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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성지순례를 간다.
문제는 하루에 네 곳, 게다가 토요일에 간단다.
평일에 하루 두 곳 정도를 돌아봐야 할텐데 그렇게 간다니 하는 수 없다.
-1- 명동 대성당.
입구 가까운 곳에 버스가 잠시 정차를 하고 부지런히 내려 성당을 향한다.
성당 입구에 눈에 띄는 표석이 있다.
"이재명의사 의거터"(李在明義士義擧址)다.
그 이야기인즉 이러하다.
한일병탄(韓日竝呑)직전인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국왕"레오폴드 2세"(Leopold II)의 추도식에
"을사오적"(乙巳五賊)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이 참석하였다.
"이재명"(李在明)의사(義士)는 신문에서 이 사실을 먼저 알고
성당 앞길에서 군밤 장수로 변장하고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11시 30분.
인력거를 타고 내려오는 이완용에게 달려들어 이완용의 옆구리와 어깨를 칼로 3번 찔렀다.
하지만 인력거꾼 박원문이 이를 가로막으며 칼에 찔려 그가 대신 죽고 실패했다.
"이완용"도 칼에 크게 찔려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재명 의사(義士)는 이완용이 죽은 줄 알고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헌병의 총을 맞고 체포되었다.
이완용은 당시 최고 흉부외과 의학 기술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백범일지"에 "이재명"의사의 의거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다.
"김구"가 황해도 재령군에 있었을 때 "이재명이라는 자가 총을 쏘며 난리를 피우면서
아내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재명 의사를 만났는데 당시 김구는
이재명 의사가 단순히 자기 말을 안 듣는 아내를 죽이려고 하는 줄 알고
그의 총을 빼앗아 버리고 그것으로 끝난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재명 의사의 의거 이후
그것이 매국노 "이완용"을 척살하기 위한 무기였음을 알고 크게 후회하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죽이겠다 하자 그의 아내는 만류하였고
이재명은 "이 여편네가 나라가 중한 것을 모른다"고 화를 낸 것이라고 한다.
의거 후 일년뒤인 1910년 9월 30일.
"이재명"(李在明)의사(義士)는 그의 나이 22세에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殉國)하셨다.
명동성당이 세워진 곳은 원래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 ?∼1786)의 집이 있던 자리로
"이승훈"(李承熏) ,"정약전"(丁若銓)의 3형제, "권일신"(權日身)형제 등이 모여 조선 천주교회를 탄생시킨 곳이다.
"김범우"(金範禹, ?∼1786) 토마스는 "이승훈 베드로", "정약전 안드레아" 등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고 자체적으로 공소(公所)예식을 드렸다.
포도청이 적발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명문가 자제라서 적당히 훈방 조치 됐지만,
"김범우"는 중인 계급이라 고문을 받고 귀양을 가다가 중도에 사망했다.
그후 "김범우"의 집터는 고종(高宗)이 "침계 윤정현"(梣溪 尹定鉉)에게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 저택은 바깥채만도 60칸이 넘는 넓은 집이어서 처음에는 한옥 그대로 교회로 이용했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가 윤정현에게 써 준 그의 호인 "침계"
"침계 윤정현"(尹定鉉)은 추사 김정희와 친밀한 사이로 유배되었을 때 가까이에서 보살펴주었다고 한다.
"윤정현"의 부친 "윤행임"(尹行恁)은 전라도관찰사로 재직할 때인 1801년 "신유박해" 때
서학 (西學)을 신봉했다는 탄핵을 받아 신지도에 안치되었다가 곧 참형당하였다고 한다.
"블랑"(Blanc)主敎는 이 곳에다 우선 "종현 서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 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해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守護通商條約 :1886년)을 체결한 이듬해인 1887년 5월,
대지를 마저 구입하면서 그 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아 내려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신자들의 열성으로 시작된 성당의 정지 작업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운 왕실과의 부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4년이 지난 1892년 5월 8일에 가서야 기공식을 갖게된다.
그것은 성당 터가 조선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영희전"(永禧殿)과 가까이 있어
풍수지리상 곤란하고 궁궐이 내려다 보인다는 이유로 조선 왕실과 갈등을 빚으면서 성당 건설에 난항을 겪은 것이다.
당시에는 서울에 높은 건물이 없어 경복궁과 명동성당이 서로 마주보고 있게 됐다고 한다.
경복궁에서 보면 성당의 십자가가 마치 창끝처럼 경복궁을 겨누는 모습이라 꺼려했다고 한다.
그 사이 초대 주임 "블랑"(Blanc)주교가 1890년 선종하고 "두세"(Doucet)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성당 설계와 공사의 지휘 감독은 "코스트"( E.J.G. Coste 高宜善 )신부가 맡았는데
당시에는 조선인 기술자가 없어 중국인 벽돌공, 미장공, 목수등이 동원되었다.
성당을 짓는 실무 기술자들이 대부분 중국에서 왔는데,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이 기술자들이 중국으로 귀국해 버려 지연되는 일도 있었다.
"코스트"( E.J.G. Coste)신부는 약현(현 중림동)성당과 용산 신학교의 설계 감독도 맡았다.
"코스트"(Coste)신부가 1896년 선종하고, 그 뒤를 이은 "프와넬"( Victor Louis Poisnel )신부에 이르러서야
성당 건축을 마무리하여 프랑스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노력으로 1892년 착공한 후 1898년에 마침내 완공하였다.
드디어 1898년 5월 29일 성신 강림 대축일에
조선 교구장 "뮈텔"(Gustave-Charles-Marie Mutel)주교의 집전으로 역사적인 축성식을 가졌다.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근대 시기에 지어진 대표적인 건물로
평면은 라틴 십자형 삼랑식(三廊式)이고, 고딕 양식의 최초의 벽돌 건물이다.
명동성당은 축성 당시 자금 사정도 넉넉하지 않았고,
성당을 지을 큰 돌을 구하기 어려워 벽돌로 짓게 됐다고 한다.
건물의 평면 길이 약 69m, 너비 28m, 본당 높이 23m, 종탑 높이 47m. 건축면적 약 1,500㎡.
그러나 1911년에는 명동성당 주변 진고개가 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지정되고
일본인들의 상점들이 길을 차지해 버려 명동성당은 진입로가 막혀 있었다.
이때 명동성당의 "뮈텔"(Gustave-Charles-Marie Mutel)주교(主敎)는 진입로 확보를 위해 전전긍긍하던 중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helm)神父의 편지를 받고 뜻밖의 기회를 맞게 된다.
"빌렘"신부는 "안중근", "안명근"등 독립지사들과 가까이 지낸 신부였는데
"빌렘"신부는 "안명근"의 고해성사를 듣던 중 독립지사들의 활동을 알게 되어 "뮈텔"주교에게 편지로 알렸고,
"뮈텔"주교는 이를 곧장 조선 총독부 헌병사령관인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에게 달려가 밀고(密告)를 했다.
"뮈텔"주교의 밀고를 받은 조선 총독부는 즉각 행동에 돌입하여
"안명근" 체포를 시작으로 600여 명에 이르는 독립지사를 체포하고 대대적으로 탄압을 했다.
이것이 105인을 검거하고 혹독한 고문을 가해 독립운동의 싹을 자른 "105인 사건"의 발단이다.
"뮈텔"주교의 밀고는 독립운동 조직을 파괴하는데 주효했다.
조선총독부가 이에 대해 감사를 표하자 "뮈텔"주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명동성당의 진입로 해결을 요청했고 총독부는 즉시 명동 성당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진고개 길"은 수많은 독립지사의 목숨과 맞바꾼 "매국의 길"이 된 것이다.
"뮈텔"주교가 "안명근"야고보의 고해성사로 얻은 정보를 일제에 밀고한 대가로
당시 일본인과의 성당부지(聖堂敷地) 소송 문제에서도 이득을 얻는다.
명동성당은 총독부로부터 하사받은 부지로 대대적인 증축을 하였으며 그 부지는 현재도 명동성당의 일부다.
그리고 "뮈텔"주교는 중일전쟁(中日戰爭)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15일에
"황국국위선양평화"(皇國國威宣揚平和)미사를 거행하고 "황군 위문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조선시대 최고의 "외국인 반역자"인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하는 그림.
"안중근"(安重根, 1879~1910) 義士도 가톨릭 신자였고
"안명근"이 고해성사를 하며 독립운동을 이야기한 것과 같이
"안중근 의사도 국외에서 거사를 계획할 때 가까운 신부들과 상의를 했다.
가톨릭 신부가 일본에 밀고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은 가톨릭은 상당히 정의로운 종교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고 죽기 전에
마지막 "종부성사"(병자성사)를 간절히 원했고 이때 "빌렘" 신부가 그에게 "종부성사"를 행한 후
“신이 너의 영혼을 거두어 주실 것이니 안심하라.”고 다짐했지만,
그러나 영혼을 거두어 주겠다던 가톨릭은 "안중근"의사를 살인범이라는 이유로
신자 자격을 박탈하여 "안중근"의사는 사후 100년 동안 가톨릭에서 제명(除名)되어 있었다.
이 후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1993년 8월 21일 명동성당에서 집전한 미사에서
"그분의 의거는 일제의 무력침략 앞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행위였고 정당방위이며
의거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라며 안중근 의사의 행동이 더 큰 평화를 위한 노력이었음을 인정했다.
이후 순국 100주년을 맞은 2010년 3월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집전(集殿)으로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추모미사를 통해 가톨릭 신자임이 공인돼 공식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품안으로 들여졌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 천주교 일각에서는,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했던 잔 다르크가 시성되었듯이, 안중근도 시성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이에 따라 2011년 10월 31일, 천주교 서울 대교구는 안중근의 시복(諡福)을 추진하는 업무에 착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6년 10월 22일 충남 홍성군의 홍주 생매장터 순교성지의 14처 봉헌 미사에서,
천주교 대전 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는 강론 중에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시복 시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본래 시복 및 시성 추진 관련 업무는 해당 성인의 출신지 교구장이 하는 것이나, 안중근 의사가 태어난 황해도는 북한에 있다.
따라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는 이 직무를 맡을 주교 한 사람을 선출하였고, "유흥식" 주교가 이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명 동 성 당.
바보가 성자가 되는 곳
성자가 바보가 되는 곳
돌맹이도 촛불이 되는 곳
촛불이 다시 빵이 되는 곳
홀연히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
돌아왔다가 고요히 다시 떠날 수 있는 곳
죽은 꽃의 시체가 열매를 맺는 곳
죽은 꽃의 향기가 가장 멀리향기로운 곳
서울은 휴지와 같고
이 시대에 이미 계절은 없어
나 죽기 전에 먼저 죽었으니
하얀 눈길을 낙타타고 오는 사나이
명동성당이 된 그 사나이를 따라
나 살기 전에 먼저 살았으나
어머니를 잃은 어머니가 찾아 오는 곳
아버지를 잃은 아버지가 찾아와 무릎 꿇는 곳
종을 잃은 종소리가 영원히
울려 퍼지는 곳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2022년 6월 5일
작품 명 : 사형선고 받으심.
작 가 : 장 동호
규 격 : 92 X 95 X 213cm.
명동대성당 좌측의 사제관 앞 정원에는 있는 예수님의 거대한 두상.
장동호 프란치스코 조각가가 제작한 "예수 사형 선고받으심"이다.
명동대성당 건립 100주년 기념으로 성당 뒷마당에서 조각 전시회를 가진 후에 기증한 작품이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며 그분이 겪으신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깊이 느낄 수 있다.
예수님은 머리에 날카로운 가시관과 못이 박히는 혹독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눈을 굳게 감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이시는 모습이다.
2천여 년 전 온몸으로 사랑을 실천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마주 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예수 님은 돌아가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고통 속에 숨을 거두셨지만 죽음에 굴복하지 않고,
모든 것을 견뎌 내고 금방이라도 눈을 뜨실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예수님의 죽음과 그 죽음을 뛰어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준다.
좌대에 있는 세개의 못은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을 때
양손과 발에 박혔던 것으로, 그분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가운데 한 분이시라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 세상과 모든 사람을 극진히 사랑했다는 것을 말없이 알려 준다.
성당 뒤 성모동산의 성모님.
1948년 명동성당 축성 50주년 기념으로 봉헌되었다.
하단에는 "원죄없으신 잉태"라는 뜻의 "성모무염시태"라는 글귀가 있다.
"성모 동산"에서 본 성당.
맨 앞쪽이 "지하성당"이고 그 위로 긴 창문이 성당 제대의 뒤창문이다.
입구 청동문.
한국 천주교 초기 박해 역사를 압축해 보여주는 작품으로 명동성당 중앙에 있는 청동문이다.
조각가 최의순 작가가 1987년 저부조 기법으로 제작한 이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그는 3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한 끝에 1987년 높이 2.5m, 폭 1.25m의 작품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성당의 벽돌 구조물이 무거운 청동 문을 지탱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여
설치되지 못한 채 22년 동안 창고에 잠들어 있다가 2009년 초에 이 문을 걸게 되었다.
윗부분은 한국 땅에서 최초로 미사를 집전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와
평신도 단체 명도회 회장이자 최초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를 편찬한 정약종을 표현했다고 한다.
중앙은 조선에 온 프랑스 선교사들과 교우들의 피난 행렬이고,
하단에는 박해받던 시절에도 소외된 사람들을 지킨 초기 천주교회 사회활동을 보여준다.
문 위로 "스테인드 글라스"가 보인다.
유일하게 현대에 제작된 "이남규" 작가의 1989년작 "제44차 세계 성체대회 기념" 유리화다.
"명동 대성당은 가로축보다 세로축이 긴 라틴 십자형으로 되어 있다"
명동대성당의 제단을 둘러싼 "14사도화" 聖畵는 "장발"(張勃 : 1901~2001)루도비코의 작품이다.
1898년 명동대성당 축성식 전후에는 반원형 제단의 벽 주변이 텅 비어 있었다.
"드브레"(Devred)"주교는 1925년 바티칸에서 거행된 79위 "복자 시복식"(福者 諡福式)후에
한국 교회 미술의 개척자였던 "장발" 화가에게 이 공간에 설치할 작품을 의뢰했다.
화가는 텅 빈 공간을 어떻게 장식할지 많은 고민을 하면서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을 방문했다고 한다.
신라 시대에 조성된 석굴암은 거대한 화강암으로 만든 "본존불"(本尊佛)둘레에 10대 제자가 새겨진 모습이었다.
여기서 영감을 얻은 그는 제단의 감실에 계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이 감싼 듯한 모습을 그리기로하였다.
2년간 심혈을 기울인 끝에 1926년 "14使徒畵"를 완성했다.
아치형 벽감에 설치된 "사도화"는 한국 교회 최초의 제단화로서 명동대성당의 성스러움과 품위를 한층 높여 준다,
화가는 우리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 사제들을 모델로 하여 사도들을 친근한 모습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좌로부터 "마티아", "시몬","바르톨로메오","소 야고보","요한",
끝에 있는 분이 "안드레아"
가운데 성모님 아래 "베드로"와 "바오로"
중앙 위의 성모님과 아기 예수.
우측에 " 대 야고보","토마스", "필립보", "마태오", "타대오","바르나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외에 초대 교회에서 복음 전파에 헌신한 "사도 바오로"와
그의 동행자였던 "바르나바"를 추가로 그려 넣었다.
"14사도화"는 가톨릭교회가 예수님과 사도로부터 이어지는 교회이며 천상 성인들과 일치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교회의 사도들과 성인들처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삶의 첫 자리에 두고 올바르게 살아야 함을 일깨워 준다.
제대 뒤쪽의 다섯 개 긴 세로 창은 "로사리오"(묵주기도) 15단을 담고 있디고 한다.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생애 중 15가지 중요한 사건인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등이 그려져 있다.
그림 순서는 맨 왼쪽 위부터 아래로 진행되며, 각 그림 하단에 로마 숫자로 순서가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다음 조용한 시간에 방문하여 하나 하나 천천히 담아 볼 예정이다.
천장 가까운 곳에는 "광창"(光窓)이 스테인드 글라스로 설치되어 있다.
신자석 옆에 설치된 스테인드 글라스.
위쪽의 "광창"(光窓)
"장미창"(薔薇窓)의 문양은 다른 창문의 문양과 비슷한데 크기가 다르다.
명동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는 1898년 국내 최초로
주교좌 성당에 설치된 19세기 유럽 스테인드 글라스의 표현양식을 수용한 작품이다.
앞문위에 있는 이남규 작가의 1989년작 "제44차 세계 성체대회 기념" 스테인드 글라스를 제외하고,
모든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은 19세기 유럽 유리화 표현양식을 수용한 작품이다.
프랑스 유리 제작사 "제스타"(GESTA)공방이 제작했다.
"제스타" 공방에서 제작되어 설치된 것인데,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 많은 것이 깨져
수습한 뒤 1898년 성당 축복식에 맞춰 설치했다.
1898년 최초의 주교좌성당인 명동대성당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는
19세기 유럽의 표현 양식을 직접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교회사적, 미술사적 의미와 가치가 큰 작품이다.
작품에 "GESTA Freres"라는 제작자의 서명이 남아 있어 당시 프랑스 툴루즈의
대표적인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사인 제스타 공방에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명동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프랑스에서 제작되어 국내에 유입됐지만,
작품에 남아 있는 서명을 통해 그 사실들 확인할 수 있을 뿐
작품의 계획과 진행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아쉽게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1898년 프랑스에서 조선의 종현까지 어떠한 경로로 그 많은 스테인드글라스가 들어올 수 있었을까?
"오늘 스테인드글라스 상자를 뜯는 일을 끝냈다.
그런데 불행히도 많은 것이 깨져 있었다“ - 1897년 9월 1일. 뮈델 주교 일기-
1984년 한국 가톨릭200주년을 맞아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방한했을 때 1차 보수 복원이 있었고,
2007년 2차 복원을 마치고 현재의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다.
밖에서 본 "장미창"(薔薇窓)
제대 왼쪽에 있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제대.
뒤쪽에 있는 지하성당은 성인들의 묘역이다.
조용히 앉아 묵상하고 있는 분들에게 방해되지 않으려고 사진 몇장만 찍고 나왔다.
1970년대부터는 명동 성당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의 성지 역할을 해왔다.
명동성당에서는 특히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1971년 성탄 자정미사 강론",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조작"을 폭로했던 1987년 5·18 제7주기 추모미사가 거행되었고,
6월 항쟁 당시에는 "대학생 농성단"의 은신처로 역할을 다했다.
6월 항쟁 이후에는 항쟁 희생자들을 기리는 각종 미사들이 집전되었다.
1984년에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敎皇)이 방문한다.
명동성당 건립 이래 가장 큰 손님이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을 주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교황은
행사 당일인 5월 6일 대회장에 가기에 앞서 오전 8시 명동성당을 방문했다.
교황은 성당 오른편에 있는 명례방 집회 성화와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인
이벽 세례자 요한, 이승훈 베드로, 김범우 토마스 성화(聖畵)와 교황 방한 기념 부조를 축복했다.
이어 제대 앞에 마련된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한국 천주교회와 한민족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2014년에는 사목(司牧)방문차 한국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한 일정의 마지막으로 명동성당을 방문하였다.
교황은 명동성당 내 꼬스트홀에서 한국종교 지도자들과 만난 후 대성전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주례하면서
남북한의 용서와 화해를 촉구하고 전쟁이 아닌 평화를 기원했다.
그리고 2018년 9월 14일 아시아 최초로 교황청이 공식 승인한 "국제 순례지"가 되었다.
교황청은 이 길이 한국 천주교의 박해와 순교의 역사를 담았다는 점을 인정해 국제 순례지로 승인한 것이다.

첫댓글 명동성당의 역사를 새롭게 알게 되었네요.
수없이 지나다니면서 외관만 바라 보았는데, 덕분에 자세하게 볼수 있었네요.
주변 친척 중에 누군가 이곳에서 결혼식을 하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