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의 성만찬 논쟁
목 차
I. 서론 1 A.연구의 동기와 목적 1 B.연구의 범위와 전제 1 II. 요한복음의 성만찬에 대한 견해들 5 A. 극단적 성례전적 견해 7 B. 반 성례전적 견해10 C. 수정 성례전적 견해13 D. 피상적 성례전적 견해15 III. 요한복음의 역사적 배경과 집필 목적20 A. 요한복음의 역사적 배경20 1. 영지주의21 2. 유대교25 B. 원시기독교 예배와 요한복음32 1. 기독교 예배의 구성32 2. 요한복음과 예배33 C. 요한복음의 집필 목적36 IV. 요한복음의 성만찬적인 본문 주석41 A. 요한복음 6장 26-47절 주석41 B. 요약51 C. 요한복음 6장 48-58절 주석52 D. 요 약59 V. 결 론61
* 참고문헌
I. 서론
A. 연구의 동기와 목적
요한복음서가 공관복음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성례전적’ 사고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부정할 수 없다. 요한복음 6:1-14, 26-71에 있는 “생명의 떡”에 대한 예수의 말씀에서 인자(人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표현은 성만찬을 가리킨다고 일반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성만찬 제정 기록이 없다. 여러학자들은 요한복음 성만찬 제정 기록이 없음은 저자가 성만찬에 무관심했거나 반대하였을 것으로 이해한다. 요한복음이 성만찬적인 의도가 “있다”, “없다”하는 상반된 주장은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논쟁이다. 이에 대하여 본 논문은 요한복음이 성만찬 예전의 기록은 없지만 성만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루고자 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첫째, 지금까지 학자들이 논의 해 온 요한복음의 성만찬에 대한 견해들을 소개하는 것이다. 둘째, 요한복음의 역사적 배경과 집필 목적에서 성만찬적인 배경을 규명하는 것이다. 세째, 본문 주석에 의해 밝혀진 결과를 근거로 하여 요한복음이 성만찬적인 의도에서 집필되었다는 것을 규명하는 것이다.
B. 연구의 범위와 전제
본 논문은 요한복음이 성만찬적인 것을 밝히는데 있다. 보다 깊고 넓은 성만찬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성만찬에 관련된 모든 부분들을 취급해야 한다. 또한 많은 학자들이 하나의 주제로 세례와 성만찬을 함께 구성한 성례전 문제를 다루고 있어 세례에 관한 문제를 취급하는 것이 보다 균형있고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성만찬 문제만 다룰 것이며 세례는 II장에서 성례전 문제로 대치할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의 역사적 정황이 다양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성만찬과 관계가 깊은 영지주의와 유대교만 다룰 것이며, 본문 주석은 6장 26절-58절 만을 다룸으로 그 범위를 정한다. 본 논문에서는 요한복음의 저자로 사랑하는 제자 ‘사도 요한’으로 전제하며 요 의 저작 활동 시기는 A.D.90 - 1C 말로 전제하고 집 장소는 에베소를 중심으로 하는 시리아 소아시아 지방으로 전제한다. 연구 진행은 II장에서는 요한복음의 성만찬에 대한 여러가지 주장들을 4가지 유형을 통하여 소개하며 중요한 주장과 문제점을 밝힌다. III장에서는 요한복음 본문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배경을 통하여 요한복음이 성만찬적인 배경에서 집필되었다는 것을 밝힐 것이다. 영지주의를 대항하기 위한 성육신의 사건과 유대교의 공격에 대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리스도이심을 변증하는 과정에서 요한이 성만찬적인 의도로 그의 복음서를 집필한 것을 규명할 것이다. 또한 초대교회 예배를 통하여 성만찬의 위치를 살펴보고 요한이 예배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배를 성만찬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것을 규명할 것이다. 요한의 집필 목적을 살펴보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요한의 세밀한 의도가 바로 성만찬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밝힐 것이다. 제 IV 장에서는 요한복음 6장 26절-58절의 본문들을 주석하여 밝혀진 결과를 통하여 요한복음이 성만찬에 관한 본문을 가지고 있으며 요한복음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성만찬적인 배경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제 V 장에서는 요약과 결론으로 요한복음이 저자가 처한 역사적 배경과 저자의 집필목적에 따라 성만찬적으로 집필되었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자 한다. I. 요한복음의 성만찬에 대한 견해들
먼저 요한복음의 성만찬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기 전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성만찬과 세례를 따로 분리하지 않고 함께 성례전 문제로 취급함에 주목하여야 한다. 따라서 성만찬에 대한 논의는 성례전에 대한 학자들의 입장과 그 맥을 같이 할 수 밖에 없다. 2장에서는 학자들의 성례전 논의를 소개하면서 함께 성만찬 문제를 그 안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요한복음의 성례전 논쟁은 요한복음에 과연 성례전이 있는가? 있다면 왜 세례에 대한 예수의 명령, 그가 세례 받으신 일, 주의 만찬 제정 내용이 없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등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이 논쟁은 교부시대 까지 소급이 된다. 요 6:51-58의 해석과 관련해서 Chrysostom, Cyril, 그리고 Cyprian은 성만찬과 관련시켰지만 알렉산드리아의 Clement, Origen은 반대 입장에서 인간의 마음이 생명의 떡인 그리스도의 교훈에서 배부름을 얻는다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요한복음의 성례전적인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불트만(Rudolf. Bultmann)과 쿨만(O. Cullmann)에 와서 비롯된다. 불트만은 1941년에 Das Evangelium des Johannes에서요한복음은 성례전에 대해 반대적이며 그 안에는 성례전 본문이 없다는 반 성례전적(Anti - Sacramental View)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서 쿨만은 1944년 출간된 Urchristentum und Gottes- dienst을 말하여 요한복음은 극히 성례전적이며 많은 성례전적 상징과 내용을 담고 있다는 극단적 성례전적 견해 (Ultra Sacramental View)를 밝혔다. 이러한 양극단적인 입장을 피해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한 학자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요한복음의 성례전 논쟁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분류하는 데는 학자들마다 차이가 있다. J.Dunn은 3가지로 분류한다. ‘가장 성례전적’(Ultra Sacra -mental) 범주와 ‘무(無) 성례전적’ 범주로 이는 ‘반(反) 성례전적인’(Anti - Sacramental View) 경향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변형된 성례전적’ 범주로 구분한다. 카이자르(R.Kysar)도 요한복음 저자의 성례관을 중심으로 3가지로 분류하는데 첫째, 저자를 열렬한 성례전주의자로 보는 범주로 대표적인 학자로 브라운(Raymond Brown)을 들고 있다. 둘째, 저자를 성례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독특한 해석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는 범주로 이 분류에 속한 학자는 그리거(Mac Gregor)인데 그는 저자가 “영적 해석”을 제공하는 성례전으로 이해한다고 하였다. 셋째, 저자에게서 성례전적인 의미가 되는 본문들을 찾을 수 없다는 범주다. 카이자르는 자신을 이 분류에 포함시킨다. 브라운은 요한복음 전체에 대한 해석의 입장을 중심하여 크게 극단적 성례전적 견해와 무성례전적 견해로 나누고 무성례전적 견해 안에 반성례전적 견해(Anti - Sacramental View)와 피상적 견해(Peripheral Sacramen tal View)를 포함시킨다. 본논문에서는 브라운의 분류를 중심으로해서 극단적 성례전적 견해, 반 성례전적 견해, 수정 성례전적 견해, 피상적인 성례전적 견해의 네 가지 범주를 소개하고자 한다.
A.극단적 성례전적 견해 (Ultra Sacramental View)
이것은 요한복음의 저자를 적극적인 성례전주의자로 이해하고 요한복음서 안에 분명한 성례전적 표현과 내용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O. Cullmann, Als Corell, V. Ruland, B.Vawter, P. Niewalda 등이 여기에 속한다. 쿨만은 요한복음 안에 초대교회 예배의 중심요소인 세례와 성만찬에 대한 관심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고 본다. 쿨만은 요한복음 저자의 주요한 관심은 초대 기독교 예배와 역사적 예수의 지상 생애를 연결시키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요한복음이 세례와 성만찬을 초대교회 전체 예배의 표현으로 이해하며 예배의 목적은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극에 달하게 된다고 하였다. 즉 초대교회 예배의 두 요소인 세례와 성만찬은 현존하신 공동체의 주님과 예수의 지상 생애를 연결시키고 있다고 하는 것이 쿨만의 주장이며 이런 관점에서 쿨만은 요한복음의 거의 모든 장에서 성례전적 상징과 표현을 찾아내고 있다. 쿨만은 요한복음의 많은 귀절들이 성례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주장하면서 6장의 생명의 떡에 관한 설교를 두 부분으로나눈다. 이 두 부분은 모두 주님의 성찬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 첫번째는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서 다루고 있고 두번째 부분은 성례전에서 베풀어지는 떡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고 한다. 설교의 첫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세례와 주님의 성찬이라는 성례전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 요한은 이 설교에서 역시 역사적인 예수가 과거라는 시간 속에서 나타나셨다는 것과 주님의 성찬 속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는 두 사실을 한꺼번에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설교의 두번째 부분인 53절과 56절에는 몸을 먹는 것 뿐만 아니라 피를 마시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가나 결혼잔치의 기적 기사에서 성례전에서 베풀어지는 포도주에 관한 설명이 이미 있었다는 사실로 설명 할 수 있으며 가나 결혼잔치의 기적에서는 포도주가 강조 되어 있고 여기에서는 떡이 강조되고 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6장의 생명의 떡에 관한 설교는 2장의 포도주에 연관되어 설명이 가능한 것이며 이 두 기적, 즉 떡의 기적과 포도주의 기적은 모두 성찬식에서 공동체에게 베풀어지는 떡과 포도주에 연관되어 있다. 예수회 신부인 루란드(V. Ruland)는 생명의 떡 설교에 대해서 쿨만은같은 견해를 제시한다. 루란드는 이 설교에 나타난 성만찬 언어를 본래 주의 만찬 담화에서 유래된 본문 보다 초기의 상황으로 옮겨서 편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저자 또는 편집자는 철저한 성례전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는 6장에 언급된 “표적(σημειον)”의 해석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 “표적”은 일차적으로는 기적의 떡인 만나와 연결되는데 루란드는그것을 생명의 떡이신 예수의 ‘성만찬적 살’ (eucharistic flesh)과 관련시킨다. 그리고 결론 내리기를 표적은 영생을 얻게 하며 상호의 거함을 성취하는 성만찬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예수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공간적, 시간적으로 나타났다는 의미에서 “성례전(sacrament)”으로 이해한다. 그는 생명의 떡 담화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이 세상에 대한 아버지의 눈에 보이는 인격적 자기 표현으로 제시 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이 원시적 성례전(primordial sacrament)이다”라고하였다. 이와같은 극단적 성례주의(ultra sacramentalism)는 요한복음을 성례전적으로 해석하는 전제로 “성례전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본문은 모두 성례전적으로 의도된 본문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B. 반 성례전적 견해 (Anti - Sacramental View)
이 견해는 요한복음안에 본래 성례전적 본문이 없을 뿐 아니라 요한복음 기자가 성례전 자체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헀다고 보는 것이다. 반 성례전적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무엇보다도 요한복음 안에 예수께서 요한으로 부터 세례를 받으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실과 또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와 같은 “세례를 주라”는 명령이 나타나지 않은 사실과 예수의 성만찬 제정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중요시 한다. 초대 교회 전승 가운데서 수난 설화와 관련하여 그리고 교회 예식과 관련하여 그토록 중요헀던 성만찬 제정 전승이 공관복음서 (막 14:22-25, 마 26:26-30, 눅 22:15-20)에서는 물론 바울에게서도 (고전 11:23-25) 나타나고 있는데 오직 요한복음에서만 소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생각한다. 불트만은 요한복음에 세례와 성만찬을 가리키는 본문이 세 곳 (3:5, 6:51-58, 19:34-35)있지만 이 본문들은 모두 후대에 교회의 편집가에 의해서 공관복음의 교훈이나 일반교회의 교훈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삽입해 넣은 본문일 뿐 본래의 저자는 근본적으로 성례전에 대해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도리어 성례전이 요한복음 기자에게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말씀으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불트만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성례전에 대해 그토록 무관심헀던 이유는 그것이 구원의 수단으로 오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성례전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으며 침묵했다고 한다. 요한복음서에 본래 성례전적 본문이 없다고 보는데서 보른캄(G. Bornknamm)이나 로세(E. Lohse)도 불트만과 같다. 로세는 “요한복음의 원형은 본시 성례전이 없는 복음이었다”라고말하였다. 카이자르는 당시의 공동체(Johannine Cammunity)는 적어도 초기에는 성례전을 알지 못헀기 때문에 초기의 복음서에 성례전적 본문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칼웰(E.C.Collwell)과 타이터스(E.L.Titus)도 요한이 성례전 제도를 배격한 이유로 그의 종교적 견해에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요한의 다이나믹한 개념에 위배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종교에 대한 성례전적 견해는 결과적으로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기계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하였다. 즉요한복음은 성례전 예식 자체가 어떤 효력이 있는 것처럼 가르치면서 즉각적인 종교적 체험을 억누르려는 경향에 대해 반발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요한복음 저자가 성례전에 대한 입장이 무(無)성례전적 혹은 반(反) 성례전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전제는 복음기자가 성례전적 의미를 의도했었다면 그런 의미를 좀 더 분명히 표현했을 것인데 그렇지 못한 것은 복음서 저자가 성례전에 대한 관심이 없었거나 거기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브라운은 “침묵으로 부터의 논증(argument from silence)”이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이 “침묵”은 성례전이 이미 전제되어 있고 또한 일반적으로 널리 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성례전에 대한 설명과 구체적인 표현이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요한복음이 공관복음보다 늦게 집필되었으며 초대교회가 이미 그 예배에 중요한 요소로 성례전을 실시하고 있을 때 요한은 성만찬의 예전적 규범없이 성만찬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독자들의 생각 속에 성만찬에 대한 전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만찬의 용어나 상징적인 표현이 있는 곳에 서는 성만찬을 생각할 수 가 있었을 것이다. 불트만은 요한복음의 성만찬 본문이 세 곳 (3:5, 6:51-58, 19:34-35)있지만 이 본문들이 후대 교회 편집가에 의해 삽입되었다고 하였다. 불트만의 견해와는 달리 6:35절과 51절, 38절과 51절, 그리고 49절, 50절과 58절을 비교하여 살펴 본 결과 이 문맥이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따 서 이 본문들은 삽입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한 본문으로 보아야 한다. 불트만의 편집적인 입장에서 요한복음을 보고 있어서 요한복음이 한 저자의 집필이라고 입증이 될 때 그의 주장은 철회되어야 할 것이다. 또 교회의 편집자가 그릇된 성례전 사상이 담긴 본문을 삽입해 넣었다면, 당시의 교회는 그 문제에 대해 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불트만은 설명을 해야만 할 것이다. 칼웰과 타이터스는 요한이 성례을 배격한 것은 성례전이 종교적인 생동감을 저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예배 속의 성례전은 그리스도의 현존을 가장 잘 느낄 수 있으며 가장 생동감 넘치는 종교적 행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칼웰과 타이터스는 초대 교회가 가지고 있던 성례전의 생동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C. 수정 성례전적 견해 (Modified Sacramental View)
이것은 극단적 성례전주의와는 달리 요한복음에서 소수의 성례전 본문을 인정하는 보다 온건한 입장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기자가 성례전에 대한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다. 브라운, 바렛(C.K.Barrett)등이 여기에 속한다. 브라운은 요한복음에서 너무 쉽게 성례전적 본문을 찾아내는 것을 비판하고 Niewalda의 교부적 예전적 증거(partistic and liturgical evidence)와 본문안의 내적증거로 성례전적 본문으로 알려진 것들을 검토하여 판단기준으로 삼았다. 이런기준에 따라서 9개의 본문 만을 성례전 본문으로 받아 들이며, 이러한 본문을 근거해서 요한복음 안에 성례전적 관심이 매우 강하다고 보았다. 바렛은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서 보다 성례전적인 가르침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또 그는 예수님의 성육신 자체가 성례전적 사건이며 6장, 15장 19:34 등에 요한의 성례전에 대한 자세와 언급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고 본다. 브라운은 6장에 대해서 말하기를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예수의 말씀이 본래 생명의 떡 담화의 본문과 혼합된 형태로 6장 안에 나타나 있다고 본다. 특히 6:51 을 바울 - 누가 전승 (Pauline - Lucantradition)에서 발견되는 성만찬 제정 공식문구와 매우 비슷하다고 보고 그 구절을 요한적 성만찬 제정 공식문구 (Johannine Institution Formula Interpolation)이라고 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서 공적 사역 때 그토록 정확한 용어로 성만찬에 대해서 말했을리 없다는 가정하에 6:51-58절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형성 단계에서 복음서 기자 자신에 의해서, 또는 요한의 제자에 의해서 삽입된 것으로서 요한복음의 전체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이 귀절은 요한적 삽입 (Johannine - Interpolation)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생명의 떡 담화를 성례전적으로 해석한다. 이 담화는 두 부분 (35-50, 51-58)으로 나뉘어진다. 첫 부분은 지혜적 주제 (Sapoential Theme)가 일차적으로, 성례전적 주제가 부차적으로 나타나며 두번째 부분에는 전적으로 성례전적 주제가 나타난다고 본다. 이로 인하여 첫째 담화에 나타난 잠재적이며 이차적인 성만찬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D. 피상적 성례전적 견해 (Periphera Sacramental View)
브라운은 요한복음의 성례전 본문을 단지 표면상으로만 성례전적 성격을 지닌다고 하거나 또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실재를 부인하던 도케티즘 (Docetism)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지칭하는 말로 피상적 성례관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쉬바이쳐(E.Schweizer)는 성례전적 본문인 3:5, 6:51-58, 19:34 등은 반가현설적인 (anti -Docetic) 목적으로 기록된 것으로 성육신의 실재를 보여준다고 하였다. 따라서 성례전이 그 자체로서는 강조되지도 않고 또 성레전이 요한복음의 중심적인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브룩스(O.S.Brooks)도 요한복음에서 성례전이 반가현설적 목적과 관련하여 언급되었다고 본다. 그는 요한일서 5:5-8절의 “피 (αιμα)”가 일차적으로는 예수의 성육신의 실재를 가리키고, 이차적으로는 성만찬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브룩스는 이러한 생각이 요한 6장의 담화에서도 강조되고 있다고 한다. 떡을 가리키는 ‘σωμα’가 ‘σαρξ’로 바뀐 것이 좋은 증거가 된다고 한다. 그것은 요한복음 1:14 의 “말씀이 육신(σαρξ)이 되어”가 성육신의 의미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Brooks는 ‘αιμα’와 ‘σαρξ’가 이중적으로 사용된데서 본 담화가 예수의 인간됨의 실재를 강조하며 동시에 성례전적이라고 본다. 그는 요한복음 저자가 성례전과 예수의 인간됨을 관련시켜 놓았다고 생각하고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성례전적 의미가 예수의 인간됨의 실재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생명의 떡 담화에 나타난 요한의 성만찬 이해는 예수의 인간됨의 실재를 지적하는 것이거나 또는 그것의 증거라고 한다. 발더립(D.G.Vanderlip)과 맥그리거(G.H.C.Macgregor)는 생명의 떡 담화의 성례전적 성격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1세기 말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유대인과의 성례전 논쟁에서 성례전을 옹호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으로 해석한다. 맥그리거는 본 담화의 자리는 성만찬이 기독교에 대한 유대인의 공격의 주된 목표가 되었던 후대의 상황이었다고 한다. 더립도 이 본문이 예수 당시가 아니라 교회와 회당간의 긴장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또한 본 담화에는 유대인과의 논쟁 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 내의 성례전 논쟁이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그 근거로서 63절, “살리는 것은 영 (το πνυμα)이니 육(η σαρξ)은 무익하니라”를 제시 한다. 이것은 당시의 교회 안에 생겼던 마술적, 기계적인 성례관을 바로 잡으려는 의도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의 견해는 본 담화를 성만찬 본문으로 인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저자의 삶의 정황 (sitz-im-leben)을 찾는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상에서 살펴 본 성례전 논쟁과 관련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지만 대체적으로 긍정적으로 흐르고 있다. 극단적인 성례전적인 견해는 초대교회의 예배라는 맥락에서 요한복음을 이해하고 있기에 초대교회와 복음서의 관계성을 잘 이해한 것이다. 다음 장에서 초대 교회 예배와 요한복음의 관계성 속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초대 교회 예배와 성만찬을 다루고자 한다. 반 성례전적인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양식비평의 방법론을 수용하여 요한복음의 성례전적 본문을 후대 교회의 편집으로 간주했지만 그들도 후대의 편집일지라도 생명의 떡 담화를 성만찬적인것으로 간주하는 데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친(親)성례전주의 자들과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수정 성례전적 견해는 요한복음이 성례전적 배경으로 집필되었지만 6:51-58절이 지니는 용어가 너무 정확한 성만찬적 단어이기에 초기의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의 마지막 형성 단계에서 삽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요한복음이 A.D.90년 - 1C말에 저술되었기에 요한은 보다 정확하고 의미를 분명히 한 표현을 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이해할 수 있다. 피상적인 성례전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생명의 떡 담화가 후대 교회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면서 시대적 요청에 의해서 요한복음이 집필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성만찬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신약성서가 교회가 생긴 후 형성되고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발생한 교회의 책이라는 사실을 각한다면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요한복음은 성례전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본 논문은 수용 한다. 따라서 다음 장에서는 저자의 시대적 이해를 통하여 요한복음이 성례전적이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II. 요한복음의 역사적 배경과 집필 목적
A. 요한복음의 역사적 배경
요한복음 이해를 위하여 시대적 배경의 파악이 중요한 까닭은 저자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 저자가 생활을 한 정황이 어떠하다는 것을 반드시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저술 시기에 대해서는 근자에 와서 비교적 확실한 결론을 맺는다. 왜냐하면 18장 33절에서 35절, 37절에서 38절이 수록되어 있는 파피루스 단편 (일명 Roberts Fragment)이 이집트에서 발견되었으며, 그 파피루스가 주후 115년-125년 경의 것으로 결정이 된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원초적인 저술은 그 이전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9장 22절, 12장 42절, 16장 2절 등에 암시되는 유대인에 의한 기독교인의 축출(excommunication)이 공식적으로 90년 경에 있었던 가말리엘 2세의 기독교인에 대한 죄를 반영한 것으로 확인되며 결국 요한복음의 기록 시기는 일반적으로 90년 경에서 1세기 말에 이르는 기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시기의 특징은 여러가지 사상들이 뒤섞여 있었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였다. 거쓰리(Donald Guthrie)는 요한복음서의 배경으로 원시 기독교, 바울주의, 유대주의, 헤르메틱 문헌, 필로주의 그리고 영지주의와 불트만과 바우어가 주장하는 만다이즘(Mandaism) 등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배경 속에서 성만찬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영지주의와 유대주의와의 갈등을 다루고자 한다.
1. 영지주의 (Gnosticism)
영지주의는 ‘지식’(γνωσισ)의 헬라어 어원에서 유래했으며, 그런기원은 기독교 이전으로 소급이 된다. 이 사상의 절정기는 A.D.135-160년 사이이다. 여기에서 요한복음이 집필된 시기와 영지주의가 강력한 도전으로 초래한 양자의 대치적 관계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레온 모리스는 노스틱 사상은 2세기의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노스틱주의의 성인형이 갑자기 출현한 것은 아니다. 여러 다양한 사상들의 집합과 영향으로 후에 노스틱주의로 성장하였다. 따라서 노스틱주의가 완성되기 전에 초기적 상태에서 요한복음과의 관계를 언급하여야 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정통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고자 대항한 영지주의의 특수한 형태는 가현설(docetism)이다. 이들은 그리스도가 본질적으로 악한 세상에 결코 오염되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육신으로 오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육체로 오셨다고 생각되어진다면 물체와 접촉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염되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따라서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목적은 계시였지 구속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런사상은 자연히 예수의 생애 및 죽음, 당시 그의 인격의 물리적 실재성을 부인한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교회의 신앙에 위협이 되고 있는 영지주의 사상, 특히 그 중에서도 가현설(docetism)을 공박하기 위해서 복음서를 기록하게 되었다. 비록 반(反) 영지주의 혹은 반가현설적 목적이 요한복음 기록의 주 목적은 아니더라도 요한복음의 내용으로 보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던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 영지주의의 가현설적 형태에 대항하는 변증이 제4복음서의 주 목적들 중 하나를 이루었다는 견해는 슈트라한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그는 예수의 진정한 인간성에 대한 요한복음상의 강조를 복음서 기자가 이단적 견해 즉,그리스도 교회의 신앙 및 메세지는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교훈’으로 부터 분리될 수도 있다는 것을 논박하기 원했던 증거로 간주한다. 바렛트 역시 반(反)영지주의의 변증이 요한복음서의 편집 배후에 깔린 두 동기들 중의 한 가지라고 논증한다. 바렛트는 요한 시대의 교회를 압박해 오는 심각한 문제들에 답하기 위해 제4복음서 저자는 예수의 인격을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적 근거를 재확인하고 또한 아울러 현재 입장에서 그 역사의 해석을 계시해 주는 한 복음서를 집필하였다고 주장한다. 쿨만도 요한복음 6장 51절에 “몸”(body, σωμα) 대신에 “육”(flesh, σαρξ)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이유로서 성례전의 물질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함이요 이러한 물질적인 측면의 강조는 54절에서 단순히 “먹는다”(eat,εσθιειν φαγειν)는 동사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의미로서 “조각 조각 뜯어 먹는다”(τρωγειν)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이 반도케티즘적(Anti-docetic)인 입장을 강하게 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요한이 영지주의를 반박하기 위하여서 예수의 인간성과 특히 그의 육체성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첫째로, 요한은 예수가 실재하신 하나님이지만 (1:1-3) 그가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온 것을 강조하고 있다. “ 씀이 육신이 되었다”(1:14)라는 것은 “성육신의 역사성과 실재성에 대한 주장”이라고 James Dunn은 주장 한다. 또한6장 51절에서 53절에 “떡”대신에 “살”(육체)을 그리고 “먹는다”는 단어 대신에 “씹는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의 인간성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가현설을 공박하기 위한 의도적 조치다. 둘째, 요한은 육신이 되신 예수의 “죽음”을 강조한다. 19장 34절에서 예수가 죽은 직후에 “군인 하나가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 라는 말은 예수의 몸이 결코 유령이나 환상이 아니라 사람의 몸 그대로 였음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부인하는 가현설을 공박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셋째,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의 몸이 육체적 존재였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20장 20절과 20장 27절에 두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만져보라는 것은 반영지주의 혹은 반 가현설적인 관점에서 더 잘 이해될 수가 있다. 이와같이 요한복음의 저자가 반영지주의와 반가현설의 입장에서 복음서를 집필하게 될 때 예수의 성육신의 역사성과 실재성을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예수의 피와 살을 언급하는 성만찬이다. 성만찬은 역사적인 예수가 과거라는 시간 속에 나타나셨다는 것과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는 두 사실을 보여 준다. 따라서 성만찬이 지니는 예수의 역사성과 실재성은 매우 크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예수의 역사성과 실재성이 강조되는 성례전(성만찬)적인 입장에서 집필했으며 요6장의 ‘생명의 떡’에 관한 설교가 단지 떡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성만찬에서 베풀어지는 떡과 포도주 모두를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2. 유대교
기독교는 초창기에 이방인들에게는 유대교 종파의 하나로 보였다. 그러나 율법의 준수라는 문제가 선교에 나타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회의에서 기독교는 유대교로 부터 독특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 회의 결과 기독교는 유대교가 준수해 온 할례, 까다로운 음식법, 유대교의 관습들을 폐지시켰다. 이 때 부터 유대교와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은 주후 70년 성전 파괴 후 부터이다. 그것은 유대전쟁이 발발했을 때 취한 기독교인들의 태도와 전쟁이 끝난 후 유대교가 취한 행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평화를 원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유대인의 독립과 번영을 위한 세상왕국을 건설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으며 바울 사도도 정부당국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그 전쟁에 참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쟁의 위기가 임박한 시기에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었으며 유대인들에게 기독교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감을 더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유대전쟁으로 인하여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교에 있어서 제사장의 역할은 끝이 나고 서기관들이 율법교사로서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교 신앙을 지도했다. 이제는 유대교 자신의 생존을 위해 더 율법적이고 전통적인 것을 강조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갈등을 가중시켰다. 저자 요한이 처한 상황이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었다. 바이체커(Weizsacker)가 요한복음에 나타나 있는 유대교에 대한 논쟁적 공격에 처음으로 관심을 기울인 이후로 요한복음의 기록이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의 공격을 반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되어지게 되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유대인들과 대립적인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한 때는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예수를 추종했으나 곧 예수를 떠나고 배척하면서 후에는 죽이기 까지 작정하지만 요한복음서에는 예수와 유대인들의 관계가 처음에는 좋다가 나중에 나빠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 유대인이란 용어는 때때로 유대 민족내에서 예수를 배척한 자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으며 행위의 한 형태가 되기도 한다. 유대 지도자들의 반감은 예수를 대항해서 일고 있는 모든 반감을 상징적으로나타내 주는 것으로 요한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이란 대부분의 경우 예수에 대한 증오로 이해되는 세상에 대한 상징이 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맥락과 같이 하여 회당으로 부터 기독교인들을 축출하는 조직적인 시도가 80년대를 통해서 일어났다. 이러한 모습은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낭송되는 ”18축도문“(Eighteen Benedictions)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기도문은 70년 이후 재 형성되었는데 12번째 축도문은 “이단에 반대하는 축도문” (Benediction against Heretics)으로서 이단을 저주하는 내용으로 그 저주의 제 1 차적인 대상은 유대인 중의 기독교인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저주의 내용은 필경 회당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낭송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서 아직까지 유대 회당에 관계를 가지고 있던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저주를 수용하든지 아니면 그런 저주를 말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야하는 결단의 순간에 직면해 있었다. 회당에서 우선적이며 공동적인 관심을 갖는 것은 예수와 관련된 “메시야 관”이었다. 이와같은 상황과 일치한 회당으로 부터의 출회(9:22, 12:42, 16:2)가 요한복음에 나타난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회당으로 부터 출교, 그리고 계속되는 유대교의 공격에 대항하여 그의 복음서를 집필하게 된다.
1) 유일 신앙에 대한 변증 유대교로 부터 기독교가 받은 공격은 유일신 사상이 가장 심각했다. 유대교에 있어서 하나님이 둘이라는 생각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는 “나와 하나님은 하나이다”(요10:30)라고 말함으로 유대교에 거슬리는 것이 되었다. 이에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가 메시야이시며 현현하신 하나님이심을 변증해야 했다. 이 목적을 위해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저술하게 되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표적”의 기사를 통하여 예수의 인격과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다. 요한복음의 “표적”들은 선별된 것이다. 이런선별의 기준은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 주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표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요한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현현(顯現)한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한 또 하나의 특징은 예수의 자기 계시이다. 요한은 예수가 하신 εγω ειμι의 형식을 기록하고 있다. 출 3:14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사용한 형식을 요한이 사용한 것은 예수의 신성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 요한은 “말씀은 하나님이다”(1:1),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1:14). 성육신하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며(1:16,17),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다(1:14-18, 3:16, 3:18). 예수는 아버지와 하나이며(10:30), 예수는 아버지 안에 거하며(10:38, 14:10), 예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증언한다. 이는 요한이 예수의 신성을 알려주기 위해 복음서를 기록함을 의미한다. 요한은 유대교의 신관이 출애굽의 성부 하나님만을 알고 있었을 때 삼위일체의 신관을 인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요 14:25에 아버지와 아들이 그리고 보혜사 성령이 나타난다.또 요20:17에 “마리아가 예수를 만지려 하나 예수는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했다”고 말씀하신 가운데 예수가 아버지께로 올라가면 성령이 오심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요한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뛰어 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으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요한은 하나님의 현현(顯現)이신 예수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었고 그의 복음서를 통하여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유대교의 유일 신앙에 대하여 변증하는 것이 된다. 이같은 맥락에서 요6장의 “생명의 떡”에 관한 해석이 이해 된다. 과거 만나를 주신 하나님이 이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그리고 자신의 피와 살을 주신다. 이는 성만찬이 지닌 모든 것을 의미한다. 요한은 유일신앙을 변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이러한 의도가 성만찬적인 것이다.
2) 성만찬에 대한 변증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7:49) 이 말은 유대인들이 기독교에 대한 당시의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귀절이다. 기독교에서 행하여지는 성만찬은 유대인의 율법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일”(요6:53)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만찬에 대한 공격은 필연적이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의 변증은 성만찬이 나타내는 문자적인 의미와 그것을 초월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 예수의 피와 살이 생명을 준다고 장한다. 스티븐 S. 스몰리(S.S.Smally)는 요한복음에서 상징적인 표상으로 성례전을 이해한다. 성례전은 거기 관련된 실물적 요소들을 통해 영적이고 신적인 사실을 실제로 전달한다. 예를 들면 예수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요4:14)고 말했는데 이것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신자들에게 전달이 가능한 생명 부여의 능력에 대한 한 상징으로 묘사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주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요11:25)고 말씀하시며 나사로를 주검에서 일으키심으로써 이 두가지를 실증해 보이는데 이 때 이것은 요한복음서에 있어 성례전적 차원의 한 부분으로 묘사 될 수 있다고 한다. 이 요한복음의 성례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성만찬에 대한 공격은 자연히 메시야관과 관련을 맺는다. 유대교의 메시야는 정치적이며 큰 권능과 민족적 해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유대교의 메시야와는 다르게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다. 이는 유대교에서 도저히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요한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는 자신을 내어 주어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다. 이 죽음은 우리를 위한 것이며 이를 믿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 이 예수가 바로 메시야이시다. 요한은 유대교가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관에 대하여 기독교의 메시야관을 설명한다. 이 메시야의 인격과 사역을 기념하고 만나는 의식이 성만찬이다. 떡과 잔은 메시야가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살과 피이며 이떡과 잔을 통하여 메시야의 임재를 느낀다고 하는 기독교 성만찬을 요한이 변증해야 했다. 비록 유대교에서 인정하기를 거리끼는 것이지만 요한은 이 성만찬의 의미를 나타내야만 했다. 요한은 유대교의 공격에 대해 예수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아들이시며 그 분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분으로 증언한다. 성만찬은 예수의인격과 사역을 기념하며 더 나아가서 예수와 연합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의 메세지이다.
B. 원시기독교 예배와 요한복음
유대교로 부터 회당에서 축출 당한 기독교는 예배의 측면에서 볼 때 유대교의 제반 예전 활동(ritual acts)의 종식을 선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전과 회당 예배의 모든 뿌리를 예수의 사건에 근거한다.
1. 예배의 구성
쿨만은 초대교회의 예배에 본질적으로 두 가지 양태의 예배 모임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의 하나는 유대교의 회당 예배의 양식을 따라 발전된 것으로서 오로지 말씀의 예배 만으로 이루어졌고 이 예배는 성경 봉독, 설교, 기도, 축복, 그리고 시편의 찬송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양태는 말씀의 예배와 확실히 구분되는 성찬식을 위한 모임인 떡을 떼는 예배가 있었다. 이 두 양태가 분리되어서 행하여졌는지 아니면 한 번에 행하여졌는지에 대하여 쿨만은 후자를 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 예배의 구성 요소 중 성만찬이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를 통하여 그들의 생명이 결속되었고 그 가운데서도 주님의 명령에 따라 가졌던 성만찬 속에서 늘 새로운 신앙을 찾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초대 기독교의 예배에서는 성만찬이 핵심 부분이 된다. 당시 예전의 모든 주제는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시고 부활하셔서 성만찬에 임재하신 예수 그리스도다. 이 예전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만남(encounter)으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 주신 하나님의 은총과의 만남이라는 생동적 신앙을 갖게 하여 주었다. 또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며 또한 그의 원하시는 대로 새롭게 소생한 무리들은 그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봉헌의 사건을 이 예전 속에서 이루게 됨으로써 이 성례전을 가리켜 기독교 예배의 중심적 행위라고 한다. 초대교회 예배는 성만찬을 제외하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성만찬은 예배에 있어서 절대적이었다. 그러므로 요한이 초대교회 예배의 삶 속에 살았기에 당연히 성만찬도 알았을 것이다. 또한 성만찬이 지니는 깊은 의미도 알았을 것이다. 따라서 성만찬의 깊은 의미가 그의 복음서에 영향을 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다음에 요한복음과 예배에서 이 가능성을 살펴 볼 것이다.
2. 요한복음과 예배
라니(W.H.Raney)는 제4복음서가 원래 초대교회 예전의 일부를 구성했으며 나중에 독창자나 성가대에 의해 영창내지 합창되어지도록 복음서 기자에 의해 집필된 산문 찬송들을 수록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찬송들’의 사례들은 대부분이 요한복음의 강론 자료에 나타나며 제4복음서의 서론과 3장 및 10장의 일부에 그리고 고별 담화에서(요14-17장) 발견된다고 하였다. 아일린 길딩 박사는 「제 4복음서의 유대적 예전」(The Fourth Gospel and Jewish Worship)에서 제4복음서 해석의 출발점을 그리스도교 제 1세기 어간의 회당 예전에서 찾는다. 요한복음은 구약의 성구 독송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주석이다. 이는 그 독송집이 A.D.1세기 이전에도 팔레스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3년 주기용으로 배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린 길딩 박사(Dr. Aileen Guilding)의 견해에 따르면 단지 이것만 가지고도 요한의 자료 즉, 절기 -이적- 담화의 유형을 따르는 순서를 이해 할 수 있다. 이는 복음서 기자가 그 자신의 자료를 문제시 한 그 절기의 유대적 예배집전시 독송되어진 오경 및 예언서의 교훈집과 상호 연관시켰기 때문이다. 이 상호 연관의 분명한 사례가 요한복음 6장에서 발견 가능한데 거기서 이 자료 -무리를 먹이신 일, 물 위로 걸으신 일, 생명의 떡 설교- 는 사상 및 언어에 있어서 유월절에 맞춘 유대 회당 독송집과의 직접적 연계점을 드러내며, 그 독송집에 의해 결정되어진다.위 학자의 주장을 통하여 저자 요한은 예배에 깊은 통찰과 관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이는 요한복음 안에 예배에 대한 본문들을 통하여서도 확인 된다. 선재하신 말씀(ο λογοσ)이요, 생명(ζων)이며, 빛(φωσ)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전 대신 나타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1:14,και ο λογοσ σαρξ εγενετο ακι εσκηνωσεν και εθεασαμεθα την αοξαν αυτου,..)에서 ” “εσκηνωσεν”(장막을 치다)은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상징하는 구약의 성막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출40:34이하 참조). 백성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이제는 장막으로서가 아니라,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보여지셨다. 성전 청결기사(2:12-22)에서도 “성전 예배 자체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대치됨을 의미”하고 있다. “모든 예배는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는 것이며 그 분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성전의식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대치된다. 또 요한복음 4장 20절 이하에서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며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저자 요한이 예배에 대한 깊은 관심과 통찰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요한은 예배의 장소가 “산”도, “예루살렘”도 아니다. 메시야의 때가 이르면 예배할 것을 말하고 있다. 또 “메시야가 오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라는 의미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예수는 예배의 중보자가 되심을 알 수 있다. 요한은 예수가 예배의 대상이시며(2:12-22), 예배의 중보자 이심을(4:25-26) 증언하고 있다. 이는 요한이 예배의 수직적 국면과 수평적인 국면을 이해하고 있다. 수직적 국면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중재(intervention)의 유일성을 말하며, 수평적 국면은 이러한 중재와 구원의 역사 사이의 관계 수립을 의미한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를 요구하심을 말한다. 이 요구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며 수평적으로는 우리의 삶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는 예배이다. 이러한 예배의 실제적인 원형이 성만찬이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형제들의 친교”가 이루어지는 장(場)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예배를 성만찬적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의도가 그의 복음서 배경이다.
C. 요한복음의 집필목적
요한복음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가 어떤 의도로 복음서를 저술했는가 하는 집필 목적에 있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집필목적을 살펴봄으로 요한복음이 성만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카이자르는 요한복음의 목적을 4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첫째는, 유대교 회당과의 문답(dialogue)이며 둘째는, 가현설에 대항하기 위해서이며 셋째는, 사마리아 선교를 위해서 그리고 세계에 기독교를 전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스티븐스 S. 스몰리는 요한복음 집필목적을 다루면서 여러가지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요한 자신이 말하고 있는 본문에서(요20:30-31) 찾아야 한다고 했다. 레온 모리스(L.Morris)는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견해들을 비판하면서 저희가 본문 속에서 나타내고 있는 목적에 관심을 집중 한다. 저자가 정당하게 표시한 그의 목적을 제쳐놓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요한복음 20장 30절 - 31절은 요한복음의 집필목적을 이해하는 중요한 귀절이 된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 “너희로 하여금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아들이심을 믿게하고 또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였다. 31절에 밝힌 바에 의하면 목적절이 이중적이다. “믿게 하려 함이요 그리고 너희로 생명을 얻게하려 함이라”이다.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 “표적”을 사용한다. 예수의 초자연적 이적을 나타내는 단어로 기사로 번역이 된 ‘테라스’(τερασ), 전능으로 번역이 된 ‘뒤나미스’(διναμισ), 표적으로 번역이 된 ‘세메이온’(σημειον)이 있다. 그 중 표적은 다른 신약에서도 나오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이 표적 하나만 사용하고 있어 저자의 특별한 의도가 있음을 나타낸다. 이 요한복음에서는 표적이 있은 후 표적을 일으키신 예수, 그 분은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 주려는 저자의 깊은 의도이다. 요한복음의 표적은 전부가 불가능의 이적이다. 하나 하나가 한계국면의 극복을 상징하는 것으로 엄선되었다. 질, 양, 공간, 시간, 자연법, 운명, 죽음은 그 어떤 것도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인간정황의 한계이다. 예수는 한계 정황을 극복하심으로 당신의 신성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저자 요한은 설명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하나님의 성육신이심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예수는 상상적인 인물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인 실체인 것이다. 믿음은 더 큰 목적을 위한 통로이며 그 목적은 생명이다. 요한복음에서 생명은 생물학적 의미나 인간존재의 한 과정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생명은 “영생은 곧 이것이니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17:3)라고 정의 한다. 이 생명은 다음과 같은 요소가 필요하다. 이 생명은 예수에 대한 의식이다. 의식이 없는 지식은 없기 때문이다. 이 생명은 접촉이다. 왜냐하면 직접이나 간접이나 접촉(contact)이 없으면 이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생명은 지속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과의 공존(co-existence)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 서 요한복음에서 생명은 하나님의 지식이요, 접촉이요, 영원한 지속이며 포도나무 비유같이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요한이 생명을 정의하면서 성만찬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생명이 가지는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이 생명은 예수에 대한 의식이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이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분이 대속적인 죽음으로 희생당하심을 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는 생명을 얻게 된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 또한 성만찬이 행하여지는 곳에는 부활하신 주님이 현존하신다는 지식도 가지고 있다. 둘째, 접촉이다. 성만찬에서 떡과 잔을 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접촉을 갖는다. 예수를 생전에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성만찬은 예수를 느끼게 하는 접촉이 되는 것이다. 셋째 , 지속이다.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지속적으로 우리를 만나며 생명을 확인해 주신다. 예수께서 직접적으로 성만찬 제정을 하심은 성만찬을 행할 때마다 지속적인 교제를 약속하신 것이다. 넷째, 공존이다. 성만찬은 신자와 주님과의 연합이다.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마다 그와 하나가 되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불가분리의 관계가 형성되는데 이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6:56)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요한의 의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게 하려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그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데 있었다. 생명을 얻는 방법은 믿음이다. 믿음으로 얻은 생명은 무엇인가? 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요한은 성만찬적인 차원에서 그 생명을 설명한다. 요한복음의 집필목적에 표면적으로 성만찬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그 내면적인 면에 가득차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요한이 성만찬적인 차원에서 복음서를 집필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V. 요한복음의 성만찬적인 본문 주석
요한복음에서 성만찬적인 배경을 본문에서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저자의 의도를 내증하기 때문이다. 쿨만은 요한복음 곳곳에서 성만찬적인 본문들을 찾았다. 그러나 이런 본문들에 대하여 부정적인 해석을 내린 학자들도 있다. 이제 성만찬적인 본문의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6장 26절-47절과 48-58절을 주석하므로 상만찬적인 배경을 찾으려고 한다.
A.요 6:26-47
2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예수께서는 동료같아 보이는 무리의 저의(底意)가 무엇인가를 날카롭게 말씀하신다. 그들은 표적을 보고 찾아왔으나 표적을 일으킨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요6:14-15절에서 그들이 예수를 임금으로 삼으려한 의도은 예수에 대한 이해가 정치적이요 육적인 차원에 있음이다. 저들이 따라온 이유는 굶주림이 채워졌기 때문이다.
27절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예수는 저들이 올바른 양식을 위하여 일할 것을 명령하신다. 저들이 찾는 양식은 썩는 양식이다. 그러나 인자(ο υιοσ του ανθρωπον)가 주는 양식은 영생을 위한 양식이다. 영생을 위하여 있는 양식은 인자의 선물로 이것은 수고의 댓가가 아니다. 이 양식은 인자의 육체(σαρξ)이며,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가리킨다. 영생의 양식인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권위의 인을 치신자다. 27절에서 예수는 인자로서 세상에 영생의 양식을 주신다. 또 27절은 55절과 연관성을 지니는데 27절에서 양식은 (Βρωσισ)의 번역으로 이 단어가 55절에서인자의 “살”(σαρξ)을 참된 “양식”(Βρωσισ)으로 말한다. 이것은 불트만은 요한복음 6장 51절에서 58절을 예전적 관심에서 행하여진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비판하는 근거가 된다.
28절 저희에게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오리이까
2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어떻게 하여야”의 질문은, 생명이 예수께서 주실 선물임을 이미 예수께서 지목하셨는데도 깨닫지 못한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일(들)”을 단수인 “하나님의 일”로 대치하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유일한”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30절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은 무엇이니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절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무리는 예수가 행한 기적을 인정했다고 가정해야 하므로(26절 참조) 그들은 이제 모세가 행한 기적보다(31절) 더 큰 기적을 요구하고 있다. 모세 보다 더 크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의 권한에 대해서 그보다 더 놀랄만한 것을 입증해야 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만나를 주실 것을 기대 했다. 그것은 제2의 출애굽(a second Exodus)의 회당과관련된 일반적인 종말론적 기대이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제2의모세와 함께 메시야 시대가 참으로 도래했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한다. 예 께서 만나와 같은 표적을 주셔야 모세와 같은 예언자의 신분을 믿게 된다는 것이다.
3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3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저들의 모세 환상을 몰아내시는 말씀부터 시작하신다. 만나의 선물은 모세의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다. 예수께서는 만나가 “참 떡”(αρτξν αληθινον)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떡, 즉 하나님의 그 떡은(α αρτοσ ψου θεου) 하나님께 기원이 있는 점에서는 만나와 같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사명을 준다는 점에서는 만나와 다른 것이다. 즉 특정 한계가 없는 온 인류에게 생명을 준다. 이 본문은 그 당시 철저히 물질주의적으로 본 메시야 시대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있다. 예수님은 물질주의적 욕구를 만족시키거나 만나를 불러내리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논지는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메시야 관에 대한 맹렬한 항변이며 동시에 예수께서 가져다 주실 생명의 영적 성격에 대한 강력한 항의인 것이다.
34절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무리들은 즉각 하나님의 떡을 요구한다. 이런 요구의 동기는 역시 물질주의이다. 유대인의 군중은 이미 이적의 떡을 먹어 보았고 그 이적의 무기한적 연장을 요구한다. 즉 예수께 더 많은 떡의 선물을 공급하라고 한다. 예수님은 생명의 양식은 예수가 제공해 주는 일용품이 아니다. 예수 자신이 바로 생명의 양식이다. 그리고 그것을 먹는다는 것은 배고파서 먹거나 또 먹고 나면 다시 배고프고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예수는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서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고 있다.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나는......... 이다”(I am)의 형식은 지극히 엄숙한 것이며 이 본문에서는 신성의 표시로 해석이 된다. 이는신성의 표시로 해석해야 할 위대한 자기 선언이 요한복음에 7회 나오는데 이것이 그 첫 번째이다. 하나 하나 이 선언이 나올 때 마다 예수의 인격과 오신 목적을 중요하게 명시하시므로 주목하여야 한다. “생명의 떡”은 예수님과 생명을 밀착시키는 또 하나의 표식이다. 오직 그에게 오는 자 그를 믿는 자만이 결코 주리지 않고 언제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시니 사람은 그에게 와서 그를 믿어야 한다.
36절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무리들은 과거에 예수를 본 일이 있고 지금도 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의미를 깨닫지 못함으로 그들은 예수의 표적을 보고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 이것은 믿음에 있어서 아버지의 주권을 나타낸다. 아버지는 믿음의 공동체를 아들에게 주시고 아들은 자기에게 오는 자들을 받아 들이고 보호한다. 이것은 구원사역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됨을 보여 준다.
38절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합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나에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리라
구원의 전(全) 역사(役事)로 보아 예수님은 아버지와 완전히 조화되고 있다.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38절). 39절, 40절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아버지가 나에게 주셨던 모든 자는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자다. 이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며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요한은 믿는 자들의 운명은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마지막 날 다시 사는 것이다. 5장 24절에서 29절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리스도교적 삶의 두 가지 측면이 현재의 소유와 미래의 희망 안에서 정확히 균형을 이루도록 하고 있다.
41절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42절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의 말씀은 청중이 기대한 말씀이 아니다, 군중들은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저들에게 하신 교훈에 반발한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예수님은 지금까지 하신 말씀을 강조하여 반복한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 보다도 하늘로 부터 내려 왔다는 말씀에 주목한다. “예수는 인간적 기원이다” 라는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인간인 동시에 영원한 말씀이라는 성육신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4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는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저들이 수군거리지 말 것을 예수께서 명령하신다. 예수는 37절의 말씀을 반복 하신다. 여기에 주신 예수의 말씀은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올 수 “없다”고 단언을 하신다. 인간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이 요한 복음의 골자(骨子)이다. 사실 그것이 기독교의 신앙인 것이다. 예수는 최후의 날에 당신의 백성을 일으키신다고 하는 미래 사건적 행위에 관하여 세번째로 언급하신다.
45절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절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7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동일 진리를 다르게 설명한다. 이사야 54장 13절(혹 렘 31:34)을 인용함으로 하나님의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예수께로 온다. 이 교육은 하나님께서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신적 조명(divine illmination)이다. 아버지로 부터 듣고 그에게 배우는 것은 그를 “보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1:18절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일한 예외자가 “독생하신 하나님”(또는 “독생하신 아들”)이며 이 귀절에서는 “하나님께로서 온 자” 만이라고 하였다. 이는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아버지, 아들의 친밀한 관계를 지적하고 있다. 아들을 떠나 하나님의 환상을 소유할 인간은 없다.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는 그리스도만이 가능한 친밀한 하나님 교제의 실재를 더욱 명쾌하게 강조한다. 진실로 진실로(αμην, αμην)는 심각한 의미를 엄숙하게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신 단어다. 예 님은 여기에서 다시 한번 생명에의 길을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B. 요 약
지금까지 본문들을 통하여 요한은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서 다루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스스로 세상을 위해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 이러한 사실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성만찬적인 내용을 찾아야 한다. 복음서 저자가 “하나님의 떡은 하늘로 부터 내려와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라고 기록하면서 그는 이것을 “영적”인 계시로서만 이해하여 이 계시를 보여 줄 뿐 만 아니라 그 분 자신이 계시이신 역사적인 예수의 인격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인격은 과거에 나타나셨던 역사적인 예수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현존하시는데 교회 공동체가 이것을 수용할 수 있는 길은 성만찬(성례전)을 통해서 가능하다. 34절에 “주님 그 떡을 언제나(παντοτε) 우리에게 주십시오.” 이 선물은 5천명을 먹인 기적의 행위에서만, 그리고 성육하신 예수의 역사적인 서건들 속에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도 “언제나”계속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이 “언제나”라는 의미는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예수가 스스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하시는 의미로서 이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생명의 떡이시기 때문에 이 선물은 영원한 것이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언제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는 말씀은 분명히 주님의 성찬과 관련되어진다. 주님의 성찬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언제나 만날 수 있고 그를 통하여 생명을 계속 유지하게 된다. 또 “생명의 떡”에 관한 설교 중에 언제나 목마르지 않을 것을 말씀하심은 성만찬에서 베풀어지는 떡과 포도주 모두를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39절과 44절에 “나는 이들을 마지막 날에 살릴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의 성만찬에 현존하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따라서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 처럼 성만찬에서 우리의 몸도 부활하리라는 약속을 보증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 본문들도 성만찬적인 배경이다.
C. 요한복음 6:48-65. 주석
48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절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절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당신 선언의 주장이 완전히 권위와 위광(威光)으로 나타나기를 원하신다. 예수는 만나의 한계를 지적하시므로 당신의 왕적 선언을 반복하신다. 만나는 육신을 위한 양식이었으며 그 이상이 아니었다. 그것을 먹는 사람들은 시간이 되어 다 죽는다. 반대로 예수는 죽음이 없는 생명의 양식을 주시고 계신다. 이 떡은 기원이 하늘이다. 사람이 그것을 한 번 먹으면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은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이다.
51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 하시니라
다시 한번 예수님은 당신을 가리켜 떡이라고 하시며 이번에는 “산 떡”이라고 하신다. “내려 온”은 부정 과거로서 성육하신 단번의 사건을 지적한다. “먹는다”의 행위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소유하는 행위를 말한다. 누구라도 이 결정적 행위를 취하면 그는 영원히 살 것이다. 이 본문에서 성만찬이 암시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없다. 이 본문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υπερ τησ του κοσμου ζωησ) 죽음과 관련이 있으며 미래시제동사 δωσω(내가 줄 것이다)는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살을 줄 것이다. 이는 예수의 말씀이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을 뜻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우리는 성만찬 때 주님의 희생적 죽음과 부활을 생각하면서 떡을 떼며 잔을 마신다. 이 때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느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교제가 주님의 성찬이라는 성례전 안에서 주어진다는 생각은 주님의 성찬에 관한 바울의 설교에서도 잘 나타난다(고전10:24이하; 11:17). 주님의 성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의 교제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그 떡을 먹거나 분별없이 주의 피를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이다(고전11:29). 바울은 더 나아가서 고린도 교회 공동체가 이 처럼 분별없이 주님의 성찬에 첨여하기 때문에 심판이 내릴 것이라고 경고한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저자 요한은 주님의 성찬이 부활하신 몸과의 교제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 부터 오는 구속을 얻게 되는 성례전이라 한다. 성만찬 의미는 “내가 줄 떡은 곧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51절)에서 찾을 수 있다. “준다”(διδωμι)는 동사가 떡을 “나누다”(distribute)라는 뜻과 몸을 “죽음에 넘겨 주다”(give up to death) 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세례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성찬이라는 성례전 역시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51절은 성만찬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살”(σαρξ)이라는 단어 사용에 문제를 제기하는 견해가 있다. 이 린다스에 따르면 σαρξ는 의 번역으로서 올바르게 σωμα를 대치한 말이다. 예레미아스는 살이 보다 원래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성만찬에서 예수가 말한 것은 “나의 살과 피”, 즉 “나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한은 σαρξ 라는 말이 그 자신의 교회의 용법과 일치했기 때문에 또 그의 성육신학과 잘 맞았기 때문에 σωμα 대신 이 단어를 사용한다. “ 상을 위하여”라는 의미에서 누가복음 22장 9절에 “너희를 위한 나의 몸” 보다 더 성만찬적인 깊고 넓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52절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저들의 질문은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의 살을 내어 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합리적으로 수긍이 가지 않는다고 하여 당혹한다. 군중들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5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이 때 까지는 자신을 의미하는 떡을 먹는 일과 자기 살을 내어 주는 일을 말씀하셨다. 여기서는 자기 살을 먹어야 할 일에 하나 더 추가하여 자기 피를 마셔야 할 것을 말한다. 살과 피를 분류함은 죽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예수가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살과 피는 다른 사람들이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정하신 참 사람으로 그는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거기로 다시 올라간다. 사람의 아들의 삶에 관한 진술에 “너희가 그의 피를 마신다”라는 말이 첨가 되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성만찬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는 성만찬을 암시하기 위해서 그리고 생명의 양식은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의 전 삶임을 강조한다.
54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살과 피를 나란히 언급한 것은 성만찬에 대한 지시를 확증해 준다. “맞는다”는 동사가 문자 그대로 먹는 동작을 뜻한다. 따라서 성만찬을 암시한다. R. Bultmann은 - 51절에서 58절을 교회적인 편집자로 돌리는 것을 우리가 따를 수는 없지만 - 이 본문을 성만찬적인 관심과 종말론적인 관심이 결합되었다고 한다.
55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인자의 살과 피가 영생을 주는 것은 그의 살과 피가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본문이 진정 성만찬적인 것을 안다. 그것은 우리가 떡을 땔 때 예수의 살이 참된 양식인 것을 인식하며 잔을 마실때 예수의 희생적인 피흘림이 생명을 주는 참된 음료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56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그의 살을 먹는 이는 그리스도 안에 가장 밀착된 관계를 갖는데 그리스도가 또한 그 안에 계신다. 요한 복음에서 “거한다”(μενειν)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요한은 주님과의 교제가 임시적이 아니라 영구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사상은 성만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리가 성만찬을 행할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교제를 갖게 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성만찬을 행할 때에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 영구적인 교제의 약속이 성만찬에서 이루어진다.
57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가지고 믿는 자와 아들의 관계를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로 인하여 살며 아들을 믿는 자는 아들로 인하여 산다. “나를 먹는 사람”(56절) 대신에 사용된 것이다. 이것은 “살과 피”가 예수의 전인(全人)을 뜻한다는 견해를 지지해 준다. 예 의 전인격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그 안에 거하고 예수로 말미암아 참 생명을 얻는다.
58절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예수의 반대자들은 만나를 중히 보고 예수께 그것을 재현할 능력이 있는가 도전하였다. 예수는 만나의 향수(鄕愁)가 위대하여도 그것에 생명이 없음을 말한다. 만나를 먹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언급하신 하늘에서 내려온 떡은 다르다. 이 떡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그는 영생할 것이다. “이 떡을 먹는 자”는 단수이며 죽은 “조상들”의 표현은 복수인 댓구가 중요하다. 예수와 정당한 관계에 들어간 사람은 보통의 경우 단수로 표시한다. 신앙은 개별적이다.
D. 요 약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본문들을 통하여 두 가지 강력한 성만찬의 암시를 가진다. 첫째는 ‘예수의 살’을 ‘먹는’ 것과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강조에서 찾는다,. 사람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성경에 있어서 혐오스러운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것을 금지한다. 그러나 요한이 이것을 기록한 것은 이런 사실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예수의 희생적 죽음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예수의 살고 피를 언급하는 성만찬을 의식한 것이다. 이 본문들은 공관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성만찬적인 제정과 너무나 흡사하여 공관복음의 성만찬 재정을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이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나의 살이다”에서 찾을 수 있다. 요한이 공관복음과 달리 “몸”대신 “살”을 사용한 것은 보다 원초적인 성만찬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예수가 육을 입고 오신 분이심을 강조하며 가현설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 “세상의 생명을 위한”은 예수의 대속을 말한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생명을 준다는 이 희생적 죽음을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는 것으로 표현함은 요한이 성만찬을 의식한 것이다. 51절은 공관복음과 바울서신의 성만찬 본문과 일치한다. 나타나는 용어나 신학적 의미가 성만찬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요한이 생명의 떡에 관한 담화에서 떡에 해당하는 “살”만 언급하지 않고 예수의 “피”를 함께 언급함은 성만찬에서 베풀어지는 떡과 잔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V. 결 론 이 상에서 본 논문은 요한복음이 성만찬적인 배경에서 집필되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는 성만찬 논의가 세례와 함께 다루어지기 대문에 성례전 논쟁과 관련하여 성만찬 논의를 살펴 보았다.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와 입장을 통해서 밝혀진 것은 요한복음이 성만찬적이라는 것이다. O. Cullmann은 요한복음과 기독교 예배와 관계성을 중요시하면서 요한복음의 관심은 초대 기독교 예배와 역사적 예수의 지상 생애를 연결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세례와 성만찬을 초대교회 전체 예배의 표현으로 인정하며 예배의 목적은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절정을 이룬다고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O. Cullmann은 요한복음이 성례전적 상징과 표현으로 가득차 있으며 요한복음은 성례전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초대교회 예배와 복음서의 연관성을 잘 이해한 것이다. R. Bultmann은 요한복음에 세례와 성만찬을 가리키는 본문이 세개(3:5, 6:51-58, 19:34)있지만 모두 후대에 “교회 편집가”에 의해서 공관복음과 일반교회의 교훈과 일치시키기 위한 삽입이며 본래 저자의 의도는 근본적으로 성례전에 관심이 없거나 반대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반성례전적인 견해는 요한복음의 성만찬 재정이 없음을 강조하면서 그 이유는 저자가 성만찬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R. Bultmann의 견해는 6:35절과 51절, 38절과 51절, 49절, 50절과 58절을 비교하여 살펴 보면 이 문맥이 하나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6:51-58절이 삽입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한 본문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요한복음에 성만찬 재정이 없음은 50여년 동안 예배 때에 실시된 성만찬이 이제 더 이상 설명이 없어도 성만찬 때 사용되는 용어라든지 상징적인 표현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요한은 성만찬의 재정을 사용하지않고도 성만찬을 말 할 수 있었다. 수정 성례전적 견해은 요한복음이 성례전적인 배경으로 집필되었지만 6:51-68절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형성단계에서 삽입된 것을 보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사역하실 때 그토록 정확한 용어로 성만찬에 대해서 말했을리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요한복음이 A.D.90년 - 1C말에 저술되었기에 요한은 보다 정확한 그리고 의미를 분명히 한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이해 되어져야 한다. 피상적인 성례전적 견해는 저자의 역사적 배경에서 요한복음이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영지주의와 유대교에 대한 변증이다. 이 변증을 통하여 요한복음이 성만찬적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제3장에서 요한복음의 역사적 배경과 집필목적을 살펴 보았다. 요한은 영지주의(가현설)의 도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과 실재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성육신의 신학을 전개해야 했다. 또한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의 ‘살’과 ‘피’를 언급함으로 예수의 역사성과 실재성을 입증하였다. 유대교의 공격을 받던 교회를 변증하는 가운데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현현(顯現)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과거 만나를 주신 하나님이 이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떡으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다는 것이다. 이런 성만찬적인 변증은 유일신 사상과 메시야관 그리고 기독교를 변증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요한은 성만찬을 중요시 하는 초대 기독교 예배 속에 삶의 자리를 잡있다. 요한에게 예배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음은 이것을 증명한다. 라니(W.H.Raneiy)는 요한복음이 초대교회 예전을 위해서 집필되었다고 하여 예배에 대한 요한의 통찰력을 견지해 준다. 요한복음 4장 24절이하에서 예배의 대상과 예배의 태도 그리고 예배의 중보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돌ㄹ 통한 수직적 예배와 수평적 예배를 성만찬적으로 이해한다. 이는 요한이 성만찬에 깊은 관심이 있음을 보여준다. 요한은 복음서의 집필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20:30-31). 그 목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데 있다고 밝힌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고 요한은 “표적”을 사용한다. 또 믿음은 생명으로 인도하는데 이 생명이 바로 성만찬적인 배경을 안고 있다. 생명은 의식이며, 접촉이며, 지속이며, 공존이다. 이것이 바로 성만찬에서 재현된다. 또한 요한은 전도의 목적을 가지고 복음서를 집필하였다. 예수를 생전에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의 역사적 사실과 그 분의 희생적 죽음, 그리고 부활하셔서 그의 공동체와 늘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했다. 이것을 염두에 둔 요한은 초대교회가 예배의 중심으로 삼고 있던 성만찬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복음서는 성만찬적인 배경에서 집필되었다. 제4장에서 대표적인 성만찬 본문으로 인정되는 요한복음 6장 26절 - 47절과 48 - 58절을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이 본문들에는 성만찬을 암시하는 단어들로 가득차 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성만찬을 떠나서는 이해가 될 수 없다. 특히 6장 51절 - 58절에 나타난 성만찬적 언어와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가리킨 것이며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희생하신 그 분에게 와서 그를 믿고 영접하므로 온전한 연합을 이루는 은유적 표현이다. 이는 요한이 주의 성만찬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성만찬적 언어를 사용하였다. 성만찬이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예표하고 이것을 기억하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과 아들을 믿고 영접한 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화목과 교제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이 본문의 내용은 성만찬과 서로 상통한다.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그 분이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었다는 것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목적과 영지주의와 유대교의 공격을 변증하려는 의도에서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성만찬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성만찬적인 배경에서 그의 복음서를 집필하였다. 따라서 요한복음을 분명하게 이해하여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 성만찬적인 배경을 전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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