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황시은 시집 <난 봄이면 입덧을 한다> 해설
빛과 어둠의 시학
이재창(시인)
1.
황시은 시인의 시 속에는 다양한 읽을거리가 존재한다. 그 읽을거리는 다름 아닌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부분과 현대적 삶의 양식의 비교를 통해 그만이 가지는 언어로 시인 자신의 독특한 발성법을 내보인다. 일상적 삶의 언어를 가차없이 시적 언어로 환치시키는 그의 문학적 능력은 대단한 수준에 올라와 있다.
언어의 기능은 원래 표현적이다. 그것은 원래 놀라움의 표시이거나 배고픔의 호소, 사랑과 미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그 안에 존재의 신비를 담고 있고, 사물과 감성을 움직이는 힘을 담고 있다. 문학에서도 사물의 하나 하나를 지시하는 기호들과 그 기호들이 배치되는 등질적 공간을 매개로 사물과 관념이 관계 맺었을 때, 인간의 관념 또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인식을 형성하게 되고 거기서 문학적 대상을 선별함과 동시에 시적 영감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모든 형태의 문학적 의식은 개인과 사회적 환경 사이의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균형관계를 유지하며 생성된다. 이처럼 그의 시적 언어는 물 흐르듯이 고요하게 흐르다가도 어느 시점에 이르면 큰 소리를 내며 이 시대 삶의 자유분방하고 격렬한 몸짓으로 변화한다.
최근 우리시의 대부분이 도시를 떠나 속속들이 자연으로 돌아오고 있다. 메마르고 황폐화된 도시의 삶에 지친 시적 영혼들이 때묻지 않은 자연을 찾아 강과 산과 바다로 영감의 여행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떠남의 형태는 다양하다. 주말여행이나 산행 그리고 어느 시인처럼 바닷가 우체국 옆에 아주 이주해 살아버리기도 한다. 그만큼 바다는 자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에겐 친숙하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거센 바다가 있는가 하면 낚싯배 드리우고 한가로이 즐기는 잔잔한 바다도 있다. 또 우리의 아침 식탁을 풍요롭게 하는 생명의 동굴이며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죽음의 동굴로 비유될 수 있는 도시의 바다도 있다. 그 바다에는 사랑과 증오, 빛과 어둠, 생성과 소멸, 좌우의 이념, 일상적 생존이 모두 함유되어 있다.
또한 문학에 있어서 역사적인 기억과 유년의 기억이 없다면 예술 그 자체로서의 의미도 잃어버릴 것이다. 여러가지 형태를 갖춘 문학구조 속에서 벗어나 우리 인간은 과거와 함께 문학적인 대응도 순수상태로 주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자연과 역사 속에서 문학의 직접성과 관습의 대립이 첨예화되고, 숭고하고 광활한 것에 대해서도 미적 체험이 가능해 짐에 따라 자연현상은 아름답게 보이면서 문학적 의식이 싹트고 다양한 상상력이 발현하게 되는 것이다.
황시은의 시는 이러한 다양한 문학적 대응과 상상력이 돋보인다. 대상에 대한 따뜻한 응시와 교감이 다소 생경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시인 자신의 삶과 체험에 대한 시적 표현들이 서정성을 획득하면서도 낯설게 보이는 장점을 지녔다. 이러한 시적 낯설음은 참신하고 개성있는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름이 낯선 만큼 시의 낯설음도 신선하고 시적 대상에 대한 갈등과 양심적 고뇌가 독자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자아내게 한다.
“지난달 종양 수술을 받은 큰 언니의 목에선 새 살이/수양버들 연한 새싹처럼 돋아나고 있다”(「봄의 안부」)나 “여든 다섯 해 동안/손등에 그려 넣은 검버섯들/그 포자가 내 몸속에 옮겨져/발아 중이다”(「김치화석」)에서처럼 빛과 어둠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람이 지나는 곳에는/길들이 만들어지고/새소리 지나는 곳에는/길들이 열린다”(「새소리도 길을 만들며 날아간다」)에서는 현대적 삶의 생성과 소멸의 상상력을 던져준다.
또한“눈 가리개 몽땅 빼앗겨 버린 보도블럭, 그 위 가로수들/잘 발려진 식육점 고기 모습으로 드러눕는다/나도 몸 속 수분 60%를 몽땅 빼버리고 진열장 사골꺼리로 눕고 싶다”(「오후 세시, 그늘-그림자」)에서는 우리의 관습의 거부를 통해 복잡다기한 현대문명의 정신적 긴장과 스트레스를,“먹물주머니를/난도질 쳐 낼 것 같았던 나의 용기는/들찔레꽃 할머니의 하얀 광목저고리를 보는 순간/주름진 여인네의 자궁 속 양수가 되어 문장을 낳고 있었다”(「시야, 놀자 - 김달진 문학관에서」)에서는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며 몸소 문학적 체험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2.
먼저 그의 시에 드러나는 모습은 동화적 상상력이다. 우리에게 어린시절의 할머니나 할아버지, 어머니 무릎에 누워 듣던 옛날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다. 「별똥 지던 밤」에서 나타나듯이 어머니의 이야기는 여섯가지의 에피소드를 지닌 진실성의 상상력으로 발현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숨쉬는 전류처럼 다가온다.
잘 볶은 콩보다 더 고소하더라던 엄마의 거짓말
하도 뜨거워 주워 들다 손이 다 타버렸다던 거짓말
떨어지다 만든 구덩이에 샘이 생겨
하도 물이 깊어 찾을 수가 없었다던 거짓말
산 넘고 물 건너 찾아 갔던 아이들이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거짓말
내 친구는 그 별똥 주워 먹어 일찍 죽었다는 거짓말
이 모든 거짓말이 참말이길 소원해 보는 별똥 지던 밤
-「별똥 지던 밤」
엄마의 거짓말이 잘 볶은 콩보다도 더 고소하다는 묘사로 시작된 이 작품이 더욱 빛나는 이유는 일반적인 동화적 상식을 뛰어넘는 일상적 삶의 재기발랄한 동화적 패러디를 인용한 재미 때문이다. 여섯가지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각 에피소드들마다 서로 연관성은 없는 완전히 독립적인 이야기들이다. 각 에피소드별 시대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을 의도적으로 달리 해서 마치 우리의 옛 전래동화를 모아놓은 느낌이 든다. 뜨거워서 손이 탔다던가, 떨어진 곳 구덩이의 샘이 깊어 찾을 수 없다던가, 아이들이 돌아오지 못했다던가, 그 별똥을 주워 먹어 일찍 죽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이 진실된 거짓의 상상력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황시인의 이번 시집의 많은 부분의 시편들이 어린시절의 경험이나 시각에 의해 발화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적 상상의 방식이 어떤 근원적인 기억에 의해 구성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만큼 시인은 지난 시절에 대한 섬세하고도 깊은‘기억’의 작용을 통해, 존재의 근원적 깊이에 가 닿으려는 서정시 보편의 욕망을 풍요롭게 보여준다. 어머니에서부터 내게 이어져 내려온 이야기가 온 우주의 경계를 긋지 않고 서로 자유롭게 소통하는 것이야말로 시인이 바라는 진정한 자유며 상상력인 것이다
이처럼 황시은 시인은 일종의 ‘원형(archetype)’에 가까운 심미적 이미지들을 불러모아 그 안에서 빛과 어둠, 삶과 죽음, 우주적 생성과 묵시적 소멸의 차원을 오가며 커다란 스케일과 아스라한 분위기의 시적 성채를 쌓아올리고 있다.
3.
황시인의 작품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항상 그립고 새롭게 나타난다. 언제 어디서든지 어머님에 대한 생각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초석이 되기도 한다. 그 속에서 시인의 동경이 발생한다. 그 동경은 현재의 자기 자신이 아닌 현대적 삶에 동화된 그 어떤 자신을 향한 존재 전이의 꿈이기도 하다. 어쩌다 그리움을 앞세우고 비 내리는 길을 달려 도착한 고향집은 텅 빈 낯설음으로 나를 반기고, 별다른 연락 없이 안개 자욱한 고갯길을 돌고 돌아 부모님의 화들짝 반기는 모습 속으로, 그 따뜻한 가슴에 안겨 보리라던 생각을 해보지 않는 사람은 없다.
바람이 마당 가득 인다
마른 몸뚱이를 감싸고 있던 비늘들이 날아오른다
짧지 않은 소풍을 마쳤으니 하늘로 돌아가잖다
엄마는 이는 바람이 서럽다
안방 문을 열고 아랫목으로 돌아가 눕는다
아랫목엔 잘 달구어진 연탄아궁이가 먼저 와 누워
그 눈빛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풍경ㆍ1 - 마늘」에서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가는 길 소나무마다 링거주사기 꽂혀 있다 여든다섯 엄마가 한 병에 육만 원 한다던 그 약병이 분명하다 한 달을 굶고도 링거액 맞을 돈이 아깝다고 버티시다 끝내 119 구급차에 실려 가셨다던 엄마, 지금쯤 제주도 유채밭에서 봄 처녀처럼 웃고 계시겠다 ‘내 가다 쓰러지더라도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다녀올란다’하시던 전화 목소리, 꽃구름 머리에 가득 이고선 벚나무 꽃숭어리들 오늘은 엄마의 검버섯 가득한 얼굴이다 노란 별 핀을 못 다한 효도인 냥 가지 가득 달고 앉은 개나리꽃들 그 곁에 선 오리나무 새싹들 링거 병에 시선 한번 주지 않는 모습이 토라져 버린 듯하다
-「풍경ㆍ3 - 소나무는 입원중」에서
창문을 여니 계절이 다가선다
이럴 땐 어김없이 입덧을 한다
투박스럽기 그지없는 막사발에
텁텁한 조껍데기 술맛이 그립다
감식초와 태양초에 버무린
시골 어머니가 보내 주신 참기름을 아침 이슬처럼
감고 나온 겉절이가 먹고 싶다
약간의 변덕이 꿈틀거리고
고추장으로 머드팩을 한 듯한
낙지볶음도 먹고 싶다
봄 햇살을 타고 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여중생 유두점 같은
홍매화 망울이 눈을 비비며 웃고 나온다
저어기 과일가게 홍 씨 아저씨네는
굵은 오렌지가 노란 눈을 뜨고 좌판을 지키고 있다
임신 4주째
-「난 봄이면 입덧을 한다」
칠 년 전 먼저 하늘나라 간 친구 약속을 지킨다며
옆 집을 구입한 터에 현대식 주택을 앉혔지만
아버지 손 떼 묻은 슬레이트 집 버릴 수 없다며
혼자 기거하는 집에는 연탄보일러 눈동자가 붉다
향나무가지 두른 버섯 같은 처마가 낮은 집
향나무에 올라앉은 으름, 다래, 머루, 청포도……
혼자되신 엄마 외로우실까, 아버지
참으로 많은 열매 매달아 놓으셨다
-「깔깔이 블라우스」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적 삶의 시간은 늘 외롭다. 시간이란 늘 변함없이 미래를 향해 직진한다. 멈추게 할 수도 없고 돌아가게 할 수도 없다. 그렇게 직진하듯 흐르면서 모든 것을 변화시키지만, 흘러간 시간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슴 속 깊숙이 어딘가에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들의 기억은 희미해진다. 그러나 더욱 선명해지는 것도 있다. 우리들 가슴에 숨겨져 있는 옛 추억이 그러하고 영혼 속에 피어 있는 어머니의 사랑이 그것이다. 그 사랑이 매일 매일 새롭게 내 자신을 일깨우기도 한다. 어머니의 기억이 가지는 소중한 삶의 의미다. 그 따뜻하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이 삭막한 세상 살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황시인의 작품에선 많은 부분이 어머니에 대한 꿈과 동경이야말로 바로 중심 바깥쪽으로 던져진 존재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삶의 알리바이인 것이다.
시인의 세상에 보여지는 어머니는“시골의 어머니가 보내주신 참기름을 아침 이슬처럼/감고 나온 겉절이가 먹고 싶”다거나 “아버지 손 떼 묻은 슬레이트 집 버릴 수 없다며/혼자 기거하는 집에는 연탄보일러 눈동자가 붉”다던 어머니의 모습까지, 또 “내 가다 쓰러지더라도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다녀올란다 하시던 전화 목소리”속에서 “지금쯤 제주도 유채밭에서 봄 처녀처럼 웃고 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해 내고 있다.
삭막하고 황량하게 변해 가는 세상이지만 그 사랑의 기억이 절절하게 남아 있기에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세월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처럼 세월을 닮아간다. 어머니의 인고의 세월이 또다시 어머니가 된 나에게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 사랑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짧지 않은 소풍을 마쳤으니 하늘로 돌아가잖다/ 엄마는 이는 바람이 서러”운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흐르는 세월 속에서 사랑했던 것을 잃어버리는 우리가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억에 의해서 그것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언젠가 다시 찾을 그 기억을 위해 다녀왔던 고향 길을 회상하며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들의 어머니는 나이든 자녀를 보고서도 첫마디가 밥 먹었냐 하며 꼬깃꼬깃 허리춤에서 돈을 꺼내 쥐어주시는 어머님을 보는 게 고통스럽고 안쓰럽지만 아직도 이 세상을 살면서 어려울 때마다 어머님을 자주 떠올리게 되는 건 그 어느 어머니들처럼 어머님의 사랑이 위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
4.
지금 우리의 세기는 산업화를 거쳐 정보화 사회에 이르기까지 인류문명은 급속히 발전하였다. 세상은 확실히 과거보다 살기 편리ㅎ고 풍족해 졌다. 그러나 인류는 그 풍요만큼의, 아니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들을 상실하고 있다. 사회현장 곳곳에서 비리와 부작용들이 터져 나오고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린다. 수많은 사회현상 속에서 세상은 점점 이기적이고 타인 의존적이고 나약하게 변해가고 있다.
황시인은 힘든 현대적 삶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도시생활의 모험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잃었던 진실함을 느끼도록 전달해 준다.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선과 악의 개념, 타인과의 관계, 인내심, 도전할 줄 아는 삶 등이 그것이다. 이런 큰 카테고리 안에 현대문명의 폐해에 대한 메시지들을 암시한다. 생명공학의 발달에 따른 문제들, 사이버 세계속에서 익명화 되어 정체성을 잃어 가는 현대인들의 문제, 환경오염문제, 가정 붕괴 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생각해 보는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
현관문 자동으로 여닫히는 습성은 전자열쇠칩이 숙련된 애완견인 탓이다
엘리베이터 속 CCTV 잘 닦아진 화장대 손거울처럼 내려다보고 섰다
지하 주차장 출근길에 마주친 외박남 눈짓으로 닦달하니
차의 뒷모습 찍고 서 있는 눈에 한 움큼 먼지를 뿌려주고 나가는 20세기 1톤 트럭
로터리 사거리 교통상황을 체크하는 CCTV 마스크 한 장 써야겠단다
회사입구 지하주차장 CCTV 앞에 섰을 때 비로소 무관심 하였던 아침 인사를 건네듯 손을 번쩍 들어 보인다
대기 중인 엘리베이터 CCTV 얼른 입속 가득 꿀꺽 나의 모습을 삼키고
잘 길들여진 한 평 남짓한 사무실 사각 박스 덩그마니 놓인 전자파속으로 감전 시킨다
뇌리 속 어제 못다 한 업무로 최면에 걸린다
쉬는 시간 자판기 입속에 보관된 식혜 한 캔에게
서투른 고향 안부를 여쭙는 일은 참으로 다행한 여유이다
점심시간 알리는 음악소리에 여친이 알은체 하며 달려온다
그녀의 가슴팍에도 전자칩이 코사지처럼 달려 있다
CCTV 터널 속을 걷고 있는 그들은 무죄다
중증 아토피 앓고 있는 도시 노을은 언제나 붉은 습포로 쌓여있다
-「전자미행」에서
지방이 가득한 비만 복부 사진 한 장
쿵하는 소리를 내며 거실 바닥으로 떨어진다
출렁이던 뱃살이 철퍼덕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여고생 딸아이가 다이어트에 자극을 주기 위해
인터넷에서 출력한 사진이다
눈에 잘 띄도록 거실 스위치 위에
스카치테이프로 뒷면에 붙였던 것이
제 뱃살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처진 아랫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 것이다
거실 바닥이 멍들었다
사진도 타박상을 입었다
그날 저녁
아이는 늦은 시간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나는 그 사진을 주워
뒷면에 더 단단한 테이프로 다시 벽에다
뱃살을 붙였다
-「뱃살이 거실에 떨어지다」
월드컵 6회 연속 진출 소식 박지성이 불끈 주먹 쥐고 하늘로 발돋움 하는 모습 화면 가득하다
22살 어린 대학생 총기 난사 사건 마스크로 얼굴 덮은 채 울고 있는 어머니 모습도 보인다
청계천 복원소식 바지를 무릎까지 끌어 올리고 맨발로 개천을 뛰어 다니는 아이들 있다
김대중 대통령 평양방문 꽃다발 든 평양 소녀 보인다
주말연속극 속 IMF환란으로 시래기처럼 엮어져 있던 몇 장의 카렌다 찢겨져 연처럼 날린다
성수대교 붕괴되고 삼풍백화점 역시 견디지 못하고 기절해 버린다
정몽헌회장 생을 마감하기 전 아내에게 미안하다 유서 쓴다
-「문명이 죽다」에서
우리의 전통적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과 같은 무조건적인 ‘빨리빨리’란 현상은 없었다. 모든 삶 속에‘천천히’또는 ‘차근차근’이라는 단순하지만 철학적인 지혜를 지니고 살았다. 하지만 현대문명이 도입되고 과학기술과 정보화사회가 속도의 개념을 중시하면서부터 우리는 점차 속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천천히’라는 것을 중요시 했던 것은 ‘빠르다’라는 것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너무 빠른 것만 찾다가 정작 가치 있는 것을 놓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 얼마만큼 가치 있는 것을 얻었는가를 따지는 것이야 말로 현대인이 가져야 할 속도관념으로 변한 것이다.
「전자미행」을 보면 시간이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는 사실 속에서 시간의 의미를 왜곡하며 사는 현대인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짧은 시작품 안에서 끝나버리지 않는 현대사회의 병폐적 모습이다. 속도에 치중하느라 그 시간 안에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나 내가 한 일의 의미는 따지지 못하게 한다. 모든 것이 미행당하는 세상처럼 느껴진다.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찍히고, 내가 지금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지 나의 위치가 수시로 전송되는 세상이다. 가는 곳마다 나의 얼굴이 CCTV에 찍히는 것이다.
하지만 정보화 사회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지금 시간의 본질적인 의미를 찾지 않는 다면 우리의 미래또한 시간에 쫓겨, 자기 자신조차 되돌아 볼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가치 있고 알찬 삶은 빠르게 산다는 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되돌아보고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데서 온다는 것을 지적한다.
「뱃살이 거실에 떨어지다」 에서 현대사회가 당면한 문제점을 하나 더 들자면 무분별한 소비로 인한 과식과 비만에 대한 지적을 하고 있다. 서구에서의 웰빙 운동의 근원은 현대문명의 폐해에 대한 사회적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시민운동에서 뿌리를 두고 있다. 채식주의, 생태주의, 히피운동 등 다양한 사회적 대안운동의 경험이 축적되어 오늘날 웰빙이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작품에선 비만 복부 사진 한 장이 “스카치테이프로 뒷면에 붙였던 것이/제 뱃살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처진 아랫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떨어진 것이다”처럼 정신적 및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안락한 삶의 가치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한 반기를 드는 것이다. 거실바닥이 멍들고 사진도 타박상을 입은 현대인의 무분별한 물질적 풍요의 집착을 비꼬고 있는 것이다.
또 시인은 「문명이 죽다」에서 급변하는 현대문명 속에서의 생과 사를 지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발악하는 공룡처럼 위태롭게 보인다. 제대로 앉거나 서서 숨쉴 공간마저 없이 빽빽이 꽉 차버린 현대사회. 시인은 여기서 우리 삶을 결정 짓는 새로운 정치 사회적 환경과 문화적 조건보다는 다양한 양태의 동시대적 삶의 내면에 소용돌이 치고 있는 허무와 환멸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늘진 대학생 총기난사 사건, 말연속극 속 IMF환란으로 시래기처럼 엮어져 있던 몇 장의 카렌다, 성수대교 붕괴되고 삼풍백화점 역시 견디지 못하고 기절해 버린다. 정몽헌회장 생을 마감하기 전 아내에게 미안하다 유서 쓰는 문명의 이기 속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은 밤 서울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위장된, 기호와 이미지의 소비시대로 접어든 세기말의 풍경이며 종말 없는 종말을 예고하는 발악하는 공룡의 몸부림이다. 바로 오늘의 현대사회의 참모습을 지적하는 것이다.
5.
함께 스터디를 진행하는 그에게 점심을 먹자며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남편이 사온 함양사과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마침 집에는 청송사과와 밀양사과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세 종류 사과를 한꺼번에 맛을 보게 되었다 사과 맛을 천에 비교하는 것은 뭣하지만 그래도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될 것 같다는 너스레를 떨었다 직접 먹어보지 못한 그에게 애써 내가 음미한 맛을 설명하였다 함양사과 맛은 시골 재래시장 한복판에 파는 옷가지들 같고 밀양사과는 백화점의 마네킹이 걸친 옷 같고 청송사과는 유명인들이 입는 전문 디자이너의 작품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한참을 진지하게 듣더니,
"그게 모두 詩네요"
사과 맛이 詩로 표현 된다면 사람 맛은 어떨까!
내가 사는 아파트 같은 동 501호 정형외과 의사 아내는 청송 사과 맛을 닮았다 화장품 영업을 하는 내 소꿉친구는 밀양사과 맛을 닮은 미시이다 짧은 치마를 입은 채 오토바이로 짜장면을 배달하는 친구는 함양사과 맛을 닮아 있다 그렇다면 남의 입 안에서 나는 어떤 사과 맛으로 씹혀질지 자못 궁금하다.
-「세상 씹어 먹기」
한 귀퉁이가 칼질당한 시집에서
돼지국밥 냄새가 난다
돼지국밥을 먹던 시인은
돼지껍질에 찍힌 푸른 도장을 보고 배가 불러
시를 낳고 낳은 시들을 키워
詩집을 만들어 媤집을 보내고
잘 엮어낸 詩集 때문에 문학상까지 받는다
그 시집을 읽던 다른 한 사내
돼지국밥을 먹다 국물을 쏟고
붉은 자국이 번진 시집의 부위는
연필깎기 칼로 수육처럼 잘려져 나갔다
그날 사내는 국밥을 먹고 배탈이 난다
시집을 읽는 동안 내내
돼지국밥 냄새를 진하게 맡는다
눈에서 생각으로
입에서 뱃속으로
돌고 돌아 다시
살아나는 돼지의 생애
돼지의 몸부림이 시를 낳아
시를 읽게 하고
돼지국밥 냄새를 풍기며
사람의 배를 채운다
-「시집에서 돼지국밥 냄새가 난다」
시는 언어를 매개로 우리가 사는 세계와 독특한 방식으로 소통을 한다. 시인이 어떤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감각기관들이 작용하는 것은 시의 언어화 과정의 최초의 순간인 것이다. 언어가 사물이나 대상, 세계의 존재를 개념화, 내면화, 주관화 하면서 시인의 시가 되는 것이다. 시가 그려내는 풍경은 언어 이전의, 그러한 최초의 대상과 사물의 대면 순간에 세계와 합일화된 인간, 객체와 융합된 주체 바깥의 주제를 드러낸다.
위의 세편의 작품도 그러한 측면에서 관찰할 수 있겠다. 이 각박한 세상인 도시의 삶 속에서 인간과 사물이 인간과 인간이 서로 교감하면서 일체감을 느꼈던 저 최초의 떨림의 영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시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황시은의 시 작업은 일상적 삶의 구속으로부터 자유인이 되기를 꿈꾸는 자의 기록이다. 또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현실에 대한 인식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이웃의 삶도 함께 생각하는 진지한 성찰의 반영이다. 아울러 자신이 꿈과 사유를 통해 내면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마음의 초석이다. 이처럼 그의 시는 삶에 있어서 필연적이다. 그에게 시쓰기가 결코 여가생활의 배설작용이 될 수 없듯이, 그의 시는 삶의 옆에 혹은 삶이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중요한 생활이며 그 삶의 체험이 그의 시 속에 절실하게 투영되어 있다.
20세기를 지내오면서 우리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혁명은 운동으로, 실천은 욕망으로, 정치 경제학은 문화연구로, 진보주의는 다원주의로, 지배 피지배 논리는 탈중심주의와 해체주의로, 계급에의 논의는 기호에 대한 탐구로, 민중은 대중으로, 민족은 세계화로, 마르크스는 푸코와 보드리야르로 그 중심이 옮겨갔다고 한다. 그 결과 담론의 중심어들도 어느새 컴퓨터, 뉴 또는 멀티미디어, 영상, 사이버, 정보화, 또는 그린, 페미니즘, 다국적 기업, 문화 제국주의와 같은 새로운 용어들로 바뀌었다. 그러한 거대한 변화 속에서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길어 올려진 진정성의 분위기를 지닌 작품들은 살아남았다.
시는 운명적으로 역사의식을 다룰 수밖에 없다. 시에는 언제나 창작 주체와 창작 대상이 있게 마련이다. 창작 주체는 시를 쓰는 사람일 것이고, 창작 대상은 세계 일반이다. 따라서 시적 대상으로서 세계 일반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구체적으로 역사적 현실과 현실적 세계를 뜻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문학 행위를 한다는 것은 결국 대상에 대한, 세계에 대한 인식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황시은 시인의 시는 인식의 대상, 인식의 세계가 곧 사회 현실이고 역사 현실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현실적 삶에 대한 인식행위, 곧 앎의 행위가 문학 행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황시은 시인은 현대시의 한 특성이었던 난해성을 거부하고 쉽게 읽히는 감동적인 시를 쓰고 있다. 현대의 시가 대중으로부터 소외당하게 된 제일 큰 요소였다는 난해성과 애매모호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지양해나가는 황시은 시인의 시적 특징은 이 시대 시인으로서의 하나의 미덕으로 보인다.
*이재창 시인은 /
1959년 광주광역시 학동에서 태어나
1978년 《시조문학》에 「옛 동산에 올라」로 1회 추천과
1979년 《시조문학》에 「墨畵를 옆에 두고」로 2회 천료,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거울論」 당선,
1991년 《심상》 신인상 시 「年代記的 몽타주 · 2」 외 4편이 당선돼 문단 활동.
시조집 『거울論』, 시집 『달빛 누드』,
창작과비평 6인 시조집 『갈잎 흔드는 여섯 악장 칸타타』,
문학평론집 『아름다운 고뇌』 등이 있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10여년간 〈시조창작〉을 강의함.
현재, 濟州와 光州에 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