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엽풍란의 뿌리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창가에 놓인 대엽풍란을 바라본다.
두툼한 잎들이 서로의 어깨를 낮게 포갠 채 한 덩어리로 모여 있었다. 잎맥 위로 번진 빛은 젖은 비단처럼 얇게 미끄러지고, 바람이 지나가도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림은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고, 이내 다시 제 자리로 되돌아왔다. 처음에는 그 고요한 균형만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시선이었다. 위로 드러난 것들만을 읽어내는 관성.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시선은 서서히 아래로 내려앉았다.
화분의 가장자리 틈. 그 좁은 어둠을 밀어내며 뿌리들이 밖으로 흘러나와 있었다. 흙 속에 감추어져야 할 것들이 공기 속으로 떠오른 것이다. 마른 결이 굳어 있었고, 색은 오래된 나무껍질처럼 바래 있었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결코 죽어 있는 형상이 아니었다. 서로를 얽고 감으며, 보이지 않는 곳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 그 긴장이 오히려 생명의 다른 이름처럼 느껴졌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잎이 빛을 받아내는 일, 물을 머금는 일은 단지 표면에서 일어나는 결과일 뿐이었다는 것을. 그 모든 결과의 시간은 아래쪽 어둠에서, 누구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는 것을. 흙 속의 시간은 소리 없이 겹겹이 눌려 있었고, 그 압력 위에서만 잎은 저렇게 단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 뿌리 앞에서 오래 멈춰 섰다.
그것은 단순한 기관이 아니었다. 흙을 뚫고 나온 어떤 ‘부분’이 아니라, 버틴 시간의 형상처럼 보였다. 자리를 옮기지 않은 채, 오히려 스스로를 늘려가며 공간을 붙잡고 있는 흔적. 살아 있다는 것은 어쩌면 움직임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은 채로 끝까지 남아 있는 방식일지도 몰랐다.
사람의 삶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쉽게 결과를 먼저 본다. 단정한 말투, 무너지지 않는 표정, 조금은 정돈된 성취. 그러나 그 표면을 지탱하고 있는 시간은 언제나 다른 층에 있다. 이름 붙여지지 않은 반복, 아무도 계산하지 않는 인내, 스스로조차 지나쳐버린 무수한 흔들림의 흔적들.
대엽풍란의 뿌리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드러난다. 의도를 가지고 드러난 것이 아니라, 버티는 동안 자연스럽게 밖으로 밀려 나온 시간의 결. 침묵이 굳어 형태가 된 것처럼, 그 자체로 하나의 기록이 되어 있었다.
나는 오래도록 그 뿌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삶의 바닥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문장이 아니라 감각으로 밀려왔기 때문이다. 이해가 아니라, 아주 낮은 곳에서 올라오는 체온 같은 인식이었다.
잘 자란다는 것은 위로 뻗어 오르는 일만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아래로 내려가는 일, 보이지 않는 자리로 더 깊이 스며드는 일, 스스로를 붙잡아 두는 시간의 밀도를 견디는 일일지도 모른다. 성장이라는 말은 언제나 조용한 방향을 먼저 통과한 뒤에야 모습을 드러낸다.
창가의 빛이 천천히 기울었다.
잎은 여전히 단정했고, 뿌리는 여전히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서로를 놓지 않은 채 얽혀 있었다. 움직임은 없었지만, 그 정지 속에는 오래된 진행이 있었다.
달라진 것은 식물이 아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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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첫댓글 '뿌리 깊은 나무'를 생각하고 돌이나 고사목에 길게 뿌리를 붙이고 사시사철 태연자약한 대엽풍란을 떠올려 봅니다.
대업풍란의 생존전략은 신비하기만 하더군요.
선수필에 실림.
풍란에 영감을 얻어 풀어가신 것도 압권이네요. 사물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탁월하신 거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몇 번 더 읽어 봐야겠습니다.
열심히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니 고맙습니다.
대엽풍란
대엽풍란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앉는 과정이 매우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입니다.
표면의 ‘고요한 균형’만 보다가, 점차 그 균형을 지탱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얽히고 설킨
‘뿌리의 긴장’을 발견해 내는 관조의 안목이 돋보입니다.
뿌리를 단순한 식물의 기관이 아니라 '버틴 시간의 형상'으로 바라봅니다.
마지막에 빛이 기울며 풍란은 그대로인데 달라진 것은 식물이 아니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였다 로 맺는 여운은, 삶의 바닥을 조용히 돌아보게 만듭니다.
침묵이 굳어 형태가 된 풍란의 뿌리처럼, 청석님 삶의 軌跡과 내면의 밀도가
고스란히 整齊된 문장으로 피어난 流麗한 작품입니다. ^^
이 작품을 뒤늦게 보셨군요.
화분이 넘어져 깨졌는데 보니 뿌리가 어리저리 많이 엉켜있더군요.
눈에 보이는 모습은 평온한데 아래서는 치열한 생존투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