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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명 | 입택집 (笠澤集)(17C) |
간략서지 | 笠澤 金鑑의 문집, 4권 3책. 〈古 819.53-G418i〉 |
간략해제 |
저자의 후손 样銖가 집안에 보관하고 있던 유문과 「朝天日記」를 각각 1책으로 정리하고 연보를 대신할 목적으로 편집한 編年, 柳東蕃이 쓴 墓碣銘, 李德馨 등 당시의 명사들이 저자에게 증정한 詩와 挽詞 등을 1책의 부록으로 묶어 4권 3책으로 南原 龍洞에서 1912년 간행한 金鑑의 문집이다. 권두에 金甯漢과 曺元承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는 문집을 간행한 상수의 발문이 있다. 권1에는 詩 141수, 권2에는 疏 3편, 表 3편, 策 1편, 箋 3편, 書 5편, 論 1편, 序 2편, 記 1편, 祭文 4편, 祝文 1편 등이 수록되어 있고 「朝天日記」를 별도의 한 책으로 편집하여 卷次를 달리하지 않고 권2에 포함시키고 있다. 권 3,4는 부록으로 권3에는 편년, 묘갈명이 수록되어 있고 권4는 시, 만사, 발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疏 중에 「申壯節祠宇請額疏」는 고려 때의 무신 신숭겸의 사당에 사액을 청하는 것이고, 그 밖의 2편은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을 다녀온 후 仁穆大妃(1584∼1632)의 西宮 유폐 사실을 알고 관직에 뜻을 잃고 올린 사직소이다. 3편의 表 중에 태자를 미리 정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漢有司請豫建太子」만 본문이 남아 있고 나머지 두 편은 본문이 일실되어 제목만 수록되어 있다. 策은 관리 임용의 원칙을 논한 글이다. 임관의 으뜸가는 원칙으로 현재의 임용을 주장하고 우리나라의 임관 제도를 중국에 비추어 그 의의와 기능을 비교 설명하고 우리나라의 임관 제도가 그 기본적인 취지는 요순시대에 비추어 손색이 없지만 수신에 너무 치우쳐 시대가 변함에 따라 약간의 문제가 있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箋은 김인후를 배향한 서원에 賜額해 줄 것을 요청하는 「請賜額金麟厚書院箋」, 일본의 조공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례와 중국 역사상의 사실에 입각하여 주장하는 「請勿受日本所獻方物箋」, 새로운 궁궐의 완공을 축하하는 「賀移御新宮法殿箋」 등 3편이다. 「汲黯請爲郞中論」은 한나라 때 급암이 무제에게 강직한 간언을 올렸다가 淮陽太守로 좌천된 뒤 은밀히 궁중을 드나들면서 郎中 벼슬을 요청한 사실을 당시 醇儒였던 동중서가 취한 행동과 비교하면서 군자의 진퇴의 적절함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고 비판하는 글이다. 이는 당시의 사대부들이 중앙관직을 얻기 위하여 아첨하던 풍조를 비유적으로 비판한 글이다. 「祝天文」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의 교지를 받고 고향인 谷城에서 吳尙志 등 5인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礪山에 집결한 뒤 출전을 앞두고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쓴 축문이다. 「조천일기」1617년(광해군 9) 8월 27일에서 이듬해 閏4월 26일까지 동지사 李尙吉(1556-1637)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오는 동안의 여정을 매일매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기행문이다. 권2에 배속되어 있지만 별도의 책으로 분리되어 있고 150여 페이지에 이를 정도로 많은 분량이다. 중국 使行과 관련된 연구에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기록이다. 권3에 실려 있는 「編年」은 1912년 문집을 간행할 때 遺稿와 「長雲語錄」 등 여러 문헌의 기록에서 김감의 행적을 찾아내서 연보를 대신할 목적으로 편집한 연대기이다. 권4에 수록된 시는 김감이 교유하였던 李德馨(1561-1613) 등 당대의 명사들에게 받은 시 55편을 수록한 것이다. 특히 김감의 시에 차운한 시와 중국 사신으로 갈 때 받은 증별시가 많다. 문집의 말미에 歲在壬子李香春南原龍洞開刊라는 간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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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 김 감 (金鑑) |
저자개요 | 1566∼1641 (명종21∼인조19) 字: 仲虛, 號: 笠澤․石谷, 本貫: 錦山 父: 聲遠 母: 海州 吳氏 |
저자내용 |
1588년(선조 21) 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613년(광해군 5) 48세의 나이에 알성문과 병과제일인으로 급제하여 承文院正字가 되었다. 1615년 侍講院說書, 1616년 刑曹佐郞, 禮曹佐郞, 吏曹佐郞 등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兵曹正郞으로 옮겼다가 冬至使 李尙吉을 수행하는 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618년 귀국 직전에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는 일이 일어났고 귀국 후 이를 알고 중앙 관직에 미련을 버리고 지방직을 요청하여 慶尙道都事, 全羅道都事를 역임한 후 1619년 全羅慶尙兩道提督官에서 물러나 고향 곡성으로 낙향하여 石谷江 변에 伴鷗亭을 지었다. 인조반정 후 1630년 遺逸로 천거되어 홍문관교리에 제수되었지만 병으로 나가지 못했고 1631년 羅州提督官이 되었다가 이듬해 해직되어 낙향하였다. 병자호란 때 인조의 교지를 받고 谷城에서 吳尙志 등 5인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였고 곧이어 玉果縣監 李興悖 등과 함께 礪山에 병력을 집결한 후 진격하여 淸州에 도착했을 때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1638년 다시 홍문관교리에 제수되었다. 전후 30여년을 관직에 있었고 吳天賚, 李廷龜, 李景奭 등과 교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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笠澤集序 (1) | 1912. 金甯漢이 쓴 입택집의 서문이다. 문집을 간행한 样銖와 擇鉉의 부탁을 받고 썼다. 전반부는 병자호란 때 谷城에서 처음 의병을 모집하고 남원과 공주 지역의 의병을 규합하여 북상하던 중 청주에서 강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고향으로 돌아 온 일을 중심으로 충의지사 金鑑의 면모를 서술하고 있고 후반부는 문집의 내용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서문을 짓게 된 동기를 기록하고 있다. |
笠澤集序 (1) | 1912. 曺元承이 쓴 입택집의 서문이다. 전반부는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등과한 후 30여년을 관직에 있었던 점,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이끌던 중 강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귀향하였던 일, 기묘사화 이후 이조참의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던 일 등 김감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고 후반부는 문집의 내용과 구성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를 기록하고 있다. |
詩 | 大殿迎祥詩帖, 罷官歸家, 題泗水庵東巖, 絶句四首, 拜調度於太平館客懷離恨月夕甚苦以詩寄趙修撰-裕善, 伴鷗亭十景(龍門宿雲, 巴山曉鍾, 鳩山落照, 城峯初月, 文灘夜雨, 笠澤漁燈, 凌波晩笛, 鷗亭明沙, 南里炊烟, 薪洞歸僧), 上洞峴面望黃州, 大殿春帖, 與曺東崖-應瑞-吳病栢-天賚-月夜書懷, 題寶城客館, 贈大興李馨撥醫師, 戱酬吳上舍-尙友, 山房謝李汝實及諸友見訪, 遊淸溪洞, 客中與梁霽湖-慶遇-吳病栢唱和-三首, 挽崔秀才-濩, 宿大凌河謝副使李荷塘送酒, 客館生朝, 通州過除夕, 宿奉恩寺, 挽仲兄察訪公-鎭, 與亞使共守庚申夜到鷄鳴, 贈林靈巖-東野, 次金察訪送別韻-璇, 和姜德羽別章-鳳翔, 仲春賦雪和羅參奉-海鳳, 冬至日贈牧伯-元斗杓, 題剛泉寺, 訪林靈巖舊居有感, 還家聞新牧下車寄一律-朴演, 贈趙令兄出宰淮陽-有道, 送李德久行忠原, 無題, 除夕, 次愼侯雪夜愁邊吟, 挽愼城主室內, 次房而省仙津避兵寄示-元亮, 居泮日與五君子唱酬, 同梁霽湖鄭谷口元夕望月-鄭昕, 少焉月食, 有項月復生明, 贈別林同年-東野, 送鄭季涵還鄕-澈, 過松峴有感, 次眠字和鄭谷口, 和朴弼善-榟, 書癸巳大統曆後, 拜獻陵, 拜英陵, 舟下梨湖, 過婆娑城, 奉命巡撫嶺南, 舟過道東示諸生, 鴨綠江送兒還家, 大殿立春帖, 雲興館却妓, 題遼東白塔寺, 萬柳庄讀古跡有感, 玉田廉家壁追次柳參判韻-名逸, 皇島登眺, 南樓月夜謝趙修撰, 過松京和李聖微-廷龜, 次鄭敎官-應運-別香雲詩, 重逢銀春感舊贈別, 奉別錦城諸公, 陳參奉胤-유(車+臾)-來訪贈乃翁二絶, 完山參禮橋別金同年-遂, 禁門卽事, 京城仲秋月夜聯句, 次東崖曺兄見志, 次病栢戱梁子漸不就-慶遇, 金童煥業兩孫在膝遂吟一絶, 大殿迎祥詩帖, 又二首, 訪錦陽尉醉後書示-朴瀰, 謝錦陽尉見寄, 次金侯-汳, 送李都事德甫罷官還鄕, 記夢, 開閤, 斷酒, 挽安秀才-名逸, 挽李景深, 漢城久雨和霽湖病栢一韻四回, 拜宣靖陵, 廣陵津次病栢, 送鄭汝觚之山陰, 述懷用東坡立春韻分寄, 次鄭太虛別章戱得悅字, 成同年君悅罷官還京第要余贈詩-忻, 挽許도(忄+度), 和羅遜夫, 奉寄遜夫, 次李韓平觀?亭韻送成君悅, 別李學官-敬南, 鑷白, 挽梁主簿千運, 謝崔使君-皥-惠寄肉物, 入直春坊與李枕書唱和, 又, 又, 苦寒無聯奉和南說書-九萬, 題白塔寺華表柱, 南樓贈別趙修撰歸京, 送申正字歸豐德別墅-昜于, 錦城鄕學與金市西羅南磵遊詠-金璇羅海鳳, 謝陳參奉剡湖見訪, 又, 和羅南磵用剡湖韻寄示, 雪中書懷示諸公, 其二, 歸家謝洪進士寄詩-適, 重遊風詠亭懷古, 次趙素翁韻贈羅遜夫, 丙亂後入城口號呈趙參議-素翁, 和南長洲-九萬-鄭睡窩-主胤-別意-二首, 校書館褒貶日書懷示同僚, 挽李進士, 閒居遣興, 次房而省和愼使君韻, 復用前韻呈愼使君, 奉寄完山府尹李君, 山中次李汝實, 告別金淸陰-尙憲, 營庫下訪金參議幽居-槃, 金同年-遂-以南學典籍除校書校理卽余交代也同出都門戱賦長篇 |
申壯節祠宇請額疏 (1) | 1608. 고려 때의 충신 申崇謙의 사당에 賜額을 요청하는 소이다. 사당의 창건, 전란 중의 소실, 중건 등의 과정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
辭平安道巡察御史疏 (4) | 1618. 평안도순찰어사의 직을 사양하는 소이다. 막중한 임무를 미관말직인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는 능력면의 문제와 지난해 燕京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동안 脹질환이 생겼고 이후에 천식까지 심해졌다는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들고 있다. |
辭江原道巡察御史疏 (6) | 1618. 강원도순찰어사의 직책을 사양하는 글이다. 신병을 이유로 들고 있다. |
乞身歸田里表 (6) | 제목만 실려 있고 본문은 일실됨. |
金山文廟上樑文 (6) | 제목만 실려 있고 본문은 일실됨. |
漢有司請豫建太子 (6) | 漢나라 관리들의 주장을 담은 고사를 통해 태자를 미리 정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表文이다. |
策 (7) | 1613. 관리 임용의 원칙을 논하는 대책문으로 알성문과 시험에서 제출한 답안이다. 正心을 통해 修身하여 군주 스스로 도덕적 인격을 함양하고 이를 바탕으로 公明을 원칙으로 인재를 선발하여 유능하고 현명한 인물을 관직에 임용할 것을 주장하는 글이다. 우리나라의 관리 임용 제도를 중국에 비추어 그 의의와 기능을 비교 설명하면서 우리나라의 관리 임용 제도는 그 기본적인 취지는 요순시대와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으나 지나치게 수신에 치우친 점이 있고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해 약간의 문란함이 있게 되었다는 비판을 아울러 싣고 있다. |
請賜額金麟厚書院箋 (11) | 김인후를 배향한 서원에 賜額해 줄 것을 요청하는 箋이다. 김인후를 학문과 문장뿐만 아니라 덕행의 측면에서도 호남지역에서 배출한 인물 중 가장 훌륭한 인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
請勿受日本所獻方物箋 (13) | 괴이한 물건을 진상하여 자신들의 간악한 마음을 숨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일본 사신의 봉물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주장하는 箋이다. 역대의 선례와 중국 역사상의 사실에 입각하여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다. |
賀移御新宮法殿箋 (14) | 新宮을 완공하여 法宮으로 삼아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왕에게 하례를 올리는 글이다. 본문의 일부만 남아 있다. |
與梁敎官-克選-書 (15) | 1625.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谷城에 있을 때 梁克選에게 이괄의 난 이후 京城의 옛 동료들의 안부와 근황을 묻는 편지글이다 |
與姜野老堂-毅虎-書 (16) | 초야에 묻혀있는 은둔 생활을 고집하는 姜毅虎에게 관직에 나갈 것을 권유하는 편지글이다. |
答家兒書-南式 (16) | 1636. 큰 아들 南式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다. 농번기라 일손이 부족해 군량 운송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상황과 전염병의 기세가 점차 가라앉고 있어 다행스럽다는 등 자신의 근황을 전하면서 한해 내내 겨를이 없어 책을 읽지 못하고 있는 아들에게 안타까움을 표하면서 『大學』을 열심히 익히도록 권면하는 내용이다. |
上李參議啓-明漢 (17) | 당시 吏曹參議로 있던 李明漢에게 자신을 관직에 천거해 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글이다. |
上李參知求薦啓-敬輿 (20) | 당시 吏曹參知로 있던 李敬輿에게 자신을 고향 지역의 지방관으로 천거해 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글이다. |
汲黯請爲郞中論 (22) | 漢나라 武帝 때 汲黯이 강직한 간언으로 淮陽太守로 쫓겨나자 은밀히 궁중을 드나들며 임금의 최측근인 郎中 벼슬을 청한 사실을 당시 醇儒였던 동중서가 취한 행동과 비교하면서 군자의 진퇴의 적절함이라는 관점에서 급암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글이다. |
送吳病栢還鄕詩序 (25) |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친구 吳病栢의 환송에 즈음하여 작별의 아쉬움을 나누는 증별시의 서문이다. |
西行日錄序 (26) | 1638. 광해군의 폐모 사건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15년 동안 고향에서 지내던 중 弘文館校理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73세라는 나이와 여러 상황을 감안하여 출사를 망설이던 중 고향 어른들의 출사 권고를 받아 도성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하고 그 과정을 서술한 글이다. |
伴鷗亭記 (28) | 1619.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谷城의 石谷江 변에 정자를 짓고 ‘갈매기를 벗 삼는다’는 의미에서 伴鷗亭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연유와 정취를 서술한 기문이다. |
祭李景深-泑-文 (29) | 1623. 고향 친구인 李泑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
祭亡兒-南式-文 (30) | 후사를 남기지 않은 아들 남식이 죽은 지 삼년이 되는 날 조카에게 후사를 잇게 하면서 지낸 제사의 제문이다. |
祭仲兄察訪公文 (30) | 1615. 둘째 형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김감 자신이 과거공부 때문에 오랜 기간 가족들의 생계를 형에게 맡겨 두고 있었기에 그 노고에 제대로 보답하지도 못하고 영결을 맞게 되자 진한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다. |
道東祠祭寒暄金先生文 (31) | 1619. 全羅慶尙兩道提督官으로 있을 때 김굉필의 문묘종사를 요청하는 주장이 있을 당시 안동의 도동사에서 김굉필을 제사지낼 때 쓴 제문이다. |
祝天文 (32) | 1636. 병자호란 때 인조의 교지를 받고 谷城에서 吳尙志 등 5인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여 礪山에 집결하여 출전을 앞두고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쓴 축문이다. 淸州에 도착했을 때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
附敎文 (32) | 1636.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를 대적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후 의병의 규합하여 항전할 것을 촉구하는 인조의 교지이다. |
龍門嶝祈雨文 (33) | 용문 고개에서 비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낼 때 쓴 기우제문이다. |
朝天日記 (1) | 1617년 8월 27일에서 이듬해 閏4월 26일까지 동지사 李尙吉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오는 동안의 여정을 매일매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기행문이다. 권2에 배속되어 있지만 별도의 책으로 분리되어 있고 150여 페이지에 이를 정도로 많은 분량이다. 날씨, 하루하루의 여정, 만난 인물, 각 지역의 풍물, 그날그날의 사건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
編年 (1) | 1912. 김감의 행적을 문집을 출간할 때 연도순으로 정리한 편년이다. 앞머리에 笠澤公編年義例와 김감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붙어 있다. 김감의 연보가 없기 때문에 家藏과 여러 문헌에서 평생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찾아 편차하여 연보를 대신한다는 내용이 義例에 보인다. 실제로 편년의 몇 항목에는 근거가 되는 문헌의 이름을 수록하고 있다. |
墓碣銘 (19) | 柳東蕃이 쓴 김감의 묘갈명이다. 가계, 관직, 행적, 후손 등을 기록하고 있다. |
詩 | 京城秋月和笠澤, 客中唱和, 漢城久雨和笠澤, 居泮醉興(以上 吳天賚), 客中奉和笠澤見志, 漢城久雨(以上 梁慶遇), 漢城秋月和笠澤, 壬子孟冬遊剛泉寺次金笠澤吳病栢諸兄, 赤城留別(以上 曺應瑞), 金持平朝天歸路留松京相酬(李廷龜), 送金笠澤之皇城(李明漢), 與金校理還鄕作伴同出都門賦長篇(金遂), 贈別金校理(朴瀰), 送金笠澤歸家(李景奭), 笠兄南歸諸僚賦詩作別謹步五首(梁克選), 次前韻贐行(鄭主胤), 和奇韻送笠澤還鄕二首(南九萬), 同遊剛泉寺(羅茂松), 謝笠澤見寄(梁千運), 贈別金笠澤(趙某), 奉寄笠澤老人(尹頴), 考講光山都會適値庚申夜與金提督鄭牧使酌酒賦詩達曉不寐(全克恒), 敬次笠翁述志(金璇), 鄕學奉和金提督, 謝笠澤寄贈銀口魚, 次冬至韻以呈(以上 陳景文), 步陳剡湖韻奉寄金提督(金時咭), 敬次休字呈金笠澤(洪適), 和金察訪詩呈笠翁(姜鳳翔), 謹步笠兄諸篇(洪海鳳), 贈笠兄絶句(林東野), 泮宮秋懷(丁士達), 前韻和笠澤(鄭昕), 又用前韻(金順親), 又用前韻(庾長益), 送金持平朝天(李文伯), 朝天時贈金校理二首(李尙吉), 送金校理赴燕京(鄭惟誠), 贈別金書狀冬至使行(吳允誠), 送金持平奉使皇朝(趙紳), 金持平奉使皇州賦詩贐之(梁克選), 贈別金年兄朝天(鄭某), 送別冬至使(柳希發), 送笠澤之中華(崔濩), 贈行金書狀一絶(張晩奎), 贈笠澤聖節使行(李埁), 又(李仲進), 又(南毅萬), 又(李馨遠), 又(李德泂), 送金校理朝天賦贈長篇(趙素翁), 又(朴守弘), 又(裵大維), 又(徐國楨), 又(李文彦) |
挽詞 (17) |
동료와 후학들이 쓴 김감의 죽음을 애도하는 21편의 만사이다. 梁克選, 楊汝梅, 趙時述, 趙時一, 姜頡, 李廷美, 吳燦, 李士穎, 吳廷式, 盧亨運, 黃暐, 金用礪, 權濬, 崔葕, 崔徽之, 崔攸之, 房元亮, 李必華, 尹徵, 鄭相說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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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 (1) | 1912. 후손 样銖이 문집을 간행하면서 쓴 발문이다. 저자의 생존 연대로부터 300여년 후에 문집을 간행하는 관계로 남겨진 유문들이 얼마 없고 관련 자료들도 많이 수집하여 싣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박정철) |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첫댓글 입택집은 교리공 감 선조님의 문집입니다 전체가 한문으로 되어있어 전문가가 아니면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후손들이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는게 애석합니다 전체 문중 차원에서 한글 번역본을 제작하는 방법도 연구해 볼 과제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