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꽁박사/L. 엘리엇저/곽안전역
땅콩박사는 철없었던 어린 시절 20살 때, 내 인생에 있어서 큰 영향을 준 책 중에 한 권이다. "땅콩박사"는 조지 워싱턴 카버의 전기다. 암울한 현실 가운데서 자신의 처지를 탓하지 않고, 오직 배움에 대한 열정 하나로 그를 가로막는 인생의 모든 난관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헤쳐나간 사람이다. 그는 흑인으로 태어날 때부터 인종차별로 인한 괴로움으로 힘들었지만 급진적인 인권운동가, 마틴루터 킹목사나 말콤엑스처럼 투사가 되기보다 보이지 않는 누룩처럼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흑인사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던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의 실천적인 삶을 통해서 흑인에 대한 사회의식을 크게 뒤바꾼 사람이다. 그가 땅콩박사로 불리게 된 것은, 땅콩을 이용하여 수십 수백 가지의 실생활에 유용한 상품을 개발하고 만들어내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준 일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하길 “조지 워싱턴 카버”는 미국 역사상 가장 특출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농업에 대한 과학자이긴 하지만, 실제로 식물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화학작용을 카버만큼 많이 알아낸 사람도 없고, 그것을 실생활에 이용하는 방법을 그만큼 알고 있는 사람도 없다. 그는 쓰레기가 쌓여 있는 실험실에서 녹슨 냄비와 내다 버린 빈병으로 만든 실험기구를 가지고 물질을 분석하기도 하고, 또한 그 물질들을 화학적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식료품, 의약품, 건축재료 등을 만들었다.
그는 진흙에서 색소를 빼내어서 손수 그림도 그렸는데 그 그림이 어찌나 아름다웠든지 화상들과 미술관에서 서로들 팔라고 졸라댔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청을 다 물리치고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디트로이트, 시카고, 터스키기, 앨라배마 등지에 있는 그의 친구들의 집인 변변찮은 건물들 벽에 오늘날까지도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또 땅콩을 가지고 파이를 만들고, 잡초를 가지고 샐러드를 만들었는데, 그의 요리법은 호텔에서도 이용되었다. 그는 피아노 공구도, 별로 못했지만 훌륭한 피아노 연주자가 되어. 자기가 근무하던 작은 대학의 재정난을 해결하고자 전국으로 연주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 후 에디슨 연구소로부터 연봉 10만 달러를 주겠으니 와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두 번 생각할 여지도 없이 즉석에서 거절해 버렸다. 그는 늘 말하기를 어찌나 바쁜지 결혼할 틈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꽃씨를 보내 달라고 편지라도 하면 그는 만사를 제쳐놓고 꽃씨를 구해 보냈으며, 어느 집을 지나다가 그 집 뜰에 핀 장미가 생기가 없어 보이면 으레 그 집주인을 불러 그 장미가 무슨 병에 걸렸으니 어떤 조치를 취하라고 일러주곤 하였다.
쿨리지 대통령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도 그의 집을 방문하였으며, 곳곳의 사람들이 그의 자문을 받았고, 여러 외국 정부들이 그를 자문위원으로 추대하였으며, 헨리 월러스, 포드, 간디 등은 그의 절친한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카버가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면전에서 모욕하고 멸시하였다.
아마 이 세상에서 카버만큼 날 때부터 불행한 처지에 놓인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 아버지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자기가 어느 해에 태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노예제도를 종결시킨 남북전쟁의 초기에 한 흑인 노예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아주 허약하고 또 환경조차 좋지 못해서 사람들은 그가 사람구실도 못하고 일찍 죽으리라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는 죽지 않았다. 더욱이 그가 처해 있는 환경이 그처럼 좋지 못하고 또 나중에는 개, 돼지만도 못하게 차별을 받으며 자라났으니 그의 정신은 뒤틀리고, 병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로 자라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개, 돼지만도 못하게 대우하는 사람들에게 적의를 품기보다 호의로 대했으며, 그가 처한 환경은 어둡기만 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희망과 광명으로 꽉 차 있었다.
그는 나이 서른이 훨씬 넘어서야 학업을 끝마칠 수 있었다. 미국 중서부지방의 이 읍에서 저 읍으로, 흑인소년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찾아가 일을 하며 공부하였고, 그는 청년 시절에 길거리와 남의 추녀 밑을 자기 집 삼아 살았으며 굶주림과 헐벗음을 면하는 날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고 배움의 길을 찾아 헤맸다. 이러한 그의 굳은 뜻과 피눈물나는 노력은 드디어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다. 그의 고매한 창의력은 불붙기 시작하여 찬란한 빛을 발휘하게 되었다.
카버가 발명한 여러 가지 공적은 목화재배만을 생업으로 삼고 있던 미국 남부 지방에 큰 희망을 주었다. 그는 오랫동안 목화만을 재배하여 투박할 대로 투박해진 수백만 에이커의 땅을 개량하고 거기에 심을 수 있는 새로운 품종의 작물을 찾아냈다. 그렇게 되니 그와 자리를 같이하여 식사하기도 꺼려하고 그에게 말조차 걸기 싫어하던 사람들까지도 그의 은덕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공적은 대대로 빈곤에 시달리던 남부 연방의 가정들에게 광명을 주었으며 그들의 자녀들에게는 큰 희망을 주었다. 또한 그 자신은 백인 사회를 향한 흑인들의 인권에 대하여 한마디도 말한 적은 없지만, 그는 백인종과 흑인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평화롭게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그늘을 앞당기는 데 누구보다도 큰 공헌을 하였다.
조지 워싱턴 카버는 세계의 모든 사람 곧 흑인, 백인, 황인, 홍인들로 하여금 더욱 부하게, 더욱 건강하게, 또한 더욱 편안하게 살도록 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조지 워싱턴 카버의 삶은 나에게도 큰 희망과 삶의 목표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언제나 낙심되고 큰 난관에 부딪칠 때면 그의 전기를 읽는다. 그러면 금방 주저앉아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마력과 같은 힘을 느낀다. 그의 삶는 나의 롤 모델이 되어주었고 나도 세상을 향하여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벅찬 일이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모든 세포가 춤을 추는 것 같은 환희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위하여 밤하늘에 별이 빛날 수 있도록 까만 배경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의 즐거움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알기 때문이다.
20살 때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몰라서 방황했던 시절에 이 한 권의 책은 나에게 있어서 그 어떤 진주목거리 보다도 더 나 자신에게 기쁨을 안겨다 주었다.
지금도 “땅콩박사”는 나의 삶을 조명해주고 나아갈 길을 밝혀주고 있다.
“ 장미꽃”은 붉다고
우월하거나 노랗다고 열등하지 않다.
단지 함께 어울려서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갈 뿐이다.
-조지 워싱턴 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