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넘어 아리랑문학 마을로!
수필가 김원중
그렇게도 지독하고 짜증나던 무더위도 계절의 변화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요즘 국제적으로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G20세계정상회의가 열리고 있고 국내적으로는 이석기의원 체포동의안이 가결 되어 여야가 모처럼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 가운데 2013년 문예사조문인협회 문학심포지엄 (2013.9.6금~7토)에 참가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충무로 대한극장 앞에 대기하고 있던 전세버스에 몸을 실었다.이번 행사를 주최한 월간문예사조는 오랜 연륜에도 불구하고 최근 침체의 늪에 빠졌는가 했는데 다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반가웠다. 아침8시30분 충무로역을 뒤로하고 남산터널을 지나 한강을 건너 경부고속도로에 들어섰다. 모두들 오랜만의 단체 여행이고 낯 설은 얼굴도 많아서 버스 좌석에 앉아 있는 순서대로 각자 자기소개와 인사를 했다. 활짝 갠 날씨는 아니지만 正安휴게소에 잠깐 들렀다가 익산에서 가장 맛있는 식당에서 산채와 콩나물국밥에다 모주까지 곁들이니 은은한 흥취가 감돌기 시작했다. 다시 버스에 올라 안정을 취한 뒤 1,400여년의 古刹 金山寺에 도착했다.때마침 내리고 있는 부슬비를 맞으면서 경내를 걷노라니 점심때 반주로 마신 모주의 향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김제 母嶽山 金山寺는 백제법왕원년(서기599년)에 나라의 평안과 백성의 복을 기원하기 위한 원찰로 조그마하게 山門이 열리었고 신라36대 혜공왕2년(서기766)에 眞表律師께서 크게 중창하여 33척의 철 미륵불상을 모신 후 미륵신앙 의 근본 도량 그리고 법상종의 종찰로 크게 변모하였다.선조25년 (서기1592년)임진왜란 때 위기에 처한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는 雷黙處英스님을 중심으로 한 1,500여 승병들의 훈련장으로서 승병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의하여 재난을 겪지 않았다. 그후 정유재란(서기 1597년)때 왜군들의 보복으로 인하여 장엄했던 80여채의 건물과 40여채의 암자가 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선조31년 (서기1601년) 守文大師께서 열다섯 분의 대덕스님과 함께 복원불사를 시작하여 무려 35년만인 인조13년(서기1635년)에 五如來,六菩薩을 모신 大寂光殿과 39동의 彌勒佛을 모신 彌勒殿 등 大師區域만 낙성을 보았다.그 후 불교중흥과 교단정화 그리고 불교대중화에 앞장서온 太空月珠和尙께서 1961년 부임한 이후 일주문을 비롯하여 수많은 건물을 중수 및 중건하고 성역화를 마무리하여 오늘날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또한 미륵전(국보제62호),方等戒壇(보물제26호).五層石塔(보물제25호),石蓮臺(보물제23호),露柱(보물제22호),大藏殿(보물제827호),石燈(보물제828호)등 많은 文化財가 남아 있다. 그 가운데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국보 미륵전은 수리중이어서 내부를 볼 수 없었고 경내도 현대적으로 깔끔하게 공사 중이어서 산뜻하고 깨끗해서 좋기는 하겠지만 고색창연한 千年古刹을 기대했던 나에게는 실망감도 안겨 주었다.또한 금산사는 후백제의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하여 유폐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다음으로 문학심포지엄이 열리는 국립김제청소년 농업생명체험센터에 도착하여 방배정을 받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15;30부터 시작되는 문학심포지엄에 참석했다.국민의례, 개회사, 환영사, 축사에 이어 시인이며 문학평론가 이신 이덕주선생님의 [통합적 인식]이란 주제로 문학 강연이 숙연하고 진지하게 진행되었다.강연의 주제는 특정대상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그 대상에 관계된 종합적 이해가 작용하는 한 순간에 이루어진다. 이는 대상을 접하면서 감각적인 느낌과 대상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지식, 경험 등이 일으키는 상호작용 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은 자인만의 직관과 상상을 토대로 새로운 창의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지의 특강을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가면서 자상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다. 특강이 끝내고 질의응답이 있었는데 나로서는 시인이 아닌데다가 난해한 부분도 많아 그저 조용히 경청할 따름이었다. 저녁식사를 끝나고 19;00부터 시낭송회와 동시에 문예사조를 詩句로 하는 卽興詩를 만들어 내라는 문제에 나도 지어 봤는데 탈락되고 황인두님이 문; 문학이 어디메 있노? 예;예술은 어디에 있당까? 사;사랑은 또 있디에 있다유? 조;조목조목 따져보니 문예사조에 다 있남유. 로 장원으로 당첨되었다.그리고 시낭송부분은 별빛시랑 보령 낭송인회 회원에서 참석한 세련되고 느낌이 있는 이영열님이 정두리님의 “그대" 시낭송으로 장원을 차지하였다.여흥으로는 노래와 춤이 뒤섞인 장기자랑이 있었는데 하도 멋들어진 모습을 보니 왕년에 돈푼께나 들었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숙소는 금년 7월에 오픈한 신축 건물로써 널찍하고 깨끗하면서 복도를 사이에 두고 린넨실, 휴게실이 배치되어 있는 최첨단설비이다.하룻밤 푹 쉬게 되는 303호실은 上.下 2단의 침대방으로서 10명이 잘 수 있게 되어 있다.다행히도 룸메이트로 대구에서 오신 손수여 교수님의 시집[웃기돌 같은 그 여자]를 선물로 받게 되는 행운도 누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해마다 김제 地平線祝祭가 거행되는 碧骨堤(사적 제111호)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김제 벽골제는 백제11대 비류왕27년(서기330년)에 축조된 벽골제 제방 및 조선시대에 벽골제중수비가 1963년1월21일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3월 문화재청 공고 제2011-81호에 의거 사적의 명칭이 金堤碧骨堤로 변경되었다.아침식사를 끝내고 출발을 한 시간 앞두고 바로 옆에 있는 趙廷來 아리랑문학관을 찾았다. 作家 趙廷來 선생은 1943년 전남 승주군 仙岩寺에서 태어나 光州西中學校. 서울 보성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한 후 왜곡된 민족사에서 개인이 처한 한계에 이르기까지 단편집" 어떤 전설 "을 비롯하여 중편집 " 유형의 땅"을 발표 하였으며 그 후 대하소설 3부작인 (太白山脈).(아리랑).(한강)은 1980년대 이 후 시대를 초월한 고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선생은 조국은 영원히 민족의 것이지 무슨 무슨 주의자들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난날 식민지 역사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피 흘린 모든 사람들의 功은 공정하게 평가되고 공평하게 대접되어 민족통일이 성취해 낸 통일조국 앞에 겸손하게 바쳐지는 것으로 족하다. 나는 이런 결론을 앞에 두고 소설(아리랑)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일제 36년간 죽어간 민족의 수가 400만,200자 원고지 18,000매를 쓴다 해도 내가 쓸 수 있는 글자 수는 고작 300여만 자! 라고 쓰여 있는 1,2,3층 전시실 차례로 돌아보면서 작가 선생이 나의 중학교 후배라는 사실에 보람과 긍지를 느껴 보기도 했다.버스출발시간이 가까워지자 우리일행을 안내하러 오신 양해완 청하면 면장님이 진짜 보아야 할 곳은 이곳 아리랑문학관 보다도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아리랑문학마을 "이라고 해서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아리랑문학마을은 전북 김제시 죽산면 흥산리208-20일대에 면적29,316m로서 1.홍보관 2.근대전시가로 3.내촌. 외리마을(5가구11동) 4.이민자 가옥 5.하얼빈 驛舍로 구성 되어 있다. 1.홍보관은 쌀가마와 논의 형상을 주제로 하여 문학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며 이 지역의 대표적인 수탈대상인 쌀과 토지를 상징하여 중요성을 강조하고 고통에서 벗어나 발전된 미래지향적 염원으로 현대식 구조로 조성 2.근대전시街路는 우체국, 면사무소, 주재소(파출소),정미소 등으로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수탈을 대표주요기관별로 활용자료와 그 당시 사진들을 전시하여 잊혀져가는 민족의 아픈 역사를 상기하여 조국애를 일깨우는 교육의 장소로 활용 3.내촌, 외리마을은 조정래 선생의 大河小說"아리랑"에 나오는 감골댁, 송수익. 지삼촌, 손판석, 차득보 가옥등 일제강점기 수탈의 모습을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표현하기 위한 공간으로 조성 4.이민자 가옥은 너와집. 갈대집으로 일제강점기 선조들은 고국 땅에서 살지 못하고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로 가서 온갖 고초를 겪는 이민자 생활을 현실감 있게 그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함으로써 이민생활의 어려움을 관람객이 현실감 있게 느낄 수 있도록 조성 5.하얼빈驛舍는 1910년경 실제로 존재했었던 건물 및 철도를 토대로 60%정도로 축소 복원하여 대한민국 침탈의 원흉 伊藤博文( 이또오 히로부미 )를 사살한 안중근의사 의거장소 하얼빈驛舍와 鐵道를 독립운동의 대표적 상징성으로 표현하고 아리랑문학마을은 전체적으로 보아 조정래 선생의 大河小說 아리랑의 작품무대와 일제의 침략사를 바탕으로 우리민족의 受難史를 보여줌으로써 조국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주는 교육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자료를 전시한 현대식 건물이 너무 깨끗하게 잘 정리정돈 되어 있어서 그 당시의 분위기를 느끼는 데에는 다소 아쉬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이어서 이번 여행의 마지막코스인 새만금사업장으로 향했다. 국토면적이 적고 인구밀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바다를 매립하여 국토를 넓히는 간척사업이 필요하므로 30년이 넘도록 많은 비용과 장비 및 人力을 동원하여 防潮堤를 건설하고 바다와 갯벌을 매립하여 농업용지, 산업단지, 관광단지를 조성하는 원대한 토목공사를 진행해왔는데 이제는 차츰 그 결실이 드러나고 있는 건설 현장에서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라면서 희망찬 미래를 기대해 보았다.끝으로 1박2일에 걸친 文學紀行을 마치고 귀경하는 버스속의 맨 뒷자석에서 조촐한 소주파티가 벌어 졌다.주고받는 술잔 속에 싹트는 추억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