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전후 8회에 걸쳐 감행한 원정에 참여한 군사를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당시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 원정을 십자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십자군에게서 종교적 요인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을 간단히 종교운동이라고 성격지을 수는 없다. 봉건영주, 특히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였다.
그 밖에 여기에는 호기심 ·모험심 ·약탈욕구 등 잡다한 동기가 신앙적 광분과 합쳐져 있었다. 대체로 십자군시대의 서유럽은 봉건사회의 기초가 다져지고 상업과 도시의 발달도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어서 노르만인의 남(南)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정복,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 동부 독일의 대식민활동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주변 세계와의 경계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배경에서 십자군도 정치적 ·식민적 운동의 일환이 될 수밖에 없었고, 종교는 이 운동을 성화(聖化)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무역사] <원거리무역> 경제학과, 20010984, 신호일.
근대 초 유럽의 경제 - 상업혁명
《서론》
《본론》
1. 자본주의(資本主義, capitalism)
2. 중상주의(重商主義, mercantilism)
3. 상업혁명(商業革命, commercial revolution)
《결론》
《서론》
근대 초 유럽 사회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변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1600년 이후 200년에 걸쳐 프랑스 혁명이라는 정치적 격동과 사업 혁명이라는 경제적 자극을 산출했던 강력한 요인들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분명 이시기에 있었던 가장 큰 변화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경제적인 변화는 은행과 유한 회사의 등장과 국제 금융의 발달이다. 은행과 유한 회사들은 국제 상업 활동에 자금을 공급했다. 새로 설립된 도시 작업장들은 제조 상품에 대한 수요 증대에 부응했다. 국제 금융이 고도로 세련된 전문직으로 발달하면서 금융인은 유력 인사가 되었다. 도시의 작업장들이 새로운 조건과 습관을 부과하면서 도시의 숙련공들은 익숙치 않은 요구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론》
1. 자본주의(資本主義, capitalism)
근대 초기의 상공업 세계는 자본주의와 중상주의에 의해 지배되었다. 자본주의는 생산·분배·교환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경제 체제(이 체제 안에서 소유자는 축적된 부를 이윤 획득을 위해 재투자한다.)로 정의될 수 있다.
(1) 자본주의의 본질적 양상
① 개인 소유의 기업, 시장 확보를 위한 경쟁, 이윤 추구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는 노동자에 대한 급료 지불 방식으로 특정한 임금체계를 채택하는데, 이 임금 체계는 노동자들이 창출한 재부의 양에 근거하여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시장에서 노동자들 상호간에 이루어진 경쟁의 결과로 결정된 시장 가격에 근거하여 임금이 지불되는 방식이다. 자본주의는 중세의 반 정적인 길드 경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길드경제에서 생산과 거래는 사회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것으로 간주되며, 생산과 거래에 소요된 노력에 합당한 대가만이 배당될 뿐 무제한적인 이윤은 허용되지 않았다.
② 지방적 수준을 넘어선 전국·국제적 규모의 상업 팽창을 도모하기 위한 체계
길드의 장인은 자신의 도시를 벗어나서 상업 활동을 할만한 자본도 없었고, 그러한 상업 활동을 조직하고 감독할 지식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광범위한 규모의 활동은 부유하고 경험 많은 기업가의 재원과 전문 지식을 필요로 했다. 흔히 광범한 지역은 상대하는 상인으로 출발하여 종국에는 은행가가 되곤 했던 이들 기업가들은 대규모 상품 제조에 자본을 투자할 능력이 있었고, 필요하다면 그 상품들이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팔지 않고 그대로 보유할 수도 있었다. 이들은 시장이 어디에 있으며, 자신의 이익에 맞게 교묘히 시장을 조종하는 방법도 연구하였다.
2. 중상주의(重商主義, mercantilism)
중상주의 이론은 국가 전체의 번영을 증대시키기 위한 정부의 직접적인 간섭을 강조한다. 중상주의는 결코 새로운 이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세적 관념의 변형일 뿐이었다. 즉, 특정 도시의 주민은 공동의 부를 지닌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또 공동체의 경제적 복리는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신 또는 그들의 지배자가 맡긴 임무를 기꺼이 맡는 데 달려있다. 중상주의는 이런 관념을 변형시킨 데 불과한 것이었다.
공동체에 특정 신분에 소속된 사람들은 그 신분 고유의 특권을 누렸다. 빈민의 경우에 이것은 부당한 가격과 아사로부터 보호만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와 같은 보호의 대가로 공동체 구성원들은 길드와 규제와 도시의 조례가 부과하는 통제에 기꺼이 복종했다.
<직물길드 구성원> 램브란트
(1) 중상주의와 국가
17-18세기의 중상주의는 이러한 종래의 특권적이며 통제된 경제 단위로서의 공동체 개념을 도시에서 국가 전체의 차원으로 확대시킨 것이었다. 이는 완벽한 변화라기보다는 종전의 지배자들의 정책을 좌우했던 이론과 실제를 확대하고 정교화한 것이다. 에스파냐의 신세계 정복과 뒤이은 약탈은 중상주의가 거대한 규모로 작용한 하나의 예이다.
(2) 部(부)의 정의
중상주의 이론은 한 국가의 힘이 그 나라가 소유하고 있는 금이나 은 같은 실제적이고 계산 가능한 부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한 국가는 가능한 한 무역 차액을 많이 확보함으로써 금·은을 모을 수 있다. 따라서 국가가 수입을 최소화하고 수출을 최대화하여 얼마만큼이나 자급자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 국가의 경제 번영 및 국력의 가장 명백한 척도였다. 이 이론은 국가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첫째 해외 식민지의 확보와 개발로 나아갔고 둘째, 정부로 하여금 공업 생산과 무역을 장려하도록 하였다.
3. 상업 혁명(商業革命, commercial revolution)
(1) 상업 혁명의 배경
11-13세기, 십자군 이후의 동·서유럽에서는 원격지 상업이 한때 혁명적으로 발전하였다. 그 후 15세기 초부터 대항해 시대에 콜럼버스는 신대륙으로의 항로를, 바스코다가마는 아프리카 남단을 회항하는 동양으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였는데, 그 결과 지중해·북해·발트해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상인들이 활약하던 상업권이 구조적으로 쇠퇴하고, 대신 세비야·카디스 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에스파냐의 신대륙, 즉 서인도 무역과,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 즉 동인도 무역이 활발해졌다.
뿐만 아니라 상권은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었으며, 약 1세기 동안 이베리아반도의 두 나라가 지배하였다. 15세기 말 개인을 부유하게 만드는 상업 체계 즉, 자본주의와 국가를 강력하게 만드는 체계를 목표로 삼아 신대륙 발견과 신항로 개척으로 서유럽 상업자본의 활동영역을 확대시킨 주상주의를 통한 상업 활동의 변혁과 이에 따른 사회적·경제적 생활의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때를 '상업 혁명의 시대'라고 한다.
(2) 상업 혁명의 요인들
① 資本(자본)의 증대
새로운 규모의 기업은 막대한 자본 투자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본은 무엇보다 그 시기 전반에 걸친 점진적인 농산물 가격의 상승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만약 농산물 가격의 상승이 습격했더라면, 이는 경제 성장을 자극하기보다는 오히려 굶주림과 고통을 가중시켜 경제 성장을 방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격 상승이 전혀 없었다면, 한계 수익 때문에 발생할 불경기로 말미암아 마찬가지로 경제 성장에 불리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농업 기업가는 상업에 투자할 잉여 자본을 가지고 있었으며, 금융가들은 그 잉여를 그들의 상업 활동을 넓혀 가는 데 사용했다. 자본가와 상인은 모두 다같이 이익을 본 것이다.
② 금융업의 흥기
금융업은 이러한 팽창의 역사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중세에는 대금업에 대한 강력한 종교, 도덕적 반발로 인해 금융업은 그다지 존경받을 만한 사업이 못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위험 부담이 큰 상업 활동의 경우에는 이윤 획득을 용인하고 있었다. 이러한 개인 금융업의 등장에 이어 정부에 의한 금융 기관 설립이 뒤따랐다. 정부 금융 기관은 국가의 재정적 필요에 봉사한다는 중상주의적 목표를 반영한 것이었다.
③ 신용 제도의 확대
금융업이 성장하면서 대규모의 금전 거래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다양한 신용 제도가 발전했다. 이는 상업 혁명의 구체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신용 확대를 위한 그 밖의 제도로서, 국지적 거래에서 수표에 의한 대금 지불 체계가 채택되었고, 금과 은을 대신하여 은행권이 발행되었다. 이 두 가지 방식은 모두 이탈리아인들이 고안해 낸 것인데, 그 후 점차 북유럽에서도 채택되었다. 수표에 의한 대금 지불 체계는 무역량을 늘리는 데 효과적이었다. 왜냐하면 이제 은행의 신용 자산이 은행 금고에 실제로 보관된 현금가액 이상으로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④ 기업 조직의 변화
- 규제조합(規制 組合)의 성장 : 규제 조합은 공동의 사업을 위해 뭉친 상인들의 조직이었다. 조합원들은 공동으로 출자하지 않고, 단지 자신들의 공동 이익을 위해 제휴할 것과 일정한 규제를 지킬 것에만 동의했다. 일반적으로 결합의 목적은 일정 지역에서 무역 독점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두와 창고의 유지, 특히 독점을 깨고 들어오려는 "무면허 상인"들은 막기 위해 조합원들은 조합비를 지불했다. 이러한 형태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네덜란드 및 독일과의 교역을 목적으로 영국에서 설립된 Merchant adventures라는 영국 조합이었다
- 유한 회사(有限會社, private company) : 규제 조합이 좀 더 간편하면서도 범위가 넓은 새로운 형태의 조직으로 대체되면서 17세기의 상업 혁명은 더욱 촉진되었다. 이것이 바로 유한회사(joint stock company)로서 상당수의 투자자들에게 주식을 발행하여 설립된 것이었다.
유한 회사는 동업이나 규제 조합에 비해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그것은 영속적인 단위로서 구성언 중 하나가 죽거나 탈퇴했을 때마다 매번 재조직하지 않아도 되었다. 둘째, 주식의 광범위한 배포를 통해 훨씬 막대한 양의 자본 축적이 가능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유한 회사는 오늘날의 주식 회사(corporation)가 지닌 거의 모든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 단지 개인에게 허용되는 것과 같은 권리와 특권을 소유한 법인(法人)은 아니었다.
⑤ 화폐 경제
상업혁명의 마지막 중요한 특징으로서 효율적인 화폐 경제의 발들을 들 수가 있다. 물론 화폐는 11세기에 상업이 부활하면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런데도 국한된 지역을 벗어나서 가치를 인정받는 화폐는 드물었다. 1300년에 이르러 베네치아의 금화와 피렌체의 플로린 금화가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북유럽 국제 시장에서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어떤 국가에서도 단일한 통화 체계가 확립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거의 모든 곳에서 큰 혼란이 있었다. 더욱이 화폐 형태가 자주 바뀌었고, 주화는 종종 변종되기도 했다. 군주들은 자신의 세입을 늘리는 방편으로 그들이 주조한 주화에서 비금속의 비율을 늘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상업 혁명기의 상업 및 공업의 성장으로 좀더 안정되고 균일한 화폐 체계의 필요성이 커지게 되었다. 이 문제는 모든 주요 국가에서 자국내의 모든 계약에 사용될 표준 화폐 체계를 채택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러나 개혁이 완성되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걸렸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 치세에 균일한 화폐 제도의 구축에 착수했지만, 그 작업은 17세기 마렝 이르러서도 완성되지 않았다. 프랑스는 19세기초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화폐를 단순성과 편리성이란 면에서 현대의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못했다.
(3) 상업혁명의 문제점
상업혁명은 개인과 국가의 번영에 기여한 바 있지만 투자자나 국가 경제에 대해 심각한 위험 부담과, 때로는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해외 팽창의 한 가지 중요한 결과는 은의 공급 증대로 말미암아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나타나 유럽은 16세기말에 한차례 홍역을 치루어야 했다. 한편 가격의 등락은 경제의 불안정을 한층 더 부채질했다. 사업가들은 자신의 기업을 지나치게 빨리 확장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은행가들은 신용 대여를 과도하게 확대해서 주요 고객들, 특히 귀족들이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에스파냐와 이탈리아가 가장 먼저 타격을 입었다. 두 나라에서는 급등하는 물가에 임금이 쫓아가지 못해서 하층 계급의 생활고가 극심해졌다. 도시에는 빈민의 수가 증가했고, 지방 각지에서는 강도들이 출몰했다. 에스파냐에서는 파산해서 비참해진 일부 귀족들이 부랑자들 틈에 끼어 이 도시 저 도시를 전전했다. 15세기말에는 피렌체의 대금융가인 메디치가의 은행이 문을 닫았다.
다음 세기 중반에는 에스파냐에서 수많은 파산자가 속출했고, 독일의 후거가도 몰락하고 말았다. 반면에 영국과 네덜란드는 날로 번영을 누렸다. 이러한 번영은 특히 1540년에서 1620년까지 이어진 "은의 시대"에 나타난 독특한 현상이었다. 17세기에는 또 한차례의 인플레이션이 진정되고 나자, 종교·국제 전쟁 및 내란의 결과로서 다시 한 번 불황이 닥쳐 왔다. 1720년대 '남해 거품 사건'(South Sea Bubble)과 '미시시피 거품 사건'(Mississippi Scheme)이란 이름으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일기 시작한 주식 투기 열기는 당시로서는 사상 유례없는 주가 폭락과 대공황을 동반하며 두 나라의 경제를 근본부터 흔들었다. 이 두 나라가 이때 입은 상처가 아무는 데는 60년 이상 걸린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① 남해 거품 사건(South Sea Bubble)
호황과 불황이 교차하면서 열광적인 투기가 뒤따랐다. 경기의 기복은 18세기초에 절정에 이르렀다. 남해 거품 사건은 영국 남해 회사(South Sea Company)의 주식 가격 폭등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 회사는 국채의 상당 부분을 인수하기로 함으로써 회사 전망에 대한 무모한 확신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낙관적 희망이 공포로 바뀌자 투자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들의 주식을 처분하려 들었다. 결국 1720년에 맞이한 파탄은 불가피한 결과였다.
② 미시시피 거품 사건(Mississippi Scheme)
영국에서 남해 거품이 부풀어오르고 있을 때, 프랑스에서도 그와 비슷한 투기 광풍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여분의 현금을 긁어모을 수 있는 사람들 모두가 부의 쟁탈전에 참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주식을 몇 개 사서 값이 오를 때까지 보유한 푸줏간 주인과 재단사가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그러나 터무니없이 가치가 부풀려진 주식에 대해 회사가 명목상의 배당금밖에 지불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조심스런 투자자들이 자신들의 보유 주식을 팔기 시작했다. 경계 심리가 확산되면서 모든 투자자들이 주식을 사들일 때와 마찬가지로 주식을 팔아 치우려는 조바심에 어쩔 줄 몰랐다. 끝내 1720년에 미시시피 거품은 거대한 공황을 일으키며 터지고 말았다. 재산을 매각하여 엄청나게 비싼 값으로 주식을 사들인 수천 명의 사람들이 파산하고 말았다.
(4) 국가의 역할
바텔로호 -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1,325t급 바텔로호. 동인도회사는 17세기 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동양에 대한 독점무역권을 부여받아 동인도에 설립한 여러 회사를 말한다.
프랑스의 유한 회사들은 다른 데보다도 더 국가에 직접적으로 의존했다. 이는 프랑스가 중상주의 이론에 매우 철저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프랑스 회사들은 정부의 후원 아래 설립되었다. 궁중의 신하들(그리고 국왕 자신 역시)은 큰 투자가였다. 국가의 대리인은 때때로 회사에 불이익을 초래하면서까지 회사 경영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 예를 들면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국가의 지시에 따라 파리 법률에 의거해 식민지를 통치해야 했다.
다른 나라의 회사들은 프랑스보다 정부로부터 규제를 덜 받았다. 정부와 상업 활동은 대체로 서로의 이익을 증진시켜 주었다. 전시에 정부는 상업 자본가들에게 군비 지원을 요청했다. 그 대가로 무역 회사들은 전쟁을 이용해 프랑스 상인을 누르고 원격지 상업을 늘렸으며, 정부에 강력한 압력을 가하여 그들의 상업적 이익에 유리한 조약을 맺도록 했다.
《결론》
상업 혁명이라는 현상은 그 메커니즘, 그 영향, 심지어는 그 원인에 관해 수많은, 겉보기에는 한도 끝도 없는,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불필요한 학문적 논쟁을 일으켜왔다. 15세기 후반부터 중앙 유럽의 은생산이 증가하고 포르투갈이 아프리카로부터 그믈 수입하게됨에 따라 화폐량이 증가하고 물가가 상승하게 되었다고 지적되어 왔다. 재정이 취약하고 비도덕적인 군주에 의해 초래된 화폐 악주는 명목가격의 상승을 조장했다. 물가 상승에 있어서는 인구증가가 정금량의 증가보다 더 중요한 요소였다고 주장되어 왔는데, 이는 일반(평균) 가격수준과 상대가격 간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는 견해이다. 상업혁명으로 인해 야기된 결과는 농민과 귀족의 궁핍화에서부터 '자본주의의 성립'에 이르게까지 다양했다.
실태를 살펴보면 가격혁명으로 야기된 많은 결과들이 극히 과장되거나 그릇되게 평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한 세기에 걸친 물가상승률이 인상적이었지만 그것을 연간 기준으로 하여 20세기 후반의 물가상승과 비교해 보면 무색해진다.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심한 단기 파동이 전반적인 장기 인플레이션에 비해 더 중요한 변혁을 초래했던 것 같다. 가격혁명이 모든 다른 인플레이션과 마찬가지로 개인과 사회집단의 소득과 부를 재분배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소득이 가격 탄력적이었던 사람들은 상인, 제조업자,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는 지주, 토지보유 기간이 고정되어 있고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생산활동을 하는 소작농 등은 임금소득자, 소득이 고정되어 있거나 변하더라도 단지 서서히 변하는 연금수혜자, 수많은 지대수취자, 터무니없이 비싼 지대를 지불하는 소작농 등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익을 보았다. 비록 인구증가가 (절대적인) 물가상승을 야기 시키지는 않았을지라도 농업이나 공업이 잉여노동력을 흡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인구증가가 임금격차를 확대시키는 데 있어주된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실질임금 하락의 근원은 금전적인 문제에 있었던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인구의 변동과 농업생산성이 상호 작용한 결과였다.
{참고 자료}
1. 서양 문명의 역사Ⅲ - E.M 번즈·R. 러너·S. 미첨 씀 . 선세호 옮김 (소나무)
2. 간결한 세계 경제사 - 론도 캐머런 지음 . 이현대 옮김 (범문사)
3. 서양사 개론 -민석홍 (삼영사)
4. 인터넷 자료 -매일경제 경제사전
-두산 세계 대백과사전(그림)
-한국 일보 (이코노미스트-민경훈 편집위원.2001.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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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사] <원거리무역> 경제학과, 20010984, 신호일.
대서양 삼각 무역과 자본 축적
Ⅰ. 서론
“나는 커피나 설탕이 유럽의 행복을 위하여 꼭 있어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들이 지구상의 커다란 두 지역의 불행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아메리카는 경작할 땅으로 충당되느라 인구가 줄었으며, 아프리카는 그것들을 재배할 인력에 충당되느라 허덕였다.” - J.H. 베르나르뎅 드 생 피에르, 18세기 프랑스 작가
유럽세계의 지리상 발견 시기에 시작된 대서양 교역은 17세기 후반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라는 세 개의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18세기 그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른바 대서양 삼각무역이라 불리는 이 교역체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영국-아프리카-아메리카의 구성이고, 다른 하나는 아메리카의 뉴잉글랜드-아프리카-서인도제도의 구성이다. 전자에서는 유럽의 공산품들이 아프리카로, 아프리카의 노예들은 아메리카로,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 농업 생산물들이 영국과 그 주변의 수출국들로 옮겨졌고, 후자에서는 뉴잉글랜드의 럼이 아프리카로,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서인도 제도로, 서인도 제도의 당밀이 뉴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 글에서 우리는 비교적 일반에 잘 알려진 전자의 삼각교역체제에 집중하여 그 교역망이 유럽의 자본 축적에 기여한 바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우리의 논의는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에서 출발한다. 아메리카에는 노동력을, 아프리카에는 유럽의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자원을, 유럽에는 이 둘 모두가 창출한 부를 가져다주었던 노예무역은 삼각무역의 기반을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대륙 내 노예무역의 기원에서부터 노예무역폐지 법안이 통과되는 시기까지, 그 변천양상을 살펴보면서 노예무역이 아프리카에 미친 영향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아프리카 노예들이 노동력을 제공했던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 농업, 그 중에서도 라틴아메리카의 사탕수수 농업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인구사정과 노동력 이용 상황을 사탕수수 농업의 특징들과 관련지어 알아보고, 농장에서 노예들의 생활상도 살펴본 다음 덧붙여 금, 은과 같은 귀금속의 유출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삼각무역체제가 당시 유럽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되짚어 보고, 이어서 과연 대서양 삼각무역이 유럽세계의 자본축적에 기여했는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엇갈리고 있지만, 여기서는 주로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박지향의 『제국주의』에 제시된 논지들을 비교 검토할 것이다. 그런 후에는 앞에서 전개된 논의에 대한 내용을 바탕으로 J.M.Blaut, Eric Williams, Adam Smith의 의견을 참고하여 결론을 내려보고자 한다.
Ⅱ. 아프리카와 노예무역
대서양 삼각무역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의 성장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값싼 노동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5세기 중반 포르투갈 상인의 진출로 시작된 대서양 노예무역은 점차 그 규모가 증대되어, 1700년대 이후에는 서아프리카 제1의 수출품목이 금에서 노예로 전환될 정도였다. 하지만 아프리카 역사에서 노예무역이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아프리카 내부에서 노예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노예를 거래할 수 있는 상업적 기반도 마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아프리카에서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의 노예거래가 쉽게 성립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는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기원과 발전과정을 살펴보고, 이어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에 진출한 15세기부터 영국의 노예무역폐지 법안이 발표된 19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아프리카의 사정을 알아보겠다.
1.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기원과 발전: 15세기 이전
기원전 3천년 경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웃 목축민을 습격해 수만 마리의 소와 수천 명의 포로를 생포한 사건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아프리카 대륙의 노예 매매는 그 때부터 시작됐다고 추정된다. 기원전 1천 년대 중반 헤로도토스는 중부 사하라의 산지에서 이미 오랜 기간 동안 노예사냥이 번성했다고 보고한 바 있으며, 서부와 중앙 수단과의 사하라 종단무역이 고대부터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프리카인들은 바로 이 길을 통해 처음 유럽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북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은 이슬람교가 번성하고 전파되던 시기 아랍군대의 정복활동에 의해 큰 자극을 받았다. 아랍군은 중동과 북아프리카로 뻗어나가는 과정에서 관례에 따라 피정복자들의 아내와 아이들을 노예로 취했고, 정복지에는 다인종 다민족의 거대한 국제노예시장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9세기 이후 사하라의 낙타 목축민을 포함한 베르베르인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부터는 노예공급원이 사하라 사막 남쪽으로 이동한다. 사하라 북쪽의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을 수 있었던 근거는 그들이 이슬람교에 종교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는 자라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13세기 이후 노예무역은 교역로와 금광에 대한 군사적 제압을 기초로 성립된 말리(Mali)와 송가이(Songhay)와 같은 서아프리카 대왕국의 발전과 더불어 확대되었다. 낙타에 의한 사하라사막의 교통로를 이용하면서 일찍부터 북아프리카 근동과의 문화적 교류가 가능했던 이 지역 국가들은 서아프리카 북쪽의 아랍제국과 유럽간의 무역을 관장하고 통제함으로써 국가권력의 기반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특히, 고대세계의 다른 사회에서도 그러했듯, 철기사용이 종족 간 전쟁능력에 결정적인 우열이 생겨나게 하면서 점차 대규모의 종족적 통합이 이루어졌고, 정복전 규모가 확대되면서 노예로 삼을 수 있는 포로의 숫자도 증가했다. 당시 유명한 아라비아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말리를 여행하고 1352년 북아프리카에 돌아올 때 600명의 노예로 구성된 대상과 함께 여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단 1회의 노예수입이었지만 다음의 계속적인 수입 인원을 추정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하지만 사하라를 횡단하는 무역상에게 노예는 그다지 환영할 만한 상품은 아니었다. 사막에서 생명과도 같은 물과 음식을 소비하는 부피 큰 상품인 노예에 비해 부피가 작고 고가인 물건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했다. 실제로 이 시기 사하라 노예교역의 규모는 이후 기니아 해안통의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작았다.
2. 대서양 노예무역과 아프리카: 15세기 중반~18세기
15세기 중반 유럽 상인들과 부딪힌 아프리카 사회는 철기시대의 농업에 기반을 둔 소규모 국가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서아프리카 하부의 기니아 해안 연안 국가들은 대륙간 해상무역의 발전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더 복잡한 정치적 단위로 발전하였다. 1485년 포르투갈이 베닌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이미 강력한 왕국이었고, 이어서 아샨티, 다호미도 강한 정치적 권력과 광대한 경제적 이해관계, 상당히 세련된 문화를 지닌 안정된 중앙집권국가를 확립하고 있었다. 이들은 산림지대에 위치하고 있었으면서도 원거리 무역로와 지방 생산품을 교역하기 위한 시장 등을 확보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대서양 노예무역에서 아프리카 사회가 그렇게 많은 노예를 공급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으로 크게 유럽인들이 나타나기 이전부터 이미 노예제나 노예무역을 내부에 갖고 있었다는 점과 상업에 익숙해있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즉, 노예무역을 가능하게 한 원인은 아프리카의 상업적 기구였지, 아프리카 사회의 원시성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사회가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것처럼 그렇게나 순수한 원시사회였다면 1년에 10만 이상에 달하는 생포자를 공급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1) 노예의 거래
1640년까지 대서양 노예무역의 주도권은 포르투갈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네덜란드로, 1672년부터는 영국과 프랑스 상인들에게 넘어갔다. 유럽 상인이 이용한 무역시스템은 크게 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정치당국이 노예수용을 위한 영구적 해안 취락을 세우도록 허가한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상관(商館)무역이었고 다른 하나는 해안을 따라 내려가면서 배를 꽉 채울 때까지 노예를 충당하는 선박무역이었는데, 유럽의 개인상들은 후자를 선호했다고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활동은 모두 연안 아프리카인의 통제 하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노예를 팔기 원했던 아프리카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프리카인들은 장시간의 능란한 흥정으로 노예를 거래하였다. 거래 과정에서 환대, 뇌물, 정치적 동맹, 풍부한 술 등의 로비활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프리카의 통치자들은 특권을 지닌 수출업자의 역할을 맡아 내륙무역을 독점하였지만 최종적으로 유럽 상인들에게 노예를 판매한 것은 연안의 중개인들이었다. 이들은 각종 이유를 들어 내륙의 통치자와 유럽인의 직접 접촉을 차단했고 향후 노예무역으로 획득한 부를 통해 중상주의 왕국을 세움으로써 고대의 전통적인 왕국들을 대체하게 된다.
그러나 아프리카 노예상인들이 플랜테이션 농업에서 아프리카 노예가 제공한 노동력의 가치에 합당한 가격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이들이 노예무역으로 모은 돈은 다시 유럽세계의 물품을 사들이거나 노예사냥을 벌이는 데 사용되는 등 합리적으로 재투자되지 못했다. 이들의 자본축적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고 또한 아프리카 전체의 성장에도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노예무역의 논리는 집단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분리되는 데 있었다. 힘 있는 사람들이 상품을 얻기 위해 노예를 팔고, 그렇게 얻은 상품으로 더 많은 사적인 추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했다.
노예 거래에서 화폐로 사용되었던 개오지 조가비는 10세기 무렵 인도양에서 북아프리카를 거쳐 처음 들여왔다. 개오지 껍질은 외양이 특이하고 내구성이 강했으며 공급이 제한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소량취급이 용이했기 때문에 화폐의 역할을 담당하기에 적합했고, 세네감비아와 아칸족을 제외한 대부분 서아프리카 삼림지역의 디울라족이나 하우사족의 무역지대에서 사용되면서 상업 확대를 도왔다. 하지만 수입품인데다가 사막의 무역상들이 개오지 화폐를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와의 상거래에서는 제한적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1850년 유럽 선박들이 개오지 조가비를 대량 수입해 화폐 가치를 87%까지 하락시키기 전까지도 서아프리카 연안에서는 개오지 화폐가 통용되었지만 유럽과의 교역에서 개오지를 받았던 것이 이들에게 이득을 가져다주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흥정이 끝난 노예는 새로운 유럽인 주인에게 넘겨져 낙인이 찍혔고, 다음으론 죽기 전에 선적되어야 했다. 선적 전 사망자수에 대한 믿을만한 통계는 없지만, 연안의 노예우리에서 지내는 동안이나 갑판에서 항해를 기다리는 동안 노예는 질병에 걸리거나 자살할 위험이 높았고 탈출을 기도할 가능성이 많았다. 보통 선원들도 견디기 힘들었던 두 세 달의 항해 기간 도중 죽은 노예의 수가 많았음은 물론이다. 15세기 중후반 포르투갈이 구매한 노예들은 대부분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등 유럽 자체의 노동력으로 투입되었지만, 플랜테이션 농경의 노동력 수요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1532년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의 직접선적이 시작되었고, 16세기 후반에는 서아프리카 수출 노예의 80%가 아메리카로 유입되기에 이른다.
2) 노예무역과 더불어 흥성한 국가, 아샨티(Ashanti)
황금해안의 아칸족이 17세기 황금으로 얻은 부는 서아프리카 연안에 인구가 조밀하고 상업화․계층화된 사회를 만들었다. 17세기 말, 노예무역을 통해 신무기를 갖게 된 이 지역 신흥국가들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군대를 유지할 무기를 얻기 위해 더 많은 노예가 필요해지면서 이들은 해안통에서 먼 내륙까지 노예사냥의 손길을 뻗쳤다. 이 무렵 이러한 압력에 대항해 자신을 보호하려는 종족들의 집결체들이 생겨났는데, 아샨티도 그러한 성격의 국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신생국의 효과적인 자기방위를 위해서는 새로운 무기의 구득이 불가피했고, 무기를 얻기 위해서는 유럽상인들과 접촉하는 연안의 상인들과 거래하는 수밖에 없었으며, 교환물은 물론 노예여야 했다. 노예사냥과 무기구입이라는 끊을 수 없는 고리 속에서 아샨티는 결국 직접 유럽 상인들과 대면하여 직접 무기를 구입하게 되었고, 구입한 무기로 노예사냥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군사사회의 성격을 지속하게 되었다. 여기에 왕 중심의 관료제적 행정조직과 법률 등을 갖춘 중앙집권적 정부, 그리고 국무회의와 유사한 ‘아샨티안히아무’라는 기구가 더해져 왕과 수장 사이의 내부분열을 극복하는 한편 비교적 효율적인 국가운영이 가능했던 아샨티는 결국 아칸의 모든 국가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3) 노예무역의 최절정기: 18세기
1700년, 노예는 금을 제치고 서아프리카 제1의 수출품목이 되었다. 1674년 다호미 왕국에서 노예 1인에 아마포 2장이 교환되던 것이 1750년에는 70장으로 증가한 것이 한 예다. 주요 노예공급원은 이제 서안 북쪽의 세네감비아, 콩고, 앙골라로부터 점차 남하, 18세기에는 남부의 비아프라만, 모잠빅으로 이동했다. 19세기 중반 시에라리온에서 선교사 지기스문트 쾰레가 177인의 해방된 남성노예를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34%가 전쟁통에, 30%가 납치에 의해, 11%가 재판과정에 의해, 7%는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노예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대규모 노예사냥과 정치조직체간 전쟁의 부산물로 생겨난 노예가 여전히 많기는 하지만, 노예가격 상승으로 한층 심화된 노예획득경쟁은 통치자가 자국의 신민을 사냥하게 만들고, 친척끼리 서로를 노예로 팔아넘기는 상황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3. 19세기 이후 아프리카의 노예무역: 영국의회의 대서양노예무역폐지 이후
1807년 영국의회는 대서양노예무역폐지는 아프리카 노예제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여전히 노예수요는 존재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한 불법노예무역이 성행했다. 폐지령은 단지 아프리카의 노예값은 하락시키고, 미국에서 판매되는 가격은 상승시키는 효과를 낳았을 뿐이었다. 유럽 상인들은 단속위험을 무릅써야했지만 그러한 노력을 상쇄할 만큼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던 반면, 아프리카 왕국들은 이전만큼의 수익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수의 노예를 잡아들여야만 했던 것이다.
아프리카 노예무역은 임산물의 수출에 따라 그 비율이 조금씩 줄어들기는 했지만, 아프리카인들이 노예쟁탈전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갖춰 아프리카가 독립국가로서 정치적 재편성을 이루게 될 때까지, 또 기계문명의 도입에 따라 노예를 필요로 했던 고된 노동이 사라져 노예 노동이 임금노동으로 대체될 때까지 지속됐다.
Ⅲ. 라틴아메리카와 플랜테이션 농업
앞서 살펴본 흑인 노예무역과 함께 삼각무역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는 것이 라틴아메리카이다. 라틴아메리카는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사들여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재배를 하였고 많은 금과 은이 유출되었다. 여기서는 플랜테이션 농업에서 이용된 노동력이 어떻게 원주민 노동력에서 점차 흑인 노예를 수입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갔는지 알아볼 것이다. 또 플랜테이션 농업이 어떤 방법으로 운영되었는가 하는 점과 이 산업의 특성에 대해 알아보고 금, 은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1. 라틴 아메리카 인구와 노동력
1) 인구구성
라틴아메리카 대규모 농장 산업의 노동력 이용을 알아보기 이전에 간략하게 라틴 아메리카의 인구 구성에 대해 살펴보자.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구가 어느 정도였는가에 대해서는 각 학자마다 논란이 많다. 특히 1568년 이전의 수치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원주민 인구가 코르테스의 도착 이후로 급격히 감소하였다는 점과 1650년이 되기 이전에 원주민 인구가 최저점에 도달했다는 점은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원주민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원인을 찾고 있다. 전쟁, 노동력 혹사, 영양실조, 자연 재앙 등을 이유로 들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전염병의 전파이다. 천연두, 페스트, 그리고 또 다른 전염병들로 수많은 희생자들이 생겼다. 이러한 원주민 노동력의 인구 감소는 이들이 면역력을 가지게 된 18세기가 되어서야 증가 추세로 돌아설 수 있었다.
이주민의 인구 변천을 살펴보면 1584년 브라질 해안의 인구는 5만 7천명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 백인이 2만 5천명 정도였고, 1600년 전체 인구 15만 명 중 3만 명이 백인이었다. 1세기 후에는 브라질 인구의 1/3이 백인이었다. 이렇게 이주민들이 늘게 된 원동력은 바로 설탕생산과 광산 붐 때문이었다. 초기에는 주로 모험적인 젊은 층들이었지만 점점 기술자 전문가 관리 성직자 등의 이민대열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은 생산지의 발견에 따라 내부에서의 이동도 활발하였다. 예를 들어 포토시에서 1545년 은이 발견되면서 백인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은 생산이 하락하면 다시 인구는 감소하게 되었다. 이들 이주민들이 증가하면서 혼혈 인종들도 많이 생겨나게 된다.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은 마메쿨로, 백인과 흑인의 혼혈은 물라토, 흑인과 원주민의 혼혈은 카푸조라고 지칭한다.
2) 노동력 이용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의 노동력은 16세기 중반까지는 대체로 원주민 노동력을 이용하다가 점차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이용하는 방향으로 바뀌어나갔다. 한 예로 17세기 초 페르남부쿠와 바이아 설탕 농장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로 대체되었다. 스페인 지배자들이 원주민 노동력을 얻기 위해 사용한 정책은 다양하였다. 엥코미엔다, 레파르티미엔토, 미타, 야나코나헤, 자유 임금 노동, 노예 제도 등의 방법들이 있었다. 이러한 원주민 노동력 이용은 16세기에 반투인 수단인 등이 사탕수수 경작지에 투입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원주민 노예에서 흑인 노예로 바뀌게 된 것은 원주민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흑인 노예가 더 비쌌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이 높다고 여겨져서 흑인 노예는 곧 각광 받게 되었다. 노예 교역은 매우 수지 맞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노예 무역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스페인은 1479년 포르투갈인들과 신세계 노예 공급을 위한 아시엔토 독점 계약을 체결하였고, 1518년 노예 공급회사에게 흑인 노예 수출 독점 허가권을 팔기도 했다. 16세기 초에서 1810년까지 스페인령 아메리카에는 거의 100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했다.
3)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흑인들의 상황
아메리카 식민지에 도착한 흑인 노예들은 일부 광산지역에 들어간 노예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대농장 플랜테이션에 배치되어 일하였다. 제당농장에는 사탕수수 밭인 농장에서 일하는 이들과 사탕수수를 설탕으로 만드는 제당소에서 일하는 일들이 있었다.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새벽녘부터 일어나 일하기 시작했다. 작업 감독들은 노예들의 움직임을 항상 감시했고 게으름을 피우거나 하면 가차없이 처벌을 가했다. 정오가 되면 노예들은 2시간동안 작업을 멈췄다. 그러나 이것은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노예들이 자신들과 자신들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이었다. 정확히 오후 2시가 되면 작업 감독들은 노예들을 농장으로 불러들였고 밤늦게까지 작업을 계속하였다.
제당소에 배속된 노예들은 작물을 거두어들이는 동안에는 별다른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일은 위험하고 고된 것이었다. 원통형 롤러에 빻을 사탕수수를 날라야 했고 빻은 사탕수수를 가마솥에 넣고 계속 저어주어야 했다. 과로와 졸음을 이기 못한 많은 노예들의 팔은 롤러에 으스러지거나 가마솥에 심한 화상을 입곤 했다.
노예들은 농장과 제당소에서의 고된 노동 외에 제분작업에 이용되는 가축에게 먹일 목초를 하루에 두 번 거두어 와야 했다. 목초지는 대부분 농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이 일 또한 힘든 것이었다. 게다가 모든 작업이 모두 끝난 밤 시간에 목초지로 향해야 했다. 이 일을 마치고 나서야 노예들은 식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것은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그러나 노예들이 자신들이 먹을 야채를 심어놓은 텃밭을 돌볼 수 있는 시간은 이때뿐이었다. 노예들은 보다 나은 식사를 위해서 밤중에라도 텃밭을 가꾸었던 것이다.
위의 사례로부터 우리는 당시 노예들의 생활상을 파악해 볼 수 있다. 노예들은 새벽에 일어나 밤늦은 시간까지 일하였다. 물론 중간에 쉬는 시간은 없었고 식사와 심지어 식자재들까지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 그들은 밤늦게 작업을 마치고서도 따로 부가된 노동(목초 거두기, 텃밭 가꾸기)에 임해야 했다. 일요일은 노예들의 유일한 휴일이었으나 이나마 무시해 버리는 주인들이 더 많았다. 이와 같이 휴식도 없이 일만하는 노예들에게 주인은 임금은커녕 식사마저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고된 작업 후에도 텃밭을 가꾸었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흑인 노예들을 이용하는 데에는 유지비가 거의 들지 않았거나, 든다 하더라도 아주 약간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볼 수 있다. 유지비가 거의 들지 않는 동시에,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던 흑인 노예들이 농장주들에게 가장 수익성 높은 대안 이었던 것이다.
2. 사탕수수 농업
'신세계'에서 처음으로 재배한 작물은 담배였다. 담배는 호사품이었으나 점차 일상 소비품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설탕이 담배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1700년이 되면 영국에 도착한 설탕의 가치는 담배의 가치의 2배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에서 일반적이고 장기적으로 진행된 사탕수수 산업은 매우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이 당시 단일 산업으로 이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는 분야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여기서는 시드니 민츠의 『설탕과 권력』의 논의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 사탕수수의 특징
먼저 사탕수수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 식물인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사탕수수는 높이가 2~6m이고 열대지방에서 주로 자란다. 연평균 기온이 20도 이상이어야 하고 연강우량은 1200~2000mm가 필요하다. 사탕수수는 줄기에 싹눈이 하나만 붙어있어도 땅에 심으면 무성 생식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6주 동안 하루에 2.5 센티미터씩 자라고 9~18개월이 지나면 완전히 성숙하여 설탕 추출을 위한 최상의 상태가 된다. 다시 심지 않아도 아버지 수수 그루터기로부터 자라나는 아들 수수는 매 12개월마다 수확 가능하다. 그리고 사탕수수는 수액이 줄어들기 전에, 자당의 함량이 떨어지기 전에 베어내야 한다. 일단 수수를 베어내면 부패, 건조, 반전, 발효를 막기 위해 신속하게 수액을 뽑아내야 한다.
2) 사탕수수 재배
유럽이 사탕수수를 접하게 된 것은 아랍인들이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면서부터다. 아랍인들은 시칠리아, 키프러스, 몰타, 로도스, 마그립, 스페인에 사탕수수를 들여와 경작하고 설탕 제조 기술까지 보급하였다. 설탕은 오랫동안 지중해 저지대로부터 북아프리카, 중동지역, 그리고 유럽으로 공급되었다. 그러다가 설탕산업의 중심지는 지중해 지역에서 마데이라, 카나리아, 상투메 지역을 포함하여 대서양 제도로 바뀌게 되었다가 라틴 아메리카로 중심지가 이동하게 된다. 사탕수수가 처음으로 라틴아메리카로 들어간 것은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 때 일이었고 처음 재배된 곳은 스페인령 산토도밍고였다. 그 후 16세기 사탕수수 재배가 가장 활발한 곳은 브라질이었다. 사탕수수는 밭을 갈아서 준비하고 시럽을 가공하기까지 엄청난 노동력이 들어간다. 사탕수수는 단순한 수액을 추출하는데 그치지 않고 재배 즉시 베고 분쇄하고 숙련된 노동자의 가공이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력을 확보하는 문제는 사탕수수 재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설탕 소비량이 점점 증가하면서 사탕수수 재배도 확장되어갔지만 기술 혁신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증가한다거나 1인당 생산성이 증가하기보다는 꾸준한 생산의 확장에 의해 그 수요를 충족시켜나갔다.
3) 사탕수수 재배 산업의 특징
사탕수수 재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농업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우리는 사탕수수 농장이라고 했을 때 단순한 농업으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탕수수 농장은 농공단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탕수수는 성숙하면 바로 베어내야 하고, 또 베고 나면 바로 갈아야 한다. 그리고 채취한 수액을 고체화 시키는 기술이 없이는 설탕 생산은 불가능하다. 엄청난 노동력과 숙련된 기술공의 지식 이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이 바로 사탕수수 재배였다. 제분소와 끓이는 곳의 인력은 1/10 정도였고 이들의 일은 사탕수수를 베는 일과 협력이 이루어져야 했다. 베는 것과 분쇄하는 것과의 연관 관계, 끓이는 것과 결정화시키는 것과의 연관관계 때문에 토지와 제분소는 협력을 해야 했고 노동력도 통합되어야 했다. 기술과 노동이 전문화되고 작업반을 나누고 근무 교대가 이루어지며 시간 엄수와 규칙적 노동이 강도 높게 적용되어야만 했다. 이런 특징은 알다시피 농업보다는 공업과 관련된 특성들이다. 또 카리브 해 지역에서 농장을 경영하던 영국인들은 대부분 대기업가들이었다.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려면 제분소, 수액을 정제하고 졸이고 끓이는 집, 당밀을 빼내고 설탕 덩어리를 건조시키는 집, 럼을 만드는 증류주 양조장, 선적을 위해 원설탕을 보관하는 창고가 모두 있어야 했다. 이것은 은화로 수천 파운드의 투자가 필요한 일이었다. 또 서로 서로의 긴밀한 연관 때문에 사탕수수 농장은 분할되지 않고 상속되었다.
4) 노예제 폐지 이후
유럽 제국의 번영에 기여도가 컸던 노예제와 노예무역은 18세기 후반에 폐지 운동이 벌어졌다. 자본주의의 발달, 복음주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노예제 폐지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리버풀 브리스틀 등 상인층와 서인도의 플랜터 출신의 의원들 등 직간접적으로 노예무역에 중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광범한 세력의 방해로 노예제도 폐지 결의안은 부결되었다. 그러나 1792년에 노예무역 폐지 결의안이 드디어 통과하였고 1807년에 노예무역폐지 법안이 통과되었다. 흑인 노예를 기반으로 하는 사탕수수 산업은 본국에서의 노예무역, 노예제 폐지에 부정적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곳의 해방 노예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사탕수수를 보호하던 법률적 기반은 무너졌지만 해방 노예들에게는 여전히 자유가 없었다. 투표권을 제한하고 토지를 소유하는 법을 제정함으로써 그들에게는 여전히 재구성된 농노가 되거나 지역의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방법 이외의 길이 없었다.
3. 금과 은의 붐
유럽인들이 가장 갈구했던 것은 상거래 결제 수단인 귀금속, 금과 은이었다. 보헤미아, 작센, 티롤 지역의 광맥은 거의 고갈되고 있었고 유럽은 은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엘도라도의 신화를 가지고 스페인인 모험가들은 은의 원천을 찾아 헤매었다. 그들은 멕시코 고원, 안데스 고지에서 대량의 금, 은이 매장된 것을 찾아내었다. 은광이 있던 포토시도 발견되었는데 포토시는 1573년 12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1650년 다른 조사에 의하면 포토시 인구는 16만에 달하고 있었다. 포토시는 풍부한 은광을 가지고 있었는데 칼 5세는 포토시에 황제의 도시라는 명칭과 '나는 풍요한 포토시 그 자체이고, 세계의 보물은 나의 것이며, 나는 모든 산의 왕이고, 모든 왕들의 선망의 대상이다'라는 글을 새긴 방패를 증여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포토시는 16~17세기까지 번성하고 그 이후 쇠퇴하였다. 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약탈한 귀금속은 유럽의 경제를 자극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스페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스페인으로 들어오는 은은 각국으로 나누어졌는데 Roland Mousnier에 의하면 1/3이 네덜란드 플랑드르, 1/4이 프랑스, 20%가 제노바, 10% 영국 10% 독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 은이 스페인 왕실 재산의 65%를 차지하였지만 공채 지불에 충당되었기 때문에 유럽의 부유한 가문들에게 넘어갔다. 프랑스의 재상 콜베르는 "어느 국가가 스페인을 상대로 무역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은을 소유하게 된다"라고 말하였다. 스페인은 비록 부를 쌓는데 실패하였지만 유럽의 많은 국가는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흘러 들어온 은과 금으로 새로운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Ⅳ. 유럽의 대서양 무역과 자본축적
1. 대서양 무역의 헤게모니의 변천과정
네덜란드는 서인도회사(1621)를 통해서 유럽에 면화, 담배, 설탕을 제공한 삼각 무역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후 다음 사반세기 동안 네덜란드인들은 대서양으로의 팽창을 꾀했다. 그들은 뉴암스테르담(뉴욕)을 건설하고 포르투갈(에스파냐)로부터 북동부 브라질을 빼앗아 점령하고 두 번째 시도로 서아프리카의 엘미나와 앙골라의 루안다를 점령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제1차 영국-네덜란드전쟁(1652~1654)에서 마침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한 포르투갈인들에게 브라질을 재차 빼앗겼고 제2차 영국-네덜란드전쟁에서 뉴암스테르담과 몇몇 서아프리카 요새들을 잃었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삼각 무역의 기초를 만드는 시기에 이룩한 것은 결코 작은 부분이 아니다. 첫째로 네덜란드인들이 남북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를 몰아내면서 ‘해군 방패막’을 제공했는데, 그 덕분에 스코틀랜드인을 포함한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정착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둘째로, 남북아메리카에서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한 것은 브라질이었는데 네덜란드인들이 브라질에서 쫓겨나자 바베이도스 섬으로 그 재배가 옮아갔고 이 섬은 영국령 카리브 해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플랜테이션 식민지가 되었다. 셋째로, 네덜란드인들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노예무역을 시작했다. 플랜테이션을 잃은 후에도 네덜란드인들은 노예무역 상인으로 이 지역에 남으려고 했지만 1675년이 되면 네덜란드의 우위가 끝나고 새로 설립된 영국 왕립 아프리카 회사에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네덜란드의 헤게모니는 1651년에 처음으로 도전을 받는다. 네덜란드인들이 사실상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이 자국의 교역을 증대시킬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즉 영국 상인에 대한 국가적 지원과 외국 상인에 대한 국가의 제약이 그것이다. 후자의 정책을 취하여 네덜란드의 반감을 살 것을 두려워한 영국인들은 1621년에 규제회사(regulated company)의 형태로 전자의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영국 부르주아지층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영국은 1651년에 항해조례을 통해서 후자의 정책을 취했다. 항해조례는 영국에 들어오는 상품이 영국의 선박이든지 생산국의 선박이든지 어느 한쪽의 선박으로 운반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 법령은 ‘네덜란드인들의 중계무역’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 항해조례는 영국이 대서양 무역에서 네덜란드를 밀어내고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항해조례에 대한 네덜란드인의 반발로 1652년에 두 국가간의 전쟁이 발발하였고, 1667년의 브레다 조약(Treaty of Breda)에서 영국은 네덜란드의 뉴암스테르담을 획득하였고 이를 통해서 네덜란드의 밀수 무역을 어느 정도 막음으로써 자국의 이익으로 전환하였다.
1672년 네덜란드의 몰락이후 대서양 무역의 패권은 프랑스와 영국 간의 다툼으로 압축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대서양 무역의 양은 프랑스보다 영국 쪽이 훨씬 많았다. 데이비스에 의하면 17세기에 서반구에 새로 생긴 개별 식민 단위는 28개였는데, 그중 네덜란드가 3개, 프랑스가 8개, 영국이 17개였다. 1700년 당시 영국인 식민지 인구가 노예를 포함하여 35만~40만 명이었던 데 비해서 프랑스인은 7만 명에 불과했고, 당시 번영하고 있던 카리브 해 식민지들에서 영국인들의 수는 프랑스인들보다 두 배나 많았다. 17세기의 주요 재수출무역 즉 중계무역은 영국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항해조례에 의해서 영국 운송업자들은 성공리에 자국의 식민지 무역을 독점했으며, 영국인들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의 밀수에도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영국은 무역이 필요했기 때문에 많은 선박이 필요했고, 그 다음에는 해운 관련품, 해운 관련품들을 구매하기 위한 생산품, 늘어나는 제품을 구매하기 위한 식민지 구매자가 필요했다. 선박이 많아지면서 한쪽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교역과 선박의 활용성 저하에 대한 문제점의 대책으로서 네덜란드인들이 기초를 만들어두었던 삼각무역이 대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밀수와 큰 식민지 규모로 인해서 재수출 무역의 양적 규모가 팽창하였고, 정주 식민지의 효용이 높아지게 된다. 영국인들은 또한 아시엔토권을 확보함으로써 노예무역의 독점을 이루게 된다. 이로써 영국의 삼각 무역은 계속해서 발전하게 된다.
2. 밀무역에 의한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부의 누수
17세기 초까지 카리브 해 여러 섬들은 대부분 유럽인들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에스파냐인들은 주로 트리니다드 섬과 대(大)안틸레스 제도(쿠바, 자메이카, 히스파니올라, 푸에르토 리코)의 큰 섬들을 주로 장악해왔다. 그들은 약간의 소를 사육하고 얼마간의 식량용 작물과 약간의 담배와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하지만 에스파냐인들의 주된 관심은 아메리카에서 그들이 주된 관심을 두고 있던 지역으로 가는 무역로를 지배하는 것뿐이었다. 1604년에서 1640년에 걸쳐소 돌연 영국인들, 프랑스인들, 네덜란드인들이 카리브 해를 침략해서 군소 제도들을 장악했다. 1625년에서 1654년에 걸쳐서 네덜란드인들이 브라질의 일부 지역을 장악했고, 1655년에는 영국인들이 에스파냐인들로부터 자메이카를 빼앗았다. 1629년에는 일부 프랑스인 버커니어들(Bucaniers)이 히스파니올라에서 조금 떨어진 토르투가 섬에 상륙하여 1659년까지 히스파니올라 섬을 확고하게 지배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 큰 섬의 서쪽 절반 지역, 오늘날의 아이티로 이동했다. 이후 1650년대부터 1763년까지 식민지 분할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17세기 초에 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국가들이 카리브해 지역으로 침입했으며, 17세기에 카리브해 지역은 해적과 버커니어들의 피난처가 되었는가?
에스파냐는 16세기이후로 ‘교역’의 유연한 메커니즘보다는 관료주의적 경직성이 팽배하게 된다. 1619년 톨레도 대학의 성서학 교수이자 에스파냐 중상주의 사상가였던 산초 데 몬카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서인도 제도로 향하는 교역의 10분의 9는 외국인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어서, 이들이 서인도 제도를 소유하고 황제는 이름뿐이다.” 중상주의의 시대인 17세기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중상주의 국가에 끼지 못했고 또한 그럴 능력도 없었다. 식민지로부터의 이익은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에 의한 밀무역으로 누수했으며, 금과 은 또한 영국 등의 핵심부 국가로 빠져나갔다. 영국인들과 프랑스, 네덜란드인들은 손에 넣기 쉬운 지역을 식민화한 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무역을 장악함으로써 그들이 직접 식민 지배를 했을 경우의 이익을 얻고자 하였다. 17세기에 이를 실현하는 주된 메커니즘은 밀수였다.
1640년경에 에스파냐 당국은 카리브 해 지역과 중앙아메리카 연안지역에서 부카니에(버커니어)를 근절하기 시작했다. 이로인해서 버커니어들은 해적이 되었고, 특히 자메이카의 영국과 쿠라사오의 네덜란드인, 생-도맹그(히스파니올라 섬의 서부)의 프랑스인들이 ‘이들에게 노획물의 안전한 판로’를 제공하였다. 밀무역의 중심은 자메이카였다. 영국은 크롬웰의 치세기에 에스파냐로부터 자메이카를 빼앗았는데, 에스파냐의 무역독점을 깨는 방법으로서 크롬웰은 약탈에 의존하였다. 해적을 이용하여 영국은 비교적 용이하게 밀무역을 성공할 수 있었다. 밀무역의 규모에 대해서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16세기이후 브라질의 설탕 플랜테이션으로 인한 상당한 자본이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로 흘러들어 갔을 것이다.
17세기가 막 끝나갈 무력, 약 1693년에서 1695년 사이 브라질에서 금이 ‘발견되었다.’ 이때부터 금 수출 붐이 일기 시작했고, 공식적인 추계에 따르면 금 수출량은 1699년에 725kg에서 최고점에 달한 1712년에는 14,500kg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박서는 이는 단지 실제 수출량의 1/10에서 1/3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밀수되었다고 추정한다. 왜 하필 브라질의 금이 그때에 발견되었는가? 빌라르는 브라질의 금주기가 시작된 시점과 1689~1713년까지 벌어진 전쟁으로 영국에서 통화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시점이 일치한다고 지적한다. 영국의 상업 팽창과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금의 발견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고 그는 주장한다. 즉 팽창이 새로운 광산의 개발을 요구하거나 장려함으로써 ‘금 주기’가 시작된다. 밀무역은 거의 공공연하게 이루어졌고, 오히려 사실상 포르투갈 경제를 전혀 통하지 않고 브라질의 금을 영국으로 옮기기 위해서 체계적으로 조직되었다는 사실이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해준다.
3. 대서양 무역으로 인한 영국의 자본축적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는 잉글랜드를 강력하게 만든 것은 엘리자베스 시대부터 모든 정파, 모든 사람들이 상업을 중시해야 할 필요성에 동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혁명 당시 왕을 처형한 영국의회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외 무역을 확보하는데 혈안이 되었으며, 찰스1세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항해조례(1651)를 통과시켰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상업적 동기의 대서양 무역은 제국 팽창의 초기 단계부터 두드러진다. 서인도제도의 담배경작이 성공하기 시작하면서 붐이 일었다. 담배 경작은 상당한 수익을 가져다주었는데, 경작에 필요한 노동력은 초기에 잉글랜드나 아일랜드로부터의 노역 계약에 의해 공급되었다.
담배무역이 1650년대 절정에 오른 이후 가격이 쇠퇴하고 그 후 설탕재배로 바뀌었다. 설탕재배로 전환했을 때 서인도 제도에는 25,000명의 잉글랜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1660년대에는 무려 40,000명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설탕은 담배보다 경작이 어려웠고, 추수가 단기간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더욱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노동력의 문제는 아프리카로부터의 노예수입으로 해결하였고, 1660년대가 되면서 영국령 서인도제도에는 백인 정착민보다 흑인 노예들의 수가 더 많아졌다. 영국인들은 해운력을 바탕으로 전세계의 노예무역을 점점 지배하게 되었는데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영국 정부는 노예무역을 정부가 보조해야 한다고까지 생각할 정도로 노예 공급을 중시하게 되었다. 18세기 설탕무역의 주도권이 잠시 영국에서 프랑스로 넘어갔으나, 영국은 이를 노예무역으로 메꾸었다. 아프리카 노예무역에 관련된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처음에는 당시 그들의 역할에 걸맞게 네덜란드가 가장 강력했다. 핵심적인 시장은 에스파냐의 식민지들이었고, 이 쟁탈전은 1662년에 부활된 아시엔토권을 둘러싼 경쟁이었다. 영국은 왕립아프리카회사가 1663년에 시작된 노예무역을 독점했다. 그런데 1701년에 에스파냐왕이 아시엔토권이 프랑스령 기니회사로 넘어가게 되자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크게 분노하게 된다. 이는 에스파냐왕위계승 전쟁의 원인 중 하나이다. 위트레흐트조약은 부르봉 왕조의 에스파냐 왕위 계승을 인정했지만 아시엔토권은 영국에 넘겼다. 남해회사가 30년동안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 매년 4,800명의 노예를 수입하여 판매할 권리를 얻었다. 게다가 남해회사는 매년 한척의 선박과 500톤의 상품을 보내어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 판매할 수 있었다. 영국은 1713년에 아시엔토권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는 프랑스의 무역을 심각하게 방해했으며 영국의 에스파냐와의 무역에서 이윤을 끌어내었다.
17세기 중엽의 내전으로부터 명예혁명(1688)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겪은 영국은 명예혁명이후 비교적 안정된 국내 정치제도를 이룩하고 강력한 해상력을 바탕으로 상업적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해외로 관심을 돌렸다. 17세기에는 소위 상업혁명에 의해 런던이 세계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17~18세기에는 중상중의원칙 하에서 무역과 해운을 통해서 자본을 축적했다. 항해조례는 영국 상인에 의한 영국 식민지 대서양 무역 독점권을 확보했으며, 왕정복고 후에 찰스 2세는 해군과 상업을 지원하기 위해 그리니치 천문대를 설립(1675)했으며, 윌리엄 3세는 추밀원 위원들로 구성된 무역 및 식민성(1689)을 발족시켰다.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 무역의 기득권 확보를 위해 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들이 식민지를 획득하고 무역에서의 기득권 확보를 위해서 혈안이 되었다는 사실을 거꾸로 살펴본다면, 식민지와 대서양 무역이 이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4. 박지향,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에 나타난 견해
한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서의 저발전과 상대적 후진성의 원인을 16~18세기 중상주의 시대에 형성된 국제무역의 불리한 조건에서 찾으려는 월러스틴이나 저발전 학파의 주장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이 때 행해진 원자재로부터 2차 및 3차 산업으로의 자원의 재분배의 양태가 주변부 사회에서 자유시장의 발전을 막음으로써 근대적 경제로의 발달을 저해했다고 주장해왔다. 저발전 학파의 주장을 정리하면, 우선 서유럽 일반, 특히 영국의 장기적 경제 성장은 지구적 규모에서만 의미 있게 분석될 수 있다. 또한 이 국제 경제의 팽창은 몇몇 중심부 국가의 자본가들에게 막대한 이윤을 집중시켜 주었다. 그리고 원료의 공급지 및 제품의 시장으로서 식민지가 매우 중요했고, 식민지에서 창출된 이윤이 산업혁명 단계의 자본을 제공하는 데 결정적이었으며, 이 관계는 산업화 이전에 이미 성립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대로 중상주의 시대에 국제 무역에서 나온 수익금이 유럽과 주변부 사이에 불공평하게 분배되었음은 사실이다. 문제는 시장과 자원 공급이라는 맥락에서 서유럽이 ‘얼마나’ 주변부와의 교역(여기서는 대서양 삼각 무역을 중심으로 살펴본다.)에 의존하였는가이다.
세계체제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1600년~1750년에 걸쳐서 북동부 브라질에서 메릴랜드까지 뻗어 있는 광의의 카리브 해 지역의 주변부가 핵심부 국가에서 생산될 수 없는 상품들(설탕, 담배, 금)만을 생산하였고, 이것을 토대로 핵심부 국가인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가 경제적 이익을 나누어가졌다고 하였다. 즉, 유럽을 중심부로 하는 핵심부와 그 아메리카 식민지, 아프리카 등의 주변부들이 유럽-아메리카-아프리카를 축으로 하는 삼각무역, 소위 ‘세계경제체제’ 속에 편입되어 있고, 잉여가치가 주변부에서 핵심부로 흘러가는 메커니즘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축적된 자본만이 유럽의 경제 발전과 산업 혁명을 설명할 수 있는 분석틀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양을 연결하는 망이 16세기에 만들어졌지만, 중상주의 시대의 국제적 상업을 진정한 의미의 세계경제로 구체화하는 것은 현재적 개념을 역사에 잘못 적용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교통, 통신상의 제한 때문에 유럽의 전통사회와 식민지의 경제 관계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오히려 산업화로 인한 기술혁신이 있은 후에야 서유럽은 세계 여러 영역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기술혁신이 일어나고 있던 18세기 전반기에 영국의 식민제국은 매우 빈약하였다.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는 1720년경 인구가 50만에 불과하였고, 봄베이, 마드라스 등 전 세계에 퍼져있는 식민지들의 총 인구도 30만을 넘지 않았다. 이 때 포르투갈과 스페인 제국의 인구는 합해서 1천만을 넘었다. 즉, 영국의 경우 삼각무역의 축인 영국과 식민지 간의 이익보다는 영국과 다른 유럽 국가들 간의 교역이 더 중요했다는 측면이다.
월러스틴파의 주장과는 달리 산업화 이전에 해외무역은 유럽의 경제활동에서 단지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산업화 이전인 1780~1790년 유럽총생산의 4%정도만이 국경선을 넘었고, 1%미만만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지로 팔려나갔다. 이들 지역으로부터의 수입도 수출보다 그리 높지 않았다. 주변부로부터의 수입은 18세기후반에도 국민총생산의 10~15% 정도에 그쳤다.
영국이 노예 자체와 그들의 노동력으로 창출된 잉여 가치를 거래하는 삼각 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면, 영국인들의 생활수준은 크게 향상되어야 논리적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유럽의 전통사회는 생활수준과 소비 정도에서 식민지와 큰 차이가 없었다. 영국의 일인당 차 소비량은 1700년 10g, 1790년 520g, 1910년에 2,350g으로, 산업혁명 이후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에서의 설탕 소비는 1700년 0.5kg, 1910년에야 17kg이 되었다. 이것은 산업화의 ‘결과’ 생활수준이 향상하여 소비가 늘 때가 되어서야 거대한 식민 제국과 무역이 이익이 되었으며, 중심부와 주변부의 경제적 차이는 산업혁명에 의한 근본적 변화가 있은 후에야 부각되기 시작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식민지 경제와 대서양 무역을 재평가하는 학자들은 이것이 유럽의 경제발달에 기여했다 해도 그 기여도는 매우 낮았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5.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세계의 시간 下』에 나타난 견해
페르낭 브로델의 견해는 앞서 요약한 『제국주의』류 같은 견해에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유럽세계가 18세기 말 이후 산업혁명을 이룩하여 세계사에서 패권을 잡을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으로 그 자신의 발전에 필요한 자양분과 힘의 많은 부분을 전 세계로부터 끌어왔다는 점을 들고 있다. 또, 그는 유럽이 진보해가는 도상에서 부딪친 여러 과제들 앞에서 자신의 원래 능력보다 더 상승할 수 있게 된 것도 유럽 외부 세계로부터의 가외소득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럽 세계가 자양분과 가외소득을 끌어들인 자기 외부의 세계로는 여러 곳(예를 들어, 인도나 아메리카 등지)을 들 수 있겠으나 그 중 노예무역과 관련된 대표적인 곳은 바로 아메리카이다. 브로델은 아메리카 대륙과 노예들에 대한 유럽세계의 착취와 그에 따른 유럽세계 내의 잉여의 축적을 역사적인 자료들을 바탕으로 규명하고 있다.
유럽인들이 처음 아메리카 “신대륙”에 발을 내딛었을 때 그들에게 가장 먼저 닥친 것은 바로 엄청나게 넓은 공간의 문제였다. 일반적으로 대지가 넓을수록 땅값은 내려가고 사람의 가치는 올라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구래의 쇠사슬인 농노제와 노예제는 공간이 지나치게 넓은 까닭에 이곳에서 저절로 재생하게 되었다. 지나치게 넓은 아메리카 땅에서 사람의 부족은 항구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당시 막 형성, 개발 중이었던 아메리카로서는 새로운 경제를 발달시키기 위해서 아주 싸거나 아예 공짜인 말 잘 듣는 인력을 많이 얻을 수만 있다면 이상적일 것이었다. 이에, 이 광대한 땅에서는 여러 종류의 예속이 연이어지면서 차례로 사람들을 짓밟았다. 처음에는 현지의 인디오들이 그 다음에는 백인인 유럽인들이 마지막으로는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아메리카에서 시련을 당했다.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진출 초기에 예속적인 인디오들이 흩어지지 않고 그나마 유지될 수 있었던 곳은 인구밀도가 높고 사회의 응집성이 높았던 이전에 아스텍 제국과 잉카제국이 있었던 곳이었다. 잉카제국과 아스텍 제국의 사회적 응집성은 인디오들로 하여금 스페인에 대한 복종과 순종을 가져다주었다. 따라서 스페인은 그들이 정복대상으로 삼았던 이 인구밀집지역에서 인디오들을 쉽게 장악하여, 그들을 강제적인 광산 채굴 등의 방법으로 착취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과정에서 인디오들은 가공할 인구의 감소를 경험하게 되었다. 결국 노예 제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인디오들은 스페인 국왕을 위해서 신대륙에 대한 광대한 초기의 착취를 자기들의 어깨로 감당해낸 것이다. 이들은 광산 채굴, 농업생산, 노새나 라마를 이용한 카라반 수송 등의 일을 담당했다. 이들이 없었더라면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유럽대륙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원주민사회가 응집되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진 종족단위로만 존재했던 곳(브라질, 혹은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에서는 백인들 자신의 힘이 필요했다. 17세기말까지 영국,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식민지 개발에 앙가제, 혹은 인덴처드 서번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크게 의존했다. 이들의 운명은 흑인 노예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종신노예가 아니었기 때문에 4~7년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고, 자신만의 토지를 가질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주인들은 그들을 더욱 가혹하게 다루고 착취하였다. 주인들은 앙가제나 서번트들에 대해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기만 하면 되었다. 이러한 노동력의 착취를 통해 영국, 프랑스는 그들의 식민지를 개척할 수 있었고 이 식민지는 그들의 잉여와 자본축척의 기반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앙가제나 서번트의 잉여와 자본축적에의 공헌이 여기에만 그쳤던 것은 아니다. 이들의 이민은 진짜 “사람 장사”였다. 이 교역은 흑인 노예무역과 가장 비슷한 것으로서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수익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앙가제와 서번트들은 그들의 값싼 노동력을 식민지에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대상인들에게도 엄청난 이윤을 제공했던 것이다.
백인들의 아메리카에서의 예속은 인디오들이 부족했기 때문이고, 아프리카로부터 흑인들이 대규모로 유입된 것도 인디오들과 유럽으로부터의 이주민들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초래한 것은 인종적인 요인보다는 경제적인 요인, 즉 돈이었다. 백인 “노예”들이 흑인들에게 그들의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들이 시간제로만 노예였고, 이들의 유지비용, 특히 식비, 이 흑인들에 비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백인들에 비해 “저렴한” 흑인들은 인디오들 보다 더 강한데다가 유순하고 쉼없고 힘이 좋기 때문에 그들의 노동은 가장 싸고 효율적이었으며 곧 사람들이 흔히 찾는 도구가 되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플랜테이션은 바로 이러한 흑인 노예의 등장 때문에 성립될 수 있었다. 대개 사탕수수 재배로 인해서 형성된 이런 플랜테이션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금이 많이 드는 자본주의적인 사업이었으며, 고정자본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노동력과 원재료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고정자본 중에는 흑인 노예들도 들어 있었다. 흑인 노예들은 그들의 엄청난 노동력을 거의 무상으로 유럽인들에게 제공함으로서 유럽에 플랜테이션을 통한 항구적인 수입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체가 유럽인들이게는 하나의 “자본” 이자 가장 중요한 재산 이었던 것이다.
영국의 경우를 예로 들어볼 때, 플랜테이션 농장의 소유주들은 보통 사업가들로 그들이 농장에 투자하는 자본은 대개 본토의 은행에서 대부 받은 돈이었다. 이들은 여러 면에서 영국에 커다란 재정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이들은 자본의 대부에 상당히 높은 이자를 지불했고, 식민지에 나가 있는 이주자들이 영국에서 만든 제품을 더 많이 소비하도록 만들었다. 이 식민지 농장들이 그 소유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수익성이 있었던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고 하겠다. 흑인노예들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농장 안에서 쉴 새 없이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와 메릴랜드에서 백인 소농들이 담당하던 담배 재배가 1663~1699년 사이에 수출이 6배 늘어나는 등 활기찬 발전을 보일 수 있었던 것도 백인노동이 흑인 노동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또 17세기 말에 시작된 브라질의 사금채취도 수천 명의 흑인 노예들이 도입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례들로 볼 때 흑인 노예들이 유럽인 들에게 제공한 노동력은 대규모의 플랜테이션과 사금채취와 같은 일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유럽에 막대한 부를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부가 유럽지역에서의 산업혁명을 위한 자본으로 즉시 전환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에 막대한 도움을 주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흑인 노예들은 그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서 유럽에 막대한 부를 지속적으로 제공한 것 외에, 자신들이 거래되는 과정 그 자체에서도 유럽에 많은 이윤을 제공하였다. 영국의 경우, 왕립 아프리카 회사는 1680~88년 사이에 노예 7만 명을 거래하였는데 주주들에게 각각 300% 배당을 돌려주었다. 또 리버풀의 노예 무역상은 연간 110만 파운드의 이익을 올렸으며 로이드사는 노예 선박 플랜테이션 보증으로 이윤을 축적하였다고 한다. 흑인 노예들은 대부분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를 잇는 삼각 무역에 의해 노예 시장에 공급되었다. 서론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삼각무역은 크게 3단계로 나뉘어 이루어 졌는데, 이 삼각무역에서 유일하게 손해를 본 사람들은 흑인노예들 뿐이었다. 삼각무역의 1단계는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노예 상인들이 흑인노예를 구하러 가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노예는 유럽의 상품들과 교환되었다. 2단계는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노예들을 수송하여 매매하는 것이었다. 노예들은 서인도제도, 브라질, 북미 동부해안의 13개 식민지에서 주로 매매되었고 일부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멕시코, 페루, 콜롬비아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들은 현지에서 ‘인도’라는 단위로 묶여서 상당히 비싼 값에 팔려나갔다고 한다. 3단계는 아메리카에서 노예에 대한 대금으로 받은 열대작물들을 유럽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노예 상인들이 싣고 온 커피와 설탕과 같은 열대작물들은 영국, 프랑스 등의 노예무역을 주도했던 국가들에서 모두 소비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유럽의 다른 지역, 그중에서도 북부와 중부유럽으로 再수송되었다. 이로써 18세기 프랑스와 영국 등의 대외무역은 대단한 흑자를 기록하였다. 이는 당시 프랑스 총 수출액의 5분의 1을 차지했던 것은 커피였다는 데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식민국의 입장에서 볼 때 식민지는 값비싼 수입품들을 들여오는데 비용을 절감할 수 있도록 했을 뿐 아니라 국외의 금, 은 등을 거두어 들여 자국의 통화를 증강시키기도 했다. 이와 같이 식민지 지역을 포괄하는 삼각무역은 유럽의 식민국들에게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었고 그 수익의 한가운데에는 헐값에 사들여져 비싼 값에 팔릴 수 있었던 노예라는 핵심적인 상품이 있었다.
그러나 노예교역을 포함하는 삼각무역에서의 이윤을 일반화시켜 그것이 유럽 전체에 부를 가져다주었다고 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이윤은 소수에게 돌아간 반면 열대산물 들을 선호하는 비용과 사탕수수 등의 산업과 관련한 행정과 보호의 비용은 유럽의 소비자들과 납세자들의 부담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랄프 데이비스의 지적에 의하면 이것은 오히려 정부와 특수한 이익 집단만을 살찌우게 하는 장치였다. 그렇다고 해서 노예제도와 그를 이용한 플랜테이션이 유럽의 자본축적과 전혀 무관하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바나지의 견해를 인용하자면 이러한 사탕수수 산업은 유럽의 중심부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유럽의 부 때문에 가속화되었으며 그 부의 일정 부분은 다시 본국의 투자자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따라서, 비록 노예무역, 노예제, 플랜테이션이 유럽 전체의 부를 즉각적으로 확장시키지는 못했을 수도 있으나 이것이 특정한 자본주의적 자본가 계급을 키워 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Ⅵ. 결론
글 전반부에서 살펴본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이나 라틴아메리카의 사탕수수농업이 잉여가치를 창출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이익이 영국이나 여타 국가의 부로 직결되지 않았다는 것이 최근 학계의 통설이다. 앞서 살펴본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은 그러한 최근 학계의 통설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네덜란드와 프랑스, 영국 등으로 대표되는 유럽세계는 노예무역과 설탕무역으로 대변되는 대서양무역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무역에서 경제적 이익이 발생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동시대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아담 스미스의 견해를 살펴보자. 그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식민지화한 일이 먼저 아메리카와 교역한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등의 산업을 발전시켰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사실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직접 교류하지 않은 독일의 몇몇 도시의 경우에도 중계무역을 통해 자국생산물을 식민지로 보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 식민지는 그 나라 산업발달에 일조하였다는 것이다. 그 외 자국의 물품을 아메리카로 들여보내지 않은 폴란드와 같은 국가의 경우에도 식민지의 혜택을 입은 유럽 국가들과 교역함으로써 새로운 상품을 풍부하게 공급받았을 것이고, 결국 같은 효과를 얻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대서양 교역으로 축적된 상업자본이 직접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유럽을 자극하였고 봉건적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사회로 넘어가던 이행기의 변화를 가속화시켰을 것이다. 새로운 사업이 형성되면서 이로 인한 고용 창출과 새로운 활기를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서양 교역이 국가 전체에 이득을 준 것이 아니라 일부 자본계층에게만 이득을 주었고 결국 국가 전체로 보아서는 손해로 볼 수 있다는 최근의 견해에 대해서도 우리는 다시 살펴볼 수 있다. 실제 사실을 살펴보더라도 국가 전체보다는 일부 계층에게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영국의 경우, 자본투자자를 사회계층별로 살펴보면 제조업자들이 해외 식민지 투자에 가장 관심이 없었던 반면, 지주 등의 엘리트층은 이에 가장 열성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메리카에 건설된 식민지의 투자가들은 전국에 퍼져있는 엘리트층과 런던 거주의 기업인들, 특히 상인을 포함하는데, 이들 ‘신사적 자본가들(gentlemanly capitalists)'이야 말로 영국의 해외팽창과 대외무역을 통해 획득한 이윤의 가장 큰 수혜자였다.
케인과 홉킨스는 영국의 해외팽창이 ‘긴 18세기(1689~1815)’에 시작되었다고 본다. 1688년의 명예혁명은 새로운 정치체제를 출발시켜 상업적 기업 취향을 가진 지주층 엘리트의 과두제를 성립시켰고, 1690년대에 일어난 소위 금융혁명을 통해 결탁한 금융자본의 중심지 런던 시와 잉글랜드 동남부 지역의 부유한 지주 및 투자가들은 18세기를 통해 영국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이들 신사적 자본가들은 지연과 사회적 관계로 인해 정치적 엘리트와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토지와 돈의 결합’이 18세기에 제국을 추구하고 획득하고 거기서 이윤을 얻게 했다.
이런 신사적 자본가들은 다른 사회계층보다 더 많이 식민지 플랜테이션에 투자함으로써 대서양 무역으로부터 더 많은 수익을 챙겼다. 전체로서의 영국은 제국의 식민지 경영과 대서양 무역으로부터 이익을 얻지 못했지만 소수 투자가들은 이익을 얻었고, 부담은 국민 다수에게 이전되었다.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조세제도는 오히려 사회 하층계급에게 불리했는데, 1903~1906년 연수 1,000파운드 이상의 고소득자들은 국민 총소득의 40~45%를 차지하면서도 전체 세수입의 11%만 부담하였다. 결국 유럽의 해외팽창과 대서양 삼각무역은 대다수 납세자로부터, 또한 식민지 원주민과 아프리카인들로부터 식민지에 투자한 유럽의 소수에게로 부가 집중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16~17세기의 대서양 교역이 유럽 국가 전체에 큰 이득이 아니었다는 결론으로 과연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현재의 관점에서 국가 전체의 이익, 국가 전체의 경쟁력이라는 잣대에 맞춰 해석하는 것은 올바른 해석 방법이라고 보기 어렵다. 자본은 언제나 집중되어 가는 과정을 거쳐 왔지 전체로 분배되는 과정을 거쳐 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발전의 당연한 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이것이 국가 전체의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손해였다는 견해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또 일부 계층으로의 자본 축적은 사회 전체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새롭게 자본을 축적한다는 것은 정치적 역량도 축적한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이 계급은 일정한 권력을 가진 정치적 계급으로 등장하는데 Eric williams나 J.M.Blaut 같은 학자는 이 대서양 교역이 없었다면 의회 민주주의나 부르주아 혁명이 가능했겠느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경제구조는 제로섬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므로 한 쪽의 손해가 반드시 다른 한 쪽의 이익을 의미한다거나, 역으로 한 쪽의 이익이 다른 한 쪽의 손해를 의미한다는 주장은 타당성을 갖기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해와 이익이 생겨난 현상 자체에 대한 숙고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며, 그 과정에서 벌어진 착취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대서양 교역은 유럽의 자본주의 발전의 가속화에 힘을 실어주었던 반면에 비 유럽 국가들의 자본주의로의 발전을 저지, 저개발이 가능한 토양을 만들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대서양 삼각무역에서 유럽이 저지른 죄과를 덜어주느라 애쓴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 최근의 논의에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이 제시하는 수많은 통계자료는 확실히 추정에 근거한 과거의 논의들보다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인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도출될 수 있고,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는 숫자들이 바로 통계이기 때문이다.
대서양 무역과 그 효과에 대한 최근 유럽, 특히 영국학계의 논의를 지켜볼 때, 100년 뒤에 기록하는 역사가들은 혼돈 속에서 진정한 이익을 감싸는 것을 지속하기 위한 핑계가 없다는 Eric williams의 말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역사는 결코 현재의 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해 쓰여져서는 안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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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사] <원거리무역> 경제학과, 20040527, 엄윤주.
1. 신항로의 개척이 유럽사회에 끼친 영향
유럽의 새로운 시대-근세로의 전환(신항로개척)
중세의 암흑기가 끝나고 르네상스가 시작된 시대를 우리는 서양의 근세라고 한다. 이 때에는 여러 가지 혁명적인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지리적으로 미지의 영역에 대한 탐색항해(探索航海)를 시도한 것은 고대로부터 적지 않았지만, 지리상의 발견시대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처럼 활발하고 대규모적인 시기는 일찍이 없었다. 즉, 15세기 초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의 아프리카 항로 개척을 시작으로 하여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거쳐 16세기에서 17세기 초에 이르는 유럽 각국민의 탐험 및 항해시대를 가리킨다. 이 시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산물이 유입되기 시작하고 그 결과 유럽사회는 엄청난 변화가 생기게 된다.
가. 신항로의 개척-새로운 지리상의 발견
대항해 시대는 1415년 포르투갈의 왕자 엔리케가 중심이 되어 서아프리카 연안의 탐험을 위한 항해로 시작되었다. 그의 항해 동기는 서아프리카의 모로코 상인이 행한 소금 ·황금 ·상아(象牙) ·노예 등의 무역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동시에 아프리카 대륙 내지는 아시아의 어디엔가 있다고 믿은 전설적인 그리스도교왕 프레스터 존의 나라를 발견하여 그들과 동맹을 맺어 이슬람교도의 우세를 꺾으려 한 정치 ·종교적인 의도도 강하게 작용하였다.
엔리케가 파견한 최초의 탐험선은 15년 카나리아 제도(諸島)에까지 항해하여, 이후 10여 년 간은 마데이라 ·포르토산토 ·아조레스 등 대서양 제도 및 그 근해의 답사가 진행되었지만, 1434년에 비로소 서아프리카의 보자도르곶(串)을 회항(回航)하였고, 그 이후 세네갈강 ·제바강까지 남하하였다. 엔리케 왕자가 죽기까지는(1460) 코나크리 부근까지의 아프리카 서해안이 밝혀졌다.
1469년 포르투갈인의 항해가 다시 시작되어 상아해안 ·황금해안 등에 탐험선이 진출하였다. 1482년에 장래 노예무역의 중심지가 된 에루미나에 성채(城砦)가 구축되고, 같은 해 콩고 ·앙골라 지방에 발견기념비가 세워졌다. 이어 1487년말부터 다음해 초까지 B.디아스가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희망봉(希望峰)을 넘어 그레이트피시강까지 동진하여 인도양에 이르는 항로를 열었다.
디아스의 업적을 계승한 것이 바스코 다 가마로서, 그는 1497년 7월 8일 리스본을 출발하여 베르데곶 제도(諸島)를 경유하여 11월 초 희망봉 근처의 센트헬레나만에 도착한 뒤 동아프리카의 여러 항구를 경유하여 1498년 5월 20일 인도의 말라바르 해안의 캘리컷에 입항하였다. 인도항로 발견을 기뻐한 포르투갈은 대규모 선대(船隊)를 파견하여 힘으로 인도양의 이슬람 상인의 세력을 제압하고, 1508년 2월 디우 앞바다에서 이슬람의 연합함대를 격멸하였으며, 2년 후 인도의 고아를 점령하고 나아가서 1511년에는 동남아시아 무역의 요충인 말라카 공략에 성공하였다.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 직후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4회에 걸쳐 행해졌지만, 1492년의 제1회 항해에서 바하마 제도의 산살바도르섬을 발견한 데 이어 쿠바 ·히스파니올라 ·소(小)앤틸리스 제도 ·트리니다드섬 ·베네수엘라 ·중앙 아메리카 해안 등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콜럼버스는 이들 지역이 독립된 대륙 및 그에 부속된 섬들이란 것을 알지 못하고, 인디아스로 확신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생각한 인디아스란 현재의 인도보다 훨씬 넓은 지리적 관념으로 동아시아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콜럼버스의 관념을 수정하여 아메리카가 신대륙이라는 것을 주장한 사람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이다.
아메리카 대륙 발견 후에도 에스파냐인은 대륙 그 자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히스파니올라섬을 근거지로 하여 동양의 바다로 빠져나가는 해협을 찾기에 주력하였다. 따라서 멕시코만(灣) ·카리브해 등에 대한 연안항해가 시도되었으나, 해협을 찾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점차 남아메리카 남해안에 대한 항해가 계속되어 1515년에는 솔리스가 아르헨티나의 라플라타 지방에까지 진출하였다.
그 당시 포르투갈인 마젤란(마갈랴잉시)은 남아메리카의 남쪽 끝에 해협이 있을 것을 확신하여, 1519년 9월 20일 에스파냐를 떠나 남아메리카의 동쪽 연안을 따라 남하하여 1520년 10월 21일 드디어 해협을 발견하였다. 11월 28일 해협을 통과한 마젤란 선대(船隊)는 태평양을 천신만고 끝에 횡단하여 1521년 3월 16일 필리핀 제도의 사마르섬에 도착하였다.
그 직후인 4월 26일 마크탄섬에서 원주민과의 교전 중에 마젤란은 전사하였으나, 부하들은 2척의 배로 보르네오를 경유하여 향료제도(香料諸島:몰루카 제도)에 이르렀으며, 그 중 1척인 빅토리아호는 서진(西進)을 계속하여 희망봉을 돌아 1522년 9월 6일 산루카르항(港)에 귀항함으로써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를 완수하였다.
아메리카 대륙 내부에 대한 관심은, 콜럼버스의 발견 후 10여 년 동안은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파나마 지방을 탐험한 발보아가 남아메리카 대륙 내부에 황금국(黃金國)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1513년 파나마 지협(地峽)을 횡단하여 태평양 연안에 도달한 결과, 선단(船團)을 만들어 남진할 계획을 세웠다. 발보아의 이러한 의도는 본국으로부터 파견된 총독과 대립함으로써 반역죄로 1519년에 처형되어 좌절되었다.
마침 같은 시기에 우연한 기회에 쿠바섬에 식민하였던 에스파냐 사람들이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를 발견하고 마야의 높은 문화권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부터 중부 아메리카 내부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518년 후안 데 그리할바의 항해로 멕시코 중앙고원에 있던 아스테크 왕국이 알려져, 쿠바 총독은 코르테스를 지휘자로 하는 수백 명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코르테스는 1519년 11월 아스테크왕국의 수도에 들어가 통치자 몬테수마 2세를 포로로 했지만 원주민들의 저항을 받아 일시 패퇴하고, 1521년 다시 아스테크족을 공격하여 동년 8월 13일 완전 정복했다. 그 뒤 코르테스는 캘리포니아 방면과 과테말라 등에도 탐험을 하였다.
파나마 지방에서는 발보아의 유지(遺志)를 이은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1524년 이후 남아메리카의 태평양안을 항해하여 어려운 탐험을 계속하다가 1528년에 페루의 잉카 제국을 발견하였다. 그는 1531년 18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정복에 나서 다음해 11월 15일 안데스 고원의 도시 카하마르카에서 잉카 황제를 포로로 하여 안데스 대제국의 실권을 잡았다. 피사로는 다음해 11월 15일에 제국의 수도 쿠스코를 점령하였으며, 부하들을 칠레 ·에콰도르 방면에 파견하여 황금을 찾게 하였다.
피사로, 코르테스 이후의 아메리카 대륙 내부의 탐험은, 그들의 경이적인 발견에 자극되어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케사다의 치프차 왕국(현 콜롬비아) 발견(1537), 코르나도의 미국 남서부 탐험(1540??42), 오렐랴나의 아마존강 항하(航下:1541??42), 데 소도의 미시시피강 발견(1539??42) 등이었다.
인도항로를 발견한 포르투갈이 1511년 말라카를 공략한 직후 포르투갈 사람 안토니오 데 아부레우의 선대(船隊)가 향료제도로 향하였다. 또 그가 귀착(歸着)한 뒤 1513년에는 중국과 자바에도 선대가 파견되었다. 그의 선대 중에서 프란시스코 세란은 암보이나섬을 거쳐 향료제도 가운데 테르나테섬에 도착하고, 1520년에는 포르투갈군의 성채가 이 섬에 축조되었다. 그러나 1521년에는 마젤란 선대가 향료제도에 내항하고, 1526년에는 에스파냐측도 티도레섬에 요새를 축조하여 에스파냐 ·포르투갈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529년 사라고사 조약에 따라 향료제도의 포르투갈 귀속이 결정되자, 에스파냐는 멕시코 경유로 필리핀 제도의 경영에만 주력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아스테크 왕국을 정복한 뒤 멕시코로부터는 여러 차례 필리핀 방면으로 선대가 파견되었으나, 획기적인 의미를 가진 것은 1564년에 행하여진 레가스피와 우르다네타의 항해이다. 이들은 에스파냐 식민의 기초를 이루고 동시에 비로소 대권(大圈) 항로에 따라 필리핀에서 아메리카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하여, 뒤에 마닐라 항로를 여는 선구가 되었다.
에스파냐가 필리핀 식민지 건설에 주력하고 있는 동안에, 포르투갈은 동아시아 무역체계 확립에 힘쓰고 있었다. 포르투갈인은 1550년대로부터 마카오에 동아시아 무역의 근거지를 정하였다.
16세기 후반 에스파냐는 태평양의 항해 ·발견을 계속했지만, 1567년 페루를 출범하여 솔로몬 제도에 이른 멘다냐, 사르미엔트의 항해, 1595년 멘다냐, 키로스의 남태평양 항해 등의 지리학상의 의미가 크다. 키로스는 1605년에도 태평양을 항해하여 뉴헤브리디스 제도를 발견하고, 그 부하인 바에스 데 토레스는 토레스 해협을 통과하여 뉴기니가 섬임을 확인하고 마닐라까지 항해하였다.
이러한 대항해시대의 새로운 지리상의 발견은 서양인들의 생활 전반을 바꾸어 놓았다.
나. 신항로의 발견이 유럽에 끼친 영향
1. 상업혁명과 가격혁명
유럽의 인구는 다시 중세전성기에 있어서와 같이 급속히 성장하여 1600년경 약 9천만 명에 이르렀고, 한결 물가상승, 즉 일정한 화폐단위의 가치에 있어서 한결같은 하락은 점차적인 인플레이션을 형성했다. 이를 가격혁명이라 했다.
계속적인 인구증가는 식량부족현상을 일으키게 되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경작해야 하는데 그 토지가 일반적으로 비옥하지 못하여 생산비가 상당히 증가되기 때문에 자연히 식량가격이 대폭 앙등하게 마련이다. 영국의 경우 16세기에 약 4배나 상승하였다. 화폐량의 증가는 물가를 앙등시키는 또 다른 주요한 요인이 된다. 아메리카로부터의 금은의 대량수입은 화폐주조를 용이하게 하였고 따라서 화폐량을 대폭증대 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상승하는 물가와 증대되는 인구는 상업을 유리하게 한다. 상인들은 고객의 수가 증가하기 때문에 중요하였으며, 새로운 사람들은 성공의 희망 때문에 무역에 종사할 수 있었고, 상품의 재고는 시간이 흐름과 함께 가치가 상승했으며 꾸어온 돈은 더 쉽게 갚을 수 있었다. 국왕들이 더 많은 납세자들과 더 많은 군대에 의존하는 한 정부들은 유리했다.
근세 초기의 유럽에 있어서 경제적 여러 변화를 상업혁명(Commercial Revolution)이라 했다. 상업혁명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발흥과 도시 중심으로부터 국가 중심의 경제체제로의 이행을 의미하고 있다. 이 혁명은 정치혁명과는 달리 장기간에 걸쳐 완만하게 진행되었는데, 14세기경부터 시작되어 공장제 기계산업이 상업을 능가하기 시작할 때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1) 산업과 생산의 변화 - 길드의 해체, 자본주의의 발전
중세에 있어서는 도시와 그 인접한 지방이 경제단위를 형성했다. 동업 조합(길드) 안에서 조직된 장인(craftsmen)들은 그 지방의 수요를 위하여 공통된 물건들을 생산했다. 공장에서는 주인(master)이 자기의 "자본"(자기의 주택·작업대·도구·재료 등)을 소유하고 수명의 숙련공(journeyman)과 도제(apprentice)와 함께 하나의 직공으로서 일했다. 주인들은 약간의 자본을 소유했으나 자본가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다만 주문에 따라서 혹은 취미와 숫자를 미리 알 수 있는 고객들만을 위하여 생산했다. 이윤은 거의 없었고, 손해의 위험도 거의 없었으며 크게 혁신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무역의 범위, 즉 시장의 확대와 더불어 변했다. 중세에 있어서도 서로 생산되지 않는 물건을 교역하는 원거리무역은 어느 정도 있었다. 이러한 범주 안에서 점차로 많은 상품들이 나왔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물건을 팔게 되는 지방의 동업조합, 즉 길드 주인들은 그러한 상태에서는 영업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안 팔리고 남은 물건을 보관해 둘 자본이 없었고, 멀리 있는 고객들이 무엇을 얼마나 어떤 가격으로 원하는지 알지 못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영업에 있어서 새로운 형태의 사람이 발전했다. 경제학자들은 이들은 "企業人"(entrepreneur)이라 부른다. 그들은 보통 넓은 시장에서 활동하는 상인으로서 출발하여 은행가로서 출세하였다. 이탈리아의 "메디치"가문과 독일의 "푸거" 가문이 그 전형적인 인물들이었다.
(2) 금융업의 발달
상업이 발전할수록 자본이 형성되고 은행과 대금업이 발전하였다. 중세에는 利子 받는 것을 탐욕적 행위라 비난하고 고리대금업을 천시하였다. 카톨릭교회에서는 "돈이 이자를 낳을 수 없다" 하여 교회법으로 계속 금지하였고, 1530년 파리대학의 신학자들은 고리대금업을 반대하였으며 루터도 "푸거주의(fuggerism)"와 고리대금업을 비난·공격하는 설교를 했다. 캘빈은 노동·검소·절약·저축 등을 미덕으로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여 이자 받는 것을 허용했지만, 캘빈주의 성직자들도 대금업을 여전히 비난하였다. 그러나 경제가 점점 발전됨에 따라 성직자들이 "고리대금"과 "정당한 수입"과를 구별하여 논의하게 되었고 은행이 발전되고, 은행은 군주·귀족·성직자들을 돕는 것보다는 생산자들에게 대부하여 산업발전에 기여하게 했고, 자본이 형성됨에 따라 利子率도 점차 내려가 금융대부업이 활발히 발전하게 되었다. 17세기에 있어서 암스테르담 은행은 예금자들에게 안전성과 자유로운 引出權을 부여함으로써 낮은 이율의 예금을 얻고 다시 그것을 낮은 이율로 상업활동에 자금으로 대여해 줄 수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경제적 발전은 「산업의 상업화」의 결과를 가져왔고, 대부분의 큰 실업가들은 상인들이었는데 이들 생산자(산업가)들은 상인들의 주문에 응해서 생산하고 상인들의 자본을 빌어 경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상업자본주의(commercial capitalism)는 1800년까지 전형적인 초기자본주의 형태로 계속 발전하였다. 그러나 1800년 이후 동력기계의 도입과 함께 그것은 산업자본주의(industrial capitalism)에 밀려나고 말았다. 상인들은 기계를 소유, 이해, 제작하는 산업가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3) 대도시의 성장
상업혁명은 대도시들을 발전시켰다. 1500년경에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가 파리밀라노베니스나폴리 4개 도시에 불과했는데 100년이 지난 1600년경에는 12개 도시(팔레르모, 리스본, 세빌리, 런던, 암스테르담, 앤트워프, 로마, 메시나 등)로늘어났다. 당시 파리와 나폴리의 인구는 이미 20만명을 상회하고 있었고, 그 외에도 많은 도시들이 뒤따라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급격한 경제변화의 縮圖라고 볼 수 있는 이 도시들은 상업과 정치, 경제의 중심이 되었고 각종 상품의 생산지이자 동시에 대량 소비지가 되었고, 새로운 사상과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도시의 생활은 보다 화려한 반면 각종 범죄의 온상이 되기도 하였으며 즉시 해결할 수 없는 공중위생문제, 주택문제, 교통문제, 교육문제 등 많은 문제들을 야기 시켰다.
2. 사회구조의 변화
상업혁명, 인구증가와 하락하는 화폐가치 등의 결과는 유럽의 계급들이 19·20세기의 산업시대에까지 지속될 수 있던 형태를 취했다.
이전의 봉건계급, 즉 귀족은 근대적인 귀족계급이 되었다. 토지지대는 농산물가격이 상승함에 따라서 상승하였으며, 인플레이션과 인구증가는 도시에 있어서 집세수입을 올렸다. 그들은 민간직업에 더 관심을 두게 되었으며 또한 기꺼이 더 세련된 취미를 개발하고 그들 자녀들의 교육에 더 관심을 두었다. 그들의 사회적 기능이 변화하고 또한 더 새로운 가문의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교육, 정부의 고용과 군대복무를 위해서까지도 경쟁함에 따라서 신분의 휘장으로서의 문벌에 주어진 중요성이 더해지게 되었다.
귀족계급 밑에는 중산계급, 즉 부르주와지가 있었다. 이 말은 영국의 시민과 같이 원래 특허장을 받은 도시에 살면서 그 자유를 누리는 사람을 의미했다. 중산계급은 16세기와 그 이후에도 더욱 더 많아지게 되었다. 중산계급은 일정하지 않은 범주였다. .왜냐하면 유럽의 여러 나라는 그들의 중산계급의 규모와 중요성, 그들을 구성하던 사람들의 종류와 추구한 직업의 유형 등에 있어서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중산계급은 소규모의 소매상인들, 여관주인들, 제조업 소유주들, 숙련된 무역인들과 그들의 고용인 등이었다.
모든 나라에서 대부분의 주민은 노동빈민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숙련되지 않은 임금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방랑과 걸식으로 호소하는 큰 무리와 더불어 실업자와 고용될 수 없는 사람들과 극빈자들을 포함했던 것이다. 그들은 읽거나 쓸 수도 없었으며 가끔 중산계급의 인물들과 정부관리들을 괴롭힌 불규칙한 습관들에 내버려졌다. 바로 사회분화의 성장, 즉 중산계급과 상류계급이 그렇게 발전했다는 사실은 빈민계급의 상태를 상당히 더 악화시켰던 것이다.
3. 세계관의 변화
신항로 발견의 결과로 이탈리아의 무역업과 선박업이 쇠퇴하였고, 유럽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형태에 큰 변화를 일으켰으며, 그 중심은 대서양 연안국가로 옮겨졌다. 무역의 양을 대폭 증대시켰고, 구하기 어렵던 물자들이 풍부해졌으며, 종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담배를 피우고, 차와 커피를 마시고, 고가의 도자기와 보석과 같은 사치품들을 구입하고, 의사들은 아편과 키니네와 같은 새로운 물품과 자료들을 환자 치료용으로 실험·사용하였다. 신세계와 동방세계는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물질, 새로운 신화, 새로운 인식(인도와 중국은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서도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풍요롭게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안겨주어 새로운 종교관·세계관·인생관을 가지게 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지리상의 발견은 세계사의 거대한 전환점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이로 말미암아 종전까지 비교적 서로 고립하여 독자적인 문화와 역사발전의 길을 걸어오던 국가와 지역이 이제 직접적인 접촉을 통하여 밀접한 역사적 연관성을 갖게 되고, 그것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어 우리가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은 참된 의미의 세계사가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식민지 정복활동의 시작
한 세기 동안 아메리카와 동양에 이르는 새로운 대양항로를 끝까지 쫓아간 사람들은 오직 스페인 사람과 포르투갈인들 뿐이었다. 양국은 1494년의 조약에서 지구를 양분했다. 필리핀 군도는 마젤란이 발견했기 때문에 스페인에게 돌아갔다. 브라질은 1500년카브랄이 발견했기에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스페인은 全아메리카를, 그리고 포르투갈은 아시아와 동인도제도에 있어서 모든 무역권을 얻었다.
인구가 많고 개화된 동방에 있어서는 포르투갈인들은 결코 자기들의 언어·종교 혹은 생활수단을 강요할 수 없는 몇몇의 외국인들에 지나지 않았다. 아메리카에 있어서는 악착스러운 최초의 정복자 이후 스페인 사람들은 자기 고유의 문화를 세웠다. 거기서는 종교재판소가 바로 설치되고 원주민들은 정복자들에 의하여 노예신분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스페인 정부(미국혁명 때까지 혹은 그 이후에 있어서도 모든 식민지 제국들이 국내정부와 같이)는 그 식민제국을 모국의 이익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정부는 유럽의 장원과는 거리가 먼 것이지만 일종의 유사한 엔코미엔다(encomienda)를 도입하였다. 엔코미엔다의 "영주"(lord)는 인디안들의 노동을 관리했다. 또한 스페인으로부터 이민한 여자가 적었기 때문에 백인과 인디안의 혼혈인인 "메스티조"(mestizzo) 계급이 일어났다.
지구상의 모든 민족과 지역을 포함하는 세계사의 성립과 발전에 있어 유럽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며, 19세기까지의 세계사의 흐름은 유럽의 일방창과 침략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대륙에서는 토착문명이 완전히 파괴되고, 유럽문화가 고스란히 이식되었으며,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도 홍수처럼 밀려오는 유럽의 상인과 선교사, 그리고 그들이 갖고 오는 유럽문화에 격심한 진통을 겪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중남미의 대부분이 스페인의 언어와 문화권에 속하며 풍속·습관·종교·건축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의 유풍을 대부분 지니고 있는 것을 보면 스페인의 식민 정책이 얼마나 잔인하고 철저하게 원주민의 문화를 말살하면서 스페인化를 강행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2. 세계화의 시작 - 향료 찾아 삼만리
신항로 개척의 배경, 필요성 및 과정
1. 신항로 개척의 배경
① 동양에 대한 호기심 : 마르코 폴로의‘동방견문록’으로 동양에 대한 호기심 자극
십자군 원정에 따른 이슬람 세력과의 접촉으로 세계관 확대
② 종교적 열정 : 이슬람 국가 동쪽에는 크리스트교 국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프레스터 존)
③ 중앙집권적 통일국가 형성 : 절대 왕정의 강력한 뒷받침(후원) ex) 항해왕자 엔리케
④ 과학 기술의 발달 : 자연과학 지식 증가(지구 구형설), 조선술•항해술 발달,
나침반 사용(원거리 항해가능)
* 읽을거리 *
향료 무역 - 향료는 후추, 계피 등을 말하는데, 육류를 소비하는 유럽인들에게 고기의 비린맛을 없애는 것으로 매우 인기가 있었다. 인도나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향료는 신항로 개척 이전에는 이슬람 상인이나 이탈리아 상인들이 교역을 독점하여, 유럽에서는 엄청나게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이에 향료를 좀 더 싼 값에 직접 구하려는 유럽인들의 욕구가 신항로 개척으로 이어졌다.
2. 신항로 개척의 필요성
① 경제적 욕구 : 동양산물(향신료, 귀금속)에 대한 수요가 증가 => 직접적 원인
②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상인이 육로를 통한 동양과의 교통로를 장악하여 향료무역 독점 → 새로운 교통로를 개척할 필요성이 증대
3. 신항로 개척의 과정
*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농업 환경이
열악해 경제적으로 빈곤하여 동양 무역
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고자 신항로 개척
에 앞장섰답니다. 또한, 지리적으로
볼 때 지중해 무역 중심지에서 멀리 떨
어져 있었기 때문에 불이익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죠.
1) 포르투갈
① 엔리케 왕자 : 아프리카 서해안 탐험대 파견
② 바르톨로뮤 디아스 :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
(Cape of Good Hope) 발견(1488년)
③ 바스코 다 가마 :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 개척(1498년)-인도 서부 캘리컷에 도착
2) 에스파냐
① 콜럼버스 : 서인도 제도 도착→신대륙 발견(1492년)
② 마젤란 : 세계 일주(1519~1522년), 지구 구형설 입증
신항로 개척 이후의 변화
1. 유럽 세력의 확대[Into the Text p. 140 서구세계의 팽창]
1) 유럽 국가의 세계 진출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 확립
2) 무역 중심지의 이동 : 지중해 → 대서양
2. 유럽의 식민지 확대[Into the Text p. 140 유럽인의 식민활동]
:: 시장확보를 둘러싼 유럽 각국 간의 경쟁[p.141]
■에스파냐 : 라틴아메리카 점령 → 아즈텍 문명, 잉카 제국 정복하여 금, 은 채굴
■포르투갈 :인도의 고아, 실론, 말라카 제도 점령 → 향신료, 비단, 귀금속 등을 유럽 시장에 판매
3. 유럽 세계의 변화
1) 가격 혁명, 상업 혁명
① 가격 혁명 : 신대륙으로부터 대량의 금.은 유입
→ 화폐 가치 하락 → 물가 폭등 → 장원제 붕괴,
상인의 자본 축적에 유리해짐
[Into the Text p.139 본문 읽어봅시다]
② 상업 혁명 : 동양 산물이 유입되고, 시장이 아프리카, 아메리카로 확대되면서 유럽 상공업의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옴 → 길드(Guild)체제 붕괴, 시민 계급 성장, 근대 자본주의의 발달, 근대적인 기업. 금융제도가 나타남.
2) 유럽 중심의 세계 시장 형성[Into the Text p. 138, 140]
① 서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경제의 태동 → 경제적, 정치적 측면의 우위 확보
② 주식 회사 제도의 등장(동인도 회사) : 무역상의 위험과 손해 및 이익의 분담
③ 삼각 무역 : 유럽과 아메리카, 아프리카 사이에 이루어진 무역
신항로 개척에 따른 무역 구조의 변화와 유럽 경제의 변화
① 신항로 개척과 무역 구조의 변화
신항로 개척 이전의 지중해 무역은 이탈리아 상인이나 이슬람 상인들을 통한 중개 무역 구조였으나, 신항로 개척으로 서부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새로운 무역 구조가 형성되었다. 서부 유럽은
아메리카로부터 은ㆍ설탕 등을 수입하는 대신 모직물을 수출했으며, 아프리카로부터 금ㆍ상아 등을 수입하는 대신 무기ㆍ일용품을 수출하였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노예를 신대륙에 판매함으로써 신대륙에서의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② 신항로 발견 이후 유럽의 경제 변화
새로운 항로를 통해 아메리카로부터 금과 은이 유입되면서 물가가 오르는 가격 혁명이 일어나 도시의 상공업자가 성장하였고, 장원제의 붕괴가 촉진되었다. 또한, 넓은 시장이 제공되면서 상업 혁명이 일어나 근대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3. 신밧드가 된 정화 [Into the text p. 143]
정화의 대외 원정과 이슬람 상인의 해외 활동, 유럽의 신항로 개척의 비교
구분
정화의 해외 원정
유럽 인의 신항로 개척
이슬람 상인의 해외 활동
항해 목적
•명나라의 국위 선양
•조공 요구 및 무역 활동
•동방 물산의 구입
•동양에 대한 호기심
무역, 포교
항해 주체
정부 관리
상인(국가 지원)
상인
항해 시기
15세기 이전(1405~1433)
15세기 이후
11세기 이후
항해 성격
•기존 교역로 항해
•외교적, 일시적
•탐험 항해
•상업적, 침략적, 지속적
상업적, 문화적
항해 결과
•중국의 국위 선양
•화교 진출의 계기
•유럽과 다른 문명의 접촉, 세계사 성립
•유럽의 세계 지배
•동서 문화의 교류
•이슬람교의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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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사]<원거리무역>, 영어영문학과, 20060168, 박유미
<원거리 무역>
1. 십자군 전쟁(11C말~13C말)
1) 원인: 유럽최초의 대외진출
-셀주크투르크의 팽창: 소아시아 점령, 동로마제국 위협
-동로마 황제의 구원 요청: 교황의 성지회복 요소
2) 경과: 클레르몽 종교회의(1095)에서 십자군 원정 결의(200년 동안 7번의 십자군 원정)
(1차-예루살렘 왕국 건설 성공, 4차-콘스탄티노플 점령(라틴제국 건설))
3) 결과: 중세봉건사회의 붕괴촉진(근대사회로의 전환의 계기)
-종교적: 교황권 쇠퇴→교회의 권위 하락, 종교적 열기 냉각
-정치적: 봉건영주 몰락→왕권의 강화, 중앙집권 촉진
-경제적: 지중해를 통한 동방무역 발달→장원의 붕괴와 도시의 발달
-문화적: 이슬람, 비잔틴 문화와 접촉→서유럽문화권 자극
2. 도시의 발달과 장원경제의 붕괴
1)상업과 도시의 발달
-농업생산력 증가→잉여생산물 발생→시장형성→도시발달
(10세기 이후 교통의 요지나 영주의 성곽 주변에 도시 형성)
-초기 봉건영주의 보호와 지배하에 성장→자치권 획득 투쟁(경제력,무력 바탕)
2)원거리 무역의 발달
-지중해 무역권: 지중해를 통한 동방무역으로 번영(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북유럽 무역권: 북해와 발트해 연안 무역
(북독일의 뤼베크, 함부르크와 플랑르드 지방 도시 중심, 한자동맹결성)
-내륙 무역권: 북유럽과 지중해 무역을 연계(아우크스부르크, 상파뉴 중심)
3)길드의 발달: 상공업자의 단결과 독점권 확보를 위한 조합
-상인길드: 자치권 획득 투쟁주도, 도시행정 장악
-장인(수공업)길드: 상인길드에서 분리하여 직종별로 조직, 엄격한 계층 질서, 경쟁 방지를 위한 제품 생산 규제 등
-영향: 도시산업 발달에 기여, 폐쇄성으로 자유로운 도시의 경제발달 저해
4)장원제도의 붕괴와 농촌의 변화
-장원의 해체
·화폐경제의 발달→도시와 상공업 발달로 자급자족적 장원 경제 붕괴
·지대의 변화: 영주들의 지대를 부역 대신 현물이나 화폐로 징수
(노동지대(부역)→현물지대(공납)→화폐지대(금납화))
-농민의 지위 향상
·흑사병의 유행(14세기)으로 인구감소→노동력 부족과 노동 임금의 상승
·곡물 가격상승으로 화폐 가치 하락·지대 금납화로 농민 부담 감소→농노의 지위 향상(경제외적 강제 약화)→차츰 자영농으로 성장
-농민반란
·영주의 봉건적 반동: 영주들은 노동력 부족으로 금납화를 중지하고 부역을 강화, 신분적 속박 강화→농민반란 발생
·대표적 반란: 자크리의 난(프랑스), 와트타일러의 난(영국)→농노해방, 장원해체에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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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사] <원거리무역> 무역학과, 20040460, 안철한.
중세 사회 경제적 변화
1. 기술진보와 농업 생산력의 증대
1) 농업 기술의 발달
- 바퀴달린 쟁기 ; 회전식 쟁기는 땅을 더 깊게 파고, 딱딱한 땅도 경작함. 뿌려진 종자 보호 및 영양 요소 공급.
- 금속제 써레 ; 땅을 고르고 부드럽게 만들어 파종과 발육을 돕는 11세기 농업 기술의 획기적인 산물.
- 말의 사용 ; 속도와 지구력 면에서 소보다 월등. 농민의 이동을 자유롭게 함. 분산된 촌락 -->큰 촌락 밀집형.
- 멍에 ; 말에는 목둘레 멍에, 소에는 뿔 멍에를 사용하여 우마의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
- 굽쇠 ; 가축의 걸음 걸이를 강하게 하여, 종래보다 4~5배 증가한 힘.
- 물레방아와 풍차를 이용한 제분 시설도 크게 발전
2) 12세기 말경 삼포지제(3교대작)의 도입
- 농경지를 3등분. 밀이나 호밀같은 하곡, 다른 쪽에 귀리, 보리, 콩류, 채소 등 가을 작물, 나머지 1/3은 휴경지.
- 다음해에 첫번째 땅에는 추곡, 휴경지에는 하곡이 파종, 나머지는 휴경지.
- 3교대작 덕분에 하곡과 추곡은 흉년에 서로 보완관계를 이루어 음식물의 공급을 보장.
- 삼포지제로 소출이 증가하였고, 이로 인해 농경지 일부가 염료와 같은 특용작물이나 포도 재배로 활용.
3) 주식의 변화
- 중세 유럽의 농민은 원래 곡물죽(Brei)을 주식으로 삼았으나, 곡물 수확이 증대됨에 따라 빵을 주식으로 함.
- 빵은 농민들의 체력을 강화시켜 주는 양질의 식품.
- 기독교의 보급, 십자군 운동, 대규모 개간사업, 도시 및 성당 건축 등은 강인해진 인구가 성취한 업적.
- 빵의 대대적인 보급은 물레방아와 풍차의 건설을 촉진.
4) 중세 중반 이후에 개간사업을 통한 대규모 경작지의 확대
- 11~14세기 초까지 유럽의 인구는 거의 두배로 증가. 많은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어 도시가 팽창.
-->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식량 수요가 크게 증가.
--> 각지의 농촌에서 장원의 울타리를 넘어 넓은 숲과 황무지를 개간하려는 사업이 영주들의 지원으로 진행.
- 개간사업의 전개는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11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 12~13세기에 절정.
- 임야와 황무지만이 아니라 저지대 해안 지역의 간척사업도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에 시작.
- 경작지의 확대로 인해 촌락의 수가 급증. 본당 교회의 수도 크게 증가
- 상업, 도시가 발달하자 곡물 뿐아니라 육류, 양모, 아마, 포도주, 염료식물과 같은 공업 원료에 대한 수요도 증가
--> 농업 생산의 특정 지역적 산지가 조성. 상업적 농업이 확대. 노동 생산성과 사회적 분업의 진전.
2. 상공업과 원격지 무역의 발달
중세는 일반적으로 자급자족의 농촌 경제에 의존하였으나 11세기에 이르러 도시 인구의 증가와 화폐의 유통으로 상공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상업의 부활' 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발전은 종래의 주문 생산에서 시장 생산으로, 소규모 상거래의 범위를 넘어 원격지 상업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기가 되었다. 시장 생산, 특히 원격지 시장을 상대로 한 생산에서는 상인이 필연적으로 개입하게 되므로 수공업은 상업 자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13세기에는 섬유 공업과 같은 분야에서 상업 자본가가 수공업자에게 원료, 작업 용구, 소공료를 미리 대여하여 생산하는 선대제(先貸制)가 성립 하였다. 나아가 섬유 공업에서는 작업장 내의 분업과 수직적 분업도 발달하였고, 이처럼 분업과 기술이 발달하고 지역 특산물이 개발됨에 따라 지역적으로도 수공업 제품의 생산에 전문화가 이루어졌다.
1) 원격지 상업
- 11세기 이후 사치품에 대한 귀족 계급의 수요 증대와 농촌 경제의 성장에 힘입어 발전.
-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은 지중해권과 북유럽권의 통상 무역을 더욱 확대.
- 국제 교역의 중심지에는 1년에 1~2주 정도로 개최되는 정기시(定期市) 가 성립.
2) 상업의 발달
- 여러 종류의 기업 형태가 나타나고 복식 부기법이 발달. 보험과 우편 제도도 시행.
- 도시의 해안이나 강변에는 부두, 창고, 기중기, 점등기가 설치.
- 다양한 통화 체제와 상업 활동으로 12세기에 환전상이 생김. 예금, 대출, 저당, 어음 할인을 하는 은행 출현.
-->13세기에는 화폐 사용이 증폭되어 수표, 환어음, 신용장 등 신용거래 수단도 증가
- 화폐가 사회 각 곳에 침투. 군주는 전쟁수행과 관료 조직 유지에, 귀족은 향락생활에, 농민은 화폐지대 납부 등..
-->이들을 상대로한 고리대금업이 성행
- 상인과 공인들은 도시에 상주하게 되고, 상업을 위한 교통 왕래가 빈번한 지리적 요충지에 도시가 발생.
3) 복식 부기법
모든 거래를 대변(貸邊)과 차변(借邊)으로 나누어 기입한 다음에 각 계좌마다 집계하는 조직적 기장법. 재산의 이동과 손익을 정확히 알 수 있고 잘못을 자동적으로 검출할 수 있다.
4) 원격지 상업의 중심지 베니치아(Venice)
- 지중해 지역에서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이 주도. 비잔틴 제국 및 레반트(Levant) 지방을 상대로 하는 무역 활발.
- 고대의 발달된 무역과 도시가 지속되었던 비잔틴 제국에서 거의 독립적인 공화국으로 지위 유지.
- 콘스탄티노플에 식량 조달. 이슬람 지배하의 시리아와 아프리카에 노예, 철, 목재를 수출.
- 비잔틴 제국 내에 사법적 특권이 인정된 여러 식민지를 건설하여 아시아와의 수송을 사실상 독점.
5) 제노아(Genoa)와 피사(Pisa)
- 베니치아의 뒤를 이어 11세기 말에 상당한 해상 세력 구축.
- 1096년에 시작된 십자군 원정에서 군대와 군수물의 수송을 독점. 레반트와 예루살렘 지역에 상업 거점 확보
- 12세기 초에는 마르세이유와 바르셀로나 사람들도 이에 가담.
6) 북해와 발트해 연안
- 11세기 이전에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원격지 상업이 유지.
- 플랑드르 지방의 모직물 공업의 발달로 12세기에 활기.
- 플랑드르 지방은 13세기에 영국산 양모를 사용한 고품질의 모직물이 생산. 모직물 공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명성.
- 원격지 내륙 통상은 알프스 산맥을 가로질러 롬바르디아(Lombardy) 지방, 프랑스, 독일의 강변 도시까지 확대.
- 12세기 말에는 주요 통상로가 확정. 상인들은 해상과 육로를 통해 서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활동.
7) 원격지 상업을 포함한 중세의 상공업은 근대의 자본주의적인 상업과는 다른 전 근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1. 사회적 분업과 시장 경제의 미발달로 인한 지역간의 가격차를 이용하여 상품을 부등가로 교환하여 이윤 추구.
2. 상업 활동과 상권의 확대는 주로 권력자와의 결탁에 의해 특권을 얻는 방법.
3. 장원 농민들의 생산물 지대나 부역 노동의 수확물, 수공업 길드의 제품이 상당 부분.
따라서 산업 자본의 운동을 매개로 하지 않고 봉건적인 생산 양식에 기생하고 규제하는 것이었다.
3. 중세 도시의 발달 과정과 원격지 무역
고대 도시는 지배자가 주변의 농민(노예)을 지배하기 위한 정치 무대 및 그 사람들이 농민으로부터 거둔 생산물을 소비하는 장소로서 존재했다. 여기에 대해서 유럽 중세 도시는 화폐경제의 발달과 함께 성장하는 상공업자의 집주지(集住地) 성격을 가지게 된 점에 특징이 있다(고대 도시의 시민은 정치인(home politicus)인 데 대해서, 중세 도시의 시민은 경제인(home economicus)이라 불린다.유럽 중세 도시는 그 성격으로 보아 크게 남구(南歐) 도시와 북구(北歐) 도시로 나눌 수 있다. 남구 도시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 상업의 전통이 있기 때문에 십자군을 계기로 하는 11,12세기의 상업 르네상스 시기에 북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재빨리 발달했다. 그러나 이 때에 도시를 지배한 것은 이 상업적 이익을 독점하려고 하는 근린(近隣) 농촌지대 출신의 봉건 영주 등이며, 지배자가 상업 활동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는 점에서 고대 상업의 성격을 남기고 있다.한편, 북구 도시에서는 11세기 농업 생산의 발전과 이에 따른 잉여생산물의 축적이 있어서 차츰 상공업이 발달했다. 상인·수공업자는 이즈음부터 고대 도시의 옛터, 성채(城砦), 교회 소재지, 교통의 요지 등에 정주하며, 그 곳을 거점으로 하여 원격지 상업에 진출하였고, 또한 수공업을 거점으로 하여 원격지 상업에 진출하였으며, 수공업 생산을 발전시켰다.경제활동이 발전하자 어느 도시에서나 조합(組合)의 결성이 이루어졌다. 생업의 수단을 가지고 있던 도시 주민 가운데서 직인(職人), 상인, 자유업자가 제각기 동업자들끼리 조합을 만들어반드시 가입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결성된 조합은 매우 수효가 많아져 대장장이, 구둣방, 재목상, 빵집, 여인숙 등 모두가 자기네의 조합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조합들은 피렌체에서는 소조합(小組合)이라고 불리었는데, 이 밖에 판사(判事)나 공증인의 조합, 약재상이나 향료상의 조합, 원격지(遠隔地) 상인의 조합, 환전상(換錢商)의 조합 따위와 같이 대조합(大組合)이라고 불리는 것도 있었다. 이와 같은 조합은 프랑스나 게르만 국가들에게서는 ‘길드’, 에스파냐에서는 ‘그레미오스’라고 불리었고, 중세 후기에는 전 유럽에 널리 보급되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고, 봉건세력에 대항하여 내부에서 직접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길드의 본질은 경제적인 성격에 있었으며, 제품의 가격을 규제하고, 임금을 결정하고, 제품의 품질의 수준을 결정하고, 제조법의 비밀을 감시하고, 새로운 사람이 길드에 참가하는 것을 엄격한 규율에 의해서 통제했다.
4. 지리상의 발견과 유럽의 팽창
1. 이 시기(15세기 말)의 경제적 특징
① 이 강의에서는 13~14세기 중세농촌의 고전장원이 화폐지대로 전환하여 순수ㆍ지대장원화 하고, 도시의 길드경제가 자체적 모순에 빠져 생산체계에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들이 중첩적으로 나타나는 15세기 말경의 시대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세계경제의 특징들이 중점 강의될 것임. 우리들의 교재는<제5장>의 내용이 해당되겠음.
② 15세기말은 스페인과 폴투갈 왕실의 지원을 받은 탐험가들이 아메리카 신대륙과 인도양항로 발견이라는 지리상의 2대 발견을 이루어 인류의 경제활동 범위가 전지구적 차원으로 확대되기 시작하는 시기로, 이때부터 17~18세기에 걸쳐 발생한 시민혁명(영국의 경우 1642년의 청교도혁명 ㆍ1688년의 명예혁명, 프랑스의 경우 1789년과 미국의 경우 1776년의 독 립혁명) 과 산업혁명이 전개되는 18세기중엽까지에 표출된 경제적 특징을 가르켜 이행기ㆍ초기 자본주의ㆍ상업자본주의시대ㆍ원시적ㆍ본원적축적기ㆍ중상주의ㆍ절대주의시대ㆍ구제국주의시대라는 다양한 명칭이 붙는 시대임★ 길라잡이 2 :이행기ㆍ초기자본주의ㆍ상업자본주의ㆍ원시적ㆍ본원적축적ㆍ중상주의의 경제사적 의의
1. 이행기의 경제사적 의의 :
--→ 역사발전은 단절적ㆍ연속적 흐름속에서 잉태되고 성숙된다는 시각에서 보는 측면이다. 15세기말~18세기중엽의 기간은 14세기말에 이르러 형성되어 오던 중세농촌의 장원제와 도시의 장인길드가 변질ㆍ붕괴하기 시작하면서 초래된 봉건적위기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현상들과 근대자본주의의 경제적 특징들이 중첩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예컨대 영국에서는 농노제가 독립자영농으로 분해되었고 영국ㆍ이탈리아ㆍ네델란드지역에는 자본제적 양모공업이 발생하여 직인과 빈부층 수공업자ㆍ빈농민들이 임금노동자로 전화하여 농업과 공업에 고용되어 있었다. 이러한 임금노동자를 고용했던 사람은 생산을 직접지배하게된 상인이었으며 생산자가 상인ㆍ자본가가 된 사람이었다.이러한 현상은 생산양식이 봉건적 생산양식으로부터 자본제적 생산양식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행기라 하는 것이다.
2. 초기자본주의의 경제사적 의의 :
--→ 역사적 형태로서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특질은
㉮ 노동력의 상품화
㉯ 상품생산
㉰ 잉여가치의 생산과 생산의 무정부성
⊙ 자본주의의 사회적 생산의 일반적 기초형태는 생산수단과 생활자료를 소유한 자본가와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자유노동자가 상품교환이라는 경제법칙을 매개로 결부되어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소수의 자본가계급의 수중에 사유재산으로서 독립적 생산수단이 자본으로 존재하고 있고 직접생산자인 노동자는 노동력만을 가지고⊙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해서 자본가에게 일정계약에 의해 판매하는 관계를 갖는 임노동의 존재를 합법화시켜주는 것을 말한다.
⊙ 상품생산은 사회적 분업 기초조건하에 생산자들이 그들의 노동생산물을 상호교환함으로서 관련을 맺는 사회적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 경우 생산자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생산하며, 상품거래는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등가교환에 이해서 이루어진다.
⊙ 자본주의의 모든 생산경제는 사유제도ㆍ기업자유활동의 원칙하에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자급자족적 자연경제가 지배적이던 고대사회ㆍ중세봉건제사회에서는 지배계급이 영유하는 잉여생산물의 량은 지배계층이던 노예소유주ㆍ봉건영주의 자연적 욕망의 범위내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화폐가 지배형태를 취하는 자본제상품생산사회는 부의 획득과 축적은 무제한으로 가능하게 되어있고, 그러한 가능성은 생산경제간에 경쟁을 격화시키게 되었다.
※ 즉 이윤획득과 이윤증대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서 자본주의상품생산경제의 지도원칙이 되는 합리주의가 각개의 생산경제내부에 철저히 이용되고 있긴하나 전체적인 생산경제간에는 계획적인 통일성을 갖지 못하여 무정부적인 생산이 행해지고 그러한 속에서 생산경제간에는 경쟁이 야기되고 경쟁에서 탈락한 생산경제가 발생하는 가하면, 자본ㆍ상품의 독점이 발생하고 나아가 그것은 공황문제를 야기시킨다.이 이외에 자본주의생산양식에는 노동력을 상품화한 자유노동자의 존재와 자본주의 자유기업존립의 표상인 경제생활의 자유와 경제수단의 사유를 내용으로 한 법제가 뒷받침되어 있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규정화된 법제하에서 자본주의사회는 노예제사회와 농노제사회에서와 같은 신분관계는 폐지되고 신분에 부속된 소득한계를 없애고 누구나 생산경제에 관여할 수 있게함으로써 다같이 영리에의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사회적 가능성이 개방되어 있다. 이러한 성숙된 자본주의단계에서 나타나게된 자본주의생산양식이 갖는 특징의 단초적 현상들이 15세기말이후부터 성립되기 시작했다.
3. 상업자본주의의 경제사적 의의 :
--→ 화폐이득추구의 영리행위를 자본이라할 때 역사적으로 그러한 형태의 자본은 어느시대ㆍ어느국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근대자본주의가 산업자본의 성립으로 특징지어지고 독자적 생산양식을 나타내고 있는데 반해서 전근대 사회에서의 자본은 상업ㆍ금융업등의 생산양식에 기생하여 영리 취득을 했다. 이러한 영리행위를 상업자본ㆍ상업자본주의라하는데 고대ㆍ중세에서 나타났던 것이 그의 전형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14세기말 봉건제사회의 붕괴과정에서부터 산업혁명에 이르는 근대자본주의의 성장기를 상업자본주의시대ㆍ상업자본단계라 하고 그 이후의 시기를 산업자본주의시대ㆍ산업자본단계라 한다. 논의의 대상이 되는 15세기말~18세기중엽시기에 나타났던 상업자본을 전기적상업자본ㆍ특권적 상업자본이라한다. 이 시기의 상업자본은 대개 3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 첫째형태 : 봉건지배와 결탁하여 국왕 왕주 고위성직자를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하는등 봉건제도에 기생하여 막대한 이윤을 올리고 있는 형태의 자본.
㉯ 둘째형태 : 자신에게 종속되어 있는 직인에게 고가로 원료를 제공하고 제품을 주문생산케 한 후 그것을 싸게 구입하여 유통과정에서 영리를 취하는 고리대적착취 자본.
㉰ 셋째형태 :15세기말 봉건세력의 분권적 분열로 시장이 발달하지 못하고 지역적으로도 가격차이가 커 가격차를 이용한 재화를 사게 사서 비사게 파는 형태.
※ 상업자본은 상품과 서비스의 유통과정을 통한 부등가교환에서 양도이윤을 얻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원시적ㆍ본원적 축적기의 경제사적 의의 :
① 자본주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본의 사용이 필요하고 자본으로서의 원료와 도구를 구입하고 노동 고용을 위해서 대자본가와 임노동자의 존재, 즉 자본관계의 형성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② 즉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본제적 기업설립에 필요한 화폐재산 축적ㆍ임노동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며, 여기에서 성립된 자본주의는 자본제적 축적에 의해서 부단히 확대 재생산되는데, 자본의 원시적ㆍ본원적 축적이란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기초조건인 자본ㆍ임노동을 형성하는 역사적 과정을 의미한다. 자본제이전 사회에서는 농민ㆍ수공업자 등 직접생산자는 생산수단으로 간주되어 토지에 부속되어 있었다.
③ 그 후 봉건제 해체과정에서 그들은 스스로 생산수단의 소유자로 변신하여 독립자영농ㆍ공장주가 되었다. 요컨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기초조건인 임노동자는 직접생산자와 생산수단의 직접적 결합이 해체ㆍ분리되는 과정에서 형성ㆍ창출되어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었다. 역사적 현상에서 이러한 직접적 결합의 해체ㆍ분해는 무엇보다 직접생산자의 양극분해, 즉 경제적 몰락에 의해서 생산수단인 토지의 상실(토지의 수탈)에서 진행되었다.
④ 따라서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직접적 결합에 대한 분리는 봉건적ㆍ공동체적 토지소유의 해체 내지는 재편과함게 농민(생산자)로부터의 폭력적인 토지수탈로 이루어져, 이 토지수탈의 결과 토지로부터 자유로워진 농민(생산자)는 여러 가지 기술을 연마, 임금노동자로 전화해 갔다. 예컨대 토지수탈의 전형은 영국에서 발생했던 인클로저운동(enclosure movement)으로, 영국은 16세기와 18세기등 두차례에 걸친 토지개혁운동 즉 농업혁명을 통해서 대량의 농민층이 임금노동자로 전환해 갔다. 이러한 임금노동자 창출에 대치되는 자본가의 창출은 임금노동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생산자의 양극분해, 즉 경제적 상승을 통한 자본가로의 전환에서 진행되었는데, 이 경우 주체가 되었던 것은 조직화된 강력한 국가권력이었다.
⑤ 역사적으로 초기자본주의시대라하는 15세기말에서 18세기중엽 산업혁명기까지 정치를 이끌어간 주체는 분권체제의 봉건제와는 달리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하고 국민국가통일을 완성한 절대주의적 정치체제였고, 경제적으로 그를 뒷받침했던 것은 중상주의 경제정책이었다. 요컨데 초기자본주의시대의 자본가의 창출은 국가권력에의한 강력한 추진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5. 중상주의의 경제사적 의의 :
--→ 초기자본주의를 이끌어간 정치형태는 봉건제사회의 지방분권적형태에서 벗어나 국민국가적 통일을 완성한 중앙집권적 절대주의 또는 절대왕권제였다. 이러한 절대주의체제 또는 절대왕권제의 형성은 15세기말부터 18세기중엽에 이르는 초기자본주의시대ㆍ원시적축적기에 이루어졌다. 중상주의란 이 시기를 지배하던 경제정책과 그것을 뒷받침한 경제사상과 그 이론을 총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상주의는 대내적으로는 근대적 국민국가를 확립하고 대외적으로는 독립을 유지한다는 정치적 요구에 기초를 두고 전개된 정책체계였다.
중상주의 경제적 특징
㉮ 중금주의
금ㆍ은형태의 화폐를 부의 전형적 형태로 보고 그의 많은 획득이 국력을 증대시키는 수단
㉯ 무역차액주의
국부의 증진수단으로는 무역이 가장 중요하며, 무역에서는 수출이 수입보다 많아 수출초과를 이루어 그 차액에서 금은형태의 화폐를 획득해야 하는 관념
㉰ 산업보호론
국가가 유리한 무역차액과 결제차액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경제부문의 진흥과 수출증대를 위한 국가차원에서의 강력한 보호가 있어야 한다는 관념
㉱ 식민지획득
부의 증진을 위해서는 원료를 염가로 확보하여 고가로 매입할 수 있는 항구적 수출시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이의 최적 대상이 식민지라는 인식하에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정치경제적 심리가 일반화되어진 식민지획득
① 11세기 <상업의 부활>이후 이탈리아도시상인들의 동방무역 독점과 중근동지역 통상로에 대한 오스만 터키상인들의 중간착취로 정통적인 동방통상로가 봉쇄되자 유럽의 상업자본주의는 대동방무역을 위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욕구가 팽배하고 있었음.
② 신항로 개척에 선구적 역할은 대서양의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교도의 세력을 구축하고 정치적 중앙집권화를 이루며 건국한 폴투갈ㆍ스페인이었음.
③ 15세기초 이래 왕실재정으로 해상탐험기관과 항해학교를 설립ㆍ해상전문가를 양성해 온 포르투갈은 1498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아프리카 희망봉을 우회하여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하는 성과를 올렸고; 스페인왕실도 동방무역로의 신천지를 개척코자 이탈리아 제노아 태생의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에게 대서양을 서항하는 재정지원결과 1492년 아 메리카 신대륙 발견의 성과를 올림.
④ 콜럼버스의 서항로탐험은 당시의 탐험가들을 자극--→ 제노아인 죤 캐보트 는 영국왕실의 칙허로 1497년 북아매리카 동부해안을 탐험ㆍ1591년 폴투갈인 마젤란(Magellan)은 아메리카에서 더욱 서항--→ 남미의 남단 마젤란해협을 거쳐 태평양에 진출한 후 동인도를 목표로 서진을 계속 필리핀에 도착함.
⑤ 스페인ㆍ폴투갈 양국의 탐험활동은 유ㆍ라시아 양대륙을 주요대상으로 했던 중세 상업적 안목이 아프리카ㆍ남북아메리카ㆍ오스트레일리아 등 5대양 6대륙이 인류의 시야에 들어오는 글로벌한 차원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옴.
⑥ 이와같은 신대륙의 발견으로 인하여 인류의 경제적 범위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재편성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됨.
중국 明나라 정화(鄭和)제독의 선구적인 탐험과 중국의 정책
①15세기말 유럽의 이베리아반도국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지리상의 탐험활동보다 거의 90여년 먼저 중국 명나라 해군제독이었던 정화는 1405-1433년사이에 7회에 걸쳐 62척의 정크선과 2만7천여명으로 이루어진 대규모함대를 이끌고 아시아의 남지나해ㆍ인도네시아ㆍ인도양ㆍ페르샤ㆍ아리비아ㆍ소말리아ㆍ캐냐등 아프리카최남단까지 항해 그곳에서 조공ㆍ우호ㆍ상업활동을 전개하는 선구적인 발전상을 보였고, 최근에는 영국의 개빈 맨지스(Gabin Mensis)는 1421-1423년 사이에 콜럼버스보다 72년 먼저 아메리카대륙도 발견하여 그가 제작한 천체도와 지도를 이용하여 쿡ㆍ마젤란ㆍ바스코 다 가마등이 각각 호주ㆍ남미ㆍ인도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하면서 주장하고 있음.
②이러한 선구적인 탐험활동이 후세에 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기록의 주도권을 서구에 빼앗기고 있는 이유는 정화의 탐험이후 명나라는 해양으로의 관심을 접고 정크선을 불태우며 시대적 조류에 역행했고ㆍ대외무역과 외부접촉을 반대한 유교적 관료주의의 팽배ㆍ상업을 무시한 명나라의 반상업주의와 중화사상의 영향이었음.
5. 지리상 발견의 사회경제적 결과들
① 세계경제의 중심지가 지중해무역권과 한자동맹도시상권에서 대서양의 이베리아반도국가로 이전 --→ 신대륙의 식민지화(스페인의 중남미대륙과 폴투갈의 서남아시아대륙지배권 강화)
② 경제활동무대의 외연적 확대로 인한 상업상의 혁명 --→ 상업혁명 초래
③ 신대륙 식민지로부터 들여온 귀금속의 영향으로 유럽대륙에 대규모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되는 가격혁명 초래 --→ 각산업부문과 각국가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새로운 양상의 초기ㆍ상업자본주의 전개
④ 중상주의 열강국들의 (폴투갈ㆍ스페인ㆍ네델란드ㆍ프랑스ㆍ영국) 치열한 패권다툼 야기
6. 상업혁명의 사회경제적 결과
① 앞에서 언급한 신대륙발견으로 세계교역상에 야기된 변혁내용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러한 상업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② 동서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연안 특히 베네치아와 제노아에서 폴투갈의 리스본으로 이동되었고
③ 아시아ㆍ유럽대륙을 연결했던 종래의 상업권은 전세계적인 규모로 확대되는 결과를 수반하였으며
④ 상품거래ㆍ교역규모의 확대 및 거대화를 수반하였는데, 이 현상은 원격지탐험과정에서 수반된 대형선박의 건조와 항해기술의 발달로 보다 안전한 해상수송이 가능해지고 중량이나 부피가 큰 상품이 교역대상으로 등장하였던데 있었음
⑤ 유럽ㆍ아시아ㆍ아메리카ㆍ아프리카대륙간을 연결하는 교역이 새로이 진전되면서 새로운 교역대상품목이 등장하게 되는 변혁을 수반하였던 것으로 여기에는 폴투갈의 인도의 Goa를 중심으로 한 향료무역과 스페인의 아메리카신대륙과의 교역의 역할이 컸음. --→ 특히 신대륙의 교역에는 아프리카대륙인들이 노예라는 상품으로 유럽상업자본가들에게 매수되어 아메리카의 커피ㆍ면화ㆍ사탕수수ㆍ담배 재배 재식농장(plantation)의 노동력으로 매매되고 아메리카지역의 특산품이 유럽대륙으로 유입되는 3각무역이 새로운 무역형태로 등장하게됨.
7. 가격혁명
① 신대륙발견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스페인이 식민지 신대륙에서 대 량의 귀금속을 유럽대륙에 유입해 옴으로써 16-17세기기간중 극심한 물가 폭등:인플레이션을 초래, 초기자본주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현상.
② 16세기에 들어서서 중세이래 지불수단으로 이용되던 금ㆍ은이 유럽 광산에서는 고갈상태에 들자 스페인은 아메리카의 원주민ㆍ아프리카로부터 매입한 노예노동력을 투입, 아메리카 신대륙의 금ㆍ은광을 개발 --→ 대량의 귀금속을 들여와, 유럽대륙에 유례없는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게됨 --→ 이로 인해 파생된 여러 가지 변화를 가격혁명이라함.
③ 가격혁명의 사회경제적 결과 ;
㉮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패배로 인한 국내산업기반이 미약했던 스페인이 자유무역에 입각한 개방화로 스페인경제가 몰락하고 네델란드ㆍ영국경제의 대두
㉯ 농촌의 토지경영에대한 수익성제고 경향(인클로저 및 농업혁명)
㉰ 상공업활동자극ㆍ상공업부문의 높은이윤 실현--→산업자본형성기초
㉱ 고정화폐소득계층(지주ㆍ노동자)이 고난을 받는 현상초래
8. 회사조직 및 각종 금융업의 출현
① 신대륙발견과 그에따라 수반된 원격지무역의 성행은 자본의 형성ㆍ형태에도 새로운 변모를 보임. 그 형태는 원격지무역수행에 필요한 상품구입시 자본 의 공동갹출을 목적으로 결성된 파트너쉽(partnership)ㆍ 절대왕정으로부터 특정지역의 무역독점권을 부여받은 상인단체들이 결성한 규제조합ㆍ기업의 대규모화와 장기화를 목표로 다수인의 자본을 위탁받아 임원이 운영한 후 투자액에 비례하는 손익배당을 받는 주식회사제도였음.
② 주식회사제도의 선구적 형태는 1600년 영국 엘리자베스1세의 특허장을 받 은 동인도회사였고, 이어 1602년 네델란드가 설립한 동인도회사였음. 이들은 설립당초 정부통제를 배제하고 유한책임제에 영속적 자본조직확립과 중산층 대두를 조장하는등 민주적 운영방식으로 성공을 거둠.
③ 동인도회사들의 성공적인 운영에 자극되어 아메리카대륙에 서인도회사를 설립, 설탕ㆍ모피ㆍ커피등을 유럽대륙으로 유입ㆍ판매한후 아프리카대륙의 노예를 아메리카로 팔아 양도차익을 얻는 3각무역형태의 상업자본운영이 성행됨.
④ 은행업의 발생 ── 중세초기이후 이탈리아에서 환전업무취급에서 나타났던 은행업은 그후 국제적 대시(大市)개최 지역에는 환전ㆍ예치ㆍ대체ㆍ대부업무까지 확대되었음. 17세기 경제중심이 리스본에서 암스텔담으로 이동하면서 1609년 암스텔담은행이 설립된후 이를 모델로 유럽각국에 은행이 설립됨.
⑤ 보험업의 발달 ── 원격지무역에 안전 보장 제도적 장치를 확고히 하고자 해상보험업이 16세기후반 영국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하고, 17세기에는 고도의 전문화가 이루어져 Royal Exchange와 London Assurance등 전문적인 해상 보험업ㆍ보험집단이 형성되어 생명보험ㆍ화재보험업종으로 확대되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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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사] <원거리무역 > 무역학과 ,20041475, 함영재.
중상주의
근대자본주의가 산업혁명에 의해 지배를 확립하기까지의 초기 단계에서 원시적 축적을 수행하는 데 사용된 여러 정책과 이를 뒷받침한 이론체계이다. 경제정책으로서의 중상주의의 핵심은 초기 산업자본을 위해 국내시장을 확보하고, 국외시장을 개척할 목적으로 수행되는 보호주의 제도로서 외국제 완제품의 수입금지와 제한, 외국산 원료의 수입장려, 국내상품의 수출장려, 국내원료의 수출금지 등의 조치를 직접 입법 및 관세정책으로 실행하였다. 이것은 절대왕정이 타도되어 산업자본이 국정을 지배하게 되는 명예혁명(1688) 때부터 약 100년 사이에 걸쳐 원시적 축적의 체제로서 추진되어 온 정책이다. 경제이론으로서의 중상주의를 보면, 근대자본주의는 아직 생산부문까지를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하였으므로 중상주의자들은 이윤이 기본적으로 생산과정이 아닌 유통과정에서 발생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일반적 등가(等價)로서의 귀금속이야말로 부(富)의 본원적 형태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귀금속의 원산지 이외의 지방에서는 외국무역만이 그 획득수단이었으므로 무역차액이 순(順:플러스)이 되게 하는 것이 정책의 중심목표로 추구되었다. 수단으로서 직접무역통제에 의한 개별적 차액의 확보책인 중금주의(重金主義)가 주장되다가, 후에 이에 대한 비판으로서 궁극목표인 총차액은 개별적 통제의 완화에 의해 오히려 증대된다는 주장도 나왔으나, 보호주의의 이론을 전복하지는 못하였다. 이와 같이 중상주의 사상의 주류는 단순히 무역차액이나 산업보호라는 관점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국내시장 확대와 자본축적이라는 관점에서 유효수요(有効需要)의 분석에도 진전을 보여 마침내는 화폐경제이론의 초기적 체계를 완성시켰으며, 한편으로는 고전학파의 전사(前史)로서는 W.페티의 노동가치설이나 D.데포의 자유무역론까지 포함하고 있다. 부르봉 절대왕정하에서의 프랑스의 중상주의 정책은 산업 ·무역통제로 유명한 콜베르의 이름을 따 콜베르티슴이라고 하며, 신성(神聖)로마제국에 속하였던 18세기 독일의 여러 영방(領邦)의 재정정책은 관방주의(官房主義)라는 형태를 가진 절대주의적 중상주의 체계하에 있었다. 중상주의는 정치적으로는 시민혁명과 더불어 해체되고, 이론적으로는 A.스미스의 《국부론(國富論)》(1776)의 출판과 함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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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사]<원거리무역>무역학과, 20040494, 김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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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절대왕정의 성립
Ⅰ. 서 론
서양정치사에 있어 16세기를 근대사의 시발로 삼는 이유는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두 개의 기본적 정치과정인 통치와 전쟁이 이미 절대주의 왕조국가를 기반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15세기 말부터 스페인과 프랑스에 의해 대표되는 두 개의 절대주의 왕국이 유럽정치세계에서 주요한 두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중세 봉건귀족과 반독립적인 도시국가의 권력은 점차로 그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는 기본적으로 정치단위들간의 갈등의 궁극적 수단인 군사력이 과거의 소규모 정치조직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고가(高價)한 것으로 커졌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각종 군사기술의 발전, 육해군 병력규모의 증가, 국제관계 패턴의 변화 등은 전쟁을 종전보다 훨씬 더 장기화시켰다. 이에 따라 이러한 엄청난 규모의 병력, 장비보급 등을 전혀 감당할 수 없는 봉건적 영주들이나 소규모의 도시국가들은 정치적 독립을 상실하여 갔고 대신 새로운 추세에 맞출 수 있는 자원을 보유하는 영토국가(territorial state)들이 정치적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큰변화, 어떤 의미에서는 혁명적 변화가 바로 16세기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Ⅱ. 절대주의의 성립
1. 중세봉건사회의 해체
절대주의는 중세봉건국가에서 근대시민국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난 정치형태로서 중세의 지방분권적. 다원적인 권력구조와는 달리, 군주가 국토와 권력을 중앙집권적.일원적으로 통일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데 그 특색이 있다. 이러한 절대주의는 16세기초부터 유럽諸國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봉건사회의 해체와 더불어 성립되었다.
봉건사회는 농노의 노동에 의하여 경영되는 장원(Manor)을 경제단위로 하고, 그로부터 이룩된 봉토를 매개로 하여 많은 세속적 영주가 상하로 종속관계를 맺음으로써 성립된 사회질서였다. 이 시기의 신분적 위계제(hierarchy)는 농노를 기저로, 그 위에 교회와 기사계급이 있었으며 정점으로 군주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에는 정치적 지배권력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장원을 각 영주가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주는 단지 허명뿐인 명목상의 권력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군주도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영주에 불과하고, 다만 장원의 크기나 혈통에 있어서 다른 영주들보다 우세할 뿐이었으므로 領民에 대한 군주의 지배력은 의례적이며 간접적인데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봉건사회도 여러 차례의 십자군정벌이 수행되는 동안에 점차 변화하여, 13세기 말경에는 그 내부에서 도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또 도시에서는 농산물과의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수공업생산이 조직적으로 행해졌으며, 특히 십자군에 의한 이탈리아도시의 발전을 계기로 13.4세기에는 수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수공업의 발전에 따라 상업이 발달되었으며, 화폐경제도 보급되어 그것이 장원농촌에도 침투하여 갔다. 이와 같은 수공업의 발전과 화폐경제의 침투는 장원의 자급자족적 경제와 노동지대의 존속을 불가능하게하여 결국 농노제의 변질을 가져 왔으며, 그러한 경향은 십자군에 의한 기사의 몰락과 결합하여 중세봉건사회를 크게 변질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까지 명목적이었던 군주의 지배권력이 강화되어 갔으며, 이에 따라 군주는 여러 영주의 세력을 제압하여 국가의 통일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러한 통일은 또 시민계급의 요구와도 일치되는 것이었다.그것은 그들 시민계급에게는 영주들의 지방분권적 할거상태가 시민들의 자유로운 통상을 방해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그들도 통일국가의 출현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인에 의하여 스페인. 영국.프랑스 등에서는 14세기 후반에서부터 15세기 사이에 군주에 의한 중앙집권적 경향이 현저히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세의 전형적인 봉건사회는 해체의 과정을 걷게 되었고, 그 과도적 단계에서 절대주의가 성립되었다.
2. 절대주의의 성립기초
㉠ 항해와 무역의 발달. 절대주의가 유럽제국에서 성립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경부터였는데, 그 직전인 15세기말에 이룩된 '지리상의 발견'으로 유럽제국의 항해와 무역활동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상인과 고리대금업자의 부가 현저하게 증대되었다. 이 요인은 봉건영주에게 이중으로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상업이나 무역의 발달로 영주의 생활이 더욱 더 화폐에 의존하게 됨에 따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인이나 고리대금업자의 資力에 영주가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봉건영주가 그의 경제적 궁핍을 타개하기 위하여 갖은 수단을 다하여 주민 특히 농민에 대한 탄압과 수탈을 강화한 결과, 영주에 대한 농민의 반란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 문예부흥(Renaissance)과 종교개혁(Reformation). 문예부흥의 문화는 십자군의 원정이후 동서무역의 중심지로서 번영하게 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중심으로 하여 크게 진흥하였다. 그리고 이에 맞물려 종교가 가졌던 폐단이었던 하나의 거대한 봉건영주로서의 지위에 대한 반발로 종교개혁운동이 전개되었다. 중세의 카톨릭 교회는 하나의 정치권력체로서 주민의 사생활까지도 구속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로운 활동을 원하는 시민계급은 교회세력에 대립하여 그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던 것이다.
㉢ 농민의 반영주투쟁. 농민의 반영주투쟁은 중세말기에 빈번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농민전쟁은 직접적으로 농민의 해방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구교세력의 최고권력자인 로마교황에게 타격을 주어 국민적 종교의 확립이라는 형태로 그 구심점인 군주의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Ⅲ. 절대주의의 특질
1. 절대주의의 권력기구
절대군주제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 있어서 군주는 먼저, 종래까지 지방에 할거하면서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봉건영주들의 권력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한 과정에는 대체로 무력에 의한 정복의 과정이 수반되었으며, 때로는 외교와 通婚 등의 수단도 이용되었다. 그리하여 군주는 영주들의 권력을 타파하여 행정권을 빼앗는 대신, 그들을 귀족으로 임명하고, 승려에게도 같은 지위를 주어, 귀족과 승려를 다같이 절대주의권력의 지주로 삼았다. 그 결과 중세의 지방분권적·다원적 권력구조는 절대군주에 의하여 중앙집권적·일원적으로 재편성되었다.
(1) 상비군
중세국가와 비교할 때 근대국가는 통치의 관료제화와 상비군의 보유라는 점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를 보인다. 통치의 관료제화 자체도 성립당시의 근대국가들이 항시 처해 있던 전쟁을 위한 여러 가지의 노력과 밀접히 관련되지만 상비군 확보의 문제는 일단 관료기구 확충의 문제와는 별도로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중세국가에서 군사력의 동원은 봉신으로서 군왕에게 군사복무 의무를 지니는 봉건귀족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따라서 군왕 자신이 보유하는 상비군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백년전쟁 때만 하더라도 기사군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적 의무군과 용병군이 혼합적으로 사용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상비군의 형식을 취하면서 존재하기 시작한 무장집단은 군왕의 개인적 경호부대였다. 1350년대를 전후하여 각 지역의 군왕 또는 대영주들 정예부대들을 자신의 주위에 지속적으로 배치하여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한편 지배자로서의 권위도 고양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상비군은 문자 그대로 항상 설치되어 있는 군대라는 의미 외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군대국가의 상비군을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 콘타민(Contamin)은 상비군의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항을 들고 있다.
(1) 개인 구성원의 변화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안정된 정규적 구조로서의 군사조직 단위가 존재해야 한다.
(2) 전시나 평시를 막론하고 항구적 군대로서 인정받는 현역의 군대를 갖고자 하는 당국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3) 일정한 기간에 고향을 떠나 신체적 자유를 속박당하면서 군사직에 종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충분한 청년층의 인구가 있어야 한다.
(4) 이러한 상설적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하고 정기적인 수입이 있어야 한다. 즉, 납부자들이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 안정된 조세제도가 있어야 한다.
콘타민에 따르면 이러한 조건에 충족되는 상비군의 존재는 단순히 제도의 발전이나 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군대에 소집되는 사람, 지배층 및 일반인들 전체에 걸친 태도의 변화, 즉 상비군 존재의 필요성, 군대유지에 따르는 재정적 부담의 능력과 그 부담을 질 수 있다는 신념이 생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총체적 변화가 이루어진 것은 백년전쟁 당시의 프랑스였다.
백년전쟁을 전후하여 중세 말, 근세 초에 새롭게 등장한 용병군 중심의 군사체제는 군주들이 자신의 개인 영지 수입 및 기타 영토적 지배자로서 누리던 특권에서 영유하는 자금만으로는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봉건적 기부금이 아닌 전국적으로 일정한 비율로 일괄적으로 부과할 수 있는 조세부과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몇 가지 조건은 부과되었는데 우선 하나는 그 위기가 '명백'(evident)한 것이어야 했고, 다른 하나는 사적 권리의 유보는 당사자의 동의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quod omnes tangit ab omnibus approbetur)는 또 다른 중세법적 원리였다.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이 모두 부합되어 나타난 것은 1356년 9월 푸아티 전투가 끝난 이후 국왕의 나포에 따라 진행된 석방을 위한 회담과 실직병사들의 조직적 약탈활동 때문이었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상비군이 시작인데 상비군이 새로운 병력의 동원이 아니라 무질서의 요인이 되는 기존병력의 선발-도태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의 역사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폭력이 사회전체에 만연됨으로써 나타난 혼란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상비군의 설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 국가사회 안에서 군왕의 군사력과 경쟁을 시도하는 어떤 사적 병력도 인정될 수 없고 따라서 순사력, 즉 물리적 강제력은 군왕 또는 국가에 의해 독점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정착하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중세 기사군을 상대적으로 몰락하게 만든 것은 새로운 군사기술-새로운 무기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전술, 전략-의 등장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농업경제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경제적 여건이 군주들로 하여금 새로운 군사기술을 채택케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상비군의 확보의지는 이미 한 세기 전에 나타났지만 그러한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었던 경제적 조건이 당시로서는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의 경우 샤를르 7세 때에서야 가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당시 샤를르 7세 밑에서 재상을 지낸 파리의 거상 겸 징세청부업자인 자크 괴르(Jacques Coeur)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비군의 창설은 전쟁가 그에 따른 내혼에 대한 반응으로 만들어졌으나 전쟁과 내환이 종식되면서도 그대로 남아 군주의 국내외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왕국 내에서 벌어지는 어떠한 반란도 신속히 진압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상비군은 중세 전체에 걸쳐 명목상으로 존재하던 국왕의 권위를 실질적으로 보장해 주는 수단이 되어 왕권의 상징처럼 되었다.
이러한 상비군의 확보는 국왕의 재정적 능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의 변화,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성장을 국왕의 재정적 능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조세기구의 출현과 아울러 상비군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여론의 조성 등 몇 가지의 필요한 조건들이 동시에 충족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점에서 우리가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이러한 성숙된 조건 속에서 변화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정치조직은 오로지 왕조국가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근대의 정치사가 절대주의 국가들을 주역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을 넘어서는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관료제
전쟁규모의 확대에 따른 봉건 영주 및 기사계급의 몰락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대의 흐름으로 볼 때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쟁 규모의 확대는 상비군뿐만 아니라 그 재정적 부담을 확충시키기 위해 관료제의 특성을 낳게 하는 요소로도 작용하였다. 중세 이후 근대 초에 이르기까지 유럽사에 있어 빈번했던 전쟁은 당시의 국가로 하여금 재정상의 심각한 고민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주된 요소로 작용하였다. 국가의 부채가 늘어갔다는 것은 국가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책을 계속 수행해 나갔다는 점을 말하는 것인데 결국은 파국적 결과를 빚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를 계속 넓혀 가는 노력은 부분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그 결과 절대주의 왕조국가의 기반이 상당 정도 강화되었다.
비록 상당한 액수의 부채가 국가의 강제력을 매개로 한 것이지만 국가가 계속 부채를 얻을 수 있기 위해서는 강제력을 무한히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무한정으로 강제력을 사용할 경우 국가를 상대로 하는 대금업자들은 자취를 감출 것이므로 국가는 부분적으로는 이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기도 하였다. 즉 계속 조세를 증가하여 감으로써 자신의 변제능력을 증명하기도 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변제능력을 보이기 위해 국가는 한편으로 납세자의 납세능력을 최대한도로 넓히고 동시에 이를 국가가 직접 통제함으로써 세입을 극대화하는 노력을 계속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왕실은 전쟁의 지속적 수행에 필수적인 전비의 조달을 위해 민간 대금업자들의 대부에 상당히 의존했는데 이 대부는 조세수입의 증가를 바탕으로 해서만 가능했던 것이었다. 당시 조세수입의 기반을 어렵게 했던 요인들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좁은 조세기반이었다. 즉, 승려와 귀족은 처음부터 면책특권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평민들의 경우에도 부유층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능력에 맞지 않는 가벼운 세금만을 낼 뿐이었다. 지역적으로도 몇몇 지역은 조세권이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방의 귀족의회의 특권에 귀속되어 있었고, 직접세의 징수 역시 관직 매매를 통한 관리들에 의해 이루어지곤 했다. 전쟁이나 내한의 발발과 같은 갑작스러운 재정상의 필요에 따라 관직을 남발하였기 때문에 관리들이 늘어났는데 이러한 관리들의 증가는 오히려 세수증대에 방해가 되었다. 관직판매를 통한 관직의 증가는 기존 관리들에 의해 불만의 이유가 되었고 또한 관할권 분쟁, 부패 등으로 인해 능률적인 조세행정, 즉 공평하고 정확한 세액사정 및 징세가 어려웠다. 더욱이 이들 조세관리들의 세력기반은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명령하는 인기 없는 새로운 조세의 도입 및 확대를 집행하는 데 이들은 상당히 미온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중앙정부의 정책은 조세행정에 대한 통제권을 국가가 직접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의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의 수상이었던 리쉴리에는 지방관리의 감독에 관련된 업무와 관련하여 사용해 오던 군왕의 직접 임용관리로서 감독관을 효율적 조세행정에 기존의 관리들과 병행적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위와 같은 행정체계의 확립은 전통세력에 대한 절대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조세행정을 중앙집권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됨으로써 유럽 각국은 장기간의 전쟁에서 필요한 전비를 조세를 통해 조달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절대주의국가의 특징 중 하나인 관료제가 갖는 의미를 파악해 볼 수 있다고 하겠다.
2. 절대주의 정치권력의 성격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절대주의는 중세봉건사회로부터 근대시민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출현한 정치형태였다. 다시 말하면 중세말기에 봉건사회를 대표하는 봉건귀족과 근대시민사회를 대표하는 시민계급의 상극하는 두 세력간에 일종의 힘의 균형상태가 생긴 틈을 이용하여, 그 어느 세력으로부터도 제약을 받지 않는 초월적인 절대자로서 성립된 것이 절대주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절대주의 정치권력의 성격은 바로 이러한 근대적 요소와 봉건적 요소를 아울러 동시에 가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시민계급에의 이권
원래 절대왕권은 그 성립과정에 있어서 시민계급의 재정적인 원조를 얻어 봉건영주의 권력을 타도하고 통일적인 권력을 수립했다. 이러한 요인으로 인해 절대왕권은 정책적으로 무역과 산업을 발달시킴과 동시에 군사력을 강화하여 식민지나 해외시장을 획득하는데 유력한 작용을 함으로써 봉건사회 내부에서 성장하고 있던 시민계급의 발전을 위해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내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의 동인도회사나 프랑스의 왕립 매뉴팩처의 경우와 같이 절대왕권은 시민계급 중에서 소수의 대상인이나 대금업자 또는 항해업자에게 특허권이나 독점권을 주어 그들의 활동을 보호. 장려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절대주의 정치권력은 근대시민 세력의 진전에 대하여 긍정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2) 구봉건질서의 존속
절대주의 정치권력이 강력한 통일적 권력으로 성립되었을 때에는 하층시민이나 농민의 성장을 막고 그들을 억압하는 권력으로 되어 이미 충복으로 된 봉건세력을 유지. 보호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절대주의 권력은 개개의 봉건권력은 타파하면서도 봉건제도 그 자체는 폐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영주의 권력을 집중하여 통일함으로써 봉건제도를 전국적인 규모로 재편성하였다. 따라서 영주는 주민에 대한 정치적 지배력은 잃었지만, 농민으로부터 봉건지대를 수탈하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국왕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한 봉건영주에게 귀족이라는 특권신분을 주어 절대주의 권력기구에 참여케 하였다. 그리하여 봉건귀족은 종래와 같이 영내에서 최고의 권력자로는 있을 수 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지배계급으로서의 지위는 고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봉건주의 정치권력은 본질적으로 봉건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3. 지배의 새로운 측면
1665년에서 1690년 사이에 루이 14세는 민사. 형사 재판의 절차, 산림과 하천의 관리, 해운업 및 항해, 흑인 노예무역 등과 같은 다양한 사안들과 관련하여 프랑스 전체에 걸쳐 균일하게 적용될 왕령과 법령들을 반포하였다. 프로이센에 있어서도 경찰 조례의 형식을 빌려 지배자의 이름으로 엄청난 양의 전국적인 규칙들이 만들어졌다.
지배자들의 이러한 법률 제정 행위는 그 법령과 관련된 특수한 이해관계나 활동뿐 아니라 법의 의미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신분제 국가에 있어서 '법'은 본질적으로 지배자뿐 아니라 신분의회와 그 구성단체들에 의해 주장된 권리들과 특권들의 덩어리였다. 즉 법은 일반적으로 고대적 기원을 갖는 분화된 법률적 권리의 형태로 존재했고 원칙상 그러한 권리를, 필요하다면 무력적으로, 지킬 수 있는 권리 수혜자들의 단체적 권능 안에 있었다. 그러한 법은 새로운 계약의 체결이나 또는 기존 계약의 수정을 통해 신분회에 의해 또는 신분회의와 지배자 사이에 아니면 개별적 신분집단들 사이의 심의나 상호조정을 통해 수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법은 일반적 의지의 산물로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원칙상 어떤 단일 당사자의 뜻대로 수정될 수 없었다. 즉 법의 타당성은 궁극적으로는 관습의 완만한 침전과 지배권능의 정당한 소유자들 사이에서 합의된 이해를 통해 작용하는 신의 초인간적 기관에 놓여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지배자가 자신의 주권적 의지의 행위로서 새로운 법을 만들고 그것을 점차로 포괄적이고 효과적으로 발전하던 사법체계를 통해 준수되도록 할 수 있다는 사상은 전적으로 혁명적인 일이었다. 그러한 사상은 법을 지배의 틀에서 지배를 위한 도구로 바뀌게 하였다. 더욱이 그러한 법은 원래 영역 전체에 걸쳐 적용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방의 신분의회는 그 법을 지방 조건에 맞춰 변형시킬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자신의 주권적 의지로서 법을 표출함에 있어서 지배자는 신분의회 세력을 특권적 지위를 갖는 백성의 한 부분으로 취급하였고 이들 중의 어떤 특정 요소는 새로운 지배가 가져온 불쾌한 결과로부터 호의적으로 면제될 수 있을 뿐이라고 여겼다.
이렇게 하여 지배자는 법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제시하고 뒷받침하는 에 있어 신축적이고 무제한적으로 확장, 수정할 수 있는 도구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지배자의 권력은 봉건제적 신분제국가에서와 같이 더 이상 개별적인 권리와 특권들의 집합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는 보다 균일하고 추상적이며, 따라서 잠재적으로 큰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되었다. 따라서 지배자의 권력은 개념적으로 특정 지배자와 떨어져서 존재하게 되었다.
Ⅳ. 절대주의의 쇠퇴
1. 절대주의 권력기반의 동요
(1) 시민계급의 성장
절대주의의 성립과 더불어 발전의 기회를 얻게 된 시민계급은 상업과 항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공업과 농업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서 산업가들이 나타났고, 그들에 의하여 생산의 발전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종래 상업. 운수, 금융 등의 유통업에 종사하는 동안에는 그들 시민계급에게는 절대주의 권력과의 타협. 제휴와 그 보호가 필요하였으나, 이제 그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상황 하에서는 그들 시민은 낡은 절대주의정책에 구속감을 느끼게 되고, 나아가서는 차츰 절대주의 그 자체를 타도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절재주의 권력측도 후기에 이를수록 초기의 시민계급과의 협조책을 버리고, 시민계급의 발전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2) 구봉건귀족층의 이반
절대주의의 또 다른 권력기반이 되고 있던 봉건귀족세력의 경우에도 변동의 기운이 나타났다. 그것은 농민측으로부터의 저항에 의하여 표현되었다. 절대주의가 성립되어 가는 과정에서는 농민들은 봉건영주의 역공세에 대항하기 위하여 절대군주의 권력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절대주의가 확립된 뒤에도 그들의 지위는 과거보다 근본적으로 나아지기는커녕 도리어 더 나쁜 상태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들은 귀족에게 봉건지대를 바치는 외에 국왕에 대한 조세도 새로 지불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적 부담은 절대주의 초기에 일단 안정되는 듯했던 농민생활을 다시 궁핍 속으로 몰고 갔으며, 그것은 결국 구족의 부력을 감축시키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2. 반체제세력의 대두
(1) 중산지주층의 대두
상업의 발전과 경제적 변영은 시민계급의 부를 축적시켰고,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엔클로져운동을 강력히 추진함으로써 새로운 중산지주층이 확대되었다. 이들은 의회의 하원에 결집하여 유력한 정치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문벌과 특권에 안주하는 구귀족과 대립하였으며, 절대군주를 계몽하여 개명케 함으로써 절대주의를 서서히 개혁하려고 시도하였다.
(2) 신흥자본가의 성장
무역과 항해의 발달은 새로운 상인 및 산업가의 일군을 성장케 하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그들은 17세기에 들어와 특허상인이나 궁정자본가에 대항하는 세력으로서 여러 산업부문에서 광범하게 성장해 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왕권의 비호 밑에서 일부 대상인이 얻고 있던 특허나 독점을 반대하고 경제조직의 민주화를 요구하였으며, 나아가 국왕이 자의로 세금을 부과하거나 인상하는 처사에 항의하기에 이르렀다.
Ⅴ. 결 론
유럽대륙제국에 있어서의 절대왕정의 형성을 철저하게 추구하는 것은 목적의식적 행동에 따라서 생기는 의도된 부차적 작용이 얼마나 최대의 역사적 성과일 수 있는가를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것만으로 최고의 의의를 가진다. 봉건적 연합체가 느슨해진 조직으로부터 통일국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결코 군주들이 당초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처음에는 자신을 본질상 생성중인 통일국가 밖에 서 있는 실력이라고 느끼고 주인으로서 이를 지배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이리하여 한편으로는 지배자, 다른 한편으로는 국토와 국민이라는 양자간의 새로운 이원주의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4. 개신교
개신교(改新敎, Protestantism)는 16세기 종교 개혁으로 시작, 발전하여 오늘날 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와 함께 그리스도교의 3대 세력을 형성한 교파를 두루 일컫는 통칭이다. 중세 말(16세기 초)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구조적으로 타락했다고 여긴 루터, 칼뱅 등 신학자들의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그리스도 교회로 일반적으로 가톨릭을 구교라고 하는데 대해 개신교, 신교 라고도 한다.
개신교의 주요 교리는,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한 다섯 솔라로 요약할 수 있다. 오늘날의 개신교 종파들 중엔 다섯 솔라를 그대로 계승하는 종파는 물론, 그 중 일부만 교리로 채택하는 종파도 있다. 종교 개혁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개신교 종파로는 루터교를 비롯한 메노나이트, 재세례파, 후터라이트, 아미시파, 장로교(개혁교회)등이 있다. 근대 영국에서는 성공회의 주교제와 예복사용(즉, 초기 영국 성공회의 로마 가톨릭적인 면)에 반대하며, 성경 이외에 다른 어떤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청교도[1]가 등장했으며, 이들 청교도에게서 조합교회와 침례교회가 갈라져 나왔다. 18세기에는 성공회의 사제였던 존 웨슬리 신부가 직접 민중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감리교가 시작되었다. 미국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 그리스도 교회, 오순절교회 등의 교파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많은 교파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연합운동이 시작되었고 1937년 에든버러에서 열린 신앙 및 직제 협의회와 옥스퍼드에서 개최한 생활과 실천 협의회에서는 두 조직을 합쳐 단일 협의회를 결성하자는 데 동의하였다. 1938년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에큐메니컬 운동가들 중심으로 새 협의회를 만들기 위하여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 모여 협의회 헌장 초안을 작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교회가 구성원이 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1948년에 이르러서야 제1차 총회를 열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출범하였다. 여기에는 개신교회와 동방정교회가 참여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로마 가톨릭은 참관인들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4억 2천만 복음주의적 교회들과 교인들의 연합체인 세계복음주의연맹(WEA)가 결성되고 1974년 로잔 회의에서 로잔언약이 선포되었으며 양 기구간의 협력이 가속화 되는등 가시적인 거룩한 일치의 결과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어 의견차가 있음에도 교회 일치를 향한 발걸음은 계속되고 있다.
다섯 솔라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다섯 솔라입니다.
종교 개혁 당시 개혁자들의 사상을 요약한 5개의 표어이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 진리냐 아니냐의 유일한 권위, 곧 그리스도교 진리의 원천은 성경에 있다는 뜻이다. 즉 전통은 신앙에 있어서 2차적인 의미를 띠며 신앙에 관한 최종적인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다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교리. 이는 성경이 계속 분명히 천명하는 바이다.
오직 은혜(Sola Gratia) :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참된 생명력을 잃고('죽어 있는 상태') 죄의 종노릇하고 있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결코 이를 수 없는 상태로, 현세에서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만 사후의 심판에서 죄에 대한 대가로 영원한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헌데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스스로 죄를 벗어날 능력이 없으므로,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완전히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믿음을 통해 받는 것뿐이라는 것이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에 담긴 내용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옮겨지는 놀라운 은혜를 받는다.
오직 믿음(Sola Fide) : 하나님이 내리시는 구원의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 구원과 영생은 믿음으로 얻는다.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자신의 의는 전혀 없기 때문에 성도는 오직 십자가를 자랑할 뿐이다. 예를 들어 선행은 구원에 필요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 받은 결과로 발생하는 열매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며 믿음에서 선행이 나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선행은 믿음의 외적 표현으로 볼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기독교인의 믿음이 고백되어지는 은혜로운 예배를 통해 주권적으로 선택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자에게 이미 함께계신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를 새롭게 하신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든 삶의 예배도 성도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한다. 예수를 믿고 신앙안에서 회심한 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예수그리스도의 사죄의 복음과 보혈을 믿는 믿음 안에서 회개로 죄를 피하고 싫어하여 습관적으로 끝까지 의도적으로 자범죄에 빠져있지 않는다.
오직 주님만 영광 받으심(Soli Deo Gloria) :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교리이다.
개신교 종파 [편집]
1517년에 일어난 루터의 종교 개혁 운동에 따라 기존의 로마 중심의 서방 교회, 즉,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분리된 개신교 종파들이 하나 둘씩 형성되기 시작했다. 세계 기독교 백과에 따르면 2001년 현재 238개 국가에 33,000개 이상의 개신교 종파가 있으며, 매년 270~300개의 종파가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2] 주요 개신교 종파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주의: 다음 순서는, 역사적 순 또는 각 교파들이 구체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시기의 순서에 따라 나열한 것이다.[3])
루터교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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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가장 먼저 분리된 루터교는, 교회에서 성경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권위도 두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라는 세 가지 원리는 루터교를 떠받고 있는 기둥이다. 루터교에서는 평신도들이 단상에 올라와 설교를 하거나 성찬(성체를 나누는 잔치)을 성직자들과 함께 베풀기도 한다. 종교 개혁 시대에 분리된 루터교는 비슷한 시기에 분리된 장로교와 신학적으로 비슷한 점이 많으며, 장로교와 더불어 다섯 솔라 정신을 공유한다. 루터교의 세계적 교인수는 약 7천만 명이다.
장로교 (개혁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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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장 칼뱅이 스위스에서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시대로 올라가며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John Knox)에 의해 확립되었다. 선거에 의해 선출된 장로가 목사를 보필하는 장로제에서 그 이름이 연유한다. 신학적으로는 종교 개혁 시대에 체계화 된 개혁주의를 표방한다. 다섯 솔라를 핵심 교리로 인정한다. 대한민국에서는 600만 이상의 신자들이 포함돼 있어, 개신교 신자들 중 가장 많은 수가 이 교파에 속해 있다. 크게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성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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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란 전 세계적으로 통일된 명칭은 아니고 한국에서만 호칭된다. 영국 국교회라 번역하는 것이 옳다. 신학적 교리적으로 성공회는 종교개혁을 통해 개혁하는 보편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라는 고유성격를 형성하여 헨리 8세의 혼인무효 문제와 관련하여로마 가톨릭과 갈등하였으며 토마스 모어는 로마 가톨릭입장을 견지하다가 사형을 당했다. 결국 불화 때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하게 되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같은 가톨릭교회 소속의 건물을 무단 점유하는 등 많은 불법을 자행하면서까지 로마교회에 대항하였다.
감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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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9년 영국국교회의 성직자였던 존 웨슬리가 창시한 이 교파는, 각 신도가 엄격한 규율을 통해 자기를 통제해야 한다고 (Methodist)하며 현재 세계적으로 약 7천5백만명이 넘는 교인이 있다. 감리교회는 미국에 파견할 선교사에 대한 안수를 거부당한 존 웨슬리 목사의 독자적인 안수에 의해 영국국교회와 분리되었다. 미국 감리교회는 영국의 선교사 코크에 의해 1784년 설립되었으며 미국 남북전쟁으로 북 · 남 감리교회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연합감리회가 세워졌다. 한국에는 1884년 미국 북감리교회의 일본 주재 선교사 맥레이가 북감리교회의 지부를 설립한 이후, 1933년에 남 · 북 감리회가 미국보다 앞서 연합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고, 해방 이후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로 하여 현재에 이른다.
침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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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교는 구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스스로 고백한 후, 물에 완전히 잠기는 세례인 ‘침례’를 실시하기 때문에 침례교라는 교단 명칭을 갖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침례교 교인의 수는 약 1억 5백만 명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한국 침례교인들은 중세기말 유럽에서 부흥했지만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측으로보터 공히 이단으로 쫓겨난 '재세례파'의 교리와 혼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정통으로 인정된 침례교단은 기독교한국침례회(기침), 성서침례교회이며, 본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곳은 기독교복음침례회(권신찬, 유병언), 대한예수교침례회(이요한(본명 이복칠), 박옥수)가 있다. 미국에서는 기독교인 중 로마 가톨릭 다음으로 많은 신자수를 갖고있는 교파이지만 한국에서는 자칭 '침례교파'임을 주장하는 다수의 '독립 교회'가 난립하고 있다.
퀘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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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Quaker)는 17세기에 등장한 기독교의 한 종파이다. 친우회(형제들의 단체, Society of Friends)란 뜻을 가지며, 퀘이커라는 이름은 ‘하나님 앞에서 떤다’는 조지 폭스의 말에서 유래했다. 1650년대에 영국의 조지 폭스(George Fox)가 제창한 명상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창시자 조지 폭스는 19세에 집을 나와 4년 간의 구도여행을 통해 펜들 힐(Pendle Hill)이라는 산에서 환상을 보며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퀘이커는 영국 정부에 의해 탄압받았으나, 퀘이커 신도 윌리엄 펜이 불하받은 북아메리카 식민지 영토에 도시(現 미국 펜실베이니아)를 세움으로써 종교적 자유를 허용받았다. 국내의 유명한 퀘이커 교도로는 씨알 함석헌 선생이 있다.
성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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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는 19세기말 미국 감리교에서 존 웨슬리의 완전주의적 입장을 강조하며 형성된 교파로서, 20세기초 미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던 성결 운동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 이 4가지를 4중 복음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그 중 성결을 가장 강조한다. 성결교 신학의 배경에는 우선 개신교를 바탕으로 두고 있기에 개신교의 복음주의와 그 당시 시대적으로 19세기에 있었던 성결 운동, 그리고 웨슬리의 신학적 배경이 되었던 알마니안주의를 들을 수 있다. 한국의 성결교 전파는 1901년 미국인 카우만이 일본에 설립한 동양선교회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1907년에 한국에 대한 선교가 본격화되면서 독립 교파가 되었다. 1962년에 이념의 차이로 인하여 다시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 1991년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불법 교권 행사로 인하여 일부 교역자들이 불법 교권 행사를 거부한 뒤 교단을 나와 예수교대한연합성결교회를 조직하여 현재 3개의 교단으로 분리되었다.
회중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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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교회, 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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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대표적인 오순절파로는 하나님의성회(The Assembly of God)’가 있다. 믿음을 통한 병고침 등 종교적 체험과 간증을 강조한다.대한민국에서는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유명하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에 속한 대부분의 교회 이름이 ‘순복음교회’로 끝나기 때문에 통상 순복음교회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영산 조용기 목사의 동생인 조용목 목사(은혜와 진리교회)가 따로 만든 예수교대한하나님의성회도 있었다. 2007년 이 교단들의 통합이 추진되었으나 특별법을 문제로 무산되어 현재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통합),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여의도순복음)으로 나뉘게 되었다.
[[파일:== 세계 개신교 신자 수 현황 == 2005년 현재 전 세계 개신교 신자 수는 약 7억 명 정도이다.[4]
침례교회 : 1억 5백만명[5]
감리교회 : 7천 5백만명
아프리카 감독 감리교회 : 5백만명
개혁주의 교회 : 1천 5백만명
칼뱅주의
스위스 개혁 교회 : 240만명
네덜란드 개신 교회 : 230만명
장로교회
장로교회(미국) : 2백만명
회중주의교회
그리스도 연합 교회 : 120만명
루터교회 : 7천만[6]
제세례파 : 450만명
메노나이트, 아미시, 퀘이커 등
비교파 복음주의 : 4천만명
복고주의 개신교 : 2천만명]][[파일:]]
한국의 개신교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후, 여러 차례 외국 선교사들이 선교를 시도했지만 직접적인 선교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만주 지역에 있는 한국인을 중심으로 전도가 이루어졌다. 조선의 개신교는 1879년 이응찬(李應贊), 서상륜(徐相崙, 1848년~1926년) 등이 중국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다음 신앙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시작되었다.[출처 필요] 조선의 개신교는 신앙 공동체 형성 직후부터 성경 번역에 착수하여 1882년 함경도 방언으로 된 <예수성교 누가복음젼셔>를 출판했다. 따라서 한국의 개신교 전래는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1883년 이수정이 일본에서 야스가와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한글 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해 1885년에는 〈마가의 전복음셔언해〉을 출판해 냈다. 그의 성서 번역은 일본에서 체류하고 있던 서구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서의 선교를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7] 이수정은 미국에 한국에 선교사를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1885년 4월 5일 같은 날 장로교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와 미국 북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가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광혜원을 설립하였고, 아펜젤러 목사는 배재학당(現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밖에 침례교는 캐나다의 맬콤 팬윅에 의해 전래되었으며, 1905년 구세군교회도 구세군 사관 허가두 중령에 의해 들어왔다.
평양 대부흥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평양 대부흥입니다.
평양 대부흥은 1907년에 평양에서 있었던 큰 교회 성장을 일컫는 말이다. 개신교의 세력이 강했던 조선 북쪽 지역의 개신교 신자,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공개적 고백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길선주 장로를 비롯, 신자들과 선교사들은 횡령 및 교우들에 대한 교만한 태도 등을 고백하고, 이를 돌려주는 절차 등을 밟았다. 이후로 개신교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이 일어났다.[8]
일제 강점기의 신사참배
1930년대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린 일본 제국에서는 한국의 교단들을 통폐합하고 일본과 조선의 소위 미션스쿨과 개신교 교회들에 대해 신사참배를 강요한다. 이때 조선 개신교는 크게 세 가지 반응을 보였다: 적극 참여파 / 무관심한 소극파 / 적극 반대파. 주기철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상숭배를 할 수 없다는 종교적 이유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한 사람들과, 양주삼처럼 신사참배는 종교 행위가 아니라면서 찬성하는 부류로 나뉘었다. 당시 대다수의 장로교, 감리교는 이에 찬성하여 신사참배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친일활동을 한 개신교 목사들이 교회에서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총회장이나 노회장 등의 교단지도자를 역임했기 때문에, 친일파 청산을 한국 개신교가 사실상 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이로 인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고신(고려)파가 분리되었다.[9] 그러나 최근들어 민족적 신사참배에 대한 교회적이고 민족적인 회개운동이 전개 되었고 주기철 목사를 복권시키는등의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
광복 이후의 개신교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개신교가 크게 성장하였다. 미국에서 발간되는《크리스천 월드(Christian World)》가 1993년에 발표한 세계 대형 교회의 순위를 보면, 세계 10대 대형 교회 안에 한국 교회가 1위와 2위를 포함하여 5개가 포함되어 있으며, 20위 안에는 10개, 그리고 발표된 50위 안에는 23개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10]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온 것이 1885년, 진정한 개신교 선교의 시작 시점이 대한민국의 건국 이후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대한민국의 개신교는 불과 50여 년 정도 만에 세계 선교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의 성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 인구의 약 20% 정도가 개신교 신자이다.
5. 종교혁명
중세 가톨릭교회를 분열시키고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수립한 16세기의 교회개혁. 중세 가톨릭교회는 14세기의 교회분열로 인하여 보편적 권위를 잃고 보헤미아에서는 J. 후스에 의하여 교회개혁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콘스탄츠공의회(1414∼16)는 분열의 해결 즉 교회 전체의 통일과 후스 처리에 일단은 성공하였으나 교회 전체의 개혁에는 실패하였다. 그 뒤 신학자·신비주의자를 비롯해서 각 방면으로부터 개혁요구가 제시되었으나 가톨릭교회는 세속적 영화와 권세를 추구하여 교의의 형해화(形骸化), 성직자의 부패를 쇄신하지 못하였다. 이때 M. 루터가 주장한 종교개혁은 새로운 신앙원리에 바탕을 둔 시도였으나, 결과적으로 가톨릭교회를 분열시키고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종교개혁운동은 J. 칼뱅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기를 보이며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이 무렵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중앙집권적 국가가 형성되는 단계여서, 그 과정에 종교개혁운동이 끼어들게 되었다. 각국의 정치사정에 따라 그 전개양상은 여러 가지 변화를 보였는데, 국왕권력의 절대화에 이바지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국가의 독립운동의 사상적 근간이 되는가 하면 양심의 자유도 낳게 하여 근대화에 이바지하는 측면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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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사] <원거리무역> 무역학과, 20040561, 진철호.
I. 절대왕정성립
서양정치사에 있어 16세기를 근대사의 시발로 삼는 이유는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두 개의 기본적 정치과정인 통치와 전쟁이 이미 절대주의 왕조국가를 기반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15세기 말부터 스페인과 프랑스에 의해 대표되는 두 개의 절대주의 왕국이 유럽정치세계에서 주요한 두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중세 봉건귀족과 반독립적인 도시국가의 권력은 점차로 그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는 기본적으로 정치단위들 간의 갈등의 궁극적 수단인 군사력이 과거의 소규모 정치조직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고가(高價)한 것으로 커졌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각종 군사기술의 발전, 육해군 병력규모의 증가, 국제관계 패턴의 변화 등은 전쟁을 종전보다 훨씬 더 장기화시켰다. 이에 따라 이러한 엄청난 규모의 병력, 장비보급 등을 전혀 감당할 수 없는 봉건적 영주들이나 소규모의 도시국가들은 정치적 독립을 상실하여 갔고 대신 새로운 추세에 맞출 수 있는 자원을 보유하는 영토국가(territorial state)들이 정치적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큰 변화, 어떤 의미에서는 혁명적 변화가 바로 16세기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Ⅱ. 절대주의의 성립
1. 중세봉건사회의 해체
절대주의는 중세봉건국가에서 근대시민국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난 정치형태로서 중세의 지방분권적. 다원적인 권력구조와는 달리, 군주가 국토와 권력을 중앙집권적.일원적으로 통일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데 그 특색이 있다. 이러한 절대주의는 16세기초부터 유럽諸國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봉건사회의 해체와 더불어 성립되었다.
봉건사회는 농노의 노동에 의하여 경영되는 장원(Manor)을 경제단위로 하고, 그로부터 이룩된 봉토를 매개로 하여 많은 세속적 영주가 상하로 종속관계를 맺음으로써 성립된 사회질서였다. 이 시기의 신분적 위계제(hierarchy)는 농노를 기저로, 그 위에 교회와 기사계급이 있었으며 정점으로 군주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에는 정치적 지배권력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장원을 각 영주가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주는 단지 허명뿐인 명목상의 권력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군주도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영주에 불과하고, 다만 장원의 크기나 혈통에 있어서 다른 영주들보다 우세할 뿐이었으므로 領民에 대한 군주의 지배력은 의례적이며 간접적인데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봉건사회도 여러 차례의 십자군정벌이 수행되는 동안에 점차 변화하여, 13세기 말경에는 그 내부에서 도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또 도시에서는 농산물과의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수공업생산이 조직적으로 행해졌으며, 특히 십자군에 의한 이탈리아도시의 발전을 계기로 13.4세기에는 수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수공업의 발전에 따라 상업이 발달되었으며, 화폐경제도 보급되어 그것이 장원농촌에도 침투하여 갔다. 이와 같은 수공업의 발전과 화폐경제의 침투는 장원의 자급자족적 경제와 노동지대의 존속을 불가능하게하여 결국 농노제의 변질을 가져 왔으며, 그러한 경향은 십자군에 의한 기사의 몰락과 결합하여 중세봉건사회를 크게 변질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까지 명목적이었던 군주의 지배권력이 강화되어 갔으며, 이에 따라 군주는 여러 영주의 세력을 제압하여 국가의 통일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러한 통일은 또 시민계급의 요구와도 일치되는 것이었다.그것은 그들 시민계급에게는 영주들의 지방분권적 할거상태가 시민들의 자유로운 통상을 방해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그들도 통일국가의 출현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인에 의하여 스페인. 영국.프랑스 등에서는 14세기 후반에서부터 15세기 사이에 군주에 의한 중앙집권적 경향이 현저히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세의 전형적인 봉건사회는 해체의 과정을 걷게 되었고, 그 과도적 단계에서 절대주의가 성립되었다.
2. 절대주의의 성립기초
㉠ 항해와 무역의 발달. 절대주의가 유럽제국에서 성립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경부터였는데, 그 직전인 15세기말에 이룩된 '지리상의 발견'으로 유럽제국의 항해와 무역활동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상인과 고리대금업자의 부가 현저하게 증대되었다. 이 요인은 봉건영주에게 이중으로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상업이나 무역의 발달로 영주의 생활이 더욱 더 화폐에 의존하게 됨에 따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인이나 고리대금업자의 資力에 영주가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봉건영주가 그의 경제적 궁핍을 타개하기 위하여 갖은 수단을 다하여 주민 특히 농민에 대한 탄압과 수탈을 강화한 결과, 영주에 대한 농민의 반란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 문예부흥(Renaissance)과 종교개혁(Reformation). 문예부흥의 문화는 십자군의 원정이후 동서무역의 중심지로서 번영하게 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중심으로 하여 크게 진흥하였다. 그리고 이에 맞물려 종교가 가졌던 폐단이었던 하나의 거대한 봉건영주로서의 지위에 대한 반발로 종교개혁운동이 전개되었다. 중세의 카톨릭 교회는 하나의 정치권력체로서 주민의 사생활까지도 구속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로운 활동을 원하는 시민계급은 교회세력에 대립하여 그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던 것이다.
㉢ 농민의 반영주투쟁. 농민의 반영주투쟁은 중세말기에 빈번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농민전쟁은 직접적으로 농민의 해방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구교세력의 최고권력자인 로마교황에게 타격을 주어 국민적 종교의 확립이라는 형태로 그 구심점인 군주의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Ⅲ. 절대주의의 특질
1. 절대주의의 권력기구
절대군주제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 있어서 군주는 먼저, 종래까지 지방에 할거하면서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봉건영주들의 권력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한 과정에는 대체로 무력에 의한 정복의 과정이 수반되었으며, 때로는 외교와 通婚 등의 수단도 이용되었다. 그리하여 군주는 영주들의 권력을 타파하여 행정권을 빼앗는 대신, 그들을 귀족으로 임명하고, 승려에게도 같은 지위를 주어, 귀족과 승려를 다같이 절대주의권력의 지주로 삼았다. 그 결과 중세의 지방분권적·다원적 권력구조는 절대군주에 의하여 중앙집권적·일원적으로 재편성되었다.
(1) 상비군
중세국가와 비교할 때 근대국가는 통치의 관료제화와 상비군의 보유라는 점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를 보인다. 통치의 관료제화 자체도 성립당시의 근대국가들이 항시 처해 있던 전쟁을 위한 여러 가지의 노력과 밀접히 관련되지만 상비군 확보의 문제는 일단 관료기구 확충의 문제와는 별도로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중세국가에서 군사력의 동원은 봉신으로서 군왕에게 군사복무 의무를 지니는 봉건귀족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따라서 군왕 자신이 보유하는 상비군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백년전쟁 때만 하더라도 기사군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적 의무군과 용병군이 혼합적으로 사용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상비군의 형식을 취하면서 존재하기 시작한 무장집단은 군왕의 개인적 경호부대였다. 1350년대를 전후하여 각 지역의 군왕 또는 대영주들 정예부대들을 자신의 주위에 지속적으로 배치하여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한편 지배자로서의 권위도 고양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상비군은 문자 그대로 항상 설치되어 있는 군대라는 의미 외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군대국가의 상비군을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 콘타민(Contamin)은 상비군의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항을 들고 있다.
(1) 개인 구성원의 변화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안정된 정규적 구조로서의 군사조직 단위가 존재해야 한다.
(2) 전시나 평시를 막론하고 항구적 군대로서 인정받는 현역의 군대를 갖고자 하는 당국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3) 일정한 기간에 고향을 떠나 신체적 자유를 속박당하면서 군사직에 종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충분한 청년층의 인구가 있어야 한다.
(4) 이러한 상설적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하고 정기적인 수입이 있어야 한다. 즉, 납부자들이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 안정된 조세제도가 있어야 한다.
콘타민에 따르면 이러한 조건에 충족되는 상비군의 존재는 단순히 제도의 발전이나 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군대에 소집되는 사람, 지배층 및 일반인들 전체에 걸친 태도의 변화, 즉 상비군 존재의 필요성, 군대유지에 따르는 재정적 부담의 능력과 그 부담을 질 수 있다는 신념이 생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총체적 변화가 이루어진 것은 백년전쟁 당시의 프랑스였다.
백년전쟁을 전후하여 중세 말, 근세 초에 새롭게 등장한 용병군 중심의 군사체제는 군주들이 자신의 개인 영지 수입 및 기타 영토적 지배자로서 누리던 특권에서 영유하는 자금만으로는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봉건적 기부금이 아닌 전국적으로 일정한 비율로 일괄적으로 부과할 수 있는 조세부과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몇 가지 조건은 부과되었는데 우선 하나는 그 위기가 '명백'(evident)한 것이어야 했고, 다른 하나는 사적 권리의 유보는 당사자의 동의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quod omnes tangit ab omnibus approbetur)는 또 다른 중세법적 원리였다.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이 모두 부합되어 나타난 것은 1356년 9월 푸아티 전투가 끝난 이후 국왕의 나포에 따라 진행된 석방을 위한 회담과 실직병사들의 조직적 약탈활동 때문이었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상비군이 시작인데 상비군이 새로운 병력의 동원이 아니라 무질서의 요인이 되는 기존병력의 선발-도태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의 역사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폭력이 사회전체에 만연됨으로써 나타난 혼란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상비군의 설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 국가사회 안에서 군왕의 군사력과 경쟁을 시도하는 어떤 사적 병력도 인정될 수 없고 따라서 순사력, 즉 물리적 강제력은 군왕 또는 국가에 의해 독점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정착하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중세 기사군을 상대적으로 몰락하게 만든 것은 새로운 군사기술-새로운 무기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전술, 전략-의 등장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농업경제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경제적 여건이 군주들로 하여금 새로운 군사기술을 채택케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상비군의 확보의지는 이미 한 세기 전에 나타났지만 그러한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었던 경제적 조건이 당시로서는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의 경우 샤를르 7세 때에서야 가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당시 샤를르 7세 밑에서 재상을 지낸 파리의 거상 겸 징세청부업자인 자크 괴르(Jacques Coeur)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비군의 창설은 전쟁가 그에 따른 내혼에 대한 반응으로 만들어졌으나 전쟁과 내환이 종식되면서도 그대로 남아 군주의 국내외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왕국 내에서 벌어지는 어떠한 반란도 신속히 진압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상비군은 중세 전체에 걸쳐 명목상으로 존재하던 국왕의 권위를 실질적으로 보장해 주는 수단이 되어 왕권의 상징처럼 되었다.
이러한 상비군의 확보는 국왕의 재정적 능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의 변화,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성장을 국왕의 재정적 능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조세기구의 출현과 아울러 상비군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여론의 조성 등 몇 가지의 필요한 조건들이 동시에 충족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점에서 우리가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이러한 성숙된 조건 속에서 변화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정치조직은 오로지 왕조국가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근대의 정치사가 절대주의 국가들을 주역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을 넘어서는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관료제
전쟁규모의 확대에 따른 봉건 영주 및 기사계급의 몰락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대의 흐름으로 볼 때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쟁 규모의 확대는 상비군뿐만 아니라 그 재정적 부담을 확충시키기 위해 관료제의 특성을 낳게 하는 요소로도 작용하였다. 중세 이후 근대 초에 이르기까지 유럽사에 있어 빈번했던 전쟁은 당시의 국가로 하여금 재정상의 심각한 고민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주된 요소로 작용하였다. 국가의 부채가 늘어갔다는 것은 국가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책을 계속 수행해 나갔다는 점을 말하는 것인데 결국은 파국적 결과를 빚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를 계속 넓혀 가는 노력은 부분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그 결과 절대주의 왕조국가의 기반이 상당 정도 강화되었다.
비록 상당한 액수의 부채가 국가의 강제력을 매개로 한 것이지만 국가가 계속 부채를 얻을 수 있기 위해서는 강제력을 무한히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무한정으로 강제력을 사용할 경우 국가를 상대로 하는 대금업자들은 자취를 감출 것이므로 국가는 부분적으로는 이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기도 하였다. 즉 계속 조세를 증가하여 감으로써 자신의 변제능력을 증명하기도 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변제능력을 보이기 위해 국가는 한편으로 납세자의 납세능력을 최대한도로 넓히고 동시에 이를 국가가 직접 통제함으로써 세입을 극대화하는 노력을 계속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왕실은 전쟁의 지속적 수행에 필수적인 전비의 조달을 위해 민간 대금업자들의 대부에 상당히 의존했는데 이 대부는 조세수입의 증가를 바탕으로 해서만 가능했던 것이었다. 당시 조세수입의 기반을 어렵게 했던 요인들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좁은 조세기반이었다. 즉, 승려와 귀족은 처음부터 면책특권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평민들의 경우에도 부유층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능력에 맞지 않는 가벼운 세금만을 낼 뿐이었다. 지역적으로도 몇몇 지역은 조세권이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방의 귀족의회의 특권에 귀속되어 있었고, 직접세의 징수 역시 관직 매매를 통한 관리들에 의해 이루어지곤 했다. 전쟁이나 내한의 발발과 같은 갑작스러운 재정상의 필요에 따라 관직을 남발하였기 때문에 관리들이 늘어났는데 이러한 관리들의 증가는 오히려 세수증대에 방해가 되었다. 관직판매를 통한 관직의 증가는 기존 관리들에 의해 불만의 이유가 되었고 또한 관할권 분쟁, 부패 등으로 인해 능률적인 조세행정, 즉 공평하고 정확한 세액사정 및 징세가 어려웠다. 더욱이 이들 조세관리들의 세력기반은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명령하는 인기 없는 새로운 조세의 도입 및 확대를 집행하는 데 이들은 상당히 미온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중앙정부의 정책은 조세행정에 대한 통제권을 국가가 직접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의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의 수상이었던 리쉴리에는 지방관리의 감독에 관련된 업무와 관련하여 사용해 오던 군앙의 직접 임용관리로서 감독관을 효율적 조세행정에 기존의 관리들과 병행적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위와 같은 행정체계의 확립은 전통세력에 대한 절대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조세행정을 중앙집권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됨으로써 유럽 각국은 장기간의 전쟁에서 필요한 전비를 조세를 통해 조달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절대주의국가의 특징 중 하나인 관료제가 갖는 의미를 파악해 볼 수 있다고 하겠다.
2. 절대주의 정치권력의 성격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절대주의는 중세봉건사회로부터 근대시민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출현한 정치형태였다. 다시 말하면 중세말기에 봉건사회를 대표하는 봉건귀족과 근대시민사회를 대표하는 시민계급의 상극하는 두 세력간에 일종의 힘의 균형상태가 생긴 틈을 이용하여, 그 어느 세력으로부터도 제약을 받지 않는 초월적인 절대자로서 성립된 것이 절대주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절대주의 정치권력의 성격은 바로 이러한 근대적 요소와 봉건적 요소를 아울러 동시에 가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시민계급에의 이권
원래 절대왕권은 그 성립과정에 있어서 시민계급의 재정적인 원조를 얻어 봉건영주의 권력을 타도하고 통일적인 권력을 수립했다. 이러한 요인으로 인해 절대왕권은 정책적으로 무역과 산업을 발달시킴과 동시에 군사력을 강화하여 식민지나 해외시장을 획득하는데 유력한 작용을 함으로써 봉건사회 내부에서 성장하고 있던 시민계급의 발전을 위해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내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의 동인도회사나 프랑스의 왕립 매뉴팩처의 경우와 같이 절대왕권은 시민계급중에서 소수의 대상인이나 대금업자 또는 항해업자에게 특허권이나 독점권을 주어 그들의 활동을 보호. 장려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절대주의 정치권력은 근대시민세력의 진전에 대하여 긍정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2) 구봉건질서의 존속
절대주의 정치권력이 강력한 통일적 권력으로 성립되었을 때에는 하층시민이나 농민의 성장을 막고 그들을 억압하는 권력으로 되어 이미 충복으로 된 봉건세력을 유지. 보호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절대주의 권력은 개개의 봉건권력은 타파하면서도 봉건제도 그 자체는 폐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영주의 권력을 집중하여 통일함으로써 봉건제도를 전국적인 규모로 재편성하였다. 따라서 영주는 주민에 대한 정치적 지배력은 잃었지만, 농민으로부터 봉건지대를 수탈하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국왕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한 봉건영주에게 귀족이라는 특권신분을 주어 절대주의 권력기구에 참여케 하였다. 그리하여 봉건귀족은 종래와 같이 영내에서 최고의 권력자로는 있을 수 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지배계급으로서의 지위는 고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봉건주의 정치권력은 본질적으로 봉건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3. 지배의 새로운 측면
1665년에서 1690년 사이에 루이 14세는민사. 형사 재판의 절차, 산림과 하천의 관리, 해운업 및 항해, 흑인 노예무역 등과 같은 다양한 사안들과 관련하여 프랑스 전체에 걸쳐 균일하게 적용될 왕령과 법령들을 반포하였다. 프로이센에 있어서도 경찰 조례의 형식을 빌려 지배자의 이름으로 엄청난 양의 전국적인 규칙들이 만들어졌다.
지배자들의 이러한 법률 제정 행위는 그 법령과 관련된 특수한 이해관계나 활동뿐 아니라 법의 의미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신분제 국가에 있어서 '법'은 본질적으로 지배자뿐 아니라 신분의회와 그 구성단체들에 의해 주장된 권리들과 특권들의 덩어리였다. 즉 법은 일반적으로 고대적 기원을 갖는 분화된 법률적 권리의 형태로 존재했고 원칙상 그러한 권리를, 필요하다면 무력적으로, 지킬 수 있는 권리 수혜자들의 단체적 권능 안에 있었다. 그러한 법은 새로운 계약의 체결이나 또는 기존 계약의 수정을 통해 신분회에 의해 또는 신분회의와 지배자 사이에 아니면 개별적 신분집단들 사이의 심의나 상호조정을 통해 수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법은 일반적 의지의 산물로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원칙상 어떤 단일 당사자의 뜻대로 수정될 수 없었다. 즉 법의 타당성은 궁극적으로는 관습의 완만한 침전과 지배권능의 정당한 소유자들 사이에서 합의된 이해를 통해 작용하는 신의 초인간적 기관에 놓여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지배자가 자신의 주권적 의지의 행위로서 새로운 법을 만들고 그것을 점차로 포괄적이고 효과적으로 발전하던 사법체계를 통해 준수되도록 할 수 있다는 사상은 전적으로 혁명적인 일이었다. 그러한 사상은 법을 지배의 틀에서 지배를 위한 도구로 바뀌게 하였다. 더욱이 그러한 법은 원래 영역 전체에 걸쳐 적용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방의 신분의회는 그 법을 지방 조건에 맞춰 변형시킬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자신의 주권적 의지로서 법을 표출함에 있어서 지배자는 신분의회 세력을 특권적 지위를 갖는 백성의 한 부분으로 취급하였고 이들 중의 어떤 특정 요소는 새로운 지배가 가져온 불쾌한 결과로부터 호의적으로 면제될 수 있을 뿐이라고 여겼다.
이렇게 하여 지배자는 법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제시하고 뒷받침하는 에 있어 신축적이고 무제한적으로 확장, 수정할 수 있는 도구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지배자의 권력은 봉건제적 신분제국가에서와 같이 더 이상 개별적인 권리와 특권들의 집합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는 보다 균일하고 추상적이며, 따라서 잠재적으로 큰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되었다. 따라서 지배자의 권력은 개념적으로 특정 지배자와 떨어져서 존재하게 되었다.
Ⅳ. 절대주의의 쇠퇴
1. 절대주의 권력기반의 동요
(1) 시민계급의 성장
절대주의의 성립과 더불어 발전의 기회를 얻게 된 시민계급은 상업과 항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공업과 농업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서 산업가들이 나타났고, 그들에 의하여 생산의 발전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종래 상업. 운수, 금융 등의 유통업에 종사하는 동안에는 그들 시민계급에게는 절대주의 권력과의 타협. 제휴와 그 보호가 필요하였으나, 이제 그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상황 하에서는 그들 시민은 낡은 절대주의정책에 구속감을 느끼게 되고, 나아가서는 차츰 절대주의 그 자체를 타도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절재주의 권력측도 후기에 이를수록 초기의 시민계급과의 협조책을 버리고, 시민계급의 발전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2) 구봉건귀족층의 이반
절대주의의 또 다른 권력기반이 되고 있던 봉건귀족세력의 경우에도 변동의 기운이 나타났다. 그것은 농민측으로부터의 저항에 의하여 표현되었다. 절대주의가 성립되어 가는 과정에서는 농민들은 봉건영주의 역공세에 대항하기 위하여 절대군주의 권력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절대주의가 확립된 뒤에도 그들의 지위는 과거보다 근본적으로 나아지기는커녕 도리어 더 나쁜 상태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들은 귀족에게 봉건지대를 바치는 외에 국왕에 대한 조세도 새로 지불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적 부담은 절대주의 초기에 일단 안정되는 듯했던 농민생활을 다시 궁핍 속으로 몰고 갔으며, 그것은 결국 구족의 부력을 감축시키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2. 반체제세력의 대두
(1) 중산지주층의 대두
상업의 발전과 경제적 변영은 시민계급의 부를 축적시켰고,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엔클로져운동을 강력히 추진함으로써 새로운 중산지주층이 확대되었다. 이들은 의회의 하원에 결집하여 유력한 정치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문벌과 특권에 안주하는 구귀족과 대립하였으며, 절대군주를 계몽하여 개명케 함으로써 절대주의를 서서히 개혁하려고 시도하였다.
(2) 신흥자본가의 성장
무역과 항해의 발달은 새로운 상인 및 산업가의 일군을 성장케 하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그들은 17세기에 들어와 특허상인이나 궁정자본가에 대항하는 세력으로서 여러 산업부문에서 광범하게 성장해 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왕권의 비호 밑에서 일부 대상인이 얻고 있던 특허나 독점을 반대하고 경제조직의 민주화를 요구하였으며, 나아가 국왕이 자의로 세금을 부과하거나 인상하는 처사에 항의하기에 이르렀다.
유럽대륙제국에 있어서의 절대왕정의 형성을 철저하게 추구하는 것은 목적의식적 행동에 따라서 생기는 의도된 부차적 작용이 얼마나 최대의 역사적 성과일 수 있는가를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것만으로 최고의 의의를 가진다. 봉건적 연합체가 느슨해진 조직으로부터 통일국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결코 군주들이 당초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처음에는 자신을 본질상 생성중인 통일국가 밖에 서 있는 실력이라고 느끼고 주인으로서 이를 지배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이리하여 한편으로는 지배자, 다른 한편으로는 국토와 국민이라는 양자간의 새로운 이원주의가 만들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