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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홍순관의 춤추는 평화 원문보기 글쓴이: 숲의 노래
홍순관 |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미술과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86년부터 무용무대미술을 기획하거나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연출 및 출연했다. 국악노래, 뮤지컬, 동요, 가스펠, 시노래 등 여러 장르의 음악활동을 해왔다. 1995년 정신대 할머니 돕기 공연을 시작으로 2000년 동경국제법정 공연 등 정신대 관련 초청공연을 하고 있으며, 평화센터건립을 위해 모금공연<춤추는 평화>를 진행중이다.
홍순관씨는 정신대 할머니를 돕고 평화박물관을 짓겠다며 기타 하나 들고 전국과 세계를 돌아다닌다. 그의 노래는 노래 이상의 것을 노래한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인지 알아보았다.
노래를 시작하게 된 배경을 알고 싶습니다.
노래시작은 어릴 때부터 했습니다. 사람 앞에 서서 노래한 것은 중2 때부터였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했습니다. 그와 똑같이 6학년 때부터 화실을 다녔습니다. 결국 그림을 그려서 미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6학년 때 이미 미술로 진로를 정했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시절, 콩쿨대회에서 1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음악선생님과 미술선생님간 갈등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나를 음대에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탐내신 거죠.
3년 내내 음악을 가르쳐주신 중학교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 선생님이 제게 “네 몸에 맞게 노래하라”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이 제게 화두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17년을 지휘했습니다만, 한국교회를 보면 선곡 자체가 권위적입니다. 꼭 대곡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몸에 맞는다는 것은 평화입니다. 평화는 제 숨을 잘 쉬는 것입니다. 자기 숨이 아니고 남의 숨을 내 숨 인양 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선생님은 “네 몸에 맞게, 자연스럽게 노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성악은 나한테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미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때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 미국 가스펠을 번역해서 불렀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조그만 녀석이 뭘 알까” 하겠지만 그 노래를 부르면서도, ‘왜 우리 노래가 없는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자란 가정환경과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집에 계셨습니다. 1909년생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일어나시면 먹을 갈고, 붓글씨를 쓰시고, 늘 시를 읽으셨습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저는 우리 것이 몸에 익었습니다. 따라서 ‘왜 우리의 것은 없는가’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발전되고, 반복되고, 성숙했습니다. 대학교는 예술대학 미술과에 들어갔는데, 같은 건물에 국악과, 무용과, 음악과가 다 있었습니다. 그때 무용음악을 하고 무대미술을 같이 하면서, 국악과 선생님이 작곡을 하면 제가 노래를 불러주곤 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노래, 우리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 음악이 발전하기 위해서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또한, 근래들어 국악을 접목하려는 가수들이 늘고 있습니다. 좋은 현상입니다만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으신지요?
언어라는 것도 우리 것, 우리 정서, 우리 숨, 우리 이야기가 있어야만 합니다. 착한 노래는 내 숨으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경배와 찬양’을 교회에서 부르지만 가사를 잘 보면 한국식 언어가 아닙니다. 미국식 언어입니다. 강약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억지로 붙은 가락이 굉장히 많습니다. 미국식 경배와 찬양이 교회를 세뇌시키면서 그런 것들이 화석화된 것입니다. 남의 것이 내 것처럼 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처음부터 생각했기 때문에 저는 국악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사실 국악동네에 친해지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미대를 나오고 가스펠을 했지만, 86년부터 국악동네에 기웃거렸습니다. 부르기 싫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시립 국악관현악단 등 국악오케스트라와 협연을 많이 했는데, 그때는 제가 부르고 싶은 것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주문해오면 불렀습니다. 노래하는 사람으로서는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국악을 알아야 하기에 할 수 없이 했습니다. 음반도 내곤 했는데, 그때 함께 했던 분들이 지금 제가 공연을 할 때 도움을 주시고 있습니다.
지금도 가스펠하신 분이나 가요하시는 분들이 간간이 국악을 사용하십니다만, 국악창작독집으로 12년 전 음반을 냈을 때, 한 번도 팔지 못하고 사탄음악이라고 매도당해 사장되었습니다. 최초라는 것이 우스운 꼴이 되었습니다. 그런 아픔이 제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월이 지금 저를 있게 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때 고생한 것이, 그 동네를 기웃거린 것이 공연을 할 때 이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국악기를 개량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국악은 키의 한계가 있습니다. 낼 수 있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디테일한 부분을 담아내지 못합니다. 따라서 노래하는 사람으로서 내고 싶은 소리를 내지 못하는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을 감안하고도, 국악을 살려야하기 때문에 노래하는 이의 불편함을 감수해 온 세월이 20년입니다. 국악기를 개량해야 한다는 주장이 20년 전에 나왔는데, 불과 몇 달전에 국립국악원 앞에 개량연구소가 생겼습니다. 잘잘못을 따지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국악기가 이 시대에 있어 어떤 것인가? 이시대 노랫꾼으로 외국에서 “너의 노래가 뭐냐”, “너희 나라의 음악이 뭐냐”고 할 때 나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북한과 남한이 만났을 때 어떤 노래로 만날 수 있을가?” 이것은 나의 화두였고 일상이었습니다. 이것을 풀기 위해서 고민한 세월이 20년입니다. 외로울 때 눈물 흘리고 배고픔을 겪은 세월이 20년입니다. 그때 가만히 있던 친구들이 이제야 된다고 하니 지금 뛰어들고 있습니다. 그때는 숨죽여 있다가 이제 먹혀들어가니깐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 혁명가 노신이 “분수에서 물이 나오고 혈관에서 피가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혁명문화 시대 때, 가만히 있다가 혁명시 하나 썼다고 혁명문학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상과 삶이 중요합니다. 세월과 역사가 묻어있지 않으면 거짓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스승의 날, 어버이 날, 어린이 날, 학생의 날이 있어서 그 날만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삶에서 스승, 어버이, 어린이, 학생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으로 흐르지 않으면 억지로 되지 않는 것이 노래입니다. 세월이 없으면 설득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음악으로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홍순관씨의 음악을 한국적 기독음악이라고들 합니다. 노래를 들어보면 기독성을 포함하면서도 한국적 전통을 붙잡으면서, 아이들 세계를 노래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어른들에게 무엇인가 들려주고자 하는, 정호승 씨가 말한 '어른을 위한 동요'의 성격이 강한 것 같습니다. 본인의 음악세계를 이루는 정신과 철학은 무엇입니까?
제가 82학번인데, 대학교 때에 민중가요 음반이 없었습니다. 민중가요 음반을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안했습니다. 당시 노래패들의 노래들이 좋고 정신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릴 때 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생각한 것은 인간, 세상에 대한 연민의 정에 대한 노래입니다. 민중가요에도 연민의 정이 있지만 시대적 상황이 더욱 강합니다. 저는 시대적 상황을 이야기하지만 서정성이 굉장히 강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경에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총쏘지 마라, 총쏘지 마라” 이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때리지 마라”를 반복하면 강력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성향은 “총쏘지 마라”가 아니라 꽃을 “숨쉬게 하자. 꽃이 숨쉬게 하자”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웃게 하자”는 정서입니다. 민중가요를 취입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많은 고민끝에 거부했습니다. 민감하고 어려운 경계가 있었습니다만, 그때 나는 기독노래를 했습니다. 그림에 양 한마리를 그렸다고 성화가 아닌 것처럼, 예수라는 글자 또는 할렐루야라는 글자가 있다고 찬양이 아닙니다. “그 그림이 성경과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가”, “노래가 말씀과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있는가”가 핵심입니다. 예를들어보죠. 제가 부른 ‘나처럼 사는 것은 나밖에 없다’. ‘들의 꽃이 산의 나무가 가르쳐 주었어요’가 기독교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숨을 쉬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창세기를 보면 땅과 하늘이 숨을 쉬고, 별과 해가 숨을 쉽니다. 사람은 그분의 생기를 얻어서 창조의 숨을 쉽니다. 창조하신 숨을 쉬는 것이 평화의 시작이요, 완성입니다. 제 숨을 쉬는 것이 지금 쉬운가요? 현대사회로 가면, 꽃과 들판이, 사람이 제 숨을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대국 때문에 약소국이, 어른들 때문에 어린 아이들이, 교사들 때문에 학생들이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이런 은유와 상징성을 가지고 저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기독성이란 산의 꽃이, 들의 나무가 가르쳐주었다는 것입니다. 창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노랫꾼이 되셨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틀림없이 교회에 갇혀 노래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외롭고 쓸쓸히 울며 고민하시다가 아픈 세상과 역사 속으로 들어가셔서 노래하셨을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내가 예수 제자라는 것은 할 수 없이 아픈 세상과 아픈 역사 속에 들어가서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노래의 메시지가 정말 예수의 길을 걷고 있는가” 이것이 기독성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동요를 하는 이유는 특별합니다. 동요는 어머니 나라의 정서입니다. 이민 1세대와 2,3세대간 언어 단절이 커지고 있습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가 낳은 자식과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아이가 부모와 말하기 싫어합니다. 언어는 문화 단절이며 역사 단절입니다. 조국이 어떻게 되든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됩니다. 이것은 한민족의 비극입니다. 동요는 어머니 나라의 정서를 고스란히 갖고 있습니다. 제가 외국에 가서 노래를 부르면 꼭 동요를 합니다. 엉뚱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가스펠한다는 사람이, 모금운동을 하는 사람이 왜 동요를 부르냐고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면 왜 제가 이것을 부르는지 알게 됩니다. 저는 북한에 가서 동요공연을 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봅니다. 북한에 동요를 심어놓으면 나중에 아이들이 만나 함께 부를 노래가 있게 됩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이 노래는 본질과 연민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동요는 그런 힘과 위력,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에 어린이 몇 명과 남한의 몇 명을 데리고 동요 워크샾을 하고 싶습니다. 각자 글을 쓰고 곡을 붙여서 연습을 합니다. 남한과 북한에 공연을 하고, 백두산과 한라산에서 동요공연을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지금은 어렵다고 해도 어린아이들은 바라볼 수 있습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통일은 껍데기이다. 제 부르는 노래 중에 “꽃은 참 예쁘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11살 짜리 꼬마가 쓴 글에 곡을 입혔습니다. 풀꽃에게 11살 짜리 꼬마가 “너는 예뻐”, “예쁘지 않은 꽃이 없다”고 한마디 합니다. 요한복음 3장16절에 온 우주전체를 사랑하셔서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라크, 미국, 남한, 북한의 꽃은 예쁜 생명입니다. 동요를 통해 얼마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노래 장르로서 너무 중요합니다. 지금은 동요가 죽은 세상입니다. 골목에서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동요는 이 시대에 중요한 노래장르라고 생각합니다. 목숨 걸어야할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교사와의 만남과 선생님의 노래가 연결이 될 수 있나요?
중학교때 강경자 선생님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제가 이런 노래를 불렀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 선생님이 제게 강조한 몸에 맞게 노래하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와 가락, 정서, 숨으로 쉬라는 말도 담겨져 있습니다. 절제하고, 온유하라는 것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합니다. 어려운 말이 아닌 진심 어린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또 한번은 제가 수학여행 때 아팠던 적이 있었습니다. 젊은 선생님이셨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다른 선생님들은 화투를 치셨을꺼에요. 그 선생님이 밤새도록 열이 높은 제 머리에 수건을 짜내시고 얹어주셨습니다. 여기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사람을 사랑하고 아이를 아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거죠. 그런 가르침은 한 아이의 가치와 철학을 결정짓습니다.
자라나는 우리 2세들을 생각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노래나 교육은 같은 것입니다. 김교신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울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일제시대에 가난하고, 억압받았기 때문이겠지만, 그만큼 학생들을 사랑했고, 연민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교실 문을 열 때 학생들을 바라보며 웃는 울 수 있는 교사와 관객을 보면서 웃고 울 수 있는 노래꾼은 하나라고 봅니다. 사람을 향한 연민, 배려, 사랑 그리고 아이들을 향한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교사나 노랫꾼이나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성을 유지하면서도 기독성과 관계없는 일반 가수들과도 공연도 하고 협력도 하고, 바깥세계와 같이 하시면서도 교계와도 함께 하셔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칫 오해를 살 수 있고, 이해를 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교사운동도 외로운 운동이라고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만, 노래세계를 펼치는데 외로움을 느끼시지는 않으신지요?
저는 사각지대입니다. 국악을 쓰면서도 국악인으로 평가받지 못합니다. 가스펠쪽에서는 일반 가수로 보고 있고, 대중가요로 가면 가스펠가수로 봐줍니다. 암튼, 어떤 장르에서도 저는 사각지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해도 이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이것이 제게 주어진 시대적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홍순관이 국악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음악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시대적 운명적 접근이라고 평가해 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이 민족이 어떤 음악을 해야하는가”, “노랫꾼으로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때문에 국악을 선택한 것입니다.
국악기는 너무나 탁월한 악기여서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자연의 소리입니다. 섹소폰, 플릇, 오보에가 대금의 청아함을 못 따라옵니다. 아프리카 아이들이 타악기를 잘하지만, 장고를 못 따라옵니다. 어떻게 하든지 우리 것을 살리고 싶습니다. 국악기가 탁월하기 때문에 대금과 가야금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 초등학생이 선생님은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국악기를 쓰는 것인가요”라고 질문을 하더라구요. 저는 “아니다. 이 악기 자체가 훌륭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고 답변했습니다.
외국음악을 가지고 우리가 외국인과 승부를 건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재즈, 레게, 랩으로는 승부가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외국 사람이 한국에 와서 국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음악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나라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밥과 김치와 된장 맛은 그 나라 사람이기에 아는 것입니다. 외국 것을 한다고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수가 음악으로 외국에서 승부를 던질 때 당연히 우리 것을 가지고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저는 미국의 링컨 센터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한국 가수들 중에 링컨 센터에서 공연을 한 경우는 드뭅니다. 그것이 한국의 것을 가지고 음악한 것에 대한 위력입니다. 돈과 유명세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국악기로 공연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화와 국제적 코드를 가지고 사용했기에 가능했습니다.
링컨센터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십시요
링컨센터가 되었든, 카네기 홀이 되었든 무조건 돈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조수미나 신영옥 정도 돼야 가능할 겁니다. 히트곡 하나 없는 제가 어떻게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100% 은혜였습니다. 이때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국악기를 가지고 노래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렸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단지, 가스펠만으로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맨하튼의 수많은 공연을 봤던 링컨센터의 직원들과 관객들이 수도 없이 정통 사물놀이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교포들은 국악의 현대화된 모습을 저의 공연을 통해 처음 보았습니다. 반응은 숨이 멎을 정도였습니다. “와 이렇게도 되는 구나” 한국 민족들은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국악기가 이것이 되는구나’를 느끼게 한 것입니다.
링컨센터 공연은 한 푼 없이 시작했습니다. 무대포도 그런 무대포가 없었습니다. 기획자. 연출자도, 스폰서도 없었습니다. 가능하지도 않았습니다. 10월 11일이 공연인데, 10월 3일까지 표를 한 장도 못 팔았습니다. 막판에 총영사가 우연찮게 행사에 저를 세웠습니다. 가방하나 들고, 무반주로 ‘세노야’를 불렀는데, 앵콜이 나왔고, 관객들이 왜 이 사람들을 안도와주냐는 관객이 반응이 있었고, 이후 일주일 만에 표가 3만불 어치가 팔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시다가 살리신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은혜였습니다. 그 힘이 우리 음악이 가진 힘이라고 봅니다. 그 절박한 상황에서 저는 20년 세월을 걸고 노래했습니다. 심지어 공연을 매일 보는 링컨센터 직원들도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해금과 가야금의 위력은 원자폭탄에 비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방에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문화의 힘이 그렇게 큰 것입니다.
모금운동까지 하시면서 가수 생활이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지금까지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노래도 어려운데, 하는 일이 정신대니 평화센터니 모금이야기를 하니 받아들이는 이들은 부담감이 큽니다. 도와주어야 하니깐... 가수로서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노래를 하고도 개런티를 못 받습니다. 정신대부터 지금까지 모금운동을 한 것이 15년이 넘었는데, 제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워 할 일입니다.
교회가 저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교회를 사랑하지만, 그런 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와서 보면 그래서 지금의 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정신대 국제법정 모금공연에서 1억을 모금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푼도 없었습니다. 공연을 하고 지하방에서 잤습니다. 매트 하나 깔고 잡니다. 다음 날 감기 걸려서 노래하는데 서러웠습니다. 평소 연단이 없으면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넉넉하게 견딜 수 있습니다. 지금껏 평화박물관 모금공연을 62번을 했습니다. 평화박물관을 통해 전 세계의 아이들을 모으고 싶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다른 것을 만나게 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다른 생각이 있구나’를 느끼게 하고, 그래서 넓은 사람들을 만드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너네 나라에는 그런 것을 배우냐, 우리나라는 이런 것을 배운다. 너는 그런 생각하냐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는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교사운동이 추구하는 것과 제가 추구하는 것이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홍순관 씨를 기독교사대회때 모셔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4월에 개최된 교육기획력 워크샾이 마친 직후였다. 딱딱하고 메마른 워크샾 때 잠시 쉬어가는 코너로 그를 초빙하였다. 장비도 거의 그를 뒷받침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달하는 ‘메시지’, ‘시와 같은 노래말’, ‘동요와 국악, 가스펠을 넘나드는 변주’. ‘감미로우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에 모두들 행복해했다. 그의 노래는 메마른 대지에 단비처럼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씻겨주었다. 그런 감동이 있었기에 평소 음악을 즐기지 않는 나도 몇 번씩 그의 음반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는 언제든 노래를 내려놓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산다고 했다. 그 마음으로 다른 가수들에게 양보하고 배려할 수 있는 넉넉함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는 마음을 통해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넉넉함! 어찌보면 우리 교육계에 필요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댓글 꼼꼼히 읽어 보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