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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일본 불교사
3. 헤이안[平安: 794~1183] 시대 불교
헤이안 시대는 794년 캄무[桓武, 737~806, 재위 781~806] 천황이 수도를 헤이안[平安, 오늘날 교토]으로 옮기면서부터 시작된다. 원론적으로는 부패한 불교 도시 나라奈良를 버리고 천도한 것으로, 강대해진 남도南都의 사찰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실시되었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라 불교의 타락과 천도에는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환무천황이 수도를 나가오카에서 또다시 헤이안으로 옮긴 것은 나라시대 70년의 율령정치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서였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780(보구11)년의 에조(蝦夷)의 대반란과 그에 의한 정세불안이었지만, 북방의 불안이라는 것도 결국은 파견된 군대만의 문제가 아니고, 강한 수비대를 파견할 수 없는 율령국가의 약세에 원인이 있었다. (천기용지川崎庸之·입원일남笠原一男 지음, 계환스님 옮김,『일본불교사』pp. 67~69.)
통제력이 있었던 왕조가 사찰 세력을 피하기 위하여 나가오카[長岡]나 헤이안[平安]으로 이동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라 불교나 헤이안 불교의 각 종파는 모두 천황가天皇家나 귀족들의 귀의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 세력에 있어서는 불교사상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연유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지만, 불교계는 ‘국가불교’ 혹은 ‘호국불교’로 국가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교토로 수도를 옮기면서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불교사원이 조성되었고, 승려들은 국가의 안녕과 천황가의 번영이라는 현실적 이익을 도모하는 기도자로서의 소임만이 강조되었다. 불교의 존재이유가 오로지 재앙을 진압하여 나라를 보호하는 ‘진호국가鎭護國家’ 역할에 국한되었던 것이다. 본분인 깨달음을 향해 수행하는 구도자로서의 모습은 없었고, 보살행과 같은 이타적 종교행자로서의 모습 또한 중요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1) 사이초[最澄]와 구카이[空海]의 등장과 산림山林 불교
헤이안 시대는 진호국가를 표방하면서도 불교가 국가 권력에 대하여 주체성을 가지고 대처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근본적인 입장은 나라나 헤이안 시대 모두 ‘국가’에 두고 있었지만, 국가와 종교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인다. 나라 후기에 이르면 남도육종과 같은 학문불교의 성장과 더불어, 불교계에 두 거인, 사이초[最澄, 767~822]와 구카이[空海, 774~835]가 등장하여 기존 질서를 흔드는 새 바람을 일으킨다.
이들은 일본불교사를 통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로 평가받는데, 한반도 불교를 흉내 내던 일본 불교가 공히 일본 불교로 거듭나게 한 장본인들인 것이다. 일본 불교의 지평을 연 이들은 중국과의 문화교류증진을 위해 파견된 견당遣唐 유학생 출신으로 9세기 초 중국으로 건너가 천태교학과 밀교를 배우고 돌아온다. 이들은 개창開創이라는 형식을 통해 종파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서는 수계受戒라는 형식으로 혈맥상승의 원칙을 세운다.
이러한 과정은 남도불교에 대한 비판 또는 결별이라는 형식으로 거행되었지만, 동시에 기존의 국가불교에 대한 비판이자 결별이기도 하였다.(천기용지川崎庸之·입원일남笠原一男 지음, 계환스님 옮김,『일본불교사』pp. 74~75.) 그래서 이들 불교를 헤이안 신불교[平安新佛敎], 또는 남도육종에 견주어 헤이안 이종[平安二宗]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국가불교로부터 결별을 선언하고 배타적인 성격을 띤 교단 독립성을 추구하려면 여전히 천황 또는 귀족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한편, 이들은 산으로 들어가 수행하였는데, 사이초가 구족계를 받고 남도를 떠나 히에이잔[比叡山, 또는 히에이산]에 들어갔고, 공해는 대학을 버리고 산림에서 두타행을 실천하였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사이초는 히에이산[比叡山]에 개산開山하였고, 구카이는 고야산[高野山]에 개산 한다. 이때부터 산악수행山岳修行을 통해 정신을 단련하고 자비심을 기르는 산림수행의 전통이 생기게 된다. 이는 이전의 도시불교都市佛敎에서 산악불교山岳佛敎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으로, 헤이안 시대 불교를 산림山林불교라고도 한다.
2) 사이쵸[最澄]의 천태종天台宗
일본 천태종天台宗을 세운 덴교대사[傳教大師] 사이초는 767년 태어나, 12세 되던 해인 778년, 생가 근처 오우미고쿠분지[近江国分寺]라는 절에 들어간다. 14세에 국분사의 결원으로 출가를 허락받았고, 교효[行表, 722~797]의 제자로 공부하다가 19세 때인 785년 도다이지[東大寺]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국분사 관승으로서의 안정된 삶을 버리고, 히에이산에 들어가 작은 초암을 짓고 수행정진하며 경전연구에 몰두한다. 후에 초암을 일승지관원一乘止觀院이라고 하였는데, 헤이안 천도 전해인 793년 그곳에 엔랴쿠지[연력사延曆寺]를 세우고 천태종을 개창開創하였다.
794년 헤이안(平安, 지금의 교토)으로의 천도가 단행되고, 수도와 인접한 히에이잔에서 수행하던 사이초는 칸무(桓武) 천황의 눈에 띄게 되어, 797년 내봉공십선사(內奉公十禪師)의 소임을 맡게 된다. 내봉공십선사는 궁중 안의 법당에 근무하는 10인의 승려를 말하는데, 주된 업무는 천황가의 안녕을 기도하거나 천황에게 조언하는 등이었다.
산중에 숨어 수행에 전념하던 은둔승 사이초가 일약 천황의 최측근 조언자로 발탁된 것에 대해서는 《예산대사전》에 전하는 바와 같이, 이미 궁중에서 천황을 내봉공으로서 천황을 보좌하던 수흥선사(壽興禪寺)가 사이초의 입산 원문(願文)을 보고 그 문장의 수려함과 정신의 순수함에 감명받아 사이초를 찾아 친교를 맺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떻든 이를 계기로 사이초는 일개 은둔승에서 십선사(十禪師)라는 권위를 얻게 되고, 그로부터 4년 후인 801년에는 남도(나라)의 16명의 고승들 앞에서 법화십강(法華十講)을 행하며, 이듬에 고웅산사(高雄山寺)에서 나라 남도육종의 승려들이 운집한 가운데 천태 강의를 행한다. (김춘호/동국대 강사,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0. 일본 천태종의 개조 사이초(最澄) (출처 : 불교닷컴(http://www.bulkyo21.com.))
그리고 804년에는 견당사遣唐使의 일원으로 입당入唐하게 되어 중국 천태종의 본산인 천태산天台山에서 수행하게 된다. 그는 천태종 7조이자 수선사修禪寺 좌주座主(선가禪家에서, 경론을 강講하는 스님)인 흥도존자興道尊者 도수(道邃, ?~805)와 불롱사佛隴寺 행만行滿에게서 전통적인 천태종을 배우는데, 이들은 중국 천태종의 6조이자 부흥조인 형계존자荊溪尊者 담연(湛然, 711~782, 혹은 잠연)의 제자들이다. 805년에는 도수道邃에게서 ‘대승원돈보살계大乘圓頓菩薩戒’를 받고 천태종 제8조가 된다.
사이초는 또 명주(明州: 지금의 浙江省 奉化縣)를 전전하며 밀교와 선禪을 수학하는데, 용흥사龍興寺 순효順曉에게 밀교를, 선림사禪林寺 소연翛然에게 우두선牛頭禪을 전수받음으로써 이른바 ‘사종상승四種相承’을 이룩하고 귀국한다. 사종상승이란 원돈계(円頓戒, 계戒) ‧ 지관업(止観業, 천태天台) ‧ 차나업(遮那業, 진언真言) ‧ 달마선(達磨禪, 선禪) 등 사종四宗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이초의 일본 천태종은 중국 천태종에다 밀교密敎, 선禪, 계戒 등 세 가지 요소를 종합 ‧ 조화한 독자적인 천태밀교라고 하겠다.
사이초가 대승계단을 설치한 것은 국가 권력에 묶여 있던 남도의 승계 형태에서 벗어나 교단의 자주적 관리를 회복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당시는 나라에 가서 수계受戒를 받아야 승려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배권을 유지하려는 나라불교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되었는데, 계단 독립은 그의 생존 중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이초가 죽고 나서 7일이 지나서야 국가로부터 대승계단 설립을 인가받는데, 일본 최초의 자주적 교단은 이때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다음 해부터 새로운 제도에 의한 수계授戒가 시작되었다.
한 사람의 정식 승려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계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수계의식을 행하는 장소가 계단이다. 그런데 당시는 국가불교의 흐름 속에서 토다이지(東大寺) 계단원(戒壇院)과 같이 나라의 일부사찰의 계단만이 공인되고 있었다. 따라서 천태종에서 제자를 키워냈다고 하더라도 수계를 위해서는 반드시 나라의 사찰들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사이초는 사가(嵯峨) 천황에게 히에이잔 엔랴쿠지(延暦寺)에 새로운 계단 설치를 허락해 줄 것을 탄원한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나라불교계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 성사되지 못하다가 822년 7월 그의 사후 7일째에 성사된다. (김춘호/동국대 강사,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0. 일본 천태종의 개조 사이초(最澄) (출처 : 불교닷컴(http://www.bulkyo21.com.))
사이초가 대승계단을 개설하고 이것이 국가의 공인을 받음으로써, 히에이산은 명실공히 불교 종합대학綜合大學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엔닌[圓仁]이나 엔친[圓珍] 등 일본 불교를 이끌 쟁쟁한 제자들을 배출하였고, 이들이 중국에 유학하여 새롭고 충실한 교리를 다량으로 이입함으로써 일본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기존 나라奈良의 남도육종南都六宗은 서서히 몰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3) 사이초의 ‘천태본각사상天台本覺思想’
사이초는『법화경』과『열반경』의 가르침을 토대로, 일체중생은 부처 앞에서 동등하며, 모든 인간은 그 출생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평등하다고 주장하였다. 예컨대『열반경』에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하여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佛性, 즉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이 있다고 하였다. 『법화경』역시 ‘일체중생一切衆生 皆是吾子’라 하여 모든 중생은 이미 깨달은 존재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불성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의 본질은 동일하기 때문에 소수가 아닌 모두가 언젠가는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문제는 말을 바꾸면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논쟁」이라고도 일컬어집니다. 「본각」이란 본각사상(本覺思想)이라고도 하며, 「원래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은 인간으로서 태어났을 때부터 완전히 깨달은 존재인 것이다」, 혹은 「태어나기 전부터 깨달은 존재인 것이다」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본각의 사상은 천태종(天台宗) 계통에서는 천태본각사상(天台本覺思想)이라고도 합니다. 일본의 히에이잔(比叡山)은 이 사상입니다. 원래 깨달은 존재라는 사고입니다. 이 사고에 대해 「시각(始覺)」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는 않다. 인간은 가르침을 듣고 수행을 해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수행을 해야 비로소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라는 사고방식이 시각입니다. (불성(佛性)과 성불(成佛) 월간 『행복의 과학』 1992년 12월호.)
이를 두고 법상종의 승려 토쿠이찌[德一]와 사이초의 ‘삼일권실三一權實’ 논쟁이 벌어진다. 덕일은 법상종의 교의를 근거로 불성이 전혀 없는 인간이나, 혹은 불성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인간도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반드시 성불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불성이 있는 이상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주장과 불성은 있지만 부처가 되려면 수행을 해야 하는데, 수행을 해도 부처가 될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주장이 맞부딪친 것이다.
즉, 일본 천태종의 개조 사이쵸(最澄)와 일본 법상종의 승려 토쿠이찌(德一)의 논쟁이다. 이 논쟁을 가리켜 ‘삼일권실논쟁(三一權實論爭)’이라고 한다. 혹은 ‘삼권일실논쟁(三權一實論爭)’이라고 바꾸어 말할 경우도 있다. 이는 일승(一乘) 사상이 진실이냐, 삼승(三乘) 사상이 진실이냐 하는 논쟁이다. 바꾸어 말하면, 본각사상이냐 시각사상이냐 하는 것이다.
사이쵸는 천태종 본각사상을 기반으로 해서 ‘일승주의(一乘主義)’, ‘실유불성론(悉有佛性論)’을 제창해 본각사상의 입장이었다. 이에 대해 나라불교(奈良佛敎)의 대표라고도 할 석학 토쿠이찌는 삼승사상(三乘思想)을 기반으로 해서 사이쵸의 일승주의에 반론을 제기 시각사상의 입장을 취했다.
삼승사상(三乘思想)이란 인간에게는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이라는 세 종류의 성질을 가진 인간이 있어서, 각각의 수행방식이 다르다는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소승불교로부터 죽 계속되고 있는 교학(敎學)적인 사고방식이다. 석가모니불이 재세 중일 때부터 그와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이라 하겠다.
이에 비해 일승사상(一乘思想)은 <법화경>으로 대표된다. 부처님이 “여러 가지 사람이 있어, 각각의 사람이 수행하고 깨닫는 것이다”라고 설하시고, 성문ㆍ연각ㆍ보살이라는 종류에 대해 설한 것은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은 모든 사람은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본각사상의 입장에서 불승(佛乘), 일불승(一佛乘)밖에 없다는 사고방식이다. ([출처] <본각사상(本覺思想)> -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작성자 아미산)
사이초는 이로 인해 기존 불교세력에게 심한 반발을 사지만 굽히지 않았고, 황실의 후원과 불굴의 신념으로 타파해 나간다. 나아가서는 천태종의 ‘천태본각사상天台本覺思想’을 기반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고, 현실 그 자체로 좋다고 보는 사상을 펼친다. 이는 헤이안 시대 후기로부터 가마쿠라[鎌倉]에 걸쳐 일본 천태종에서 확립한 사상으로,『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본각의 의미를 확대해석하여, 생멸·변화하는 현상계야말로 본래 진실한 깨달음의 세계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이러한 본각사상은 일본 불교의 여러 종파뿐만 아니라, 일반사상이나 신도神道, 또는 문학, 예술의 다양한 방면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와 같이 사이초가 일본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으며 한때는 사원에서 훈련받는 승려들이 3만 명이나 됐고, 히에이산[比叡山] 전역에는 수천 개의 사원과 강원이 있었다. 따라서 히에이산은 큰 불교 세력권이 돼, 뒷날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사이초의 천태종은 그의 뜻을 계승한 엔닌[圓仁, 794~864], 엔친[円珍, 814~891]에 의해 현저하게 밀교화됐지만 진언종과 함께 헤이안 시대 말기까지 불교계의 양축을 이루었다.
4) 사이초는 중국인인가?
천태종天台宗을 세운 덴교대사[傳教大師] 사이초는, 시가현[滋賀縣] 오츠시[大津市] 출신으로 선조가 중국 후한後漢 시대 황제의 자손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이초가 태어난 생가터에 쇼겐지[生源寺]라는 사찰이 들어서 있는데, 여기서도 그를 중국 황제의 자손이라고 안내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조작된 것으로 그는 오토모[大友] 가문 출신의 도래인 후손이다.
일본 교토시 동쪽 비와코 호수 지대인 오우미(近江) 지방에는 사카모토(坂本)라는 지역이 있다. 이곳은 고대 백제인 오토모(大友) 가문의 옛 터전으로 이름난 곳이다. 시가현 오쓰시의 오쓰역에서 사카모토행 전철을 타고 불과 10여 분만 가면 사카모토역에 이른다. 교토산대 고대사연구소장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수는 고문헌들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며 “오우미 지방에서는 명문인 백제인 오토모 가문이 번성했다”(‘渡來人’ 1987)고 밝혔으며, 그 밖의 저명한 일본 고대사학자들도 백제인의 고장임을 각각 고증하고 있다. 물론 비와코 호수 일대는 사카모토 지역 외에도 가모군(蒲生郡)을 비롯해 구루모토군(栗太郡)과 야스군(野洲郡) 등 오우미 땅 일대에 백제인들이 드넓게 퍼졌던 것이 문헌마다 잘 드러나 있다.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 83 오우미 땅 백제인 터전 오토모 가문과 덴치왕)
사이초는 히에이산 동쪽 산기슭 마을에서 태어났다. 도래인인 오토모[大友] 가문 미쓰노오비토 모모에[三津首百枝]의 아들로 백제인이라고도 하고 신라인이라고도 하는데, 어쨌든 히에이산은 그에게 매우 익숙한 곳이었다.
전교대사 최징은 신라인 후손이다. 그는 히에이산 동쪽 산기슭 마을에서 신라인 오토모(大友) 가문 ‘미쓰노오비토 모모에’(三津首百枝 8세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징의 속명은 ‘미쓰노오비토 고야’(三津首廣野). 오우미 땅 ‘사카모토(坂本)’에 자리 잡고 있는 지금의 ‘쇼겐지(生源寺)’라는 사찰 터전이 그의 생가다. 이 지역은 신라인 호족 집단 오토모 가문의 오랜 역사의 본고장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신라인 “오토모 가문에서는 고대로부터 이 고장에서 신라명신(新羅明神)의 신주를 모신 사당을 세우고 대대로 제사를 받들어 왔다”(太政官牒 ‘天台座主記’ 866)는 것. 이러한 발자취가 기록된 866년(정관 8) 7월에는 이미 44년 전에 세상을 떠난 승려 최징에게 세이와 천황(858∼876 재위)으로부터 ‘전교대사’의 시호가 내려졌다.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24>日 천태종 총본산 히에이산의 엔랴쿠지 사찰 (세계일보&세계닷컴(www.segye.com))
『일본서기(720)』스이닌[垂仁天皇] 3년 조에 ‘오토모노누시[大友主]는 미와노키미[三輪君]가 조상’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미와노키미는 신라新羅 신神인 대국주신大国主神(제신祭神, 아스카 일대에 모셔 있는 남근석들은 모두 대국주신을 상징)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연력사 사이초의 행적을 그린 그림 간판에는 역시 그를 중국 후한後漢 효헌제孝獻帝의 후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태정관첩 ‘천태좌주기’에 오토모 가문이 신라인으로 명시되어 있는데 언제부터 신라인 ‘미쓰노오비토’(삼진수) 가문이 중국인으로 뒤바뀐 것일까. 문헌을 조사해 보니, 9세기 초에 일승충(一乘忠)이 썼다는 ‘에이산대사전’(叡山大師傳)을 18세기 이후에 필사한 ‘에이산대사전’에서 최징을 중국인 후손으로 쓰고 있다. 일승충이 처음으로 전교대사 최징에 관해 기록했을 때는 모름지기 스님을 신라인으로 썼을 것 같다. 태정관첩 ‘천태좌주기’는 9세기 후반인 서기 866년 세이와 천황이 최징 스님에게 전교대사의 시호를 내렸을 당시에 쓰인 관보(官報)이므로 이 고문서 이상 더 정확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세에 ‘에이산대사전’을 필사하던 당시에 역사 왜곡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왜곡된 대목은 다음과 같다.
“히에이산 동쪽 기슭의 사카모토 땅에는 후한의 효헌제 자손으로서 일본에 귀화한 미쓰노오비토 일족이 번영해 왔다. 그 당시인 ‘진고게이운 원년’(서기 767) 8월 18일의 일이다. 사카모토 땅에는 하늘에서 연꽃잎이 떨어져 내리는 축복된 징조가 나타났고, 때마침 미쓰노오비토 모모에의 집에서는 옥 같은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뒷날 일본 천태종 히에이산의 개조가 된 사이초 성인이었다.”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24>日 천태종 총본산 히에이산의 엔랴쿠지 사찰 (세계일보&세계닷컴(www.segye.com))
9세기 초 일승충一乘忠이 썼다는『에이산대사전叡山大師傳』이나 후반인 866년 쓰인 태정관첩『천태좌주기天台座主記』관보官報에는 오토모[大友] 가문이 신라인으로 명시되어 있는데, 18세기 이후 다시 필사하면서 사이초를 중국인 후손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왜곡은 공공연한 것으로 일본에선 꽤 익숙한 편이라고 한다.
근세며 심지어 현대 일본에 와서조차 고대 일본에서 눈부시게 활약한 한국인들이 예외 없이 중국인으로 뒤바뀌었다. 일본 왕실 역사책 ‘고사기’며 ‘일본서기’에서 ‘백제인 왕인’으로 기록된 왕인 박사를 고마자와(駒澤) 대학 와타나베 미쓰오(渡邊三男 1908∼) 교수는 “왕인은 한(漢) 고황제(高皇帝)의 후손”(‘日本の苗字’ 1965)이라고 쓰고, 아스카 시대(592∼710) 왕실 재무장관이었던 신라인 진하승(秦河勝 6∼7세기)을 가리켜 “진나라 시황제의 후손”이라고도 했다. “진나라 시황제의 성씨는 영씨(瀛氏)”(司馬遷 기원전 145∼68 ‘史記’)라고 했으니 진하승이 진시황제 후손이라면 영씨 성이어야 하지 않을까.
현대 사학계에서 전교대사 최징이 신라인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입증한 것은 도쿄대 사학과의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 1917∼1983) 교수. 이노우에 교수는 고대 일본 고승들은 거의 한반도 출신임을 고증하였다. 후학을 위해 여기 굳이 함께 거명해 둔다. “고승들은 조선인 출신으로서 도자(道慈)를 비롯하여 지광(智光) 경준(慶俊) 근조(勤操) 도소(道昭) 의연(義淵) 행기(行基) 양변(良弁) 자훈(慈訓) 호명(護命) 행표(行表) 최징(最澄) 원진(圓珍) 등이다”(‘王仁の後裔氏族と佛敎’ 1943). 이 논문은 이노우에 교수의 도쿄대 사학과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왕인 박사는 완벽한 백제인으로 규명돼 있다.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24>日 천태종 총본산 히에이산의 엔랴쿠지 사찰 (세계일보&세계닷컴(www.segye.com))
그러니까 후세에 의도적으로 역사 왜곡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히에이산 동쪽 기슭 일대가 고분古墳시대 신라인들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은 ‘백혈고분군百穴古墳群’에 의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다시 말해 5세기말~7세기 경 이 지역에는 한반도로부터 도래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이 고분군도 한반도 도래인들이 축조한 고분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부뚜막 토기가 발견된 오츠시 아노우 마을에는 한반도 생활양식인 온돌의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전교대사 사이초은 도래인의 후손인 셈이다.
5) 천태종의 본산 히에이산 엔랴쿠지[延曆寺]
785년 구족계를 받은 사이초는 히에이산에 올라 수행한다. 788년에는 약사불을 안치하고 일승지관원一乘止觀院이라 하였고, 후에 이 절은 엔랴쿠지[延曆寺]가 되었다. 연력사는 히에이산 정상을 중심으로 동탑(東塔, 도도)지역과 서탑(西塔, 세이토)지역, 그리고 횡천(橫川, 요카와) 지역 등 3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동탑지역에는 근본중당根本中堂, 문수루文殊樓, 장보고기념비, 대강당, 종루鐘樓, 계단원戒壇院, 동탑, 아미타당阿彌陀堂, 산왕원山王院 등이 있고, 서탑지역에는 정토원淨土院, 춘당椿堂, 상행당常行堂, 법화당法華堂, 혜량당惠亮堂, 석가당釋迦堂 등이 있다. 횡천 지역에는 횡천중당(橫川中堂, 요카와츄도), 적산궁赤山宮, 혜심당惠心堂, 원삼대사당元三大師堂, 사계강당四季講堂, 구혜운원舊惠雲院, 정광원定光院, 근본여법탑根本如法塔 등이 있다.
본당인 근본중당에는 아직도 ‘불멸의 법등法燈’이 타오르고 있는데, 이 등불은 절을 창건한 전교대사 사이초가 788년 불을 밝힌 뒤, 1,20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근본중당을 나와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문수보살을 모신 문수루文殊樓가 있다. 그리고 문수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장보고張保皐 비’가 있다.
장보고張保皐는 신라시대 서남해안에 있는 섬 출신으로(청해진이 있었던 완도가 유력), 20대에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 지역에서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보고는 828년 통일신라시대 열일곱 번째 왕인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년~836년) 3년에 귀국해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남서해안의 해적들을 소탕하고 장보고 선단을 운영하면서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한다.
장보고는 823년, 지금의 산동성, 등주 문동현 적산촌에 적산법화원(赤山法花院, 적산원 또는 신라원新羅院)을 세워 신라와 일본에서 온 승려들을 거주하게 하고 보호해 주었다. 그때 신라방新羅坊과 신라원에 머물며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당 유학을 마친 이가 천태종 산몬파의 시조 엔닌[圓仁, 794~864]이다. 엔닌뿐 아니라, 산 아래 있는 사찰 미이데라[三井寺]의 개조인 엔친[円珍, 814~891] 역시 장보고의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사찰 경내에는 신라명신을 모신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이 남아 있다.
중국 3대 여행서로 꼽히는『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쓴 엔닌은 사이초의 제자이다. 840년 2월 17일, 승려 엔닌은 중국여행 허가증을 받지 못한 채 법화원에 머무르면서 장보고에게 존경의 편지를 썼고 장보고의 영향력으로 허가증을 받게 된다. 이후 엔닌은 중국에 머무르면서 밀교를 공부하였고, 847년 귀국할 때는 장보고의 도움으로 559권에 달하는 중국 불교문헌과 의식에 사용되는 불구들을 가져오게 되어 일본 밀교의 원조가 된다.
태밀(台密) 교학의 완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천태종의 승려 엔닌에게는 그의 교학적 업적보다 더욱 주목받는 저술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4권이다.
836년 6월 13일부터 847년 12월 14일까지의 약 9년여에 걸친 입당 여행기로서, 그가 보고 경험한 당시 당나라의 사회상을 꼼꼼히 전하는 귀중한 사료이다. 무종에 의한 회창폐불(會昌廢佛)과 같은 사건은 물론 당시 사원의 의례형태, 사원경제 상황, 불교유적의 상태, 재당 신라인사회의 모습 등, 여타의 사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내용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2. 고대 일본불교의 밀교화.)
엔닌이 장보고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두 번이나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는『입당구법순례행기』에 실려 있다. 장보고 비는 이를 알게 된 후세 사람들이 세운 기념비로, 어딘지 눈에 익숙하다 했더니 이 비는 일본이 아니라 완도군에서 설치한 것이다. 이 비에 대해서는「‘청해진대사 장보고비’ 일본 연역사에 세우다」라는 제하에 ‘청해진대사 장보고 비가 일본 延曆寺 文殊樓(大津市 坂本本町 220) 옆에 세워졌다.’로 시작하는 한겨레:온 기사에 자세하다.
평화의 뱃길이 열린 시대에 장보고와 圓仁 스님은 인연을 맺었다. 圓仁스님은 838년 일본 천태종의 求法僧으로 선발되어 당나라 불교 성지를 방문하고 불교연구를 하고자 고난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847년 여행을 마치고 귀국할 때까지 9년 6개월 동안 圓仁스님은 장보고의 사찰과 장보고 휘하의 재당 신라인들의 도움으로 구법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장보고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주요 활동지마다 사찰을 건립하였고 스님들을 극진히 모셨다. 특히 圓仁 스님의 구법여행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표했다. 圓仁 스님이 남긴 <입당구법순례행기>는 이와 같은 두 분의 인연을 소상히 전하고 있다. 圓仁 스님은 장보고의 인품과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공경과 흠모의 정이 담긴 서한을 남겼다.
圓仁 스님은 당나라에서 장보고 선단의 도움으로 많은 불구와 불교 경전을 일본에 가져갈 수 있었다. 圓仁 스님은 당에서 가져온 佛具와 佛敎經典 하나에 하나의 건물을 지어 연역사의 대대적인 중창을 이룩하였다. 또한 유언으로 적산선원을 열게 하고 신라명신을 봉안하였다. 신라명신은 장보고을 신으로 모신 것이다. 두 분의 관계는 비길 데 없이 격조 높고 아름다운 관계라 아니할 수 없다. 장보고 대사와 圓仁 스님의 인연은 오늘날 한․일 관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본다. (양성숙 편집위원, 「‘청해진대사 장보고비’ 일본 연역사에 세우다」(출처 : 한겨레:온 (http://www.
hanion.co.kr))
‘연역사의 청해진대사 장보고비는 한․일 양국의 공식기관(완도군, 연역사)이 함께 세운 최초의 기념비다. 이 작은 비가 한․일 양국의 선린우호와 상호발전에 기여하기를 염원하면서 이 비를 세웠다.’는 이 기사에는 청해진대사 장보고비 설립, 청해진대사 장보고비 개요 비문 내용, 圓仁 스님이 장보고대사에게 보낸 서찰 번역(김문경 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역주) 등이 실려 있다.
사이초가 히에이산 동탑지구에 연력사를 지었다면 당에 들어가 천태종을 공부하고 돌아온 3세 좌주座主 자각대사慈覺大師 엔닌은 848년 횡천중당橫川中堂을 건립한다. 횡천지구에는 세키잔구[赤山宮]이 있다. 세키잔묘진샤[赤山明神社]라 불리는 이 신사의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자각대사 엔닌 화상이 칙허를 받아 당나라로 건너가 적산(赤山) 신라명신(新羅明神)을 유학 중 불법연구의 수호신으로서 권청하여 자신의 주명신(呪命神)으로 삼고 그 공덕에 의해 10년간의 수행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으므로 귀국 후 이곳에 모셨다. 이후 전국 사원에서는 자각대사를 천태불법 전승의 대사로 추앙하면서 적산 신라명신을 천태불법의 수호신으로 삼아 모시고 있다. 적산명신은 재난을 없애주고 수명을 늘려주는 방제의 신이자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박규태 한양대학교 교수,「히에이산 연력사의 <적산궁>과 <장보고 기념비>」)
엔닌이 당나라 유학 시 중국 산동성 적산赤山 신라방이 있던 신라명신을 모시고 귀국, 이곳에 모셔 일본 천태종의 불법 수호신으로 삼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라명신新羅明神을 자신의 신주로 모신 히에이산 연력사 출신은 더 있다.
신라명신'(新羅明神)을 자신의 신주로 모신 히에이산 엔랴쿠지 가람 출신 고승은 모두 네 명이다. 전교대사 최징(傳敎大師 最澄·사이초 767∼822)과 그의 직제자인 자각대사 원인(慈覺大師 圓仁·엔닌 794∼864), 지증대사 원진(智證大師 圓珍·엔진 814∼891), 그리고 원삼대사 양원(元三大師 良源·료겐 912∼985) 스님이 그들이다. 모두 일본 땅의 신라인 후손들이다.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 (26) 온조지 사찰의 신라선신당.)
적산궁에서 내려오면 종루가 있고 종루에서 남쪽 참배 길로 내려가면 오른쪽에 염불삼매도량인 에신도[惠心堂]가 나온다. 혜심당은 천태종 18세 좌주를 지낸 료겐 대사의 제자로 혜심승도(惠心僧都, 에신소주) 혹은 횡천승도橫川僧都로 불리는 겐신[源信, 942~1016]이 머문 절이다.
료겐의 제자인 겐신[源信]은 이곳 혜심당에서 은거하며 후일 정토종淨土宗의 기초가 된『왕생요집往生要集』이라는 책을 편찬한 인물이다. 교토에서 칭명염불稱名念佛을 외치며 민중들을 교화敎化한 시장 속의 성인, ‘이치히지리[市聖]’ 쿠야[空也, 903~972]가 정토신앙의 씨앗을 뿌렸다면, 학승 겐신은 저술을 통해 정토신앙을 확산시켰다고 할 수 있다.『왕생요집』의 집필 후에도 혜심원에서 수행과 저작활동에 전념하여, 1014년에는『아미타경약기阿彌陀經略記』등을 찬술撰述한다. 1017년 6월 10일 76세로 입적하였는데, 임종 시에는 아미타여래상阿彌陀如來像의 손을 묶은 실을 잡고 합장한 상태로 입적하였다고 한다.
3권 10부로 구성된 《왕생요집》은 혼탁한 말법시대에 살고 있는 중생들에게 있어서 극락왕생을 위한 염불만이 가장 적절한 길이고, 이러한 관점에서 경전이나 논서 등에서 염불과 극락왕생의 요점을 설한 부분을 수집하여 하나로 엮은 것이다.
(중략)
이후 겐신의 왕생요집, 특히 염리예토, 흔구정토의 교설은 헤이안 귀족들뿐만 아니라 서민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되었고, 불교교학 뿐만 아니라 문학, 예술, 일반 관습에 이르기까지 일본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호넨(法然), 신란(親鸞) 등 정토계 가마쿠라 신불교 조사들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정토교의 기초가 이 책으로서 완성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5. 저자의 성자 큐야, 겐신의 ‘왕생요집’.)
종루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히에이산 중흥조 자혜대사慈慧大師 료겐[良源, 912~985]이 머문 간잔다이시도[元三大師堂] 건물 군이 나온다. 18대 좌주인 료겐[良源]이, 무라카미[村上] 천황의 명으로 사계절 내내 법화경을 강의했다고 해서 시키코도[四季講堂]란 별칭이 붙어 있는 곳이다. 원삼대사당 입구에는 부적 같은 원삼대사 그림이 붙어있고, 오른편이 수계행사를 치르는 계족원관실雞足院灌室, 왼편에는 구혜운원舊惠雲院이란 건물이 있다.
료겐은 서기 912년 오우미(近江·지금의 오쓰시 일대) 땅의 히가시아사이(東淺井)에서 명문 모노노베씨(物部氏)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12살에 히에이산 서탑보당원(西塔寶幢院)에 입산함으로써 고승직에 오를 수 있는 '일산대중'(一山大衆)에 들어섰다. 일산대중의 길은 우선 중앙 또는 지방의 이름난 명문 출신의 자제에게만 한정됐다.
(중략)
명문 모노노베씨 가문은 신라인('신찬성씨록' 815년 성립)이며, 고대 일본 왕실에서 백제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신토(神道)를 일으켜 받들어 온 가문이다.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 <44> 산통으로 점치는 ''오미쿠지'' (세계일보&세계닷컴(www.segye.com).)
신라계인 모노노베씨[物部氏] 가문 출신인 료겐은 1월 3일에 입적하여 원삼(元은 1월을 나타내므로 元三)대사란 이름을 얻었다. 료겐은 연력사 중흥조로 횡천지구를 독립시켜 비예산 삼탑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의 사후에는 대사에 대한 신앙이 생겨 수많은 별명들을 가지게 되었는데, 귀대사鬼大師, 콩[豆]대사, 뿔[角]대사 등등으로 불린다. 원삼대사당 입구에 여러 개 현판이 걸려 있고, 실내에는 원삼대사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귀대사 그림이 걸려 있다. 그림 부적이 효험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신사나 절에 가면 오미쿠지御神籤라고 하여 하얀 종이를 접어 주렁주렁 걸어 놓은 것을 보게 된다. 어느 신사, 사찰에 가든 경내에서 인생의 행복을 기원하며 산통算筒을 흔들어 길흉사의 점을 치고 미코(巫女, 신사 직원)에게 돈과 함께 주면 그에 해당하는 오미쿠지(운세풀이 종이)를 준다. 운세풀이 종이에는 남녀 애정 문제, 길흉, 승진, 건강, 직업, 학업, 대인관계, 이사방위 등이 적혀있다. 우리가 재미로 치는 운수 점과 비슷하다. 대개 오미쿠지를 읽은 사람들은 신사 경내에 묶어 놓고 가도록 설치한 곳에 얌전하게 묶어 놓고 간다. 앞으로 좋은 괘는 이루어지고 나쁜 것은 신사의 신이나 절의 부처가 잘 돌봐줄 거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일종의 '부적'이다. 이러한 부적들은 경내 야트막한 나뭇가지에 흡사 흰 눈처럼 줄지어 매달려 있다. (김영조의 ‘일본 속의 한국문화 톺아보기’ <23> 신라출신 원삼대사는 운세풀이의 시조이자 액막이 대사 (2010년 03월 23일(화) 09:55 [인제신문])
이처럼 산가지를 산통에서 뽑아내는 오미쿠지[御神籤] 점치기를 일본 고대에 가장 먼저 시작한 이가 원삼대사元三大師 료겐이다. 그러므로 일본 신토[神道] 문화의 하나인, 신사나 절에서 제비뽑기를 하여 길흉吉凶을 점치는 오미쿠지의 발생지가 바로 이곳 원삼대사당元三大師堂인 것이다.
간산대사당(주정당) 경내 안내판에는 '액막이대사(厄除け大師), 오미쿠지대사(おみくじ大師) 주정당(求法寺)'이라는 긴 표제의 해설판이 세워져 있다. 이 해설판에는 "간산대사는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또 이곳에는 '간산 대사와 뿔대사(角大師)의 유래'라는 두 뿔이 솟은 뼈대만 있는 사람 모양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어서 흥미롭다. 비석에 새겨진 유래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서기 984년, 전국에 못된 병마가 휩쓸어 수많은 사람이 죽으며 신음하게 되었다. 이에 간산 대사께서 병마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조용히 큰 거울 앞에서 손을 합장하고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러는 동안에 몸뚱이가 저절로 거울 속으로 들어간 대사의 모습은 점점 변신하더니 몸은 뼈만 남은 도깨비(야차·夜叉)로 바뀌었다.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 중의 '명길아자리'가 재빨리 그 모습을 직접 붓으로 그렸다. 그러자 대사는 제자에게 서둘러 뼈만 남은 도깨비 모습의 야차 그림을 나무판에다 새겨 판본을 만들게 하였고, 대사는 수많은 사람에게 그 판본 야차 그림을 찍어서 나누어 줬다. 이 판본으로 찍어낸 찰(부적)을 집집이 갖다 붙이자 집 안에 숨었던 병마는 겁을 먹고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그 이후 1000여 년 동안 사람들은 간산 대사의 부적을 '뿔대사'라고 추앙하며 호부(護符)로 삼게 되고 병마의 퇴치와 온갖 액을 면하게 되는 영험한 '오미쿠지'로서 전국에서 받들어 오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일본 각지의 신사, 사찰에서 자신이 직접 산통을 흔들어 사게 되는 오미쿠지의 효시는 신라인 간산 대사임을 말해준다.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44> 산통으로 점치는 “오미쿠지”' (세계일보&세계닷컴(www.segye.com).)
일본에서 역병을 물리친 액막이 대사로 유명한 신라인 고승 간산(원삼·元三)대사의 에도시대 인출본 각대사, 콩대사 부적이 특히 눈길을 끈다. 코로나19 이후 일본에서 뿔 달린 각대사 부적이 재유행하고 있어서다. 각대사 부적은 서기 984년 전국에 병마가 들었을 때 간산대사가 조용히 합장하고 기도하자 거울로 들어간 대사가 뼈만 남은 도깨비(야차·夜叉)로 바뀌었는데, 이를 본 제자가 그 모습을 재빨리 그린 후 나무판에 새겼다는 설이 내려온다. 이 판본 야차를 찍은 부적을 집집마다 붙이자 병마가 사라지게 됐다는 유래를 갖고 있다. 이후 간산대사의 부적은 ‘각대사’라고 불리며 영험한 부적으로 이어져왔다. 일본 국립도쿄박물관이 올 가을 간산대사 특별전을 예정하고 있다는 점은 선조들의 액막이 문화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심을 보여준다. (김진형 역병 벗어나려는 마음, 천 년 지나도 ‘살아있는 힘’ 되다 ‘마음의 백신-다라니·부적전’, 20일 원주 고판화박물관 개막, 코로나 정국 액막이 문화 조명, 아시아 각국 유물 100여 점 전시, 출처 : 강원도민일보(http://www.kado.net))
2021년 코로나가 한창일 때 치악산 명주사 고판화 박물관(관장 한선학)에서는 문화재청 생생문화재 사업으로 4월 20일부터 5월 30일까지『마음의 백신- 아시아 다라니와 부적』특별전이 개최되었다.
‘코로나 19 극복’을 위한 이번 특별전에서는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티베트, 몽골, 네팔 등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옛 선인들이 역병이나 고난을 극복하거나 소구소망을 담아 ‘마음의 백신’으로 사용했던 다라니와 부적 60 점을 비롯해 인출할 때 사용하였던 목판 20여 점과 다라니와 관련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51호인 제진언집 등 고서 20여 점 등 총 100여 점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예로부터 다라니는 불보살의 지혜와 복덕을 나타내는 신비로운 범어로 된 주문으로, 원문을 번역하지 않으며, 이 주문에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어서 이것을 외우면, 모든 장애를 벗어나는 공덕을 얻는다고 하였다. 인도의 고대 철학 사상인 아트르바 베다와 인도의 고대 의학인 아유르 베다와 깊은 연관성이 있으며, 인도, 티벳, 중앙아시아,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등으로 전파되어 발전하였으며, 도교와 민속 신앙과도 결합되어 각 나라마다 독특한 부적으로도 발전되었다. (염정우 기자 bind1206@naver.com,『마음의 백신-아시아 다라니와 부적 특별전』미디어 붓다 (media Buddha.net))
이 특별전에 원삼대사의 에도시대 인출본印出本 각대사 부적, 원삼대사 판본(각대사(간잔다이시)와 뿔 달린 각대사(추노다이시) 부적), 콩대사 부적 등이 공개되었다고 한다. 코로나19 이후 일본에서도 뿔 달린 각대사 부적이 재유행하고 있다고 하는데, 일본 국립도쿄박물관에도 원삼대사 특별전이 열렸다고 한다.
오사카 시텐노지[四天王寺]에도 원삼대사당이 있지만 원삼대사를 모신 사찰로 유명한 사찰은 진다이지[深大寺]다. 심대사深大寺는 도쿄 쵸후시[調布市]에 있는 사찰로 733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러니까 약 1,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절이다. 이 절의 창건 설화說話를 보면 고구려(또는 백제)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는데, 절이 있는 기타타마군[北多摩郡] 고마에정[拍江町]의 고마[拍]라는 지명도 고구려와 연관이 있다.
심대사는 재난을 막아주는 액막이나, 사랑이 성취되는 인연 맺기가 이루어주는 주는, 즉 행운을 주는 사찰로 유명하다. 심대사는 또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금동석가여래상金銅釋迦如來像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1909년에 원삼대사당의 단상 밑에서 발견된 아스카[592~710] 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석가여래상이다. 전체 높이 83.9cm, 좌고 59.3cm의 7세기 만들어진 대형불상으로, 관동지방에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불상을 닮은 작품이다.
원삼대사당을 나오면 동남쪽으로 하시즈가벤자이텐[저총변재천箸塚弁財天]이라는 젓가락 무덤이 나온다. 힌두교 예술의 여신 사라스바티가 불교에 흡수되면서 예능의 신 벤텐[弁天]이 되었는데, 재액을 막고, 싸움에서 이기게 해주는 신으로 변설, 재화, 복, 지혜, 연수延壽 등을 담당한다. 변천은 변재천弁才天이라고도 하고, 재주 재才를 재물 재財로 바꿔서 변재천弁財天이라고도 쓴다. 일본 전통 민간신앙에서 숭배하고 있는 절이나 신사 등에서 흔히 만나는 칠복신七福神 가운데 유일한 여성 신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대부분 변재천弁財天이라고 쓰는데, 저총변재천箸塚弁財天은 특별히 젓가락들을 묻고 세운 사당이다. 헤이안 시대로부터 일본은 나라에 난이 일어나거나 天災地變이 발생하면, 많은 승려를 불러 모아 공양하는 법회 센조쿠요[천승공양千僧供養]가 열리는데, 원삼대사가 거행한 천승공양에서 사용된 젓가락들을 모아 묻고 사당으로 만든 것이다. 이어 갈림길에서 왼쪽으로는 원삼대사 묘소로, 오른쪽으로는 정광원定光院으로 가는 길이다.
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도쿄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이초가 헤이안, 도쿄로의 천도를 예상하고 이곳에 자리 잡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절묘한 위치다.
천태종天台宗
중국 불교 십삼종十三宗의 하나. 중국 수隋나라의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가『법화경法華經』을 근본 교의敎義로 하여 처음 세운 종파이다. ‘천태종’이라는 명칭은 6세기의 승려로서 이 종파의 실질적 개조이며 위대한 설법자였던 지의가 거주하며 가르침을 폈던 중국 동남부의 산에서 유래한다. 이 종파의 기본경전은『법화경』이며, 이 때문에 ‘법화종’으로 불리기도 한다. 천태종의 기본적인 교의는 ‘삼제원융三諸圓融’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데, 첫째, 모든 현상은 존재론적 실체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공空의 진리,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임시적으로는 존재하고 있다는 가假의 진리, 셋째, 모든 현상은 비실체적이며 동시에 임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어서 첫째와 둘째의 진리는 포용하면서도 초월한다는 절대적인 중中의 진리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진리는 각각 다른 두 진리를 서로 포용하며 각각은 나머지에 이미 속해 있다고 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변화한다는 점에서 현상적 세계를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와 동일시한다. 삼제원융의 가르침은 북제北齊 혜문慧文의 가르침이지만 천태종의 창립에 크게 공헌한 인물은 제3대 지의이다. 지의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에 이르렀을 당시에 이미 불교의 온갖 교의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으며 다만 듣는 이들의 정신적 자질에 따라 점차적으로 펼쳐내었다고 전제하고, 이러한 전제에 의거하여 불교 경전 전체를 체계화했다. 그 가운데『법화경』을 석가모니의 모든 가르침을 담고 있는 최고의 교리서로 간주하였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천태의 사상은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을 수용하고 있으나, 화엄이 ‘일즉다’를 강조하는데 반해서 ‘다즉일’을 강조함으로써 많은 교법들을 하나로 귀일 시키는 일원론적 성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