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감사성찬례 묵상(21)
성체 나눔과 하느님의 어린 양
주의 기도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십시오” 하고 청원을 드린 다음 본격적으로 영성체 예식에 들어갑니다.
우리 기도서에 보면 성체 나눔과 하느님의 어린 양이 한 묶음처럼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 역사를 잠깐 살펴보면, 초대교회는 큰 빵을 조각으로 떼는 동안 특별히 정해진 틀 없이 그때그때 적당한 기도문을 외웠는데 7세기 때부터 ‘하느님의 어린 양’이 성체 나눔의 전례기도문으로 정착된 것입니다.
당시 이슬람의 침공으로 로마에 피신 차 들어온 동방교회 성직자들에게 서방교회가 배운 관습이라고 하지요.
아무 뜻 없이 관습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성체를 쪼개어 나누는 행위의 신학적 의미를 ‘하느님의 어린 양’이 잘 드러낸다고 수용이 되니까 받아들인 것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빵을 쪼갤 때 초대교회 신자들은 십자가에서 깨지고 상하는 주님의 몸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상함과 깨짐이 우리에게는 생명의 양식이 되고 구원이 되는 의미를 자연히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구약적 표상이야말로 빵을 부숴 나눌 때 떠올리는 그리스도의 상함과 희생에 더할 나위 없이 부합하는 의미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은 무엇보다도 출애굽기에서 모든 이집트인의 맏이가 죽는 재앙이 닥치던 날 밤에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화를 면했던 이야기에서 비롯된 표상입니다.
이후 유대교는 어린 양의 피 덕분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구원을 얻었다는 기억을 전승시키게 됩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고 했을 때 그는 한 유다인으로서 출애굽 전승의 의미와 상징을 활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요한 1:36).
즉 저분의 피 흘림이 우리의 구원이 되실 분이 저기 있다고 말한 셈입니다.
물론 출애굽의 ‘과월절 어린 양’이라는 표상과 함께 기억해야 할 구약의 또 다른 표상이 있습니다.
바로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이라는 이미지입니다.
자기 백성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했던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표상됩니다(예레 11:19).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는 야훼의 종(이사 53:7)은 말없이 수난을 받아들이는 예수님에게 그대로 적용된 이미지였습니다.
하물며 이 종은 채찍을 맞고 찔리고 상처를 입으며 으스러집니다(이사 53:5).
그러니 예수님의 몸을 표상하는 성체의 빵이 쪼개지고 부스러질 때 ‘하느님의 어린 양’을 노래하는 것은 더없이 적합합니다.
순한 어린 양처럼 순명과 자기 비움을 통해 자아는 깨지고 부활생명이 나타나게 된다는 구원의 주제를 우리는 성체 나눔과 하느님의 어린 양을 통해 새김질을 하는 것입니다.
성체 나눔이라는 빵을 떼는 동작은 그 자체로 성찬례 전체를 의미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는 모여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돕고 ‘빵을 떼며’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다고 합니다(사도 2:42).
이때 ‘빵을 뗌’이란 곧 애찬과 성찬 즉 예배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때 유대교의 관습처럼 큰 빵을 쪼개서 나눠 먹었을 터인데 9~10세기경부터 작은 면병을 편의상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한 그리스도를 나눔으로써 우리는 하나’라는 성체 나눔의 본래적 의미는 사제가 상징적으로 큰 면병을 쪼개는 동작을 보여주는 걸로 대체되었습니다.
오늘날 세계성공회는 초대교회의 관습을 되살리고자 큰 빵을 사용해서 실제로 이를 쪼개서 나눠주는 관습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조차도 본래의 신학적 의미가 그러하기에 가능하다면 큰 빵을 쪼개서 나누도록 하라는 전례지침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현실로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애초에 작은 면병을 사용하게 된 계기처럼 너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일이 빵을 쪼개기가 너무 불편해서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성공회처럼 작은 규모의 공동체가 일반이라면 큰 빵을 쪼개 나누는 전통을 회복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주엽 신부 (프란시스, 분당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