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미상, 일명 위웅(尉雄), 신라의 종성(宗姓)으로 경순왕 부(傅)의 손(孫)이다. 어사대부지군사(御史大夫知郡事)·검교(檢校)·사농경(司農卿)을 거쳐 은청광록대부상주국좌승상(銀靑光綠大夫上柱國左丞相)의 벼슬을 지냈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과 실직군(悉直君)으로 책봉되었고, 후에 군왕(郡王)으로 책봉되었다.
강원도(江原道) 삼척시(三陟市) 성북동(城北洞) 갈야산(葛夜山) 고분군(古墳群)에 있는 삼척김씨(三陟金氏) 시조의 무덤 실직군왕릉(悉直郡王陵, 강원도기념물 제15호)을 일명 갈야릉(葛夜陵)이라고도 한다. 실직군왕릉은 삼척의 진산(鎭山)인 갈야산 중턱에 낮으막한 담에 둘러 싸여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는 삼척시내를 관통하여 동해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오십천(五十川)과 오십천변의 삼척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삼척김씨 종중에 의하면 실직군왕릉의 주인공은 신라(新羅)의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의 8남인 일선군(一善郡)의 아들 김위옹(金渭翁)이라고 한다.
일선군 추(錐)는 경순왕과 고려(高麗) 태조 왕건(王建)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사이에서 태어난 여덟 번째 아들이다. 낙랑공주는 왕건과 그의 제3비 신명순성왕후 유씨(神明順成王后 劉氏) 사이에서 난 딸로 고려 정종(定宗)과 광종(光宗)의 누이이기도 하다. 외조부는 태사내사령(太師內史令)을 지낸 충주의 호족 유긍달(劉兢達)이다. 실직군왕은 경순왕의 복속을 받아들인 왕건이 인정을 베푸는 정책적 차원에서 책봉한 것으로 보인다.
실직국(悉直國)과 실직군(悉直郡)은 혼동하기 쉽다. 고조선(古朝鮮) 이후에 들어선 실직국 또는 실질곡국(悉直谷國)은 원래 삼척 지역에 존재했던 소국(小國)이었다.
실직국은 울진의 파조국(波朝國) 또는 파단국(波但國), 강원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동예(東濊)와 공존했다. 서기 50년 경 실직국은 파조국을 합병했다.
60년 경 동예의 침공을 받자 실직국 안일왕(安逸王)은 도읍을 파조국으로 옮기고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 산성을 쌓았다.
102년(신라 파사이사금 23) 동해안 일대로 세력을 확장한 실직국은 남하하여 경주시 안강읍 지역에 있던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영토 분쟁을 벌였다. 오랜 분쟁에도 결말이 나지 않자 실직국은 진한(辰韓)의 종주국인 신라에 중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신라는 중재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빌미로 두 나라를 침공해 음즙벌국과 경산시 압량에 있던 압독국(押督國)을 합병했다. 104년에는 실직국도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합병되어 자치소국이 되었다. 이후 신라의 세력권은 강원도 일대까지 확대되었다.
138년부터는 신라왕이 주재하는 태백산 제사가 거행되기 시작했다. 392년(내물왕37) 신라는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는 등 고구려의 정치적, 군사적 간섭을 받았다. 450년(눌지왕 34) 하슬라성주(何瑟羅城主) 삼직(三直)이 출병하여 실직(悉直)에서 사냥하는 고구려 변장(邊將)을 죽이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동해안 지역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481년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의 남침으로 신라는 포항 일대까지 점령당했다. 이 무렵 자치소국 실직국도 고구려에 의해 자치권을 박탈당함으로써 완전히 멸망했다. 고구려는 실직국 지역에 우곡현(羽谷縣, 羽谿縣, 강릉시 옥계면),죽현현(竹峴縣, 竹嶺顯, 삼척시 하장면, 태백시), 만경현(滿卿縣, 滿鄕縣, 삼척시 근덕면), 해리현(海利縣, 波利縣, 삼척시 원덕면), 우진야현(于珍也縣, 울진군) 등 5개 현을 관할하는 실직군(悉直郡)을 설치했다.
505년(지증왕 6) 실직국을 재정복한 신라는 주군현제(州郡縣制)를 실시하면서 이 지역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했으며, 이때 이사부(異斯夫, 金苔宗)가 군주(軍主)로 임명되었다. 실직주는 지방행정구역이 아니라 북방 진출을 위한 일종의 군사기지 역할을 했다. 524년 실직주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거벌모라성(居伐牟羅城,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을 함락하는 등 신라에 항거했지만 법흥왕(法興王)이 지휘하는 신라군에 진압당했다. 법흥왕은 반란군 주모자와 진압에 실패한 관리들을대거 숙청한 뒤 그 내용을 울진의 봉평신라비(鳳坪新羅碑)에 기록했다.
반란을 주도했던 옛 파조국 왕족 파단씨(波但氏), 또는 진씨(秦氏) 일족은 일본으로 망명해 교토(京都) 북부를 지배하는 최대 호족 세력인 하다씨(秦氏)가 되었다.
556년(진흥왕 17) 신라의 국경이 현재의 함경남도 안변까지 확장되고, 이곳에 비열홀주(比烈州)가 설치되면서 실직주는 폐지되고 실직군이 되었다. 639년(진덕여왕8) 실직군에 진주도독부(眞珠都督府)가 설치되었고, 658년(태종무열왕 5)에는 북진(北鎭)이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 16) 신라는 지방제도를 재정비하면서 북쪽의 하슬라주(何瑟羅州)와 통합하여 명주(溟州)라 하였다.
'삼척군지'에는 조선 헌종 4년(1838) 가을 삼척김씨 후손인 김학조(金學祚), 김흥일(金興一) 등이 삼척부사(三陟府使) 이규헌(李圭憲)에게 시조의 묘를 찾겠다고 간청하여 갈야산과 사직동 고분군을 발굴하였는데, 토기 여러 점이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무덤을 다시 보수하고, 수찬 박주운(朴周雲)에게 비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100년 뒤인 1937년 김원갑(金源甲), 김형익(金炯益) 등의 건의로 삼척김씨 중종(宗中)에서 석의(石儀)를 갖추어 능으로 봉하였다.
매년 음력 3월 15일 삼척김씨 후손들은 삼척시 당저동에 있는 재사왕묘(齋舍王廟)에 모여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실직군왕릉에는 전설이 하나 내려오고 있다. 마을의 어떤 사람이 능 옆에 자신의 조상을 몰래 암장하려고 했다. 암장을 하려던 날 밤 파던 구덩이에서 물이 솟아오르고, 백호(白虎)가 와서 걸터앉아 바람을 일으키면서 뇌성벽력이 진동하자 그 사람은 두려워서 도망쳤다고 한다.
1959년 갈야산 고분 조사 결과 갈야릉(葛夜陵)은 삼국시대 신라계 실명고분(失名古墳)임이 밝혀졌다. 동해시(東海市) 추암동(秋岩洞) 과동(科洞) 고총의 용묘(龍墓)는 삼척박씨(三陟朴氏) 시조인 삼척군 박원경(三陟君朴元慶)의 묘로 알려져 왔다.
과동 고총도 1992년도 발굴조사 결과 주인공을 알 수 없는 신라계 봉토돌방무덤(추암동 가-29호분)으로 확인되었다. 고고학계는 후대에 와서 이 두 고분이 정확한 근거 없이 삼척김씨와 삼척박씨 종중에 의해 시조묘로 지정, 관리되어 왔다고 보고 있다.
갈야산에는 실직국이 쌓은 갈야산성지(葛夜山城址)가 있다. 산성지에는 실직국왕이
사용했던 어정(御井)이라는 우물이 남아 있다. 1896년(고종 33)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에 맞서 민용호(閔龍鎬)가 이끄는 관동의병(關東義兵)과 김헌경(金憲卿)이 이끄는 삼척의병(三陟義兵)이갈야산을 거점으로 삼척읍성(三陟邑城)과 남산(南山)에 진을 치고 일제수비대(日帝守備隊)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관동의병은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