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고린도전서 2:1-5
제목: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일시: 2004. 9. 19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다. 주일성수, 십일조생활, 성경공부, 그리스도인으로 해야 할 봉사와 헌신, 사랑, 인내... 그런데 그 많은 일들 가운데 가장 어렵고 힘들게 느끼는 것 가운데 하나는 전도일 것이다. 전도는 한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새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를 낳는 것으로 종종 비유된다. 마치 육신이 자녀를 낳듯이 우리의 영혼도 잉태하고 해산의 고통과 양육의 일까지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헌신이 요구되는가? 시간도 써야하고 어떤 경우에는 내 돈도 써야하고 심지어 나의 성질도 죽여가면서 주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마치 태중에 있는 아기를 다루는 엄마와 같다. 산모가 해산을 위해 고통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주님께로 인도했다고 그것으로 끝나는가? 양육이라는 것이 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계속 양육해야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영적인 임신과 해산과 양육을 위해 지금도 많은 선교사들이 일하고 있다. 몇일 전 까작스탄에서 남편과 9살, 7살 자녀를 뒤에 두고 순교한 한 여자선교사와 같이 영적인 잉태와 해산을 하다가 죽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일을 초대교회초기에 했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다. 그는 바나바와 더불어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되어 유대인들과 헬라세계에 복음을 전하러 다녔다. 그는 이러한 전도의 일을 자기 문화권에서만 한 것이 아니라, 타문화권속에서 행했다. 그는 복음을 전할 때 편했는가? 그는 자신이 전도하는 일에 있어서 당했던 일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린도후서 11:23-27) 바울에게 있어서도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고 잉태와 해산의 수고를 기울이는 것이었고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이 얼마나 약한 사람이었는가를 오늘 본문에서도 나오고 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시기는 복음의 씨를 뿌리기에는 토양과 기후가 나빴다. 사면초가와 같은 시기였다. 복음의 근원지였던 예루살렘과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그들을 적대시하여 예수뿐 아니라, 제자들까지 해하고자 하였고 이방세계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날이라고 형편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그 복음 전도의 일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도 사탄은 주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 사탄은 오늘도 주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공작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어떻게 하면 주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의 복음전도의 사역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이 사명을 감당하자.
II. 무엇보다도 사도바울은 복음에 대한 증인으로서 복음에 대해 확실한 사람이었다. 사도바울은 증인이었다. 복음의 증인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하나님의 증거를 전한다고 했다. 증거를 전하는 그는 증인이었다. 증인이란 어떠한 사람인가? 증인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느끼고 체험을 한 사람이다. 증인은 그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만 말하면 되는 것이었다.
예)독일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창밖을 얼마나 잘 보는지 모르겠다. 뭘 보는지 팔짱을 끼고 창밖을 본다. 그들 눈이 무서워 쓰레기도 함부로 못 버린다. 병은 병대로 그것도 색깔에 맞추어서... 종이는 종이대로 큰 쓰레기도 함부로 못 버린다. 언제나 합법적으로 해야 한다. 교통사고가 나면 그들은 증인이 되겠다고 자청한다고 한다. 그러니 독일이 비교적 안정한 나라이고 치안이 좋은 나라라고 한다. 독일은 모든 할아버지 할머니가 경찰관이다. 어떤 사람이 차를 잠시 장애자자리에 두고 볼일을 보러 집안에 들어갔다. 그런데 나와 보니 차가 이미 견인되어 갔다고 한다. 두리번거리는 그를 보면서 앞집 아파트에 있는 한 할머니가 손을 흔들며 그곳은 정상인이 주차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자신이 전화해서 신고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말한다. 증거없는 증인은 없다.
이렇게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확신이 있게 된다. 확신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무어라고 하든지 믿어주지 않는다고 할찌라도 가슴을 치면서 답답해하면서 전한다. 증거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사도바울과 같이 수많은 어려움을 당할찌라도 복음을 전한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잘 알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뚜렷한 증거가 있기에 증인의 노릇을 하는 것이다.
예) 할레에 김현중목사님과 조수함 사모가 독일에 온지 약 1년이 되었다. 온지 얼마 되지 않다 자꾸 내게 어디 아픈 곳이 없냐고 묻는다. 아니 이분들이 내가 어디 아프기를 원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겨우 발견해 낸 것이 허리이다. 그런데 허리에서 피를 뽑고 나서는 말짱하게 나은 것이다. 그리고 눈으로 보았는데 젤리같은 것이 여러 스푼정도 나왔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버얼(벌)이 없느냐고 말한다. 이것을 맛본 저는 여기 저기에 말했다. 아픈 사람 없는가 라고... (나의 이러한 선전 덕분에 사모님이 좀 피곤했을 것이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참으로 신기하다고 말하고 다닌다. 증거를 가지고 있고 체험을 가지고 있기에 누가 돈 주지 않아도 전하고 다닌다. 얘기를 시작했다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은 돌팔이 수준이 되어서 내가 어디가 아픈지 물어보고 그것은 벌한 방이면 끝나는데라고 말하고 진단까지 한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했고 하나님의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전할 때 이미 예수님에 대해 체험의 증거가 있었다. 사도바울은 확실한 복음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었다.
물론 헬라세계로 그 복음을 가지고 나갈 때 사도바울은 두려웠고 쉽지 않음을 알았다. 바울도 인간적으로 볼 때 약했다. 그도 고린도지역에 있을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을 보라.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였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였다. 하지만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 복음은 어떠하던가? 유대인들에게는 꺼리는 것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바로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그러한 예수님을 소개하고 전하며 그의 죽으신 십자가를 소개하는데 유대인들은 분명히 꺼렸을 것이다. 헬라인에게는 어떠한가?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었다. 헬라는 철학이요 문화요 세계의 유식인들이었다. 그러기에 헬라말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들이었고 바바리안이라고 부르지 아니했던가? 바바리안의 의미는 바라바라바라한다고 해서 지어진 것이다. 마치 우리가 미국 사람의 말이 쌀라쌀라한다고 하고 중국사람을 칭챙총하고 놀리듯이... 이러한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 앞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오직 부르심을 입은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였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확신이 있었고 십자가의 능력을 알았고 체험했기 때문이다.
III. 증거가 있는 사람은 증거를 있는 대로 이야기하면 되었다.
증인은 증거를 전하는 것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증거는 설득할 일이 아니었다. 증거는 더 맛나게 하려고 조미료같은 것을 첨가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믿고 안 믿는 것은 듣는 자의 자유이다. 바울을 보라. 바울은 증거를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되었다. 바울이 전한 그 증거는 무엇이었는가? 바울은 무엇에 대한 증인이었는가? 2절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한다. 바울의 입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었다. 사도 바울은 할 얘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율법에 대하여, 기적에 대하여, 주님을 만난 일에 대하여, 그의 당한 많은 고난에 대하여, 삼층천에 올라가서 주님을 만난 일에 대하여... 하지만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였다.
바울을 보라. 그는 공부한 사람이었다. 율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다 버렸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버리고 처음부터 출발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전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신념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거를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예)신학교 2학년 때 선창장로교회에서 실습을 했다. 실습을 다 마치는 12월 31일 마지막 날 수요일에 목사님께서는 내게 설교를 하라고 하셨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처음으로 하게 되는 설교, 그것도 그 큰 교회에서 하려니 설교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얼마나 연구를 하고 자료를 찾았던지... 지금 기억에 사랑에 대해 설교를 했는데, 그 단순한 이야기에 무엇을 그리 붙였는지 내용은 지금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많은 정보가 그 속에 있었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하겠더라. 짜깁기와 같은 설교였다.
그때 설교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이고 피곤한 일인지 이제 깨닫는다. 매주일 교인들이 감동적인 설교를 주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인간적으로 죽 쑤는 설교도 있고 인간적으로 멋지게 만든 한편의 설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잘된 설교는 무엇인가? 설교를 잘 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먼저 무엇을 전하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얼마나 마음속에 감동을 주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전하라고 준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설교이고 참된 복음선포이다.
사도바울이 1절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라는 말을 썼다. 이것은 딱 맞는 말이다. 복음은 전하는 것이지 개발하는 것이 아니다.
예)세계적인 부흥사 빌리그래함은 그의 설교중에서 늘 쓰는 표현이 있다. 빌리그래함이 가장 좋아하는 문구가 무엇인지 아는가? 빌리그래함의 Bible says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필요하냐.
예)설교의 ABC에서 금물이 되는 표현이 있다. “생각한다“라는 표현이다. Ich denke는 사절이다. 설교에서 설교자들이 “생각한다” 혹은 “그럴 것이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생각하면 되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전하면 되는 것이지.
예)기도할 때 목사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분도 있고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라고 기도하는 분도 있다. 모두의 속 의미는 알지만 어느 것이 더욱 정확할까? 물론 전하는 말씀이다.
목사는 종이기에 전하시는 말씀도 아니고 전하는 말씀이다. 있는 대로 전할 때 우리의 증거는 참된 것이다. 따라서 가장 잘하는 복음전도,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지 나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감동적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전하라고 한 것을 전했느냐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거기에 어떠한 해석을 달아서는 안 된다. 내 의견으로는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증거를 가지고 그 증거를 그대로 전해야 하는 증인이어야 한다. 우리는 사도바울과 같이 받은 것을 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증인의 모습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증인이 전하는 것은 그가 보고 들은 것, 그가 체험하고 느낀 것을 말하는 것이지 스스로 개발해낸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한 증인이었다. 증인은 자신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그대로 전하면 되는 것이다.
IV. 하나님의 증거를 가진 사람은 성령의 권위로 말씀을 전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그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오직 성령을 앞세워 사역을 해나갔다. 그는 복음이 선포되는 권위는 자신의 말로 해서는 안 되고 오직 성령의 권위로 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의 선교사역을 성령께 맡겼다. 그러기에 사도들의 행전인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까지 하지 않는가! 4,5절을 보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에게 있어 그의 복음선포의 권위는 성령이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학위와 바리새인으로서의 배경과 헬라문화의 경험을 그의 복음의 권위로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의 말과 지혜로 말하고 우리 자신의 권위로 말할 때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신학에는 많은 논쟁이 있다. 왜 그런가? 쉬운 복음을 어렵게 만들어 자신들의 해석을 하였기 때문이다. 있는 역사적인 하나님의 섭리의 사실들을 왜곡하여 자신의 생각으로 옷을 입혔기 때문에 각기 다른 사람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다시 해석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신학적인 논쟁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복음이 선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논쟁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이 논쟁을 잠재울 수 있는 권위는 오직 성령이며 그의 능력으로 복음이 퍼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권위로 말하면 그 권위는 도전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성령의 권위로 말하면 누가 도전할 수 있겠는가!
제가 설교를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이 시간 이루어지는 멧세지의 선포는 권목사의 말씀이 아니라, 권목사가 전하는 말씀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설교할 때 질문을 하는 때가 있는가?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기에 질문하지 않는다. 저의 말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는 말씀을 전할 때 먼저 주님의 권위로 전하기에 조심해야 한다. 전하는 나 자신은 먼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바로 그분이 의도하고 있는 것을 전하는지 조심히 살펴보고 기도하면서 전해야 한다. 전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전해야 한다. 혹 잘못 전한 것이 있다면 성령이여 그것을 제하여 주시고 오직 성령께서 마음에 남아야 할 것만 남기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 그것이 나의 기도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대언자이며 대필자와 같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사용되는 채널일 뿐이다.
예)시골에 계신 우리 할머니는 살아계실 때 도시에 있는 저희 아버님에게 편지를 쓰신다. 당신의 이름석자도 환갑이 다 되어서야 아셨던 일자무식의 할머니, 텔레비전에 나오는 외국사람이 한국말로 들리는 것을 신기하게 여겨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셨던 할머니, 돼지가 나오면 텔레비전 뒤로 돌아가서 뭐가 있나 보셨던 할머니가 어떻게 쓰시는가? 대필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녀에게 쓰라고 해서 편지 내용을 부르는 것이다. “보아라 힉봉아”라고 시작해서 어디가 아프고 니가 보고 싶으니 이번 추석때는 내려와서 우째라는 내용이다. 손녀는 착실하게 할머니가 불러준대로 편지를 받아 쓴다. 시골할머니들이 글은 못쓰니 그렇게 손주들에게 부탁해서 쓴다. 그러면 도시에서 그 글을 읽는 아버님은 어떠하냐? 비록 글은 삐뚤빼뚤하고 받침도 틀린 것도 종종 있지만 아이구 어머니가 아프시군요 하고 마음이 상심되고 아이고 이런 것으로 섭섭해 하셨군요 하고 이번 추석때는 가서 봉양을 해야지 생각한다. 하지만 조카이름을 부르고 울지는 않는다.
기자가 있었어도 저자는 하나님인 줄 알아 말씀 그대로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대필자와 같다.
V. 성령의 권위로 전할 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 말씀의 능력은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이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전하면서 얼마나 많은 좌절에 빠지는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도 바울은 말씀을 전하면서 반대에 부딪힌 일이 더욱 많았다. 그는 많은 핍박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러니 얼마나 자신이 약하고 자신의 말로는 안 되는 것을 알았을까.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약하며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복음의 씨가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도록 사도바울이나 우리로서는 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주의 말씀을 소개할 뿐이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 어찌 우리가 한두 마디 말로서 2000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지금의 내 사건으로 생생하게 가지라고 한다고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 또한 지나온 나를 버리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자기 부인을 요청할 때 별로 아쉬움이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께로 돌아오게 할 재간이 있겠는가?
* 또한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우리의 상식으로 믿기 어려워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라고 할 때 과연 그것이 얼마나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 어떻게 이 딱딱한 심령에 복음의 씨앗이 들어가게 할 수 있단 말인가!
* 우리가 아무리 나의 말로 설득을 해도 어찌 그 복음을 마음속에 넣어줄 수 있겠는가? 유대인들은 십자가의 도를 꺼리고 헬라인들은 미련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주의 복음으로 넣어줄 수 있는가? 오늘날 물질에 쌓여 부족함이 없고 과학과 합리주의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주의 복음을 줄 수 있는가? 답은 하나이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야 한다. 말씀에 감동해서 쓰게 했던 성령께서 직접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시고 조명해 주셔야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말에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능력으로 이해를 하게 하셔야 한다.
예)진화론자들을 반대하여 있는 창조과학회가 있다. 그것이 과학시대에 사는 우리의 믿음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젊은 우리들에게 설득력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신앙의 근본적인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것을 취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버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과학적 범위 안에서 해석되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절름발이로 만들 수 있고 연약한 신앙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후에 신앙인들은 신앙과 신학을 집대성하여 정통주의를 만들었다. 새롭게 모든 신앙을 정립한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신앙이 권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후에 계몽주의와 과학이 나오면서 자유주의신학이 나온다. 자유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인간의 이성이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그들은 아이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나오니 어른들이 감동해서 자기들의 점심을 내어놓았고 그래서 12광주리가 넘쳤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도 음식이 적으면 밥상위에 남지 않느냐! 또한 주님의 죽으심도 선선한 동굴무덤에서 기절했던 분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성이 모든 신앙을 대변할 수 없다고 나온 것이 신정통주의이다. 네오오도독스. 그것은 정통에 근거를 두면서 자유주의를 만족시키고자 한 것이다. 인간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세계에 맞게 신학도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나 슬픈 일인가? 성경은 언제나 과학의 검열에 통과하여야 하고 인간의 이성이 찬성표를 던져야 믿을만한 것이 되지 않았는가! 우리의 신앙이 과학적인 것을 믿는 것으로 되어서는 안되는데... 그렇게 되면 성경은 꼭 과학적이어야 하고 논리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성경이 과학에게 와서 구걸하는 것이다. “과학님 오셔서 믿어지게 한마디만 말씀 좀 해 주세요”라는 식이다. 이제 과학이 없으면 성경이 권위가 안서는 것이다. 성경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과학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과학이 성경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즉, 성경이 과학 위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과학이 없어도 성경이 믿어져야 하는 것이고 권위를 그대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길, “과학아 너도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내고 있지”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매주 과학으로만 성경을 말해보라. 복음주의는 말씀으로만 신앙하였다. 결국 우리의 신앙은 말씀의 권위로 믿는 것이어야 하지 세속적인 요구와 만족을 따라 과학의 권위를 빌려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바울을 보라. 그는 말씀을 전할 때 “지혜의 권하는 말로”하지 아니했다고 한다. 철학자들이 사상가들이 한 말로 어찌 복음이 선포되며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우리가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한다고 할찌라도 얼마나 감명을 받고 주님께로 돌아오겠는가?
오늘날 과학자들이 말하고 이성이 말하는 것으로 복음이 선포될 수 있는 것인가? 오직 증인은 전할 뿐이고 그 능력은 성령께서 드러내는 것이다. 세상의 지혜의 말로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함께 하시는 능력이다. 그것이 기적이다.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분은 성령이며 그분의 능력이 변화를 가져온다.
VI. 우리는 이곳 독일에 살면서 복음 증거하는 일을 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님의 사랑의 편지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성품을 닮아서 우리가 주님을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증인이다.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 증거를 가지고 그저 말하라. 그 권위는 성령이 싣는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라. 우리가 말하고 말하는 것을 듣는 사람에게 변화를 주는 것은 성령이 주체해야 한다. 성령이 강하게 마음에 감동을 주는가? 그러면 거부하지 말라.
새로운 학기를 맞이하면서 우리 주변에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가? 기존에 있는 형제자매들도 있고 새로 이곳에 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는 대로 주의 복음을 전하라. 증거를 보여주라.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 역사를 체험하라.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들의 심령 속에 복음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니다. 오직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역사하실 것이다. 오직 우리는 씨를 뿌리는 작업을 증인으로서 하면 되는 것이다.
전도를 하면서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거절도 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로부터 무언의 핍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증인의 삶을 사는데 소홀하지 말라. 오직 성령의 권위와 능력을 힘입어 사도바울과 같이 비록 약하고 두려워하며 떨리는 가운데서도 주의 복음을 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