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9일
핵심 구절 13-15: “그러자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서 원하는 사람들을 부르시니 그들이 그에게로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열두 사람을 사도로 부르사 그들과 함께 있게 하시고, 그들을 보내어 전도하게 하시고, 악령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려고 하셨습니다.”
1년 만에 수고의 결실을 보고 싶은 사람은 일년생 꽃을 심고, 10년 후에 열매를 즐기고 싶은 사람은 과일나무를 심고, 30년 후에 수고의 결실을 보고 싶은 사람은 사람을 교육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100년, 1000년 후에 수고의 결실 보기를 원했습니다. 이를 위해 메시아 사역 기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심고, 제자들을 키우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영생과 참 빛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 위해 제자들을 키우셨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안식일에 치유(1-6)
1절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회당으로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은 한 손이 마비되어 쓸 수 없는 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사람은 건강한 두 손이 있어야 제대로 일할 수 있습니다. 당시 가난한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육체노동을 하기 때문에 건강한 두 손이 있어야 일해서 생활비를 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건강한 손이 하나뿐이었고 다른 손은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건강한 두 손을 가진 우리는 이 사람의 고민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한국에는 “과부의 고민은 과부만이 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은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배우자를 찾는 것에 대해 매우 걱정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항상 마비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숨겼을 것입니다.
안식일이 되어 사람들이 회당으로 왔습니다. 당연히 바리새인들도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배에는 관심이 없고, 예수님이 안식일에 마비된 손을 가진 사람을 고치실지 관찰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롭고 능력의 사역을 매우 질투했는데, 이는 예수님이 치유 능력과 은혜의 말씀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손상시킬까봐 두려워했습니다. 유대의 영적 지도자들은 안식일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정도의 심각한 병이 아니라면 병자를 치료할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손이 마비된 사람은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치료받아도 마비된 손이 더 나빠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치료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동정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유죄로 만들어 없애버릴 수 있을까 하는 차가운 생각만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아신 예수님은 장애인에게 “앞으로 나와라!”라고 말씀하시며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악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했습니다(3-4).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도 사랑하셨고, 그들이 올바른 생각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악한 의도가 있었던 것을 뉘우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고 대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이 굳어져서 악한 의도를 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장애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바람에 날려 보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선한 목자가 아니라 늑대와 같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의 사악한 마음을 알고 진노하셨으며 또한 그들의 강퍅한 마음 때문에 슬퍼하셨습니다(5a). 예수님은 하나님의 양들 때문에 마음속에 큰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장애인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악한 의도를 알고 계셨기에 하루 더 기다리시고 그를 고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손 마비된 사람의 고통을 아시기에 당장 그를 고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 손이 나았습니다(5b).
고침을 받은 사람은 기쁘고 또 예수님께 매우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매우 화가 나서 나가서 헤롯의 추종자들과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을지 의논했습니다.
이 치유는 예수님이 정말 선한 목자이자 구세주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생명을 구하고 보존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예수님은 죄와 질병에서 우리를 치유하고 영생을 주십니다.
2. 많은 사람들의 치유(7-12)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가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갈릴리, 유대, 예루살렘, 이두메와 요단강 너머와, 두로와 시돈 근방에서 많은 무리가 그의 행적에 대해 듣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많은 사람을 고치시니, 병든 모든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 예수님을 만지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러운 귀신들이 그분을 보고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무에게도 예수님의 치유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핵심 사역이 치유가 아니라 복음 전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치유를 필요로 하는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와 영생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을까요?
3. 열두 사도의 부르심(13-19)
13a 절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산에 올라갔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막 3:13의 병행 구절인 눅 6:12, 13에는 “그때에 예수께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서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간절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아마도 사람들이 영생의 복음이 필요한데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계획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구세주로서 자신의 사역 방향을 물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분명한 방향을 주셨습니다. 그 방향은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택해 사도로 키워 예수님과 하나님의 복음을 잘 알게 하고, 그 제자들을 통해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열두 사도로 부르셨나요?
13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부르셨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도들을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인간적 자질 때문에 그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택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모든 부르심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13절은 “...제자들이 그에게로 나아가니라”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즉시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14절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목적을 설명합니다: “또 열두 사람을 사도로 부르사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그들을 보내어 전도하게 하려 하셨으니.”
“사도"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열두 사람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예수님과 그분의 메시지를 더 깊이 알게 하고 나서 파송하여 전 세계에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전하도록 의도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은 예수의 구원 사역의 싹을 자르기 위해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세워 복음의 사도로 양육하여 세상 모든 곳에 영생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도들을 통해 지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아여 사람들에게 죄 사함과 영생의 길을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을 죽음과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하고 영생과 천국을 선물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전은 컸습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한 실행방안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열두 명을 선택해 자신과 자신의 메시지를 잘 알 수 있도록 그들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생각해 봅시다. 그분의 프로그램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고, 또 가끔 파송하여 실습시키는”(14)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교육 프로그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최고의 교육 프로그램이자 예수님의 인격적인 교육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은 사도들에게 최고의 교육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써 그들은 예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깨닫고 죄 사함, 예수님의 능력과 부활의 복음을 배웠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과 그분의 능력을 잘 알고 그분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얼마 후에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8:29)라고 고백할 수 있었고, 도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요 20:28)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 복음을 신뢰성 있고 권위 있게 전할 수 있었고 또한 그들 자신도 예수님을 닮은 다른 제자들을 양육하여 복음을 신뢰성 있고 권위 있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또 복음서도 저술해서 오늘날 우리가 신약 성서를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사도들이 예수님과 진심으로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맺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사도들은 항상 예수님과 동행하고 함께 식사하며 예수님과 함께 일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받아들이고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관계로 인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써 그들은 훌륭한 성경 교사와 기도자가 되는 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지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함으로써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훌륭한 성경 교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함으로써 그들은 예수님을 더욱 닮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매일 교제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예수님의 거룩함, 의로움, 사랑, 신실함 등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의 도움으로 자신의 연약함과 죄성을 벗고 예수님의 거룩한 내면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와 사도로 성장하여 온전한 능력과 신뢰를 가지고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는 가시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하고 예수님의 좋은 메신저가 될 수 있을까요?
답은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지만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할 때, 마태복음에서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도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마태복음 18:20에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두 사람이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느니라”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근거로 이 예수님을 잘 알고 그분을 닮아 말씀에 따라 성경 공부, 기도, 교제, 식탁 교제, 공동 생활 등에 초청한다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신뢰할 수 있고 능력 있게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13~15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서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부르시니 그들이 그에게로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열두 사람을 사도로 부르사 함께 있게 하시고, 그들을 보내어 전도하게 하시고, 악령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시려고 하셨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