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순례여행(21) - 1월 10일: 담양에서 빛고을 광주로
수북교회의 사택에서 아침식사를 나눴습니다. 사모님이 농협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지 않은데 길손을 위해서 아침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나도 목회를 하면서 주일 아침을 우유 한잔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기억이 나는데 바쁜 목양생활 중에 주일 아침식사 준비는 나그네를 위한 특별 준비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행 중에 민폐를 많이 끼치는 것같습니다. 좋은 말로는 사랑의 빚을 진 셈이지요. 나도 기회가 주어지면 이러한 사랑의 빚을 갚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준 사랑보다는 받은 사랑이 많은 것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 빚진 자의 삶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주님에게는 얼마나 빚을 졌을까요, 생명의 빚, 영생의 빚을 졌으니 생명이 있는 동안 주님 나라위해 살아야 하지요.
아침식사후에 교육관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수북면소재지의 이곳 저곳을 걸었습니다. 배냥도 없이 걸으니까 얼마나 편한지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지요. 그런데 배냥에는 정말 꼭 필요한 곳이 모두 들어있으니까 배냥을 버릴 수는 없지요. 그래서 때로는 짐들이 무겁지만 꼭 필요한 짐들은 지고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자녀들의 양육이 무거운 짐이지만 그 양육을 하면서 행복이 있습니다. 이제는 빈둥지처럼 자녀들이 떠나갔으니까 종종 아이들을 기를 때의 기쁨이 소록 소록 생각이 납니다.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것같습니다.
주일오전예배를 드렸습니다. 면소재지 시골교회인데 예배당이 그득했습니다. 12명 모이는 교회인데 50명 이상 모이는 교회로 성장시켰다고 하니까 주목사님이 목양사역에 애씀을 가졌던 것같습니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교회가 항상 부흥하는 것은 아닌 것같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하는데 부흥이 어려운 교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부흥의 비결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로 밖에는 다른 설명이 불가능한 것같습니다.
주세영목사님이 야고보고서 1장 말씀을 가지고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조심스럽게 하며 말한 대로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했던 말씀은 마음 속에 깊은 은혜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가르치는 교수가 설교를 듣고 있으니까 부담은 되었겠지만 필자는 주목사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았고 교인들도 감화를 받는 것같았습니다. 내용도 있고 전달방법도 좋아서 시골교인들도 지성인들도 함께 은혜받을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날 무렵에 광주기독병원에 원목으로 섬기는 박재표 목사님이 길손을 만나겠다고 하시면서 오셨습니다. 함께 근처식당에서 맛있는 돼지갈비로 점심식사를 나눴습니다. 스승을 대접한다고 먼 길을 온 박목사님에게 감사를 했습니다. 귀한 분이 배웅을 와서 광주가는 길은 걷는 것 대신에 승용차를 탔습니다. 가는 길에 송강원에 들려서 정철선생님의 발자취를 맛보았습니다. 이곳에 귀향을 와서 임금님에 대한 애틋한 충성을 시로 표현했던 정철의 심정을 보는 것같앗습니다. 한양을 바라보면서 작은 정자에서 눈물을 지으면 임금님을 사모하는 을 썼던 우리들의 선조들의 애틋한 나랏님에 대한 충성을 보는 것같았습니다.
이곳을 떠나 소쇄원이라는 곳에 들려서 구경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것은 민간정원으로 알려진 곳인데 한 때는 정자가 12채나 있었는데 지금은 세 채 정도가 남았습니다. 이곳을 설명해주는 분이 들어오라고 해서 군불을 땐 방에서 이 분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었습니다. 이 분은 옛날의 여성들은 집안을찾아오는 손님들을 지성으로 섬겼는데 요즘 여성들은 환경이 좋아지고 평안해졌는데 왜 이렇게 이혼도 많고 불평도 많은지 여성들의 각성을 호소하는 일장 연설을 했습니다. 다행히 들어야 할 여성 청취자는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세월의 변화는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일방적인 여성의 희생의 강요는 안되고요, 결국 삶이란 더불어살아가는 인생이라는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광주로 향했습니다. 광주에서 박목사님이 섬기는 광주기독병원에서 이곳 저곳을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고요.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길손목사가 환자 한 을 위해서 기도하는 은혜도 경험했습니다. 이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님들에게 천국의 기쁨과 소망이 풍성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죽음은 분명히 누구에게나 두려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어려운 여정이지만 주님과 함께 마지막을 보내는 행운을 가지는 분들은 행복할 것같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예수님 부활하셨으니 우리들도 죽음 너머의 부활을 기대하면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광주병원에서 나와서 신대 동산안에 있는 선교사들의 묘역을 보았습니다. 먼 나라에서 이곳까지 와서 땀과 피를 흘리면서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바쳤던 님들의 수고와 헌신에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어떤 분은 병든 나병환자의 임종을 함께 하면서 거룩한 사랑을 베풀었던 분도 계셨습니다. 이 분이 나중에 여수애향원을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양림교회에서 노치준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이게 몇년 만인가요. 같은 신일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같은 반은 아니지만 반장을 하면서 서로 교제를 나눈 사이였습니다.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이라는 신일고등학교에서 삼년을 함께 보냈으니까 우리는 신앙의 동지인 것같습니다. 그곳에서 같은 학생지만 노목사님은 존경할만한 친구였습니다. 같은 고대에서 대학생활을 했습니다. 그 곳에서도 함께 기독학생회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서로가 목사가 되었는데 노목사님이 이곳 광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광주양림교회의 담임목회자로 섬기게 되었고 그 친구 목사님을 이곳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감화가 되는지요.
마치 원로장로, 명예권사추대, 안수집사, 권사 취임이 있는 저녁예배여서 함께 예배를 참석하면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교회는 새롭게 부흥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곳 양림동은 광주에서 오래된 지역이어서 큰 변화가 있는 곳은 아니지만 열심히 목양을 하면서 성도들에게 큰 감화를 주는 노목사님의 목양사역에 주님의 은총을 빌었습니다. 사모님이 저녁식사를 정갈하게 준비해서 맛있게 식사를 하면서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녁 예배후에는 함께 이런 저런 담소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길손에게 새벽예배를 설교를 부탁해서 조금은 긴장하면서 하루 저녁을 보냈습니다.
"주님, 노목사님의 목양사역과 가정과 사모님과 두 자녀를 축복하여주옵소서! 이 양림교회를 통해서 광주애 내렸던 큰 은혜가 앞으로 오고오는 세대에 더욱 풍성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