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열녀.
[가계]
이천 서씨(利川 徐氏)는 서영규(徐榮圭)의 따님으로 오천인(烏川人) 정한헌(鄭瀚憲)의 부인이다.
정한헌은 고려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하는 영일 정씨(迎日 鄭氏) 후손으로, 문과 급제 후 봉익대부행전공판서(奉翊大夫行典工判書)인 정인언(鄭仁彦)과 그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정광후(鄭光厚)부터 영천 전촌(錢村)에 옮겨 살았다.
고조는 정주봉(鄭周鳳)이며, 증조는 정몽두(鄭夢斗), 조부는 정득섭(鄭得燮)이다.
아버지는 정기수(鄭基守)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 朴氏)로 박중화(朴重華)의 따님이다.
공은 고종(高宗) 정축년(丁丑年 : 1877)에 태어났다.
후사(後嗣)가 없어 형 정영헌(鄭領憲)의 아들 정수표(鄭守杓)로 뒤를 이었다.
[활동 사항]
이천 서씨는 시집온 지 4년째 되는 해 친정으로 근친을 가서 있던 중 남편이 갑자기 병을 얻어 죽게 되자 부인은 부음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듯하였으나, 곧바로 시댁으로 달려가 시신을 껴안고 통곡을 하고는 이내 정신을 차려 염습할 옷가지를 간추려 내놓고 장사치를 음식 등 모든 준비에만 바쁘게 서둘고 슬픈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시부모님을 위로하며 한 쪽 자식이라도 저가 있지 않습니까? 하니 친척들은 모두 철이 없다 하였다.
석달이 지나 남편의 장례를 나흘 앞두고 모든 준비를 손수 점검하고는 2월의 밤공기는 싸늘하고 달빛만 고요히 비출 뿐 삼라만상이 잠든 틈을 타서 신혼 때 입었던 채색옷으로 갈아입고 그 위에 남편의 상복을 덮어 입고는 남편의 시신이 묻혀있는 초빈(장례 전에 임시로 묻어둔 묘) 곁에 가서 남편이 평소 사용하던 허리끈으로 한 쪽 끝은 어린 소나무에 매고 한 쪽은 자신의 몸에 매어 남편을 따라 고이 세상을 떠났다.
이른 아침 집안사람들이 부인이 없어짐을 알고 사방으로 찾았으나 행방이 묘연한지라 행여나 하고 초빈으로 달려가 보니 흐트러짐 없이 잠들듯 고이 이 세상을 떠난 몸이었다.
이는 필시 남편과 함께 묻히려고 장례 나흘 전에 이렇게 자결했음을 알고 한날 같은 곳에 합폄을 했다.
이 사실을 안 고을 선비들이 군수와 순무사에게 장문으로 정려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한말의 어수선한 시국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가, 뒤에 마을 입구에 비각을 세우고 창렬각이라 현판하니 그 철석같은 심정과 근엄한 행실은 세상에 귀감이 되는 일이라 하여 표창의 뜻으로 유림(儒林)의 공론에 부쳐 결정하기를, ‘아 열부의 생애는 짧았지만 이름과 정신은 천추에 빛나리라.’고 하였기에 이 각을 세워 기리고 있다.
[묘소]
묘소는 영천시 오미동(五味洞) 삼귀(三歸) 석현산(石峴山) 사좌(巳坐)에 합폄(合窆)이다.
[상훈과 추모]
영천시 도림동(道林洞)에 완산(完山) 이호대(李好大)가 지은 비와 비각이 남아있다.
[참고 문헌]
『영일정씨세보(迎日鄭氏世譜)』
『영천의 충효 이야기』(포은선생숭모사업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