며 크기는 128×44×17cm이다. 기대는 85×60×25cm인데 비신과 대좌의 홈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짝이 아니다. ▷ 역사 및 유래 비신의 전면에는 “郡守李公謙鎭淸德愛民善政碑”라 적혀 있고 뒷면에는 “崇禎紀元後三癸酉(1813년) 十一月 日立”이라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