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럽고 엄숙해야할 왕의 무덤이 있는 곳에 왜 하필이면 소갈비집이 유명할까?지금도 수원갈비 간판 달고 성업하는 갈비집이 한두곳이 아닌데 어찌된 까닭일까?
조선시대에는 농경사회라 소는 농민이 키우더라도 국가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함부로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임금의 허가없이 소를 잡다가는 큰 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왕능에 제사 지낼때는 소를 잡아 임금과 왕비의 제상에 올렸기 때문에 자연히 왕실의 요리법과 고기가 왕능앞에서 발달하고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왕이 죽으면 바로 계령이 선포되고 성문과 성곽의 검문이 시작되고 다음 임금의 등극시까지 사대부는 함부로 이동이
금지되며 요즘의 장례위원회인 국장도감과 빈전도감, 산능도감이 임시로 설치되고 의정부의 좌의정이 총책이 되며
이조,예조,호조,공조판서와 한성판윤(서울특별시장)이 분과위원장이 되어 5개월 동안 국장이 치러집니다.
한편 왕능은 장례가 끝난 뒤에도 2,3년간 공사가 진행되는데 공사비가 지금 금액으로 1조원이 들었다니 왕능 앞에 고기집이
많이 생길수 밖에 없지요.
태능(泰陵)은 11대 중종의 계비로 파평 윤씨 尹元衡의 누이 문정왕후가 잠들어 있는곳으로 살아 생전 윤씨들의 세도 만큼이나 거세어 지금은 그 일때가 선수촌으로 유명해 졌지요.
홍능(弘陵)은 21대 영조의 원비(元妃)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 (달성부원군 徐宗悌의 딸)의 능으로 이곳에는 영조 임금이
묻일곳이 빈곳으로 아직도 남아 있는데 사도세자를 죽게하자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를 효종임금이 묻였다가 이장한 묘터에
장사지내 아버지의 한을 풀어 준 능으로 유명합니다.
수원 화성 역시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능인 융능(隆陵)과 22대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가 묻힌 건능(健陵)을 함께 융건능(隆健陵)이라 부릅니다.
요사이 광우병,AI 때문에 들짐승, 날짐승 수난을 당하고 나라마져 떠들석하여 왕능 갈비 생각이 나서 몇자 올립니다.
첫댓글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면 「○○가든」「△△가든」「▲▲가든」「××가든」등이 연이어서 있어 우리나라의 딴 이름이 『가든 공화국』이 되어렸다네!!! 그 가든들이 모두 갈비집이거든..........
나도 한마디......중종에게는 세분의 왕비가 있었다. 첫 왕비가 단경왕후(端敬王后)이고 제1계비가 장경왕후(章敬王后)이고 제2계비가 중종이 죽은 후 오빠 尹元衡과 함께 세력을 휘두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중종을 포함한 이 네 분의 능이 각기 흩어져 있는데 이는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욕심 때문이었다.
중종이 죽자 제1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 옆 즉 서삼릉(西三陵-경기도 고양시 삼송동)에 안장을 했는데, 뒤에 왕비가 된 문정왕후(文定王后)는 중종과 장경왕후(章敬王后)가 함께 묻힌 것을 질투하여 중종을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정릉(宣靖陵-성종의 계비 정현왕후의 능인 宣陵과 문종의 靖陵을 합쳐서 宣靖陵이라 칭함)으로 이장을 하고 자신이 그 옆에 묻힐 작정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뒤바뀌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자 제1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세력이 곧바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능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생전 생각대로 중종의 옆에 조성되지 못하고 중랑구 태릉(泰陵)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