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어제(3월 26일)가 도마 안중근의사의 순국 99주기였습니다.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 나이가 고작 31세라니 절로 숙연해지고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했던 안중근 의사의 공훈을 기려 우리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합니다.
약지가 단지된 그의 손가락을 보고 있으니 왠지 눈물이 고일려고 합니다.
'대한국인'이라고 쓴 그의 곧은 결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손바닥의 선명한 손금마저 의연해보이고 저 손바닥이 말을 하는 듯합니다.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의 동상입니다.
좀 더 많이 세워지고 좀 더 사람들에게 가까운 곳으로 와야하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여지껏 몰랐는데 안중근의사의 기념관이 남산도서관 옆에 있다고 하네요. 다음에 언제 서울나들이를 하면 가봐야지...생각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배려로 만들었고 그 기념관을 만든 날이 바로 1970년 10월 26일이고 물론 같은 해는 아니지만 같은 날 박통이 시해되었다는 아이러니를 어찌 설명해야할지...물론 어쩌다 겹친 것이겠지만....
역시 위대한 인물의 뒤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계시더군요.
재판을 받고 감옥에서 사형을 받으려고 기다리면서 어머님이 면회를 와서 안중근에게
"아들아, 결코 이 어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불효라고 여기지 말거라.
너는 우리 조선에서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했고, 이 어미는 그것을 한 없이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안의사가 순국하기 전 곱게 입은 한복은 그 어머니가 만들어서 보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저 한복을 지으면서 어떤 마음이었을지....생각하면 저 땀 하나하나 마다 어머니의 서러운 눈물과 가슴 아픈 핏땀이 서려있을 거 같아서 하얀 두루마기가 몹시도 서럽습니다. 위의 사진은 사형 당하기 5분 전에 찍은 사진인데 저 의엿한 표정에서 죽음을 앞둔 두려움의 표정은 전혀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 어머니는 덧붙이기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항소하지 않음)
안의사 역시 면회 온 동생들에게 자기를 대신하여 효도를 다해줄 것을 당부하며
'사람은 반드시 한 번은 죽는 것이므로 죽음을 일부러 두려워할 것은 아니다. 인생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고 담담하게 죽음에 대한 의지를 전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삔공원옆에 묻어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라고 유언했던 그의 말을 여러가지 이유와 사정으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순국한지 100년이 다 되도록 안중근의사는 그의 뜻과 우리의 오랜 바램에도 불구하고 낯선 이국 땅 여순의 어느 곳 차디찬 땅 속에 묻혀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미 당시에 여순감옥의 확장공사 등으로 훼손되어 영원히 못 찾을 지도 모른다고 하니 이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어찌해야할지...먹먹할 뿐입니다.
지금 서울의 효창동 효창원 3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묘 옆에는 안중근의사의 가묘가 있습니다. 안중근묘 찾기가 지금 추진 중이고 언젠가 그 묘를 찾으면 모셔올 곳입니다.
위의 사진은 3의사의 영정과 유해를 담은 상자이고 앞에 앉아있는 이가 백범 김구 선생입니다. 당연히 안의사의 것은 없습니다. 이 나마도 백범이 추진하여 일본의 도움(자료나 생존자의 고증...)을 받아서 찾아온 것이니 백범은 역시 백범이네요. 백범이 서두르지 않았다면 3의사의 유해마저 아직도 못찾았을지도...해방 후 백범이 안의사의 유해를 찾고저 김일성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하나 소련땅이므로 어쩔 수 없고 아직 북한정부가 수립되지 않았으므로 급하지 않다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의식이 정말 중요하다고 할 수밖에....(물론 그 김일성도 후에 유해를 찾으러 두 번이나 그 곳을 방문했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천추의 한이지만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 상(분단, 냉전, 이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찾았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았을 텐데....
재판을 받을 때 조차 그 의연함을 잃지 않고 오히려 이등박문의 15가지 죄를 일일이 열거하여 마치 이등박문을 재판하는 재판장인 것처럼 만들었다고 하니 그의 기개는 남다른 거 같습니다.
이 거사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대한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행했다는 그는 이등박문 저격을 단순한 개인의 암살이 아닌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동양평화를 교란하는 침략에 항거하는 평화의 메시지였다고 동양평화론은 뒷받침하고 있으며 이 같은 발언은 당시 재판장을 취재하던 외신기자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쳐 외신에 보도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감옥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은 미완으로 남았습니다. 조금만 더 쓰면 완성하는데 사형집행일을 조금 연기해달라는 그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 많은 독서를 했으며 (죽기 바로 전에도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형집행인에게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다 읽도록 5분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고 하니....)수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아래의 글은 어떤 블러그에서 퍼온 글입니다. 아마도 젊은 학생인듯합니다.
(드디어 아래 글의 주인을 찾았답니다. 네이버 블러그 토토님이 올린 글입니다. http://blog.naver.com/art270/20064197691)
아직도 그를 추모하는 이들이..일본인들이 있었고,
그의 사형선고에 동의했었던 대표중 한 일본인의 자손들은
그들의 조부의 뜻대로 안의사의 정신을 기리고 존경하는 제를 올리고 있었다.
여순감옥의 간부중 한 이는 안의사의 사형집행날 딸에게
"오늘 아까운놈 하나 죽는다."고 말했다한다.
너무나 소름이 끼친다.
아까운 인물이라는 말이 일본인 입에서 나온이유로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원래 양반출신이라그런지 언행에도 늘 품위,기품이 있었다는데...
"일본인으로서 이런말을 하게 된것은 가슴아픈 일이지만
안중근은 내가 만난 사람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다나카 세이타로-
그들도 이토록 인정하고 존경했던 그 아까운 청년 안중근을 왜 굳이 사형까지 했어야했단 말인가.
일본검찰관은 이토 처단의 이유(15가지)를 안의사에게서 듣고난후,
"당신은 참으로 동양의 의사라 하겠소. 당신은 의사이니까 반드시 사형받아야한다는 법은 없으니 걱정마시오."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논할 것 없이 내 뜻이나....."
버거운 그의 기운이 엄습했다.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논할것 없이....'
어떻게 이런 말을....
이 밀려오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정말 모르겠다.
대의를 위해 그는 스스로를 철처하게 죽이고 명을 구걸하지 않았다.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운이 구름같도다."
그를 감시하였던 간수마저도 그 인품과 사상에 감동해
그를 존경하였다하니...
나는 만나보고싶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눈인사만이라도 한번 나누어 보고싶다.
그 기운을 받아 그대로 본받고 싶다.
도대체 어떤 기개를 가진 이인가.
어떻게 하면 그의 발치만이라도 쫓아갈수있는 '인품의 향기' 를 품어낼수있나...
여기까지가 퍼온 글입니다.
MBC에서 방송한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 스페셜' 방영을 본 그의 소감을 블러그에 적은 글입니다.
방송을 본 그는 또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모르겠다.
방송이 끝나고 안중근의사에 관한 여러가지를 닥치는대로 뒤져읽었다.
흥분해서 이것저것 헤집어놓는 성질탓에 머리속은 늘 잡스런 정보들로 엉망진창 너저분하기 그지없다.
물론 정리도 되지 않고,
충격탓이다."
아래는 안중근의사가 쓴 글입니다.
고막고어자시(孤莫孤於自恃)
'스스로 잘난체 하는것보다 더 외로운것은 없다'
歲寒然後知松柏之不彫 (세한연후지 송백지부조)
- 눈보라 친 연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見利思義見危授命
위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人無遠慮難成大業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白日莫虛渡靑春不再來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아래의 글은 안중근의사의 마지막 유언의 일부입니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의사는 여순(뤼순)감옥에서 순국했으며 그 감옥은 역사기념관으로 보존되어있다. 아마도 여순감옥의 공동묘지의 탈골된 통관에 묻힌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조국의 해방을 지켜보았을....그분을 찾기 위해 애쓰시는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안중근의사 순국99주년을 맞아 자료를 찾으면서 안의사에 대한 공부를 같이 했습니다. 저 역시 저 블러그의 젊은이처럼....
이것저것 안의사에 대한 자료를 발췌하여 여기에 옮기면서 약간 제 생각을 덧붙였습니다.
누군가 따끔하게 꼬집더군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물으면 그 인물에 대해 잘 모르면서 슈바이처, 링컨, 처어칠..... 등 외국인사를 내세우는 경우가 더 많은데 우리나라의 역사공부가 제대로 안 되어서 그렇다고...
http://video.naver.com/2009032606421518616
이 비디오에 달려있는 덧글들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역사교육의 산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바람님 퍼온 글의 경우 누구의 글이라는 것은 밝혀주시는 것이 역사학의 기본 상식입니다. 안의사의 서화 한 점을 지난 해 서울시문화재위원회에서 보물로 지정 신청을 통과시킨 것이 새롭습니다. 그의 서화는 모두 10점이 되지 않으나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곧 하얼빈 역을 방문하여 그 역사의 현장을 카메라로 담아 사진으로 올리겠습니다. 안의사는 참으로 큰 일을 하신 민족의 스승입니다. 바람님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지금 저 퍼온 글의 주인공을 찾으려고 지금 한 시간 이상을 야후, 다음, 네이버를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만 아직 못 찾았습니다. 검색어를리하여 찾아도 없군요. 안 그래도 허탈해하던 중 어떤 글을 찾아 들어왔더니 공교롭게도 제 글이네요. 이를 어찌할까나....
교수님 드디어 인용한 글의 주인을 찾았습니다. 네이버 블러그이구요. 토토님이 작성한 글입니다. http://blog.naver.com/art270/20064197691 에 들어가 보시면 원문이 있습니다. 아주 찝찝하더니 드디어 숙제를 해결한 느낌입니다. 원문도 인용자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길벗 바람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