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VISTA 프로그램 참가 수기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충북 충주고 재학시절인 1962년 청소년적십자(당시 JRC, Junior Red Cross) 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62년 7월 30일부터 8월 31일까지 미국적십자사와 국제적십자사연맹 공동주최로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개최된 ‘청소년적십자국제대회’(Operation Vista in USA)에 한국 대표로 선발되어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곽영훈(경기고), 신은주(경남여고), 정영애(경기여고) 등 4명도 함께 참가하여 청소년적십자활동 소개와 민속예술소개 등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VISTA(Visit of international students To America) 프로그램에는 당시 43개국 117명의 대표들이 참여했다. 대회기간 중 백악관으로 케네디 대통령을 방문하는 등 학생대표들로서는 매우 보람 있고 유익한 국제대회였다.
당시 청소년적십자국제대회에 비스타(VISTA)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돌아온 반기문이 대학적십자 회지에 기고한 글이다.
7월 30일 오후 3시 45분 김포국제공항을 경기고의 곽영훈군, 경기여고의 정영애양, 경남여고의 신은주양과 함께 떠났다. 생각하면 곧 하늘의 별이라도 따고 말 기분이었지만 한편 내 자신 어떻게 앞으로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해 조심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 일행이 맨 먼저 도착한 San Francisco에는 25개국에서 41명이 모였다. 서로 인사교환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나 곧 그룹을 나눴는데 우리 반은 캐나다, 칠레, 터키, 파나마, 인디아, 독일, 유고슬로비아, 뉴질랜드, 이탈리아, 한국으로 구성되었다.
San Francisco에서의 생활은 대개 시가지 구경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우리들은 세계에서 제일 긴 Golden Gate Bridge 라든가 Bay Bridge, Golden Gate Park 등 두루 여러 군데를 보았다.
특히 항상 안개에 쌓여있는 금문교는 아직도 그 웅장한 자태가 눈에 선하다.
San Francisco에서 3일간 머무른 다음 Marin County로 갔다. 나의 가족은 Robert. A. Patterson 이라는 중학교장님이었다. 맨 처음에는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어서 좀 난처하였다. 더구나 습관이 젖지 않았기 때문에「고맙다」는 인사를 한다든가 “Excuse me”라는 말도 여간해 나오지 않았다. 남의 어깨를 치고서도 먼저 상대방으로부터 그런 말을 듣고 난 뒤라야 “Excuse me”라는 말도 나왔다.
미국 가정생활은 무척 즐거웠다. 해변으로 소풍을 간다든가 또는 말을 타고 시간을 보낸다든가 무척 재미있는 생활이었다. 보통 그러한 일은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하였다. 월요일 및 화요일은 직접 활동하는 날이다. 내가 택한 것은 국제관계 및 교육부 면이었다.
대개 미국청소년적십자 단원의 활동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Gift Box나 Chest-box 또는 Art Exchange 같은 것이 그들의 주요사업인 것 같았다. 말이 나왔으니 가장 감명 받았던 미국적십자의 사업을 이야기 해 보기로 하겠다.
첫째는 Blood Program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해 전부터 적십자 사업으로 운영되고 있는 이 사업이 미국에서는 무척 활발하였다. 피가 모자라는 사람을 위하여 아낌없이 자기 피를 제공하는 거룩한 일인 것이다.
한 지사의 병원에서 수십 명이 자기의 피를 빼고 있는 거룩한 장면을 볼 수가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Henry Dunent이 Solferino 전쟁에서 발휘한 고귀한 인간애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둘째는 Volunteer activity(봉사원의 활동)이다. 정말 Volunteer들에게는 무척 인상을 받았다. 자기의 일도 젖혀놓고서 몇 시간 동안 때로는 며칠씩 정신적 물질적으로 남을 돕는 것을 보고서 무척 그들에게 감사도 드리고 또 가장 고귀하게 보았다. 미국 내에는 무려 3,600개의 지사가 있는데 그 지사마다 약 900명의 Volunteer가 있다니 그 수는 실로 2,3백만 명에 달할 것이다. 아마 미국적십자 사업 중의 90%가 봉사원의 손에 의해 되어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미국인의 가정생활에 관해 말해 보려한다.
제일 좋았던 것은 그 사람들은 항상 명랑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호조건의 덕택이겠지만 그곳에선 인간으로서 대하는 것이다. 동양에서와 같이 어른은 아이들을 무조건 눌러버리는 그러한 관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 모든 사람사이에 항상 웃음의 꽃이 피고 좀 더 나은 내일을 약속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점이 있는 반면 나쁜 점도 없지 아니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좋게는 생각되지 않았음을 솔직히 말해둔다.
미국사회는 미국의 10대 청소년들에게 너무나 많은 자유를 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나칠 정도를 생활을 enjoy하려고 한다든가 또는 부모와 자식사이에 의견이 맞지 아니할 때 부모가 간섭을 안 한다든가 하는 것은 서양미덕은 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동양도덕에는 없는 소리이다.
Marin County에서의 7일간 후에는 Oregon주의 Portland로 갔다. 거기서는 농장을 경영하는 John Barett씨 댁에서 머물렀다.
미국사람 및 그 외 대표들의 한국 인식부족에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전(辭典)이 있느냐 大學이 하나라도 있느냐 또는 남녀 date를 하느냐 하는 등등의 질문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Portland에서 우연한 기회에 인디안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 그네들의 독특한 복장에 고유의 춤과 노래는 진귀한 구경거리였었다.
Portland에서 7일간을 지낸 뒤 Washington주의 Spokane으로 갔다. 미국사람들의 생활은 자동차와 밀접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한시라도 떨어져 있기 싫어하는 눈치다. 그래서 그런지 Drive-in Theater나 Drive-in Restaurant 가 많이 눈에 띈다. Drive이라는 것은 자동차를 몰고 극장이나 식당에 들어가서 자동차 안에서 영화구경을 한다든가 음식을 먹는 아주 듣기에도 기이한 일들이다.
여하튼 자동차와 Television 냉장고는 미국인의 필수생활조건인 것 같다. 8월22일 Washington D.C.로 갔다. 거기서는 43개국의 117명의 대표들이 모였다. 진짜 우리의 생활은 Washington에서 재미있었다. 인종도 많이 모였지만 성질도 별의 별 인간이 다 모였다. 우리의 숙소는 가정대신 Wesley Theologial Seminar의 기숙사에서였다.
아침, 점심, 저녁 100여 명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면 정말 가족과 같은 흐뭇한 마음이 들곤 했다. 한번은 international night를 열었다.
한국대표로서는 辛양이 부채춤을 추었는데 인기최고였었다고 자부한다. 어떻게나 감탄들을 했던지 모든 대표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또 郭군이 Vista Song을 지어 각국대표들이 같이 부르게 하여 일약 한국을 빛냈던 것이다. 월화요일은 토론이 있었는데 월요일은 Office of Volunteers, Office of Educational Relations, Safety and Disaster International Relations에서 2개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화요일은 Agriculture, International Law, Religious Life, Education에서 2개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내가 택한 것은 Office of Volunteers와 Office of Educational Relations와 Agriculture와 International Law이었다.
한국대표의 긍지를 가지고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우리에게 무척 영광스러웠던 날은 Kennedy 대통령과 만난 날이었다. 먼저 백악관의 내실을 구경하고 11시에 만났다.
말이나 시진에서만 보던 Kennedy 대통령! 보기에도 묵직하게 생기신 분이었다. 2,3분 동안 연설을 하고나서는 여자들 몇 명과 악수를 하고 들어가셨다. 한번 악수를 해보려고 노력하다가 헛수고만 한 생각을 하면 쓴 웃음을 금치 못하겠다.
저녁 7시부터 Bon Voyoge Dinner가 있었다. General Grunther의 연설은 듣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게 했다. 폐회식을 마치고 난 각국대표들은 서로 부등 켜 안고 섭섭한 눈물을 흘렸다. 모두다 형제자매와 같은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이튿날 우리는 117명의 여러 대표들과 미국적십자관계의 여러분과 친절했던 미국인 친구 및 미국에 adieu를 고했던 것이다.
충주고등학교 3년 반 기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