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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등산사 초록 [춘천편 1] 1957년 설악산 개발 위한 촬영산행이 모태
[월간 산 2004-10-1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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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2월 동계등반…같은해 6월28일 강원산악회 창립
아무리 찬란한 과거가 있었다 한들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이 어찌 그 진가를 알 수 있겠는가. 내 오랜 산친구들이 ‘60대산회’라는 이름의 모임을 결성하고 값진 한 권의 책 <1960년대 한국의 산악운동-대구 광주 부산 전주 제주편>을 출간했다.
이 모임의 대표 박진 총무가 수 년 전 이 모임의 정회원으로 참여해 줄 것을 권유했다. 그렇지만 참여 여부를 선뜻 회답하지를 못했다. 집사람이 와병 중인 가정사정도 있고, 한편으로는 내 나이가 이 모임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60’이라는 숫자가 나이를 말하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고, 어느 날에는 회원 명단에 내 이름이 등재되어 있는 것도 보게 됐다.
지난해 봄에는 1년에 봄 가을로 갖는 두 차례 공식 모임을 춘천사람들이 주관해야 하는 차례였다. 박진 총무와 박재곤 회원이 춘천을 방문하고, 춘천의 산친구들이 펼친 멋진(?) 주연 자리에서 2003년 봄 모임의 장소를 속초시 동명항에 있는 돌섬횟집으로 결정했다. 이 모임에는 참으로 반가운 전국 각지의 오랜 산친구들이 모였다. 돌섬횟집에서는 파도소리 들으며 싱싱한 회를 즐겼고, 다음날 아침에는 옛날을 회상하며 외설악도 탐방했다. 1박2일이라는 짧은 일정이라 많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참으로 소중한 만남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월간山에 연재하고 있는 한국등산사 초록 춘천편을 써야만 한다는 어려운 ’숙제’도 안게 됐지만, 다행스럽게도 강원산악회가 창립 40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강원산악회 40년>이 있기에 이를 근간으로 숙제를 풀어 나가기로 한다.
1957년 설악산 등반이 강원산악회 창립 싹 틔워
1950년대에 비하면 지금의 설악산은 마을의 뒷동산 같은 국립공원이 되어 있다. 내가 처음 올랐던 설악산은 지금 사람들이 히말라야를 생각하는 것만큼의 세계였다고나 할까. 어쩌면 지금의 히말라야니스트들이 느끼는 히말라야 보다 더 멀고 더 어려웠던 미지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957년 10월 중순, 나는 강원도청에 고용되어 ‘설악산 관광개발을 위한 영화촬영’이라는 일을 맡게 됐다. 그때로서는 제법 거창한 이름의 사업으로 설악산을 올라야 했다. 그때까지 나는 ‘등산’이라는 것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공비들이 출몰하던 때라 등산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었다. 나 한 사람을 위해 양양군청 직원 2명, 양양경찰서 무장경찰관 2명, 청간 HID에서 군인 2명, 그리고 짐꾼 3명이 동원되어 10명의 대가족이 됐다.
제대로 된 지도 한 장 없었고, 설악산의 사정을 안다고 하는 사람은 짐꾼들 뿐이었다. 그들은 6.25 때 지게부대로 참전했던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신흥사까지 길은 양양군 강현면쪽에서 고개를 넘고 개울을 건너 걸어서 가야만 했다. 겨우 임산도로 같은 것이 있기는 했지만, 길 가운데는 큰 바위들이 불거져 나와 있기도 했다.
첫날 우리는 마등령을 넘고 오세암, 원명암터를 거쳐 한밤중에 백담사에 도착했다. 다음날 우리는 백담사에서 가야동을 거쳐 봉정암까지 전진. 길이라고는 오랫동안 인적이 끊어진 데다 수목이 우거져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우 겨우 6.25 때 우리 군과 인민군이 설치했던 군용전화선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수십 가닥의 양측 전화선이 어지럽게 깔려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고, 고지의 점령자가 수도 없이 바뀌었을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봉정암은 소실되어 빈터인데, 우리는 그곳에다 화덕불을 피워 놓고 노숙을 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청봉을 향했다. 사람이 다닌 흔적은 전혀 없고, 능선마다 골짜기마다 철모, 박격포탄, 소총탄이 널려 있었고, 방치되어 있는 전사자의 백골들은 전쟁의 아픔을 새삼 되새기게 했다. 중청과 대청 사이에는 박격포탄 통이 수백 개나 버려져 있었는데, 정상에는 당시 군인들이 쌓아 놓은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돌무덤이 우리 일행을 숙연케 했다.
정상에서 화채봉 능선을 타고 내려가다 오색약수쪽 계곡을 내려오는데 밤이 됐다. 거의 다 내려올 무렵 우리는 뜻하지 않은 총격을 받고 혼비백산했다. 동행인 군인들이 소리소리 질러 의사소통이 되고 사태가 수습된 뒤 내려가 보니 우리 일행은 공비로 오인된 것이었다. 잣을 따러 온 사람들이 밤중의 인기척을 공비로 알고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군부대에 신고한 것이 이런 사태를 빚었다.
그 날 밤을 그들의 움막에서 보내고 다음날 양양으로 돌아온 것이 내가 설악산을 처음 올랐던 기록이 됐다. 이 어처구니없는 산행이 씨가 되고 잇따른 동계 설악산 등반이 계기가 되어 1958년 6월28일 강원산악회가 창립하게 된다.
산악운동의 동반자 이문주와 심용섭의 만남
내 평생 산악운동의 동반자이자 인생으로는 후배인 심용섭(沈龍燮·1932년생)은 <강원산악회 40년>에 참으로 소중한 기록 ‘마등령 겨울산의 시련을 딛고’를 남겨 놓았다. 이 글을 읽어 보면 그와 내가 만나게 된 계기와 강원산악회가 창립하게 된 과정을 그런대로 파악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이 글은 거듭 거듭 소중한 기록으로 평가를 받아야만 할 것이다. 이 글을 발췌하고 재구성해서 여기에 인용한다. 심용섭은 강원도 문화재전문위원과 강원산악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6.25 휴전 후의 혼돈 속에서 1957년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겨울이었다. 동양통신의 지역 특파원이었던 이귀영(李貴煐)이 내가 근무하고 있는 춘천방송국으로 나를 찾아왔다. 나와 그는 시내에서도 가끔 마주치는 구면이었다. 음악학교 출신으로 평양방송국 합창단원이었다는 그는 방송에 출연해 ‘봄처녀’ 등의 가곡을 들려 준 적도 있어 잘 아는 처지였다.
그는 이번 설악산 적설기 등반을 계획하고 있는데 멤버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 자기와 나 두 사람이고, 한 사람만 더 있으면 갈 수 있겠다는 것이다. ‘모험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나 판에 박은 단조로운 생활에서 탈출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하는 생각에서 함께 가기로 했다.
며칠 후 함께 모여 저녁을 먹기로 한 자리에서 이문주(李文周)라는 분을 처음 만나 상견했다. 이귀영이 180cm의 늘씬한 체구인데 반해, 이문주형은 보통 키에 균형 잡힌 선비의 풍모다. 감색 양복에 자주색 넥타이가 돋보이고, 검은 오버코트를 입은 단정한 신사였다. 그 때 두 분은 모두 나보다 다섯 살쯤이 위인 30대 초반이었다.
이문주형은 강원도의 관광개발을 위해 설악산 전역의 아름다운 경관을 촬영하고자 하는 것과, 지난번 설악산을 넘었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그렇지만 설악산의 겨울등산은 경험이 없으니 위험에 대비해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등의 의견들을 나누었다.
1958년 2월 적설기 등반 이전 기록은 찾지 못해
6.25 전까지만 해도 설악산은 북한에 속한 땅이었다. 휴전선이 간성 북방에 설정되면서 38선 이북에 있던 양양, 인제, 화천, 철원 지역이 남한땅 강원도로 편입되고, 당시 양양군에 위치한 설악산이 남한땅으로 넘어 오게 된 것이다.
강원도 당국은 금강산에 버금가는 설악산과 양양 위로 펼쳐진 아름다운 동해안을 하나로 묶는 관광개발사업에 착안했다, 우선 아름다운 풍광을 16mm 천연색 영화에 담아 국내외에 소개하려는 일을 시작했다. 군부대의 호위를 받은 일단의 촬영반이 여름산 촬영을 이미 끝내고 겨울산 촬영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여름과는 달리 겨울산의 촬영지원은 일반적인 지원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적설기 고산지대에서의 전문등반기술이 요구된다는 것이었다. 나를 제외한 두 분은 나름대로의 유사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이문주형은 일본군에 징집되어 중소 국경지대인 흑룡강가에 주둔하고 있다가 해방이 되자 그곳에서 압록강까지 한 달 이상을 걸어 나온 경력을 갖고 있었다. 이귀영형은 황해도 사리원인가 하는 곳의 과수원집 외아들로 각종 스포츠에 손을 대어본, 운동이라면 만능선수였다. 학생 때부터 겨울이면 삼방 스키장에서 스키를 타는 등 눈과 얼음에 대한 경험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내겐 눈 쌓인 산길을 오르내리고 그런 곳에서 먹고 자본 적이 없다. 운동이라야 학교 기계체조부에서 뜀틀이며 철봉에 매달린 덕분에 손으로 잡고 기어오르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도 쓸만한 지식이라도 얻어 볼 양으로 서울로 올라가 명동이며 광화문 근처 고서점을 뒤지고 다녀 보기도 했지만, 도움이 될 만한 책 한 권 찾지 못했다. 그저 막연히 남들 하는 일이라면 남들만큼은 할 자신이 있고, 남들이 가는 곳이라면 나도 갈 수 있다는 마음가짐 하나로 버티기로 했다.
등반에 소요되는 식량, 장비는 공동으로 구입 준비하고, 부족한 장비는 2군단 본부에 요청할 계획이었다. 출발은 적설량이 많아 설산의 경관이 잘 표현될 수 있는 2월 중순으로 정했다.
1958년 2월25일경. 그 때만 해도 ‘등산’이라는 용어가 생소한 말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상식으로 통하는 말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계등반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등반방법으로 들어가면 얘기는 달라졌다. 1954년 영국 에베레스트 등반대의 등반기를 요약한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었다면 전문가로 통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강원도는 물론 전국에서도 처음(?)이라 할 수 있는 적설기 설악산 등반길에 나서는 세 명의 등반대원을 실은 지프는 춘천을 출발, 인제로 향했다. 장비 지원 요청을 받은 2군단에서는 우리를 3군단으로 인계했다. 우리는 3군단에 들러 산악장비를 살펴보았으나 이미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장비이기에 발길을 인제경찰서로 돌려 입산신고를 했다. 경찰측은 신변보호가 불가능하니 자체방어를 해야 한다며 소총 2정과 실탄을 우리에게 지급했다.
우리는 내설악 입구에 자리 잡은 작은 산골마을인 용대리에 당도했다. 이 마을에서 촬영장비를 운반하며 길을 안내할 인부 한 사람을 구하고, 백담사로 향하는 작은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짧은 겨울해가 저물고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우리 일행 네 사람은 겨우 백담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끝없이 계속되던 눈길에서 벗어나 하룻밤을 쉴 수 있는 곳을 찾게 되어 안도의 숨을 쉬었다.
백담사는 가야동 깊은 골에서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무성히 늘어선 평탄한 대지 위에 세운 ㄷ자 모양의 큰 기와집이었다. 절에는 주지라는 승려와 잡역을 하는 사람, 이렇게 두 사람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일부 추녀가 물러앉은 퇴락한 절간을 지키고 있었다. 앞길을 묻는 우리에게 주지는 “인적은 여기가 끝이고, 내일부터 여러분이 가셔야 할 오세암과 봉정암터에는 사람이 없으니 고생이 심하겠다”며 온돌방으로 안내했다.
다음날 우리는 영시암이 있었다는 옛 터인 묵밭을 지나 몇 개의 고개 길을 넘어 오후 늦게 오세암에 도착했다. 텅빈 절터에는 은신할 만한 건물은 없었다. 하얀 눈만 쌓여 있는 절터 위쪽으로 화강암 장대석으로 정연하게 쌓아 올린 텅빈 법당 자리를 보며 이곳에 명찰이 있었던 자취를 더듬게 할 뿐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하룻밤 막영을 하고, 다음날은 일찍 서둘러 봉정암을 오르는 길에 올랐다. 봉정암 오르막길에서는 씨름이라도 한 듯 기진맥진했다. 봉정암에도 반석 위에 세운 석탑 하나만이 풍상의 모진 세월을 버티고 있을 뿐 폐허였다. 다행히 벽채는 없으나 지붕과 마루가 남아 있는 산신각이 있었기에 그 안에다 천막을 쳤다. 얼어붙은 샘터를 찾아 저녁밥을 지으니 눈속에서 고생한 일은 사라지고 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봉정암과 중청봉을 오가며 고산지대의 경관을 카메라에 수록하는 일을 하며 지냈다. 중청에서는 바람이 심해 오래 머물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모포에 쌓아둔 카메라의 셔터가 얼어 작동이 안 되니 정상에서의 촬영은 중단하고 봉정암으로 내려왔다.
일행은 다시 오세암, 마등령을 거쳐 신흥사 객사에 몸을 맡겼다. 이렇게 5박6일의 설중생활을 무사히 잘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등반기간 중 한 번도 눈 내리는 날이 없었고, 예년에 비해 적설량이 적은 비교적 온화한 겨울 날씨 덕분이라고 생각됐다. 첫 단추를 잘 채운 덕분일까. 우리의 산행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졌다.
강원산악회 창립 1958년 춘천의 여름
북한강과 소양강이 합치는 분지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 춘천. 휴전이 성립된 지도 5년이나 지난 1958년 여름. 동란으로 입은 전화의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 놓은 채, 인구 7만여 명으로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라는 명맥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을 때다. 백마고지, 토설산, 파라호 등 중부전선의 수많은 격전지를 북에 두고 있다는 지리적인 조건과 전략적인 이유로 춘천은 중부전선의 유일한 군사도시가 되어 있었다. 도심을 가르고 끝없이 이어지는 육중한 군용 트럭들의 행렬, 외출이며 휴가 나온 군인들로 거리는 넘쳤다.
이러한 도시 분위기의 1958년 여름 어느 날. 무성한 신록의 산들이 손짓하는 계절에 심용섭은 춘천시내 거리에서 우연히 배낭 맨 복장 차림새가 낯설지 않는 젊은이들과 마주쳤다. 한눈에 등산을 갔다 오는 사람들이라는 감이 왔는데, 식물채집을 다녀오는 강원대학 학생들이었다.
지도교수가 이귀영형을 안다고 한다. 정현배(鄭炫培) 교수였다. 마른 듯한 체구에 눈이 빛나는 강인한 인상을 풍긴다. 임학과 교수로 식물분류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한다. 그 후 그를 자주 만났다. 소주 한두 병에 흐트러지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애주가였다. 춘천을 둘러싸고 있는 1,000m 안팎의 산들을 자주 찾는다고 했다. 맑은 계곡에서 모닥불 피워 밥해 먹는 재미에 매료되어 식물채집은 명분일 뿐, 등산을 우선시하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산꾼이었다. 이문주, 이귀영 형들과는 비슷한 연배로 자주 만나 술잔을 나누며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로 그와는 쉽게 친분을 쌓아 갔다.
이런 가운데 산악회를 만들자고 최초로 제안한 것은 정 교수의 입에서 나왔으리라고 짐작된다. 그 후 ‘산악회’ 라는 말은 우리는 물론 주변 사람들의 입에서도 자주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미 산악회를 만든 것으로 착각이라도 한 듯 저녁에 모여 술 한 잔 하게 되는 경우, 오늘 저녁 몇 시 어느 집에서 ‘산악회 모임’이 있다는 표현이 예사롭게 통용되고 있었다.
회원 네 사람으로 구성된 산악회가 있다면 그것은 아집이었거나 아니면 농담이어야 했다. 그러나 남달리 일을 잘 벌려 놓고 또 수습도 쉽게 잘 하는 정현배 교수의 시각은 전혀 달랐던 것 같다. 6월 어느 날 정오에 춘천 시립문화관에서 산악회 모임이 있다기에 나가 보았다. 1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사진동호회에 소속된 사람들과 학생이 몇 명 끼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회칙도 읽고 정현배 교수를 회장으로 선출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강원일보 사회면에 ‘강원산악회 창립’이라는 제목과 함께 1단 기사가 실려 있었다. 수없이 회자된 잉태의 과정을 거쳐 강원산악회는 어느 날 갑자기 탄생된 느낌이다. 그 어느 날이 1958년 6월28일이다.<계속>
/ 구술 이문주 60대산회 회원
/ 정리 박진 60대산회 총무
- 구술자 이문주 프로필
△ 1924년생
△ 강원도 사진작가협회 회장
△ 예총 강원도 지부장
△ 강원산악회 회장
△ 강원도산악연맹 회장
△ 대한산악연맹 이사 등 역임
△ 춘천시 거주(전화 033-254-2790. 011-360-27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