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60세 이상 테니스 동호인이 모여 테니스를 즐기는 수원이순 테니스 클럽약칭으로 "수이테" 모임이 내가 매일 운동하는 삼일 공고 테니스 코트에서 있었다. 새벽 6시 화홍 테니스 회원들과 아침 운동을 마치고 이어서 수이테 회원들을 맞이하기 위해 총무님과 테니스 코트를 말끔하게 정리했다. 테니스가 좋아서 자진해 봉사를 했지만 주1회 만나는 회원들이 반가워 참석 회원을 맞아 악수하고 커피 봉사도 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삶의 본질인 사랑과 행복을 느꼈기 때문에 솔선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매주 1회 수요일 9시 30분부터 12시까지 운동을 하고 식사하고 해산했다. 오늘은 23명중 19명이 출석해 대 성황을 이루어 회장으로써 기분이 좋아 막걸리 한 잔 마셨다. 삶의 본질이 무엇일까? 내가 나이 들어 깨닫게 된 것은 이웃 간에 또 가족 간에 사랑과 행복을 추구함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40여년 교직을 떠나 정년을 한 것도 어느새 13년이 되었다. 1972년부터 매일 테니스를 하고 있으니 40년이 훨씬 넘은 70중반 넘도록 테니스를 즐기는 건강을 감사한다. 오늘 모인 회원들 대부분이 테니스가 너무 좋아서 만나 정들고 음식을 나누며 행복 했기에 다음 만나는 날을 아이처럼 손곱아 기다린다고 생각한다. 내가 회장직을 수락하며 이 즐거운 모임의 행복한 분위기를 위해하는 회원은 자진해서 떠나야 한다고 첫 인사를 했다. 그래서 이런 분위기를 유지해 노년에 행복한 삶과 사랑을 느끼도록 커피 봉사도 회원들이 즐겁게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봉사하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뿌린 대로 언젠가는 거두리라 확신이 있기에 나의 경험을 알리고 싶다. 지금부터 43년 전 1972년 서울 금천구 시흥동 모 여자중학교 2학년 담임을 맞고 있었다. 아마 그 때 서울 남부경찰서 코트에서 처음으로 테니스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일요일 새벽에 테니스 코트에 나가면 다른 사람 공치는 것을 구경하며 공도 집어 주고 시원한 물시부름도 해 주어야 겨우 공한 번 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아침도 굶어가며 1시경 자장면 한 그릇 먹고 날이 어두워야 집에 가서 아내 눈치 보며 늦은 저녁을 먹고 골아 떨어 졌다. 틈만 있으면 집안에서 테니스 공으로 벽치기 서브 연습한다며 유리창과 형광등도 여러번 깨고 아내에게 잔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2교시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반장이 찾아 왔다. 운동장에서 체육 수업을 마치고 교실에 들어 왔는데 한 학생의 육성회비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평소에 담임으로서 공납금은 등교 즉시 서무과에 납부하라고 강조 했는데 분실 사고가 난 것이다. 당장 여학생의 몸을 수색해 돈을 찾을 수도 없고 또 돈을 찾는다 해도 여학생하나 희생시키는 불상사가 불가피했다. 나는 반장에게 알았다며 점심시간에 모두 교실에 모이라 지시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모두 고개 숙여 눈을 감고 누구나 돈을 보면 한 번은 실수 할 수가 있으니 선생님만 알 수 있도록 손을 들었다 내리면 용서해 주겠다고 했다. 내가 어리석었다. 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지금 당장 돈을 내 놓기는 어려울 것이니 오늘 하교하기 전까지 교실 어디나 교무실 내 책상 서랍에 갖다 놓으라고 했다. 6교시 수업이 끝 날 때까지 찾지를 못했다. 나는 혹시나 해서 종례 전에 단체 기합을 준다며 전학생들에게 운동장 한 바퀴 돌고 오라고 했다. 나는 학생들을 내 몰고 교실 안 청소도구함 교탁 속 창틀 후미진 구석을 뒤져 보았다.
학생들이 운동장을 돌고 숨을 헐떡이며 모두 숨죽여 자리에 앉아 교단에 장승처럼 서있는 나를 두려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나는 학생들에게 돈을 들어 보이며 우리 학급 중에 이렇게 용기 있는 학생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담임으로 보람을 느낀다며 이 학생에게 박수를 보내자며 30여초 동안 전학생이 박수를 쳤다. 그리고 돈을 잃어버린 학생에게 앞으로 공납금은 등교하는 즉시 납부하라며 돈을 돌려주었다. 돈을 찾은 학생은 고맙다며 내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나는 왠지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답답했다. 사실 그 돈은 동료 직원에게 빌려 돈을 찾은 것처럼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날 그 돈에 대한 속사연은 나도 누군지 모르지만 돈을 훔친 학생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내가 빌고 싶은 것은 그 돈을 훔친 학생이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사립학교의 교복 부교재 판매로 부당한 돈을 챙기는 학교 비리를 견디기 어려워 3년 후 그 학교를 그만 두었다.
사립학교에 대해 신물이 난 나는 공립학교를 가기위해 경기도 순위 고사를 보아 40명 공채에 4위로 순위를 받았다. 당시 서울 독산동에 살면서 세 딸을 두었는데 첫째 둘째가 문성초등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늦둥이 막내딸은 유치원생이었다. 당시 소문에 잘못 발령을 받으면 시골 변두리 학교에 배정을 한다고 했다. 아내와 떨어져 살면 죽는 줄 알았다. 누구나 서울에서 공부하기를 원하는데 한편 아이들을 데리고 이사를 가면 아내와 딸들이 기가 꺾인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담당 장학사가 서울에서 수원으로 출퇴근이 가능한 사립하교 영복 여고와 삼일 실고를 소개 했다. 영복 여고는 호봉이 높아 안 되고 삼일 실고 면접을 갔는데 마침 삼일 실고 교감이 이력서를 보고 고등학교 후배라며 반겨 맞았다. 수학교사 자리가 고등학교가 아니라 삼일 중학교라며 삼일 중학교 교감을 찾아 가라했다. 삼일 실고와 중학교 교장인 장기홍 교장이 이것저것 물어 보더니 호봉이 높아 안 되겠다고 했다. 나는 여기도 안 되면 공립학교로 가면 되겠지 생각하며 교장에게 인사하고 돌아서 몇 발작 걷는데 "김선생 잠간 물어 볼게 있소." "예! 교장 선생님!" "혹시 취미가 뭐요." "예 요즘 테니스에 미처 3년째 운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이 눈을 둥글게 뜨면서 "아! 그래요?" "그러면 가지 말고 교무실에서 기다리고 교감 들어오라 하세요." 나는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갸웃 등하면서 "예" 교무실에서 생각해 보았다. 아까 교문을 들어오다 보니 운동장에 테니스 라인이 그려졌고 이동식 칸막이 그물망이 보였다. 운동장에서 머리가 하얀 체육선생이 수업을 하고 있고 중고등학교 건물 규모도 크고 역사가 꽤 오래된 학교로 보였다. 열심히 근무하면 봉급을 받으며 교사직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서울에서 출퇴근하다가 다시 서울 명문사립학교로 옮기면 딸들 교육에도 지장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교장실을 나온 교감이 당신이 테니스를 한다니까 나를 꼭 잡으라는 교장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봉급 1호봉은 깎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감이 일 년 후 호봉 재사정할 때 근무하는 것을 보아 조정해 준다는 것이다. 나는 2,3일만 말미를 달라며 집으로 와서 아내와 상의 했다. 결국 공립하교 발령을 포기한다는 각서에 서명을 하고 채용에 승낙을 했다. 3일후 공립학교 발령 인사 발표가 있었는데 나 다음 5위가 수원시내 수성중학교에 발령이 났다. 이것이 내가 살아 온 길이며 운명이라 생각했다. 결국 1976년 3월 삼일중학교에서 2년 근무한 후 1978년부터 1993년 까지 고등학교에서 여러 해 교무 주임 근무하면서 매일 새벽에 장기홍교장 테니스 파트너를 했다. 이곳에서 교직의 꽃 교장은 본교 경력이 많은 선배 때문에 어렵다는 생각에 타법인 사립학교로 옮겨 안산에서 1993년부터 교감 교장으로 근무하다가 2003년 3월 정년을 했다. 안산에서 10년 동안 근무하면서도 수원에서 새벽에 테니스를 치고 출근을 했으니 나의 인생은 테니스로 시작해 테니스로 끝날 것이다.
그런데 2003년 12월 성탄 전날로 기억된다. 오후 3시경 50대로 보이는 여인이 집으로 찾아 왔다. 처음 보는 얼굴로 양장 차림의 여인이 "김선생님 저를 기억 못하실 겁니다." 두 팔을 이마에 대고 큰 절을 올리며 일어 설 생각은 안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었다. 당황한 나는 여인을 일으키며 앉도록 했다. 아내가 준비한 차를 마시도록 진정을 시켰다. "제가 **중학교 2학년 학생 ***입니다." 그 이름을 기억하며 자세히 보니 생각이 났다. 가정이 어려웠으나 반에서 제일 예쁘고 공부도 잘 했던 학생이었다. 여인은 다시 무릎을 꿇고 "선생님 용서해 주세요." "30년 전 제가 육성회비를 훔쳤던 학생입니다." 그러면서 돈이 든 봉투를 내 놓았다. "제가 자식을 키우면서 30년 동안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을 찾아오려 했으나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나는 제자를 끌어안고 얼마나 함께 울었는지 모른다. 30년 만에 비밀의 꽃이 피었다. 제자도 남매를 시집 장가주고 내년이면 손자를 보게 되어 이 죄의 굴레를 벗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육부 은사 찾아주기 인터넷을 통해 나를 찾아 왔다는 것이다. 100만원 봉투를 들고 왔기에 이제 되었으니 도로 가져가라 했으나 받지 않아 나는 제자에게 약속을 했다. 내 기억으로 한 기분 육성회비가 7만원인 것 같아 원금을 받고 나머지 돈으로 요즘 년 말이고 내일이 성탄절이니 자네가 살고 있는 이웃 독고노인들에게 쌀을 사서 드리는 것으로 자네 잘못을 용서한다고 했다. 악을 뿌리면 악을 거두고 선을 뿌리면 선을 거두리라. 30년 전에 뿌린 씨가 꽃을 피워 거두었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
어쩌면 오늘도 수이테 회원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커피 대접 봉사도하고 테니스 코트 정리하는 것이 내게는 소중하고 행복한 하루였다. 지금 노년을 살고 있는 나이에 삶의 진정한 본질은 사랑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