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태인, 자는 군수, 호는 삼가이다. 김개의 문인으로 장성에서 태어났다. 1513년(중종 8)에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정원 정자를 거쳐 1522년에 지평이 되었다. 헌납·당령·함경도경차관, 나주목사 등 내외 요직을 두루 지냈다. 좌찬성과 호조판서 , 중추부사를 지낸 뒤 64세에 병으로 죽었다.
박수량선생은 25세에 등과하여 64세까지 39년간 관직에 있으며 오지 공직자로서 사명에 충실, 명예와 재물에 욕심이 없었다.
명종은 청백하다는 말을 듣고 암행어사를 보내 생활을 보니 생계를 겨우 연명할 정도이며 집은 낡아서 비가 샐 정도라 하였다. 선생은 1554(명종 9) 1월 64세로 세상을 떠나며" 고향에 장사를 지내되 묘를 너무 크게 하지 말라" 유언하였다.
명종은 크게 슬퍼하며 판서까지 지낸 분이 운상비가 없어 고향으로 가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비용을 주고 예장을 명하였다. 그리고 서해 바다의 돌을 골라 비를 하사하고 비문을 새기다 선생의 고결한 삶에 자칫 누를 끼칠까 염려되어 그대로 비문이 없는 돌을 세우니 이비가 유명한 백비(白碑)이다. 1806(순조 11) 2월 정혜(貞惠)라는 시호를 받았다.
밀양박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30 cm, 폭 45 cm, 두께 15 cm 이며, 청백리(淸白吏 )로 유명한 박수량이 죽은 뒤 나라에서 내린 것이다. 박수량의 묘 앞에 서 있으며, 직사각형의 대석 위에 호패 형의 비신을 올리고 비문의 내용을 새기지 않아 백비라는 이름이 붙었다.
벼슬길에 있었던 38년 동안 가는 곳마다 치적을 쌓았으며, 주세붕 과 깊이 교류하는 등 유림들 사이에서도 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두어칸 집 한 채 없이 지냈고, 죽은 뒤에도 남은 양식이 없어 초상마저 치를 수 없었다. 그때 대사헌 윤춘년 은 ‘박수량은 청백한 사람이라 멀리 서울에 와서 벼슬을 하면서도 남의 집을 빌려 살고 있었으므로 그 고향인 장성으로 돌려보내 장사지내고자 하오나 도저히 그 자력으로써 할 수 없사오니, 만일 이런 사람을 국가에서 표창하여 주면 모든 청백한 관리들에게 크게 장려될까 하옵나이다’라고 정부에 즉시 요청하여 근근이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명종은 이 말을 듣고 슬퍼하면서, ‘수량의 청백한 이름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지 오래이다’ 하고 서해 바다의 돌을 골라 비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와 함께 그 비에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하게 하고 다만 그 맑은 덕을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을 백비라고 부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