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연휴 풍경
지난 어린이 날, 라디오에서 어느 청취자가 보냈다는 사연을 듣다가 폭소를 터뜨렸던 기억이 납니다. 사연인즉, 연휴였던 어린이날을 맞아 의무감으로 유원지를 찾아 ‘봉사’하려던 아빠에게 아들이 말하기를 “아빠, 이런 날은 나가면 길만 막혀!”라며 시큰둥하더라는 것이죠. 덕분에 집에서 쉴 수 있었던 아빠는 아들에게 ‘종일 인터넷 이용권’을 선물했다나요. 그 집 아이의 말대로 공휴일, 그것도 연휴에 교외에 나가보면 어디서 그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는지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에도 연휴가 겹치면 항공권 예매가 매진되었다는 뉴스도 이젠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소식이 되어버렸습니다. 과거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여가를 즐기는 방식도 달라졌기 때문이지요.
일반적으로 직업상의 일이나 필수적인 가사 활동 이외의 시간들을 여가(餘暇)라합니다. 국어사전에는 ‘겨를’, ‘틈’, ‘짬’ 등의 순 우리말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한자어 여가의 가(暇)자가 ‘여유로울 가’, ‘겨를 가’여서 그 한 글자만으로도 국어사전의 뜻을 포함하고 있으니 ‘남을 여’자가 덧붙여진 ‘여가’는 우리말 ‘짬’이나 ‘겨를’ 보다도 더 강조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남아도는 시간들, 그러니깐 무언가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들 사이사이의 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노동의 의무로부터 해방, 쉼의 시간이죠. 영어로는 라틴어 “허가된, 여유있는”이라는 의미의 동사 리체레Licere에서 파생된 단어로 레져Leisure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집회서를 읽다보면 여가에 관한 재미있는 구절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스콜레 : School과 Leisure
집회서 38장 24절 이하에서는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농부, 목수, 대장장이, 옹기장이)과 율법학자의 지혜를 비교합니다. 그리고는 39장에서 율법을 명상하는 이의 지혜를 찬양합니다. 벤 시라는 ‘한 세대의 골격을 유지하는’(38,34) 여러 장인들의 기술과 그 직업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지혜를 추구하는 율법학자들을 훨씬 추켜세우고 있습니다. 이 대목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율법 학자의 지혜는 여가가 얼마나 있느냐에 달려 있고 사람은 하는 일이 적여야 지혜롭게 될 수 있다.”(집회 38,24)
율법학자의 지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여가’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는 일이 많으면 지혜를 명상할 여유가 없어진다는 것이지요. 더욱 재미있는 것은 칠십인역 원문에서 ‘여가’에 해당하는 희랍어가 ‘스콜레σχολή’라는 단어라는 사실입니다. 희랍어의 스콜레σχολή, 라틴어의 스콜라schola는 영어 스쿨school이나 독일어 슐레Scule, 프랑스어 에콜école, 이태리어 스콜라scola의 어원에 해당합니다. 현대어에서 일반적으로 학교를 의미하는 이 단어의 원래 뜻이 ‘여가’, ‘여유’라는 사실이 아리송하지 않나요? 동사형인 스콜라조σχολάζω는 ① to have time or leisure for, busy oneself with, devote oneself to(탈출 5,8.17; 1코린 7,5) ② to be without occupants, be unoccupied, stand empty(마태 12,44)의 뜻을 지녔습니다(cf. BDAG). 칠십인역 성경의 시편 45,11ㄱ(시편 46,11ㄱ)은 ‘멈추게 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다’의 의미로 이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학교라는 말의 어원이 ‘한가로움’에서 왔다는 점 때문에 혹자는 유한계급(leisure class)의 특권 혹은 그들의 사회지배를 위한 수단-통로 정도로 교육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으나 일하지 않는 시간을 뜻하는 이 말을 교육의 장소 혹은 교육 자체를 표현하는 말로 발전시킨 데에는 놀라운 통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요셉 피이퍼가 “여가의 중요성과 가치는 사회적 직무를 수행하는 기능인이 그의 일을 조금의 착오도 중단도 없이 수행하도록 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동안 내내 인간으로 존재하도록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여가: 자유와 문화와 교육의 기초」, 성경제, 1995, 41)라고 지적하는 바와 같이, 고대인들은 노동과 노동 사이의 휴식을 단순히 생산효율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을 보다 더 지고한 단계로 끌어올려 자기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관조하는 시간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가는 단순히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시간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생각하는 존재, 감각적 세계를 초월하는 존재임을 망각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매우 중요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벤 시라가 다양한 장인(匠人)들의 노고와 근면함,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후한 평가를 내리면서도 노동에 몰입하지 않고 지혜를 찾는 자세를 더욱 높이 평가하는 점이나, 코헬렛이 인생의 온갖 노고의 결실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인간 세계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는데에 정열을 바쳤던 점을 감안할 때, 구약의 지혜문학이 일관되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인간은 하느님을 떠나서는 자신과 자기의 모든 활동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고 벤 시라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했음을 보여줍니다.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를 둘러싼 세상과 그 세상에서 나에게 말을 건네고,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께 내 존재를 향하는 시간으로 우리 활동의 남은 시간을 채워갈 때 내가 살아가는 시간들은 시(詩)가 됩니다. 같은 의미에서 시편 45,11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
나는 민족들 위에 드높이 있노라, 세상 위에 드높이 있노라!”
올 여름 휴가는 북적거리는 유원지의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시달릴 것이 아니라 한가로운 피정 집을 찾아 아무 짓 말고 나에게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참된 공부에 매달려 보심이 어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