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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어느 별의 사랑 이야기
#1. 우주력 590년. 타이탄의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 우주선교사 수선013의 감상
죽음을 노래로 표현할 감상은 어떤 환경 속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어떠한 절망과 공포가 저 노래를 만든 사람에게 주어졌기에, 저러한 노랫말을 쓰고 곡을 붙였을까.
- 이오오~ 아오오~ 이오이~ 아오여~ 아여, 아여, 아여어~
임종을 앞둔 이가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에 토해 내는 신음 소리와도 같은, 목젖소리의 힘겨운 배설이 연속되는 듯한 노래가 주점 안에 낮게 깔려 퍼지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이성계(異星界) 우주인의 외모를 한 일단의 장례 행렬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주점 곳곳에 놓인 검은 색깔 장미 화분과 흑장미 문양의 자수가 화려한 비단옷을 걸친 도우미들과, 그녀들의 손에 들려 나오는 암흑색 장미주(薔薇酒) 등으로 검은 색깔 일색인 주점 안팎의 풍경과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만든, 일부러 들려주는 노랫소리는 아닌 듯했다.
-신이여! 신이시여! 가오이다! 가여이다! 받으소서! 받으소서! 받으시리이다!
번역기를 통해 인식된 노랫말의 뜻이었다. 프록시마 항성계에 속한 행성 무리의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언어에 지구류의 곡을 붙인 통곡성의 노래로 음유 시인들이 널리 부른 장송곡의 아류인 듯해 구태여 번역기의 힘을 빌려 해석하고 싶은 욕구는 없었지만, 이미 뜻은 전달되고 있었다. 신이여! 신이시여! 가오이다. 가여이다. 받으소서, 받으소서. 받으시리이다.
문득 기억 속에서 복분자호의 장례식 장면이 되새김되었다. 내가 한때 선목으로 승선했던 상선 복분자호는 우주 안팎에 널리 알려진 해적선 신천지호의 한 분생(分生)이었다. 무역선의 이름을 걸고 우주를 종횡하고 있었지만 때때로 본업인 해적행위를 하여 온갖 우주에 피를 뿌렸고, 약탈행위로 인한 전투 끝에 죽은 선원들의 시신은 본인이 희망할 경우 공간 멀리 흩어지기 마련이었다.
죽음을 노래로 만든 이의 감상을 헤아리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음절의 단락에 의한 변화로 죽음 행위로 인해 빚어질 영원한 소멸에 대한 절망감과 혹시 있을지 모를 영적 재탄생을 향한 열망의 간절함을 노래하던 해적들의 호곡성(號哭性) 장송곡이, 주점 안을 온통 통곡의 바다로 만들고 있는 이성인들의 장례 노래에 버금간다고 생각되어서, 문득 비교를 하였던 것이었다.
어떤 말기형 태양계에 속한 행성에 갔을 때 얻어들은 노래에도 비슷한 가사가 있기는 하였다. 천년을 주기로 태양이 폭주하여 행성계 전부를 태울 듯이 열기를 퍼붓던 날, 그 별의 사람들은 새벽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여 열풍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간에 노래와 함께 죽어갔다. 뜨겁게 달구어진 대지와 끓어오르는 바다는 그들의 별 전부를 열탕으로 만들었는데, 그들은 신이 내리는 벌로 알고 당연한 듯이 감내하여 죽음을 맞았다.
다시 천년을 기다려서 새로운 중력 폭주 현상이 올 때까지의 준비로 그들은 지하 깊숙한 곳에 알을 남겼다. 난태생 생물이 진화한 지성체답게 체념이 빠른 일면 훗날을 기약하는 방편으로 열에 강한 알을 남긴 예의 우주인은, 숙명처럼 짐 지워진 종말의 별세계에서 피할 길 없는 죽음을 맞는 지성체로서 남길 수 있는 모든 한을 노래로 풀고 있었다.
-아이~ 아이~ 아이여~ 아이~ 아이여~
#2. 우주력 580년. 은하연방의 수도. 어느 중범죄자 수용소.
신원 : 확인불가(최종 신분은 중범죄자 수용소의 종신 수형수로 수인번호 14783).
성별 : 여.
전생테 : 100 이상.
복제 횟수 : 확인불가(다수 예상).
복제 유형 : 초기기억 1회 반복재생.
사인 : 종신 수감으로 인한 자연사.
-죽었어. 끝내 아무도 구하러 오는 이는 없군.
-47년인가. 참으로 질긴 생명이로군.
-이 죄수의 무엇이 종신토록 독방에 있도록 했을꼬?
-죄의 경중을 묻지 않고 웬 신파극의 대사?
-저 죄수의 기억을 조사해 보았어. 죄가 아냐.
-그렇다면 저 죄수도?
-음.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았다는군. 높은 분들 이야기를 슬쩍 들었는데, 우리 은하연방의 최대 적수와 관계가 있는 여성이라고 하더군. 볼모로…… 아냐, 미끼로 잡혀 있었던 것일세.
-수인번호 14783에 대해서, 긴급히 보고할 사항이 있습니다!
#3. 우주력 580년. 은하연방 변방. 전쟁터
신원 : 확인불가.
성별 : 여.
전생테 : 100 이상.
복제 횟수 : 확인불가(다수 예상).
복제 유형 : 초기 기억 1회 반복 재생.
사인 : 교전지역 무단 침범으로 인한 총상.
-사격을 멈춰! 민간인이야!
-늦었어! 빌어먹을!
-벌집이 됐군. 다들 명사수인 걸 증명해서 기분이 좋겠군.
-저 여자가 무작정 걸어 들어왔습니다.
-치명상은 우리가 아냐. 저쪽에서 쐈어. 벨제뷔트연맹 쪽의 누군가와 연고가 있었던 것 같아. 이름을 계속 부르더라고.
-그런데 쏴? 자기편을? 더구나 여자를?
-그것도 단 한 방으로 숨통을 끊어놨어. 솜씨는 좋지만…… 쯧쯧, 젊은 미인인데…… 해적들 하는 짓이라고는……
-저 상처, 아물고 있어!
#4. 우주력 580년. 상선 복분자호
신원 : 확인불가(최종 신분은 노예선 선장의 성행위 상대자).
성별 : 여.
전생테 : 100 이상.
복제 횟수 : 확인불가(다수 예상).
복제 유형 : 초기기억 1회 반복재생.
사인 : 비윤리적인 행위로 징계를 받아 처형용 단승 우주정에 태워짐. 사후 확인 결과 아사로 판정함.
-이게 무슨 재판입니까? 저 여인이 죄인이라면,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우리는 윤리법에 의해 판결을 내렸네. 우리가 고발자가 되었고, 군이 변호를 했고, 간디 형님이 판결을 내렸고, 선장님이 최종 재결을 했네. 문제가 있을 여지가 없어.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 사건을 재판 운운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노예사냥에 걸려든 젊은 여인이 사냥꾼에게 성노예로 학대당한 것을 윤리법 위반이라니, 불가항력적인 상황 하에서의 피동적 행위는 긴급피신으로 무죄입니다. 윤리법에도 ‘지성체는 자신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배의 노예선 공격 명분은 ‘약한 자를 돕는다’인데, 이런 형식의 무지막지한 재판이 약한 자를 돕는 행위입니까?
-모두가 찬성한 끝에 열린 재판이야. 군도 기꺼이 변호를 맡겠다고 하지 않았나.
-양식이 있는 재판이 열릴 줄로 알았습니다. 이런 억지 판결이 날 줄 알았다면…… 왜 한 생명을 끊기 위해 안달이 난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겁니까? 저는 선목의 신분으로, 이 엉터리 재판을 은하연방의 사법기관에 보고할 것입니다.
-죽음이 그렇듯 쉬운 일인가. 눈에 보이는 현상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실은 아니라네.
#5. 우주력 580년. 어느 소행성. 도시의 뒷골목
신원 : 확인불가(최종 신분은 무적 방랑자).
성별 : 여.
전생테 : 100 이상.
복제 횟수 : 확인 불가(다수 예상).
복제 유형 : 초기 기억 1회 반복 재생.
사인 : 타살. (흉기에 의한 기도 절단)
-어제, 우주선에서 내린 여자야. 여행 중이었다는군.
-왜 인간사냥꾼들 속에 들어와 변을 당했을까.
-사람을 찾고 다녔다지. 찾는 사람이 어두운 세력과 관계가 있었던 모양이야.
-젊은 미인이 “나, 임자 없는 몸이요!”하고 외치고 다닌 격이니…… 쯧쯧.
-반항했군. 고집을 부려 몸을 지킬 세상도 아닌데……
-이 시체, 움직이는데?
#6. 우주력 580년. 태양계 제6행성의 위성 타이탄.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
신원 : 확인불가(최종 신분은 유랑 예인).
성별 : 여.
전생테 : 100 이상.
복제 횟수 : 확인불가(다수 예상).
복제 유형 : 초기 기억 1회 반복 재생.
사인 : 독극물 복용에 의한 자살.
-좋겠네, 승부에 이겨서.
-말조심해! 큰언니한테 무슨 말버릇이냐?
-혼나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어요. 승부에 이기는 게 한 생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광경을 보는 일보다 즐거웠어요?
-막내, 넌 지금 말을 함부로 하고 있어!
-소리치지 말아요! 그 여자, 무슨 몹쓸 것을 가르쳐달라는 것도 아니던데 딱 거절해서, 약을 먹게 만들어요?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큰언니, 정말 나빠요!
-막내야!
-내둬라. 그 애 심정도 이해해 줄 만하다. 우리가 언제 여성 나그네를 푸대접한 적 있었니? 큰언니, 안 그래요?
-둘째 언니?
-흥!
-다들 그만하면 됐다. 그 여자, 아직은 죽는 생명이 아니다.
#7. 이중성 아폴로X 태양계의 행성 ‘가이아’. 최후의 날
별은 적색거성 아폴로 알파와 말기항성 아폴로 베타의 상호공전으로 이루어진 아폴로X 태양계의 유일한 행성이었다. 태생부터가 행성으로서의 운명에 적절치가 않았던 별은 이제 공간을 곡예하듯 떠돌던 오랜 세월 동안의 난곡선 운행을 끝내려 하고 있었다. 함께 태어났던 다른 행성들이 외줄타기 공전운동 중에 행성의 위치를 잃고 가루로 부셔서 태양들에게 흡수된 뒤에도, 별은 내내 혼돈의 공간 속에 외떨어진 존재로서 시달림을 감내하며 연명해 왔다. 이제 그나마 명맥이 다해 사망을 선고받고 절망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현실 속에서, 별은 자신 안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몸부림을 하고 있었다.
핍박이 심한 태양은 평소 은은한 밝음을 베풀던 어둠의 태양 아폴로 베타였다. 밝은 태양 아폴로 알파가 정열을 다투던 난폭한 전신(戰神)이었다면, 어둠의 태양 아폴로 베타는 묵묵히 생명의 뒷바라지를 하던 대지의 여신으로 별에게 가장 큰 은혜를 베풀던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밝은 태양 아폴로 알파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하늘에 어둠의 태양 아폴로 베타가 검붉은 자태를 나타낼 때면, 별 안의 주민들은 그 장엄한 모습에 감격하여 축복의 노래를 불렀다. “오! 이오오! 이오오!”
이제 별은 여신의 자비마저 등을 돌린 현실을 맞아 단말마의 비명을 올리고 있었다. 밝은 태양 아폴로 알파가 폭주를 일으켜 아폴로 베타의 중력권을 침범했고, 강약의 차이로 흡수되기 시작한 아폴로 알파의 몸부림으로 이중성 아폴로X계는 온통 열기로 들끓었다. 간단없는 폭발이 이어지며 아폴로 알파는 팽창을 계속했고, 별 안의 주민들은 죽음의 노래를 불렀다. 종말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아폴로X 태양계의 유일한 행성은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자신 안의 모든 것을 지키려고 최후의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이오오~ 이허허허~ 이오오허허~
별의 고통은 지진이 되어 흔들렸고, 별의 피는 용암이 되어 흘렀고, 별의 분노는 화산이 되어 폭발했다. 별이 최후를 늦추기 위해 요동을 하는 동안, 별 안의 생명들은 하나, 둘, 불꽃이 되고 연기가 되고 티끌이 되어 사라졌다. 고통을 표현할 재간을 가진 존재들은 비명을 질러대어 단말마의 순간을 어머니인 별에게 하소연하려 했고, 그나마 표현 수단마저 갖지 못한 존재들은 별 스스로 자신 안의 불꽃으로 승화시켜 우주로 날려 보냈다. 별이 사랑하는 생명들 중에서도 가장 아낌을 받던 일단의 생물들은, 진작부터 자신이 속한 세계의 최후를 조상하는 노래를 목 놓아 부르고 있었다.
-어허허~ 아아허~ 아허~ 아허허~ 아허허허~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생물들은 지구계 인류의 여성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젊고 아름다웠다.
#8. 이중 태양계 아폴로X의 중력권 외곽, 멸망하는 행성이 보이는 우주. 우주선교선 장미13호
홀연 한 척의 우주선이 공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뱃전에 커다랗게 장미 문양의 표식이 수놓아져 있는, 타이탄의 장미장원 선적의 우주선교선 장미13호였다. 장미13호는 중력권 밖 우주에 멈추어 이중태양계 아폴로X의 기이한 운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폴로X 태양계의 남매 태양은 그간 서로 어지럽게 얽혀 돌던 난해한 피신운동을 청산하려는 양으로 하나로 합체하는 중이었고, 두 태양의 중력이 하나가 됨으로 빚어진 중력 집중 현상이 아폴로X 태양계 전체를 혼돈으로 몰아가고 있었는데, 예의 중력 집중의 폭풍이 작심한 듯 만든 초점의 중심에는 한 행성이 외로이 떠 있었다.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요?”
소리를 낸 것은 새로 선단에 참여한 로테005였다. 최근에 재생되어 전생테가 다섯이 된 그녀는 수선013이 최초로 선교사로 승선했던 무역선 복분자호의 구함을 받아 타이탄의 장미장원에서 재조형 되었던 생체예술품으로 인조지성체였다. 자신을 만들어준 본래의 주인을 찾아 지구로 갔다가 절망을 맛보고 공황상태에 있던 그녀를 구해온 것은 수선013이었다. 타이탄의 우주선교선 장미13호의 책임 선목으로 지구종교 총연합회의 윤리 강령을 위반하여 자격이 정지되어 있던 우주선교사 수선013은 청문회에 참석하기 위해 지구행을 하던 도중에 폐인이 되어 있는 003시절의 로테005를 발견하고 자신의 선교단에 합류시켰던 것이다.
장미13호의 선원들은 전망 스크린 앞에 모여 화면에 비치는 아폴로X 태양계의 기이한 운동 모습과 그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는 행성 가이아의 최후를 관망하고 있었다.
“지금이 마지막 시기입니다. 더 늦으면 손쓸 방법이 없어요.”
오덕양097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는 해적선 신천지호의 중간간부인 오덕양과 유전계보를 공유하는 분생 중의 하나로 장미13호에서도 용병대의 하나를 지휘하는 중간 간부였다. 오덕양097이 지적하지 않아도 두 개의 거대한 별이 쏟아 붓는 중력폭풍의 중심에 외로이 떠 있는 가이아의 상황은, 한없이 위태해 보였다.
“아폴로 알파의 폭발이 가장 큰 위협입니다. 아폴로 베타에 흡수되는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상규를 벗어난 핵융합을 거듭한 탓에 아폴로 알파는 태양으로서의 생명을 끝내고 초신성 폭발을 일으킬 최종 단계에 있습니다. 저 행성 가이아는 지금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면 합체된 아폴로X 태양계에 삼켜지게 될 것입니다.”
장미13호의 정보담당 책임자인 알렉375의 해설이었다. 그의 해설이 아니더라도 두 개의 태양 사이의 협곡에 잘못 그려진 흑점처럼 외떨어져 떠 있는 행성의 운명은 전망 스크린 속의 경치 속에서 충분히 해석되고 있었다.
풍경이 변한 것인 그때였다. 전망 스크린 속의 경치에는 대형 우주선이 두 척 추가되어 있었다.
“우리의 친척인 신천지호도 왔군. 그리고 황금전함도……조금 더 지켜보기로 하지. 우리는 이미 객원이 된 상황이니.”
선장인 론775가 말했다. 용병대의 최고 원로인 그를 선장으로 추천한 이는 용병대 사령관인 마덕대장이었다. 옛 지구우주군 출신으로 우주군 대장의 계급을 갖고 있던 마덕114을 선원들은 모두 그렇게 불렀고, 그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으므로 모두의 중론으로 론775는 우주선교선 장미13호의 선장이 되었다. 수선013을 포함한 간부급 다섯 사람은 모두 노병 론775의 경험을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장미13호는 관망자가 되어 이중성계 아폴로X의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9. 온갖 우주. 그리고 해적선 신천지호. 이중성계 아폴로X의 유일 행성 ‘가이아’ 최후의 날. #6의 시각을 바꾼 연속
우주의 모든 곳에 있는 어떤 여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오오~ 이허~ 이오오~ 이허허허~. 은하연방 수도의 중범죄자 수용소에서 47년을 갇혀 있다가 노화로 죽었던 장기수도, 은하연방 정규군과 벨제비트연맹군과의 전장에서 유탄에 쓰러졌던 여인도, 상선 복분자호의 선상재판에서 추방형을 선고받고 우주를 떠돌다가 아사했던 여인도, 어느 변변치 못한 행성의 뒷골목에서 범죄자들로부터 몸을 지키다가 흉기에 찔려 숨졌던 여인도, 인공행성 타이탄에서 목숨을 담보로 무언가를 가르쳐주기를 청하다가 끝내 거부당하고 분김에 자살한 어떤 여인도, 우주 안팎에서 누군가를 찾다가 사연이 알려지지 않은 채로 이런저런 죽음을 맞거나 죽어 가는 도중에 있는 다른 많은 여인들도, 이중성계의 합체에 의한 중력 폭풍에 휩쓸려들어 최후를 맞고 있는 별의 주민으로서의 젊은 여인들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오오~ 이오~ 이오~ 이오오오~.
그리고 또 하나, 해적선 신천지호의 어느 방에서 역시 죽음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파란 색깔 눈에 몸통보다 더 큰 머리를 가진, 신천지호의 재생의료전문가 간디048이 역시 죽음의 노래에 동참하고 있었다. 이오오~ 이오~ 이오~ 이오오오~
그 밤 내내, 간디048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로 인해 신천지호의 승무원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육탄전의 전장에서 적의 칼에 가슴을 찔린 전사가 최후의 절규를 토하는 듯한 호곡성 노래가 밤새 이어져, 신천지호의 승무원들 모두의 심중에 가없는 시름을 안겨주었다.
길고 어두운 밤이 지나고 간디048의 노래가 갑자기 날카로운 칼로 절단한 듯 멈추었다. 해적선 신천지호의 안팎에는 한 순간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같은 순간, 온갖 우주의 곳곳에서 노래를 부르던 여인들도 하나같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한때 죽었던 여인들이 다시금 생명 현상을 보인 결과는, 자신의 죽음을 조상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10. 재생의료 전문가 간디048의 회상. 우주력 1세기 후반. 이중성계 아폴로X 태양계의 한 행성. 해적선 신천지호.
“간디 형님은 사람이 너무 좋아 탈입니다. 싹 쓸어버리자는 데 왜 반대해요? 겨우 식인 종족 아닙니까?”
오덕양017이 간디010에게 타박을 주고 있었다. 코넬013과 오신010, 알렉산더011은 곁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글쎄, 반대 할 걸 반대해야지, 그 꼴이 뭡니까? 가뜩이나 큰 머리가 곱절이나 더 커지고 눈은 새파랗게 변해서 리겔 켄타우리에서 보았던 별종 올빼미 꼴 아닙니까? 원수를 갚아야지요, 원수를.”
오덕양017은 계속 채근하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간디010은 태평한 얼굴이었다. 김진욱013은 두 사람의 그런 실랑이를 곁눈질로 훔쳐보며 속으로 웃고 있었다. 새로 재생되어 배양기를 나온 간디010의 모습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이게 편리해. 운동은 조금만 하고 머리만 많이 쓰는 주제에 환경이 험악한 우주에서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이 몸은 썩 잘 만들어진 작품이야.
오덕양군, 자네도 이번에 죽으면 다음 재생 때는 내 꼴을 만들어 주지. 그게 싫으면 그만 놀리라구.”
간디010의 협박성 공갈에 오덕양017은 아이고 뜨거워라 하고 입을 다물었다. 역대의 간디 중에는 실제로 재생 동료를 기형인간으로 만들어 낸 엉뚱한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1. 앞 장면의 직전 장면. 해적선 신천지호
김진욱013이 간디009의 최후를 보고 받은 것은 열세 번째 재생으로 살아난 몸을 숙성시키기 위해 숙면실에서 잠들어 있던 도중이었다. 간디009는 김진욱012가 재생 불량으로 인한 조기 노화로 죽자 배양기에 넣은 후 대리 선장역을 맡아 왔는데 새로운 행성을 탐사하던 중에 사라졌다고 했다.
서둘러 숙면실을 나온 김진욱013은 오덕양017의 부대를 동원해 직접 간디009 구출에 나섰다. 오덕양017은 간디009를 혈육처럼 따랐으므로 선봉을 자원하고 나섰던 것이다.
간디009가 실종된 행성은 이중성계인 바너드별과 이웃한 또다른 이중성계의 유일한 행성으로 최근에 발견된 지구형 행성이었다. 백만 분의 하나라는 확률인 지구형 행성의 발견이었으므로 간디009가 상륙을 결정한 것은 대리 선장으로서 당연한 임무 수행이었을 터였다.
“잘난 별이로군요. 나무도, 풀도, 물도, 지구와 다른 점이 없어요.”
행성에 내려 자연을 대한 오덕양017은 감탄사부터 늘어놓고 있었다. 그만큼 행성은 지구계 인류의 고향인 태양계의 지구와 흡사한 자연을 갖고 있었다.
“자네가 지구를 언제 보았다고 아는 척을 하나? 간디009 형님이 심어준 기억을 가지고 지구라고 생각하는 것 아냐?”
굳이 따라 나서서 오덕양017과 함께 선봉에 나선 오신010이 핀잔을 주었다. 두 사람은 간디009의 실종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상륙부대가 내린 곳은 강가의 평원이었다. 바다처럼 넓은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고 강 저편에 아스라이 수풀이 보였다. 김진욱013은 간디009가 강을 건너간 후 사라졌다는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었으므로 대원들에게 도강을 명령했다.
강을 건너는 보트 속에서 김진욱013은 언젠가 이런 식으로 강을 건넜다는 감상을 떠올렸다. 우주사가 시작하기 전의 옛날 지구에서 가졌던 젊음의 시절, 간디를 따라 그의 고국인 인도에 갔을 때였다. 그때에 간디는 인도의 어머니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김진욱은 따라나섰고 간디의 안내로 강을 만나 강물 속에 들어갔었다. 많은 사람들이 강물을 의지해 살고 있었다. 마시고, 목욕하고, 숭배하고. 강물은 그들의 생활 터전이었고, 그들의 탄생과 죽음을 주도하는 신이었다.
강을 건넌 것은 왜였을까. 강 저편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간디는 때때로 자신의 나라가 가진 영원한 가난이 싫어질 때가 있다고 했다. 이생의 가난을 내세의 영원한 행복을 위한 준비로 보고, 어떠한 고난도 묵묵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민족이라는 점이 부끄럽다고 했다. 강 저편에 있을지 모르는 행복을 스스로 찾아볼 생각은 않고, 행복이 강을 건너오기만을 기다리는 민족이 자신의 동족이라고 했다.
그때에도 강을 건넌 것은 김진욱 혼자였다. 간디는 그렇게 자신의 동족의 가난을 탄식하면서도 끝내 강을 건너지는 않았다. 삶의 시간을 죽음 뒤를 위한 준비 기간으로 보고 묵묵히 내세를 준비하는 동족의 모습을 슬퍼하면서도 그 슬픈 동족의 곁을 떠나는 것은 끝내 거부하던 간디였다. 김진욱은 그때에 건넌 강 건너편에서 건너온 저편과 별다르지 않은 가난의 연속을 발견하고 함께 배를 타지 않은 간디를 위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모든 것을 강물의 흐름에 맡기고 강물이 흐르듯 스쳐 가는 인생을 관조하며 사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런 인생도 한 차례의 생애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문득 간디가 강을 건너오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듯한 기분이 되기도 했었다.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지구 시대의 경치를 연상하며 강을 건넜지만 구조대가 도착한 강 건너편의 경치는 그 옛날 지구의 인도에서 본 강가의 경치와는 판연히 달랐다. 초록빛 나무와 풀이 잘 어우러져 잎과 꽃을 피우고 있었고, 벌과 나비가 꿀을 찾아 나는 사이로 토끼와 양을 닮은 초식동물이 경주를 하고 있었다. 특히 젖무덤이 탱탱하게 부풀은 젖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장이 돋보였는데, 젖 짜는 아낙네들의 주위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눈에 익은 경치인데 왜? 김진욱013은 홀연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낙원이로군요. 간디 형님은 이 세계에 반해서 스스로 숨은 게 아닐까요?”
오덕양017이 감탄사를 대신해 하는 말이었다. 우주의 떠돌이 생활이 싫어졌을 때 이만한 정착지도 없겠다는 생각을 한 듯 오신010도 모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김진욱013은 구조대의 선두에 서서 낙원의 경치 속을 헤쳐 나갔다. 젖 짜는 아낙네들 저편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던 아가씨들이 수줍은 듯 다가와 잘 익은 사과를 대원들에게 권하고 있었다. 천사인양 아름다운 아가씨들의 호의에 구조대의 대원들은 김진욱013의 동정을 살폈다. 허락만 떨어지면 아가씨들의 손을 덥석 잡을 기세였다. 이 경치에 흔들리면 안 돼! 김진욱013은 대원들의 기대를 무시하고 발걸음을 더욱 빨리 했다.
가고 또 가도 낙원은 계속되는 듯했다. 농우에 쟁기를 끌려 밭을 가는 농부가 보였고, 양털을 깎는 아낙네들과 병아리 떼에 모이를 주는 아이들이 보였다. 동산 아래 양지 바른 곳에 자리 잡은 마을에서는 저녁 짓는 연기가 오르고 있었고, 열어젖뜨린 창문으로 베 짜는 아낙네가 보이기도 했다. 김진욱013은 그 모든 경치를 모질게 외면하고 행군의 속도를 더욱 높였다.
낙원의 경치는 시나브로 바뀌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농원 풍경이 끝나면서 꽃이 있는 전원 도시가 나타났고, 차츰 잘 조화된 대도시 풍경으로 변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건물들 아래로 여러 가지 탈것이 달리고 있었고, 인도를 걷는 행인들도 연도의 상점에서 물건을 진열하고 있는 상인들도 모두 밝은 표정으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 고궁을 찾아 한가로이 휴가를 즐기고 있는 일가의 모습에 부하 대원들의 시선이 가장 많이 모이는 것을 느끼며 김진욱013은 발걸음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때쯤 오신010과 오덕양017도 김진욱013과 보폭을 맞추어 행군을 단속하고 있었다. 김진욱013은 그들의 표정에서 두 동료가 자신이 느낀 어떤 의문을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이 경치는 지구의 도시 심양과 장미장원이 있는 타이탄의 행정 수도가 아우러진 것이다. 그리고 간디의……”
김진욱013의 판단이었다.
도시의 끝을 알리는 전원주택이 나타나면서 경치는 다시금 변했다. 목련이 흐드러지게 핀 주택들 저편에서 홀연 장미꽃 향기가 풍겨오고 눈에 익은 풍경이 나타났다. 덩굴장미를 아치형으로 올려 정문을 장식한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이었다.
구조대는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의 문 앞에 멈추었다. 활짝 열린 아치형 꽃 문 저편에서는 신천지호의 승무원들 공통의 고향 냄새인 장미주의 향기가 풍겨 오고 있었다.
“본대에 묻는다. 이 경치의 해석을 부탁함.”
김진욱013이 신천지호에 통신을 시도하는 동안 오신010과 오덕양017은 대원들을 단속하여 무장을 강화했다. 대원들도 자신들의 입지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있었으므로 총을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경치는 실제의 것임. 그러나 생명 반응이 없음. 낙원은 분자의 조합에 불과한 거짓 자연임.”
신천지호에서 온 응답이었다. 통신에 나온 알렉산더011은 잔뜩 긴장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거의 동시에 ‘언제나 장미…’의 장미꽃 대문이 활짝 입을 벌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거대한 동혈처럼 다가오는 아치형 꽃 문 속에서 흑장미를 비롯한 ‘언제나 장미…’의 여주인들이 손짓을 하여 대원들을 부르고 있는 듯싶기도 했다. 김진욱013은 냉정하게 대원들에게 후퇴 명령을 내린 후 신천지호의 알렉산더011에게 응원을 청했다
“철수를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줄 것. 그리고 이 경치를 연출한 미지의 적에게 대한 대책도 연구해 주기 바람.”
행성의 상공에 신천지호가 나타난 것은 구조대가 다시금 강을 건널 무렵이었다. 강은 거대한 함정으로 변해 구조대를 삼키고 있었다.
#12. 앞 장면의 다른 시각에서의 연속
-떠난다는 것은 도피였을 뿐 도전이 아니었다. 난 비겁자가 될 수 없었다.
-머무름의 장소가 어디인지 파악한 후의 결정이었는가.
-인생은 어차피 환상이라고 하지 않던가. 환상과 사실의 구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고 싶다.
-인생이 환상이라면, 스스로 꾸민 낙원에 머무는 환상과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달리는 실제의 환상 중 어느 쪽이 더 가치가 높은 인생인가의 판단도 어렵지 않았을 텐데?
-결과가 확실하지 않은 여행에 이미 아홉 생애를 바쳐 왔다. 내게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할 생각인가. 나는 싫다. 나는 이대로 머물고 싶다.
-그대가 머문다는 뜻에 참작의 여지가 있음은 인정한다. 한데 왜 우리까지 붙잡아 두려 하는가.
-몰라서 묻는가. 우리는 동지가 아니었는가. 게다가 나는 외로움이 또한 싫다. 같이 있어 달라.
-역시 그대는 내가 아는 간디가 아니다. 내가 아는 간디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으로 동지의 희생을 강요하는 따위의 인물은 아니었다. 그 옛날 지구에 있을 때의 간디는 가난한 동족의 세계에 머물기 위해, 함께 강을 건너자는 김진욱의 청을 거부했었다.
#13. #11의 연속
“이 별을 파괴하기 바람. 우리의 생사 안위에 대한 걱정은 전혀 불필요함.”
김진욱013이 신천지호의 알렉산더011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알렉산더011은 가장 강력한 반양자탄을 준비했다. 알렉산더011이 전망 스크린을 통해 본 행성의 경치 속에서는 강물이 일으킨 거대한 파도 속으로 삼켜지고 있는 김진욱013을 비롯한 구조대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14. #10의 연속. 해적선 신천지호
“가이아 이론이라는 게 있었지. 지구 전체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고 인간은 두뇌, 기타 자연은 표현 수단으로 보는.”
알렉산더011이 훗날 동료들과 어울렸을 때 한 말이었다. 오덕양017은 말꼬리를 물고 질문을 던졌다.
“간디 형님이 우리를 따라온 것은 어떻게 된 거요? 이미 별의 한 조각이 되어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소?”
“한 조각이 아니라 전체였지. 그때의 별은 두뇌를 갖지 못한 가이아였어. 간디 형님을 만나 지식을 얻어 진정한 가이아가 될 수 있었지.
그 별이 동료들과 간디 형님을 놓아 준 이유를 물었나? 간디 형님의 두뇌를 제 것으로 한 만큼 반양자폭탄의 위력을 알고 있었던 탓의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해둘까. 더는 나도 모르겠어. 스스로 연구해 보라구.”
김진욱013은 알렉산더011이 말꼬리를 흐리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별에서 놓여난 전생테가 아홉인 간디의 시신을 재생시켜 배양기를 나온 간디010은 터무니없이 큰 머리통과 기왕의 파란 눈이 더욱 짙어진 모습을 하고 별의 수명만큼이나 깊은 심지를 보이고 있었다. 그 별은 간디009를 놓아 보낸 것이 아니라 간디009에 깃들어 따라와 간디010의 몸으로 우주로 나왔던 것이다.
지금의 간디010은 간디일까, 저 별의 가이아일까. 혹은 둘 모두일지도 모른다. 간디009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낙원을 만들고 동족을 머물게 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우리를 붙잡으려 애쓴 이유는 가장 가까운 동료로 받아들인 때문이었을 것이다. 별에 포획되어 가이아의 두뇌가 된 간디009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간디009는 우리를 잊지 않은 우리의 동료였고, 그 뒤를 이어 태어난 간디010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 옛날의 간디는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동족들의 무지를 싫어하면서도 동족의 곁을 떠나는 것은 끝내 거부했던 성자였다. 지금의 간디010이 우리를 따라온 이유 또한 그러하지 않겠는가.
“글쎄, 간디 형님. 그저 그 별을 탕! 부셔버리자니까요. 별 전체가 생물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을 잡아먹으려 들던 식인 족속 아니었느냐 하는 것이 내 말씀의 뜻이라 이 말입니다요.”
오덕양017이 다시 간디010을 놀리는 소리가 들렸다. 좋은 친구들…… 저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알면서 저러는 거다. 간디010이 본래의 간디이거나, 간디의 몸을 빌려 외계 구경에 나선 가이아이거나, 혹은 두 생명이 하나로 뭉친 또 다른 간디이거나를 막론하고, 간디010은 우리의 친구인 것이다. 이것은 아름다운 현실이고 아름다운 우정인 것이다.
김진욱013은 전망 스크린을 통해 별이 다가오고 멀어지는 우주를 보고 있었다. 홀연 간디를 떠나보낸 후의 푸른 색깔이 더욱 짙어지던 별의 풍경이 떠오르는 듯 보였다. 그렇군. 그 친구의 눈은 역시 그 별을 닮았어. 너무 푸르거든. 놀림감이 되는 게 당연해.
#15. 그리고 여러 세기 후. 해적선 신천지호. #9의 연속. 이중성계 아폴로X의 유일 행성 ‘가이아’ 최후의 날
“왜 구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그 별은 간디형님의 작품인 가이아의 하나였던 게 확실하지 않습니까?”
오덕양407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여 선장 김진욱071을 공박해 댔다. 이중성계 아폴로X의 유일 행성 가이아는, 그들의 고향인 태양계의 제3행성과, 역시 같은 태양계에 속한 제6행성의 위성인 타이탄과 함께, 신천지호의 선원들에게 고향별로 각인 된 연고가 있는 별이었다. 오덕양407의 분노는 간디 가계의 사람들이 기호로 삼는 ‘행성 소유하기’의 결과에 대한 항의의 표시이기도 하였다. 이중성계 아폴로X의 ‘행성 가이아’는 간디 계열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푸른 별-사파이어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우주 곳곳에 자신의 분신을 뿌려 구원을 청하지 않았습니까? 간디형님을 찾는 여인들의 모습이……”
오덕양407은 스스로 격정에 겨워 말꼬리를 흐렸다. ‘행성 가이아’가 우주로 내보냈던 여인들은 모성이 폭발한 순간 가루가 되어 사라졌던 것이다.
“간디형님도 잔인한 데가 있습니다. 자신이 생명의 씨앗을 뿌린 별이 구원을 청하는 데도……”
김진욱071이 오덕양407의 말을 막고 나섰다. 간디의 심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가이아를 구하자는 간디의 청을 내가 거절했네.”
그러나 정작 간디048의 말은 달랐었다.
“우주에는 우주의 법칙이 있네. 가이아는 이제쯤 생명을 끝낼 별일세. 우리는 그저 아파할 수 있을 뿐이네.”
#16. #9의 다른 방향에서의 계속
버리는 이와 버림받는 이에게는 강퍅한 자와 연약한 자의 차이 외에 대부분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의 구분이 있다고 했다. 남성은 떠나는 것으로 다른 존재들에게 자신을 확인시키려 들고, 여성은 기다리는 것으로 한 남성에게 인정을 받으려 한다고 하였다.
내가 그러한 공식적인 여성상을 버리고 우주로 나선 이유는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게 기다림의 고통을 남겼을 뿐 돌아온다는 약속을 남기지 않은 채 우주로 떠났다.
“꼭 찾아야 할 무언가가 있으므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가 내게서 떠나는 것은 전날 떠나온 곳으로의 회귀에 다름 아님의 증명이었다. 그에게 있어서의 나는 길을 떠난 나그네가 하룻밤 신세지던 여인숙의 안주인이었을 뿐, 자신을 기다려 주는 전형적인 여인상 속의 여성은 아닌 셈이었다.
“그가 나를 소홀히 생각한다고 해도 나는 그럴 수 없다”고 그를 찾아 떨치고 나섰을 때, 그의 동료들과 친구들은 말했다.
“그 친구, 몹쓸 짓을 했군.”
그는 내게 그리움을 심었다. 몸체의 반절을 넘어 보이는 커다란 머리통을 가졌고 온갖 행성의 온갖 우주인의 유전자를 이식 받은 탓에 도무지 지구계 인류라고는 보아주기 힘든 용모를 한 그를 내가 못 견디게 그리워하게 된 이면에는, 그의 장기인 지성 교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리들이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만들어진 지성이거나 본래부터 타고난 본능이거나를 막론하고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고, 내 사랑에 거짓이 없음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떠나 우주의 거친 풍파에 휩쓸린 후에 겪은 고통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은하연방 정부의 첩보 요원들에게 붙들려 갖은 고초를 겪었고, 노예선의 선장에게 잡혀 성노예가 되는 걸로 목숨을 부지했다. 타이탄의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에서는, 목숨을 담보로 그의 소식을 묻다가 냉대를 당하여 스스로 생명을 다하는 수모를 겪었다. 나는 그를 찾아 온갖 우주에 출몰했고, 온갖 우주의 온갖 상황에 휩쓸려 들어 죽음을 맞았었다. 그를 찾는다는 일념 외의 기억은 스스로 포기했으므로, 나를 빌어 무언가를 추구한 이들은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했다. 나는 다만 내가 사랑하는 그에 대한 추억들을 본능으로 간직하고 우주로 나왔을 뿐이었다.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억울하지 않다. 나는 최후의 순간에 사랑하던 이의 소식을 접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내 최후를 놓고 갈등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의 정신 속에 내 최후를 슬퍼하는 진심이 숨어 있음을 그의 안에 숨은 나를 읽어 알고 있었다.
나는 가장 사랑하던 이가 내 죽음을 슬퍼하여 죽음의 노래를 불러주었음을 확인하였으므로 기꺼운 마음으로 죽어가고 있다. 내 안에 사랑의 씨앗을 뿌려 푸른 색깔 자연을 낳도록 만든 내 사랑 그는, 커다란 머리통과 파란 색깔 눈을 가졌고 이름은 간디로 불렸다.
#17. 우주선교선 장미13호의 항해일지. 수선013의 기록
무릇 생명을 품에 안고 있는 별은 대지이고 어머니이고 기다림이다. 멸망이 예정된 별에 생명의 씨앗을 뿌려 고통을 안겨준 어떤 존재의 무심함에는 치가 떨리지만, 어찌하랴, 별의 탄생과 소멸은 우주의 섭리인 것을.
“우리가 우주사에 개입하는 이유는 우주사를 아름답게 할 목적이 있을 뿐, 예정된 흐름에 변화를 주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해적선 신천지호의 초대 선장은 그렇게 말했었다.
#18. 앞 장면의 다른 시각에서의 계속. 이번 이야기의 종장
이중성계 아폴로X의 두 항성이 하나로 뭉쳐 거대항성을 완성한 시각, 잉여에너지의 분출수단으로 폭발을 시작한 새로운 아폴로X의 품안으로 유일한 행성 가이아가 뛰어들어 불꽃으로 사라졌다. 별이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은 익숙히 듣던 인간계의 장송곡과 너무나 흡사했다.
- 이오오~ 아오오~ 이오이~ 아오여~ 아여, 아여, 아여어~
-신이여! 신이시여! 가오이다! 가여이다! 받으소서! 받으소서! 받으시리이다!
수선013과 장미13호의 선원들은 함께 별의 종말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해적선 신천지호와 은하연방의 지배자 류우 일가의 사설함대 황금전함도……
수선013은 문득 이 풍경이 빚어진 이유를 깨닫고 있었다. 그렇군. 우리는 모두 공범이었어. 방관자로서…… 종말실험…… 지구계 인류에게 예언되어 있는 종말의 연습을 하고 있었던 거야. 아마도…….
첫댓글 이중성계 아폴로X의 두 항성이 하나로 뭉쳐 거대항성을 완성한 시각, 잉여에너지의 분출수단으로 폭발을 시작한 새로운 아폴로X의 품안으로 유일한 행성 가이아가 뛰어들어 불꽃으로 사라졌다. - 마지막 단원의 두 항성이 하나로 합쳐져 가이아 항성이 사라지는 비극을 보면서 우리 은하계와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운명에 대한 기사를 다음 사이트에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250 만 광년 떨어진 두 은하계는 서로를 향하여 돌진 중이고 40억년 후 조우하여 60억 년 후에는 하나의 은하계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태양은 이미 백색 왜성으로 죽은 별이 되고 지구는 또 그 이전에 죽은 별이 되며 인류도 이미 모두 사멸하겠지요.
이 전부터 지니고 있는 우주에 대한 호기심에 형님의 공상 우주소설은 그 흥미를 배가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인간이 추측하는 우주의 규모는 지름 980 억 광년으로서 그 안의 은하계도 엄청난 숫자로 포진하고 있습니다. 우리 은하계는 지름 10 만 여 광년으로 내부에 약 4 천 억 개의 별이 있지요. 위에 언급한 안드로메다 성운은 지구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은하계인데도 무려 250 만 여 광년의 거리입니다. 하느님이 지으신 이 세계, 이 우주는 무한하기만 합니다. 형님의 상상력 넘치는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지으심 받은 모든 것은 무한 그대로의 엄청난 것들 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별을 시작으로해서 머나먼 우주와 그를 지켜보는 우리들 자신까지도....
감히 소설로 쓴다는 건 비할 데 없는 불경이겠지만 그 또한 주신바 재능에 힘입음이니 계속해보려 합니다. 남은 다섯 회도 계속 읽어주세요. 고맙습니다.
사랑이 그대를 속일 지라도 ...........
감사합니다 ^^
읽어주셨군요. 고맙습니다.
잘읽고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