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연천 안보 체험기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재경 성주군 향우회의 사업 계획의 일환으로 1박 2일로 중부지역 철원 · 연천지역의 안보 견학으로 서울 지하철 사당역 4번 출구에서 9시에 리무진버스로 출발하였다
고향 선후배와 다정한 인사 교환 후 한상칠 회장님의 인사와 이종명 사무총장의 시간계획의 설명을 들으며 총 36명이 철원으로 향했다
차내에서는 각자의 소개인사로 고향이야기와 강해석 정영 선배님의 상경기는 모두가 감동을 받았으며 시간가는 줄 모르게 첫 방문지 고석정에 도착하여 먼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임꺽정 가든에서 메기 메운탕에 막걸리 1잔하고 고석정을 관람하였다
고석정은 한탄강 중류로 양쪽10m 위로 석벽의 장관인 명승지로 조선 명종 때 임꺽정(林巨正)이 활동한 의적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오늘따라 쾌청한 6월의 맑은 날씨와 녹음은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철원의 녹음만큼이나 싱그럽다. 얼룩무늬가 그려진 제2땅굴입구에 도착했다.
DMZ일대에서 두 번째로 발견된 제2땅굴은 총 3.5Km에 달하며 우리는 화이바를 쓰고 지하 땅굴에 들어가니 천정이 낮아 쾅쾅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나는 키가 커서 계속허리를 굽히고 다녔다. 유사시 땅굴을 통해 북한군이 1시간에 16,000명이 침투가 가능한 땅굴로서 아군 후방으로 침투하여 국가혼란을 조장하고 우리 군의 방어태세를 무력화하는 기습 남침용으로 만들어 졌다.
우리는 이 엄청난 도발현장에서 분단의 아픔과 고통인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을 깨닫고 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경각심을 갖고 긴장의 고삐를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분단의 155마일의 휴전선, 인적 없는 고요한 비무장지대, 침략도발의 현장 제2땅굴! 전쟁의 총성이 멎은 지 어느 듯 60여년이 넘어도 아직도 북녘 땅은 대남도발의 야욕을 멈추지 않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음 코스로 민통선내의 철원 오대쌀, 논에는 벼가 벌써 활착을 하여 시퍼렀다. 평화 전망대에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니 평강평야와 비무장지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비무장지대는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 2Km씩 폭 4Km로 동서간 155마일에 달하며 휴전 후 60여년 세월동안 민간인의 출입이 완전 통제되어 자연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가다가 시간이 멈춘 월정리역은 서울에서 원산으로 달리는 경원선으로 DMZ 남방한계선 철책에서 최북단에 위치한 기차역이다. 역의 맞은 편 에는 “ 철마는 달리고 싶다 ” 간판이 6.25전쟁시 부서진 열차가 앙상한 골격을 드려 낸 채 누워 있어 분단의 한을 실감케 한다.
월정리역에서 노동 당사를 지나 6.25 전쟁사에 길이 빛날 처절했던 백마고지 전적지에 도착했다.
철원군 북방에 있는 백마고지는 6.25때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였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의 대공세로 10일간이나 계속된 백마고지전투는 약 30만발의 포탄이 이 지역에서 사용 되였으며 고지의 주인도 24번이나 바뀌었다. 이 전투에서 1만4천명의 사상자를 낸 중공군 2개 사단이 완전히 와해되었으며 국군 9사단은 이 전투에서 대승의 계기로 백마사단이 되었다
격렬했던 전투 끝에 서로의 포격으로 고지의 모습은 잃었지만 마치 백마가 옆으로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아직도 포성이 들리듯 하다. 참혹한 전투로 용사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어 백마고지를 향하여 돌격 앞으로를 계속했다. 이제는 기억하는 이도 점점 세상을 등지고, 그때 그 젊은이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던가. 이제 우리는 피 흘러 지킨 자유의 소중함을 젊은 세대에 큰 소리로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알아야 교육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조국의 번영을 위하고 안보를 지키는 일이다.
우리는 백마고지를 뒤로 하고 우리의 숙소인 연천 학 마을 수련원에 도착 석식 후, 북한군 상사로 전역한 새터민 이소연 강사의 북한의 실생활의 생생한 경험담을 사뭇 진지하게 들었다. 탈북을 하면 부모님 친지 등이 불이이익을 받지 않느냐의 우리들 질문에 이제 탈북이 일반화되고 많아서 다 수용소에 보낼 수 없어 감시만 한다고 한다. 1박 후 2일차로 연천의 경순왕릉으로 향했다.
경순왕릉은 신라 56대 마지막 왕릉이 어찌 이곳에 있을까 의문이 생겼다. 경순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에는 신라는 고려 후백제등의 잦은 침입으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자 고려 왕건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이에 신하들과 아들이 반대한다. 큰아들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막내아들 범공은 화엄사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경순왕은 고려 개성에서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지내다 978년 세상을 떠나자 개성에서 경주로 장례를 모시려다 고려조정에 “ 왕의 구(柩 )는 백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 ” 하여 이곳 연천군 고량포리에 장례를 모셨다. 경순왕릉은 신라의 왕릉가운데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있는 왕릉으로 기울러 간 신라의 마지막의 쓸쓸함을 볼 수 있다.
이곳 바로 근처의 김신조의 1.21침투로 안보 견학장은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를 서울로 잠입시켜 청와대 폭파와 요인암살지령을 받고 침투한 곳으로 현재 경계부대에서 설치한 철책과 철조망을 뚫고 침투한 무장공비의 모형물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그 당시 유일하게 산 김신조는 한 안보강연에서 자신이 북에서 혹독하게 받았던 특수훈련과정을 설명하며 “ 교육받은 되로만 하면 적이 철책을 뚫을 수 없으며 그것이 나 자신과 국가의 안보를 지키는 일이라.”고 강조한 바 있으며 현재는 목사로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이 근처에 산뽕나무가 많아 우리 일행은 잠시 오디 따먹는 호강도 잠시 누렸다. 승전OP 브리핑을 받고 고려의 왕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으로 향했다
임진강이 굽이쳐 흐르는 모습이 한눈에 조망되는 아미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숭의전은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곳으로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3왕과 고려 충신 16명을 배향하는 곳으로 배씨 중시조 무열공 배현경도 여기 모서져 있는 곳이다. 숭의전 관광 후 연천의 두부마을에서 순수 우리 콩으로 만든 두부전골과 율무막걸리로 중식 후, 버스에 탑승 자유로로 오면서 그동안 못다 한 고향이야기와 우리고향 장교출신의 안보관을 들으며 1박2일의 보람되고 알찬 안보체험교육과 인정이 넘치는 향우회의 고향사랑은 물론 공미주실장의 성주여중고 교가합창과 배영숙의 가천중 교가합창은 더욱 흥을 더 하였었으며 전적비의 모윤숙 시인의 “ 백마의 얼 ” 을 안보체험의 의미를 새삼 되새겨 본다.
백마의 얼
- 모윤숙 -
풀섶에 누워 그 날을 본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갈라지듯
적들이 몰려오는 저 산과 강에서
우리는 끓는 피로 용솟음 치며 넘어지려는 조국을 감쌌다.
이 한 몸 초개같이 바치려 숨찬 목소리로
다 같이 강물을 헤치고 산을 부스며
달려오는 적들을 막았노라.
수많은 적을 따라 소탕하고
조국의 얼로 내달려
떡갈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원수의 고함을 눌러 버렸나니
쓰러지며 죽으면서도 다시 일어나
숨결로 돌리고 숨지려는 조국을 살리었노라.
나의 조국 영원한 땅이여
만세를 가도록 그 얼은 살았으니
지금도 그때처럼 귀를 기울이고
,저 몰려오는 적을 막고 있노라.
푸르러 푸르러 영원한 젊음
우리는 그 품에 안겨 안식하리라
어머니 조국에 이 혼을 맡기며
후회 없이 더 강하게 앞으로 앞으로
달려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