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랫줄과 바지랑대 / 모임득
모처럼 마당가에 번진 햇살 위에 구름을 내걸고 싶다.
며칠째 내리는 비에 쌓여가는 시름만큼이나 빈 빨랫줄에서는 물방울만 오종종 매달리다 떨어지곤 했다.
서둘러 일상의 고단함을 빨래와 같이 탁탁 털어 줄에 넌다. 쌍둥이가 벗어놓은 옷들이 어찌나 많은지 세탁기로 휘휘 돌려 너는 일도 힘에 부친다. 하루 종일 쓸고 닦으며 치우다 보면 지치고 짜증나는 날들이라서 얼굴은 펴질 때가 없다.
마당의 길이만큼 걸쳐진 빨랫줄이 주어진 삶이라면 바지랑대가 놓인 중간 지점만큼 온 인생이다. 숨 가쁘게 분주한 일상을 보냈지만 돌이켜보면 바지랑대 높이에서 바라보는 곳도 벗어나지 못한 채 종종거리며 살아온 듯싶다. 이십대 후반부터 외줄 타기하듯 발끝에 온몸을 지탱한 채 자식을 갖기 위한 일념으로 살았다. 하얀 기저귀가 널리기를 갈망하며 병원을 드나드는 횟수만큼 근심만이 널렸었다. 불혹이 가까워서야 쌍둥이를 낳았을 때 하루 세 번 세탁기를 돌리면서도 행복에 겨워하며 바쁘게 살았던 지난날들이 생각난다. 조금 힘들다고 너무 소중한 것을 잊고 있었다. 손길 닿을 빨래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빨래에는 내 행복의 원천인 가족들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새벽같이 나가서 어둑해서야 들어오는 남편의 양말은 나보다도 남편의 일상을 더 알고 있을 터이다. 변비 때문에 놀림 당했을 아들아이 팬티를 볼에 대니 냄새보다는 속살에 어울려 함께했을 체취가 전해져 온다. 치마는 한사코 마다하며 머슴애들하고만 노는 딸아이의 바지까지 널어놓고 보니 하늘이 참 곱다.
쪽으로 물들이면 저렇듯 고운 빛이 나올까. 내친김에 수돗가에 자리를 잡았다. 남편 옷만큼은 손으로 비벼 빨고 있다. 울퉁불퉁 집에서 만든 비누로 비비다 보면 피어나는 거품처럼 속이 후련하다. 한번 두 번 헹굼질하는 단순한 움직임 속에 시름은 사라져 버린다. 커다란 자배기에 물을 받아 헹군 옷들은 짜지 않고 축 걸쳐 넌다.
옷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만큼 파이는 마당의 흙. 무게도 느껴지지 못할 만큼 작은 존재인 물방울이 낙하하는 속도만큼 흙마당은 자리를 비켜준다. 작더라도 큰 힘을 쓸 수 있고 맞서기보다는 돌아가는 이치이리라.
처마에서 마당을 가로질러 돌담 옆에 있는 모과나무까지 걸쳐진 줄이 힘에 겨운지 축 늘어진다. 바지랑대를 중간에 세워 무게를 덜어주니 한결 보기가 좋다. 장대 하나가 버티기에는 벅찰 텐데도 아무런 불평 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피곤에 지쳐 축 처진 남편의 어깨 위에도 바지랑대를 받쳐주면 한결 가벼워질까. 전 재산을 투자한 사업이 계획대로 되지 않아, 사십이 넘어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남편의 마음이 가벼워진다면 기꺼이 바지랑대가 되어 주고 싶다.
옷가지를 가득 달고 바람에 흔들리는 빨랫줄이 남편의 모습 같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내가 늘어진 줄 같았다. 인연이 되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 하는 태아들로 침통해 있을 때 남편은 바지랑대가 되고 따뜻한 햇살이 되어 힘을 보태 주었다.
빨랫줄과 바지랑대처럼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어 힘들 때 기댈 수 있고 어려움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인생살이이지 싶다.
무거워진 줄에 온 식구가 걸려있다. 혼자 두 팔 벌리고 힘겨움을 참고 있을 남편의 빨랫줄에 이제부터는 내가 바지랑대가 되어야겠다.
충북 증평에서 태어나서
한국 방송통신대학 영어영문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주최 '사이버문학 공모전' 대상,
시흥문학상 금상,
2006년 《수필과비평》 신인상을 수상했다.
수비작가회
푸른솔문학회
청주문인협회 회원
시전문 계간지 《당하돌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첫댓글 <간이역 우체통> 가운데 작가가 선정한 작품 한 편 올립니다.
바지랑대에 걸린 모샘의 삶이 비벼 빤 빨래처럼 환하게 다가옵니다.
서로 빨랫줄이 되고 바지랑대가 되는 삶, 미덥고 따스합니다.
잘 읽었어요. 쌍둥이엄마 모샘, 화이팅입니다!^^
감사합니다 ^^ 제 삶의 원동력은 쌍둥이라고 당당히 얘기하며 살지요.
이제는 제가 빨랫줄이 되어서 살고 있고요.^^
출판기념식에서 낭송하던 이 작품으로 장내는 숙연한 분위기가 되었고
작가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요, <<간이역 우체동>> 출간을 축하축하 합니다.
병원을 드나들던 그 시절이 생각나서 공연히 눈시울 적셨지요
사회자는 그걸 또 용케 보았고요. 고맙습니다
제목도 좋고 글도 좋고..간결하면서도 많은 것을 담아내는 글에 감탄입니다.
출간을.축하드립니다.
수비골에 인연을 맺은 것이 참 좋은 동무를 만난듯 이런저런 다양한 글을 읽으며 참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드나듭니다.
빨랫줄에 걸린 삶의 글을 어여삐 봐 주시니 좋네요
서로 멀리 있어도 이렇게 만날수 있는 수비골이 좋지요. 감사해요 ^
간이역 우체통 출간을 축하합니다. 갑오년에는 낭군의 사업이 번창할겁니다.
사람인(人)자, 삶, 인생의 도정이지요. 좋은 수필이었습니다.
반가워요. 선생님
사람사는 일이 꼭 그럴순 없지만 새해에는 행복한 일들만 있었음 좋겠어요. 감사해요 ^^
지금은 보기드문 빨랫줄, 갖가지 사연들이 줄줄이 널려 있군요.
널린 빨래로 인해 축 늘어진 빨랫줄, 그 빨랫줄에 힘을 보태주는 바지랑대.
부부가 서로 바지랑대가 되어주는 모습이 참 아름답게 배어 있습니다.
수필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모임득 회원님, 발간을 축하드립니다.
<간이역 우체통>출간을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모성애가 바지랑대에 녹아있군요.
후덕한 심성 그대로 글도 훈훈합니다. 보내주신 수필집 잘 읽었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