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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묵어가고 싶은 알레만 부부의 '까사 벨렌'
간절히 바랐으나 전혀 먹히지 않은 밤이었다.
쿠션 좋은 더블베드의 독방이 무슨 의미있는가.
사경(四更)이 넘어 간신히 든 잠도 토끼잠이었을 뿐이니.
1센트도 지불할 필요 없는 안락한 내 집을 두고 이게 무슨 꼴인가.
2015년 5월 25일 월요일.
먼동이 트기를 기다릴 정도로 일찍 기상하여 출발했다.
마을길(C./Nueva)을 흡수한 AS-263지방도로로 개천에 불과한 강(Rio de Nueva)을 건넜다.
어제 석양에 미리 확인한 대로 철도(Feve) 건널목 바로 앞에서 우회했다.
그러나 철길과 함께 걷기도 하고 고속도로(A-8,E70)와 평행하는 센다(senda/샛길)를 걸어야
하는데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시간의 자욱한 안개가 훼방을 놓았다.
바스크에서 지방어 때문에 난처했다면 아스뚜리아스에서는 까미노마커 부족으로 애를 먹고
있는데 이 아침에는 안개까지 가세했으니.
들판의 우거진 풀숲길로 잘못 들어선 것이다..
아침 이슬에 젖은 아랫도리가 소나기 맞은 것과 다름 없을 만큼 되어 간신히 까미노를 찾았다.
AS-263지방도를 따라 삐녜레스 데 쁘리아(Piñeres de Pria)에 도착함으로서 방황이 끝난 것.
주민수가 100명 미만인 작은 마을 삐녜레스는 누에바에서 2.5km 쯤 되며 야네스에 속한 마을
쁘리아(Pria)의 자연마을이다.
이 마을의 알베르게 라 요사 꼬스메(Albergue La Llosa Cosme) 앞에는 '산띠아고 405km'
라는 안내표가 붙어있다.
어느 가이드 북에는 뽀(Poo) ~ 리바데세야(Ribadesella) 구간을 노르떼 길 총 867km중 정
중간(432.5 : 434.5)으로 표기되어 있다.
어느 쪽이나 모두 이 마을이 중간지점을 넘어선 곳임을 의미한다.
또한, 초반에 나태한 편인 내게 분발을 독려하는 사인(sign)일 것이다.
어제부터 내 관심은 꾸에레스(Cuerres)의 사설 알베르게 '까사 벨렌'(Casa balen)이다.
고지대의 산 뻬드로 교구교회(Iglesia de San Pedro de Pria)와 저지대의 엘 꼬야우 예배당
(Ermita de El Collau)을 지나 걸음을 재촉했으니까.
노르떼 길은 페베 철도가 지나가는 벨몬떼 데 쁘리아(Belmonte de Pria)를 지나고 중세의 돌
다리(Puente Romano)가 있는 구아다미아 강(Rio Guadamia)을 건너 꾸에레스에 진입한다.
지자체 야네스가 끝나고 지자체 리바데세야(Ribadesella)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리오 구아다미아는 이 두 지자체의 경계가 되는 강이다.
로마노 다리에서 지호지간인 까사 벨렌에 당도한 시각은 아침 8시 반쯤.
뻬레그리노들이 모두 길떠난 후의 한적한 시간일 때다.
출입문은 잠기지 않았으나 적막강산인 실내.
아마, 아침 먹여 떠나보내느라 새벽같이 일어났기 때문에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중일 것이다.
볼륨을 높여가며 소리친 몇번의 '디스꿀뻬'(disculpe/excuse me)에 반응한 초로의 장신남.
잠자리에서 나온 듯 취침용 가운을 입은채인 그를 뒤 따라 장신녀도 가운 차림으로 나왔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만 미인형 용모에 상냥하고 해맑은 미소가 매력적인 여인이다.
알레만(Aleman/독일인) 부부인 그들, 만프레트 와 비르키떼(Manfred and Birgitte)는 때아닌
(이른아침의) 극동의 늙은 방문객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모두 떠나가는 시각에 찾아왔으니 그럴 수 밖에.
어제 도착하고 싶었으나 여의치 못한 내 사정을 들은 그들은 새삼 반가워하고 만프레트는 내
아침식사까지 차려냈다.(빵 한 쪽에 차 한 잔이지만)
자기 집의 빈방 2개를 뻬레그리노스를 위해 내놓았단다.
각 방에 4명씩 최대 8명이 가족처럼 자기네와 함께 식사하며 편히 묵어가게 한지 4년째란다.
도나띠보(Donativo/donation/기부제)로 운영하고 있는데 초로의 독일 부부가 왜 이역 스페인
땅에서 이 일을 하고 있을까.
동기를 말하기는 피하면서도 꼬레아와 81세 늙은이에는 관심이 많은가.
묻기를 나보다 더 많이 했으니까.
만프레뜨는 나를 뜰로 안내했다.
꽤 넓은 뜰에는 미니 미사실(Capilla)과 휴게실이 있다.
취침룸은 공실을 활용하는 것이겠지만 신앙과 여가를 위한 부속실은 신축했을 텐데 정원 8명
이라는 미니 숙소에 이같은 시설을 갖춘 부부의 열의와 성심에 고개가 무거워졌다.
어제 다소 무리해서라도 여기까지 왔더라면 오카리나로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를 연주하는 밤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뭉클했다.
까미노에서 나는 알레만들로부터 가장 많은 질문을 받는다.
지금은 아니지만 같은 처지였던(분단) 그들에게 여전히 분단국인 꼬레아는 특히 관심국이고
두 다리만으로 까미노를 걷는 81살 늙은이는 기인으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참으로 많이 알려고 하는 그들의 이성적인 머리에 경탄하는데 내게도 단골 질문이 있다.
까미노 도처에서 보게 되는 하켄크로이츠(Hakenkreuz/옛 나치의 상징.갈고리십자가)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알고 싶은 것.
이 아침에도 듣고 싶었으나 이른 아침의 질문으로는 무거울 것 같아서 접고, 하룻밤 묵어가고
싶은 아쉬움을 안은채 까사 벨렌을 떠났다.
주민이 150명쯤 되는 꾸에레스는 아스뚜리아스 주(아스뚜리아스 지방)의 지자체 리바데세야
에 속한 아홉 교구 중 하나인 꼬예라(Collera)의 자연마을이다.
까미노 거개가 그러하듯 노르떼 길도 교회(Iglesia de San Mamés)를 거쳐서 서진한다.
철로를 건너서 철로와 나란히 가고 마을길을 따르면 또리에요(Toriello/아스뚜리아스 지방어
Torriellu)에 이른다.
꾸에레스 처럼 꼬예라의 자연마을이다.
아스뚜리아스의 평창동에는 왜 눈살 찌푸리게 하는 경고판이 없을까
또리에요~리바데세야 역 까지의 노르떼 길 5km정도는 서북쪽을 향해서 페베 철도와 AS-263
지방도, 마을길 등을 바꿔가며 넘나들고 오르내려야 한다.
페베 역사(Estacion de Ribadesella)에서 세야 강(Rio Sella) 입구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다.
직진하면 더 가까울 텐데 노르떼 길은 우측에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산따 마리아 막달레나 교회
(Iglesia de Sta. Maria Magdalena)로 우회하게 되어 있다.
까미노의 개설 당시에는 지금처럼 대로들이 없었으며 교회경유 원칙(?)을 따르느라 그랬을터.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나도 그 길을 따르기는 행으나 다수의 첩로(捷路)가 있는 이 시대에
옛길을 고집하는 것은 무의미한 도로(徒勞)일 것이다.
교회에서 북서쪽 끝 해안(Punta del Caballo)의 꼬르베루(Corberu) 산으로 가다가 포기했다.
대서양의 돌풍을 막아주는 마을의 수호산이며 정상의 예배당 라 비르헨 데 라 기아(Ermita de
la Virgen de la Guia)에 관심 있지만 빠듯한 시간에 해발103m의 높이가 부담되었으니까.
다리 지근, 세야 강가의 잘 꾸며놓은 관광안내소(Oficina Municipal de Turismo de Ribade
sella)에 들렀으나 '루네스 쎄라도'(Lunes cerrado/월요일은 휴무)란다.
관광객이 몰리는 일요일에 근무하기 때문에 평일의 휴무가 불가피한 점은 이해하나(우리나라
에서도 월요일 휴무) 휴무일이 지자체 따라 달라서 혼란스럽다.
알폰소 10세(1221~1284)가 많은 집을 지었다니까 13c에 취락이 형성된 마을이지만 현존하는
건물들은 대개가 17c ~ 18c 작품이라는 기초지자체 리바데세야.
그래서인지 누에바와 비슷한 느낌을 주며 3천여명 인구(9개의 부속 마을 전체는 2015년 현재
5904명)의 초대형 마을인데 물 맑은 강가의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에 더하여 바게트 한 토막을 아침 겸 점심으로 먹었으니 뭘 더 바라겠는가.
N-632국도가 된 세야 강 긴 다리를 건넜다.
노르떼 길은 우측의 꼬로넬 브라보 길(C./del Coronel Bravo)을 따라 세야 강 하구의 리바데
세야 항(Puerto)을 지나서 산따 마리나 해변(Playa de Santa Marina)으로 이어진다.
이 해안로 일대는 인디아노풍이라는 화려한 건물이 즐비한 지역이다.
별장과 호텔을 비롯한 위락시설이 소위 쩐 냄새를 물씬하게 풍기지만 우리나라 평창동 일대를
비롯해 북한산 둘레길에 붙어서 눈살 찌푸리게 하는 경고판(?/아래) 같은 것이 왜 없을까.
". . . . 마을을 통과하는 구간. . . . 마을 주민의 주거생활 보호를 위해서 조용히. . . ."
". . . . 제발 버리지 마세요." 등등
얼마나 소란하고, 버리고 가는 쓰레기가 얼마나 많기에 이리 요란을 떠는 것인가.
둘레길 종주자는 하나같이 목청껏 소리지르거나 집안 쓰레기를 들고 나와 버리기라도 하는가.
연간 1만에 육박하는, 문화가 각기 다른 지구촌 사람들이 지나가기 때문에 불편한 점이 적지
않을 텐데도 여기 사람들은 왜 불평불만을 토로하지 않는가.
15만명 이상이 누비고 가는 프랑스 길의 마을들에도 오직 식수(agua) 안내판이 있을 뿐이며
내가 걸은 6천여km 까미노 어디에서도 볼썽사나운 '부탁'은 보지 못했다.
긴(長) 산따 마리나 해변은 건너편의 꼬르베루 산이 이 마을(Ribadesella)의 수호산임을 수긍
하게 하는 최근 거리의 해수욕장이다.
리바데세야 항의 천연 방파제일 뿐 아니라 천연 방풍벽이니까.
노르떼 길은 해변(Santa Marina) 끝 지점에서 안또니오 마차도 길(C./Antonio Machado)을
따라서 붉은 주택단지(Astursella)를 지난다.
산 뻬드로로(Ctra. de San Pedro)를 따라서 로터리를 지나는데 로터리 중앙에 웬 어선이?
쓰나미(つなみ/津波)가 몰려왔다는 기록이 없는데 장식용인가.
캠핑장(Camping los Sauces Playa) 옆으로 해서 계속 직진하면 산 뻬드로(San Pedro)다.
인구가 390쯤 되며 지자체 리바데세야에 속한 마을 레쎄스(Leces)의 자연마을.
까미노에서 벗어나 있으나 지근인 왼쪽의 산 뻬드로 예배당(Ermita de San Pedro)에 들렀다.
역시 왼쪽 500m라는 산 에스떼반 데 레쎄스(San Esteban Leces)에도.
N-632국도가 통과하나 주민이 21명 뿐인 미니 마을인데도 알베르게가 있으므로 이 일대에서
마감하는 뻬레그리노에게는 꼭 필요한 마을이다.
나는 산 에스떼반 교구 교회(Templo de San Esteban/Iglesia de San Esteban de Leces)
의 인력에 끌려서 였는데 전망이 좋기는 해도 해발110m가 넘는 고지대에 있을 줄이야.
13c에 건축한 옛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었으나 스페인 내전(Guerra Civili) 때 피해를 입어
1958년에 재건축했단다.
스페인에 서-남-동 길 닦다가 잡쳐 버렸다
다음 마을은 아베오(Abeo/아스뚜리아스 지방어는 Abeu).
주민 40여명의 미니 마을이며 산 에스떼반과 함께 레쎄스의 자연마을이다.
지루하지 않게 구불거리고, 힘 들지 않을 만큼 완만하게 오르내리는 시골길 마을.
눈의 피로도 덜어주는 파란 목초지 길이 베가(Vega) 한하고 계속된다.
날씨도 이즈음의 여느날과 달리 무덥지 않고 청명했다.
비록 2km 미만의 단 거리지만 모처럼 룰루랄라, 흥겹고 경쾌한 기분으로 걸으니 마음이 비단
같이 곱고 부드러워지며 마치 득도의 경지에 이르기라도 한 듯 초연해지는 느낌이었다.
까미노에서 이같은 감정에 잠기기는 초유의 일로 쉴만한 자리를 찾아 오카리나를 꺼냈다.
이런 때에 부를 만한 더 알맞은 노래를 익혀오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해도 내 18번인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상기된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몇번이나 반복했다.
나의 사계절 전천후 애창곡이며, 특히 저번부터 까미노의 주제곡이 된 노래다.
초기 아메리칸 멜러디(Early American Melody)에 노예매매업자에서 목사로 거듭난 존 뉴턴
(John Newton/1725~1807:영국)이 가사를 붙인 기독교 찬송가다.
인구가 100명 미만의 작은 마을 베가(Leces의 자연마을)를 통과하는 노르떼 길은 막달레나
예배당(Ermita de la Magdalena)과 규모가 꽤 큰 구에유 마르 식당(Güeyu Mar)을 지난다.
곧, 다시 해변(Playa de Vega)이다.
그러나, 광대하기는 해도 이제까지와 달리 꼬스따 길에서 뒤쳐진다 할까.
그래도, 길 아닌(없는) 바닷가에 길을 만들며 걷던 우리의 서해를 그리며 기존 길을 무시하고
백사장 따라서 진진했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까미노를 찾느라 헤매야 했다.
공연한 짓으로 체력과 시간만 낭비하고 원점으로 돌아왔다.
모처럼 부드러운 흙길을 밟지만 어떤 정감을 느낄만한 기분은 이미 증발해버렸고 오늘의 목표
인 라 이슬라(La Isla)가 멀게 느껴질 정도로 체력이 급감했다.
반동을 일으키지 않고 고분고분 길을 따를 수 밖에 없도록.
스페인에 서-남-동 길(메뉴 '서-남-동 길'참조)을 닦다가 잡쳐버렸다.
해변의 목초장길이지만 흥취 만점의 조금 전 길과 달리 조잡하다고 느껴지는 까미노였다.
오랜만에 목장의 철문을 드나드는데도 출입문을 닫아달라(CIERREN LA PORTILLA)는 당연한
당부가 눈에 거슬릴 정도로 내 기분은 엉망이 되어 있었으니.
하긴, 이같은 부탁(por favor)마저도 부담되는지 자동으로 닫히는 문을 설치한 목장주도 있다.
야멸차게도 철조망으로 막고 "사유지라 출입할 수 없다" 는 우리나라의 땅 주인들과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지만.
N-632국도에 진출했으나 즉시 떠나라고 지시하는 까미노마커(노란화살표, 가리비기둥 기타).
1km쯤 되는 베르베스(Berbes)까지 국도로 가도 되지만 노르떼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베르베스는 주민이 90명도못되는 작은 마을이지만 지자체 리바데세야의 9교구 중 하나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산따 마리나(Santa Marina) 축제가 열리는 교구교회(Parroquia de San
ta Marina가 마을 안에 있는데도 마을을 통과하는 까미노가 왜 교회를 거쳐가지 않는지.
베르베스를 나온 까미노는 꼬불꼬불한 국도(N-632)를 드나들며 까라비아(Concejo de Cara
via/La Espasa) 땅에 들어선다.
북쪽의 비스까야 만과 동.남.서로 리바데세야, 빠레스(Parres), 꼴룽가(Colunga)등 지자체들
사이에 위치하며 전체 인구가 600명도 못되는 아주 작은 지자체(아스뚜리아스 주)다.
또한, 2개의 교구(Parroquia/Caravis Alta와 Caravia Baja)로 되어 있는데 노르떼 길은 전자
(알따)에 진입하여 후자(바하)를 떠난다.
작은 레굴라 강(Rio de la Regula)을 건너 알따의 숲길이 된 까미노는 다시 모리스 사장(沙場
/Arenal de Moris)으로 이어졌다가 목초장 길로 올라선다.
까라비아 개울(Arroyo de Caravia)을 건너 광활하게 펼쳐지는 목초장 길을 따라서 베씨에야
해변(Playa de la Beciella)으로 해서 모라쎄이 해변(Playa de Moracey)으로 간다.
이후 에스빠사 해변(Playa de Espasa) 한하고 백사장과 숲의 길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노르떼의 꼬스따 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라 하나 고백하건대 조금
전의 공연한 헛수고로 인해 체력이 바닥난 내게 아무 감흥도 주지 못했다.
늙은이 사정은 늙은이가 안다?
에스빠사 강(Rio Espasa)을 건너면 지자체가 꼴룽가(Colunga)로 바뀐다.
꼴룽가의 교구 마을 라 이슬라(La Isla)로.
2014년 현재 180명의 주민이 거주한다는 해안 마을이다.
나는 라 이슬라를 가리키는 까미노마커 찾기에 급급했다.
30km를 넘겼지만 공연한 짓만 하지 않았다면 체력이 아직 여유로웠을 텐데.
이 때의 내 걸음은 오랜 세월 동안에 반복을 통해 단련된 관성효과(慣性效果)였을 뿐이다.
체력이 웬만큼만 남아 있다면 바리곤 해변(Playa Barrigon)을 거쳐서 라 이슬라 해변(Playa
de La Isla)으로 갔을 것이지만 편한 N-632국도를 따르다가 이슬라 마을길로 들어섰다.
동구(洞口)의 좋은 위치에 알베르게가 있으나 20€가 넘는 사립이다.
내 목표 알베르게는 5€의 공립(Albergue Municipal La Isla)인데 먼저 도착해 입실을 마친 낯
익은 중년 에스빠뇰이 안내했다.
숙소는 마을 끝에 있으나 초입부에 있는 접수 창구로.
그러나, 이미 꼼쁠레또(completo/만원)란다.
해는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5시가 넘은 시각이다.
크지 않은 알베르게(18bed?)에 아직껏 공(空) 베드가 있겠는가.
왔다가 돌아가기도 하지만 도움을 청하는 뻬레그리노스가 늘어갔다.
나는 알베르게 경내에 천막집을 지을 요량으로 오스삐딸레라(hospitalera)에게 양해를 부탁
했으나 75세 나이에 비해 무척 늙어 보이는 그녀의 'No'가 단호했다.
대안이 마땅치 않은 나도 계획을 철회할 형편이 아니었다.
75세 노녀(señora)와 81세 영감(Coreano)의 터무니없는 힘 겨루기?
노녀는 어딘가에 전화를 했고 얼마 후에 달려온 승용차에 몇명의 뻬레그리노스를 태워 보냈다.
아마도, 알베르게가 만원일 때 종종 활용하는 민박집인 듯.
모두 떠난 후 내 나이를 물은 오스삐딸레라는 5€를 요구하며 접수부의 빈 칸을 채우란다.
내 잠자리가 있다는 뜻 아닌가.
마을의 지형이 해안에서 해발19m까지 경사면이기 때문에 알베르게가 자리한 곳은 고지대다.
완만한 비탈길을 나와 동행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절반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노녀(老女).
비어있는 베드는 없고 늙은이가 천막에서 밤을 보내는 것을 차마 볼 수 없기 때문에 No했는데
고집 불통의 늙은이임을 간파한 그녀는 비상용 베드를 만들어 주려 한 것이다.
유유상종하듯 늙은이 사정은 늙은이가 안다?
도착한 알베르게에서는 프랑세스 영감들, 에스빠뇰 초로들을 비롯해 국적은 모르지만 낯 익은
얼굴들이 환영하면서도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내가 묵을 베드가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일거에 바꾸겠다는 듯 한쪽 코너의 응접 소파를 뒤집고 추가적 조치를 한 노녀.
한 순간에 완벽한 싱글 베드가 탄생했다.
간이 식탁들이 있는 주방과 분리되지 않은 넓은 홀인 것이 흠일 뿐 큰 방에 빽빽하게 들어있는
베드보다 우월하고 우아한 침실이다.
일제히 박수로 축하해 주고 다가와서 악수로 좋은 기분을 나누는 그들.
나는 그들을 단지 낯 익은 얼굴 정도로 알고 있지만 꼬레아는 모르면서도 킴 할아버지(abuelo
Kim)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그들이 새삼 가족처럼 느껴졌다.
전번을 합하여 100일에 달하는 까미노 생활에서 최초의 감정이다.
반동을 획책하는 밤
이같은 체험은 다른 문제점도 지적하고 있다.
노녀가 자기네(에스빠뇰) 끼리 가진 대화가 내게도 들렸는데 오첸따 이 우노(ochenta y uno/
81)는 처음이기 때문에 어떤 대책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당황되었다는 내용인 듯 했다.
장애인 방이 따로 있는 알베르게는 더러 있지만 상 늙은이의 방은 나도 아직 보지 못했으니까.
한데, 이 밤의 이 알베르게 숙박자는 75세와 70세인 프랑스 두 영감을 포함해 초로인 60대와
50대 장년이 대부분인데 그들이 모두 준족인가.
이미 '16회글'에서 지적했듯이 성수기(peak)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열차와 버스, 심지어 택시
까지 이용해 일찍 도착함으로서 알베르게를 선점하는데 이를 막을 방법이 있는가.
나 같은 늙은이에 대한 대책은 어떻게 세워주겠지만 젊은이들은?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가.
나 편하면 됐지 남 걱정해 주고 있을 처지가 아니잖은가.
우아하게 편하다고 느껴졌던 베드가 한 순간에 가시방석으로 변해버린 듯 하여 밖으로 나갔다.
어두운 밤이라면 불가항력이겠으나 흑암이 나래를 펴기 시작하는 밤 8시 반까지는 2시간 이상
남았으니 무작정 밖으로 나갈 수 밖에.
그 사이에, 지쳐있었다는 것이 거짓말일 정도로 몸이 말짱해졌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내 체질은 여러 면에서 특이하다는 것이 내 지인들은 물론이고 까미노에서도 회자될 정도다.
취침 시간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짧은데다 토끼잠이며 까미노에서 내가 식사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는 말이 나올 만큼 먹는 것이 소량이다.
게다가, 체력 또는 의지로 걷는 것이 아니라 관성으로 걸어질 정도로 지쳐있다 해도 지금처럼
지극히 짧은 시간의 휴식으로 회복이 완성된다는 점 등등....
라 이슬라 해변(Playa de La Isla)으로 나갔다.
'이슬라'는 섬(島/island)을 말하는데 옛날 어느 때는 이 마을이 섬이었던가.
"라 이슬라 ~바리곤 ~모라쎄이 ~베씨에야" 로 이어지는 해변의 일그러지고 지저분하게 느껴
지는 자잘한 바위들은 아마도 해식으로 인해서 일 것이다.
고운 금모래에 비해 매력적이지 못한 라 이슬라 해변해서 발길을 돌렸다.
아마, 이 시간에는 아무리 오묘하게 아름다운 것이라도 추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마을 초입부에 있는 산따 마리아 데 또나 교구 교회 (Parroquia de Santa Maria de Tona)에
들른 후 마을을 배회하다가 아스뚜리아스 역내 지도를 보게 되었다.
무심코 보는 중에 충격적인 발상이 떠올라 급히 숙소로 돌아왔다.
라 이슬라를 떠나는 내일(5월 26일) 아침의 반동을 획책하기 위해서.
까미노 레알(Camino Real/正道)을 이탈하겠다는 것이다.
내륙의 산간길인 소위 정도의 전반부(前半部)를 버리고 미지의 해안길을 걷겠다고.
아니다, 내가 획책하는 해안길이 오리지널 까미노 레알일 가능성이 있다고.
뽀르뚜 길 '바르쎌루스~뽄떼 드 리마' 구간이 통째로 바뀌었으며(메뉴 '까미노이야기' 57번글
참조) 수 많은 곳에서 까미노가 대체되었고 이 작업은 지금도 진행형이지 않은가.
주방 안팎에서 비노(vino/wine)잔을 나누던 노장(老壯)들이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반겼다.
술잔을 받느라 여기저기에 불려다녔는데 저번에 걸은 프랑스 길 뽄페라다(메뉴 '까미노이야기'
22회글참조)의 밤을 연상하게 했다.
늘 그러하듯 그들의 관심은 이 늙은이의 여정이다.
아주 가깝게는 내일의 노르떼 길이고 멀게는 까미노 전체의 여정.
에스빠뇰이야 자국의 길이고, 프랑세스나 알레만도 인접국이므로 큰 문제가 아니지만 대륙을
달리하는 나라의 순례자들에게는 중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까미노 데 산띠아고 전체 코스(7개) 중 남은 4개와 파띠마를 포함한 뽀르뚜 길의 역코스
기타 총 4천km에 180일 여정이며 내일은 정통 코스를 버리고 해안로를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궁금해 하는 것을 풀어주었을 뿐인데 기가 막혔나 한 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는 그들.
살래살래, 갸우뚱, 과연 가능할까 반신반의의 표정이면서도 부엔 까미노를 합창하듯 연발했다.
한데, 이 일련의 정겹고 감동적인 장면이 정녕 그들 모두와의 이별을 의미했는가.
흉금을 털어놓지는 아니했어도 적어도 한 두번 이상 한 알베르게에서 동숙했을 저들인데, 라
이슬라 이후에는 나도 속도감 있게 걸었건만 까미노에서 다시 만나지 못했으니. <계 속>
로마노 다리(Puente Romano/위)
알베르게 까사 벨렌과 알레만 부부/아래)
<아래 사진들은 자료에서 전재>
문 닫힌 리바데세야의 관광안내소(위)와 세야 강 강 건너 산따 마리나 해변에서 바라본 꼬르베루 산(아래)
산 뻬드로 로터리의 어선(위)과 노변의 버스류장(아래)
라 이슬라의 알베르게(위)
첫댓글 선배님, 건안하시온지요, 금년의 년말과 년시는 찿아온 가족들과 떠들석하게 지날것 같읍니다, 멀리서나마 선배님 가족보두에게 오는해의 건강과 축복을 기원하옵니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모두 행복이 넘쳐나시네요. 이런 행복이 사계절 늘 지속되시기 빕니다.
저의 집안도 황님의 기원대로, 이즈음 처럼, 늘 무탈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