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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병원 안 집입니다. 이 정도면 문화재급인데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늙은 덩쿨에 덮힌 담벼락을 보니 눈물이 다 납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제가 이 곳에 들락거린지 4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아마도 예장 통합 측 일 거예요. 문광례, 노상채, 성신이 엄마, 산돌의 밤,
쿵따락딱 삐약삐약, 광호 형, 미애누나 등등이 생각납니다. 응답하라! 1977
담양 읍 교회 새 성전입니다(우, 구 성전). 뒤로 보이는 건물은 논두렁이었는데 40년 동안 세워진 문명이 눈이 부실지경입니다.
요리 학원 쯤이 노인정이고 도로 양쪽으로 제법 큰 실개천이 흘렀지요. 오른 쪽 개천이
더 깊어서 고기가 더 많았고 노란 경차가 있는 건물이 평화사진관입니다.
수성 병원 맞은편에 해동주조장은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저는 이곳으로 노란 주전자에 막걸리 받으러 심부름을 다녔습니다.
담양 읍 교회 문화카페입니다.
담양 읍 교회 성가대는 진호, 명옥이 누나까지 성가대를 섰지만 저는 초짜라 큐-즈 대회 나갔다가 이 기동 춤추고 도망쳤습니다.
성가대는 교회 스캔들의 성지입니다. 성가대에서 만난 커플이 어디 한 둘입니까? 지금 성가대장도 아마도 성성커플일 것입니다.
강대상 뒤편의 크리스마스 베-너 가 핑크 컬러라 설교자를 포커스로 돋보이게 했습니다.
휘장이나 파이프 오르간은 다 걷었던데 가운은 아직도 입고 있었습니다. WHY? 간지가 나니까!!!!
교회 종탑은 헌물 1순위입니다. 그러면 2,3순위는 무엇일까요? 파이프 오르간, 그리고?
백동에 있는 힐-링 호텔입니다.
남 국민 학교 5-1반 앞 풍경입니다. 우리 반 담임은 이 상수이었습니다.
우측 첫 코너 집이 핫도그 가게이었는데 저희가 진상을 치면서 착한 부부를 많이 괴롭혔습니다.
우측 길이 원래도 매인 길입니다. H라고 쓰인 부분이 공터였고 우측 길 양 쪽으로 역시 실개천이 흘렀는데 ,체어맨이 서 있는 자리가 영조네 연립주택자리입니다. 이곳에서 명자 6학년, 명옥 4학년, 효석 초등학교2학년까지 5남매가 살았습니다. 참고로 진호는 7세,
명희는 5세, 희정이는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맨 앞 짚 차 쪽 만큼에 수곤씨네 빨강벽돌집이 맞다 면 그 앞이 도효네 집입니다. 그 집에서 명옥, 명희가 팥쥐 역할을 했고, '복실이'라는 개를 키웠으며 진호는 신문배달(경향신문)을 했습니다.
최 공순 할머니 장사를 치렀고, 아버지가 좁은 대문을 통과하시다가 허리를 삐끗 하는 바람에 진호는 일찍 철이든 것으로 보입니다.
빨강 대문을 넘어 명옥에게 연애편지를 주던 삥 바리들 저한테 맞은 놈이 어디 한두 명입니까? 아마도 철규가 광주 공원에 우리 집
여자들을 데리고 다녔지요. 명희 벙어리장갑 사주고. 철규야, 어디서 뭐하냐?
왼쪽 차가 즐비하게 서 있는 곳이 앵비 집입니다. 우리 집이 마지막으로 살던 곳이고 진호, 명희, 희정이랑 네 식구가 살던 곳입니다.
지금도 기옥이 엄마네 집도 그대로 있고 앵비 집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남 국민 학교 앞은 일도네 '딩동뎅' 피아노 학원 만 남아있고 완전 다 바뀌었습니다. 우리
집은 피아노 학원쯤에 있었는데 문 열면 바로 도랑물이 흘러가던 곳이니 시드니입니다.
비가 많이 온 날 명희가 장 영길 이로부터 진호를 구한 에피소드를 저만 알 것입니다.
저는 이때 울 어머니한테 가죽 허리끈으로 손발을 묶인 채로 맞았습니다.
제가 오늘날 경쟁력이 생긴 것은 순전히 울 어머니 덕입니다.
성림택시 안 집 전경입니다. 당시에는 가장 좋은 저택이었는데 이 집 성희는 명옥이 누나 동창이고 승희는 제 동창입니다
1.
우리 집은 담양 남 국민 학교 앞 신작로 가에 있었는데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
는 바로 신작로가 딱 이었답니다. 제 기억으로 우리 집과 길 사이에 작은 도랑
은 송사리나 가재들이 흔했고 비가 많이 온 날은 길가로 붕어며 소금쟁이가
펄 펄 뛰어 다니던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한 번은 비가 얼마나 많이 왔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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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토방 마루까지 도랑물이 들어와서 철없이 즐거워했었습니다.
집 앞 벽돌공장 공터는 땅따먹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통이야 갱 깡 같은 놀이
를 하는 장소였고 스릴 있는 놀이로는 버스나 트럭이 정차하고 막 떠나려는
그때 꼬마들이 우르르 몰려 자동차 뒤에 손을 붙잡고 따라 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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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가장 오래 따라갈 수 있는지 모험심을 가르는 호기로 기절할 만큼 위험
천만한 놀이였지만 우리들은 그걸 즐기며 살았답니다. 지금 보면 고작 2차선
신작로였는데 그 길 너비가 무척이나 커보였지요. 이렇듯 목숨 건 놀이를 하면
서 자란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내 명줄은 타고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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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줄 얘기 하다 보니 상여 나가는 것도 몇 번 보았습니다.
어 어 어어, 이제가면 언제 오나 어 어 어어, 연꽃 막새를 각양각색으로 붙여
달고 누런 광목옷을 입은 상여행렬이 신작로를 점거하고 오면 나는 저만치
떨어져서 까닭모를 쓸쓸함과 공포에 사로잡혀 이불을 뒤집어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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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독차나 땅 깎는 차가 하안 연막을 내뿜거나 우렁찬 소리라도 낼라치면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신작로는 온통 꼬맹이들 세상이 되고 맙니다.
땅 깎는 차가 물러진 신작로를 깎고 지나가면 자갈 실은 트럭 뒤판에서 굵은
돌덩이들이 쏟아지면서 방송용 "새벽종이 울렸네."가 흘러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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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면 길이 편편해지지만 한동안은 울퉁불퉁한 도로를 불편함도
모르고 살았답니다. 우리약국, 시대상회 앞은 담양에서 처음으로 아스팔트길이
나던 곳입니다. 내 친구 일도네 칠칠상회도 거기 있었는데 70년대 당시 읍내
뿐 아니라 면소재지 까지 다 먹을 만큼 장사가 잘되었습니다. 해동 주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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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으로 제법 큰 도랑이 생각납니다. 그 당시 형들이 자라를 잡는다며 대 막대
기를 쑤셔 대기도 했고, 튀김 집 ‘육 남 이 아저씨’는 아예 큰 도랑을 막고
품어서 고기들을 다 잡아 갔습니다. 도랑 위 다리에서 종이배를 띄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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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샅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기다리면 아래로 관통하는 수로를 통해 배가
떠내려 왔었고 우리들은 종이배를 따라 천변 리 까지 간적도 있답니다.
장날이 되면 양각 리부터 향교 리 까지 5일장이 섰는데 여기저기서 몰려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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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꾼과 장보기 꾼들로 길을 메웠지요. 짚으로 꿴 달걀 꾸러미를 끼고
가는 사람, 키가 훨씬 넘을 만큼 소쿠리 등짐을 지고 가는 아제, 갈치나
고등어를 통째로 지푸라기에 매달고 가는 사람, 머리엔 쌀자루나 광주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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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손도 대지 않은 채 여유롭게 다니는 사람, 닭을 메고 소를 몰고 달구지를
끌고 지게를 지고 나뭇짐을 이고 밭에서 바로 온 뜻한 하얀 수건을 두른
아줌마, 분단장 곱게 하고 까만 파마머리에 한복을 빼 입고 나온 새댁, 한 잔
걸치어 비틀거리는 아저씨, 장날 한 몫 보려는 거지들 등등 철몰랐던 그 시절
이 그립습니다.
2.
뜻밖의 여행이란 수지맞은 장사가 분명합니다. 속초로 해돋이를 보러갔다가
내친 김에 담양까지 내려왔습니다. 5시간의 운전 길이 피곤할 법도한데 '떡갈
비 집'에서 차려준 거한 상차림에 피로가 한방에 싹 가시는 것 같습니다.
원래는 '신 식당'이나 '제일 식당'으로 가려다가 인터넷으로 맛 집을 쳐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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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토박이도 몰랐던 명품 맛 집이 생겼네요. 와 따 메, 겁나 좋습니다.
스케일이며 사이즈가 삼원 가든 이나 수원갈비를 능가합니다. ‘담양 愛 꽃’
쥔장이 어떤 놈이여? 전남 대 95학번이면 나랑 딱 띠 동갑입니다. 식품경영학
은 Degree는 아닌 것 같고 디플로마인데 하루 매상 50% 기부까지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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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춰서 돈을 싹싹 긁고 있으니 그놈 참말로 야뭅니다.
밥 먹다가 밑반찬이 떨어졌습니다. 쌈 싸먹을 때 먹는 '명이'를 '김 명희'로
주문하면서 한 방에 주방을 장악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어유희
입니다. 내 친구 중에 봉산 면에 사는 놈이 세권인가? 숙소를 백동 봉 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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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네 불가마 근처로 잡았습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볼까하다가 일행이 있어서
참고, 진영 이를 데리고 양각 리 근처 p. c방을 찾아갔습니다. 아마도 지명이
‘객사 리‘ 일 것입니다. 제가 진영이만 할 때(고1) '아인 당구장'을 지금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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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리고 있는 ‘피 풀‘들처럼 번질나게 들락거렸던 곳인데 현재는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든 집' 은 아인 당구장 앞에서 어머니가 하시던 식당입니다.
우리 식당 옆에도 식당이 있었는데 그 집 딸 애자는 긴 머리 소녀였고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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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진호랑 추문을 뿌렸던 소녀입니다. 그녀는 지금 52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식당 옆에 '중앙다방'은 우리들의 아지트입니다. 당시에도 사장 따로,
마담 따로, 이었으니 최초의 c e o방식입니다.
우리들은 다방에 새로운 아가씨가 왔다하면 당구장에서 차를 대여섯 잔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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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켰습니다. 땅콩밀크에 침을 뱉어 놓고 아가씨 길들이기를 했습니다.
나중에 외상값 때문에 파출소에서 난동을 부렸을 때, 내 동생 진호가 고생을
했을 것입니다. 대입 연합고사를 치르고, 노땅 교수랑 입학금 딜을 하던 곳도
'중앙다방'입니다. 객사 리 에서 천변 리로 빠지는 골목길은 범 단 전국구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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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이를 세워놓고 군기 잡던 장소이고, 파벌싸움에서 내 친구 종선이랑 칼싸움
하던 비열한 거리이기도 합니다. 객사 리는 뭐니 뭐니 해도 아인 당구장 조00
이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카운터 보는 2년 선배가 꼬장꼬장 해서 짬뽕 국밥
을 다이에 엎어버린 일이 있습니다. 전화 받고 달려온 조 사장이 내 머리 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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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고 린치를 가했고, 이성을 잃은 저는 애자네 식당에 들어가 식칼을 들고
당구장을 들어갔습니다. "형님, C팔, 오늘 죽여 버릴 거야"
"야, 왜 그래, 칼 치워?" 이 날 이후로 기소중지를 걱정한 저는 입대를 해야
했습니다. 후에 헌병대 야상을 입고 복수를 벼렸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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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치기일 뿐입니다. 커피 생각이 나서 성당 앞 미니스톱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이곳은 ‘명동세탁소‘자리였습니다. 형님, 형님 하면서 교복
주름을 잡던 그 곳인데 알바에게 아버지 이름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21살 먹은
꼬마가 인상을 쓰네요. 자기 아버지가 담양택시 00을 몰다가 돌아가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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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 괜히 물어봤나 봅니다. 성당은 야외스케치, 공공 연애 장소입니다만,
간혹 가다 길거리에서 픽업한 공고 애들을 집단으로 구타하던 장소이기도 했으니
우범지대가 더 맞습니다. 개인적으로 이곳에서 칼싸움을 하다가 36계 줄행랑을
쳤던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성수야, 잘 있냐?
3.
11시 예배를 드리러 ‘담양 읍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오메, 읍 교회가 성전이
되어있었습니다. 새 성전 뒤쪽은 방의 도랑 뒷길이고 오른 쪽으로 수성병원
안집이랑 해동주조장이 40년을 그대로 버티고 있어줬습니다. 주보를 훌 터
보니 김 해운, 서 아란, 한 양순, 세 명 빼고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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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교회가 갈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양 읍 교회‘는 내 친구 일도 네가 거의 세웠고, 내 동생 친구 성환, 상묵,
갑주가 보이질 않습니다. 내 동생이 '산돌의 밤' 할 때 마당쇠 역할을 했던
프로메이드 사진이 전시되어있습니다. 내 기억이 맞다 면 옥실 이랑 진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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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 교회에서 만나 결혼을 했을 것입니다. "돈 돈 돈, 좋지 좋아, 내게 얼마든지
부탁하라고"는 올챙이 전도사가 소싯적에 했던 '문학의 밤'대사인데 읍 교회
인가, 성석교회인가, 긴가민가합니다. 조 태익 담임 목사가 광천교회 박 금호
목사처럼 서글서글합니다. 헌금 주머니를 돌려서 기다리고 있었고만 웬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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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줄은 패스해서 만원이 굳었습니다. 대 예배에 500명 쯤 모이는 것이 교세가
중앙교회를 추월한 것 같습니다. 중앙 교회는 창의 엄마가 제게 교회가면 뻥튀기를
준다고 해서 가본 최초의 교회입니다. 신년이라 그런지 대표기도를 성가 대장겸,
수석 장로가 성가대 가운을 입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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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기도하는 장로는 내 친구 김 해운입니다. 시종일관 기도하는 것을 지켜
보았는데 기도문을 읽기는 했지만, 내 동생 진호스타일로 점수로 치면 한 80점
쯤 주겠습니다. 그래도 수석장로를 먹은 해운이 놈 많이 컸습니다.
가스펠송을 하지 않고 찬송가만 한다고 보수는 아닐 것입니다. 새해에 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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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구도자로 예배를 드리는 주제에 수석장로 기도 평이나 하고 있는 나는
도대체 정체가 무엇일까요? 예닐곱 살 무렵 다방구를 하던 공터도, 홍신 이네
이발소도, 영조네 안 집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다 어디로 간 것이여?
읍 교회에서 남 국민 학교 방향 지침 리79번지는 딩동 뎅 피아노 학원이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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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우뚝 솟아 보일뿐 완전 신 타운 입니다. 농 방에서 ‘방의 도랑’가는 골목
길은 막혀졌고, 길은 오그라지고, 학교까지 양쪽에 흐르던 실개천은 다들 어디
로 가버린 거야? 돌려둬? 우리 동네. 지행이네 문방구를 거쳐 학교 안으로
들어 가보았습니다. 방금 길에서 우두 망 찰 쪼그려 앉아있는 아저씨가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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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지행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학교에 파킹을 해 놓고 이리저리 고증 찾기에 들어갔는데 교장관사가 없어지고
급식소가 들어섰습니다. 그 옛날 교장 사모가 머리감다 죽었습니다.
그때 장사 치르던 상황이 캡쳐되었는데 거의 국장수준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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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사 옆 창고는 소사가 "용을 죽여서 소풍갈 때 비가 온다."는 남 국민 학교
전설이 있었습니다. 체육 선생 전동현은 교장 딸과 결혼을 했을 것입니다.
에게 게, 그 넓디넓은 운동장이 주먹만 하게 보입니다. 정원에 조경이나 동상
들은 제가 40년 전에 만든 것들인데 골조는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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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본관 맞은 편 건물을 보려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보았는데 병설 유치
원이 들어섰고 빨간 벽돌은 늙어 꼬부라지긴 했지만 그대로 담 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실로 ‘소년은 이로 할 세 학 난성‘입니다. 남향인 이곳은 겨울에
햇빛 쏘이기를 주로 했고, 중학교 시절에는 짤짤이를 하러 자주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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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서넛 놀고 있어서 진영이랑 패널 킥을 해보았습니다. 패널 킥은
놀부 광천이 형이 펠레라고 불릴 만큼 신출귀몰했습니다. 한 빵에 50원 100원
씩 걸고 했던 축구 게임, 이거 뭐지요?
죽녹원 앞에서 찍었습니다.
향 교리 앞 죽전입니다. 왼쪽은 뚝 방 길로 지침 리 에서 오려면 꽤 먼 거리인데 저는 울 엄마 한복 딜리버리 때문에 장터 안 일성
상회를 자주 다녔습니다. 조금 더 가면 양각 산 빨강 깃발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수발'로 이어집니다. 수발은 진호랑 고기 잡으러
많이 갔습니다. 오른 쪽은 절이 있고 상수리 따서 도장을 파려고 역시 진호랑 많이 갔는데 옥실 이네 집이 향 교리에 있습니다.
향 교리 고수부지는 죽전이 있는 장터였지요. 저는 수발에서부터 양각 산을 거쳐 만 성리까지 고기를 잡으러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관방 천, 안의 총무정입니다. 활 쏘는 것을 보려다 우연히 용만이 형을 만났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인사를 했더니 좋아라합니다.
나 아직 살아있지요?
힌 색 옷을 입은 사람이 성만이 친 형 용만이 형님(61세)입니다. 용곤이
복 순이 까지 이 조폭 패밀리는 담양 1 빠 가 분명합니다.
참고로 복순 이는 제 첫사랑입니다. 지금 서울에서 산다는데 전번을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진영이가 형님들 계신데서 큰 소리로 화장실이 어데있냐고 물어 봐서 큰 형님들이 서빙을 하는 헤프닝이 있었습니다.
관방천은 민속촌을 버금갑니다. 산책을 하는데 100년까진 아니어도 40년을 타임 슬립 해주었습니다.
추성경기장 옆으로 자전거 마차가 드나드는 것이 완전 유원지가 아닙니까?
죽녹원 풍경입니다. 강호동이 하는 1박2일 찍고 난 후, 담양의 명동으로 지각변동이 생긴 것으로 사려 됩니다.
4.
새해라 그런지 원래 그런지, 향교 리 도립 대 앞이 북적 댑니다.
도립 대는 담양 여고-신학교를 거쳐 지금은 죽물 박물관과 도립대로
바뀌었습니다. 차를 '용 면' 방면 길가에 대 두고 걸어서 박물관 뒤쪽 길을
선택했습니다. 입구에서 '대 잎 호떡'에 호롱낙지를 사 먹었는데 ‘죽 녹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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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에 두고 저름발이 일행 때문에 포기해야 했습니다. 개천에서 소나기
징검다리를 건너 추성경기장 쪽으로 산책을 했습니다.
관방 천에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까지 관광 상품으로 개발을 해놓았습니다.
700년 전 홍수 재해 방지로 심은 팽나무와 45년 전 새마을 운동 때 심은 낙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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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 만나 지지체의 새로운 관광 수익원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활 쏘는 '총무 정'을 지나다가 용만이 형을 만났습니다. 뜻밖에 용곤이, 상만이,
경선 이까지 전번을 따왔고 급 들뜨기 시작했습니다. 후배들이 잠실에서 생활
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태 촌이 형 사후, 범 단 전국구 패권이 칠성 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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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범 서방파(충장 오비)로 넘어갈 것 같습니다. 용만이 형님은 61세라는데 아직도
현역 같습니다. 병신년을 지나 정유(丁酉)년입니다. 나라 안팍으로 참으로 병신같이
살았습니다. 재주부리던 원숭이는 높다란 나무에서 떨어지고 서글픈 닭 울음에 화들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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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우리는 또 이리도 누추한 새해를 맞이합니다. 이쯤해서 길제선생의 시조한 편이
떠오릅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계속)
2017.1.1.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