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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에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회담을 하였습니다. 물론 여당 대표도 참석해서 삼자 회담의 형식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대통령과 야당 대표의 회담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에 열렸던 대부분의 회담이 그랬듯이 대화를 하고 난 후에 정국은 오히려 더 심각한 대치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 같습니다. 회담을 마치고 나서는 야당 대표도 그렇고, 대통령도 그렇고, 서로를 향해서 '그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국민적 저항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물론 국민들 중에는 야당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여당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각각 자신들을 지지하는 사람들만 국민이라고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국민의 소리 가운데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 것이 분명합니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하겠다고 정치인들은 입만 벌리면 이야기하지만, 그 말을 믿고 그런 정치를 기대하는 국민은 이제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흔히 회담을 마친 정치인들이 하는 말이 할 말은 다 했다는 말입니다. 이번 회담도 각자가 자신의 할 말만 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상생의 정치, 대화와 타협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오직 힘으로 해결하려 드는 것 같습니다. 할 말만 다 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국민적 저항을 받게 될 것이라고 협박성 경고를 던지고 나오는 것이 우리 나라 정치인들의 대화이고 회담인 것입니다.
우리교회 어떤 집사님은 점심 시간에 부하 직원들과 좀더 가까이 만나고 직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개인적으로나 혹은 두 세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일러서 히어링 런치(hearing lunch)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정한 힘은 대화에서 나오고 대화의 기본은 듣는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로서 올바른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중요한 것 하나는 들을 수 있는 귀입니다. 솔로몬을 일러 지혜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솔로몬이 어떻게 해서 그토록 지혜로운 왕이 되었는지를 전해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후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 정성에 감동하신 하나님이 솔로몬 왕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 주겠다. 무엇을 원하느냐?” 솔로몬은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을 벌이고 겨우 왕위에 오른 왕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왕권을 튼튼하게 해 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이방 민족들이 언제 이스라엘을 공격해 올지 모르니, 튼튼한 군방력을 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므로 건강을 구할 수도 있고, 자손들의 번성을 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그런 것들을 다 버리고 지혜를 구했습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고 백성들을 잘 재판하고 통치할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을 주옵소서” 한 나라의 왕으로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이러한 간구가 마음에 드셨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오래 사는 것이나 부유한 것이나 원수갚는 것을 요구하지 아니하고, 재판하고 통치하는 데 필요한 듣고서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는 능력을 요구하였으므로, 이제 나는 네 말대로, 네게 지혜로운 마음을 준다. 그리고 네가 달라고 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화도 모두 너에게 주겠다."
솔로몬이 간구한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번역된 이 말을 히브리어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듣는 심장'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책은 ‘듣는 마음’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지혜로운 마음은 곧 듣는 마음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가? 지혜는 잘 듣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잘 들어야 합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양심의 소리도 잘 들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소리, 반대자들의 소리 까지도 들을 줄 알아야 그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들을 수 있는 마음, 지혜로운 마음을 가지면 우리들의 인생에 우리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얻을 수 있고, 진정한 평안과 축복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자기 주장만 내세웁니다. 이것은 정치 지도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줄 모릅니다.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지시하거나 자기 얘기만 하려고 합니다. 자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지적하는 부모들로 인하여 자녀들은 숨막혀 고통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자들이 그렇습니다. 남자들이 남의 얘기를 잘 들을 때는 연애할 때 하고, 직장 상사나 자기보다 힘있는 사람이 말 할 때뿐입니다. 결혼하고 나면 여자 말을 잘 안 듣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남자들은 힘 있는 사람이 이야기하고 약한 사람들은 듣는 문화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 회식 문화는 어떻습니까? 요즘에는 많이 달라져 가고 있습니다만, 가운데 자리에 앉은 사람이 혼자서 얘기하고 다른 사람은 모두가 다소곳한 자세로 귀를 쫑긋하고 그 이야기를 듣습니다. 국무회의에 안 들어가 봐서 실제 회의 분위기는 잘 모르지만, 텔레비전 뉴스 시간에 나오는 국무회의 장면은 언제나 대통령이 이야기하고 있고 모든 국무위원들은 다 듣고 있습니다. 한 마디라도 놓칠까봐 수첩을 꺼내서 열심히 적으면서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하급자나 힘이 약한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이라고 하는 잘못된 편견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들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듣기를 즐겨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문제와 아픔, 기쁨과 즐거움, 모든 것을 듣기를 즐겨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찬송하고 기도하고 탄식하고 부르짖는 모든 소리와 모든 이야기를 즐겨 들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들으시고 그분은 응답해 주십니다.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책망도 해 주십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서로 들어주고 서로의 위로와 충고와 권면까지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서로 말하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 신뢰하고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고 신뢰하기 때문에 서로의 삶과 서로의 생각을 참으로 편안하게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들을 수 있는 귀와 말할 수 있는 입을 회복하는 것, 소외와 단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한 사람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 사람은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이었습니다.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도 잘 못하고, 다른 사람과 의사 소통도 하지 못하고, 자기 주장이나 자기 표현도 하지 못하고,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33절에 보면 예수님은 우선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를 데리고 무리를 떠나셨을까요?
성경은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는지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귀먹고 말을 더듬는 그 사람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선행을 배풀 때에는 사람들 앞에 나팔을 불기를 즐겨합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자존심이나 마음의 상처는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과시하고 명성을 얻기 위하여 도움 받는 사람의 인격에 커다란 상처를 주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보통 사람들처럼 사람들의 인기나 명예를 얻기 원하셨다면 따로 그를 데리고 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을수록 기대하는 효과가 더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해 주셨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언제나 사람들의 호기심, 동정, 멸시와 같은 차가운 시선에 상처받고 주눅들어 살아온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가 낫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와 같은 시선에서 벗어나 해방되고 싶은 욕구도 그 중 하나였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살피시고, 둘러서 있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를 데리고 무리를 떠나신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심으로서, 예수님은 이 귀먹고 어눌한 사람과 개별적이고 인격적인 만남을 갖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대중 속에 우리는 살아가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우리와 인격적인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를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신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의 양쪽 귀에 넣고,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장면을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양쪽 귀에 손가락을 대시며 예수님은 그 사람의 얼굴을 맞대고 바라보셨습니다. 그 눈에는 사랑과 연민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손 가락에 침을 바르시더니 그의 혀에 대셨습니다. 내가 너의 아픔과 연약한 부분을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의 아픔을 만져주셨습니다. 듣지 못하는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촉각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과 관심을 표현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만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상처, 우리의 아픔, 우리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만져 주시는 것입니다. 이 가을에 그분의 사랑의 손길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치유하시고 위로하시는 손길로 인하여 세상에서 상처받고 연약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치유받고 회복될 뿐 아니라, 주님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도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34절에 보면,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무엇 때문에 탄식하셨습니까? 당신의 아픔이나 고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그 사람, 듣지 못하고 말 못하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무척이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을 그 사람으로 인한 탄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식은, 예수님이 지금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그 사람과 당신을 동일시하고 계신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통 중에 있는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실한 사랑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최근에 언제 탄식해 보셨습니까? 우리는 너무나도 이기적이어서 자신이 아프거나 사랑하는 내 가족이 힘들어 하면 자신도 함께 힘들어하고 고통스럽지만, 다른 사람의 고통은 외면하고, 이웃의 아픔을 보고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 제목도 언제나 '나와 나의 가족들'입니다. 우리 가족들 건강하고 우리 아이가 공부 잘하고,내 사업이 잘 되기만을 구하는 나 중심적이고 가족 이기적인 기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이웃들의 고통에 대해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인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 탄식의 마음을 우리는 회복하여야 합니다. 이웃의 아픔, 소외된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공감하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대신 간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에바다!” 아람어로 ‘열리라’는 뜻입니다. 막힌 귀가 열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명하실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시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명령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명령대로 이 사람은 귀가 열렸고, 맺혔던 혀가 풀려서 그 즉시 듣게 되고 말 또한 분명해 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셨지만, 그를 비롯하여 그의 치유와 회복을 목도한 사람들은 나가서 더욱 널리 전파하였습니다.
들을 수 있는 귀와 말할 수 있는 입을 가진 사람이 행복합니다. 귀를 열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기에 서로에게 말하고 들으며 소통할 수 있는 관계가 성숙한 관계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귀는 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들으려 하지도 않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말에는 지혜가 없습니다. 그저 자기 생각, 자기 감정, 자기 이야기일 뿐, 그 말 속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정한 지혜를 담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말은 인간적으로는 아무리 지혜로운 말 같아도 영적으로 볼 때에는 어눌한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로하거나 치유하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그 사람의 말 속에, 교훈이 있고, 감동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그 말로 인하여 듣는 사람은 위로를 얻고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귀와 입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닫혔던 귀를 열어 주시고, 맺혔던 혀를 풀어 주십니다. 세미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을 수 있게 하시며, 이웃들의 탄식의 소리도 듣게 하여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들을 향하여 마음껏 입을 열어 주님을 찬양하고 증거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귀와 열려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어눌한 혀가 풀어져서 주님의 은총과 능력을 찬양하게 될 때, 그 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에바다'의 은총을 덧입어 지혜로운 자가 되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라고 오늘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