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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만공주) 선덕여왕의 배필(정식 남편)에 대한 설 총정리 - 조계룡, 김용수, 김용춘, 을제, 흠반, 백반?] http://kr.blog.yahoo.com/sppopsj/1361903
현재로서는 덕만공주의 정식 남편이 삼국유사에 왕력보에 기록된 飮葛文王(일단 음갈문왕으로 읽음) 외에 누구인지 정확하게 밝힌 역사기록이 없다. 현금에 나타난 화랑세기필사본에는 선덕여왕의 남편으로 거론되고 있는 인물로 김용수,김용춘, 을제, 흠반이 있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덕만공주인 선덕여왕의 남편이 누구인지에 대한 각종 설을 종합하여 정리해 본다. 최종적인 결론은 독자들의 몫이다.
신라시대에는 [1부 1처제]가 아니라 [1부 1처 다첩제]였다고 보면 된다. 즉 정식 배필은 하나이며 첩은 여럿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진평왕에게는 전후 황후 1명씩 합 2명, 다수의 후궁이 있었고, 왕자, 전군, 공주 등이 있었다.
태자로 거론된 인물은 없으며, 왕자로는 마야부인이 사망 후 왕비가 된 후비 승만부인 손씨의 아들(진골)이 있었고, 전군으로는 후궁 보량궁주의 아들(진골)인 보로(寶路)가 있었으며, 전군이라 불린 인물로 천명공주의 남편으로서 사위가 되는 김용수(진골)가 있었다. 딸들은 모두 공주라 불리었는데, 엄격히 말하면, 정비의 딸은 공주가 되고 후궁의 딸은 옹주가 되는데, 구별하여 적지 않고 있다.
왕의 아들과 딸들을 엄격히 구분한다면, 태자>적자 왕자>서자 왕자>공주>옹주의 순으로 나눌 수 있다. 태자는 대를 이을 왕자이며, 적자 왕자는 대군(大君)에 해당하고, 서자 왕자는 군(君)에 해당하며, 공주는 정비의 딸이고 옹주는 후궁의 딸이다. 단, 진평왕에게는 성골에 해당하는 왕자는 없었고 진골에 해당하는 왕자가 2명 이상 있었던 것이 된다. 성골에 해당하는 공주로는 덕만이며, 천명도 정비 마야부인의 딸로 일단 보이는데 출궁하였기 때문에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진골신분이라면 마야부인의 딸이 아닌 것이 된다. 그외의 딸들은 모두 후궁의 딸로서 진골이 된다. 선화공주도 마야부인의 딸로 추정되나 분명하지는 않다.
천명공주가 김용수와 혼인한 것이 진평왕과 정비 마야부인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사위를 후계자로 지목하여 계획적으로 만든 일이 되므로 천명은 처음에는 성골로서 마야부인의 딸이 된다고 본다. 서기596년 이전에 마야부인이 천명과 김용수를 혼인시킬 때 천명이 14세정도 였다고 보면 천명은 서기583년경 출생이 되고 마야부인은 천명보다 최소한 16세 정도 많다고 보아 서기568년 이전 출생이 된다. 그리하여 덕만공주가 차녀라 하더라도 천명보다 약 2년 후가 되는 서기585년경 출생이 되는 것이며 장녀라면 서기580년경 출생이 되는 것이다.
1. 선덕여왕의 남편으로 거론되는 인물
가. 김용수(金龍樹)
나. 김용춘(金龍春)
다. 을제(乙際)
라. 흠반(欽飯)
마. 백반(伯飯)
바. 김인평(金仁平)
사. 조계룡(曺繼龍)
2. 선덕여왕의 남편이라는 근거
가. 김용수라는 설
김용수는 진지왕의 장남으로서 진골신분을 가진 것이 된다. 서기576년경 출생이며, 김춘추의 생부라고 전하고, 천명공주의 첫 남편이 된다. 동생 김용춘보다 일찍 죽어 천명공주와 김춘추를 김용춘에게 맡겼다 한다.
화랑세기필사본에는 김용수를 갈문왕 또는 전군(展君)이라고 적고 있다. 김용수는 천화공주를 아내로 삼고 있었으나, 김용수를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진평왕과 마야부인이 천명공주와 혼인하게 하므로 천화공주를 동생 김용춘에게 주고 천명공주를 받아들여 부인으로 삼았는데, 이리하여 김용수는 전군(展君)이 된 것이다.
김용수는 진골로서 그냥 공(公)으로 불릴 인물이나, 왕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전군(展君)이라 불린 것이 된다. 천명공주가 마야부인의 딸이라면 전군은 공주의 남편을 부른 호칭이 된다. 그리하여 공주와 격이 비슷한 것이 된다. 한편, 보로전군은 진평왕의 후궁 보량궁주의 아들인데, 서자 왕자를 전군이라 하므로 결국 김용수 전군은 보로전군과 격이 비슷하다고 보며, 적자 왕자인 대군 아래의 군(君)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태자>적자 왕자(대군)>전군(군), 공주>옹주
김용수를 갈문왕이라 부른 것은 김춘추의 생부로서, 김춘추가 계부가 되는 김용춘을 문흥갈문왕으로 추봉한 것으로 볼 때, 친아버지 김용수를 갈문왕으로 봉하였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정사에는 나오지 않지만 충분히 갈문왕으로 봉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화랑세기필사본에서 갈문왕이라 적은 것으로 본다.
화랑세기필사본에서 진평왕은 덕만공주가 자라나면서 용봉의 자태가 있어, 김용수를 덕만의 남편으로 삼으면서 천명공주에게 물러나게 하였다 하는데, 그리하여 김용수는 전군의 자리를 유지한 것이 된다. 이때는 이미 김춘추가 성장하고 있던 때가 되므로, 덕만에게서 아들을 보기 위함이라 한 것은, 왕위를 사위가 되는 김용수에게 물려주려 한 것이 아니고 덕만에게 물려주려고 한 것이므로 논리가 맞지 않으나 덕만이 아들을 낳으면 대를 물려줄 근거가 되므로 일리는 있게된다.
김용수는 서기576년경생이고 천명공주는 장녀라 할 경우 서기580년경 출생이 되므로 혼인하는 나이로는 별 문제가 없다. 덕만공주가 성골이므로 마야부인의 딸이 되는데, 마야부인과 진평왕은 나이가 비슷하다고 보아 서기565년경생이면 마야부인이 덕만을 낳을 때 나이가 아무리 적어도 25세정도는 되었다고 본다면, 서기590년경 이전에 덕만이 출생한 것이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건대 덕만이 장녀이며, 선덕여왕으로서 할머니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므로 서기647년경에는 아무리 적어도 60세는 되었다고 보면 서기587년경 이전에 출생한 것이 되고, 장녀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계산을 하면 천명보다 위가 된다. 천명은 서기603년에 김춘추를 낳았으므로 최소한 16세는 되었다 보아 서기588년경 이전에 출생한 것이 된다. 한편 천명공주가 서기596년에 김용춘이 화랑 풍월주가 되었을 때 화주(花主)가 되었다 하는 바, 이때는 김용춘의 부인이 된 것이 된다. 서기588년에 출생하였다면 천명은 서기596년에는 8세 밖에 안되므로 타당성이 없고 최소한 13세이상은 되었다고 보아 서기584년경 이전에 출생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덕만이 장녀라면 서기582년경에는 출생 한 것이 된다.
화랑세기필사본의 기록대로라면 김용수가 천명의 남편이 된 때는 서기600년경이 되고 서기602년 또는 서기603년에 김춘추가 출생하게 되는데, 서기596년부터 서기603년까지 김용춘이 화랑 풍월주로서 천명의 남편이 되었다라는 기록과 배치된다. 왜냐하면 김용춘은 김용수의 뒤에 천명을 부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김춘추가 서기603년에 태어났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게 된다. 김춘추가 김용춘과 천명의 아들이라면 의문은 사라진다.
화랑세기필사본 외는 김용수가 덕만의 남편이라는 기록이 없다.
나. 김용춘이라는 설
김용춘은 진지왕의 차남으로서 김용수의 동생이 되고, 진골신분이 되며, 서기578년에 출생하여 서기596년 19세에 화랑 풍월주가 되었으며 천명공주가 화주로서 부인이 되었던 것이 된다. 천명이 화주가 된 때는 앞에서 본 것처럼 최소한 13세가 되는 때가 되어야 하므로 서기584년생이 되고 김춘추를 낳은 때는 약20세가 된다.
화랑세기필사본에는 김용춘은 형 김용수로부터 천화공주를 물려받아 부인으로 삼았다가 진평왕의 명으로 덕만공주의 남편이 되었다 하는데, 이 기록 외는 없다.
김용춘은 서자를 많이 두었고 김용수가 죽을 때 천명공주와 김춘추를 맡기므로, 천명공주를 정식 부인으로 맞고 김춘추를 적자로 삼았으므로 김춘추에 의하여 갈문왕으로 추봉되었던 것이 된다.
다. 김용춘, 을제, 흠반이라는 설
선덕여왕이 왕이 된 후 김용춘을 남편으로 삼았으나 아들이 없자 신하들이 을제와 흠반을 남편으로 삼게 하여 삼서제(三壻制)를 시행하였다 한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장녀라 할 때 서기582년경 출생으로서 왕이 된 해인 서기632년에는 이미 51세의 폐경기가 지났음직한 나이 때이므로 자식을 두기 위하여 남편을 셋이나 두었다라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 자식을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된다.
화랑세기필사본의 기록대로라면, 김용춘은 김용수가 죽기전에는 천명공주의 남편이 되지 못한 것이 되고, 김용수가 죽은 후 천명공주와 김춘추를 부인과 아들로 맞은 것이 된다. 김용수가 죽은 해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삼국사기의 기록을 기준으로 하면 서기647년에 김용춘이 사망하였고, 김용수는 그 이전에 사망한 것이 된다. 즉 선덕여왕이 즉위할 때 김용수는 엄연히 살아 있었던 것이 된다.
을제는 선덕여왕이 국정을 맡긴 대신으로서 진평왕과 나이가 비슷한 인물로 보인다. 즉 선덕여왕보다 약10세이상 많은 인물이 될 것이다. 서기632년경에는 약60세가 넘은 나이가 되는데, 선덕여왕과의 사이에 자식을 두기 위하여 남편이 되었다라는 기록은 타당성이 없는 것이 된다.
흠반은 더 자세한 기록이 없는 인물인데, 선덕여왕이 50세가 넘어 왕이 된 후 남편이 되었다라는 기록은 위와 마찬가지로 논리에 맞지 아니하므로 남편이 아니라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 된다.
라. 음갈문왕(飮葛文王)의 飮은 飯의 오각(오기)라는 설 - 흠반, 백반?
삼국유사 왕력보의 기록이 인쇄를 할 목판을 잘못 새겨 飯자가 飮자가 되었다는 설인데, 이는 억지주장에 불과하다. 만에 하나 오각이라면, 飯자를 가진 이름을 외자로 쓴 이유가 무엇인지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신라시대 이름자에 飯자를 가진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흠반의 반, 아니면 백반의 반, 아니면 국반의 반? 국반은 승만공주인 진덕여왕의 아버지이므로 제외한다 하더라도, 흠반과 백반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백반은 진평왕의 친동생으로서 진정갈문왕으로 봉해진 인물이고 자식은 기록되고 있지 않다.
음갈문왕의 飮자는 흠반(欽飯)이나 백반(伯飯)의 반(飯)의 오기로서 덕만공주의 남편이라 하는 것은 타당성이 떨어진다.
마. 음갈문왕의 飮자가 欽으로서 흠반이라는 설
음과 흠은 한자음으로서 ㅇ과 ㅎ의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한 발음이므로 선덕여왕의 남편은 흠반이라고 주장하는 설이다. 이는 飮자를 음으로만 읽은 것이 된다.
바. 김인평이라는 설
조선시대 기록인 동경잡기 등에 선덕여왕의 남편을 김인평이라 적고 있는 것은 삼국유사왕력보에 ...음갈문왕인평갑오립...의 인평을 선덕여왕의 남편이라 한 것을 옮겨 적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 김씨족보에 진평왕과 같은 항렬에 김인평이 있다라고도 한다.
경주김씨선원세보에도 선덕여왕의 남편으로서 ...夫金仁平..이라 적고 있으나 더 자세한 기록은 없다.
삼국사기에서는 서기634년에 연호를 인평이라 하였다 한다. 이는 진평왕이 서기632년에 붕어하므로 3년상을 끝낸 서기634년에 덕만공주가 정식으로 즉위하였다는 기록이 된다. 그래서 삼국유사왕력보에 기록된...음갈문왕인평갑오립...에서의 인평갑오립은 인평이라 연호를 세운 서기634년인 갑오년에 정식으로 즉위하였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
...음갈문왕인평갑오립...에서의 인평을 사람이름으로 보고 음갈문왕이 되는 김인평이 갑오년에 책립되었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이는 앞에서와 같이 인평을 사람이름으로 확정하고 내리는 결론이 된다. 왕이 갈문왕을 봉(封)하는 것이지 갈문왕이 입(立)한다고 적는 경우는 없다고 본다. 왕이 즉위하는 것을 입(立)한다고 적는다. 다만, 인평이 음갈문왕의 이름이 아니다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즉 충분히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음갈문왕인평갑오립...에서 인평을 사람이름으로 보는 경우에도 김씨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신라시대에는 용춘공, 유신공 알천공 처럼 성씨를 적지않고 이름만 적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알천공은 소씨(蘇氏)이다. 백결선생의 아버지인 제상공은 박제상이 본명이나 기록에 따라서는 김씨로 잘못 알고 김제상으로 적고 있기도 하다.
사. 조계룡이라는 설
창녕조씨 족보에 의하면, 조계룡은 진평왕의 사위로 부마도위이고, 태사를 지내고 부원군을 지낸 인물이다. 다만, 그 부인이 누구인지 공주라고 보여주는 기록 외에 현재로서는 더 자세한 기록은 없다.
진평왕에게는 딸이 많았다. 통상적으로는 덕만공주, 천명공주, 선화공주 세명 정도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후궁의 딸들이 많았던 것이다. 후궁의 딸들도 일단 통상적으로 공주라 불리는데 엄격하게는 서녀 공주로서 옹주가 된다.
천명공주의 남편은 김용수였으며 나중에는 김용춘이 되었다. 선화공주의 남편은 서동요라는 설화에 의하면 백제무왕이 되는 서동이 된다. 덕만의 남편에 대하여는 삼국사기에는 전혀 기록이 없고, 삼국유사 왕력보에서는 飮葛文王이라고 적고 있다.
화랑세기필사본에 의하면 덕만공주의 남자로 거론되는 인물이 김용수, 김용춘, 을제, 흠반이 나온다. 그러나 이들도 이 기록에 의한다 하더라도 덕만공주, 선덕여왕의 배필 즉 정식남편이라고 단정할 만한 기록이 안된다. 아들을 낳기 위한 남자로서 역할을 한 것으로만 적혀 있다. 그렇다면 정식 남편인 배필이 되는 음갈문왕(飮葛文王)은 누구인가?
조계룡(曺繼龍)은 진평왕의 사위이므로 일단 공주의 남편이 된다. 천명과 선화는 일단 제외된다. 그외 진평왕의 딸로는, 천화공주, 양명공주, 보화공주, 우야공주가 있다. 물론 그외에도 공주들이 있었다고도 추정된다.
천화공주(부모 불명. 아버지는 진평왕으로 추정됨)는 처음 김용수의 부인이었다가 김용춘의 부인이 되었다.
양명공주는 모종공의 부인으로서 화랑 풍월주가 된 양도공을 낳았고 보종공과의 사이에 진평왕의 후궁이자 김춘추의 부인이 된 딸 보량(보라)궁주가 있다.
보화공주는 후궁 미실궁주와 진평왕 사이의 딸로서 화랑 풍월주가 된 선품공의 어머니가 된다.
우야공주는 후궁 만룡낭주와 진평왕 사이의 딸로서 화랑 풍월주인 예원의 부인이며, 화랑세기의 저자인 김대문의 할머니가 된다.
이상으로서 공주로 거론되는 인물들은 모두 남편과 자식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덕만공주의 남편과 자식은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화랑세기필사본에서는 아예 자식이 없다라고적고 있다.
그런데, 창녕조씨 족보에 의하면, 조계룡이 공주의 남편으로서 진평왕의 사위로 부마도위이며, 태사가 되고, 부원군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덕만공주의 남편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게 된다.
부마도위는 공주의 남편임을 나타내는데, 부마위가 되는 옹주의 남편이 아니라 공주의 남편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부마도위는 부마위의 윗단계이다.
태사는 왕의 뒤를 이을 태자의 스승을 가리킨다.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다가 마야부인이 죽은 후 승만부인이 아들을 낳았고 요절하였다라고 화랑세기필사본에 전한다. 태사를 넓은 의미로 왕실의 스승이라 하면, 당시 진평왕 시절의 왕족으로는 공주와 왕자 그리고 더 넓게는 왕실과 관련이 있는 핏줄로 김춘추와 김유신도 있게 되는데, 이들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왕자 또는 태자의 스승을 태사라 한다면, 조계룡은 진평왕의 아들이 되는 보로전군과 승만부인 손씨의 아들인 왕자의 스승이었다는 것이 된다. 보로전군(寶路展君)은 진평왕의 후궁 보량궁주의 아들로서 서자 왕자가 된다. 보량궁주는 서기605년경 출생이니 서기620년경에 진평왕의 후궁이 되었다가 아들을 낳은 것이 되고 서기626년경 김춘추의 부인이 되어 딸 고타소를 낳은 것이 된다. 승만부인 손씨는 후궁이 아니라 마야부인이 사망후 정식왕비가 되었으므로 황후가 되며 그 아들은 적자 왕자가 된다. 그래서 승만부인 손씨의 아들이 만약 살아 있었다라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왕위를 잇게 될 가능성이 많다. 물론 골품으로 따지면 덕만공주에 뒤진다. 그런데 요절하였다 한다. 요절은 어릴 때 죽었다는 의미이므로 약10세를 전후하여 죽었다는 것이 된다. 계산에 의하면 승만부인 손씨의 아들은 서기629년이전에 죽은 것이 된다. 이때 약10세라 하면 승만부인 손씨는 서기620년경에 마야부인이 사망하고 황후가 된 것이 된다. 보로전군이 왕위를 이을 자에 언급이 없는 것은 이유를 잘 모르겠으나, 아마도 왕의 재목이 안되거나 서기625년경 생으로 당시상황으로 보아 나이가 너무 어렸다든지, 천명공주나 덕만공주에 자리를 뒤지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적녀 성골 공주>서자 진골 전군의 질서가 있었다는 것이 된다. 승만손씨의 아들은 적자 진골 왕자이므로 화랑세기필사본의 기록에 의하면 아마도 적녀 성골 공주인 덕만공주보다 서열이 위였다고 추정된다. 즉 적자 왕자>적녀 공주가 된다. 남존여비의 사상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 된다.
조계룡이 태사라 한 것은 왕자나 태자의 스승이라는 것을 가리키며, 넓게는 왕실의 스승으로서 김춘추, 김유신 들을 포함한 왕족의 스승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조계룡의 나이는 이들 김춘추 김유신보다는 아버지뻘이 되는 사람으로서 최소한 10세가 많다고 보면, 김유신이 서기595년 출생이므로 서기585년 이전 출생이 된다.
또 조계룡은 부원군(府院君)이라 한다. 부원군은 왕족과 관련된 인물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신라시대의 갈문왕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 된다. 진평왕이 조계룡에게 부원군이라는 호칭을 공신(功臣)에게 내린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갈문왕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조계룡이 음갈문왕(飮葛文王)이라는 근거가 있다. 바로 曺라는 글자이다. 飮이라는 글자와 曺라는 글자는 음은 다르지만, 훈이 같다. 즉 마실 음자와 마실 조로서 마실이라는 훈이 같다라는 말이다. 曺가 왜 마실일까?
曺는 마을 즉 관청을 나타내는 글자로서 마을 조가 된다. 그런데 이 마을이라는 말은 조선 세종대왕 시대에는 [마] [유성음ㅅ.ㄹ] 조가 된다. 즉 [마 ㅈ.ㄹ 조]라는 소리이다. 이 마을이라는 소리는 신라시대 말로 마실이 된다. 관청이라는 뜻을 가진 [마 ㅅ.ㄹ]이 신라시대 말로 [마슬, 마살]이 되고 [마슬]은 [슬]의 전설모음화로 인하여 [마실]로 발음되는 것이다. 즉 마을의 신라시대 말은 마실이다. 한편 동네,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 리(里)도 신라시대 말로는 마실이라 한다. 경상도 사투리로 "마실다닌다"는 말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닌다는 의미이다.
리(里)는 거리로 따지면 약400미터에 해당하고, 옛날에는 1리에 마을이 하나씩 있었던 것이 된다. 십리에는 마을을 10개나 거치게 되는 것이다. 사방으로 100리는 국(國)에 해당하는 넓이이다. 지름이 약40킬로미터이면 지금의 큰 군(郡)단위 나라가 되는 것이다. 관청이 설치되는 최소단위가 리(里)일 수 있다. 지금도 도시의 동(洞)에 해당하는 마을이 리(里)가 된다.
飮葛文王의 飮자를 음으로 읽으면 曺와 아무 관련이 없는 말이 된다. 그러나 "마실 음"자의 "마실"로 읽으면 바로 曺와 관련된 말이 된다. 飮葛文王으로 적고 曺葛文王으로 적지 아니한 것은 "조"로 읽지 말고 "마실"로 읽으라는 취지에서 "飮"자를 쓴 것으로 된다.
조계룡은 계산상으로 서기585년경 이전에 출생하여 진평왕에게 등용되어 궁에서 지냈는데, 조계룡의 겨드랑이에 "曺"라는 글자가 있어서 성씨를 "曺"로 하였다는 것을 보면, 조계룡은 "曺"와 관련된 인물이 된다. 즉 처음부터 "曺"씨일 가능성도 있고, 당시 벼슬이 "曺"라는 글자를 가진 자리에 있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공주와 혼인할 때 나이는 대략 20세로 본다면 서기605년경에 혼인한 것이 된다.
그런데, 창녕조씨 족보에 의하면 진평왕 건복48년이 되는 서기631년 2월에 조계룡이 사성받은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즉 이때 조계룡이 태어났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앞에서 적은 것으로 종합고찰하면, 서기631년 2월에 출생한 것이 아니라, 서기585년 이전에 출생하여 진평왕에 의하여 궁에서 생활하였고 서기605년경 이전에 공주와 혼인하였으며, 서기631년에 "曺繼龍"이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받은 것이 되는 것이다.
만약 성씨를 원래부터 曺라고 써 왔다면 삼국유사왕력보에서 굳이 "飮"갈문왕으로 쓸 이유가 없게 되는데, 신라시대에 曺라는 글자를 계속 이두식으로 "마실"로 발음을 하였다든지, 아니면 조계룡이 사성받은 때의 벼슬이름에 "마실"이라는 글자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조계룡은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고 태사가 되어 진평왕 시절에 왕자나 공주의 스승이었고, 부원군이 되어 갈문왕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飮葛文王"은 "曺葛文王"으로서 "마실갈문왕"이라 읽으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되는 바, 덕만공주인 선덕여왕의 정식남편이 되는 소위 음갈문왕은 바로 조계룡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3. 결론 : 飮葛文王 = 曺繼龍
덕만공주의 정식 남편인 배필은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조계룡이 된다. 그 이외의 인물들은 飮葛文王 즉 "마실"갈문왕이 아니다. 단, 조계룡이 김인평(金仁平)이 아니다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즉 김인평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진흥왕이 비사벌가야를 합병하고서 그 왕족에게 김씨를 하사하고 왕자였던 김옥결이 이례향과 혼인하여 김인평을 낳았고 그 김인평이 서기631년에 조계룡이라 사성명을 받은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는 원래의 성씨가 조(曺)였는데, 진흥왕으로부터 김씨를 하사받았다가 진평왕 시대에 다시 원래의 성씨였던 조씨로 하사받았다라고도 볼 수 있기도 하다.
화랑세기필사본에서 선덕여왕의 남편으로 거론되는 김용수, 김용춘, 흠반, 을제는 정식남편이 아니라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 되며, 바로 사신(私臣)이라는 말이 된다. 사신이라는 것은 신라시대에 있던 벼슬의 명칭이기도 하며, 개인 비서와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이기도 하다.
만약 조계룡이 김춘추와 김유신의 아버지뻘에 해당하는 인물이라면 서기580년이전에 출생한 것이 되고 심지어는 그 훨씬 이전에 출생하였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덕만공주보다 나이가 충분히 많을 수 있는 것이다. 덕만공주가 계산상으로 서기582년경에 출생한 것이라면, 조계룡은 서기580년 이전에 출생하였을 것이다.
조계룡은 자식으로서 5남2녀를 두었다라고 기록되는데, 결론대로 덕만공주의 남편이라면, 덕만공주의 나이가 40세정도가 되는 서기620년경에 자식을 모두 둔 것이 된다. 서기600년경에 혼인하여 약20년간 7명의 자식을 둔 것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서기620년경에 덕만공주가 왕위를 이을 재목으로 부상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때 마야부인이 사망하므로 승만부인이 황후가 되어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덕만공주이 입지가 불안정하였으나, 서기629년경이전에 승만부인의 아들인 왕자가 요절하므로 덕만공주가 다시 본격적으로 왕위를 이을 작업에 착수한 것이 된다.
이리하여 서기631년 2월에 덕만공주의 남편에게 조계룡(曺繼龍)이라 사성명을 한 것이 되고, 5월에는 칠숙과 석품의 반란모의를 사전발각하여 처단하였다. 이후 덕만공주가 왕이 되는 데 장애가 없었던 것이 된다. 서기631년2월에 조계룡이 탄생하였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김용수가 천명공주의 남편이 되었을 때 전군(展君)이 되었는데, 조계룡이 덕만공주와 혼인하였을 때 이미 전군(展君)이 되었고, 서기631년에는 갈문왕에 봉해진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선덕여왕 시대에 남편을 갈문왕에 봉한 기록이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마야부인의 아버지는 복승갈문왕이다. 진평왕 당시에 복승갈문왕은 살아 있었다. 복승갈문왕을 별도로 봉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봉한 것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는 남존여비 사상을 풍기고 있는 역사기록으로서 선덕여왕을 좋게 보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남편에 대한 기록도 없는 것으로 된다. 정사에는 없는 기록을 창녕조씨 족보에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진평왕은 13세에 왕이 되었다라고도 하고 서기579년 즉위할 때 15세라고 계산이 되는 바, 서기565년경생이 된다. 여자는 초경이 14세정도로 만13세이면 혼인할 수 있는 나이가 되는데, 실제로 자식을 두는 것은 아마도 16세정도였다고 보인다. 그래서 마야부인은 진평왕과 나이가 비슷하다고 추정된다. 그래서 서기620년경에 마야부인이 사망할 때 나이는 약55세가 된다.
덕만공주가 서기582년경에 출생하였다면, 덕만공주의 남편이라는 조계룡은 약10여세 정도 많을 수도 있다. 그래서 조계룡은 서기570년경부터 서기580년경 생으로 추정된다. 김유신과 김춘추 외 왕자나 공주들의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였을 수 있는 나이가 된다.
조계룡의 어머니는 이례향으로서 진평왕 시대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이 되는데, 이광옥은 진흥왕 때에 등제하였다 하므로, 서기576년 이전에 이광옥은 30세가 넘었다는 것이 되고, 이광옥이 조계룡을 진평왕에게 추천한 때에 조계룡의 나이가 약20여세가 되는 해라고 본다면, 덕만공주가 혼인할 때가 되는 서기600년경보다 약10여년 이전이 되는 서기590년경에 약20세라는 것이 되므로, 조계룡은 서기570년경에 출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상으로 조계룡은 서기570년경 출생으로서 약20세가 되던 서기590년경에 진평왕에 의하여 등제하였고, 이후 약8년이 지난 서기598년경에 약17세가 되는 덕만공주와 혼인하였으며, 서기620년경까지 5남2녀의 자식을 두었고, 자식을 다 낳은 덕만공주가 왕위를 이을 작업에 착수하였으며, 승만부인의 아들이 요절한 서기629년경 이전에 이에 진평왕이 덕만에게 왕위를 넘기려 결정을 하자 본격적으로 계승작업에 돌입한 것이 되며, 서기631년 2월에 진평왕이 덕만공주의 남편인 조계룡을 갈문왕으로 봉하고, 5월에 덕만공주측에서 칠숙과 석품의 반란모의를 사전색출하여 처단하였으며, 서기632년 1월에 진평왕이 붕하니 덕만공주가 왕위를 이었고, 3년상이 끝난 서기634년에 정식으로 즉위하여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한 것이 된다.
*갈문왕(葛文王) : 신라시대 말로 "갈믄"왕이라고 해석되며, "갈믄"의 뜻은 "갊(다) 은"에서 온 말이며, 갊다라는 말은 갈무리하다, 보완하다 등의 뜻이 있으므로, 결국 보왕(補王), 비왕(裨王), 소왕(小王)이라는 의미가 된다. 본왕을 대왕이라 하면 갈문왕은 곧 소왕이 되는 것이다. 본왕을 그냥 왕이라 하면 대군(大君)격의 임금이 된다. 갈문왕 이외의 작은 임금(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직으로서 간(干)이 있다. 즉 대왕>갈문왕>간의 순이 된다. 단군조선 시대로 비겨 말하면, [단군=단제=천왕(天王)>삼한(三韓)=천왕격>기타 제후국의 임금(君, 侯, 汗)=천군, 천후, 천자격]의 순이 되며, 삼한이 곧 섭정 비왕(裨王)이 되는데, 본왕을 천왕이라 하면 갈문왕은 곧 삼한에 해당하게 된다. 기타 간(干)은 제후격의 한(汗)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특히 삼한의 임금을 한(韓)이라 하고 열한(列汗)을 한(汗)이라 구분하여 적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韓과 汗은 원래 같은 소리로서 같은 뜻을 가지는 말이 된다.
*天王(단군)>三韓(천왕격)>天君>天侯(天公, 天侯, 天伯, 天子, 天男), 한(汗)(천자격)
*단군(단제)>삼한>군>후(공후백자남)>대인>욕살
*고대중국 : 천자(왕)>공>후>백>자>남>대부
->단군 천왕>삼한>천군>천후, 천자 (천하왕)>공, 후, 백, 자, 남, 대인>욕살(지방장관), 대부
4. 여론 : 曺繼龍=飮葛文王=(金,曺)仁平
화랑세기필사본은 지금으로서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줄거리 되는 역사는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고, 반면, 덕만공주의 출생연도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면서 오로지 자식을 얻기 위한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김용수, 김용춘, 을제, 흠반을 거론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사신(私臣)에 해당하는 인물로 보이고, 정식혼인한 남편으로 적은 것은 아닌 것이다. 성골과 성골의 자식이 성골이며, 성골과 진골의 자식은 진골이 된다. 그래서 천명공주의 아들인 김춘추는 진골이며, 덕만공주의 자식도 진골이 되는데, 덕만공주나 선덕여왕에게서 자식을 얻기 위하여 남편감으로 여럿을 두었다는 것은 덕만에게 왕위를 잇기 위하여 한 일도 아니며 그 아들에게 왕위를 잇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닌 바, 화랑세기필사본 기록 자체의 취지에 흠이 있는 것이 된다.
서기621년 당나라 고종이 보낸 모란꽃과 화병풍을 보고 덕만공주가 해석한 것은, 향기가 없다라고 한 것까지이고, "나에게 배필이 없는 것을 조롱한 것이다"라고 기록한 삼국유사의 지기삼사의 기록은 뒷부분을 저자가 주관적으로 가필한 것이 된다.
한편, 창녕조씨 족보상의 기록에서 조계룡(曺繼龍)이라는 이름에 동해신룡(東海神龍) 즉 청룡(靑龍)의 후손임을 나타내고 있다. 즉 동해신룡은 동쪽바다의 신룡이므로 청룡이 된다. 그리하여 조계룡의 어머니가 되는 이례향이 약20세가 되어 청룡병을 앓은 것이라 적은 것이다. 청룡병은 청룡과 관련된 질병인데, 설화의 취지로 보아 약20세가 되어 혼인하여야 되는 상사병과 같은 의미로 적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례향은 청룡 즉 동해신룡의 아들인 옥결과 혼인하여 조계룡을 낳은 것이 된다. 조계룡의 조(曺)는 동녘 동(東)과 가로 왈(曰)의 합자이다. 그리하여 曺라는 글자에 동해신룡의 東자가 들어 있는 것이다. 계룡은 이을 계, 용 용자 이므로 용 즉 왕을 이었다라는 의미로서 용(=왕)의 후손이라는 글자이다. 그리하여 조계룡은 동해신룡의 후손임을 드러내고 있는 이름이 된다.
조계룡의 출신에 대하여는 두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하나는 비사벌가야의 왕손이며, 다른 하나는 신라김씨의 왕족이 된다는 것이다. 이 두 경우에 조계룡이 飮갈문왕이므로 (김)인평이 사람이름이 맞다면 곧 조계룡의 본명이 될 것이다.
(1) 비사벌가야는 창녕지역의 가야로서 그 왕족은 가야김씨일 가능성이 충분이 있다. 그래서 조계룡의 원래의 성씨가 김씨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왕력보의 ....음갈문왕인평...에서 인평을 갈문왕의 이름으로 볼 때 음갈문왕이 조계룡이라면 조계룡의 본명은 김인평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만약 원래의 성씨가 曺라면 조인평이 되는 것이다.
또는 원래 조씨였는데, 진흥왕이 비사벌가야를 합병하면서 그 왕족에게 김씨를 하사하였다가 진평왕 시대에 김인평이 조계룡으로 원래의 성씨로 복원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조(曺)라는 글자가 벼슬과 관련이 없다라면 협하에 조라는 글자가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원래의 성씨가 조씨였을 수도 있는 것이며, 진평왕이 복원시켜 성명을 하사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김인평이 곧 조계룡이며 飮갈문왕이 된다.
(2) 비사벌가야는 서기555년경에 망한 것이 된다. 이때는 진흥왕 시대로서 이때경을 전후하여 진흥왕이 비사벌가야 왕족이나 귀족의 여자에게서 아들을 얻고 그 아들은 비사벌가야 지역에서 숨어 지내다가 서기570년경에 이례향과 혼인하고 조계룡을 낳은 것이 되고, 이례향의 아버지 이광옥이 이 숨겨진 사실을 서기590년경 진평왕에 고하여 진평왕이 조계룡을 궁으로 불러들여 살게 하였으며 약8년이 지난 서기598년경에 덕만공주와 혼인시킨 것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다. 그러면 조계룡은 진흥왕의 손자로서 진평왕과 같은 항렬이 된다.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조계룡은 김인평이 되고 비사벌가야의 세력이 아닌 자격으로 진흥왕의 혈육으로서 덕만공주와 혼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이 된다.
그러나, 창녕조씨족보상의 기록으로 본다면, 조계룡의 어머니 이례향이 용자 옥결과 만난 곳이 비사벌가야의 화왕산 용지라고 적고 있어 조계룡이 비사벌가야의 토착 왕손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앞에서 논한 것처럼 조계룡의 원래 성씨가 김씨이거나 조씨이거나 별 문제가 되지 아니하는데, 진평왕이 조계룡이라 하면서 용의 후손 즉 비사벌가야의 왕손으로 인정한 것으로 보면 원래의 성씨를 복원하여 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창녕조씨통사편찬위원회의 창녕조씨통사에서는, 조계룡의 부인이 덕만공주로서 선덕여왕이라 적으면서 한편으로는 선덕왕녀정안공주김씨(善德王女貞安公主金氏))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앞뒤가 맞이 아니하며 뒷부분의 기록은 조계룡이 진평왕의 사위라는 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되어 작위적인 느낌이 든다. 만약 선덕왕녀를 선덕이라는 공주 즉 왕녀라고 본 것이라면 맞는 것이고 정안공주를 선덕여왕의 공주시절 이름이라면 맞다고 보이나 선덕여왕의 공주시절 이름은 덕만이므로 일치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진평왕이나 선덕여왕의 성씨를 김해김씨라고 적은 경우도 있다. 글자의 취지로 보아 선덕여왕의 딸이되는 정안공주 김씨가 되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덕만공주가 정식 남편인 조계룡과의 사이 외에 다른 딸이 있어 조계룡의 부인이 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김유신이 나이가 들어 김춘추와 여동생 문희의 딸을 부인으로 삼은 일이 있으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이다. 만약 조계룡이 선덕여왕의 딸이 되는 정안공주를 들인 것이 사실이라면, 조계룡은 약30세, 덕만공주는 약20세가 되는 서기598년경에 혼인하고 덕만공주가 약40세가 되는 서기620년경까지 5난2녀를 두었고, 덕만공주가 다른 딸을 두었는데, 선덕여왕이 서기632년에 왕이 된 후 약60세가 되는 조계룡이 약20세가 되는 덕만공주의 딸을 들여 첩으로 삼은 것이 될 것이다.
*창녕조씨 족보와 통사관련 기록을 종합하여 보더라도, 조계룡의 부인은 진평왕의 장녀로서 덕만공주로 귀착되고, 서기600년경 이전에 혼인한 것이 되며, 5남2녀를 둔 것이 된다. 다만, 덕만공주나 선덕여왕의 남편으로 음갈문왕이 아닌 김인평이라고 적은 기록과 일치하지 아니하는 점에서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음갈문왕이 김인평이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김씨가 아닌 조인평일 수도 있고, 한편, 조계룡의 본명이 김인평임을 전혀 배제할 수도 없는 것이다. 즉, 조계룡의 원래의 성씨가 曺라면, 삼국유사왕력보 상의 ...음갈문왕인평..의 인평을 음갈문왕의 이름으로 본다면 조인평이 되는 것이다.
*앞에서 본 바대로 진흥왕이 비사벌가야를 합병하고서 그 왕족에게 김씨를 하사하여 왕자인 김옥결이 이례향과 혼인하여 김인평을 낳고 그 김인평이 진평왕으로부터 조계룡이라 사성명을 받은 것일 수도 있는 바, 겨드랑이에 曺라는 글자가 있었다라고 하는 점을 고려하면 원래의 성씨인 조(曺)로 복원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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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만공주(선덕여왕)의 주변인물 연대 정리
참조 : http://kr.blog.yahoo.com/sppopsj/136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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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 홍근님 열심히 연구하셔서 카페에글올려주시지만.(대종회 자료와 다른부분은).야후
조 홍근님의 많은 자료 정말 감사합니다.
2009년 3월15일 발표된 '昌寧曺氏 始祖妣에 대한 大宗會 決議 事項 '(창녕조씨 시조비에 대한 대종회 결의 사항)과 같이 대종회의 입장을 참고하시고 신중히 접근 하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예, 항상 염두에 두고 참고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