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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인도 불교사
11. 불교의 발전과 쇠퇴
인도불교는 원시불교原始佛敎, 부파불교部派佛敎, 대승불교大乘佛敎, 밀교密敎 등 으로 변화하였다. 원시불교 초기 불교로서 붓다가 교화활동을 시작한 때부터 입멸入滅 후 각 부파部派로 분열分裂되기 전까지를 이른다. 붓다 생존 시를 따로 떼어 근본불교 시대로 구별하기도 한다.
붓다 사후 붓다가 설한 교리나 규율이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보니, 그것들을 정리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고, 제자들이 모여 이에 대해 논하는 “결집結集Samgiti”이 이루어진다. 이후 문제가 생길 때마다 결집이 이루어져, 불교는 결집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장에는 붓다 입멸 후 불교의 발전과 쇠퇴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본다.
1) 1차 결집結集, 참가자와 불참자
붓다가 입멸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섭은 무려 500명에 달하는 수행승들을 이끌고 쿠시나가라로 향한다. 임종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고, 또 마지막으로 붓다의 육성을 듣고, 또 묻고 싶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다소 과장된 숫자이겠지만 5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가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 이교도 한 사람이 손에 만다라화曼茶羅華를 들고 다가왔다. 만다라화는 연꽃을 지칭하는데, 붓다의 탄생 설화에서부터 등장하는 꽃으로 불교와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꽃이다. 가섭 일행은 짚이는 데가 있어 무슨 꽃이냐고 묻는다.
마하까시야빠의 물음에 그 행자가 말했다.
“당신들의 스승은 이미 죽었으며 이 꽃은 그 장의 때 사용했던 꽃이니라.”
그 말에 깨달은 제자들은 슬픔을 꾹 참고 동요가 없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울었으며 그중에서 한 사람 쑤바드라라는 수행자는 반응이 달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울음을 그쳐라, 벗이여. 슬퍼하지 말지라. 통곡하지 말지라. 우리들은 그 대사문에게서 완전히 해탈되었느니라. ‘이는 너희들에게 허락한다. 이는 너희들에게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괴롭히고 압박받아 왔지만 이제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남전대장경》, 제7권, P. 155)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 134.)
제자 쑤바드라는 스승이 죽었다는데 과연 저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긴 하지만 사람들은 보통 규제보다는 자유를 원하기 마련이어서,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특히 출가 수행자로 승가에서 배우는 입장이라면, 규칙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누구라도 세간에서 살던 습관을 떨어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계율을 정한 것도 그런 이유였겠지만, 수행 초기 수행자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하튼 그대로 읽으면 쑤바드라라는 수행자는 붓다의 죽음을 슬퍼하기는커녕 해방감을 느끼고, 자유를 얻은 것에 대해 쾌재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왜 굳이 개인의 일탈일 수 있는 이 사건을 이렇게 내세워야 했을까?
얼마 전(2015. 11.22) SBS에서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한 교실 프로젝트, 창사특별기획《바람의 학교》를 내보냈다. 무너지는 교권과 함께 학생-교사 간 불통을 해소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교사들은 교사와 학생 간 불통을 해소하기 위해, 또 기존의 상하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총 4부작으로 된 이 작품은 1부가「꼴통」2부가「교실에 갇힌 자유」3부가「수업료를 돌려주세요」4부「세상에 바람이 되어」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목부터가 범상치 않다.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을 혼내기보다는 차라리 규칙을 정해 담배를 쥐어주고,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시험의 시험지를 찢어버리게 하는 등,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교사들이 눈물겨웠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좌충우돌 싸우는 모습도 있었지만 교사와 학생이 담을 허물고, 서로 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하면서 점점 이해가 깊어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특히 주어진 프로젝트를 힘을 모아 열심히 수행하고, 꼴통 소리를 들으며 교실을 감옥 정도로만 생각하던 아이들이,「수업료를 돌려주세요!」라는 연극을 어려움 속에 완성해 내는 모습은 감동을 자아냈다.
그런데 문제 학생들이 학교에 처음 도착하였을 때, 그들이 무엇을 가장 원하는 지 알아보기 위한 조사가 이루어진다. 백 만 원의 가짜 돈을 주고 자유, 명예, 상생, 성장, 그리고 돈 등이 쓰인 상자에 넣게 한 것이다. 학생들이 어떤 것을 가장 절실하게 추구하는지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었다. 교사들은 무엇보다도 돈이 1등일 거라고 모두 추측했지만, 학생들은 “돈”보다는 “자유”를 선택한다. 이들 문제 학생들이 갈구하는 것은 바로 자유였던 것이다. 쑤바드라 역시 문제 학생이었을까? 그리고 그도 역시 자유를 원했던 것일까?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기성세대(장로)들은 자유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그것 또한 당연한 일이요, 자연스러운 현상일 터이다. 지도자의 입장에 있던 가섭 역시 쑤바드라의 말을 듣고, 스승의 가르침이 후세에 가서 왜곡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다. 아마 당장 교단을 이끌어가는 데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으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근본부터가 무너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섭은 장로들을 소집한다. 붓다의 가르침을 수집 통일하고 계율을 정비하기 위해서이다. 붓다가 설한 교리나 규율이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보니 그것들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마하까시야빠는 석존의 가르침을 확인해 두고자 했다. 즉 석존 입멸 후 오백 명의 제자가 중인도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王舍城)에 모여서 각자가 기억하고 있는 석존의 가르침을 비교해서 어느 것이 석존의 바른 가르침이며, 또 어느 것이 석존의 가르침이 아닌가를 확인했던 것이다. 그것이 제1결집이다. 결집이란 ‘회의’의 의미이다. 5백 명의 제자가 참가했기 때문에 이를 ‘오백결집’이라고도 한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 135.)
붓다가 열반한 해에 왕사성王舍城 교외 칠엽굴에서 처음 “결집結集Samgiti”이 이루어진다. 회의의 주재자는 물론 마하가섭이었고, 교에 대해서는 아난다가, 그리고 계율에 대해서는 지계持戒제일 우바리(優婆離, Upali)가 중심이 된다. 비록 그 동기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었지만, 결집은 자칫 흩어져 버렸을 붓다의 가르침을 점검하고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암송暗誦의 형식이긴 하지만 붓다의 말씀을 후세에 전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응병여약應病與藥, 대기설법對機說法이 특징인 붓다의 가르침이 고정화 내지는 획일화, 교조화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측면도 있었다. 참가자들 의견에 따라 참가자들 위주로 편집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어서 다양성이 줄어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요즘 우리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역사 교과서처럼 국정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인데, 이는 나중에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갈라지는 분열의 씨앗이 된다.
석존 가르침의 고정화라 하는 폭거의 결과는 그로부터 1백년 후 교단의 분열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때 교단은 계율의 해석을 두고 보수파와 진조파로 분열한다. 그 분열의 연원(淵源)은 제1결집에서 석존 가르침의 고정화에 있었던 것이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 137.)
여하튼 1차 결집으로 불교 교법은 사상적으로 처음 정리되는데, 교법은 정리되어 경장經藏이 되었고, 계율은 정리되어 율장律藏이 되었다. 이들이 문자화될 때까지는 또 몇 백 년이 흐른다. 원시 불교 연구의 근본 자료이며 초기 경전인『아함경阿含經』의 경우, 이때부터 암송 전승傳承되기 시작하여 기원전 1세기 경 순차적으로 문자화되어 완성되게 된다.
참고로 “아함阿含”이란 산스크리트어 낱말 아가마āgama의 음역音譯으로 “전승” 또는 “전승된 가르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함은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의 언행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 선종의 선어록으로,『아함경』이 선어록의 초기 형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하가섭이 주도한 1차 결집에 참가하지 않은, “불참자不參者” 집단이 있었다. 붓다도 수행 초기 한적하고 고요한 곳에서 좌선하였는데 이를 따르ejs 산림山林 은서자隱棲者들이 있었고, 듣는 사람의 이해 능력에 맞추어 하는 대기설법을 새삼스럽게 하나로 통합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집단들이 그들이다. 산림에 숨어 수행하는 사람들은 화상을 중심으로 모인 교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으며, 이들은 붓다의 입멸소식 조차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반면에 부처님 교법을 통합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집단은 붓다의 죽음을 알면서도 결집에 참가하지 않았다.
붓다 사후 불교교단은 합의제合議制 혹은 집단지도 체제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붓다는 후계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을 대신할 후계자 또한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붓다는 ‘자신을 섬[洲]으로 삼고 법法을 섬[洲]으로 삼아 자신을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기를 일관되게 원했고, 썩어 없어질 몸뚱이를 보고 예배하기 보다는 법에 충실할 것을 바랐다.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는 자’라고 가르친다.
가섭에 버금가는 커다란 집단을 이끌었던 데바닷타는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른다. 장례 같은 일에 상관하지 말고 진리를 위해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는 붓다의 유훈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자기 자신 외에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홀로 조용한 곳에서 스스로 증득證得한 법을 관조하고 성찰하였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데바닷타와 그를 따르던 집단은 가르침을 통일하는 결집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결집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그들이 알기로는 붓다의 가르침은 대기설법으로 때와 장소에 따라 달랐고, 그런 연유에서 교의와 계율을 통일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결집을 반대하여 가섭이 주도하는 이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의견을 달리한 결과, 데바닷타 교단은 불교 역사에서 제외되었으며, 이단자로 분류되어 경전에서 철저히 매도당한다.
2) 2차 결집,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의 등장
불교는 점차 교단을 형성하고 조직화하면서 종교 교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렇게 100년의 시간이 흐르자 서서히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는데, 1차 결집으로 통일된 계율戒律에 대한 해석에 차이를 보인 것이다. 계율을 그대로 지켜나가야 한다는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시대에 따라 변화된 세태를 반영하기위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는 진보적인 사람들로 나뉘게 된 것이다.
계율을 계속 지켜나가야 한다는 쪽과 시대 사정에 따라 유연하게 해석하려는 쪽이 대립하게 되면서, 이들의 의견 차이를 조정하기 위한 결집이 열리게 되었다. 700명의 비구들이 모여 계율에 대한 열 가지 그릇된 주장, 소위 ‘10사비법十事非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실상은 이것을 허용할 것인가 금지할 것인가를 정하는 모임이었다.
젊은 비구들은 허용한다는 진보적인 입장이었고, 장로들은 금지하는 보수적 입장을 취하게 되는데, 십사가 불법不法이라하여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자, 교단은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분열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 칭하는데, 보수파 장로들을 상좌부라 하고 다수인 진보파 비구들을 대중부라 부르게 되었다.
‘상좌’란 말하자면 ‘윗자리’의 뜻이며 장로이므로 상좌에 자리한다. 자기 자신들을 스스로 상좌 · 장로라 해서 권위를 붙여서 부르고 있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 쪽이 ‘정통파’라고 하는 긍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면 대중부는 아무런 긍지도 없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자기들은 다수파라는 그것 때문에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이라 불렀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p. 196~197.)
일견 상좌부가 더 권위가 있어 보이지만 대중부가 다수여서 더 의미가 있다는 논리이다. 어느 시대에나 보수적인 사람들과 진보적인 사람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요즈음 정치를 비롯한 사회 전반이 여전히 투쟁중인데, 어쨌든 이들이 분열함으로써 원초불교 교단의 시대가 끝나고 부파불교시대가 열린다.
그럼 ‘정통파’라고 하는 상좌부와 ‘다수파’라는 대중부, 어느 쪽을 정통이라고 해야 할까? 초기에는 상좌부나 대중부 모두 붓다의 기본 정신을 계승하고 있었고, 일부 계율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기는 하였지만, 근본적인 교리는 그리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차이는 벌어지게 되어, 소승과 대승 나아가서는 남방불교와 북방불교로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붓다는 이런 다툼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상좌부도 대중부도 마찬가지로 석존의 기본 정신을 계승하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석존의 기본 정신을 위배하고 있다. 왜냐하면, B의 道를 수행해 가면 되는데도 불구하고(B의 道도 석존의 가르침인데도 불구하고) A가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석존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逆으로도 마찬가지이다. A가 석존의 가르침에 허용됨에도 불구하고 B가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B도 역시 석존의 참뜻에 위배되는 것이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 197.)
지범개차持犯開遮라는 말이 있다. 모든 계율은 절대적이 아니라 적당히 응용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계율은 때와 장소에 따라 변경 될 수도 있고, 고쳐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붓다 역시 사소한 계는 버려도 좋다고 하였는데(『大般涅槃經』), 아이러니하게도 제자들은 붓다가 말한 사소한 계가 어떤 것인가? 어디까지가 사소한가? 라는 주제로 다투게 되었던 것이다. 붓다의 기본 정신을 위배하고 있는 상좌부와 대중부, 그 어느 쪽도 ‘정통’이라고 자칭할 만한 자격이 없음을 알 수 있다.
3) 제3, 4차 결집
모든 자연의 과정들은 비가역적이다. 그리고 자연현상의 물질의 상태 또는 에너지 변화의 방향은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무질서도無秩序度)의 법칙을 따른다.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간단히 무질서하게 변한다는 것인데, 이를 거스르는 것이 나무나 풀이 자라나는 것이고,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보면 분열은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불교는 계속해서 분열하였고, 변화를 거듭한다.
불멸佛滅 후 200년경인 아소카 왕(기원전 274~236년경) 대에 와서는, 난립하는 교단을 정비하고, 외도들을 정리하며, 교법을 바로 잡기 위한 “제3차 결집”이 열리게 된다. 천여 명의 승려들이 선출되어,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던 부처님 말씀이 이때 재차 정리되었으며, 비로소 문자화가 이루어진다.
이때 경經, 율律 뿐 아니라 교법에 대한 연구와 해석인 논論들도 정비되어, 경장(經藏 Sutta Pitaka), 율장(律藏 Vinaya Pitaka), 그리고 논장(論藏 Abhid-harma Pitaka)의 삼장三藏으로 정리되었다. 다만 새롭게 논장이 성립되었는데, 논論이라 함은 ‘대법對法’으로 교법에 대한 연구와 해석을 말한다. 경 · 율 등은 부처님 재세在世 중에 이미 존재하였으나, 논장은 불타 입멸 후 제자들의 손에 의하여 새로이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한편 근본분열이 있고부터는 교리상의 견해차이나 지도자간의 대립이 더욱 심화되어 파생적으로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를 “지말분열支末分裂”이라 하는데, 근본根本 2부인 상좌부와 대중부, 그리고 분파分派 18부 등 소승小乘 20부로 나누어져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불멸후 200년경부터 기원 전후 시기까지의 이 시대를 총칭하여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라고 하는데, 이들은 300년 동안 복잡하게 분파하였으나, 그 세력을 계속 유지한 부파는 상좌부와 상좌부 계통의 설일체유부, 정량부, 경량부 그리고 대중부 등이다[도표 참조]. 불교사는 결집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기원 후 2 세기경에는 불교를 숭상하였던 쿠산Kushan 왕조의 카니시카(Kanishka, 약 l32 ~ l52 재위) 왕이, 각 부파의 교의가 다름을 알고 이를 통일하고자 500명의 스님들을 선출, 또 한 번의 결집이 이루어진다. 이를 “제4차 결집”이라고 하는데, 이때 경장, 율장, 논장, 삼장에 대해 각각 10만 송씩, 도합 30만 송의 주석이 만들어진다. 이를 동판에 새겨 석함에 넣고 큰 보탑에 안치하였는데, 현재 그 중 논장의 주석이 남아 있다.
4) 대승불교 운동
마우리아 왕조의 3대 황제 아소카 이후,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국가의 지원이 늘어나게 되면서, 출가자의 숫자도 크게 증가하게 된다. 승려 중에는 왕이나 대신의 스승이 되는 사람도 있어, 승려의 지위가 높아지고 그에 따라 많은 보시도 이루어진다. 그러나 재정적으로 풍부해지면서 출가자 본연의 수행과정이었던 탁발이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그에 따라 수행과 포교가 분리되어 개인의 출가수행에만 몰두하게 된 것이다.
한편 자기가 속한 교단의 교학연구에만 치중하는 경향도 보인다. 자파의 존립을 위해 타파와의 이론적 차별화를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눈으로 보면 종교가라기보다 번쇄煩瑣한 교리해석에만 매달리는 학자들이었던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학자들이 불교가 철학이냐 종교냐? 하는 논쟁을 계속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분열된 교단(부파교단)은 당연하게 교리해석에 전념을 다하게 된다. 自派의 存立을 위해 他派와 이론의 차이를 명확하게 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세세한 이론해석의 차이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부파교단의 불교를,
― 아비달마불교
라 부르게 된다. 漢譯으로는 ‘阿毘達磨’라 音寫하고 ‘對法’이라고 意譯한다. ‘아비다르마(abhidharma)’란 ‘法(dharma)’에 ‘대한(abhi)’ 연구라는 뜻이다. 그를 부파교단 사람들은 번쇄(煩瑣)한 교학연구(abhidharma)에 제정신을 잃었다. 오직 그 일만이 自派교단 存立의 생사가 달렸기 때문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아비달마에 정신이 빠져 버린 까닭으로 그들은 점점 더 석존의 근본정신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p. 219~220.)
그런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자기중심적이고 독선적인 수행태도를 반성하고, 붓다 본래의 뜻을 살려 자비慈悲를 이 세상에 실현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대중을 함께 태울 수 있는 너른 수레[大乘]라는 뜻에서 “대승불교大乘佛敎”라 칭하였는데, 대승은 범어 Mahayna의 번역으로 마하연나摩訶衍那 혹은 마하연摩訶衍이라 음역한다. 상연上衍, 상승上乘이라고도 하는데, 기존 불교가 자신의 해탈만을 목적으로 한다하여 작은 탈것[小乘]이라고 대비한데서 유래하였다. 그러므로 ‘소승’이란 말에는 지식만을 추구하여 말만 많고 행동하지 않으며,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라는 경멸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자기중심적이고 독선적인 수행태도를 반성하고, 붓다 본래의 뜻을 살려 자비慈悲를 세상에 실현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른바 “대승불교大乘佛敎” 운동이다. 대중을 함께 태울 수 있는 너른 수레[大乘]라는 뜻에서 대승불교라 칭하였다.
대승은 범어 Mahayna의 번역으로 마하연나摩訶衍那 혹은 마하연摩訶衍이라 음역한다. 상연上衍, 상승上乘이라고도 하는데, 기존 불교가 자신의 해탈만을 목적으로 한다하여 작은 탈것[小乘]이라고 대비한데서 유래하였다. 그러므로 ‘소승’이란 말에는 지식만을 추구하는, 말만 많고 행동하지 않으며,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라는 경멸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대중부 부파들이 대승불교로 발전하였던 것일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자들은 대중부의 부파가 대승불교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래도 대중부의 부파들이 대승불교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부의 부파들이 대승불교 교단과 함께 존재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져, 대승불교는 대중부와는 다른 새로운 불교 운동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5) 정토사상의 출현
살기가 어려웠던 인도의 서민들에게, 사색과 명상을 위주로 하는 불교 수행법은 맞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원래 불교는 서민이나 대중을 포교하기 위한 종교가 아닌, 출가자들을 위한 종교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붓다의 포교 대상이 서민이나 대중이 아니고 왕족이나 귀족, 승려들이었던 것이다.
불교의 진리를 터득하자면 생활을 잃어버린 수행(고행은 아니지만)과 깊은 사색 그리고 명상이 필요하다. 그런데 고대 인도인의 생활이 현재보다 편했다고는 볼 수 없다.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교역도 없었고 농경기술도 유치했던 당시의 인도는, 비록 인구는 지금보다 적었지만 서민 생활은 고통스러웠을 것이 틀림없다. 그날그날의 생활이 어려웠던 당시의 대중들에게 있어서 불교의 진리를 터득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구나 ‘붓다’의 포교 대상이 서민이나 대중이 아니고 승려들이었다는 것도 불교자신이 대중과는 거리가 있는 존재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鈴木一郞 저, 권기종 역,『불교와 힌두교』 pp. 176-177.)
불교가 대중적인 종교로 발전하면서, 대중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중생구제衆生救濟”를 목적으로 한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는 절대적 존재에 의해 구원될 수 있다는 타력구원他力救援 사상으로부터 생기는데, 대표적인 것이 부처와 보살의 본원력本願力에 의지하여 정토의 왕생을 실현하려는 “정토사상淨土思想”이다. 불교가 스스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하는 자력신앙에서 타력신앙他力信仰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대승의 일반적인 수행관과는 상반되지만,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타자의 구원에 의지하는 ‘이행도易行道’가 합리화 된 것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사상적 토대 위에서 성장한 대승불교로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던 것이다. 약 600부의 대승경전 가운데 정토사상을 설하고 있는 경전이 200여부에 이른다고 하니, 정토사상이 대승불교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불교는 틀림없는 하나의 종교이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인 한 민중의 구제가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소승불교에서는 민중을 구하지 않는다. 소승불교는 엘리트인 출가자의 해탈만을 목표로 하고 노엘리트인 재가신자의 구제는 관심 밖에 있었다. 따라서 재가신자 ― 민중 ― 서민 ― 일체 중생을 구원하는 새로운 불교가 반드시 출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 새로운 불교가 대승불교이다. 그것을 바꿔 말한다면 대승불교는 서민불교인 것이다. 서민의 서민에 의한 서민을 위한 불교 ― 어디선가 들은 듯한 文句이지만 그것이 대승불교이다.
어떤 의미에서 대승불교가 성립됨으로 해서 비로소 불교는 ‘종교’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까지의 불교 ― 소승불교 ― 는 완전한 의미에서 ‘종교’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한 개의 학파에 불과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대승불교를 2기준으로 한다면 지금까지의 불교역사 · 사상사는 ‘前史’였다. 이 대승불교에 의해서 비로소 불교역사 · 사상사의 ‘本史’가 시작되는 것이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p. 273~274.)
이러한 인도의 정토사상이 하나의 종파로 탄생하고 발전하게 된 것은 중국에서부터이다. 후한과 삼국시대를 지나면서 정토관련 경전들이 번역 소개되기 시작하는데, 그중 아미타경이 번역된 이후 혜원(慧遠, 334-416)이 염불결사念佛結社를 실천하였다. 이어 북위의 담란(曇鸞, 476-532)은 칭명염불稱名念佛을 최초로 시도하였다. 정토교가 태동하게 된 것이다.
이후 정토교는 도작(道綽, 562-645)으로 계승된다. 도작은 그의 시대를 말법(末法)으로 규정하고 ‘응당 마땅히 참회하고 복을 닦으며, 진정 부처의 명호를 불러야 할 시기’라고 하였다. 한편 도작의 법을 이은 선도(善導, 613-681)은 칭명염불을 중심으로 삼는 정토교를 대성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말법 시대에 사는 이로서, 어리석고 더러운 몸을 지닌 이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토교를 신앙하는 것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는 진실한 마음인 지성심(至誠心)과, 자신은 범부이며 아미타불에 의해 구원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믿는 심심(深心), 그리고 스스로 닦은 일체의 선을 중생에게 회향하고 왕생을 기원하는 회향발원심(廻向發源心)의 세 마음을 갖추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가재(迦材, ?-648)는 도작의 학설을 계승하면서도 유식이나 여래장 계통의 경론을 토대로 정토교의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권오민,『인도철학과 불교』에서 발췌.)
중국에서 불교가 성행하게 된 데에는 정토사상이 한 몫을 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처음에는 귀족들의 전유물로 받아들여졌지만, 실천불교로서 선종과 정토종이 양분되면서, 지식적인 요소와 구복적인 요소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발달하였던 것이다.
윤회 등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이 없었던 중국에, 정토종은 큰 인기를 구가하며 오늘날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근대 중국의 승려들을 소개한『근대 중국의 고승』에 등장하는 승려들의 절반 이상이 정토종 계통인 것이다. 정토종은 일본에서 더욱 더 발전하여 새로운 종파가 여럿 탄생, 번창하며 현재에 이른다. 그중 호넨[法然]의 제자인 신란(親鸞, 1173~1262)의 정토진종淨土眞宗은 2만개의 사찰에 1,300만의 신도를 거느리고 있다. 호넨(法然, 1153~1212)은 일본 불교 정토종淨土宗의 개조다. 정토종은 8,000여개의 사찰에 600만의 신도를 거느리고 있다.
6) 소승과 대승경전
처음 중국에 불교가 들어와『아함경』이 처음 번역 소개되었을 때, 이른바 소승 경전이라고 하여 무조건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다. 작은 경전들을 모아놓아 조잡해 보이기도 했지만, 대승 경전에 비해 간결하고 소박하였으며, 이론 또한 단순하여 무시된 측면이 있었다.
이런 경향은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의 ‘오시五時의 교판敎判’1에 잘 나타난다. 붓다가 설한 교법敎法을 시대와 내용별로 분류한 ‘오시의 교판’에서 『아함경』은, 무지하고 우둔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낮은 경지의 교법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19세기 말 팔리어 경전이 나오기 전까지 계속됐다.
팔리어 경전이 등장하면서 아함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하는데, 소박하고 단순하지만 초기 불교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경전이었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숫타니파타에는 일체의 불교용어가 없다’고 하였을 정도로, 이들 경전에는 대승경전에서 보이는 현학적이고 번거로운 교리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우리가 접하는 불교 용어는 대부분 후대에 이루어진 것들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 아함경이 알려진 것은 1963년 동국역경원에서 한글대장경이 간행되면서부터이고, 1970년 고익진 교수의 논문「아함법상의 체계적 연구」가 발표된 이후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으로 읽는 반야경,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아미타경 등 대승경전들은 양도 많고 내용도 다양할 뿐 아니라 교의敎義적으로도 깊이가 있어, 이들 경전이『아함경』보다 오히려 더 부처님의 참 뜻을 전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대승경전은 이렇게 성립이 모호하고, 소승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문제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전적으로 석존의 교설이 아니라고 배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상적 차원은 아함 교설의 위에 있지만 그러한 차원의 이론적 근거는 역시 아함에 두고 있는 점으로 보아, 대승불교는 아함 교리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석존의 교설은 원래 중생들을 점진적으로 성숙시켜 가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하는 방편을 채택하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대승경전의 원시부분만은 석존의 교설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고익진 지음,『불교의 체계적 이해』 p. 74.)
이들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이 아니라는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은 틀림없이 맞지만, 대승경전이 불교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아함경의 내용을 보다 심화시켰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성립 시기를 보아도 아함경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데, 아함은 거의 모두가 구송口誦에 의해서 전승되어오다, 기원전 1세기 경 실론(스리랑카)에서 문자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함 경전 가운데에도 후세에 만들어진 경전이 다수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원시경전 가운데 佛滅 이후 佛의 遺弟子들이 설하신 것도 상당히 있습니다. 그것은 불멸 직후 第一結集에서도 誦出되지 않은 것인데 어떻게 해서 現存 경전 가운데 포함되었는가 하면 아마 第二回 이후의 결집에서 經典으로 誦出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 221.)
대승경전의 정통성에 대해 고익진 선생은 아함경은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반야경에 수렴하고, 성불成佛과 중생 교화는 법화경에 이른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대승 경전을 아함 경전과의 연결선 상에서 하나의 맥락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현실적 존재를 분석적으로 관찰하여 괴로움의 원인을 밝혀 그 해결책을 마련해 주는 아함경의 복잡한 교설은,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반야경에 이르고, 이것은 다시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불成佛과 중생 교화에 있다는 법화경에 이르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략)
현대 학자들 속에서도 아함 이외의 반야 · 법화와 같은 것은 부처님 설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사람까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적이 당황하였고 그러한 학설이 나오게 되는 근거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반드시 그렇게만 보아야 할 절대적인 이유는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경전자체의 사상적인 체계를 살펴볼 때 아함에서 반야 · 법화에 이르는 교리적 체계는 조금도 빈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대승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함이고, 아함의 교리는 또 대승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될 성질의 것이라는 것이 뚜렷했던 것입니다. (고익진 지음,『불교의 체계적 이해』 pp. 9~10.)
이는 자료적인 측면에서 객관적인 눈으로 보면 더욱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예컨대 현재 불교경전을 집대성한 대장경 중, 세계불교계에서 표준으로 삼고 있는 대장경은『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이다. 총 백 권으로 이루어진 대장경의 앞 32권이 인도 찬술부撰述部이다. 이 부분이 인도에서 성립한 본래의 대장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경장, 율장, 논장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데, 그중 대부분인 31권이 경장이다. 그리고 경장 중 1~4권(네 권)이 소승경전이고, 5~21권(17권)이 대승경전으로, 대승경전의 분량이 소승의 네 배가 넘는다. 이를 보면 불교 경전은 붓다 하나만의 창작품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합작품으로 보아야 함은 물론이고, 더불어 대승경전을 빼고는 불교를 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7) 소승과 대승경전 II
대승경전은 보통 발달사적으로 초기 · 중기 · 후기로 나눈다. 초기는 최초기 경전에서 용수龍樹 시대까지, 중기는 용수 이후 무착無着 · 세친世親 시대까지이고, 그리고 후기는 무착 · 세친 이후 불교가 인도에서 멸할 때까지를 말한다. 무착과 세친은 유가행파瑜伽行派로 불리어, 용수의 중관파中觀派와 더불어 인도 대승불교의 양대 주류를 이룬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모두 처음에는 소승불교의 학자였다가 나중에 대승불교로 전향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를 보아도 대승경전은 부처님 말씀으로부터 아함을 거쳐 내려온 불교사상의 연속성 속에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대승경전은 자연스러운 발전의 결과이고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대승은 소승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대승경전이 소승을 기초로 완성되었다는 고익진 선생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다. 또, 고익진 선생은 경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우리 주변에는 선禪에 맹목적인 사람들이 흔히 경전의 권위를 부정하려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역대의 조사祖師치고 경전을 전적으로 부정한 사람은 한 사람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달마達磨는 능가경楞伽經을 육조六祖 혜능慧能은 금강경을 의지했고, 임제臨濟와 보조普照 또한 삼장에 통효했던 것입니다. 선종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함은 문자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지 딴 말이 아닌 것입니다. 문자에 얽매어서는 안 된다는 이러한 입장은 이미 부처님도 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교설을 뗏목에 비유하시고 반야는 불가설不可說이요, 삼승은 방편이라고 설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익진 지음,『불교의 체계적 이해』 p. 10.)
그리고 경전은 교리를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골똘히 생각해야 하는 과제물이라고 말한다. 사색하는 부처가 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그대로 공안집인 것이다. 경전의 저자나 문자적 해석에 매달리기 보다는, 그 본연本然에 집중해야 한다는 충고다.
경전은 흔히 교리를 자세하게 설명 해주는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불교 경전은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만이 간명하게 시설되어 있을 뿐 그 밖에 모든 것은 스스로 알아내고 깨닫도록 짜여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전은 그대로 전체가 문제 덩어리라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함경에는 ‘홀로 고요한 곳에서 골똘히 생각한다(獨一靜處 傳精思惟)는 말이 수없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러한 태도가 참으로 아쉽습니다. (고익진 지음,『불교의 체계적 이해』 pp. 10~11.)
한편 근래 우리나라에 ‘위빠사나’ 수행법이 유행하면서, 초기불교주의자들이나 인도에서 위빠사나 수행법을 배우고 온 스님들 사이에, 임제종 간화선법은 불교 수행법이 아니라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들린다. 위빠사나 만이 붓다가 공인한 유일한 수행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1990 년대 이후 많은 사람들이 미얀마를 중심으로 남방 불교권에서 위빳사나 명상을 수행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위빳사나 명상이야 말로 부처님의 명상이며 초기불교의 명상이고 불교고유의 수행법이라고 주장하면서 간화선 중심의 한국불교 명상수행 풍토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미얀마에서 위빳사나 명상센터들이 생겨나는 과정들을 돌아보면, 현재 남방불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수행법은 1,800년대 중반 이후 새롭게 개발되었고, 1,900년대 초반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한 수행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비달마 교학 위주의 미얀마 불교는 일종의 단절을 겪으면서 수행위주의 불교로 전환되기 시작했고, 위빳사나의 정체성 및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수행법을 초기경전의 몇몇 가르침과 일치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위빳사나 수행법이야말로 남방불교의 수행법이자 부처님 수행법이며 초기 불교의 명상이라고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황순일,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 제 8차 국제학술 포럼「불교의 명상: 고대 인도에서 현대아시아까지」, 2012. 11. 29~30, 포럼주제 p. 16).
그러나 중국 불교 초기 이미 위빠사나 수행법이 도입되어 비슷한 과정을 거쳤고, 한중일 삼국에서 수백 년의 탁마를 거쳐 완성된 수행법이 간화선법인 것이다. 이것이 수행법이 아니라면, 한중일 선종 조사들, 가깝게는 위빠사나 수행법이 들어오기 전 한국불교를 이끈 선승들은? 그들은 그 과정들을 모두 무시하고 다시 반복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초기불교주의자들은 위빠사나만이 붓다가 공인한 유일한 수행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선종을 ‘조도祖道’, 즉 조사들의 가르침이라고 부르며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고까지 한다. 그렇다면 불과 30년 전만해도 우리와 같은 시공간에 살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경봉이나 구산, 성철과 같은 선사들은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이란 말인가? 때로는 인자하게 때로는 불같은 사자후로 수많은 사람들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며 20세기 한국불교를 지탱해 온 경허, 혜월, 용성, 만공, 한암, 만암, 만해, 혜암, 효봉, 고봉, 춘성, 전강, 동산, 금오, 청담, 향곡, 백봉 등등 기라성 같은 선사들은 또 무엇인가? 그들은 단지 시대가 필요로 한 피에로였단 말인가? (방경일 지음,『초기불교 vs 선불교』p. 292.)
원시 경전인 팔리어 경전이 일본에 소개되었을 때, 일본 내에서도 똑같이 그런 경향을 보였었다. 원시 경전만이 붓다의 실재 목소리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중국에 전해졌던 것이고, 수많은 조사들의 탁마를 거쳐 내려온 것을, 일본 선승들이 일본으로 들여와 오늘의 일본 불교를 이룬 것이다. 인도 수행법을 들여와 지금까지는 그런 것들을 접하지 못했던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난센스에 불과한 것이다.
소승불교가 석존의 가르침에 가장 근접한 불교라고 한다면 대승불교의 존재이유(raison d'etre)는 없다. 역사에 등장한 많은 사상가들 ― 일본의 예를 들어 最澄, 空海, 法然, 榮西, 親鸞, 道元, 日蓮 등 祖師들의 업적은 보잘것없고 쓸데없는 노력에 불과해지고 만다.
소승불교는 소승불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소승불교가 어떻게 해서 석존의 근본정신에서 멀어진 불교가 되었는가에 대해서 나는 앞 章과 이 章에서 상세하게 분석했다. 석존의 가르침을 고정화하고, 교조화해서 본래 버려야 할 ‘사소한 戒’를 남겨두고 자질구레한 계율의 엄수에 얽매어서 자유로운 석존의 정신을 밟아 뭉개버린 것이 소승불교 ― 원초불교, 아함불교 ― 이었다. 석존이 독화살을 뽑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쳤건만 독화살을 뽑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번쇄한 철학이론 ― 아비달마교학에만 정신이 빠져 있던 것이 다름 아닌 소승불교이다.
소승불교는 그나마 석존의 말씀 ― 음성은 전했을지 모르나, 애석하게도 말씀은 기껏 말씀에 지나지 않았다.
표면적인 말씀의 밑바닥에 흐르는 전신 ― 석존 가르침의 진수는 소승불교 속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p. 222~223.)
8) 인도불교의 쇠퇴
불교가 종주국인 인도에서 쇠퇴하게 된 것은 일반적으로 이슬람 세력에 의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역사 이래 정복자들에게 종교는 첨예한 갈등의 요소이고 분쟁의 불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도불교의 경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불교는 종주국인 인도에서 몰락할 수밖에 없었는가?
일반적으로는 986년 인도를 정복한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니(Ghazni) 왕조에 의한 이슬람 지배와 1206년 불교 교학의 대본산인 비크라마실라(Vikramasila) 대사원의 파괴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여기에는 다소 의문이 있다. 이때 이슬람의 박해를 받은 것은 불교도만이 아니다. 아니 그 이상의 박해를 받고 사원과 신상들을 철저하게 파괴당한 것은 힌두교이며 자이나교였다. 그런데 힌두교와 자이나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현재까지 계속해서 꽃을 피우고 지금도 그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고 있다. (鈴木一郞 저, 권기종 역,『불교와 힌두교』 p. 175.)
인도의 토착 신앙이며, 브라만교가 융합한 민족 종교 힌두교가,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한 것을 보면 이슬람의 지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아소카 왕 시대 이후 승려들의 지위는 높아졌고, 많은 보시가 이루어지게 되고, 탁발은 줄어들게 되었다. 생활고에서 벗어난 승려들은 비서민적非庶民的으로 변했을 뿐 아니라, 현실과는 동떨어진 고답적高踏的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왕족 및 일부 부호들의 보시에 의존하다보니, 이들 후원자들의 몰락과 함께 같이 몰락하는 운명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대중을 위한다는 대승불교 운동도 그 본래의 뜻과는 동떨어진 면이 있었다. 국가적 지원이 줄어들면서 대중의 재정적 후원과 유대가 절실하여 발생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일반적 믿음과는 달리 대중에 대한 타협과 아부의 혐嫌이 있다. 아쇼카 왕이 받쳐주던 국가적 지원이 끊기면서 승단은 대중의 재정적 후원과 유대를 절실히 필요로 했고, 승가는 그 반대급부로 대중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내세를 이끌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관음과 미륵, 지장 등의 수많은 부처와 보살(菩薩)들이 그래서 생겨났다. (한형조 지음,『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pp. 128~129.)
후원이 끊긴 불교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모르겠다. 대승불교 운동과 함께 정토사상으로 서민 대중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지만, 그 대가로 질의 저하를 초래하였고, 불교 본연의 특색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계속 가속화하여 뒤에 가서는 밀교密敎가 성행하면서, 불교의 힌두화를 촉진시키게 되었다. 4세기 초에 이르면 힌두적 색채가 매우 짙은 굽타왕조가 등장하여 불교는 더욱 더 쇠퇴하게 되었다.
그밖에 말기(末期)의 불교는 그 비문(碑文)과 기록에 나타나 있듯이 후원자들이 기증하는 현금을 상인들에게 빌려주고 그 이자를 받아서 교단의 경비로 썼다. 즉, 지주나 고리대금업자로 타락해서 서민 대중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승원 내에서 지적 유희에 빠져 중생을 구제한다는 사명을 일체 망각해 버린 것이다. 불교 승려들의 보호자들이 서로마제국의 붕괴를 계기로 몰락했을 때 불교가 쇠망하는 것을 막는 대중은 아무도 없었다. (鈴木一郞 저, 권기종 역,『불교와 힌두교』 pp. 178~179.)
불교는 애초에 일부 귀족들의 종교로 서민들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7, 8 세기경부터 이슬람 세력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11세기에 들어서면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고 있던 가즈니 왕조와 고르 왕조가 차례로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한다. 우상 숭배를 배척하던 그들은 힌두교 신상과 불교의 불상 등을 모조리 파괴한다.
이슬람 세력은 불교를 철저히 공격하였는데, 1191년에는 나란다 대학이 파괴되었고, 1206년에는 이크티얄 웃딘Iktiyar Uddin이 이끄는 이슬람 군이 벵갈 지방을 침략, 불교교학의 본산이었던 비크라마실라Vikramasila 대사원을 완전히 파괴하고, 수만의 불교도를 학살하였다. 이슬람 군대가 동인도의 불교사원을 철저히 파괴하자, 승려들은 티베트, 네팔, 스리랑카 등으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고, 불교는 다른 나라로 터전을 옮겨 명맥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당시 적극적으로 불교를 보호하고 비크라마시라 사원의 교학을 깊이 받아들였던 티베트로 많은 승려와 함께 방대한 전적(典籍)도 전하여졌다. 오늘날 볼 수 있는 티베트 대장경의 조직에 기본을 이루는 것은 비크라마시라 사원의 장서군(藏書群)이며, 티베트의 밀교 교학은 이 사원에서 발달한 교학의 전통 위에서 성립한 것이다. (佐マ木教悟·高崎直道, 井ノ口泰淳·塚本啓祥 共著, 權五民 譯『印度佛敎史』p. 152.)
티베트로 전해진 불교는 대승불교였지만 밀교를 동반한 것이었고, 티베트 고유의 샤머니즘 본교와 결합, 독특한 형태의 불교로 발전하였다. 이후 북인도 불교는 점점 쇠퇴하여 몰락의 길을 걸었고 점차 힌두교로 흡수되어 간다. 불교는 힌두교화 하여 밀교가 되고서도 힌두교화를 멈추지 않아, 결국 밀교마저 없어지고 힌두교만이 남게 되었다.
불교는 인도에서 힌두교 속으로 해소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긴, 그것을 ‘발전적 해소’라 볼 것인가, ‘운산무소’라 볼 것인가는 입장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그리고 비끄라마씰라 밀교근본도량의 파괴는 힌두교화 되지 않고 남아 있던 ‘불교’ 최후 법등(法燈)의 소멸이었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上』 p. 313.)
9) 불교 부흥운동
불교는 2 천년의 세월을 뚫고 근대에 이르러 다시 소생하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인도인 사이에 붓다의 이름이 다시 거론되기 시작하였고, 위대한 선각자로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이렇게 다시 불교가 재건되기 시작하는데, 세일론(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Colombo의 페타지구) 출신의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 1864~1933)는 가톨릭 계통의 학교에서 공부하다, 오르콧트 대령과 프라밧스키 부인이 시작한 신지협회(神智協會, Theoretical Society) 운동의 영향을 받아, 불교에 관심을 가진다. 그는 불교 부흥을 위해 활동하다가 만년에는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그는 1891년에 콜롬보에서 대각회(大覺會, Maha Bodhi Society)를 창설하였는데, 다음해 사무소를 인도의 캘커타로 옮기고 기관지(The Maha Bodhi Journal)를 발행하였으며 불적(佛蹟)의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대각회의 목적은 불적의 부흥을 꾀함으로써 장차 인도에서 불교를 부흥시키려 함이었다. 그는 이 운동의 지원자들과 함께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러 회의에 참석하여 불적 부흥의 중요성을 설하였는데 1920년에는 대각회 최초의 사원인 스리다르마라지카 차이트야 비하라(Sri-dharmarajika citya vihara)가 캘커타에 건립되고, 1932년에는 사르나트에 무라간다크티 비하라(Mulagandakti vihara)가 완성되었다. 그는 다음해 1월에 비구(比丘)가 되고 3개월 후 사르나트에서 서거(逝去)하였다. ( 佐マ木教悟·高崎直道, 井ノ口泰淳·塚本啓祥 共著, 權五民 譯『印度佛敎史』pp. 155~156.)
근대에 들어서는 불가촉천민 출신인 암베드카르(Bhimrao Ramji Ambedkar, 1891~1956)가 붐베이에 인도불교학회를 창설하고(1955), 자신을 따르는 불가촉천민들 50만 명을 불교로 개종시키는(1956년) 등 신불교 운동을 일으킨다.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그는 카스트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는 등 만민평등의 사상을 석존의 가르침에 의해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1. 오시교판五時敎判 : 모든 경전을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그것을 시간적으로 재배치한 것을 말한다. 중국 천태종의 오시팔교가 대표적이다. 이 같은 교판은 수많은 경전을 독자적 사상체계로 분류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업이지만, 사실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허구로 본다. 부처님께서 성도 이후 49년간 설하신 것을 연도별로 분류해서 화엄경 21일, 아함경 12년, 방등경 8년, 반야경 21년, 법화경 8년으로[最初華嚴 三七日, 阿含十二, 方等八, 二十一載 談般若, 終談法華 又八年] 나누었다. 여기서 오시(五時)는 다음과 같다.
1. 화엄시(華嚴時) :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직후 최초 3.7일간 화엄경을 설하신 시기를 말한다. 이때는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아래에서 정각을 이루고 그 자리에서 그 깨달음의 내용을 아무런 수식 없이 단적으로 그대로 표명하였던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가르침은 그 정도가 너무 높았기 때문에 부처님의 큰 제자조차도 귀머거리와 같고 벙어리와 같았다고 하므로 부처님의 본뜻인 중생교화의 측면에서는 별다른 효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없다.
2. 아함시(阿含時) 혹은 녹원시(鹿苑時) : 화엄경을 설하신 후 12년간 소승의 아함부(阿含部) 경전을 설하신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 부처님의 최초 설법장소가 녹야원이었으므로 녹원시라고 하며 설하신 경전의 명칭에 따라 아함시라고도 한다. 이때 말씀하신 가르침은 그 정도가 매우 낮은 소승 즉 3장교(三藏敎)로서 앞서 설한 화엄시에서 아무런 교화적 효과를 얻지 못한 대부분의 대중들을 위해 방편적으로 점진적인 가르침이 시도되는 것인데, 능력이 낮은 자들을 좀 더 높은 곳으로 이끌기 위해 가르침을 편 시기이다.
3. 방등시(方等時) : 아함부 경전을 설하신 후, 8년간 유마경, 승만경 등의 불성과 여래장 사상계통의 대승(大乘)경전을 설하신 시기이다. 녹원시에서 얻은 소승의 낮은 깨달음을 부처님의 깊은 깨달음과 동일시하여 여기에 만족하고 머물려고 하는 자들에게 소승은 방편 일뿐이고 부처님의 본뜻은 대승에 있다고 가르쳐 이들의 잘못된 견해를 타파하는 시기이다.
4. 반야시(般若時) : 방등시 이후 22년간 주로 공사상을 나타내는 반야부(般若部)계통의 경전을 설하신 시기로서 경전의 명칭에 따라 반야시라고 한다. 이때에는 대승과 소승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보는 잘못된 견해를 완전히 불식하고 대승과 소승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융합시키는 시기이다.
5.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 : 계속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중생의 능력이 매우 뛰어나게 되었으므로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곧 바로 진실한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 보이고 깨달아 들어가게 하는 시기이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8년 간 설하신 법화경과 열반(涅槃)에 드시기 직전 하루 동안에 설하신 열반경(涅槃經)이 여기에 해당되며 지금까지 설한 성문, 연각, 보살의 삼승에 관한 설명은 모두다 부처가 되는 일불승을 설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설했다고 한다.
교판敎判은 교상판석敎相判釋의 준말로 부처님이 일생동안 설한 가르침을 분석하여 그 성격에 따라 시기별로 분류한 방법론이다. 그러나 이 같은 교판은 수많은 경전을 독자적 사상체계로 분류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업이지만, 사실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허구로 본다. 남방불교에는 대중부(대승불교의 경전)경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설이 아니기 때문에 취급조차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한 이유로 남방상좌부(소위 소승불교)는 대승불교를 부처님의 설법이 아닌 불교라 하여 비판했고, 그런 비판 때문에 천태 지의가 그런 비난을 종식시키기 위해 오시 교판설을 주장한 것이라고 전한다. 역사적으로 고고학적考古學的으로 볼 때도 대승불교의 경전 성립은 니까야 성립 후 한참 뒤에 대승경전이 성립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대승의 경전의 경우 산스크리트어로 성립되면서 중국으로 불전이 넘어간 뒤 한역으로 번역되었고, 대승의 경이나 염을 할 때 산스크리트어가 아니라 번역된 한자로 이루어져 있어 대승의 불교는 인도의 초기 근본불교라 보기 힘들며 지극히 중국식의 불교라고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