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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1-14장) 주석
====1:1
다리오 왕 이 년 팔 월에 - '다리오 왕 이 년 팔 월'은 B.C.520년 10-11월에 해당
된다. 학 1:1에 따르면, 학개 역시 그의 예언 사역을 다리오 왕 이 년 유월 첫날, 곧
B.C.520년 8월 29일에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스가랴는 학개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이 두 선지자들의 사역은 공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독려하여 성전
재건을 돕는 것이었다. 그런데 스가랴는 영적 갱신에 보다 실질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
었다(2-6절). 한편 바벧론에 붙잡혀 갔던 포로들이 이스라엘로 귀환할 즈음에는 왕이
없었기 때문에, 학개의 경우와 같이 스가랴도 유다의 군주이며 페르샤 왕인 다리오 통
치년도로써 연대를 기록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 '선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비'는 '하나님에 의해 대변인으로 부르심을 받는 자'를
의미하는데, 스가랴가 자신을 특별히 선지자로서 묘사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로서의 사명을 받았음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스가랴는 또한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로 규정되어 있다. 스가랴 가문의 이 세 사람의 이름의 뜻은 '주께서
기억하시고', '축복하실 것이며', '적절한 시기에' 등인데, 이를 다시 정리하면, '주
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기억하사 적절한 시기에 축복하실 것이다'라는 말이 된다. 이
는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하다. 잇도는 스룹바벧과 여호수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
한 제사장 중 한 명이다(느 12:4,16). 스가랴는 포로 중에 태어났으며, 이스라엘로 귀
환할 당시에는 상당히 어렸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기 전에는 제사장이
었다(K.L.Baker).
======1:2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 스가랴는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반드
시 죄를 처벌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시작한다. 언약의 하
나님은 포로이전의 조상들의 언약 파기에 대해 보응하셨다. 과거에 대한 이런 지적은
아마 청중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선지자는 여태까지 살았던 포로 생활
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의 직접적인 결과임을 다시 한번 강조함으로써 백성들의
경각심을 촉구하였다. 한편 '열조'란 말의 문자적 번역은 '아버지들'인데, 셈계 언어
에서 아버지는 '할아버지'나 싸'선조'를 뜻하기도 한다(Baldwin).
=======1:3
그러므로...돌아오라...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여호와의 진노에 이어서 은
혜가 언급된다. 선지자는 여기에서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충만한
축복을 개인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조건들 중에 하나였다. 본절에는 경험할 수 있는
조건들 중에 하나였다. 본절에는 이런 회개의 촉구가 세 번의 만군의 여호와의 권위있
는 선언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스가랴에게 권위를 부여하신 '만군의 여호와'는 역
사의 주권자로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주관하사 자신의 뜻을 성취시키신다.
자기 선지자를 통해서 전달된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은 간략히 말해서 '내게로 돌아오
라...그러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는 것이었다(말 3:7). 당시 사람들이 회개하
고 여호와께 돌아오면, 여호와께서는 저주 대신에 축복을 가져다주신다는 것이다
(K.L.Baker).
======1:4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아니하였느니라 - '열조'는
포로기이전 사람들을 말하고 있으며, '선지자들'은 이사야, 하박국, 예레미야 등과 같
은 포로기 이전 선지자들로서, 바벧론 침략의 위협을 경고했던 자들이다. 여기서 인용
되고 있는 선지자의 말은 어느 특정 선지자의 글에서 발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
의 잘못을 경고하였던 포로기 이전 선지자들의 일반적인 메시지의 내용이다(렘
35:15). '악한 길. 악한 행실'이란 말은 포로기 이전 열조들의 사악한 행위를 강조하
기 위한 비슷한 단어의 중복 표기이다.
=======1:5
5,6절은 재앙의 성격에 의해 분명히 언급한다.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 이 수사적 의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재앙을 당했
던 선조들과 그들에게 재앙을 경고했던 선지자들은 모두 이미 죽고 없다는 것이다. 이
들 선지자들 중에 어떤 이들은 그들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K.L.Baker).
========1:6
내가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전례들이...행하셨도다 하였다 하셨느니라 - 본절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이미 사라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성취된다는 사
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사 40:6-8). '전례'라고 하는 것은 율법의 특별 규정 조항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율법을 어겼을 경우 그에 따르는 위협과 저주가 포함되어 있었다.
성령이 선지자들을 감동시킨 이상(벧후 1:21), 설사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종 선지
자들을 통해서 전달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한편 선지자들을 '종'으로 지칭한 것은 그들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영예로
운 칭호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왕이시요, 전세계의 주권자이신 여호와를
섬기는 귀한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직무를 맡는다는 것은 높이 들림받은 것이지,
결코 천해지는 것이 아니다(K.L.Baker). 한편, 유다가 포로로 잡혀가는 사건은 민족의
멸망을 뜻하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서 민족 지도자들이 모두 제거되었고 또 국가 제도
도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겔 37:11). 이것은 신 28:15,45에 언급되고 있는 저주의 경
고가 직접적으로 성취된 사건으로 본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행하셨도다'란 말이 그곳
에도 그대로 쓰였다(사 55:10,11; 렘 1:12). 이런 상황은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도 있
었다. 즉 백성들의 불순종과 불신앙,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배척 등으로 인해서 그
들은 파괴되고 흩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저주 조항뿐만 아니라 신 28:2에 언급되어 있
는 축복 조항도 이루어질 것이다(Baldwin). 아무튼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말씀의 취
지는 분명하다. 즉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사
자들이 이미 죽고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기 때문이다(K.L.Baker).
========1:7
다리오 왕 이 년 십일 월 곧 스밧월 이십사 일에...말씀이 임하여 - 여기서부터는
하나님께서 밤중에 스가랴에게 보여주신 환상들이 나타난다. 그것은 모두 8개의 환상
으로, 이곳에서 17절까지는 그 첫 번째 환상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계획을 보여주셨다. 한편, 이들 8개의 환상들의 주요 항목들을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서론적 말씀이 나오고, 그런 다음 스가랴가 본 환상이 묘사된다. 그리고
선지자가 이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는 장면이 등장하고 천사의 설명이 뒤따른다.
또한 이 환상들 중 네 가지에는 신탁의 말씀이 주어지고 있으며(1:14-17; 2:6-13;
4:6-10; 6:9-15). 보다 상세한 메시지가 소개된다(Baldwin). 한편, 본절에는 다시 다
리오 왕 이 년 이라는 연대가 언급하고 있는데, 이 '다리오 왕이 년 십일 월'은
B.C.519년 2월 15일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앞서 언급된(1:1) 회개의 촉구가 있은 지 약
석 달이 지난 때였다. 본절에 언급되고 있는 스밧월 이십사 일에서부터 정확히 다섯
달 전 이십사 일에는 성전 재건이 재개되었다(학 1:14,15; 2:10). 아마 이날은 자기
백성이 순종한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특별히 기뻐하셨던 날이었음이 분명하다. 본절
하반절은 1b절과 동일하다(Lange).
=======1:8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백마가
있기로 - 본절에서 17절까지 시작되는 첫 번째 환상의 근본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비록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이 백성을 위해 '열심을'내고
계시다는 것이며, 곧 그들과 그들의 성읍들, 그리고 성전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이
다. 이 환상은 11월24일 밤 동안에 주어진 것이다. '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
아'는 NIV영역 성경에는 '환상을 가지다'(I had a vision)로 번역되었는데, 바른 번역
이다. 이 동사는 민 12:6; 사 30:10; 합 1:3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아마 이 동사는 근
거하여 선지자를 가리키는 또 다른 명사, 곧 '보는 자'(선견자, seer)란 말이 나왔을
것이다(Baldwin). 한편 이 환상에는 한 사람이 홍마를 타고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서 있
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11절을 보면, 이 사람은 '여호와의 사자'(천사)인 것으로
확인되어진다. 계 6:4에도 붉은 말이 나타나고 있는데, 거기서 그 붉은 말은 전쟁과
죽음의 도구인 칼과 관련되어 있다. 아마 여기서는 색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사 63:1-6). 또한 '화석류나무'는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도금양을 말하는 것
으로 보이는데, 느 8:15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항상 푸른 잎을 가진 나무로서
수전절과 관련되며, 그 절기의 자은 오두막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메시야 왕국에서의
축복을 묘사하고 있는 사 41:19과 55:13에도 이것이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이 나무는
미래의 희망과 약속을 암시하는 듯하며, 바벧론 포로에서의 회복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말탄 사람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었는데, 아마 그 말들 위에도
기사가 타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여호와의 사자가 거느린 천사들의 무리인 것 같
다. 한편, 백마는 보복과 승리와 관련되어 있다(계 19:11,14, K.L.Baker).
=======1:9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내가 네게 보이리라 - 스가랴는 매우 공손하고 경
외하는 말('내 주여')로 이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해석하는 천사가
자신이 그 뜻을 설명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런 내용은 13,14,19절; 4:1; 5:10; 6:4
등에도 나타난다.
=======1:10
이는 여호와께서...보내신 자들이니라 - 스가랴의 질문에 대해 천사가 설명해주는
내용이다. 그 대답은 다른 말탄 사람들이란 땅 곳곳을 살피라는 명령을 받고 여호와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천사들이라는 것이다. 페르시아 군주들은 날쌔로 용맹스러운 사자
들을 제국 곳곳에 보내어 국사를 알리게 했는데, 아마 본절의 내용은 여호와께서도 그
와 같이 이들 사자들을 땅 곳곳에 보내사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신다
는 점을 말해주는 것 같다(Baldwin).
========1:11
그들이...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하더이다 - 본절에서
는 8절의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기사가 '여호와의 사자'란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
다. 여기서 그는 여호와의 군대, 곧 다른 말탄 사람들을 지휘하는 우두머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종종 여호와 자신과 동일시되어 나타난다
(3:1,2; 창 16:11,13; 18:1,2,13,17; 22:11,12; 출 3;2; 수 5:13; 삿 2:1-5; 6:11,12;
겔 43:6,7). 다른 말탄 사람들은 그에게 전세계가 안전하고 평안하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이는 세상이 무사 안일주의에 빠져 있음을 의미한다. 당시 제국은 외적으로 평
안하였고, 침략의 위협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은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
고, 인근 민족의 모욕과 침략을 받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W.S.Lewis).
======1:12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언제까지...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
여호와의 사자는 유다 백성을 위해 간청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앞서 보고했던 말탄
자들은 열방중에 평온과 정온이 있다고 보고했는데,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을 실망시켰을 것이 확실하다. 그들은 시온에 대한 축복과 은혜가 임할 징조의
하나로서, '열방 중에 혼란'이 있다는 말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가 간구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우리의 중재자이시며 대제사장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연상시킨다(요 17장).
=====1:13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 12절에서 중재했던 자가 여호와의 사자였긴 하
지만, 여호와의 대답은 해석하는 천사에게 곧바로 주어졌으며, 그를 통하여 스가랴에
게 전달되었다(Hengstenberg). 여호와는 선한 말씀과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였다
(사 40:1,2). 이러한 말씀은 이후 14-17절에서 계속된다.
=======1:14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크게 질투하며 - 본절에는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위하
여 '질투'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가지
신 여호와의 언약 개념에 근거한 거룩한 분노라고 할 수 있다(Baldwin).
======1:15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고난을 더하였음이라 - 여기서 스가랴는 예루살
렘과 시온을 해친 열국에 대한 진노를 선포함으로써 고난받는 이스라엘을 위로한다.
하나님께서 열국에 대해 진노하시는 까닭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도구임을 망각하고 자
만하여 난폭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사 10:5-7,12).
=========1:16
그러므로...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 본절은 13절에
서 언급된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을 보다 긍정적이고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문두에 나오는 '그러므로'란 어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질투하기까지 분노하
시고 계시기 때문에 다음에 언급되는 약속의 말씀이 성취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
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12절에 언급된 '여호와의 사자'의 중보에 대한 응답으로서, 예
루살렘에 대한 자신의 자비를 다시 보이시겠다고 약속하셨다(겔 43:1-5; 48:35). 한편
'내 집' 곧 성전이 재건되리라고 하는 것은 신적 자비가 주어질 것임을 뜻하는 표현이
다. 구약의 몇몇 성구들을 비교해보면, 성전 건축이 완성되어 봉헌된 때는 B.C.516년
(스 6:15,16)인 것으로 보이며, 이런 성전 건축의 완성은 본절과 다음절의 약속이 완
전히 성취되는 초기 국면이었다(사 2:2,3; 렘 31:38-40; 겔 40-42장; 행 15:14-18,
Helpran).
=======1:17
여호와의 말씀에...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 본절은 예루살렘의 회
복과 번영을 예고함으로써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대망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위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1)쇠퇴해 있고 짓밟혀져 있던 이스라
엘 중에 여호와의 사자가 임재함. (2)이스라엘을 위한 진지하고도 애정이 깃든 중보,
(3)미래의 축복에 대한 약속등이다. 한편 첫 번째 환상은 전체 환상들의 제목에 해당
하는 일반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나머지 환상들은 이 환상에 대한 세부적 사정을
제시한다(Feinberg).
=======1:18,19
본절에서 21절까지는 두 번째 환상으로, 네 뿔과 네 명의 공장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두 번째 환상과 다음에 이어지는 세번째 환상은 13절과 17절에 약속된 안위를 근거
로 제시된다. 특별히 두 번째 환상에서는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열방들에 대해서 하나
님이 크게 진노하심으로 이 약속이 실현될 것을 말하고 있고, 세 번째 환상(2:1-13)은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던 번영을 보증함으로써 그들을 위로하고 있다.
내가...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 이곳의 네 뿔은 유다와 이스라엘, 그리고 예루살
렘을 공격하여 그 백성들을 다 흩어버렸던 열방들을 뜻한다. 탈굼역은 이 네 뿔을 '네
나라'로 번역하였고, 어떤 학자는 이를 다니엘 2장과 7장에 언급되고 있는 세계의 네
제국, 곧 바벧론, 메대바사, 그리스, 로마, 혹은 앗수르, 애굽, 바벧론, 메대-바사등
으로 보기도 한다(K.L.Baker, Feinberg). 그러나 네 뿔을 특정한 나라와 연관시켜 제
한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이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존재가 있기 때
문이다.
=======1:20
공장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 - 이들 공장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네 뿔이 단 2장과 7장의 네 제국을 상징한다고 보는 자들의 견해로서, 이들 장인들
역시 이들 네 제국을 상징한다는 주장이다. (2)이들 장인들은 과거에 이스라엘을 괴롭
혔던 나라들을 징벌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백성들로서, 애굽, 바벧론, 페르시
아, 그리스 등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2)의 견해가 보다 타당하지만, 구체적인 나라
를 규정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저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들이 궁
극적으로는 패배하고 말 것이라는 점이다(Charles Ryyie, K.L. Baker).
=======1:21
스가랴의 질문과 천사의 대답이 이루어진다.
유다를 헤쳐서 - 70인역은 '그리고 이스라엘을 산산조각 내버린'이라는 말을 첨가
했다.
열국의 뿔을 떨어 치려 하느니라 -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열국들이 모두 하나님이
일으킨 세력에 의해 멸망당함을 의미한다. 이는 바사에 의해 열강이 정복당함으로써
성취되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완성된다.
=======2:1
뺐 또...본즉 한 사람이 척량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 본절에서 13절까지는 세
번째 환상이 기록되어 있다. 이 환상에 약속되고 있는 축복과 회복의 범위는 그 당시
의 역사적 상황을 넘어서 메시야 시대에까지 확장된다. 두 번째 환상이 대적들의 파멸
을 묘사하고 있는 반면, 이 환상은 그로 인한 예루살렘의 번영과 성장을 묘사하고 있
다. 그리고 두 번째 환상이 그 당대의 적들을 멸망시킴으로써 그 당시의 문제를 해결
해 줄 것을 말하고 있다면, 이 환상은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환상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가랴와 척량사, 그리고 해석하는 천사, 그리
고 신분이 알려지지 않은 천사이다. 어떤 이들은 이 척량사를 '여호와의 사자'로 해석
하기도 한다(Perowne). 그리고 '척량줄'은 예루살렘의 회복과 성전 재건, 더 나아가서
는 메시야 시대를 준비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2:2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 여기서 스가랴
는 그 척량사에게 어디로 가는지 묻고 있다. 이에 대해 예루살렘의 길이와 폭을 척량
하러 간다는 그의 대답은 그 경계를 재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분명히 이 도시를 회복
시키고 또 약속된 축복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처음으로 취할 조치였을 것이다(겔 40:5;
계 11:1).
======2:3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 스가랴에게 친절하게 답해주었던
그 천사가 떠나려고 했을 때, 다른 천사가 나타나 그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 다른
천사는 스가랴에게 4-13절에 언급되고 있는 메시지의 뜻을 알려준다.
======2:4
사람과 육축이...같으리라 - 예루살렘 성벽이 허물어질 정도로 도시가 번영할 것이
라는 약속이다.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은 성벽이 없는 주변 촌락에서 살게 될 것이다
(겔 38:11). 그러나 역사상 아직 이런 축복이 실현된 바 없기 때문에(느 7:4; 11:1-2)
어떤 주석가들은 이를 영적인 의미로 받아들여 교회나 새 예루살렘, 곧 천국의 예루살
렘으로 확대 적용시키기도 한다(K.L.Baker, Feinberg).
======2:5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영광이 되리라 - 예루살렘의 번영으로 사람들
이 성외곽 지대로 밀려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안전할 것임을 설명한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내가'가 강조형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NIV 영역 성경은 이를 살려서 'I myself'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불성곽'이란 말은 출
애굽 당시의 '불 기둥'을 연상시키는데(출 13:21). '불 성곽'과 '영광'은 모두 하나님
의 모두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상징하고 있다. 출애굽기에도 본절에서 언급되고 있
는 '불'과 '영광'이 자주 등장한다(출 13:22; 14:20; 40:34, K.L.Baker).
======2:6,7
도망할지니라...피할지니라 - 아직 바벧론에 많은 유다인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천
사가 그들의 귀환을 촉구한다. 그 이유는 (1)바벧론에 임할 심판과 (2)예루살렘에 임
할 축복때문이다(T.V.Moore).
========2:8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 본절은 해석하기 난해한 구절 중에 하나로서 여러 가지 번역과 사본들이 존
재하고 있다.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란 어구는 '강권적으로 나를 보내셨다'
로도 해석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그가 나를 보내셨다'
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 백성의 운명과 불가
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곳의 '나'를 스가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학
자들이 많이 있긴 하지만, 여호와의 사자, 곧 메시야 시대의 사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Baldwin, Feinberg). 그렇다면, 본절의 화자는 한글 개역 성
경의 번역과 같이 만군의 여호와가 된다. 그리고 그는 또한 여호와의 사자이며, 메시
야 자신과 동일시된다. 아무튼 이 사람의 임무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해롭게 한 것은 하나님의 눈동자를 상하게 한 것과 같기
때문에 유다인들을 학대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 대한 반역인 것이다. 한편, 하나님
의 눈동자는 바벧론 성에 거하는 시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을 소중히 여기며(신 32:10) 질투하기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 24:19; 시 17:8; 마 25:34-45; 행 9:1,4,5).
=======2:9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대적들을 위협하는 몸짓으로
그의 손을 들어올린다는 뜻이다. '움직이다'란 말은 '손을 들어올리다' 또는 '흔들다'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앞절과 본절의 화자가 신성을 가진 인물, 곧
메시야나 여호와의 사자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내 손'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 곧 신적 전능을 나타낸다. 그 능력의 손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해서 대적을 파
멸시킬 것이다.
=======2:10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 위대한 구약의 언약, 특히 세계 만방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리라는 아브라함의 언약이 성취될 날이 이르게 될 것임을 말한다.
이 예언은 성육신으로 이루어졌고, 재림을 통해 완성될 것이다(T.V.Moore).
======2: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내 백성이 될 것이요 - 위대한 메시야 시대에는 많은 나라
가 여호와께 속하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 이 내용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8:20-23; 창 12:3; 18:18; 22:18; 사 2:2-4; 60:3)는 아브라함과
의 언약과 관계가 있다. 그들이 복을 얻은 결과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그 날에'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 날'이란 말은 '여호와의 날'
을 축약시킨 표현으로서, 역사적 또는 종말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Baldwin).
========2:12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유다를 상속물로 취하고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할 것임을 밝히
고 있다. 거룩하고 영광스런 왕인 여호와는 그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고 선포하는 거
룩한 백성들을 취하게 될 것이다(출 19:6; 레 11:44,45; 19:2; 시 24:3-10; 29:1,2;
96:9; 벧전 1:15,16; 계 14:8, K.L.Barker).
거룩한 땅 -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이다(K.L.Barker) - 문자적으로 가나안
땅을 의미하지만, 상징적으로는 하나님이 계시고 여호와의 주권이 마치는 땅 전체를
의미한다(출 3:5; 호 9:3).
=======2:13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 수많은 성도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
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행위를 하심을 보여준다(시 44:23; 사 51:9). 한편 여기서 '성
소'가 스룹바벧 성전과 연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거
처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3:1
본장에서는 사탄이 여호수아를 고소하고 이에 대해 여호와의 사자가 변호하는 형태
를 취하면서, 메시야 사건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주어진 복을 언급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 '여호수아'는 당시에 대제사장직
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보이며,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앞에 섰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메드'는 분사형으로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
다. (1)제사장직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신 10:8; 대하 29:11; 겔 44:15). (2) 재
판 장면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된다(민 35:12; 신 19:17; 수 20:6; 왕상 3:16). 여기서
는 두 가지 의미를 복합적으로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여호와의 앞에서 제
사장 직분을 감당하는 여호수아가 사탄의 참소로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성 여부를 판
가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제사장직이 공적이듯이, 그는 개인적인 입장이라기보
다는 공적인 위치로 여호와 앞에 섰다(1,2,5,8,9절). 한편, '사단'은 욥 1,2장에서도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 욥의 신앙은 참신앙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바뀌는 일시적인
신앙이라고 참소하였다. 사탄은 모든 성도들을 대적하고(벧전 5:8) 참소하는 일(계
12:10)을 계속한다.
=========3: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
에 - 사탄의 최후는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며(마 25:41), 마지막 때에 하늘에서
떨어져(눅 10:18) 무저갱에 들어가고야 마는 것이다(계 12:9; 20:3). '불에서 꺼낸 그
슬린 나무'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표로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암 4:11).
이는 여호와의 구원이 가진 성격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표현이다. '불'은 바벧론 포로
를 의미하는 것으로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이스라엘은 그 불로부터 불타는 막대기로 취
급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애굽에서의 구원을 아울러 회고하
게 하며(신 4:20; 7:7,8; 렘 11:4). 장차 올 환난의 때에 있을 구속을 예상하게 하기
도 한다(13:8,9; 렘 30:7; 계 12:13-17).
======3: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 '더러운 옷'은 수치와 비난거
리가 되는 것으로 심각한 죄의 상태를 나타내며(사 64:6). 이런 옷을 걸친 여호수아의
모습은 당시에 죄와 허물로 가득한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더러운'에 해당하는 히브리
어 '초임'은 가장 간악하고 혐오스러운 성격의 더러움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중에서 가
장 강력한 표현이다(Feinberg). 사탄은 바로 정결하지 못한 성도의 상태를 문제삼는
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바로 은혜로 말미암은 메사야적 사역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3:4
여호와께서...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 '더러운
옷을 벗긴다'는 것은 여호수아가 죄악으로 인해 제사장 직분을 박탈당했다는 것을 의
미할 수도 있다(K.L.Baker). 하지만,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여호수아가 죄
로 인해 직분이 박탈되고, 죄책에 시달린다고 해도 여호와의 선언은 죄과를 제하여 버
린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호수아의 죄를 깨끗이 하겠다는 약속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며(계 7:14), 우리의 옛 사람을 벗기고 새 사람을 입히시는 것과 같다
(롬 6:6; 엡 4:2; 골 3:9).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의 죄를 완전히 사하시고(사 6:7)
구원과 의로 옷입히실 것이다(사 61:10; 눅 15:22; 계 19:8). 이런 일은 메시야의 대
속적 죽음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3:5
본절은 죄과가 없어지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운 성도들이 그에 합당한 지위를 제공
받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조치로 성도들은 보다 구체적으로 의로운 모
습이 나타나 성결되고 구별된 삶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3:6,7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증거하여...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 여기서는
속죄로 인한 결과들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권에 참여하는 것이다. 속
죄로 인해 새로운 자격을 얻게 된 여호수아는 그 자격과 지위에 걸맞게 하나님으로부
터 계시를 받는다. 하나님은 은혜로 성도들을 의롭다고 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결
륜을 알리시고 율법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 법도와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게
될 삶의 최고 가치이다. 그 조건은 두 가지인데, (1) '내 도를 준행하며'라는 것으로
여호와께 대한 개인 생활 및 자세를 가리킨다. 즉, 개인으로 실제적인 의가 드러나야
한다는 말이다(살전 4:1; 딤전 4:16). (2) '내 율례를 지키면'이라는 것은 신적 수임
인 제사장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기 때문에
(호 14:9) 선한 생활과 거룩한 삶을 요구하며(신 8:6; 10:12; 시 128:1). '율례'는 모
세의 법을 따라 맡은 직무에 충실히 살아야 할 것을 요구한다(레 8:35; 대하 6:16; 겔
44:15,16). 이러한 조건을 지키면 얻게 될 상급에 대해서도 언급되었다.
========3:8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순을 나게 하리라 - '예표의 사람'은 바로 여호
수아와 그의 동료 제사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들의 직분이 예언적이고 상징적인 의미
를 갖고 있었다. 결국 구약의 제사장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가치는 메시야를 통해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가리키는 '종'(사 42:1; 49:3; 50:10;
겔 34:23)과 '순'(荀)(렘 23:5)에 대한 약속으로 이어진다. '종'이라는 표현은 메시야
이신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행하여 완전한 속량을 이루실 것을 잘 나
타내며, '순'은 다윗의 계보에서 나올 새로운 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적 특성을
시사한다(6:12; 사 11:1; 42:1).
=======3:9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 이 돌은 일차적으로 성전 건축을 위해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으로
필요한 기초석이나 모퉁잇돌을 의미한다(스 3:9-11; 시 118:22,23; 마 21:42; 행
4:11). 이는 문맥상 메시야를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Bullinger). 이
와 함께 일곱 눈의 모습은 보다 완전한 메시야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일곱'이라는 숫
자는 완전한 수로 여호와께서 불꽃 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모습이며(4:10; 계 5:6),
하나님의 무한한 지성과 전지성을 상징한다(사 11;2; 골 2:3,9; 계 5:6). 이는 성전
재건 사업이라는 역사적인 현실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즉, 영원한 대제사장이요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
도께서 성도들의 죄악의 요구를 단번에 만족시키시는 사역을 가리킨다(히 7:27;
10:10).
========3:10
8,9절에 열거된 메시야적 행동에 대한 결과로 주어지는 소망스러운 약속이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제공되는 평강과 안정이다.
그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큰 은혜를 받은 상태를 말한다
(K.L.Baker). 메시야 시대가 도래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평화가 이루어져서 하나
님과 백성의 교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성도들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질 것을 보여
준다(롬 5:1; 고후 5:18). 메시야의 오심으로 인해 평강을 얻게 된 하나님의 백성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며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계 20:1-6).
< 스가랴의 묘>
슥 4:1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니 마치 자는 사람이 깨우임 같더라 - 스
가랴는 역시 인간인 만큼, 성령의 깨워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그의 마음이 하늘의 것을
생각하게 되지 못한다(Calvin). 사람은 그 마음이 항상 땅의 것에게 매어 있다. 혹설
에 여기 "깨운"다 함은, 벌써 받은 계시 (3장에 기록되어 있음)에 놀라서 거기에 집중
된 스가랴의 마음을 돌이켜 일으킴이라고 하나 이연치 않다.
슥 4:2,3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 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
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
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
편에 있고 하나는 그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 "순금"은 가장 고귀(高貴)한 금속인데 여
기서 그 변치 않는 성질일 생각하여 하늘의 것을 상징한다. "등대"는 두말할 것 없이
신약 교회를 상징한다. "주발"은 바리(鉢)와 밭은 그릇인데 기름을 저장(貯藏)하기 위
한 것이고, "등잔"은 불타는 심지를 넣은 등(燈)자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각기 등잔에
있는 일곱 관은, 등잔에 기름을 흘려 들이기 위한 것이다. "두 감람나무"는 기름을 내
어주기 위한 것이다. 이것들에 대한 설명은 이아래 6절이하에 나온다.
슥 4:4,5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 들이 무엇 이니이까 내게 말하
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이니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 주여 내가알지 못하나이다 - 선지자는 여기서도 계시의 의미를 알려고 사모한
다. 그렇게 진리를 탐구하는데 대하여 천사는 가르쳐 주기를 원한다. 누구든지 스스로
아는체 하지 않고 정직하게 그 무식을 고백하며 알고자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
을 물리치지 않으신다. 하늘나라의 오묘한 진리는 간절히 사모하는 자만이 깨닫는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성물을 개에게,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시지 않기 때문이다(마7
:6).
슥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벧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 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 이것은 위에 보인 수금 등대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곧,스룹바벧이
건축하기 시작한 성전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필경 산과 같은 난관을 극복하고 준
공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비취는 등대의 역할을 하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겸하여 장차
오실 메시야(그는 스룹바벧에게서 예표되셨던 참 스룹바벧이심)꼐서 세우실 신약 교회
를 상징한다.
순금 등대가두 감람나무에서 공급되는 기름으로써 그빛을 발함과, 이스룹바벧이 세
울 성전(또 그것이 예표한 신약 교회)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성립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천사는 여기 말한다. 곧,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
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한다. "힘"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각양 세력(예컨대 부
력, 병력 등)이고, "능"이라는 것은, 개인의 정력이나 담력 같은 것을 가리킨다.
슥 4: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벧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하셨고 - 스룹바벧
의 성전 재건 공사를 반대하는 세력이 비록 큰 산악(山岳)같을찌라도, 하나님의 성령
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그것은 평지와 같이 변한다. "머릿돌"은 건축이 완필된 때에 집
꼭대기에 놓는 것이니, 그것을 내어 놓는 것은 그 건축의 마감을 의미하는 행동이다.
스룹바벧이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어 무리가 외쳐 기도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원오에는 文法上 女性인 고로 "건물에게"라는 뜻임)"있을찌어다"하고 기도하리라고
한다. 이것은, 그 기도가 하필 그 준공하는 순간에만 있으리라는 뜻이 아니고 그 건축
공사하는 동안에도 계속하여 있음을 암시한다(Calvin). 성전 재건하는 동안 큰 무리의
외치는 기도는 그 공사를 격려하는 돕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기도가 가장 힘있게
돕는다. "은총 은총"이라고 거듭 말함은, 그 일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될 수 있음
에 대하여 역설함이다.
슥 4: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 선지자의 이말은 종종 반복(反復)된다
. 그것은, 그의 전하는 바가 하나님 말씀 밖에 다른 것이 전연 없다는 역설(力說)이다
. "임하여"라는 말을 보아서, 그 말씀은 외래(外來,곧, 자기 밖에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 것이다.
슥 4:9
스룹바벧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
니 만군의 여호와깨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 하나님은
시작하신 것을 반드시 마치신다. 이런 의미에서도 그는 알파와 오메가이시다(빌1:6;
계1:8). 그가 스룹바벧을 시켜서 성전을 재건하게 하셨으니 그가 또한 스룹바벧로 하
여금 그 일을 마치게 하실 것이다. 이말씀은, 원수들의 방해로 인하여 성전 재건 공사
를 중단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위로하여 격려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이것은, 계시를 설명하는 천사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인 사
실을 알게 되리라는 뜻이다. 스룹바벧이 재건하는 성전이 필경 완성될 때에는 이 천사
의 예고한 대로 됨이니, 그것을 보는 자는 그 천사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안
다.
슥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 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
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벧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 "작은 일의 날".
그때의 성전 재건이 원수들의 방해로 인하여 미천(微賤)해 보였다. 하나님께서 유대인
더러 이런 미천해 보이는 시기(時期)를 멸시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일은 처음에는 미천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이 역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천한 것이다. 스룹바벧의 성전 재건 공사가 그때에 미약해 보였으나 필경
완성될 이유는,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 곧, 모르심이 없으신 성령꼐서
그 일을 성사 (成事)시키겠기 때문이다. "일곱"은 완전을 의미하는 수(數)이니, "일곱
눈"은 무소부지(無所不知)하신 성령을 비유한다.
"다림줄이 스룹바벧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 곧,
"일곱 눈"이 스룹바벧의 성전 재건 공사를 위한 다림줄을 기뻐 하신다는 뜻이다. 성령
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완성되지 않으랴!
슥 4:11
스가랴가, 같은 내용의 질문을 두 가지 형식으로 묻는다. 그의 질문은, 그가 진리
를 알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다. 그는 계시의 뜻을모른는 그대로 무관심하게
지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이 모본해야 할 심리이다. "금 기름". 이것은
금빛같은 기름이다.
슥 4:13
그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
지 못하나이다 - 천사는 위의 선지자의 질문(11,12)에 대하여 곧바로 그 묻는 뜻을 알
려주지 않고,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하면서 그로 하여금 그의 무식을
안타깝게 느끼도록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계시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방법이다. 그는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는 사람이 간절하여지기까
지는 줄 것을 주시지 않고 시간을 잡으신다.
슥 4:14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세사의 주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
"기름 발리운 자 둘"이라는 말은, 문자역(文字譯)대로 "기름의 아들 둘"이라고 한다.
기름 발리운 것이 이들의 특징이다. 이들은 제사장과 왕이다.(레21:10; 삼상10:1).
"주 앞에 모셔 섰다"함은, 하나님의 시키시는 일에 즉각 순종하려고 대비(對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둘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벧을 가리킨다. 이 둘은 하나님과 함께 있
으면서 성령의 은혜를 풍성히 받아 하나님의 교회에 공급한다.
슥 5:1,2
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다 - "눈을 든"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얻기 위하여 준비된 행동이다.
인간은 영적으로 우준하기 때문에 경건한 노력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점점 주님과 교
통이 열리는 법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몇 날 동안 기도를 힘쓰고 애써야 필경 기
도가 되어진다.
"날아가는 두루마리" 이것은 빨리 두루 돌아다니는 저주이니(3절), 두루마리의 안팎
에 쓰인 것이다(겔 2:9,10)"그장이 이십 규빗 이요 광이 십규빗"이라고 하였으니, 이
는 성소의 면적으로서(출26:1), 그 면적이 이렇게 성소와 같은 이유는, 거기 쓰인 저
주를 받을 자들이 성소에 나타나는 하나님 백성에게서 끓어지겠기 때문이다
(Delitzsch).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계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목적은, 그들이 성전 재건 공
사에 있어서 원수들의 방해로 인하여 낙심하였던 것으로 이제 다시 착수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온 땅의 백성들의 죄악을 하나하나 다 벌하시리라는 것은 , 하
나님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을 가까이 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사람에게 진정한 종
교심이 작홍되는 것은 온 땅이 평안함을 보는 데서가 아니고, 도리어 온 땅이 하나님
의 징벌로 캄캄하여질 것이 내다보일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슥 5:3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 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끓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 - 여기 "온 지
면"이라는 것은, 하필 이스라엘 땅 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고 온 세상을 의미하였을 것
이다. 이것을 보면 범죄한 자로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벌을 면할수 없다는 것이 알려
진다. 여기 관설된 죄악은 "도적질"과 "맹세", 두가지 밖에 없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죄악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모든 죄악을 포괄한다. 곧, "도적질"은, 이웃 사람을 해
롭게 하는 것이니 십계명의 둘째 부분(5-10계명)을 어긴 죄악을 대표하는 것이고, "맹
세"는 ,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 망녕되이 일컫는 것으로서 (4절 참조), 하나
님을 반역하는 죄이니 십계명의 첫째 부분(제 1-4계명)을 위반한 것이다. "그 이편 글
대로... 그 저편 글대로" 라는 말씀은, 그 두루마리가 안팎으로 쓰여져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두 방변을 가리키고 있다. 겔 2:10 참조.
슥 5:4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 아떤 해석가들의 말에 의하면 이 말씀
은, 하나님께서 자금 이후(自今以后)로 죄인들을 취급하실 때에 각기 개인 자격대로
하시고, 그들의 죄 때문에 전 민족(全民鏃)이 이방에 사로잡혀 가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을 역설(力說)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확실성 있는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여기 관설된 두 가지 죄악 곧, "도적"과 "망녕된 맹세"에 대한 해석은 위의 3절에 벌
써 나왔으니 거기서 참조하여라. 여기 말한대로 하나님께서 발하신 저주가 그 범죄자
들의 "집을 그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옛날의 형벌 방식
으로서 그 민족에게서 그 범죄자의 전 가족을 제거(除去)시킨다는 의미이다(K.
Marti,Die Zerstorung des Hause des Frevlers ist altes Strafercht und bedeutet
den Ausschluss der ganzen Familie aus dem Verbande des Volkes(Wellh), vgl. auch
Dan 25). 그러나 그보다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곧, 범죄자들에
게 이와 같이 저주가 심각히 임하여 그 집과 그 나무와 그 돌까지도 폐허(廢墟)의 참
상(慘狀)을 이룬 것은, 지나가는 사람이나 후대인들까지라도 그 죄에 대한 징벌의 확
실성을 보게 하며 영구(永久)한 증거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슥 5:5
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아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 - 선지자에게 주신 계시와 관계된 천사는, 또 다시 어린 학도(學徒)를 잘
가르치는 선생과 같이 문답식으로 진리를 가르친다. 이런 반법은, 배우는 자로 하여
금 심령에 진리 탐구의 자발적 사색(自發的思索)을 일으켜 생명 있게 배우게 하는 것
이다.
슥 5:6
내가 묻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그가 가로되 나오는 이것이 에바니라 또 가로되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 여기 이른바 "에바"는 유대인이 곡식을 되는말
이다. 여기서 곡식 되는 말이 나오는 것은 죄악을 칙량하기 위함이니 퓨세이에 의하
면, 유대인들이 선지자들을 살해하였으므로 죄가 많다고 할 수 있으나 아직 메시야를
죽이는 시기는 이르지 않았으니 그 죄악이 말에 찼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
서 여기 천사가 말하기를,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 말
속에 한 여인이 앉은 정도로(7절)서 꽉 차지는 않았으니, 아직은 죄악이 말에 가득하
지 않은 모양이라는 의미이다. 마 23:32 참조
슥 5:7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는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
라 - 이 번역은 히브리 원문에 있는 어순(語順)을 전도(轉倒)시켰으니, 그것을 바르게
번역해 놓아야 하겠다. 그것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 곧, "볼찌어다 둥근 납 조각이
들리웠도다 그리고 한 여인이 그 에바 가운데 앉아 있도다"라고 함이다. 이 번역에
의하면, 천사가 스가랴에게 가리켜 보이는 대로, 에바의 둥근 뚜껑이 들리워 있는데
그 안에는 한 여인이 앉아 있음을 보여 준다. 여기 이른바 "둥근 납 한 조각"은, 실
상 둥근 연(鉛)조각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에바의 뚜껑일 것이다. 여기 "여인"은 죄악
을 상징하는 것이니(8절 상반절 참조), 그가 말 속에 앉은 정도는 아직 죄악의 관영은
아니다(Pusey). 연 조각은 양심을 누르는 죄악의 무게를 상징한다.
슥 5:8,9
그가 가로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놓고 납 조각을 에
바 아구리 위에 던져 덮더라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왔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들이 그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었기로 - 이 귀절들은 유대인의 죄
악이 이방에 옮겨지는 광경인데, 다른 두 여인이 나타나서 "학의 날개 같은 날개"로
높이 "천지 사이로" 쳐들어 감이다. 이와 같은 이동(移動)은 아마 어떤 이방 나라들의
권세로 유대인들을 분산(分散)시키는 것을 의미한 듯하다. 어쨌든 유대인들은 로마의
정권하에서 각국에 흩어져 살면서, 자기들의 본국에서는 이방인 정권(곧, 빌라도 정
권)하에서 그리스도를 죽였고, 또 다른 나라에 흩어져 있는 자들은 사도들의 전도(傳
道)를 박해하였다. 이렇게 저들의 죄악은 팔레스틴에서만 아니고 널리 각국에서 그 에
바를 가득히 채우는 것과 같이 죄악을 관영시켰다.
슥 5:10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 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 이까 하매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
가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 - 여기서도 문답식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선지자에
게 알림이 된다. 이상(異象)으로 나타나는 방식도 그 보는 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데, 그 위에 또다시 문답식으로 설명을 나타내는 것은 더욱 인상 깊이 깨닫게 하는 교
수 방법이다.
에바 속에 앉은 여인 곧,죄악을 "시날 땅"으로 옮겨간 것은, 이교주의(異敎主義)의
본산(本山)으로 옮겨감이다. "시날 땅"은 인류가 고만하게 바벧탑을 쌓던 곳이다(창
10:10, 11:2). 그러니만큼 그 땅이름은, 이방 사상과 환경을 비유한다. 유대인의 죄악
은,로마의 정권하에서 그들이 이방 세력과 타협하여 극도로 발달되어 필경 메시야를
죽이고 사도들을 핍박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비유컨대 시날 땅에 근거하고 죄악을 극
도로 관영시킨 현상이다.
에바 가운데 여인이 앉은 것과, 그 에바가 시날 땅으로 이동되는 이상에 대하여 다른
해석들도 있다. 곧,(1) 이것은, 유대인에게 있었던 착취적(搾取的) 상업주의(商業主
義)의 죄악을 바벧론으로 운반함을 의미한다고 하는 해석이 있다. 계시록 18장을 보면
바벧론은 상업주의의 죄악이 팽창하였으며, 그 죄악때문에 심판을 받을 사실이 기록되
었다. 거기 바벧론은 물론 상징적 명칭으로서 세계 각국에 있는 상업주의 죄악의 근거
지를 총칭하였을 것이다. (2) 이것은,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이 받던 죄벌이 이제는 중
단되고, 그 죄벌이 유대인들을 과도히 핍박하던 이방 나라들에게로 이전(移轉)된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것은 칼빈(Calvin)의 해석이다. (3) 이것은, 유대인들이 범하던
우상 숭배 죄악이 이제부터는 제거되고 이방나라로 그 죄악이 옮겨 가서 거기서 발달
하고 있을 것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다.
슥 6:1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그 산은 놋산 이더라
- "눈을 들어 본즉" 이라는 말씀에 대하여는 5:1의 같은 말 해석을 참조 하여라. "네
병거"는 하나님의 섭리를 집행하는 천사들을 상징한다. 그들이 두 놋산사이로 나옴은
, 산 같이 변동 없고 놋 같이 단단한 섭리임을 보여준다. 그들이 일종 심판의 진행자
이므로 두 산 사이에서 나온다. 산 사이는 시온과 감람산 사이니 그곳은 하나님의 심
판 좌소이다. 14: 4; 욜 3:16 참조.
슥 6:4,5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천사가 대
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
더라 - 여기서도 문답식으로 계시가 나타나서 그것을 받는 선지자의 마음에 깊은 인상
을 준다.
"바람"은 여기서 영을 의미하는데, 곧, 섭리 수종의 천사들을 가리킨다(욥 1:6,2:1
). 이들은 온 세상을 주장하시는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지시를 받
아 가지고 나온다.
슥 6:6
흑마는 북편 땅으로 나가매 백마가 그 뒤를 따르고 어룽진 말은 남편 땅으로 나가
고 - 홍마들이 메인 첫째 병거가 나가는 방면에 대하여는 여기서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스가랴가 이 계시를 볼 때에 그것이 상징하는 시대는 벌써 지나간 까닭이겠다
(Pusey). 이 말들이 병거를 메인 것을 보니(2절), 전쟁으로 정복하는 군사 행동을 상
징하고 일반 다른 재앙을 상징하지 않는다. 그리고 흑마의 뒤를 백마가 따른다고 했
으니, 이것들이 각기 뒤이어 한 시대씩 차지하고 활동할 것임이 분명하다. 이 말들이
나가는 방위(북편 땅, 남편 땅)에 대하여는, 위의 2절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슥 6:7
건장한 말은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 고자 하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라 하매 곧 땅에 두루 다니더라 - 여기 "건장한 말"은 윗절의 어룽진
말을 형용하는 것이니, 본절은 네째 병거의 동태에 대한 진술의 계속임이 틀림 없다.
일설에 여기 "건장한 말"은 모든 병거를 끄는 모든 말들을 가리켰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땅에 두루 다님"은, 온 땅에 정복하는 기세를 펴는 것을 상징한다. 제 3절의 해석
을 참조하여라.
슥 6:8
그가 외쳐 내게 일러 가로되 북방으로 나간 자들이 북방에서 내 마음을 시원케 하
였느니라 하더라 - 여기 "그가 외쳐"라는 것은, 여호와의 사자 곧, 메시야의 외침을
이름이다. "북방으로 나간 자들"은, 이스라엘의 원수 바벧론을 정복하는 하나님의 섭
리를 이룬 자들인데 여기서 흑마가 메인 병거(혹은 백마가 메인 병거) 가 그것을 상징
한다. 그것은 메대바사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과도히 괴롭힌 원수에 대
하여 진노하셨나니(1:15), 이제 그 원수를 진멸한 자들은 그의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
슥 6:9,10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사로잡힌 자 중 바벧론에서 부터 돌아온 헬
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었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취하되 - 이것은, 선지자 스가랴를 시켜 상징적 행동을 취하도록
하여, 메시야 예언을 대신케 한다. 바벧론에서 돌아온 자들 중 위에 지명된 세 사람
이(14절에는 스바냐의 아들 헨까지 4명) 성전 건축을 위하여 바벧론에 남아 있는 동포
들에게서 금품을 모집해 온 듯하다. 선지자는, 이제 그들을 찾아가서 그 금품을 취하
여 면류관을 만들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도록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왜 스가랴를 특별히 세 사람(혹은 네 사람- 14절 참조)에게 보내며 그들
의 금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도록 하셨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그들
은, 귀환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높은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예루살
렘 재건 약속을 불신앙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귀정시켜 신앙으로 많은 유대
인들을 바로 인도하도록 하시려고,그들에게 스가랴를 보내어 이 일을 하게 하셨다(Ca
-lvin).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의 이와 같은 상징적 행위로써 여호수아의 대제사장 직
분 실행(성전 재건)의 확실성을, 그들에게 보여주시어 그들의 신앙을 강화시키신다.
"헬대"는 주님의 세계라는 뜻이고, "도비야"는 나의 좋은 것이 주님이라는 뜻이며,
"여다야"는 하나님이 아신다는 뜻, "요시야"는 하나님이 지지하신다는 뜻이다. 이 이
름 뜻들이 여기 스가랴를 통한 행동 계시에 협조하는 의의를 가지기도 한다. 곧, 유
대인들이 바벧론에서 돌아와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통하여 성전 재건하는 것을 이 이
름들의 지시함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지지에 의하여 이룬다는 것이다.
슥 6:11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 여기 "면류관"은 실상 히브리 원어로 "면류관들" 이라는 복수 명사이니, 그
내용은 두 면류관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예표하는 메시야의 직분
이 왕이요 또 대제사장인 사실을 암시한다(13절 해석 참조). 실제에 있어서 여호수아
자신은 대제사장 뿐이고 왕은 아니었다.
슥 6:12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아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 여호수아에게서 예표된 사람은, "순"(가
지, Branch) 곧, 메시야라는 의미에서(3:8 해석 참조), 선지자로 예언케 하신다. 사
11:1 참조. "자기 곳에서"라는 것은 "자기의 아래로부터"라고 직역되나 실상 자기의
고향(메시야가 나시기로 약속된 곳이니 베들레헴)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겸하
여, 아래로부터 (미천한 데서부터) 자라남을 암시 하기도 한다(Keil and Delitzsch).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므로 교회
를 세우실 것을 예언한다.
슥 6: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
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 "여호
와의 전을 건축하고". 이것은 윗절 끝에 있는 말씀의 중복 이다. 이 중복은 이유 없
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 때 현재에 재건되는 스룹바벧 성전 으로는 상상될 수 없
는 신약 시대의 신령한 성전, 곧, 교회 설립의 사실을 역설하는 것이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역설체는 중복체로 나온다.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좌에서(하나님
우편에서) 그의 교회를 다스리실 것을 가리킨다.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는, "또 그가 자기 보좌에서 제사장이 되리니"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한 몸
에 양직을 겸하실 것이 여기 예언된다.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고 한
것은, 그의 왕직과 제사장직이 서로 충돌이 없고 제정 일치의 이상적 형태인 것을 예
언한다.
슥 6:14
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
와의 전 안에 두라 하시니라 - 여기 기록된 인명들이 10절에 나온 동일한 사람들을 가
리키나, 거기 "헬대" 가 여기서는 "헬렘" 이고, 거기 "요시아"가 여기서는 "헨"이다.
이것은 문제될 것 없으니, 히브리 사람의 이름은 하나 이상 되는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면류관"을 여호와의 전에 두어 이 사람들을 "기념"함은, 이들의 신앙 부족을 후
세인들에게 거울 삼아 (10절 해석 참조), 그들의 믿음을 격려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이것은, 그 네 사람의 사랑으로 만든 면류관을 저렇게 성전에 보관해
두므로 후일에 그것을 보는 자들로 하여금 주님을 사랑하여 보물을 바치도록 장려하려
는 것이라고 한다.
슥 6:15
먼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 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
내신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할찐대 이같이
되리라 - "먼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함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신약
시대에 이방인들이 신령한 성전, 곧, 교회를 설립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렇게 되
는 것을 보는 자는, 스가랴를 하나님의 보내신 참 선지자인줄 알게 된다. 그러나 하
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에 참여하는 신자들만이 그 사실을 알
게 될 것이라고, 조건부로 말한다.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스가
랴의 예언 성취를 모른다.
슥 7:1
다리오 왕 사년 구월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
다리오는 바사 왕이니 고레스의 장인 다리오가 아니고, 히스타스페스(Hystaspes)의 아
들 다리오이다. 여기 "기슬래월"은 유대 성력대로 9월 달의 이름이니(우리 본문에도
구월 곧, 기슬래월이라 했음), 그것은 양력 11월에 해당한다. 그 달 "4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 였다고 한 것은, 또다시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성 있게 임한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일자까지 자세히 기록 함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선지자에게
임할 때에 막연하게 나타난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을 전달하는 선지자도 막연하게 말하
지 않는다. 인간의 분명치 않은 사상으로 꾸며 놓은 공환은, 시대적으로 일정한 역사
적 기원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그 역사성을 생명으로 가지
는 것이다.
슥 7:2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종자를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 여기 "벧엘 사람"이라는 것은, 바벧론에서 돌아온 벧엘 사람인데 스 2:28을 보면 그
때에 벧엘과 아이 사람이 223명이나 돌아왔다고 한다. 칼빈(Calvin)은 여기 벧엘이라
는 말을 자역하여 "하나님의 집"이라 하고 생각하기를, 여기서 바벧론에 아직 머물러
있는 유대인들이 사람들(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 수종자) 을 유대 성전에 보내어 금식
문제를 물어본 것이라고 하였다. "사레셀"은 앗수르풍의 이름이니(사 37:38; 렘 39:
3,13), 아마 그가 바벧론에서 출생 하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받은 듯하다. 그리고
"레겜멜렉"은 팔레스틴에 속하는 이름 으로서 팔레스틴 출생을 보여준다(대상 2:47).
"그 종자"라는 것은 그들의 수종자를 의미한다. "여호와께 은혜를 구"한다 함은, 3절
이 설명하여 주는데 곧,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금식 문제에 대한 여호와의 해
답을 구함이다. 그들이 바벧론에 포로되었던 동안에 선지자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
었으나(시 74:9), 이제 바벧론에서 해방되는 때를 당하여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 말
씀을 듣게 된 것은 가장 큰 위로의 은혜이다(사 40:1).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
는 것은 하나님 백성에게 있어서 큰 은혜이다.
슥 7: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 대로 오월간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하매 - 여기 이른바 "오월간에 울며 재
계"한다 함은, 제 오월에 성전 훼파의 사건을 기념하여 바벧론에서 애통하며 금식한
사실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이 이제 바벧론에서 해방되어서 성전을 재건하는 중에 있
으니 아직 바벧론에 머물러 있는 자들로서 그 같은 금식을 앞으로도 계속 하여야 될런
지가 문제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주신 해방의 은혜를 받아 순종하지 않고 (다시 말하
면,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거기 머물러 앉아서 이런 금식 문제 같은 것을 가지고
논란하고 있었으니, 그들은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순종하는 것보다 사람이 만든 규
례를 숭상하는데 치중하였다. 이것을 보면 그들의 종교 생활이 얼마나 어두워진 것을
알 수 있다.
슥 7:4,5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 들에게 이르
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 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
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 여기 이른바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함은
, 금식 문제에 대하여 유대 민족 전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지적 하려 함이다.
그 잘못된 생각은 이렇다. 곧, 외부적 의식 문제를 영적 생명이나 또는 하나님의 도
덕적 의지보다 중대시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사리의 경중을 구분할줄 모르는 잘못이
다. 사리의 경중을 구분하지 않고 경미한 것을 취하느라고 중대한 것을 희생 시키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 그 경미한 것도 바로 취해지지 않는 것이다. 비유를 들면, 가죽
보다 살이 중요한데 살을 손상시키면서 어떻게 가죽을 올바로 보호할 수 있을까? 그
러므로 주님께서도, 종교 사리의 경중을 바로 구분하지 아니하고 행동하는 자들을 꾸
짖어 말씀하시기를,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라고 하셨다(마23:24).
"오월과 칠월에 금식"은 위에 벌써 말한 바와 같이, "오월 금식"은, 성전 훼파의 사건
을 기념하기 위하여 바벧론에 잡혀 간 유대인 포로들이 금식한 것이고, "칠월 금식"은
, 바벧론 군대로 말미암아 유대 총독 그달리야와 및 유대 땅에 남아 있었던 유대인들
의 살해된 사건을 기념 하느라고 금식한 것을 가리킨다(왕하 25:25, 26; 렘 41:1-).
유대인들이 바벧론에 칠십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는 중 이런 금식일들을 정하고 행하
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며 기도하기 위함보다 다
만 저들의 민족적 사정이 애달퍼서 그 금식을 통하여 비애를 표시하였던 것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금식을 자기들이 하나님앞에 설 수 있는 공로와 같이도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 종류의 금식은 실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금식은
공로도 아니며 그 누구의 비참한 처지를 애처롭게 여겨서 동정하는 행위도 아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함과 기도하기 위함이니 어디까디든지 자기와 및 기타 인
간적 요소를 기껏 낮춤이다. 그러나 그 때 유대인들은 벌써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그
릇되이 금식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기서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라고 하셨다. 여기 두 번씩이나 "나를 위하여"라는 말씀이 나왔으니 이 중
언체는 역설체이다. 곧, 그들의 금식이 주님을 위하지 않은 것이 확실한 것을 힘있게
지적하는 것이다. 금식을 하는 자가 그것을 하나님의 도덕적 의지에 대한 순종보다
더욱 존중시하여 그것으로써 진정한 종교 생활의 내용을 대표할 것처럼 생각하거나,
혹은 그것을 공로로 내세운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 아니다.
슥 7:6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
그 때 유대인들은, 그들의 얼마 동안의 금식이 그들의 다른 때의 모든 불의한 생활을
칭의해 줄것처럼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금식하지 않는 때 곧, 먹고
마실 때에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였던 것이다. 진정한 금식자는 그 금
식을 공로로 알지 않기 때문에 금식하지 않는(곧, 먹고 마시는) 때에도 금식하는 때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가지도록 된다(고전 10:31). 그러나 그
때의 유대인들은 먹으며 마시는 생활(곧, 금식하지 않는 때의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
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몇 번 금식하므로써 공로를 삼아 장구한 세월의 불
의한 생활이 괜찮은 줄 알았다. 금식한 결과로 그 뒤를 따르는 생활은, 하나님의 말
씀을 순종하는 생활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슥 7:7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그 때에는 예루살렘
과 사면 옵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남방과 평원에도 사람이 거하였었느니라 - 하
나님께서 여기서 진정한 종교 생활의 요점은, 금식이 아니고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하
나님 말씀을 청종하는 여부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부터 실례를 들어 이 사
실을 설명한다. 곧, 선지자들이 예루살렘 멸망 전에(다시 말하면, 예루살렘과 그 주
위의 모든 지방의 백성들이 잘 살고 있던 때) 하나님 말씀을 주셨던 것인데, 그 때에
그들이 순종하였더라면 바벧론에 잡혀 가지 않았을 번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필경 하나님의 예고대로 바벧론으로 잡혀 간 것이
다. 이 사실은 8절에서 14절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사람들이 잘못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씀을 주신 것은 얼마나 큰 사
랑인가! (1)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사랑은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캄캄한 세상에
서 생명 길을 밝히 보고 가도록 하신 것이고, (2) 장래의 멸망 위험을 면하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말씀을 주시되 막연하게 주신 것이 아니고 누구나
깨달을 수 있게 주셨으니 누구든지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
여 그는 말씀하시기를,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이라고 하신다. 여기 "외친"이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에 카라라고 하였으니 곧, 선포 혹은 부르짖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충만한 내용을 가지고 힘껏 말한 것을 이름이다. 이와 같이 밝히 나타낸 말씀 앞에서
도 계속적으로 멸망 길을 가는 자는 핑계할 말이 전연 없을 것이다.
슥 7:8-10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미 말하여 이르기
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
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 여
기 이른바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이라고 한 것은, 유대인들이 바벧론에 의하여 망하
기 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아래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스가랴가 하나님의 말씀(9,10절)을 이 아래 인용하는 것은, 그의 시대의 사람들도 그
것을 순종하여야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암시한다. 7절 참조. 하나님의 도덕적 의지를
가리키는 말씀은 어느 시대에나 변치 아니하고 계속적으로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임한다
.
하나님께서 금식 문제로 물어보는 유대인들에게 이 아래 역설하시는 말씀은, 하나님
에게 대하여 직접 행할 계명보다도 사람에게 대하여 옳게 행할 도덕을 보여 주신다.
그는 여기서 종교의 어떤 의식(예컨대 금식과 같은 것) 보다도 사람에게 대하여 옳은
도덕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표시한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과 관계 없는 인본주의
도덕을 관설함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미에서 그의 명령 실천으로서 사람에게
대하여 옳게 행함을 말씀하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사람과
의 관계에 있어서 옳게 행해야 될 도덕이 강조되었다는 사실이다. 곧, "너희는 진실
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라는 것과 고독한 자를 "압제 하지 말"
라는 것과 "남들을 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훈을 볼 때 우리는 신본주의
종교가 사람에게 대한 사랑을 얼마나 심히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자들 중에는
, 신본주의 신앙을 강조하는 자들로서 사람에게 대한 공의와 사랑의 의무를 무관심하
게 생각하는 일이 종종 나타난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그렇게 잘못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에 끌림이다. 신본주의는 하나님을 중심한다고 하니까, 그들은 하나님 중심, 하
나님 중심하면서 사람에게 대한 사랑을 주요시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
착이다. 신본주의는, 사람 사랑하는 것도 그 불가결의 표현으로 가진다(요일 4:20).
"진실한 재판"이라는 것은 사실과 진상대로 바로 재판함을 의미하나니 곧, 공의이다
. 사람들이 남의 외모를 따라 그릇되이 판단하기 쉬우니, 예를 들면, 자기의 사랑하
는 자에게 대하여는 편견을 가지고 사정을 보아주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인애와 긍휼"은, 하나님께서 사람더러 행하라고 하시되
공의를 강조한 것 만치 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남들에게 인애와 긍휼을 행함
에 있어서 너무도 등한히 한다. 그들은 인애와 긍휼을 행할 책임감조차 명백히 가지
지 않는다. 그러나 공의(진실한 재판)만 있고 인애와 긍휼이 없으면 실상 사해와 같
은 사나운 사람이 되어진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라는
것은, 고독한 자들을 억울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 나그네라는 것은, 외국 사
람을 의미하나니 성경에 외국인을 과부와 고아와 같은 부류에 넣어서 말씀한 귀절이
여러 곳에 있다. 신 24:17, 27:19; 레 19:10; 시 146:9; 레 19:33; 말 3:5 참조. 사
람들이 이런 고독한 자를 업신여기는 심정으로 홀대하기 쉬운 것이다. 그들에게 이런
자를 돌아볼만 한 힘이 없는 것은 아니로되 저렇게 업신여기는 심정이 앞서서 그만야
그들을 섭섭하게 한다.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고 한 말씀은, 행위
의 근거로서 심령을 중요시할 줄 모르고 나타난 것만을 간구할줄 아는 부패한 인생들
에게 필요한 경고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들의 마음 속에 있는 악독을 문제시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행동상 죄악보다 못하지 않게 크게 문제시하신다.
잠 16:2 참조.
우리는 위의 몇 가지 도덕의 강조를 보아서 하나님 중심하는 신자들이 명심해야 될
것을 알게 되었다.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위주하는 신앙가라면, 사람들에게 대
하여(특별히 믿는 형제들에게 대하여) 착하게 행해야 될 사실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하여 엄격한 경건을 주장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대하여 몰인정하고, 사납고, 악독하
게 행하는 것은 진정한 경건이 아니다. 약 1:27 참조.
슥 7:11,12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
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
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 바벧론으로 잡혀 가
기 전에 유대인들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이 귀절들은 자세하
게 진술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기 싫어하는 것은, 고금이 일반
이다. 암만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 중심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
면, 자기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가지 못할 일이라면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라 할지라도
행하기를 싫어하고 귀를 막는 태도를 가진다. 마음이 "금강석 같"다 함은, 그 심령이
부드럽지 못하고 굳어서(겔 3:9; 렘 17:1) 하나님 말씀에 대한 섭취력이 전연 없음을
이름이다.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 이 말씀은 선지자들의 가르친
말씀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전하여진 것임을 보여준다. 유대인들이 선지자들의 말씀을
순종치 않은 것은, 곧 바로 하나님의 성령을 반역함과 같았다. 그러므로 여호와 께서
진노하셨다.
슥 7:1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었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은즉 그들이 불러
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 - 이 말씀은 응수식으로 표현되어서, 인간의 불의에 대한 하나
님의 보응이 어떻게 정확하게 또는 불가항적으로 임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결국 그
들이 행한 대로 갚음을 받는다는 말씀으로써 그들의 망하는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
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슥 7:14
회리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헤치리라 한 후로 이 땅이 황무
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으로 황무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 여기 "회리바람"은 그들이 막을 수 없는 환난을 의미하는바 곧, 바벧론으
로 사로잡혀 갈 것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은 하나님께
서 예고하신 바였다. 그 예고 대로 그들이 바벧론에 잡혀 갔고 그들의 국토는 아주
황무지가 되었다.
여기서도 유대인들이 저렇게 비참스러워진 것이, 저들 자신의 자작지얼 곧, 자기들
이 만든 앙화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그들의 불회개가 그들을 그
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슥 8:1,2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 본장에 약속된 축복
이 사람의 약속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다는 의미에서, 첫 머리에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라고 내건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성호는, "별들의
무리의 하나님"이라는 해석도 있으며, "군대의 하나님"이라는 해석도 있으나 왕을 의
미한다(Bavinck). 물론 하나님으로서 왕이라는 뜻이다.
여기 "질투"한다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카나이니, 시기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사랑하
는 자를 보호하기 위한 뜨거운 관심을 가리킨다(Calvin). "분노함으로 질투"한다 함
은, 이스라엘의 적에 대하여는 분노하시며 질투함이다. 자기의 백성 관계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질투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동시에 죄는 미워하는 생각이시다. 그러므로 그
것은 선한 것이다. 그러나 마귀의 질투는, 죄를 사랑하면서 사람은 미워하는 심리이
다. 그것은 악한 것이다(Pusey).
슥 8: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
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 하나님
께서 예루살렘을 내어버리실 때에는, 자기가 그곳을 떠나시는 계시를 나타내셨다(겔9
:3, 10:4, 18, 11:22,23).
"진리의 성읍"이라 함은, 히브리 원어로 이르 하에메드라고 한다. 그것은, 안전한
성읍이라는 뜻은 아니고 거기 거주하는 백성이 주님을 향하여 신실 되고 충성될 것을
가리킨다(Keil and Delitzsch). "성산"(모리아 산이 있는 예루살렘도 의미함) 은, 그
곳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그곳이 도덕적으로 더럽힘이 되지 않음을 이
름이다.
위의 예언은 실상 그리스도께서 팔레스틴에오신 때에야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슥 8:4,5
이 귀절들은, 그 나라가 외국의 침략을 당하지 않으므로 예루살렘 거민들이 살륙되
지 않고 평안히 살겠다는 뜻이다.
슥8:6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 하려니와 내
눈에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이 일"이라는 말은, 위에 관설
된 약속대로 이루어질 사건을 의미한다. 그 이루어지는 사건을 당할 때에 하나님 백
성(=남은 백성)이 이상히 여긴다 함은, 그들의 신앙 부족을 이름이다. 저들이 미리부
터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으로 대비하고 있으면, 그 일이 이
루어질 때에 으례히 될 일이 된다 하면서 이상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슥 8:7,8
이 귀절들은, 하나님께서 분산된 이스라엘 백성을 사방에서 모을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각국에서 사람들이 하
나님께 돌아올 것을 가리킨다.
슥 8:9
성전을 재건하려고 지대를 쌓는 때에, 백성들이 원수들의 방해로 인하여 힘을 잃었
다. 따라서 그들은 성전 재건 공사에 무관심하여졌다(스 3:12-4:5). 그러므로 선지
자들(학개와 스가랴)이 일어나서 그들을 권면하였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권면을 잘
순종하여 성전 재건을 계속해야 될 것이다. 교회 일이 어지러워질 때에는, 하나님께
서 그의 뜻이면 옳은 지도자들을 세워서 그 일을 귀정시키기도 하신다.
슥 8:10-13
여기 제 10절은 "왜 그런고 하면"으로 시작하여 그 이하의 말씀(10-13)이윗귀절(9
절) 권면의 이유임을 보여준다. 그 이유 해설은 요지 다음과 같다. 곧, 성전 재건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아직 황무케 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그의
노력의 보수를 받지 못할 정도였다. 짐승도 그 수고의 보수를 못받았다. 사람들이
안전히 여행도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축복 하시어서 추수
가 많도록 하신다. 이렇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것인즉, 이스라엘 백성
은 성전 재건도 형통할줄 알고 건축 공사를 강력추진시켜야 할 것이다.
슥 8:14,15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시기로 뜻하시든지 은혜를 베푸시기로 뜻하시
든지, 한번 정한 뜻은 변동하시지 않는다. 과거에는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재앙을 내
리시기로 뜻하신 다음에 그대로 실시하셨던 것이다. 그것을 보아서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은 한 번 정하신 뜻을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
에게 은혜 베풀기로 뜻하셨으니 그대로 될 것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저들은 확실한
축복 받을 소망 가운데서 성전 재건을 강력 추진해야 된다.
슥 8:16,17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
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
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
이것은 성전 재건에 착수한 자들로서 행할 도덕을 진술한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도덕을 그들에게 부탁하심은, 그들이 "금식절"과 같은 종교적 의식보다 도덕을 지키는
것이 재건 이스라엘의 본분임을 강조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도덕으로서도 진실을 제일로 강조하셨다. 여기 짧은 도덕 목
록 가운데 "진실"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고,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는 말이 한
번 나온다. 진실은 옳은 도덕의 근본이다. 진실을 결여한 것이면, 제일되는 사랑도
가치 없을 뿐더러 도리어 악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여기 화평한 진실의 열매이다. 진실하지 못한
재판은 화평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주의에 입각한 진실한 재판은 질서와 평
안을 유지시킨다.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이것은 거짓을 금하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심중에서 남을 해하려는 것은 감추인 악이니, 이것도 거짓이다.
위의 해석대로 보면, 16,17절의 말씀은 모두 "진실"을 가르친다고 생각된다. 평안
한 사회도 진실한 사회요, 평안한 교회도 진실을 그 성격으로 가지는 법이다.
슥 8;18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다"- 는 뜻은, 1:2의 같은 말씀 해석을 참조하여라.
슥 8:1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
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
과 화평을 사랑할찌니라 - "사월 금식"은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의 정복을 당한 사건
을 기념하는 금식이고, "오월 금식"은 성전을 불사른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고, "칠월
금식"은 그달리야 총독의 피살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고, "시월 금식"은 예루살렘이 포
위된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이 네 가지 금식절은, 바벧론에 포로된 유대인들이
바벧론에서 지키던 것이다. 이제 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본국에 돌아와서는 그 금식
을 지키지 않고 희열의 기회로 가진다.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라". 진실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특징이다(요 1:47).
그리고 화평도 하나님의 자녀(참 이스라엘)된 증표이다(마 5:9). 이 말씀은, 재건된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을 말해 주지만 겸하여 신약 시대 새 이스라엘의 특징을 예언하
기도 한다.
슥 8:20-23
이 귀절들은 신약 시대에 복음으로 만국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 받을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이 예언 가운데 들어 있는 몇 가지 특색은 이러하니, 곧, (1) 한
민족만 아니고 각국 민족이 주님께 돌아옴 (20,22,23). (2) 저들이 서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권면함(21절). (3) 개인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돌아옴(21절). (4) 여호
와께 은혜를 받으려고 돌아옴(21,22). (5) 유대인이 복음 운동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
는 예언(23절). 이방인 열명이 유대인 한 사람을 따른다는 의미의 말씀은, 복음 운동
의 초기에 많은 이방인들이 소수의 사도들(이들은 유대인이었음) 의 전도를 열심으로
받을 것을 예언한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났으니(요 4:22),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으
므로 그 구원에 참여한다.
슥 9:1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세상 사람과 이스
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봄이니라 - 여기 "경고"라는 말은, 히브리 원
어로 맛사니 짐(burden)이란 뜻이다. 이것은 이 예언의 상대자가 아주 망하게 될 것
을 가리키는 무거운 말씀임을 보여준다. "하드락"은 수리아의 지명 혹은 수리아 나라
를 가리킨다. "다메섹"도 역시 수리아에 속한다. 이 경고가 거기에 머무른다 함은,
수리아 나라가 아주 망하기까지 그 경고의 내용이 실시될 것을 가리킨다. "세상 사람
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본다" 함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
함을 의미한다고 한다(Calvin). 이 해석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회개하기 때문에 하나
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 수리아와 기타 나라들을 멸망시키게 된다는 뜻이다. 일설에,
여기 "세상 사람"이란 것은 모든 다른 나라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수리아와 같은 이스
라엘의 적국들이 멸망하는 동시에 장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어 이방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올 것을 여기서 예언한다고 한다.
본절에 예언된 수리아의 멸망은, 이 아래(2-5절) 두로와 시돈과 불레셋과 함께 주전
332년 경에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말미암아 실현되었다.
슥 9:2-4
그 접경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은 넓은 지혜가 있으니 그들 에게도 임하
리라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보장을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정금을 거리의 진흙 같
이 쌓았은즉 주께서 그를 쫓아 내시며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니 그가 불에 삼키울찌
라 - 이 귀절들은 하맛에 대한 멸망 경고를 주었으니, "하맛"도 멸망에 속한 지방으로
서 칼빈(Calvin)은 이것을 안디옥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 귀절들이 두
로와 시돈에 대한 멸망 경고를 주었으니 이 두 도시는 베니게에 속한다.
"두로"는, 비록 작은 섬이지만 150영척이나 높은 성으로 방위되어 있어서 앗수로의
살만에셀왕이 5년 동안 아무 성공도 없이 포위하였던 일이 있고, 느부갓네살은 13년
동안 그것을 포위하였으나 정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후에 이 예언대로 헬라의 알렉
산더 대왕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였다. 두로가 "보장을 건축하"였다 함은, 요새를 건축
하였다는 뜻이다. 두로는, 해상 무역을 통하여 많은 재물을 모았으며 권세를 잡았으
나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므로 필경은 멸망하고 말았다. 두로가 멸망할 때에(알렉산더
로 말미암아) 6,7천명이 학살당했고, 2천명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3만명이 노예로 팔
려 갔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재물과 지형(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서 성까지 소유하
였던 요새)을 믿는 자는 필경 저렇게 비참하게 망하였다.
슥 9:5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
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칠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거민이 없을
것이며 - 여기 이른바 "아스글론"은 불레셋 나라의 도시들이다. 이 도시들이 망하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는 이유는, 이제부터는 전화가 자기들에게 미칠 차서였기 때문이다
. 그들이 실상 순망치한의 위험을 느꼈던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공포심을 가졌던
것과 같이 사실상 멸망의 자리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스글론에는 거민이 없어
질 정도였다. 과연 후일에 알렉산더 대왕이 불레셋을 칠 때에 가사에 있었던 임금을
사로잡아 갔고 백성들을 많이 치워버리고 다른 나라사람들을 그곳으로 이민하였다(Pu
-sey).
슥 9:6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하리라 내가 불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 여기 이른바 "잡족
"이라는 말은, 타국인을 의미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 예언과 같이 타국인들을 불레
셋에 많이 거주시켰다. "불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는다 함은, 그 족속이 일찌기 이스
라엘을 많이 괴롭게 하므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의 죄가 많았음을 암시한다. 이제
그 민족이 자랑하던 나라가 무너짐에 따라 그들은 수그러지게 되었다. 하나님 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복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먼저 그들의 교만을 꺾으신다.
슥 9:7
그 입에서 그 피를, 그 잇사이에서 그 가중한 것을 제하리니 그도 남아서 우리 하
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두목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
이 귀절은, 위에 말한 것과 같이, 교만이 꺾이운 불레셋 사람들도 필경 복음을 받아
하나님 백성에 참여할 것을 예언한다. "그 입에서 그 피를...제"한다 함은, 다른 민
족을 착취하는 죄를 다시 범치 않도록 함이고, "그 잇사이에서 그 가중한 것을 제" 함
은, 가중스러운 우상의 제물 같은 것을 먹는 악습을 버리도록 함이다. 그들이 복음을
받을 때에 이와 같이 된다. "유다의 한 두목 같이 된"다 함은, 그들이 복음을 믿어
유다의 어떤 높은 지도자처럼 하나님의 총애를 받을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부스
사람 같이 된"다 함은 그들이 복음을 믿어 하나님 백성 가운데 참여하기를 옛날에 다
윗의 정복을 당한 여부스 사람들이 이스라엘 나라에 귀화한 것 같이 될 것을 예언한다
(삼하 24:16; 대상 21:15).
슥 9:8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 이 귀절
은, 이스라엘의 적국들은 멸망을 당해도 이스라엘 나라만은 그 때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안전할 것을 예언한다. 여기 이른바 "내 집"이라는 것은, 하나님 백성 곧, 이스
라엘 나라를 의미한다.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고 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억울함(열국으로 말미암아 받은 억울함)을 친히 보셨기 때문에
이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겠다는 뜻이다.
이 귀절은, 실제로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하던 때에 유대 나라만은 그 침략에 걸리지
않은 것으로 성취를 본 것이다. 요세보 사기에 말하기를, "알렉산더 대왕이 예루살렘
부근에 침입할 때에, 대제사장은 예복을 입고 많은 제사장 앞에서 알렉산더를 표시 하
는 예언을 왕에게 들려주므로 왕은 감동되어 예루살렘을 침해하지 않고 유대인에게 특
전을 주었다"고 하니, 이 귀절은 예언은 알렉산더 대왕의 한 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
이 분명하다(W.C. Erdman).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 여기 와서는 선지자가 신약 시대를 성립시키는 메시야의 내림을
예언한다.
여기 이른바 "시온의 딸"은 딸 같은 시온 곧, 약소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
다. "예루살렘의 딸"이라는 말도 역시 같은 것이다. "네 왕"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
를 가리킨다. "그는 공의로우며". 이것은 메시야께서 그 백성을 원수들의 무리한 침
략 하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필경 공의를 발동해서 구원하여 주심을 의미 한다. 이
공의는 실제에 있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히우는 데까지 낮추사 그 백성의 죄 값을
담당하시므로 성립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라는 말씀이
따른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왕이시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겸
손한데 떨어지므로 그 백성을 구원하신 겸손의 왕이시다. "나귀 새끼" 를 타신 것은
그의 겸비의 극치를 의미하는 참된 왕의 덕을 상징한다. 마 12:17-21 참조.
슥 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
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
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 이 말씀은, 메시야께서 초림하신 때부터 이루어지기 시작
한 것인데 그것이 완성되기는 대종말 때 곧, 그리스도 재림시에 이르러서야 될 일이다
. 사 2:4, 9:4-6; 시 115:9 참조.
그 뿐 아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왕국은 폭력으로 성립될 것이 아니고 다만 고
요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 갈 것을 보여주며, 또한 그 나라는 어떤 한 민족에 국
한된 것이 아니고, 세계적이고, 또 무궁할 것을 보여준다.
슥 9:11
또 너로 말할 찐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없는 구덩이
에서 놓았나니 - "너"라는 말은 유대 백성을 가리킨다. 위 절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
계에 전파될 것을 결론 하였는데 여기서부터는 유대 나라가 앞으로 당할 일에 대하여
특별히 말하고 있다.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계약하신 사실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 이 언약은 장차 올 신약시대의
새 언약의 예표라고도 할 수 있으나 유대 민족에게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하
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기억하시고 유대 민족을 돌아보시며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말하기를, 내가 너희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
았나니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때에도 아직 바벧론에 남아 있는 유대인 포로
들을 해방시키실 것을 예언한다. 물 없는 구덩이는 유대인에게 대하여 소망 없는 바벧
론을 비유한다. 이 말씀은, 아직소수로 돌아와 있는 유대인들에게 위로와 힘을 준다.
슥 9;12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 찌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
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 소망을 품은 이라는 말은 바벧론에서 유대로 돌아
올 소망을 품었다는 뜻이다. 보장은, 요새를 의미하는 것인데 실상은 하나님을 비유하
는 것이다. 그 때에 유대는 말할 수없이 빈약한 사정하에 있었으나. 그곳을 보장이라
고 하는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신 까닭이겠다.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는
것은, 앞으로 유대인들에게 주실 축복이 풍부할 것을 의미한 것 뿐이다.
슥 9:13
내가 유다로 당긴 활을 삼고 에브라임으로 먹인 살을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하며 너로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 많은 주석가
들은 이 귀절부터 유대 나라가 유다 마카비의 지도하에서 헬라의 실루시대의 왕조를
승리할 일에 대한 예언이라고 한다. 여기 '유다로 당긴 활을 삼고 에브라임으로 먹인
살을 삼았으니 이것은 전혀 그 전쟁의 힘이 여호와께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다
윗에게 힘을 주시어 골리앗을 이기게 한 것과 같이 그가 미약한 자들에게 힘을 주시어
승전케 하시는 일은 역사상에 종종 나타났다. 한가지 실례를 들면, 그가 기드온의 삼
백명을 통하여 미디아의 큰 군대를 이긴 것과 같은 것이다.
슥 9:14
여호와께서 그 위에 나타나서 그 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리시며 남방 회리바람을 타고 행하실 것이다 - 이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위하여 친히 그 권능으로써 전재하여주실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다. 하나님의 위엄을
묘사하기 위하여 여기서 그의 동작이 번개, 회리바람 같은 현상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나팔을 분'다고한 것은 그 원수들을 두렵게 한 것이다. 어쨌든 이 표현은 대종말에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원수를 남김 없이 정복 하실 위세를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행
동은 부분적으로 나타난 것이든지 전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든지 그 성질과 이법은 동일
하다.
슥 9:15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멧돌을 밟을 것
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
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다 - 윗말에 계속하여 원수들에게 대
한 유대인의 승리를 진술함. '원수를 삼킨'다 함은 이긴다는 뜻, '물맷돌을 밟'는 것
은 원수들의 사격앞에서 두려움 없이 전격하여 용이하게 승리를 걷울 것을 가리킨다.
'피를 마심'은 승리를 비유, '즐거이 부른다'는 모든 승리 표시의 행동이 방종스러운
것이 아니고 조심스러이 하나님 앞에서 가져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백성들이
이 땅 위에서 이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의 주시는 승리를 걷우는 일이 많지는 않다. 그
이유는 영적승리가 유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표본으로서 어떤 때에 세상일에
있어서도 승리를 걷우는 일이 있다. 그건, 무척 경건 하게 싸워 나가는 중에 하나님의
축복으로 되어지는 일인고로 그 승리에 대한 그의 희열도 경건되이 하나님 앞에 있다
는 의식으로 행하여진다.
슥 9:16
이 날에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떼같이 구원하시리니 그
들이 면류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양떼
같이 구원하심은 자력으로 자기를 방위할 수 없는 양과 같은 자들을 오직 그의 능력으
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한다. 그들이 전적으로 그들의 무능을 깨닫고
하나님을 목자와 같이 볼 때 하나님이 그 능력으로 그들을 돌보신다. 그들은 왕의 면
류관에 보석이 빛남과 같이 하나님의 왕권을 빛낸다. 곧, 하나님은 다스리고 저들은
다스림을 받는 관계가 드러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세계에 언제나 나타나
는 현상이다.
슥 9:17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소년은 곡식으로 강건하며 처녀는
새 포도주로 그러하리로다 - 이는 윗절에 대한 결론이다. 은혜를 받는 이스라엘의 아
름다움에 대해 말한다. 그들이 저렇게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결과로 곡시과 새 포도주
로 풍성하였다. 구약에서는 신령한 은혜를 이런 물질적 부요로써 비유하기도한다.
슥 10:1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
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 '봄비 때에'는 실상 '늦은 비의 시절'을 의미하
니 팔레스틴에는 추수하기 전에 결실케하기 위해 오는 비다.'번개를 내는 하나님'이라
는 것은 비가 내릴 준비로 일어나는 번개를 하나님이 만들어주신다는 뜻이다. 성경은
자연 현상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립되는 것임을 가르친다. '비'는 하나님이 주시는
자연게의 축복을 상징하지만 영적 은혜도 비유한다. 영적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
음에 주시는 성령의 감화를 이름이다. 이 귀절은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할 것을 강조한
다. 유리에게 축복하실 이는 하나님밖에 없으니 그에게 부르짖으라는 것이다.
슥 10:2
대저 데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백성이 양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
니 - '데라빔'은 집안에 보관하는 유상인데 점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다. 유대인은
바벧론에 가기 전에 이런 미신 때문에 벌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바벧론에 포로
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이런 미신을 숭상한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제 돌아온
그들더러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을 모른바 아닌데 미신
나으로 떨어진 것은 큰 죄이다. 신자들 중에 누구나 행복의 길을 하나님 말씀에서 찾지
안고 다른데눈을 팔며 생명의 길이 또 있는줄 아는 자는 결국 길 잃은 양 같이 유리하
게 되며 필경은 망한다.
슥 10:3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수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
리 곧 유다 족속을 권고하여 그들로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 하나님은 유다의 거
짓된 지도자들을 벌하심에 대하여 말함. 그들의 '목자들' 곧 지도자들을 수염소라고
했으니 '수염소'는 이스라엘을 학대한 관리를 비유한다. 저악한 지도자는 이스라엘 백
성을 천대하며 상해하기를 나귀나 소를 때려 몰듯 하였으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취급하실 때에 전쟁의 준마같이 하시겠다고 한다. 그가 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을 승
리케하여 왕이 타고 승전한 좋은 말을 대우하듯 하시겠다는 것이다. 여기 유다의 족속
전쟁의 준마에 비유한 것은 마카비시대에 유대인의 전승을 예언한 것인 듯하다.벧하우
젠은 우리와 신학 처지가 다르면서도 역시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스가랴의 이 예언은
그 이상에까지 나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 사업이 유대인에게서 나오서 온 세상
을 정복할 것을 가리켰을 것이다.
슥 10:4
모퉁이 돌이 그에게로서, 말뚝이 그에게로서, 씨우는 활이 그에게로서, 권세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로서 나와서 - 이것은 앞절 말씀의 확장이다. 곧, 유대에서 구
속 운동이 나와서 하나님의 집(천국운동)을 견고히 할 것을 가리킨다. '그에게로서'라
는 것은 '유다에서'라는 뜻이다. '모퉁이 돌'은 건물을 든든히 서게 하는 것이며 그것
은 건물의 이 부분과 저부분을 결부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선지자는 장래 신약 시대의
천국 운동을 집 짓는데 비유하여 말했다. 장차 유다에서 나올 이 운동이 어떻게 견고
히 될 것이 여러 표현으로 나타났다. 이 표현은 물론 하나님의 견실한 사역의 여러가
지 방면을 보연준다. '싸우는 활'이나 '권세잡은 자'는 또 다른 성격들을 띈 비유적
언사이다. 하나님은 싸우시는 듯이 사역하시며 권세 잡은 사역도 하신다. 이와 같은
말씀은, 그리스도의 교회 설립의 견고할 것까지 포함하는 예언이다. 퓨세이는 위의 네
가지 표현들이 그리스도를 비유한다고 하였다. 어드만도 역시 그렇께 말한다. 곧 '모
퉁이 돌'로 말하면,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소망이 모퉁이 돌도 되시며 신약 교회의 모
퉁이 돌도 된다. '말뚝은 히브리인의 풍속대로 집에 손님이 들어오는 곳에 박아서 그
위에 의복이나 귀중품을 걸어두어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같이 메시야는 이스라
엘 집의 영광을 나타내실 자로 오시리라는 것이다. 이사야도 이와 같은 말로 그리스
도의 예표인 엘리야 김에에 대하여 말씀한 것이다. '활'은 메시야가 모든 원수를 이길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권세잡은 자'가 메시야인 사실은 마28:18이 말씀하고 있다고
한다.
슥 10:5
싸울 때에 용사 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대적을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함께
한 즉 그들이 싸워 말 탄 자들로 부끄러워 하게 하리라 - 유대인은 약하여도 병력이
강한 원수를 여지없이 패배시킬 것이 예언되었다. 그들이 승리하게 됨은, 여호아가 그
들중에 계신 까닭이다. 미7:10참조
슥 10:6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찌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
김으로 그들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내게 내어 버리움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 윗절에서 유다 족속이 유력해질 것을
말씀하였는데, 본절은 좀더 자세히 진술한다. 곧 저렇게 유다 족속이 강력하게 됨에
따라서 요셉도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될 거라고 한다. '나는 그들의 하나
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여호와'는 영원 자존자를 의미하나니, 그 백성
과 게약하신 것을 지킴에 있어서 변동이 없음을 내포하는 이름이다. 이런 하나님은 유
당와 요셉의 기도를 들으신다. 곧 그는 게약하신대로 저들을 자기백성으로 생각하시메
있어서 변동이 없으니만큼, 그 기도를 들으신다.
슥 10:7
에브라임이 용사 같아서 포도주를 마심 같이 마음이 즐거울 것이요 그 자손은 보
고 기뻐하며 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에 즐거워하리라 - 이것은 북쪽 이스라엘도 장차 우
다 족속이 승리하는 전쟁에 협력하여 개선가를 부르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 자손은
보고 기뻐하리라고한 것은 자아 북국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직접 이와 같은 승리를 목
도하고 기뻐하리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상반절의 의미를 해설한 것 뿐이다.
슥 10:8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 불어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 - '휘파람 불어 모음'은 하나님은 최소의 운동으
로도 그의 백성을 사방에서 모으실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님인 고로
큰 운동을 일으키지 않고 아주 경미한 행위로서도 큰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들을..모
은다'함은 귿대 아직 바벧론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을 유대 땅에 돌아오도록 하시겠다
는 말씀인 듯하다. 그가 그렇게 하실 이유는 그가 그들을 구속하기 시작하였기 때문
이다.
슥 10:9
내가 그들을 열방에 뿌리려니와 그들이 원방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의 자녀와 함
께 다 생존하여 돌아올찌라 - '열방에 뿌림'은 열방중에 번성하게 한다는 뜻이다. 곧
유대인들이 이방 각국에 흩어져 있어도 그 수효가 심은 종자처럼 많아지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역사상에 성취된 바이다. 유대인은 세계 각국에 분산되어 있으면서도
많이 번식하고 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던 그 때에도 그들이 가는 나라마다 유대인
들이 있었고 그들이 회당에서 전도할 때에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본
절의 말씀은 그를 예언한 듯하다.
슥 10:10
내가 그들을 에굽 땅에서 이끌어 돌아오며 그들을 앗수르에서부터 모으며 길르앗
땅과 레바논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리니 그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 - 이는 비유의 말씀
으로 하나님 백성의 원수였던 애굽이나 앗수르 같은 큰 나라들도 하나님께서 그의 백
성을 돌려 데려가실 때에 막지 못하였다. 그와 같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그의
백성을 세상 죄악 세력에서 구출 하실 때에 막을 자가 없다. 길르앗 땅과 레바논은 이
스라엘이 살던 고토였다. 이 지명은 문자적보다 비유적으로 해석되야 하니 이는 이스
라엘이 고토로 돌아갈 때에 거할 곳이 부족할 정도로 많이 돌아감 같이, 신약 시대에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으리라는 뜻이다.
슥 10:11
내가 그들로 고해를 지나게 하며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
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흘이 없어지리라 - '내가 그들로 고해를 지나
시며'라는 말은 '그가 고해를 지나시며'라고 번역해야 된다. 몇가지 표현은 하나님께
서 그 백성을 구출 하실 때에 바다들이 문제될 것 없으며 나일강이 문제될 것도 없다
는 것을 의미한다. 그 뿐 아니라 앗수르의 교만이나 애굽의 왕권이 다시 하나님 백성
의 구출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실상 신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복음으
로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능력의 지대하심을 비유한다.
슥 10:12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케 하리니 그가 내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
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 신약 시대의 신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강해
진다. 사람은 약하나 믿음으로 강하여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들이 내 이
름을 받들어 왕래하리라는 신자들이 주의 공로를 의지하기 때문에 주님과 연합하고 또
살게 됨을 의미 한다.
슥 11:1,2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너 잣나무여 곡할찌어다 백
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가 훼멸되었도다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곡할찌어다 무성
한 산림이 엎드러졌도다 - 마르티(K. Marti)는 이 귀절에 있는 나무들의 불타는 것을
가리켜 이방나라의 집권자들의 멸망을 상징한다고 하였다(Der Jammer der heidnische
-n Weltmacht uder ihren Fall; die heidnische Weltmacht erscheint hier unter dem
Bilde des Libanonwaldes wie Jes 10:34 und der Waldung Basans,die Cedern des Lib
-anons und die Eichen Basans,reprasentieren die heidnischen Herrscher.- Hand-Co
-mmentar, IV. p. 436-437). 그러나 델리취는 이 귀절들이 유대의 멸망을 비유한다고
하였으니 정당한 해석이다. 이것은 특별히 유대 나라가 로마로 말미암아 멸망 당할
것을 예언한다.
슥 11:3
목자의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 그 영화로운 것이 훼멸되었음이로다 어린 사자의 부
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황무하였음이로다 - 목자들이 곡하는 것은,
바산의 자랑할만한 목장이 불 붙은 까닭이다. 여기서 목장은 나라를, "목자"는 임금
을 상징한다. "요단의 자랑"이라는 것은 요단 골짜기에 왕성한 초목을 의미 하는데,
이스라엘 열 지파가 포로되어 간 뒤에는 거기에 사자들이 있었다고 한다(렘 49:19,50
:44). 그러면 이와 같이 울창한 수풀들이 불 붙게 되어 사자들도 부르짖게 됨은, 장
차 로마로 말미암아 유대에 무서운 침략이 있을 것을 보여준다.
슥 11:4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떼를 먹이라 - 여기서 선지자가 "잡힐
양떼" 곧, 유대 민족(장차 로마로 말미암아 멸망 당할 민족)을 먹이라는 사명을 받은
것은, 실제에 있어서 메시야의 할 일(이스라엘에게 대한)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가
여기서 양떼를 먹이는 선한 목자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이 실제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으로서만 하실 일이었으니(7, 10, 12-14), 그 일은 메시
야의 일이다.
슥 11:5
산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
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 도다 - 이
귀절은 유대인들이 얼마나 열국 앞에서 또는 자기 나라 지도자들 앞에서 천대와 멸시
를 당할 것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은 비참한 일이 있을 시대는 특별히 로마가 유대를
정복할 때를 의미하였을 것이다. 여기 "산 자들"이라 함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팔리
워 갔을 때에 그들을 매수한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판 자들"은 유대의 지도자들
을 가리킨 듯하니, 저들은 유대 민족이 멸망한 뒤에도 이기주의의 근성을 버리지 않고
, 그 멸망을 기회로 하여 영리를 도모하는 자들이었다. "그 목자들"이라는 말은 이와
같은 부패한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슥 11:6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을
각각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찌라도 내가 그 손에서 건
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 - "이 땅 거민"은 유대 민족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므로 각기 이웃의 손에서 학대를 받기도 하고, 다른 나
라 임금의 손에서도 압제를 받게 되어진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
쌍히 여기지 않으시는 증표이다.
슥 11:7
내가 이 잡힐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쌔 - 윗절에서 말한 것과 같
이 이스라엘 백성은 잡혀 죽을 양떼처럼 비참한 처지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야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목양하여 잘 되게 하려고 막대기 둘을 취하여 그들의 목
자로서 활동하셨다. 이 두 막대기 중 "은총"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
를 은혜의 관계라고 가르치는 것을 대표하고, 다른 막대기 곧, "연락"이라는 것은 유
대인과 유대인 사이에 형제적 연합을 배양하려는 사역을 상징한다.
슥 11:8
한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 하였고 그들
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 여기 이른바 "한달 동안에 내가 세 목자를 끊었"
다 함은, 얼마 오래지 않은 시간 동안에 메시야께서 이스라엘의 목자를 세 사람 이나
내버리셨다는 것이니, 이것은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 인도하시려는 동기에서 하신
일이다.
여기 하반절 초두에 "이는"이란 말이 히브리 원문에는 없다. 그리고, 여기서 목자
되신 이의 "마음이 그들을 싫어하"셨다는 것은, 그가 위에 관설된 세 목자를 싫어하셨
다는 뜻이 아니고, 유대의 모든 백성을 싫어하셨다는 뜻이다(Calvin). 메시야께서 그
백성을 싫어하시게 되는 원인은, 물론 하반절이 말하는 것과 같이 그들이 하나님을 미
워하였기 때문이다.
세 목자에 대하여 해석이 여러 가지 있으니, 예롬(Jerome)은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
이라 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요시아왕의 세 아들이라 하였고, 또 다른 사람들은 마카
비의 삼 형제라 하였고, 씨릴(Cyril)은 유대의 제사장과 관원과 서기관이라 하였다.
그러나 칼빈(Calvin)은 여기 "세 목자"라는 것이 많은 수효의 목자를 의미한다고 하였
으니 그것이 적당한 해설이다.
슥 11:9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대로, 망할 자는 망할 대
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대로 두리라 하고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유대 백성
에 대하여 진노하사 내어 버리시는 태도를 보여준다. 랑게(Lange) 는 여기서 세 가지
비극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곧,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둔다 함은, 자연적 사망을 이
름이고, "망할 자는 망할대로" 둔다 함은, 외국의 침략으로 인하여 받는 전화를 이름
이고, "피차 살을 먹는대로 두리라" 함은, 유대인들 사이의 내란을 의미한다. 이 말
씀의 성취는 예루살렘 역사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슥 11:10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
려 하였음이라 -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잘랐다 함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대한 은
조를 중단함에 대한 상징적 행동이다. 그것은 물론 하반절이 설명하여 준다. 곧, 그
행동은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한다는 것이니, 여기 "모든 백성"이라는 것은 유대
인을 의미하지 않고 열국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 문구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열국더
러 부탁하기를 너희는 이스라엘을 해하지 말라고 함에 따라 그들은 그대로 순종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일종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제부터는 그 언약을
철회함에 따라 그들은 유대 나라를 해롭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슥 11:11
당일에 곧 폐하매 내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 이었던줄 안
지라 - 여기 "당일에"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바욤 하후이니 "그 날" 이라는 의미로
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취하신 국가적 심판의 시기를 가리킨다. 그 시기는 물론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날이다. "내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본장에 주요히 관설
된 잡힐 양떼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한 신자들을 이름이다. 그들은 유대인들
이 당한 국가적 심판이 여호와에게서 떨어진줄로 알았다. 그것이 그들의 신앙 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 줄 안지라"고 한 말씀이 이 뜻이다. 다시 말하면, 유대
나라가 망하게 됨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된 것이라는 뜻이다. 잡
힐 양떼와 같은 비애에 빠진 백성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자는 구원을 얻
는다.
슥 11: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
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 본절 초두에 "내가 그들에
게 이르되"라고 한 문구의 "그들"이라는 것은, 윗절에 말한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만
아니고 유대 민족 전체를 가리킨다. 메시야께서 저 불순종하는 유대인들더러 그의 목
자 사역의 노임(우리 번역에는 고가라 하였음)을 달라고 하신다. 이것은 물론 자기의
사역에 대한 유대인들의 평가를 알아 보고자 하시는 상징적인 요청인 것이다. "그렇
지 아니하거든 말라"고 한 말씀을 보면, 이 요청이 일반 사회에서 노임을 청구하는 관
념으로 된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 여기 "은 삼십"은 종 한 사람의 가격이다(출 21:32). 이것을 보면 메시야의 사랑
에 대한 유대인들의 낮은 평가를 볼 수 있다. 메시야의 대가를 종 한 사람의 대가와
같이 보는 것은, 너무나도 메시야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동이다. 이 예언은 그리스
도께서 은 삼십에 팔리신 사건으로 성취되었다.
슥 11: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 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 이 말씀을 보
면, 본장에 관설된 잡힐 양떼의 목자가 메시야인 것이 분명하다. 그 목자의 역할을
스가랴더러 하라고 하셨으나(4절), 실제에 있어서 목자 자신은 메시야, 곧, 여호와이
신 고로 여기 13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준가(대가)"
라고 하셨다. 12절 참조. 목자이신 여호와 곧, 메시야께서 그의 사역에 대한 유대인
들의 평가를 너무 낮은 것으로 보셨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토기장이 에게 던지라고 명
령하셨다. 이 명령은 그 평가를 잘못된 것으로 알아 업신여긴 뜻이다(Delitzsch).
마 27:9,10 참조.
슥 11:14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더욱 심각히 내어 버리리라
는 행동을 보여준다. "연락"이란 것은 유대인들끼리 서로연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호와께서 연락의 "막대기를 잘랐"다는 것은, 저희들의 서로 합하는 은혜를 걷우셨다
는 뜻이다. 이 예언과 같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뒤에 저들의 국
운은 날로 쇠하고 저들 사이에 불화와 충돌이 심각하여졌다(Delitzsch).
슥 11:15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우매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할찌니라 -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더러 미련한 목자의 역할을 해 보라는 의미에서 그 "기구들을 취"하
라고 하신다. 이것은, 위에 관설된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대립되는 거짓 목자들
이 어떤 자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다음 귀절에서 그 명세를 보여준다.
슥 11:16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찐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압제를 전적으로 받게 되어 필경 멸망하게 되었다.
우리 본문에 "한 목자"는 로마 정권을 가리켰을 것이다(Delitzsch). 그러나 칼빈은
여기 "한 목자"를 로마 정권에 국한시키지 않고 교회의 일군으로서 선한 목자의 책임
을 하지 않는 자로 생각하였다. 본절에 기록된 어리석은 목자의 몇 가지 악덕은 다음
과 같다. (1) 없어진 양을 기억도 하지 않으며, (2) 흩어진 자들을 찾아 오지 아니하
며, (3) 상한 자를 고치지 않으며, (4)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않으며, (5) 살찐 자의 고
기를 착취하며, (6) 잔인하게 양떼를 취급하여 그 발굽을 찢는 것이다. 선한 목자가
되려면, 위의 여섯 가지 악덕과 정반대되는 여섯 가지 덕을 행해여야 될 것이다. 이
여섯 가지를 간추려 다음 몇 가지로 말할 수 있으니 곧, 없어진 신자를 찾아 올것, 상
심한 신자들을 치료하여 줄것,강건한 신자들을 먹여서 끝까지 강건하도록 하여 줄것,
잔인하게 행하지 말고 언제나 선량하게 행할 것이다.
슥 11:17
화 있을찐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 여기 "못된 목자"는, 히브리 원문대로
로이 하엘릴이니 아무것도 아닌 가치 없는 목자라는 뜻이다. "칼이 그 팔에, 우편 눈
에 임하리니"라는 말은, 칼빈(Calvin)에 의하면, 벌이 그의 힘과 지각에 임한다는 뜻
이다. 하나님의 벌이 거짓 목자에게 임할 때에 그의 팔 곧, 영력이 쇠하여지고, 그의
우편 눈 곧, 그의 영적 지각이 어두워 진다. 주님의 양떼를 잘못 인도하는 지도자는
언제나 영력이 약하여지며 영안이 어두워지는 법이다.
슥 12:1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 여기 "경고"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
로 맛사이니 협박하는 예언(threatening Prophecy)을 가리킨다. 이것은 경성 하지 않
는 자를 깨우치기 위한 교훈이다.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
사대" - 사 43:15; 암 4:13 참조. 이렇게 하나님을 창조자로 칭호 하는 목적은, 그가
창조적 능력으로써 이 아래 관설된 위대한 일을 하실 자이심을 알리려는 것이다. "하
늘을 펴신"다 함은, 천공에 무수한 천체들을 유지하심을 이름이다. 하나님 께서 물질
계에 하신 일들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이 일이다. 오늘날 발달된 문명도 천체들의 세
계 곧, 우주를 지향하고 새로운 발달을 도모 하고 있다. 그 세계는 크고 오묘하다.
"땅에 터를 세우심"은 또 한 가지 그의 일의 장관이다. 땅은 어떻게 그 궤도 대로 운
전되도록 구조 되었는가?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초로 한 것이다. "사람 안에 심령
을 지으신 자"도 전능하신 하나님 밖에 없다. 심령은 위에서 마랗다 하늘이나 땅 보다
오히려 만들기 어렵다.
슥 12:2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 에게 흔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
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미치리라 - 열국은 예루살렘을 전취 하려고 왔으나
드디어 힘을 잃고 패망하게 될 터이다. 그것은 마치, 에루살렘이 저들에게 마취제 같
이 된 셈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성경에서 취하게 하는 음료로 비유된다(사 41:17).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통하여 열국에게 진노를 나타내실 것이다.
이 예언은, 신약 시대에 교회가 이방 세력의 박해를 받는 중에도 오히려 복음은 승
리할 것을 비유적으로 가리킨다(Lange). "국민"이라는 말은 민족들을 가리킨다.
슥 12:3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 여기 "모든국민"
은 열국의 민족들을 가리킨다. "무거운 돌이 되게" 함은, 무거운 돌을 쳐들어 보려는
자가 결국 그 자신이 상처를 당하고 말 것을 가리킨다. 열국은 예루살렘을 치려다가
도리어 자기들 편에서 손해를 보고 만다. 이 "돌"은 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단 2:45; 사 28:16; 슥 3:9; 눅 20:17; 마 21:44).
마르티(K. Marti)는, 여기 "무거운 돌"에 대한 말씀은, 헬라에서 예루살렘으로 수입
된 경기의 풍습에서 왔다고 한다. 곧, 청년들이 힘내기를 하면서 무거운 돌을 쳐들었
는데 그리 하다가 흔히 몸을 상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합당치 않다.
슥 12:4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자를 쳐서 미치
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아보고 모든 국민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 - 이 귀
절은, 하나님께서 유다의 적군들의 병력을 권능으로 꺾을 것을 예언한다. 놀라게 하
거나 눈이 멀게 하여 패전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왕하 6:18; 삿 7:22; 삼상
14:20). 그리고 그가 "유다 족속은......도랑보" 신다고 하였으니, 그런 일은 역사상
에 있다(삼상 7:5-11; 느 1:11; 사 37:36).
이 귀절에 기록된 세 가지 재앙("놀라게"함, "미치게"함, "눈 멀게"함) 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내릴 것으로서, 모세가 일찌기 말한 바도 있다(신 28:28). 그렇다
!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언제나 천벌로 망한다. 불란서 왕이 기독교를 반대하며
개혁자 안드류 리베트(Andrew Rivet)를 위협할 때에 리베트는 왕에게 담대히 말하기를
, "하나님의 교회는 많은 쇠망치를 부러친 쇠모루입니다"라고 하였다.
슥 12:5
유다의 두목들이 심중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거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찌라 - 곧, 유다의 지도자들에게 예루살렘 거민들이 힘이 된
다는 뜻이다. 그들(예루살렘 거민들)이 저 지도자들에게 힘이 되는 원인은, 그들(예
루살렘 거민들)이 하나님 곧, 만군의 여호와의 택한 백성이므로 그의 보호를 받기 때
문이다(10:12, 3:2, 1:17, 2:11). 시 87:2 참조.
이렇게 단체의 일이 잘 될 때에는, 그 단체의 성원들이 서로 높인다. 곧, 남이 나
에게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 힘의 근원은 하나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
슥 12:6
그 날에 내가 유다 두목들로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국민을 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리라 - 이것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곧, 복음 전도자들이
모든 불신앙과 죄악의 적들을 이기고 교회도 왕성케 할 것에 대한 비유이다(Pusey).
교회의 원수들은 언제든지 교회를 없이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교회(예루살렘 사
람으로 비유되었음)는 늘 그 본곳(제 자리에 그대로)에 있다.
슥 12:7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유다 지방을 예루살렘보다 "먼저 구
원"함은, 구원이 하나님께로서 온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유다 지방은 예루살
렘과 달라서 방위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원이 거기 먼저 임하였다면, 그것
은, 전연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집"(곧, 이스라엘 왕족이나 예
루살렘 거민)과 꼭 마찬가지로 유다 지방 백성도 사랑 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오히려
방위가 없는 유다 지방 사람들을 먼저 구원 하신다(렘 9:24; 고전 1:31; 고후 10:17;
갈 3:28; 눅 10:20; 약 2:5).
슥 12:8
그 날에 여호와가 에루살렘 거민을 보호 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 이것
은 신약 시대에 신자들이 어떻게 큰 은혜 받을 것을 보여 준다. 여기 "약한 자" 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닉솰이니 "넘어진 자"(Stumble)를 의미 한다. 넘어진 자들이 회
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올 때에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된다. "다윗의 족속"이라는 문구
는, 베트 다위드이니 다윗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다윗의 왕퉁을 의미하나니, 그
영광이 하나님 같이 나타나기는 그리스도(다윗의 후손이심)로 말미암은 구속 사업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오실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말씀이다. 더욱이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라는 명칭은 실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니 만큼, 위의 예언
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염두에 둔 것임이 분명하다. 칼빈(Calvin)도 그런 의미로
해석하였다(Minor Prophets, Vol. V. p. 357).
슥 12:9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 사람은 아무리 힘
써도 성공 못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엇을 목표 하시고 힘쓰시는 것은
그대로 다 이루신다. 그는 교회의 원수들을 멸하실 것을 힘쓰신다고 하셨으니, 교회
의 원수들은 그 앞길이 캄캄할 뿐이다.
슥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 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 이것은,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
교 끝에 일어난 회개 운동으로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행 2:37-41). 거기 말하기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 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이라고 하였다.
신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고난을 생각하고 애통하는 것은, 그들이 그를 십자가
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할 이유는, 그들의
죄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이다. 혹 우리가 잘못 생각 하기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니 우리는, 기뻐할 뿐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생
각이다. 우리는,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생각 밑에서 죄를 아프게 여겨야
한다. 자기 죄에 대하여 통분히 여길 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없
다.
자기의 죄를 슬퍼할줄 모르는 자는 구원 소망이 전연 없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
다"라고 하였다(약 4:9). 우리 본문에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
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라고 했으니, 이는 진정한 슬픔을 의미하
며, 깊은 슬픔을 의미한다. 자기 죄가 메시야를 죽인 일에 대하여 이런 진정한 슬픔
을 가진 자들은 진정한 영적 희열을 가진다.
슥 12: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자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은, 요시야 왕이 거기서 전사한 때에 유대인
들이 슬퍼하였음을 의미한다(대하 35:22). 유대인들이 추앙하던 왕의 죽음은 그들의
큰 슬픔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메시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은 신자들의 슬퍼
할 일이다. 이것은 단지 육체적 슬픔이 아니고 회개의 슬픔이니 신령한 것이다.
모든 참된 신자들은 다 눈물을 소유한다. 눈물 없이는 십자가를 깨닫지 못한다.
눈물은 부드러운 마음의 표현이다. 부드럽지 않은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으
니 어찌 십자가를 깨달으랴? 그러므로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눈물
의 골짜기를 지남이 없이 하나님의 품에 이르는 길은 없다. 실망, 낙담, 응답되지 않
는 기도, 이것이 있고서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실망, 낙
담할만한 때에 마음이 부드러워져야 한다.
슥 12:12-14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
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모든 남은 족속도 각
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다윗의 족속"은 유대의 왕족이고, "나단의
족속"도 그러하다(나단은 다윗의 아들임). 그리고 "레위의 족속"은 제사장 족이고,
"시므이의 족속"도 그러하다(시므이는 레위의 증손임-민 3:18). 스가랴가 여기서 왕
족과 제사장족을 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케 한다. 여기 "따로"라는 말이 열 한
번이나 나온다. 이것은 회개의 애통을 진실하게 또는 착실히 가져야 할 것을 가리킨
다.
슥 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은, 비유적 표현이니,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을 믿게 하
시는 성령의 은혜를 가리킨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자마
다 사죄를 받나니, 그 역사는 "씻는 샘"과 같다. 요 7:38, 4:14 참조.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전국을 대표한다. "열리리라
"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이호예 니프다라고 하는데, 계속하여 열려 있음을 가리킨
다(Pusey).
슥 13: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
여기 우상이나 거짓 선지자는 포로 시대 이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이후에도 있
었다(느 6:10). 그러나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 됨에 따라서 모든
우상과 거짓 선지자는 유대 땅에서 근절 되게 되었다. 특별히 바리새 주의는 일종의
거짓 선지자의 운동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파쇄시켰다.
슥 13:3
사람이 오히려 예언 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 - 여기 이른바 "칼로 찌르리라"는 말씀은, 구약 시대에 있어서 거짓 예언하
는 자들을 그 근친이라도 아낌 없이 죽인 사실을 신약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듯이
말한다. 신 13:6-9 참조. 그러나 이것은 그와 같은 정신을 신약 시대에 옮겨 놓는
표현이고 문자 그대로 칼로 찌름을 가리킨 것은 아니다.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말씀)가 더욱 밝히 계시 되었기 때문에, 거짓
예언하는 자를 그의 근친이라도 미워하게끔 되리라는 것이 본절의 의미이다.
슥 13:4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
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 신약 시대에는 선지자가 불필요하다. 그 이유는, 그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만큼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 되기 때문이
다. 렘 31:33, 34; 사 54:13 참조. 선지자의 운동은 세례 요한으로 끝났다(마11:13
; 눅 16:16). 그리스도는 율법과 선지의 완성 이다(마 5:17).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누가 예언한다면, 우선 그 자신이 그 이상(계시)을 부끄러워 해야 마땅하다. 우리 본
문에 "그 이상을 부끄러워할 것이며"라는 말씀이 이 뜻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가 엘리야와 같이 털옷을 입고 선지자인체 할 자는 없을 것이다.
슥 13:5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
라 할 것이요 - 사람마다 자기는 선지자가 아니라고 하기 위하여 자기는 농부 라고 하
며 또한 어려서부터 무식한 일군(사람의 종)이라고 자처 한다는 말씀이다. 신약 시대
에는 사람마다 그리스도에게 직접 속하여 하나님 말씀을 충분히 알 수 있게 되었으니
만큼, 그들이 선지자가 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그것을 기피하는 심리를
가진다.
슥 13:6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 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이교도들이 그 거짓된 신
에게 예배할 때에 칼로 자신을 찌른 자리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교와 관계 있던 자들
이 신약 시대에 회개하고 복음으로 돌아온 뒤에는, 그들이 그 과거의 미신을 부끄러워
하는 의미에서 그것을 자랑하지 않고, 솔직한 고백을 피하면서 그것은 자기들의 친구
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고 한다.
슥 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 여기 "내 짝된 자"라
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아미디라고 하는데 "나의 가장 가까운 자"를 의미한다. 그러
므로 이분은 단지 사람만이 아니고, 신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일체이신 분이다(Keil a
-nd Delitzsch). 그는 메시야이시다.
이 귀절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잡히워 십자가에 못 박히우실 것을 가리킨다. 여
기 "작은 자들"이라는 히브리 원어는, 초아림이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미천한 자들
을 이름이다. 이들은 실로 기독 신자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손을 들어 복 주
신다. 마 26:31,32 참조.
슥 13: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우심에 따라서 유대인들이 환난 중에서 많이
멸망 당하고 그들 중 기독 신자들은 영생에 참여하게 됨을 가리킨다. 그러나 기독 신
자들도 환난 중에서 시련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다음 귀절이 설명한다
.
슥 13:9
본절은 윗절에 언급된 남은 백성의 자격에 대하여 말하였으니 곧, (1) 신앙상 연단
을 받음. (2)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심. (3)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고 하
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슥 14:1,2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
리라 - 여기 제 1절에 "네 재물에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고 한 말씀은, 유
대 나라를 침략한 적군이 유대의 재물을 그 나라 안에서(유대 안에서) 나누게 될 것을
의미한다.
여기 이 두 귀절 가운데 있는 말씀은, "여호와의 날"에 될 일이니 그것은 두 말 할
것 없이 주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유대 민족의 당할 환난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로마의 유대 침략을 예언한 것이라 함은 이연치 않다.
슥 14:3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
라 - 이 말씀은 위의 두 귀절(1, 2절) 이 말한 것과 같이, 유대를 침략하는 적기독의
나라를 여호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멸하시기 위하여 강림하심을 가리킨다. 여호
와께서는 그의 합의하신 때에 그의 백성을 위하여 전쟁하신 일은 과거 에도 많이 있었
다(수 10:14, 42, 23:4; 삿 4:15; 삼상 7:10; 대하 20:15). 대종말 에도 주님께서 오
시어서 적기독 나라들로 더불어 싸워 이길 것은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다(계16:12-16,
17:14,19:11-21, 20:7-10).
슥 14:4,5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
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
고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찌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 하되 유다 왕 웃
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
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 - 여기 이른바 감람산이 동서로 갈라져 큰
골짜기가 생긴다 함은, 몇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이것은 비유니 곧, 유대를 침략하
던 적군들이 산위에 진을 치고 있다가 사방으로 도망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둘째, 이
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에 감람산에서 하실터인데 그 때부터 사도들이 사방으
로 헤어져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곧, 산이 갈라지므로 길이 나
서 가게 되듯이 저들이 각처에 가게 될 것을 비유한다는 것이다. 세째, 칼빈(Calvin)
은 이 말씀을 사 2:2과 미 4:1에 비추어 해석 하였다. 곧, 하나님의 성전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높이 솟으리라는 말씀에 기준하여 여기 이 말씀을 해석하였으니, 감람산
이 갈라진 것은, 그 지대가 무너짐에 따라 낮아지고 예루살렘은 높아지는 결과를 가져
오므로 여호와의 성전 산만이 높이 솟아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유대에서 난 하나님
의 율법이 온 세계에 전파될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네째, 그러나 이 모든 해석 보
다도 차라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본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감람산에 오실 것이며, 그가 강림하실 때에는 여러 가지 두려운 일들이 있을 것 만은
사실이니 지진도 일어날 것이다.
여기 "아셀"이라는 말은 감람산 한 끝에 있었던 촌인 듯하다(Pusey). 그 때에 사람
들이 "도망" 한다 함은, 주님의 재림과 함께 있을 지리상 변동에 따른 일시적 재난을
피함인지 확실하지 않다.
"여호와께서...모든 거룩한 자"와 함께 오신다 함은,그가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을
가리킨다. 이는 주님의 재림을 이름이다.
슥 14:6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자들이 떠날 것이라 - 이것은 마 24:29의 말씀에 해
당된다. 혹은 이 말씀이 환난으로 캄캄해진 사회를 비유하는 의미도 가졌을 것이다.
슥 14:7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라는 말씀은 마 24:36에 해당되나니 곧, 주님
의 재림 날자는 하나님께서만 홀로 아신다는 것이다.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함은
황혼 빛 곧, 희미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이 불안정의 시기 곧, 환난의 때를
상징한다. 이와 같은 시기가 있다가 그 끝에 구원이 임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본
문은 말하기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라고 한다(Calvin). 그러므로 신자
들은 어려울 때에 낙심할 필요는 없다. 어두워지려 할 때에 바로 빛이 오리라는 하나
님의 미쁘신 약속이 있지 않은가!
슥 14:8
그 날에 생수가 에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 여기 "생수"라는 말은 성령을 상징 한다. 물은 깨끗
게 함과 해갈시켜 주는 두 가지 일을 함과 같이 성령도 그리 하신다(Calvin). 이렇게
성령으로 사람들을 살리는 역사에 대하여는, 구약이 많이 예언하고 있다 (사 44:3; 겔
36:25). "동해"는 바사해를 가리키고, "서해"는 지중해를 가리키나니, 생수가 이렇게
멀리 또는 대량으로 흐르리라 함은, 신약 시대와 및 주님의 재림시에 성령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할 것을 가리킨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흐르리라 함은, 끊임 없이 흐름
을 이름이다.
슥 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 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왕권을 배척한 것은, 그들
이 사람을 왕으로 세우던 그 때부터이다(삼상 8:7). 그 후에 그 백성이 하나님을 왕
으로 의지하지 않고, 어떤 때에는 수리아에게, 어떤 때에는 애굽에게, 어떤 때에는 앗
수로에게 의뢰하였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왕권을 무시한 행동 이었다. 따라서 그
들은 필경 바벧론에 잡혀 갔고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당하였으니 하나님의 왕적 보호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벧론에서 건져 내셨고 다시 그들의 왕되신 관계를 회복
하셨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종말에 하나님께서 신 이스라엘(모든 택한 백성) 의 왕
으로 임하실 것에 대한 예표이다. 우리 본문의 말씀은 이것을 내다본다.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함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이 세상의 대종말에
하나님께서만 왕으로 나타나실 터인데,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오직 참된것 하나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현세에는 하나님을 잘못 깨달은 미신도 많고, 그릇된 종파들
도 많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 이후에는, 사람들이 모두 다 하나님을 참되이 알기 때
문에 그를 부르는 이름이 하나 뿐이다.
슥 14:10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미칠 것이며 예루살렘
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 부터 첫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 여기 "아라바"는 "평지"를 의미
한다. 이 귀절의 주요한 뜻은, (1) 예루살렘이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드러나게 되리라
는 것, (2) 그것(예루살렘)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되리라는 것이다(Calvin).
"게바"는 베냐민 지경의 북쪽에 있었고, "림몬"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었다. 그러면
게바에서 림몬까지가 "아라바" 곧, 평지 같이 됨은, 성전이 있는 지점을 높이 드러나
게 하려는 것이다.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라는 말씀은, 이사야가 말한 "여호와의 전
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이다(사 2:2). 이것
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여호와의 종교가 열국에 주도권을 가지게 됨을 비유한다.
"그 본처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이 바벧론에 사로 잡혀 갈 때에 훼파 되었던
성전이 이제 스가랴 시대에 재건되어 원상 회복될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
나 여기서 선지자는 그것으로써, 주님의 재림시에 신도 혹은 천국이 완성될 것을 가리
킨다.
"베냐민 문"은 예루살렘 북쪽에 있었고, "첫문"은 그 서북편 구석에 있었고, "모퉁
이 문"은 그 동북편 구석에 있었다. 그리고 "하나넬 망대"는 예루살렘 북편에 있었고
, "왕의 포도주 짜는 곳"은 그 남편에 있었다(W.C. Erdman).
선지자가 위의 모든 지점의 이름들을 들어서 예루살렘의 한계를 가리킨 목적은, 앞
으로 재건될 예루살렘의 영광이 본래의 그것과 같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겸하여 이
묘사는, 주님의 재림시에 나타날 천국의 영광을 예표하는 것이다.
슥 14:11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 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
로다 - 이것은, 주님이 재림 하신 후에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세계의 형편을 예언한 것
이다. 계 22:3 참조.
슥 14:12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요.- 이것은 하
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던 원수들의 비참한 정경을 보여준다. 곧, 그들은 신벌을 받아
서 살이 썩는 전염병에 걸리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를 핍박하던
자들 중 로마의 황제 맥시미안(Maximian)이 신벌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한 예
이다. 세상 끝날에 나타날 핍박자들은 더욱 그런 재앙을 당하게 될 것이 예상된다(계
16:10, 11).
슥 14:13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로 크게 요란케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치려던 원수들이 서로끼리 원수되어 공격하
므로 자멸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원수들 중에 종종 있었다(삿 7
:22; 삼상 14:20; 대하 20:23).
슥 14:14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이 때에 사면에 있는 열국의 보화 곧 금 은과 의복
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을 치러 온 적기독의 군대를 전멸시키는
전쟁에 있어서, 예루살렘 사람들만 아니고 유다 지방의 거민들도 참전할 것이라고 한
다. 적기독의 군대는 그 소유했던 보화와 물품들을 도리어 유대인들에게 빼앗긴다.
이것을 보면, 적기독 군대는 금이나 은이나 물질을 얻기 위하여 예루살렘에까지 온 것
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 백성의 피를 흘리기 위하여서만 온 것임이 분명하다.
슥 14:15
"모든 육축에게 미칠 재앙도"- 원수들의 군대에 미칠 재앙과 같다고 하였으니, 그
재앙에 대하여는 12절을 참조하여라.
슥 14: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
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 이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재림하신 뒤에 만국은
주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보호 받은 것
을 감사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만국의 민족들이 이와 같은 것을 지키는 목적은, 저
들도 세상에 살던 동안 하나님이 보호하여 주신(특별히 영혼이 망하지 않게 해 주신)
은혜를 회고하며 감사하려는 것이다. 여기 "초막절" 이라는 것은 반드시 옛날 유대인
이 지킨 절기와 같은 시기라고 할 것은 없다. 이것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행위를 중점으로 말하는 것이다. 칼빈(Calvin)은 여기 만국이 개종된 사회는, 재림
이후의 영광 세계를 이름이 아니고 신약 시대의 교회를 가리킨 것이라고 한다.
슥 14:17-19
여기 있는 말씀은, 천국에는 이교 국민이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올라감"- 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참된 신앙 행위를 구약적 표현으로 말
함이다. "비를 내리지 아니함"- 은, 사람이 살 수 없도록 된 자연계의 재앙이다. 이
런 재앙 아래서는 생명이 근절될 것이다. "창일함이" - 라고 쓴 소자의 어귀는, 히브
리 원문에 없고, 그저 "(그들에게) 있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이는 곧
"비가 있지 않으리라"는 뜻이다. 번역자들이 "창일함이" 라는 말을 가지고 보역한 것
은 애굽에서는 농사를 비에 의지하지 않고 나일 강수의 창일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굽에도 비가 전연 내리지 않으면 못산다.
이 귀절들이 여호와의 세계적 왕권을 말하는 것은, 그 때 곧, 선지자 시대의 유대인
들로 하여금 여호와 경외를 강화하게 한다. 유대인들은, 그 때에 자기들 만이 여호와
를 섬기고 있었으므로, 여호와 종교의 절대성을 아직 실감하지 못할 정도 였다. 그러
나 선지자가 이렇게 장차 만국이 여호와께 돌아올 것을 말할 때에, 그들(유대인들) 은
더욱 여호와에게 대한 신앙을 힘 있게 가지게 될 것이었다.
슥 14: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
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 이것은, 주님의 재림 후에는 만물이 모두 다
거룩되어, 성별 제도가 전연 없을 것을 가리킨다. 계 21:22 참조. 속된 것의 대표라
고 할 수 있는 "말 방울"과 또는 "하나님 전에 모든 솥"도 다 거룩할 것이다. 하나님
전에 모든 솥은 제단 앞 주발 만큼 거룩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 이
후에는 그 구분이 폐지된다.
"말 방울"이나 "솥"이나 "제단 앞 주발"은, 구약적 표현이니, 선지자는 구약 시대에
살았으니 만큼 말할 때에 이런 표현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런 표현들을 가지고, 그가
나타내는 것은, 주님의 재림 이후 세계는 만물이 마찬가지로 거룩할 터이니 성별 제도
가 전연 없으리라는 뜻이다.
슥 14:21
본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도 거룩 하다는 뜻으로 말
한다. 20절 해석 참조. "고기를 삶"- 는다 함은, 제사의 소용으로 고기를 삶음이다.
이것은, 역시 전에는 속되다고 하던 것이 이 때에 와서는 거룩되어지리라는 뜻이다.
이것도 구약식 표현이니, 우리는 그 표현의 형식에 착안하지 말고 그 내용을 취하여야
한다. 그 내용은, 주님의 재림 이후에는 모든 것이 다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 시대
에는 실제에 있어서 구약식 성전 제도나 제사 제도가 없다. 계 21:22 참조.
"그 날에는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 여기 이른바 "가
나안 사람"이라는 말은, 죄와 저주 아래 있는 자를 가리킨다(창 9:25; 레 18:24; 신7
:2, 9:4). 이는 혈통적으로 가나안 사람을 이름이 아니고, 마음으로 가나안 사람됨을
의미하나니 주님의 재림으로 세우신 영광 세계에는 그런 사람은 전연 없다는 것이다(
계 21:22,27).
위의 모든 말씀은, 천국이 영광으로 완성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믿음이 있는 모든
주석가들은 일치하게 이렇게 주장한다(Keil and Delitzsch,Thus dces our prophecy c
-lose with a prospect of the completion of the kingdom of God in glory. All bel
-ieving Clmmentators are agreed that the final fulfilment of vers. 20 and 21 li
-es before us in Rev. 21:27 and 22:15).
첫댓글 후원이 없습니다 캬페운영이 어려워요
쌀도 없고 반찬거리도 못사고 있습니다
병원 치료약도 다 못사고 먹을것도
없습니다 먹거리를 사도록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후원은 카페지기에게 큰힘과 용기가 됩니다
이달에도 치료약값이 필요합니다 많이 힘이드네요...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먹을것 반찬거리도 사야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농협 233012-51-024388 예금주.황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