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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科學)으로서의 시학(詩學)
김기림(金起林)
1. 고전적(古典的) 시학(詩學)
시학(詩學)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전(傳)하는 불유쾌(不愉快)한 인상(印象)은 그것이 주장 지금까지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이었던 까닭에 한 과학(科學)보다도 한 형이상학(形而上學)을 연상(聯想)시키는 때문이다.
과학(科學)으로서의 시학(詩學)의 성질(性質)을 밝히기 전(前)에 과학(科學) 아닌 시학(詩學) 내지(乃至)는 그것에 유사(類似)한 여러 가지 환영(幻影)을 써서 버리는 것이 옳겠다. 가령(假令) 여러 나라의 시인(詩人)의 일흠과 경력(經歷)과 일화(逸話)에 정통(精通)하고 또 그들의 약간(若干)의 시편(詩篇)을 암송(暗誦)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은 시(詩)의 과학(科學)과는 아모 인연(因緣)이 없는 한 박식(博識)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박식(博識)이 과학(科學)이 아닌 것은 조직(組織)된 방법(方法)과 체계(體系)를 갖이지 못한 때문이다. 또 시(詩)에 대하야 방언(放言)된 몇 개의 명제(命題)가 여러 사람에게 오해(誤解)되고 부연(敷衍)되어 몇 세기(世紀)를 거쳐가면서 한 실체(實體)와 같이 통용(通用)되군 했다. 가령(假令) 「월터어․페에터어」의 「시(詩)는 음악(音樂)의 상태(狀態)를 동경(憧憬)한다」는 말이 「시(詩)는 음악(音樂)을 동경(憧憬)한다」는 의미(意味)로 그릇 해석(解釋)되면서 시(詩)를 음악(音樂)을 맨드러버리자는 순수시(純粹詩)의 운동(運動)이 되기도 했다. 음악(音樂)의 상태(狀態)는 그러나 음악(音樂) 그것은 아니리라고 생각된다. 음악(音樂)이 비져내는 심적(心的) 효과(效果)는 그 질(質)에 있어서 혹은 시(詩)가 비져내는 효과(效果)와 같은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音樂)을 시(詩)를 맨든다든지 시(詩)를 음악(音樂)을 맨드러버린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意味)할까? 모오든 형이상학(形而上學)은 이해(理解)된다느니보다는 해석(解釋)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 의미(意味)의 다의성(多義性)속에 언제고 숨으려 한다. 객관적(客觀的)으로 검증(檢證)할 길 없는 이러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명제는 다만 발언자(發言者)의 한 의견(意見)으로서 이해할 것이고 결코 어떤 객관적(客觀的)인 사실(事實)의 기술(記述)이라고 받어서는 아니 된다. 한 의견(意見)으로서는 참고(參考)할 것이나 그것이 얼른 보아서는 대표(代表)하는 드시 보이는 일련의 사실을 가상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내가 여기서 「페에터어」를 예(例)로 든 것은 한 형이상학의 일이 만약에 오해된다고 하면 어떻게 심각한 결과를 나올 수 있는가를 우리들과 그리 멀지 않은 시사(侍史)에서 인증(引證)하려고 한 까닭이다. 「페에터어」는 물론(勿論) 시(詩)보다 음악(音樂)을 더 고위(高位)의 예술(藝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事實)이나 시(詩)와 음악(音樂)을 혼동(混同)하도록 현명(賢明)치 못하지는 않었다.
2. 가치와 형이상학
우리는 그러나 결(決)코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절멸(絶滅)을 기도(企圖)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시대(時代)에고간에 형이상학(形而上學)은 있어왔다. 또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형이상학(形而上學)은 조직(組織)된 가치의식(價値意識)인 때문이다. 위대(偉大)한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체계(體系)는 한 시대의 가장 보편적(普遍的)인 가치의식(價値意識)의 궁전(宮殿)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意味)에서 형이상학(形而上學)이 사람에게 지식(知識)이 아니고 생활하는데 유용(有用)한 지혜(智慧)를 제공한다는 말은 옳은 말이다. 다만 병폐(病弊)는 여기있다. 즉(卽) 지혜(智慧)에 지나지 않는 것이 지식(知識)으로 통용(通用)되려고 하고 또 수용(受容)되려고 할 때에 더 단적(端的)으로 말하면 시사(示唆)에 지나지 않는 것이 객관적(客觀的) 타당성(妥當性)을 주장(主張)할 때에 관념(觀念)이 과학(科學)이라고 하고 나올 때에 사실(事實)과 인식(認識)이 몽롱(朦朧)한 안개 속에 몰려가는 것이다. 가령(假令) 근대(近代)의 뭇 위대(偉大)한 형이상학(形而上學)이 우리에게 준 것이 지식(知識)이 아니었고 지혜(智慧)었다고 하는 것은 누구나 쉽사리 인정(認定)할 수 있다. 「쇼오펜하우어」가 그랬고 「베르그송」이 그랬다. 인간학(人間學)이라던지 실존철학(實存哲學)은 더욱 그렇게 보인다. 소위(所謂) 동양철학(東洋哲學)이라고 불러지는 것은 거지 열외(列外)없이 지혜(智慧)의 제시(提示)었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철학(東洋哲學)은 늘 시에 가까우려 한다고 임오당의 말은 옳다. 그러나 그는 또한 거기 반해서 동양철학(東洋哲學)은 늘 과학(科學)에 가까우려고 한다고 말한다. 우리 견해로는 파탄(破綻)은 철학(哲學)이 과학(科學)인 체하는 데서 오는 것 같다. 형이상학(形而上學)이 지혜(智慧)로서의 한계(限界)를 너머서 지식(知識)인 체 꾸미는 데 결계(結界)로는 사실(事實)의 인식(認識)을 혼란(混亂)시키고 또 사실의 인식 대신에 무수한 환영(幻影)을 사실의 주국(周國)에 흩어놓는다. 시(詩)를 학문(學文)의 대가(大家)으로서 취급(取扱)하려고 할 때에 위선 우리의 안계(眼界)에서 전래(傳來)하는 뭇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환영(幻影)을 물리치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3. 시론(時論)
시(詩)에 대한 진술(陳述) 가운데서 근본적(根本的)으로는 역시 형이상학(形而上學)의 단편(斷片)이면서도 학문(學文)의 모양(模樣)을 하지 않고 차라리 기술론(技術論)의 모양을 한 점(點)이 다를 뿐인 것으로서 시론(時論)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주로 한 유파(流波) 혹은 하 시인의 그 유파(流波) 또는 그 개인(個人)의 시(詩)의 합리화(合理化)다. 또는 한 개인(個人)이나 유파(流波)가 그가 있기를 원(願)하는 시의 가상(假想)을 그리는 것이다. 과법(過法)의 용어(用語) 예(例)도 시론(時論)을 구별해 왔다. 가령(假令) 「아리스토텔레쓰」의 시학(詩學)이라고 하면서 「보왈로오」의 시론(時論)이라고 하는 것 같은 것이 그것이다. 다만 시론(時論)은 체계(體系)의 완비(完備) 때문에 더 많이 상상(想像)이 드러가는 시의 형이상학(形而上學)들보다는 시인(詩人)의 작시(作詩)의 실제(實際)에서 비져나온 암시(暗示)가 풍부(豊富)한 점에서 더 유용(有用)하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한 유파(流波)나 개인(個人)의 시의 이해(理解)를 도읍기 위하야 그 시론을 들추어보는 것은 옳다. 그러나 어떤 암시(暗示) 이상으로 거기서 시(詩)의 과학(科學)을 찾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경계(警戒) 아래서 시론(時論)을 읽는 것은 여러 가지로 필요(必要)하다. 감상하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고 시사가(詩史家)에게는 좋은 사료(使料)가 될 것이다.
4. 어떻게 묻나?
시(詩)의 형이상학(形而上學)과 및 시론(時論)의 존재(存在) 이유(理由)와 가치(價値)를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은 과학(科學)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의 학적(學的) 설계(設計)에서 구축(驅逐)한 다음에 우리가 의도(意圖)하는 시(詩)의 과학(科學)이란 그러면 어떤 것인가?
시란 「무엇」이냐? 시는 「웨 있느냐?」이런 류(類)의 설문(說問)에 대해서는 우리는 여러 종류(種類)의 대립(對立)된 혹(或)은 모순(矛盾)된 해답(解答)을 예기(豫期)할 밖에 없다. 시(詩)에 대하야 정의(定義)를 나릴려고 계획한 과거(過去)의 모오든 시험(試驗)은 앞의 것과 같은 문제(門題)제출(提出)의 방식(方式)을 취(取)한 것이다. 그래서 그 여러 가지 정의(定義)를 통일(統一)할 일의(一意)적인 해결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바벨」의 탑처럼 그것은 소란(騷亂)했다. 그러고 뒤의 것과 같은 설문(說問)에 대해서는 당파(黨派)를 따라서 당파(黨派)의 수만치 많은 해답(解答)을 기대(期待)할 밖에 없을 것이다. 혹(或)은 정당(政黨)을 위해서 혹(或)은 교회(敎會)를 위해서 혹(或)은 정부(政府)를 위해서 시(詩)는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亦是) 「바벨」의 탑(塔)은 영원(永遠)한 혼란(混亂)을 갖어 올뿐이다. 이러한 문제(問題)제출(提出)의 방식(方式)은 말하자면 본체론적(本體論的)인 또는 목적론적(目的論的)인 성질의 것이다. 형이상학(形而上學)의 문제(問題)제출(提出)의 방식(方式)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것은 가령(假令) 「세계(世界)란 무엇이냐?」, 「인생(人生)은 신(神)을 위해서 있다」고 자문(自問)에 자답(自答)하는 것이 어떤 형이상학(形而上學)이었고 신학(神學)이었다. 그런데 그 명제(命題)들은 아모도 증명(證明)할 수는 없다. 중세기(中世紀)의 신학(神學)은 신(神)의 존재(存在)를 증명(證明)하는 몇 가지 삼단논법(三段論法)을 갖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다 전제(前提) 미결정(未決定)의 삼단논법(三段論法)이었다. 그러므로 교권(敎權)으로써 끊어놓지 않는다면 그것은 끝을 모르는 순환논법(循環論法)일 것이다. 십구세기(十九世紀)의 평단(評壇)을 그렇게 소연(騷然)케 한 「인생(人生)을 위한 예술(藝術)」파(波)와 「예술(藝術)을 위한 예술(藝術)」파(波)가 드디어 오늘까지도 해결(解決)을 보지 못하고 작가(作家)나 시인(詩人)을 가끔 괴롭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문제(問題)제출(提出)의 방식(方式) 자체가 잘못되었던 탓이다.
그러면 새로운 시학(詩學)은 어떤 모양(模樣)으로 무러야 될가? 그것은 「무엇」또는 「웨」와 같은 무름은 일체(一切) 버릴 것이다. 그것은 다만 시(詩)는 「어떻게」있는가 하는 무름에서 시작해서 거기서 끝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시에 대해서 무슨 환상(幻想)이나 이념(理念)을 그리거나 맨드는 것이 아니고 시(詩)의 사실(事實)에 실로 사실(事實)에만 육박한다. 그것이 설정(設定)하는 명제(命題)는 형식논리(形式論理)의 식에 맞느냐 않맞느냐 하는 점으로서 완전(完全)함을 자랑할 수는 없다. 다만 참이냐 거즛이냐 하는 점(點)에서만 긍정(肯定)되거나 부정(否定)된다. 그것은 시에 대한 아름다운 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詩)의 사실(事實)만을 가르친다. 명제(命題)들은 시(詩)의 사실(事實)과 한 번씩 비추어보아서 그 참이고 아닌 것을 결정(決定)한다. <이하 생략>
『문장』제 2권, 제 2호, 1940.2
구국문학론
구국문학론은 문맹이 기관지인 《문학》제7호 권두언으로 게재된 문화(문학)위기론에서 비롯한다.
누가 감히 예상하였으랴! 지금 우리는 문화위기의 내용으로 일제시대 우리 민족문화를 억압 말살하고 퇴폐적인 반동문화를 조장하는 연장으로 사용되었던 일제적 악법이 수차로 부활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영화법령, 국대안, 공연법, 출판관계법령 중에 표시된 비민주적인 법규와 반인민적 관료통제의 사상은 일제시대의 그것과 대비하여 어느 형안이 있어 까마귀의 자웅을 판별할 수 있을 것이랴.
--- 권두언, <문화의 위기>, 《문학》, 1948
문맹은 일제하에 가장 배족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순수문학·민족주의가 이제는 희대의 매국적 음모에 가담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남조선에 있어 문화의 위기를 극복하고 민족문화·문학의 건설이 대도를 열기 위한 문화인·예술가의 모든 투쟁을 조국의 위기를 지양하고, 통일조선을 전취하는 거대한 거족적 구국투쟁의 일부분이 되고 있다는 데에 문한운동의 의의와 사명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문학』제8호 권두언인 「구국문학의 방향」에 이르러 더욱 구체화된다. 구국문학론은 5·10단선과 결부된 외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단정분쇄, 양군철퇴, 자주적 남북통일, 반파시즘 등에 적극 호응하고, 이에 따른 작품수준을 한결 내질화 시키려는 의도의 방향성과 타개책이 설정되어 있다.
이 권두언을 발표한 무렵에는 조선중앙일보의 구국문학론 특집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중이었다. 조선중앙일보는 1948년 6월 20일에서 7월 11일까지 「구국문학의 이론과 실천」이란 제하의 특집을 무려 17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었다.
문학이 구국투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거의 일치된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문맹의 내부방침이 수립되지 않았고 구성원 간의 자의적인 견해도 심했다. 방법론의 부재와 혼선으로 인해 논의의 구심점을 상실한 것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고 나선 김영석은 문학의 위기가 우익 정치세력의 공세에 의한 위기이지 문학자체의 내재적인 위기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문학운동을 포기하면서 구국운동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은 소박한 견해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또한 그는 <문맹> 지도부가 조직사업에 대해 매우 피상적인 개념밖에는 갖고 있지 못했을 뿐 아니라 또 그에 주력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때문에 일부에선 오직 창작을 통한 실천만을 중시하는 과오가 거듭되어 왔다고 지적한 다음 그는, 오늘과 같은 위기의 상황에서 창작적 실천에 앞서 조직운동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점을 부언한다.
정진석은 구국문학론의 논의의 초점을 순수문학 비판에 두고 있다. 그는 「순수의 본질」이란 글에서 우선 구국문학을 오늘날 민족적 위기를 당면하여 외래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한 민족의 노예화를 방어하고 주권을 회복하여 통일 독립 자주적인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데 봉사하려는 사상적 내용을 가진 문학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문학이란 언어라고 하는 형상적 사유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반영하는 것이다. 이를 단순한 정서감염의 수단으로 보면서 인간의 감정을 사유와 형상에서 분리시키는 순수문학은 문학을 상아탑 속에 몰아 놓고 문학의 구국적 역할을 봉쇄하는 본질적인 기만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정진석은 순수문학이 단선단정을 주장하며 항구적인 민족분열과 남조선의 식민지화를 획책한다는 점에서 한 마디로 매국적인 반동문학의 지조가 된다고 잘라서 말했다. 그렇다면 구국문학이란 "조선의 민족분열과 외국식민지화의 위기에 당하여 민족주의적 통일자주독립의 주권을 회복하려는 민족해방운동에 봉사하는 문학"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구국문학론은 대한민국정부수립을 목전에 두고 1948년 여름날 열화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여기에 찬물을 부은 것이 바로 조연현의 「구국문학론의 정체」였다. 그는 구국문학론을 초민족적인 문학론, 비구국적 정치주의적 문학론으로 규정하면서 비판하였다.
그밖에도 이 논의엔 안회남, 설정식 등이 참가하고 있었지만, 구국문학이라고 해서 특별한 이론상의 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