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에스더 9장 1~32절>
서론: 사형대 앞의 5분, 그리고 뒤집힌 운명
세계적인 문호 피오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의 젊은 시절인 1849년, 그는 반정부 혐의로 체포되어 영하 50도의 혹한 속에서 사형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집행관들이 그의 눈을 가리고 총구를 겨누었을 때, 그에게 남겨진 시간은 단 5분이었습니다. 그는 절망 속에서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저 멀리서 황제의 사면령을 가진 전령이 말을 달려왔습니다. 사형 집행 직전, 그의 형벌이 시베리아 유배형으로 감형된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삶으로, 절망에서 기적으로 운명이 완전히 뒤집힌 순간이었습니다. 이 극적인 반전의 경험은 훗날 그의 명작 《죄와 벌》의 밑바탕이 됩니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이념과 계산이 완벽하다고 믿었지만, 결국 스스로가 만든 죄악과 절망의 감옥에 갇혀 파멸을 향해 달려갑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운명의 가위눌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인들의 실존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하만이라는 거대한 권력자가 찍은 조서와 아달월 13일이라는 사형 날짜는 유다인들의 목을 죄어오는 사형대의 총구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하만의 계산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인간이 짠 비극의 시나리오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어떻게 완전히 해체되고 재구성되는지를 보여주는 '신적 반전의 연대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도스토옙스키의 삶과 작품이 포착한 그 운명의 반전이 오늘을 사는 우리 교회와 성도에게 어떤 신앙적 의미를 주는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구조적 절망을 깨트리는 신적 반전(Divine Reversal)
본문 1절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단어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대적들이 그들을 제거하기를 바랐더니 유다인이 도리어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거하게 된 그날에" 여기서 '도리어'로 번역된 히브리어 '베나하포크 후(וְנַהֲפ֣וֹךְ ה֔וּא)는 '뒤집어엎다', '완전히 전복시키다'라는 뜻의 '하파크(הָפัךְ)'에서 유래했습니다. 세상의 권력 구조와 역사의 필연성은 유다인의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인과론적 사슬을 단숨에 끊어버리시고 상황을 180도 뒤집으셨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인과법칙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는 이를 모든 결과에는 필연적인 원인이 있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만은 자신이 역사의 주권자인 줄 알고 주사위(부르)를 던져 날짜를 계산했으나, 그 인간적인 확신은 신의 섭리 앞에서 철저한 허무(Nihil)로 돌아갔습니다.
이 '베나하포크 후'의 사건은 신약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사탄과 세상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라는 사형대에 못 박음으로써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무덤을 깨뜨리시고 부활을 통해 사망을 생명으로, 패배를 가장 위대한 승리로 뒤집으셨습니다. 십자가야말로 우주적 '베나하포크 후'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치밀한 이성적 계산이 무너지고 파멸의 벼랑 끝에 섰을 때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깨닫습니다.
성도 여러분, 현재 직면한 삶의 문제가 아무리 고착화된 절망처럼 보일지라도 기억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역사의 판도를 한순간에 뒤집으시는 '베나하포크 후'의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세상의 흐름에 체념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뒤집으심을 신뢰하는 반전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2. 연대와 집중을 통한 영적 저항(Holy Gathering)
본문 2절을 보면 유다인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구체적인 행동 양식이 나옵니다. "유다인들이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 각 읍에 모여 자기들을 해하고자 한 자를 죽이려 하니" 여기서 '모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크할루(נִקְהֲל֨וּ)'는 '카할(קָהָל)'이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이는 단순히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떼를 지어 모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목적을 위해 거룩하게 소집된 총회를 뜻합니다. 대적들의 공격 앞에서 유다인들은 각자도생하지 않고, 하나의 생명 공동체로 강력하게 연대했습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등의 현대 철학자들은 고립된 개인이 거대한 구조적 악(아하수에로 제국의 법령)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 경고합니다. 홀로 남겨진 인간은 실존적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치를 공유한 이들이 한마음으로 모여 연대할 때, 세상의 부조리와 악을 저지하는 강력한 공동체적 힘이 발생합니다.
이 '카할'이라는 구약의 개념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 즉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교회)로 계승됩니다. 교회는 세상의 영적 아말렉(하만) 세력에 맞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는 영적 군대입니다.
《죄와 벌》에서 주인공이 스스로를 '초인(Superhuman)'이라 믿으며 타인과 절절히 고립되었을 때, 그의 영혼은 피폐해졌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품은 여인 '소냐'가 그의 곁에 함께 있어 주고, 그 고립을 깨뜨렸을 때 회복이 시작되었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성도들을 고립시키려 합니다. "나 혼자만 예배드리고 신앙생활 잘하면 되지"라는 고립주의는 하만의 공격 타깃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니크할루', 즉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공동체적 연대를 강화할 때, 세상의 두려움이 도리어 우리를 두려워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3. 슬픔을 바꾸어 축제가 되게 하는 은혜(Transformed Joy)
마지막으로 본문 22절은 부림절의 제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선포합니다."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에스더 8장 16절과 9장 전반에 흐르는 유다인의 상태는 '심하(שִׂמְחָה)' 즉 '기쁨'이었습니다. 원래 아달월 13일과 14일은 통곡과 죽음의 제사가 예정된 날이었으나, 하나님은 그 통곡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축제의 잔치(Feast)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 기쁨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함을 얻은' 구속사적 기쁨입니다.
장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등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고통과 죽음의 허무를 인간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유한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눈물을 영원한 기쁨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기독교적 사유 속에서의 기쁨은 인간이 운명의 굴레를 억지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초월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비극을 희극으로, 슬픔을 축제로 전환해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0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주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의 두려움과 애통은 영원한 '심하(기쁨)'로 변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즐거움이 신약의 성도들에게 부어졌습니다.
《죄와 벌》의 에필로그에서 시베리아 유배지에 가 있는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가 전해준 신약성경을 베개 아래 두고 마침내 영혼의 부활과 진정한 기쁨을 경험합니다. 죄와 벌의 종막이 은혜와 구원의 축제로 바뀐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부림절 축제의 핵심 역시 나 홀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22절)이었습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인간은 타인의 얼굴 앞에서 책임을 발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우리 내부에 머물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나눔으로 완성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기쁨을 세상의 소외된 이웃, 영적 가난한 자들에게 흘려보내는 진정한 '부림절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사형대의 절망을 넘어, 부활의 실화로
사형대 앞에서 마지막 5분을 마주했던 도스토옙스키의 절망, 그리고 자신의 계산에 갇혀 파멸해가던 《죄와 벌》 속 주인공의 슬픔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과 복음의 기쁨 앞에서 완전히 녹아내렸습니다. 슬픔 속에서 사형 집행만을 기다리던 유다인들은 하나님의 '베나하포크 후(반전)'의 은혜로 기쁨의 자리로 나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은 아달월 13일의 법령처럼 숨이 막히고 사방이 욱여쌈을 당한 것 같습니까? 세상이 그어놓은 절망의 한계선 앞에 떨고 계십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 인생의 스토리를 쓰시는 분은 세상의 하만이나 우리의 유한한 이성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사형대와 같았던 십자가에서 무덤의 권세를 도리어(베나하포크 후, וְנַהֲפ֣וֹךְ ה֔וּא) 부활로 전복시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거룩한 교회 공동체로 함께 모여(니크할루, נִקְהֲל֨וּ)서로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그리할 때, 우리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애통을 변하여 기쁨(심하, שִׂמְחָה)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역전의 주님을 찬양하며, 세상 속에 거룩한 구원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복된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