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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증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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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심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등산객들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띄인다.
증심사까지는 약 20분정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는 길에 음식점에서는 등산객들을 위해 김밥과 겉절이 파는 집들이 아주 많다.
이른 시간인데도 올라가는 길은 무더워 땀이 흐른다.
광주 무등산의 서쪽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증심사(證心寺)간혹 옛 기록에는 징심사(澄心寺)라고도 했지만,요즘은 증심사라고 부른다. 헌인왕4년(860) 철감국사가 창건하였고,고려 때 혜조국사가 중창하였다. 조선 세종 때 김방(金倣)이 중창 하였는데,이때 오백나한이 조성되었다고 한다.정유재란 때 불탔고,광해군 때 또다시 대규모의 중수가 있었다.
일제 때는 이 절이 한국불교의 정통임을 자부하는 도량이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한일 불교 의 공동원류설이 제창된 적이 있다. 두말할 나위없이 내선일치(內鮮一致)라는 식민지 문화정책의 발로였다.
이때 만해 한용운 등은 한국과 일본 불교의 뿌리는 전혀 다르다는 논지를 폈다. 즉 일본의 경우 염불종, 조동종 등이 주류를 이루면서 신도(神道)와의 융합이 이루어진 반면, 한국은 임제선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이 주류였다는 주장이다. 그때 임제종 운동을 펼친 본거가 바로 증심사였다.
1951년 6· 25 전란으로 대부분 건물들이 불타 없어졌다.1970년 이후 활발한 복원작업을 펼쳐 지장전비로전적묵당 등을 새로 건립하였다. 다행히 참화를 피한 오백전이 유일한 조선조의 건물인 셈이다.
증심사 올라가는 길...
부도
일주문
대웅전
지장전
오백전
조선 세종대왕 시절, 광주에 김방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가뭄이 잦아 고을사람들이 흉년에 시달렸다. 김방은 이 일을 안타깝게 여기어 당시로서는 큰 공사인 방죽 축조공사를 벌였다. 큰 못을 파서 무등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고이게 하여 농사에 쓰고자 하였다.
그러나 2년에 걸쳐 많은 노력을 기울여 방죽을 만들었으나 그해부터 3년간 계속 가뭄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이를 괴로워한 김방은 사흘 밤낮을 식음을 전폐하고 하늘을 우러러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였다.
기우제를 마친 날 밤, 김방의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증심사를 중건하여 오백전을 짓고 거기에 오백나한을 봉안하라’는 분부를 내리는 것이었다. 이에 김방은 서둘러 오백나한을 조성하고 증심사 중건에 나섰는데 이 일에 부정을 탈까 염려하여 스스로 육식을 금하고 손수 공사현장에서 일꾼들을 격려하였다. 일을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나자 김방의 건강은 점차 나빠지고 과로로 인하여 몸은 여위어 갔다.
온 고을 사람들이 김방의 지성에 감복하며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여러 집에서 매일 닭을 잡아다가 김방에게 먹기를 권하였다. 김방은 백성들의 간절한 권함을 뿌리치지 못하고 닭똥집 몇점만을 먹고 나머지는 일꾼들에게 고루 먹게 하였다. 이러한 김방의 노력으로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궁중에서 낮잠을 자던 세종대왕의 꿈에 난데없이 광주에서 왔다는 수백마리의 닭들이 엎드려 아뢰기를 ‘어지신 임금이시여. 광주 땅에 김방이라는 자가 있는데 무등산 골짜기에 수천명의 장정들을 모아놓고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역적모의를 하고 힘을 얻기 위하여 우리 닭들을 수백마리씩이나 죽이고 있으니 임금께서는 이 축생들에게도 자애를 베푸시어 김방을 잡아 죽여주옵소서.’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깨어난 세종대왕은 지체없이 금부도사를 불러 3일 안으로 김방을 잡아올 것을 명령하였다. 금부도사가 이끄는 군졸들은 밤낮으로 말을 달려 광주에 이르러 곧바로 무등산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런데 홍림교 근처에 이르자 갑자기 말들의 발이 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기괴한 일에 당황한 군졸들이 말에서 내리려 하였으나 말등에서 몸이 떨어지지 않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편 닭들의 꿈을 꾼 세종대왕은 이상하게 여기며 그날 밤 침상에 들었는데, 어렴풋이 잠이 든 순간 어린 사미승 수백명이 꿈에 나타나 ‘대왕께 아뢰옵니다. 어찌 영민하신 대왕께서 미미한 닭들의 참소를 들으시나이까. 김방이 매일 닭의 내장을 먹는 것은 사실이지만 김방은 일찌기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를 중수하고 광주에 방죽을 만들었으며, 다시 힘을 모아 증심사를 중건하고 오백나한을 조성하려는 갸륵한 뜻에서 하는 일이오니 굽어살피시어 금부도사를 곧 거두도록 분부하소서.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나라에 큰 환란이 있을 것이옵니다.’라고 아뢰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세종대왕은 곧 명을 내려 금부도사를 돌아오도록 하였다. 금부도사 일행이 말에서 내리지 못하고 씨름하고 있을 때 멀리서 어명이 거두어졌음을 전하고 회군을 명령하자 비로소 말과 사람이 움직여졌다는 것이다.
이 관군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선채로 이틀 밤낮이나 꼬박 지샜으므로 이 거리를 관군이 서있었던 거리라 하여 ‘선관이’ 또는 ‘선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홍림교를 배고픈 다리라고 부르는 것도 아마도 이 관군들이 이틀 밤낮동안 굶주리고 배고픔에 시달렸기 때문에 배고픈다리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삼층석탑
오백전 앞의 삼층석탑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석물로 믿어진다. 지붕돌과 면석을 통돌로 조성했으며, 네 귀퉁이에는 우주(隅柱)를 나타낸다. 지붕 돌의 받침은 모두 네개이다. 지붕돌의 끝을 아주 심할 정도로 치올렸다 . 그 결과 작은 탑이지만 매우 날렵하다는 인상을 준다. 전체 높이는 3.2m,조형수법으로 보아 신라탑이 틀림없다. 신라 말엽의 작품이리라 짐작된다. 오층석탑은 대웅전 앞에 있다. 형식은 삼층석탑과 같으나 옥개(屋蓋)받침이 3층 혹은 2층으로 낮아졌다.
1933년 탑을 수리할 때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1950년 한국전쟁 당시 망실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탑의 중심에서 칠(漆)상자가 나왔다. 그 안에는 금동석가 여래입상과 금동보살입상이 있었다. 그밖에도 철제 오층탑,철제 불상 2 구,수정,옥 등이 다수 발견되었다. 특히 석가상과 보살상은 매우 뛰어 난 형태여서 각각 국보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이 불보살상 2구는 한국 전쟁 직전에 문화재 보호를 위해 광주경찰서로 이관되어 금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곧이어 전쟁이 터지고 혼란이 가중되던 즈음 행방불명된 상태 이다.
원통전
1989년 3월 20일 광주광역시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205cm, 지대석 직경 130cm, 상대석 직경 100cm, 대좌 높이 50cm, 불신 높이 150cm, 머리 높이 50cm이다. 증심사 오백전 오른쪽의 범자칠층석탑과 나란히 서 있다. 연화대좌는 원형이며, 상·중·하대석과 지대석을 모두 갖추었다. 머리에 윗쪽이 넓고 두터운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타원형으로 갸름하여 우아한 기품이 있다. 눈은 바로 보고 있으며 코는 길게 내려와 우뚝 솟아 있고 입은 양옆으로 귀는 약간 길게 내려와 어깨 위에서 멎었다. 삼도(三道)를 얕게 새겨 희미하게 드러나는 목에는 목걸이를 장식했다. 다른 석조여래상과의 차이는 높은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1966년 간행한 《광주시사》에 따르면 본래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정곡리 서봉사터에 있던 것을 현준호가 자신의 재산을 들여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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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전
비로전에 모셔진 철조비로자나불좌상도 주목되는 문화재이다. 상호(相好)는 원만하면서도 근엄하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고,손 모습은 지권인(智券印)이다. 흔히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쥐는 형태를 말한다. 부처님의 손모습은 수인(手印)이라고 한다. 그것은 각 각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유아불인 경우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은 땅을 가리킨다. 이것은 싯다르타 태자의 선언인 「천상천 하유아독존」을 나타낸다. 또 오른손을 들고 왼손은 무릎에 얹거나 땅을 가리킨다. 이것은 석가가 성도(成道)한 직후 대지의 악마 마라(Ma ra)에게서 항복을 받았다는 상징이며 흔히 항마인(降魔印)이라고 한다 . 이 지권인은 법계(法界)가 일심(一心) 속에 있다는 의미이다.
법 이라는 용어는 다르마(Dharma),즉 현상을 가리키며 계(界)는 다 투(Dhatu),즉 존재자를 말한다. 즉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있 는 모든 존재,우주를 뜻한다. 이 우주의 근원은 바로 일심 그 지극한 마음으로부터 삼라만상이 출현한다는 의미이다. 다만 이곳의 불상은 거 꾸로 오른손 검지를 왼손이 감싸안은 모습이다. 이 불상의 출처는 불분 명하다. 광주 시내의 폐사지에서 옮겨 왔다고도 하고,일설에는 광산군에 있는 대황사(大皇寺)라는 절에서 옮겨왔다고도 하는데,확실하지 않다. 현재 보물 제31호. 조성연대는 고려 말기쯤일 것으로 보인다.
범종각
범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