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순간의 해결사들이다
2005년 3월 최영수 소장
우리는 때로는 정보가 부족해서, 때로는 더 좋은 답을 얻으려고, 때로는 갈피가 잡히지 않아서 갈등의 늪에 자주 빠지곤 한다. 그리고 갈등의 늪에 빠져 있는 많고 많은 순간들 속에서 주어지는 선택의 고통과 외로움이 종국에는 우리들 대부분을 신처럼 완벽한 존재로 처신하도록 만들곤 한다. 어쩌면 이렇게 순간순간의 완벽한 해결사로서의 능력 때문에 우리 인류가 지금껏 존재하고 그런 능력들이 섞이고 엮어지면서 인류의 문명이 이루어지고 번영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아마도 그런 순간순간의 해결능력의 과도한 믿음 때문에 우리 인간의 역사는 늘 되풀이 되는 것은 아닐까?
갈등이 있을 때 그것의 해결을 위한 답을 선택함에 있어 100:0이거나 60:40처럼 분명한 경우는 누구에게도 문제가 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50:50이거나 49:51인 경우 본인은 물론 주위 또는 상대에게조차 난감한 문제될 소지가 충분하다. 그래서 어떤 경우엔 답은 하나뿐인데 그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이미 하나뿐인 해답대로 일을 처리해 놓고 오히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기도 한다.
인간관계에서 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불편해질까봐 미리 겁을 먹고 아예 양보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관계’에 약한 사람들은 대부분 힘의 게임을 경험한 사람들이거나 어린 시절 충분한 사랑을, 인정을 못 받아서 정에 약한 사람들로 관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적을 포기하기도 한다. 반면, 늘상 만나는 인간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있을 때 그러한 관계는 아예 무시하고 갈등의 목적을 내세워 공격이나 위협을 함으로써 관계를 무시하는 소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는 사람들도 있다. 그와 반대로 갈등 시 무기력감에 휩싸여 이를 회피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스스로에게 각인 된 이미 ‘해봤자 보나마나’라는 드라마를 자신의 머릿속에서 방영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이나 관계를 모두 포기해 버린다.
우리는 순간의 선택과 해결을 밥 먹듯이 하고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으로 힘들 때 대부분의 우리는 강한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거나 극복하느라 기진맥진하게 되고 약한 상대와의 겨루기에서는 배려로 양보를 해야 할 것인지 모른 척 시치미를 뗄 것인지의 선택에 피곤을 느끼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무책임한 선택과 해결을 또한 밥 먹듯이 한다.
이렇듯 우리가 겪어내야 하는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해결사로서의 선택으로 그 상황이나 상대를 극복해야 한다. 때로는 갈등의 목적이 분명해서 관철하기가 용이하지만 관계를 고려해서 상대에게 양보도 하고 때로는 관계에 약하지만 목적을 위해 과감한 도전으로 갈등을 극복할 수도 있어야겠다. 다시 말하면, 관계가 약한 사람은 대부분 ‘저 사람과 불편해지면 어쩌나…’에 매달려 있으므로 갈등의 목적을 중시함으로써 관계의 약함을 보완해야 한다. 목적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옳은데 무슨 소리 하는 거냐?’에 매달려 있으므로 상대를 공격함으로써 더욱 강함을 드러내게 되고 상대는 그 ‘위압적인 힘’으로만 상대를 기억하게 된다. 이럴 때는 상대의 마음이 내키도록 상대의 감정을 먼저 헤아려 줌으로써 자신의 강함을 보완해야겠다. 또한 ‘해봤자 보나마나’ 드라마에 길든 사람들은 시작도 못해보고 갈등이 종료되어버린다. 그러한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키우고 지지해줄 디딤돌들을 찾거나 만들어서 그것들과 함께 갈등을 직면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우리 모두는 순간의 해결에만 몰두하기보다는 갈등의 목적과 관계를 함께 저울질 하는 능력을 향상시킴으로서 서로 서로 중시하는 상호존중의 형태를 지향해야겠다. <행가래로 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