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들어서 첫 번째로 맞는 주일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는 모든 일들이 주님의 은혜로 꼭 성취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성탄2주일이고, 오늘로서 성탄절기는 끝나고, 내일모레 6일(화)이 공현일로 대축일입니다. 공현일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공적으로 나타나셨다. 다시 말해서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날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늘까지 성탄 추리나 장식들이 필요하고, 모레 공현일부터는 연중주일로 들어갑니다. 참고로 정교회에서는 1월 6일 공현일을 성탄축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지난 25일부터, 정확히 얘기하면 24일 밤 대만도부터 성탄절기인데, 이 절기 동안 예수의 탄생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의 탄생이야기는 마태오와 루가복음 두 군데에만 있고, 조금 내용은 다르지만 기본 골격은 비슷합니다. 그리고 아주 짧습니다.
따라서 지난 24일부터 내일모레 공현일 전까지 한 보름 동안은 이 짧은 예수 탄생에 관한 복음을 가지고 성찬례를 드리기 때문에 계속 복음이 중첩됩니다. 오늘 복음도 지난 성탄전야에 했던 복음이 또 반복됩니다. 워낙 예수 탄생과 어린 시절 이야기는 적은 분량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탄생 이야기와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그렇게 적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반면에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대한 복음은 아주 상세하고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거의 복음서의 삼분의 일이고, 마르코복음 같은 경우는 반이 수난복음인데, 이에 비해서 왜 탄생의 이야기와 예수의 어린 시절 성장이야기는 적을까. 왜 없을까? 눈치 채셨습니까?
예수가 활동을 시작할 때, 예수 한 명에서 시작하여 점점 그 수가 늘어납니다. 그러다가 많은 기적을 베풀면서 그 수는 군중으로 바뀌고, 결국 수난에 이르러서는 예루살렘이라는 이스라엘의 중앙에서 모든 시민들이 목격자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과 추종자들에 의해서 신앙공동체가 생겼고, 결국 발전해서 오늘날의 기독교라는 종교가 탄생하게 됩니다. 바로 그 수난과 그 십자가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내용이고, 모든 사람들이 자세히 현장에서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은 솔직히 아무도 모릅니다. 그때는 그것을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복음서를 통해서 알고 있는 것들이 과연 역사적 사실이냐, 이것을 따지는 것은 정말 무의미합니다. 이 예수 탄생에 관한 몇 안 되는 복음서의 내용들의 출처는 크게 세 개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예수의 제자와 많은 추종자들 중에 예수의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야고보, 유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 이들의 증언이 단편적인 이야기였겠지만, 예수 탄생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의 증언자들이 되었고, 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복음서 기자가 그 탄생을 재구성하면서 대부분의 이야기를 구약의 예언에서 따온다는 것이죠. 대표적인 것이 예수사건을 구약의 완성으로 보는 마태오복음입니다.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예수 탄생이야기는 거의 구약의 예언서에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세 번째는 루가와 같이 뛰어난 작가적 기질을 가진 기자가 여러 가지 자료들을 모아서 사도행전까지 이어지는 대작을 만드는 것이죠. 그래서 루가복음의 예수 탄생이야기는 정말 드라마처럼 그 구성도 탄탄하고 드라마틱합니다. 출연진도 엘리사벳, 즈가리아, 시므온, 목동들 무척 많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역사적으로 밝힐 수 없는 예수 탄생의 이야기를 가지고 말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신앙과 그렇게 밀접한 관계가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건, 나자렛에서 태어났건 그것은 내 신앙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예수가 탄생할 때 동방박사가 찾아왔건 목동들이 찾아왔건 그것도 내 신앙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마르코복음에서처럼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건, 마태복음이나 루가복음에서처럼 마리아가 수태할 때 하느님의 아들로 되었건, 요한복음에서처럼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예수님은 본래 한 분 하느님이었건,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살고, 그것을 내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만일 예수 탄생에 대한 복음서마다 다른 여러 설이 신앙으로 고수되어야 할 것이라면 도대체 어떤 것을 가지고 우리가 고수해야 합니까? 그 내용이 아예 없거나, 복음서마다 다 다른데 말이죠.
우리가 교회력 안에 예수 탄생을 집어넣고, 그 앞에 그것을 기다리는 대림절이라는 기다림의 기간도 집어넣고 하는 것은 바로 성공회 식으로 얘기하면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우리의 신앙에 크게 도움이 되더라, 그런 식으로 했더니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되더라, 그것을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있더라. 이렇게 우리의 신앙은 이러한 전통으로 계승되고 발전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깊은 뜻입니다.
때문에 이 전통이라는 것에는 생명이 있어서, 그 전통은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고 변하고 죽기까지 합니다. 그 시대적, 지역적 요청에 따라서, 그 시대와 지역의 문화와 특수성을 흡수하면서 발전하고 변화를 가져오고, 나중에는 사라집니다. 하느님이 바로 그곳에서, 그 역사 안에서 주인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때문에 변하고 발전하고 사라지는 전통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만일 그 전통이 변하지 않는다면, 변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전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변하지 않는 것을 신조, 교조라고 얘기합니다. CREED. 그것은 하느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성찬례에서 설교 다음, 신자들의 기도 전에 외우는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신경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향한 신앙에 대해서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그것 하나 나오기까지에는 아주 오랜 기간, 얼마나 많은 정치적 진통을 겪으며, 많은 사람이 죽기까지 했는지 모릅니다.
그 신조는 언젠가는 또 변할 것입니다. 그 때에도 예상컨대, 오랜 진통의 기간이 있을 것이고, 서로 갈라서고, 전쟁도 불사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기까지 하겠지요. 바로 그러한 과정에 하느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고 보는 것이 우리 성공회의 입장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일이 잘 되어가는 것도 하느님의 은총이고, 뜻이지만/ 모든 일이 꼬이고 잘 안 풀리는 것도 역시 하느님의 또 다른 계획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서는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을 이스라엘 민족의 영욕을 통해서 보여주고, 또 예수님의 수난과 영광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그 구원의 빛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시대와 지역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해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바르게 보는 눈을 우리는 이성이라고 하는 것이구요.
오늘 우리는 성탄 2주일을 맞아서 요한공동체가 다른 공동체와는 다르게 예수의 탄생을 한 인간의 탄생이 아닌 하느님의 본래의 계획, 의지가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이 가지고 계셨던 계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신앙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기에, 우리도 역시 이것을 신앙 안에서 해석하고 우리의 것으로 고백해야만 합니다.
교우 여러분, 올 한 해 우리 교회는 바로 이러한 업그레이드 된 신앙을 고백하고, 그 안에서 우리 교회가 나아갈 바를 고민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첫 번째, 우리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성서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잘 안되면 인위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성서를 읽도록 해야겠습니다.
두 번째, 하느님과 내밀하게 소통하기 위해서 개인적인 기도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자신에 맞는 기도방법을 찾고, 그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서 기도 프로그램을 여로분에게 제공할 것입니다. 꼭 참여하셔서 자신에게 맞는 기도방법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개인적으로 업그레이드 된 신앙 안에서 내가 만난 하느님을 고백하고, 그 고백 위에서 내가 어떤 식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섬겨야 하는지 그 방법이 나올 것입니다. 이럼으로써 우리 교회의 앞으로의 선교방향이 정해질 것입니다. 올해는 이것을 목표로 우리 모두가 함께 나아가길 희망합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 모두와 그 가정에 하느님의 무한하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