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제네바 회담의 결과는 그와 달랐습니다.... 이번에는 미국이 나선 것입니다....
제네바 회담에는 베트남 민주공화국, 프랑스, 영국, 미국, 소련, 중국, 베트남 바오다이 정부, 그리고 라오스와 캄보디아 정부까지 참여하였습니다. 회담의 주된 당사자는 베트남민주공화국과 프랑스였지만, 회담의 승리자는 중국이었습니다. 어째서 회담의 승리자가 중국이었을까요?
제네바 회담은 원래 베트남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한국 전쟁이 휴전으로 종결된 후 한반도 문제 해결을 다룬 유일한 국제 회의였습니다. 이 회담이 결렬된 후 한반도 문제는 6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미해결인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은 한국전쟁에서는 직접 참전하여 미국의 북진을 저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는 베트남의 후원자가 되어 베트남의 승리를 이끌었던 것입니다.
‘자유 문명’의 대표자 미국은 ‘원시적인 공산국가 중국’의 부상에 모멸감을 느꼈는지 모르겠습니다. 회담장에서 중국 외교부 장관 저우런라이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은 악수를 거부하였습니다. 미국은 대만의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였고, 유엔 상임이사국 자리도 여전히 대만의 몫으로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중국은 미국과 겨룰 수 있는 세계의 열강이 되었습니다. 중국이 미국과의 대결에서 타격을 입을 것으로 생각한 스탈린의 기대도 빗나갔습니다. 물론 스탈린은 이미 세상을 떴습니다. 세계 공산주의 리더십은 이제 중국과 나누어야 했습니다.
베트남민주공화국 대표는 팜 반 동이었습니다. 팜 반 동은 당당하게 베트남은 물론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완전 독립과 자유선거, 모든 외국군의 철수를 요구하였습니다. 나아가 회담장에 라오스와 캄보디아 해방군의 대표도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프랑스는 이제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아직 20만 가까운 병력이 있었지만,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또한 바로 알제리에서도 전쟁이 터졌습니다. 프랑스는 ‘명예로운’ 퇴각을 희망했습니다. 미국과 영국도 베트남은 물론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주의’ 세력에 접수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습니다. 인도 역시 인도차이가 전역이 중국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는 것을 우려하였습니다.
저우런라이가 중재 역할을 주도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위도 17도 선을 경계로 베트민 군은 북쪽으로 철수하고 프랑스군은 남쪽으로 철수한다. 주민들은 각기 희망에 따라 이주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군사경계선은 잠정적인 경계일 뿐이며, 2년 이내에 총선거를 통하여 베트남 문제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 후 프랑스 군은 남부에서도 철수한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현 정부를 인정하고, 그 해방군들에게는 작은 점령지는 인정하되, 회담의 대표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프랑스는 만족하였습니다. 베트남은 불만족스러웠습니다. 마저 싸워 프랑스를 내쫓을 수 있는데, 반쪽을 찾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을 걱정하였습니다. 중국은 미국 대신 프랑스가 가능한 오래 남아 있기를 희망했습니다. 미국은 베트남 전역이 호치민 정부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새로운 전쟁이 야기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은 더 이상 미국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호치민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2년 뒤의 총선거라는 국제적 신의와 대의명분에 만족하기로 하였습니다.
미국 그리고 프랑스가 세워 놓은 바오 다이 정부는 베트남 남쪽을 호치민 정부에게 넘길 의향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네바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은 서명 당사자가 아니므로 그에 구속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2년 뒤의 총선거’란 약속은 국제적 사기극이었던 것입니다. 베트남인들은 분노하였습니다. 하지만, 호치민은 다시 인내를 호소하였습니다. 이제 “끝까지 저항하자”는 구호 대신 “평화, 독립, 통일, 민주주의”를 외치자고 하였습니다. 1945년 프랑스와 협정을 맺을 때에도 그랬듯이, 호치민은 가능한 한 무력이 아니라 협상으로, 전쟁이 아니라 국제적 여론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트남 지도부에서 호치민의 점진주의와 협상주의는 점점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제네바 협정에 따라 프랑스 군은 남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북쪽의 주민들 80-90만명도 따라 갔습니다. 그 가운데 60만명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유인선,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이산, 초판 5쇄, 2006, 390쪽) 하지만, 비슷한 숫자의 가톨릭 신도들은 북에 남았습니다. 남쪽에서도 5-9만의 베트민 조직원들과 게릴라들도 북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제네바 협정은 남쪽에서 활동하던 베트민 사람들에게는 큰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10-15만의 베트민 동조자들은 총선 준비 등 미래의 사업을 위해 남쪽에 남았습니다.(윌리엄 듀이커, 호치민 평전, 푸른숲, 688쪽)
호치민은 조용히 하노이로 돌아왔습니다. 총독부 관저가 제공되었지만, 호치민은 옆의 조그만 오두막(원래 총독부 정원사의 집)에서 살기로 하였습니다. 호치민은 제네바협정에서 예정한 총선거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남쪽의 바오 다이 정부와 미국은 여러 구실을 대며 응하지 않았습니다. 호치민은 프랑스에도 호소하고, 중국과 소련에도 지원을 부탁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두 미국의 눈치를 볼 뿐이었습니다.... 바오 다이 황제는 투철한 반공주의자이자,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응오 딘 디엠을 수상으로 앉혔습니다. 응오 딘 디엠은 베트민 동조자들의 색출과 검거에 나섰습니다. 남쪽에 남았던 베트민들에게는 모진 세월, 울분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상 다른 표기 없으면 대체로 윌리엄 듀이커, 호치민 평전, 푸른 숲, 2003에 의존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