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에게 묻다
강표성
잘 여문 햇살이 금빛 물감을 터트리는 날이었다. 바람도 가볍게 불어오는 가을날에 옥천 지역으로 향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최근에야 지용 문학관을 찾게 되었다. 그곳은 내겐 비상금과 같은 곳이다. 가까이에 미답의 길 하나쯤 남겨두고 있다는 것은 숨겨둔 돈처럼 뿌듯한 일이었다.
지용 생가와 이웃하여 지용문학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검은 두루마기 차림으로 마중 나온 시인의 동상만 아니라면, 여느 시골집이나 다를 바 없었다. 74년도에 복원했다는 지용 생가엔 두 채의 조촐한 초가집과 커다란 우물과 굴뚝, 그리고 장독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낮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향수’라도 흥얼거리면, ‘차마 꿈에도 잊힐 리’ 없는 내 고향집도 하늘을 건너올 거 같았다.
시인 정지용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삼학년 때였던가. 교실 뒷면의 학급 꾸미기란에 누군가 단정하게 써놓았던 시, ‘향수’와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대처에서 전학 온 남학생이 정성 들여 옮겨놓은 시였다. 고개를 삐딱하게 꼬고 다니던 그가 갑자기 멋있어 보였다. ‘향수’라는 시 하나로 그는 무엇인가를 아는 특별한 존재로 비추어졌다. 당시에는 그 시가 금지된 시이며 시인 또한 월북 작가로 분류되어 있음을 알지 못했다.
소녀는 이젠 어른이 되었고, 해금이란 단어도 역사 속으로 흘러갔다. 이런저런 생각에 감개무량한 나를 맞아준 이는동그란 안경의 시인이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사려 깊고 조심성 있는 눈매였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 너머를 보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내 안에서 물음표 하나가 달라붙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자진 월북인지 납북인지 설왕설래 말이 많은 그의 행적이 궁금했다. 그러나 사진 속의 시인은 꿈꾸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답답한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세 줄의 전선 위로 낮달이 걸려 있었다. 완고한 전선이 마치 38선 같았다. 퀭한 얼굴로 떠 있는 낮달 위로 시인의 얼굴이 겹쳤다.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시인의 낯빛도 저리 창백했으리라.
그는 북한행을 잠깐의 일탈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현실이 지리멸렬해 보일 때, 답답한 삶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을 때, 사람들은 일탈을 감행하지 않던가. 잠깐의 행보가 자신의 일생을 바꾸는 경계선이 될 줄 뉘 알았으랴! 당시에는 삼팔선을 암암리에 왕래할 수 있었다니, 큰 의미 없이 길에 나섰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의 대문는 거기서 닫히고 말았다. 불안정한 환경일수록 예기치 않은 변수가 일어나고 그는 시대의 희생자가 되고 만 것이다. 운명의 나침반은 시인을 더 이상 고향길로 달려올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는 역사 밖으로 걸어가 버렸다. ‘우리도 마츰내 시인을 가졌노라’ 이리 기뻐하던 당시의 사람들에게나 우리 국문학사에 있어서나 진정 안타까운 일이다. 납북이냐 월북이냐 설왕설래 말이 많았지만 굳게 닫힌 삼팔선만큼이나 그의 삶 또한 닫혀 버렸다.
역사의 서글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우리 언어의 비옥한 토양을 만들었던 시인은 삼십여 년 가까이 가위표에 갇힌 채로 지내야 했다. 서정이 흘러넘치는 시 또한 이데올로기의 벽에 갇혔다. 1988년에 해금이 결정될 때까지. 그러나 한번 비틀린 역사는 후유증을 남긴다. 북쪽에 있는 셋째 아들이 서울의 형과 여동생을 2001년에 이산가족 상봉단에서 만났다는 텔레비전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짠했다. 아버지는 전설 속으로 사라지고 그 아들들만 먼 시간을 걸어와 서로 맞대면한 것이다. 분단의 아픔은 보이지 않는 뿌리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용 생가의 사립문을 나서는데 산수유나무가 바르르 떨고 있었다. 한 노인이 애꿎은 나무에게 왜장질을 하고 있었다. 관람객 중 누군가 정지용 시인의 ‘자진 월북’ 쪽으로 이야기를 몰아가자, 문화 해설사 노인이 참을 수 없었나 보다. 가타부타 따질 수도 없고, 산수유나무를 내리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마당을 패대기치자 모래들이 놀란 듯 여기저기로 튀었다.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오는데 주차장 부근의 작은 꽃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 브로치처럼 반짝이는 민들레꽃이었다. 코앞에 화단을 두고도 돌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난감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도 찬 바람 불어오는 가을날에 꽃 머리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라니, 마치 시인 정지용 같았다.
노란 꽃에게 무슨 말인가를 묻고 싶었다. 꽃이 눈에 밟히고, ‘향수’의 흥얼거림이 돌아오는 내내 대답처럼 따라붙었다.
대전여성문학지 < 2008년 수록 >
첫댓글 어제 옥천 투어를 했는데, 예전에 2007년에 쓴 글이 생각나더군요^^
지용 생가는 많이 변했고, 그 외에도 옥천은 참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수많은 인물들...애국 선열들...
어제 잠시 뵌 그 어른이, 언젠가는 제 의식의 장으로 뚜벅뚜벅 걸어오실 날을 기다립니다~
오, 이렇게해서 샘의 지난 글을 다시 봅니다. 생가를 둘러보고 읽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최근의 지용문학관은 주위 환경이 너무 변했더군요. 옛 정취가 생각 나서 오래 전 글을 먼지 털어 내놓고 보니 쑥스럽네요^^*
강표성 전 회장님의 언어의 연금술사와 같은 글 '민들레에게 묻다' 잘 읽었습니다.
에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벅찬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 잘 읽었습니다.
옥천은 의외로 볼 게 참 많더군요. 내내 평안하시길 빕니다^^*
표성씨,
그 반짝이는 노란 민들레 꽃 가슴에 달고 왔겠네요. 민들레에겐 월남, 월북이 없답니다.
그 꽃 브로치 처럼 빛나는 글 잘 읽었어요.
갑자기 민들레가 보고 싶어 나서렸더니 밤이네요. ㅠㅠ ....
그러게요. 욕심많은 인간들만 세상을 가르고 내 편 네 편을 따지고 그런 거 같습니다.
힘들게 산 윗대들을 생각하면 참 좋은 세상이지요. 선생님, 이 좋은 세상 내내 평안하기로 해요~~
그러게요, 저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동네가 고즈넉해서 오래 걷고 싶었어요. 좋은 글 반갑게 잘 읽었습니다.
지금은 옥천의 대표 브랜드가 되어 찾는 이들이 참 많더라구요.
다행이다 싶었어요. 바람 쐬기 좋을 만큼 거리여서 더 좋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