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는 조선 전기 문신 김종서 외 28인이 고려시대 전반을 편년체로 정리한 역사서이다. 『고려사』가 완성된 지 5개월여 만에 완성하였으며, 대체로 『고려사』를 축약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고려사』에 없는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1.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권19 > 원종2(元宗二) > 원종(元宗) 14년 > 7월 > 원에 하성절사를 보내다
원문 (遣上將軍 金侁如元, 賀節日.)
상장군(上將軍) 김신(金侁)을 원(元)에 보내어 절일(節日)을 하례하였다.
2.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권19 > 원종2(元宗二) > 원종(元宗) 15년 > 9월 > 김련 등을 관직에 임명하다
원문 (九月. 以金鍊 參知政事, 李汾禧 金侁竝爲樞密院副使.)
9월. 김련(金鍊)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이분희(李汾禧)·김신(金侁)을 모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삼았다.
3. 일본 원정군이 폭풍으로 피해를 입다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권19 > 원종2(元宗二) > 원종(元宗) 15년 > 10월 >
원문 (冬十月. 都督使 金方慶將中軍, 朴之亮 金忻 知兵馬事, 任愷爲副使, 樞密院副使 金侁爲左軍使, 韋得儒 知兵馬事, 孫世貞爲副使, 上將軍 金文庇爲右軍使, 羅裕 朴保 知兵馬事, 潘阜爲副使, 號三翼軍. 與元都元帥 忽敦 右副元帥 洪茶丘 左副元帥 劉復亨, 以蒙漢軍二萬五千我軍八千梢工引海水手六千七百戰艦九百餘艘, 發合浦. 越十一日, 船至一歧島. 倭兵陣於岸上, 朴之亮 趙抃逐之, 倭請降, 而復戰. 茶丘與之亮 抃擊殺千餘級, 捨舟三郞浦, 分道以進, 所殺過當. 倭兵突至衝中軍, 方慶拔一嗃矢, 厲聲大喝, 倭辟易而走. 之亮 忻 抃 李唐公 金天祿 申奕等殊死戰, 倭兵大敗, 伏屍如麻. 忽敦曰, “雖蒙人習戰, 何以加此.” 諸軍終日戰, 及暮乃解. 方慶謂忽敦 茶丘曰, “我兵雖少, 已入敵境. 人自爲戰, 卽孟明焚舟, 淮陰背水者也. 請復決戰.” 忽敦曰, “小敵之堅, 大敵之擒. 策疲兵戰大敵, 非完計也.” 而劉復亨中流矢, 先登舟故, 遂引兵還. 會夜大風雨, 戰艦觸巖崖多敗, 金侁墮水死.)
겨울 10월. 도독사(都督使) 김방경(金方慶)으로 하여금 중군(中軍)을 이끌도록 하고 박지량(朴之亮)·김흔(金忻)을 지병마사(知兵馬事), 임개(任愷)를 부사(副使)로 삼았으며,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김신(金侁)을 좌군사(左軍使)로 삼고 위득유(韋得儒)를 지병마사(知兵馬事), 손세정(孫世貞)을 부사(副使)로 삼았으며, 상장군(上將軍) 김문비(金文庇)를 우군사(右軍使)로 삼고 나유(羅裕)·박보(朴保)를 지병마사(知兵馬事)로, 반부(潘阜)를 부사(副使)로 삼아 〈전체를〉 삼익군(三翼軍)이라고 불렀다. 〈이들로 하여금〉 원(元)의 도원수(都元帥) 홀돈(忽敦, 쿠둔), 우부원수(右副元帥) 홍차구(洪茶丘), 좌부원수(左副元帥) 유복형(劉復亨)과 더불어 몽고군(蒙古軍)·한군(漢軍) 25,000인, 우리 군사 8,000인, 사공[梢工]·인해(引海)·선원[水手] 6,700인 및 전함 900여 척을 거느리고 합포(合浦)를 출발하게 하였다. 11일이 지나자 배가 일기도(一歧島)에 이르렀다. 왜병(倭兵)이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박지량과 조변(趙抃)이 이들을 쫓아가자 왜에서 항복을 요청하였다가 다시 싸웠다. 홍차구가 박지량·조변과 더불어 1,000여 급을 격살한 뒤 배를 삼랑포(三郞浦)에 내버려두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였으니, 살해한 자가 매우많았다. 왜병이 돌격하여 중군과 충돌하였는데, 김방경이 하나의 화살을 빼어들고 성난 목소리로 크게 호통을 치자 왜가 두려워하며 도망쳤다. 박지량·김흔·조변·이당공(李唐公)·김천록(金天祿)·신혁(申奕) 등이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니, 왜병이 크게 패하여 널려진 시체가 삼대[麻]와 같았다. 홀돈이 말하기를, “비록 몽고 사람이 전투에 익숙하다고 한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군사들이 종일토록 전쟁을 벌인 뒤 해가 질 무렵에 멈췄다. 김방경이 홀돈과 홍차구에게 말하기를, “우리 병사가 비록 적지만 이미 적의 경계에 들어와 사람들이 스스로 전투를 치르니, 곧 맹명(孟明)이 배를 불태우고[孟明焚舟], 회음후(淮陰侯)가 배수진을 친 것[淮陰背水]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하건대 다시 결전을 벌이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홀돈이 말하길, “작은 적이 굳게 싸우면 큰 적의 포로가 된다[小敵之堅, 大敵之擒]. 피곤한 병사들을 채찍질하여 큰 적을 상대하는 것은 온전한 계책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 이후 유복형이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일찍 배에 오른 까닭에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마침 밤에 큰 비바람이 불어 전함이 바위와 벼랑에 부딪쳐 다수 부서졌고 김신은 물에 빠져 죽었다.
4.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권19 > 충렬왕1(忠烈王一) > 충렬왕(忠烈王) 3년 > 12월 > 김방경에 대한 무고가 발생하여 구속했다가 석방하다
원문 (前大將軍 韋得儒 中郞將 盧進義等誣告金方慶謀叛. 時, 方慶以中贊當國, 又受虎頭金符, 爲都元帥, 權傾一國. 田園遍州郡, 麾下將士日擁其門, 附勢假威者, 橫行中外, 而不之禁. 又第征倭軍功, 爵賞頗不均, 人多觖望. 得儒嘗從東征左軍使 金侁爲知兵馬事, 侁溺死, 方慶以不救主將罷其職. 進義從攻珍島, 不力戰, 掠取人財產, 方慶沒入于官. 由是, 二人怨方慶, 謀陷之, 乃譖於忻都以爲, “方慶與子忻壻趙抃及孔愉 羅裕 韓希愈 安社貞等四百餘人謀, 去王公主達魯花赤, 入據江華以叛.” 讒構多端, 忻都與石抹天衢告于王. 王命贊成事 柳璥 元傅等與忻都 天衢雜問之. 乃知誣妄, 止論希愈等十二人藏甲之罪, 杖而釋之.
○전 대장군(大將軍) 위득유(韋得儒), 중랑장(中郞將) 노진의(盧進義) 등이 김방경(金方慶)이 모반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이때 김방경은 중찬(中贊)으로서 국정을 담당하였을 뿐 아니라 호두금부(虎頭金符)를 수여받아 도원수(都元帥)가 되었으므로 권세가 한 나라를 기울일 정도였다. 전원이 주군(州郡)에 두루 펼쳐졌으며 휘하의 장수와 군사들이 매일 그 문을 호위하였는데, 권세에 붙어 호가호위하는 자들이 안팎을 횡행하였음에도 이를 금지하지 않았다. 나아가 왜(倭)를 정벌한 군공을 평가할 때 작상(爵賞)이 자못 공평하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를 원망하게 되었다. 위득유는 일찍이 동정좌군사(東征左軍使) 김신(金侁)을 좇아 지병마사(知兵馬事)가 되었는데, 김신이 물에 빠져 죽자 김방경이 주장(主將)을 구하지 않은 죄를 물어 그의 직(職)을 빼앗았다. 노진의는 진도(珍島)를 공격할 때 힘써 전투를 치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약탈하였기 때문에 김방경이 이를 관아로 몰입한 바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김방경을 원망하게 되었는데, 그를 모함하고자 흔도(忻都, 힌두)에게 참소하기를, “김방경과 그의 아들 김흔(金忻), 사위 조변(趙抃) 및 공유(孔愉)·나유(羅裕)·한희유(韓希愈)·안사정(安社貞) 등 400여 인이 왕·공주·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을 제거하고 강화(江華)에 들어가 웅거하며 반역하기를 도모합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가지로 헐뜯었으므로 흔도와 석말천구(石抹天衢)는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왕은 찬성사(贊成事) 유경(柳璥)·원부(元傅) 등에게 명하여 흔도·석말천구와 함께 이들을 국문하라고 하였다. 이윽고 무고임을 알고는 한희유 등 12인이 갑옷을 감춘 죄만을 논의하는 데 그치도록 하였으며, 장형을 가한 후 석방하였다.
5. 몽고와 싸워 패배시키다
일자 정보 : 가메야마 덴노(龜山天皇) 분에이(文永) 11년 10월 24일
출전(자료명) : 가마쿠라넨다이키(鎌倉年代記)
연대 정보 : 1274년(고려 충렬왕 즉위) 10월 24일(음) / 11월 23일(양)
연관 고려측 기록 : 일본 정벌군이 폭풍 때문에 피해를 입다
원문개요
同廿四日. 大宰少貳入道覺惠代藤馬允, 於大宰府合戰, 異賊敗北.
이 기사는 1274년(고려 충렬왕 즉위) 10월에 시작된 몽고군의 제1차 일본 정벌에 관한 내용으로, 일본이 다자이후에서 전투를 벌여 이적(異賊, 몽고군)을 패퇴시켰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 충렬왕 즉위년 10월 3일 기사【연관사료】 에서는 ‘밤에 폭풍우가 불어 전함들이 바위와 벼랑에 부딪쳐 크게 부서지고 김신(金侁)이 익사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 『가마쿠라넨다이키(鎌倉年代記)』는 가마쿠라 시대를 정리한 연표이다. 이 자료에는 1227년(고종 14) 5월 고려의 첩(牒)이 일본에 도착한 일, 1268년(원종 9) 고려의 사신이 몽고와 고려의 국서를 가지고 다자이후(太宰府)에 도착한 사실, 다음해 9월 사신들이 몽고 중서성과 경상도안찰사 첩을 가지고 가마쿠라에 도착한 일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