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조사
1 고부봉기 농민 전쟁(1차 농민 전쟁)
1894년 음력 1월 10일, 전라도 고부 농민들이 나쁜 정치를 견디다 못해 들고 일어났다. 동학 접주인 전봉준이 이끈 농민들은 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관아를 점령했다. 사태 수습을 위해 정부에서 보낸 관리가 오히려 농민을 탄압하면서 고부 봉기는 농민 전쟁으로 번졌다.
3월, 전봉준은 4,000여 농민군을 이끌고 무장(지금의 전북 고창)에서 다시 봉기했다. 동참자가 점점 늘어, 새롭게 본진을 꾸린 백산(지금의 전북 부안)에 모인 농민군은 8,000명이 넘었다. 아래와 같은 말이 나올 정도로 백산 일대는 보국안민을 외치는 농민군으로 가득 찼다.
앉으면 죽산(竹山)
농민군이 앉으면 손에 든 죽창만 보이고
서면 백산(白山)이 온통 흰 옷 입은 사람만 보인다.
4월 들어 전봉준 ・ 손화중 ・ 김개남 등이 이끈 농민군은 황토현(지금의 전북 정읍)에서 전라도 감영군을 대파했다. 농민군의 기세에 놀란 정부가 대포와 기관총을 갖춘 중앙군을 보냈지만, 농민군은 황룡촌(지금의 전남 장성)에서 중앙군을 물리치고 4월 27일 전주성마저 점령했다.
다급해진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5월 초 청나라군이 조선에 도착했고 일본도 톈진조약(톈진조약 체결 참조)을 내세워 군대를 보냈다. 5월 7일 농민군은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전주성에서 물러났다.
청나라와 일본이 간섭할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고,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며 조선을 압박했다.
2 농민군, 일본을 몰아내자고(2차 농민 전쟁)
전주화약 이후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과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 집강소와 도소를 통한 폐정개혁 활동에 주력했다. 이와 달리 김개남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 내 급진 세력은 질이 나쁜 관리와 양반, 지주 등과 직접 맞서 싸우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던 농민군이 가을 들어 다시 봉기했다. 경복궁 점령 후 조선 정부를 노골적으로 위협하는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농민군의 사회 개혁을 두려워하던 양반층이 민보군을 조직해 각지에서 농민군을 공격한 것도 농민군이 봉기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먼저 일어선 것은 김개남이었다. 음력 8월 말, 김개남은 남원에서 재봉기를 결의했다.
신중한 태도를 취하며 처음에는 재봉기를 말리던 전봉준도 9월 초 삼례에서 일어섰다. 이에 더해 그동안 전봉준을 비난하던 동학교단(북접)도 뒤늦게 봉기에 합류했다. 북접 지도부는 본래 일본이나 정부에 맞설 생각이 없었지만, 봉기를 요구하는 교인들의 요구에 밀려 동참했다. 전봉준이 이끈 남접에 가난한 하층 농민이 많았던 것과 달리, 북접에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민 비중이 높았다. 농민군은 20만에 이르렀고 2차 농민 전쟁은 전라도를 넘어 충청 ・ 경상 ・ 황해 ・ 강원도에서도 진행됐다.
음력 11월 초, 전봉준이 이끈 농민군은 일본군・관군의 연합 부대와 공주 우금치에서 혈전을 치렀지만 패했다. 전봉준이 일본군을 함께 물리치자고 관군에게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김개남 부대도 청주에서 패했다. 그 후 일본군과 관군, 민보군은 농민군을 잔혹하게 진압했고 전봉준 등은 사로잡혀 처형된다.
3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 (갑신정변, 갑오개혁과 비교한 동학농민운동)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두 가지 과제에 맞닥뜨린다. 세계와 흐름을 맞춰 근대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회로 조선을 바꿔 가는 것이 그 하나였고,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냉정한 세계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힘으로 서는 것이 다른 하나였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1895년까지 조선에서는 커다랗고도 중요한 세 번의 움직임이 있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동학농민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은 엘리트들이 위로부터 조선을 바꾸려 한 것이었고,
동학농민운동은 평범한 백성들이 아래로부터 새로운 조선을 만들려 한 시도였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엘리트와 평범한 백성들의 꿈은 행복하게 만나지 못했다.
'근대 자본주의 국가'를 지향한 갑신정변 주도 세력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꼭 필요했던 지지 계층은 1884년 당시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들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평범한 백성들의 힘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들이 발표한 14개조 정강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백성을 고통스럽게 했던 지주-소작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항은 정강에서 찾아볼 수 없다. 기존의 지주-소작제를 그대로 인정한 상태에서 세금을 공정하게 거두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구상이 담겨 있을 뿐이다. 이들은 평범한 백성과 함께 한 걸음씩 나아가기보다는 일본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부족한 힘을 단기간에 메우려 했다.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은 강했지만, 일본이 조선의 진정한 '자주 독립'을 가로막을 더 무서운 외세가 될 수 있다는 점까지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갑오개혁 주도 세력도 마찬가지였다. 갑오개혁은 '경복궁 쿠데타'를 계기로 시작됐기 때문에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리고 갑오개혁 주도 세력도 지주-소작제 문제에 대해서는 손대지 않았다. 갑신정변 주도 세력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지주층을 중심으로 한 근대화를 꿈꿨기 때문이다(이는 갑신정변-갑오개혁과 달리 군주를 중심으로 한 근대화를 시도한 대한제국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갑오개혁을 주도한 이들은 농민들이 더 '난리'를 일으키지 않도록 폐정개혁안을 일부 수용해야 한다는 정치적 판단은 했지만, 이들에게 농민군은 근대화를 방해하는 '비도(匪徒)'이자 배운 것 없는 무지렁이일 뿐이었다. 일본군과 손잡고 농민군을 토벌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와 달리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은 평범한 백성의 바람을 근본으로 삼았다. 지주-소작제의 문제점을 뜯어고치자는 내용도 개혁안에 당연히 포함돼 있었다. 갑오개혁 주도 세력과 달리 외국에 다녀온 경험은 거의 없었지만, 외국의 압력에 떠밀려 이뤄진 개방은 백성에게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훨씬 잘 알고 있었다. 개항 후 곡식이 나라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면제품을 비롯한 외국 물품이 쏟아져 들어온 것은 부유층에게 큰 부를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됐지만, 평범한 백성들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국왕과도 맞서 싸워야 함에도 그런 면에서 철저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등 농민군도 부족한 점을 여럿 드러냈다. 그렇지만 외국에 휘둘리지 않고, 오랫동안 내려온 낡은 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한 동학농민운동은 이후 한국 역사의 고비마다 많은 영감을 준다.
4 진도의 동학농민운동
진도에는 1892년 사주사람 나치현이 의신면 만길리 원두마을에 들어와 포교
7월 손행권등 동학도들이 금갑만호진과 남도만호진을 급습 병기고에서 조총, 화약, 삼지창, 환도 등을 탈취하여
진도읍내 수성민병대와 싸움이 벌어짐
이무렵 조도출신 박중진 읍내 쉬미항으로 상륙하여 읍내 수성군과 전투가 벌어짐
9월 18일 진도감독관이 도착하여 진도동학교도들은 진도를 벗어나 나주동학도에 합류했으나 고막원에서 관군과 충돌 나치현은 사살되고 나머지는 진도로 압송
동학패잔병들이 진도 조도일대에 숨어들었다
일본토벌대는 남소사군 대위는 해남을 거쳐 12월 26일 벽파진에 도착하였다
27일 진도에 도착한 동학교도죄수들을 대질하여 50여명을 읍내장터에서 총살 하였고 무혐의자는 석방하였다
1906년 목포권업모범장 출장소직원 좌등정차랑이 진도 공동묘지에 와서 송현재의 두개골 1구를 채집해갔다
1995년 7월 15일 일본북해도대학 인류학 표본창고에 진도동학괴수라는 표지가 붙어 발견발견되었고
1996년 정읍시 황토현 동학혁명기념관에 봉환 안치되었다
진도에서 동학은 갑오시련을 걲은뒤 쇠잔해졌으며 일부는 친일조직인 일진회에 흡수되고 일부는 손병희가 이끄는 천도교 교도가 되었다
첫댓글 50년전 초등학교 다닐때 무엇인지도 모르고 부르던 노래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ㅡ전봉준이 죽으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ㅡ백성이 슬프다
그당시의 흐름!!
진도도 비켜갈순 없었겠지요
더구나 싸울아비 후손인 전남사람들이...
호남인이 동학혁명도....
진도사람들의 자주 정신이 삼별초도, 임진란때도 면면히....
인골은 왜 가져가나 이런 나쁜 넘들!!!
진도나름의 동학농민운동의 흐름이 있었군요!!!
일본과 나쁜 인연이 여기서도...
쪽바리들 안 낀 곳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