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민중의 역사
산은 저기에 저렇게 서 있으되 보는 사람, 가는 사람,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가오지는 않는다. 산은 인간의 삶이 자연과 원형으로 동화되던 원시사회를 벗어나면서부터 지배계급과 피지배 민중들에게 달리 다가왔다. 지배계급은 모든 생산 수단을 항상 독점하려 하듯이 산도 독점할 대상이었다. 자신들만이 차지할 명당자리, 목재의 산출처, 남의 생산을 바탕으로 부와 시간을 독차지하고 풍류를 즐기는 놀이터이자 사냥터였다. 그에 비해 민중에게는 지배계급의 수탈과 억압을 피하고 삶의 터전을 이루는 은신처이며 안식처이자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모색하던 ‘반역의 거점’이었다. 민중적 이상향의 세계이기도 했다.
아직 사회적 생산력이 낮은 원시경제 상태에서 수렵과 채취로 삶을 꾸려나갈 때, 산은 바로 창조의 어머니였고, 때로는 범접할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외경스러움이 원시신앙의 대상이었다. 천왕봉 성모신앙도 그렇게 생겨났을 것이다. 남원군 산내면에서 실상사를 지나 들어가면 함양군 마천면에 백무동이 있다. 백무동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전설에 의하면 천왕봉에 성모가 살고 있었는데 남자와 교회하여 딸을 100명 낳았다고 한다. 전설이라 여덟명이라고도 하고 50명이라고도 하고 설이 분분하다. 이들이 처음 백무동 골짜기에서 살다가 전국으로 나가 팔도의 무당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천왕봉에 살던 성모가 우리나라 무당의 시조할머니가 되었고, 백무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 성모를 모시고 성모사가 고려시대 조선시대 후기까지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원시신앙도 계급사회가 발전하면서 지배계급에 대한 신화적 신앙으로 바뀌어 간다. 지리산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성도성모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고, 고려에서도 고려 태조의 왕비 위숙왕후를 산신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기록들이 얽히기는 하지만 원시신앙의 유습을 계급국가를 건설한 최고 지배자의 어머니로 대치시켜 신앙의 형태를 빈 새로운 지배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과 더불어 지리산 어디엔가 ‘이상향’이 있다는 설화가 이어져 내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상향을 찾으러 지리산을 찾았다. 이 이상향 설화는 한편으로는 도교적인 현실도피 사상을 품고 있으면서, 왕 중심의 계급사회에 대향하여 원시농경사회를 동경하는 민중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민중의 ‘새로운 사회’가 산 속에서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단재 신채호는 그래서 1920년대 「낭객의 신년 만필」에서 “온 조선 사람들이 다 죽든 말든 나 한 몸, 한 가족이나 잘 살면 그만”이라는 피난심리를 조장하는 짓들을 호되게 비판하며, “난을 토평할 인물은 많이 나지 않고 난을 피하려는 인사만 있으면 그 난을 구하지 못할 것이나, 우리가 모두 피난심리의 큰 적을 토벌하여야 할 것이다”고 소리쳤던 것이다.
민중에게 지리산은 먼 이상향으로만 인식되었던 것은 아니다. 지리산은 세상을 피해 들어온 화전민, 세상에 맞서 약탈을 일삼는 산적 떼, 봉건체제와 일제의 침략에 저항한 변혁세력과 민족투쟁세력들, 민족해방을 내걸고 싸웠던 빨치산들의 생활터전이었고 안식처였으며 거점이었다.
전근대 농업사회에서 가뭄이 들고 재해가 생겨도 세금이나 지대 수탈이 계속되면 민중들은 자기가 살던 터를 버리고 도망하여 떠돌거나 도적이 된다. 소극적인 저항이었다. 산으로 올라가 화전민이 되기도 한다. 산속까지 관의 수탈이 미치지 않는 것만도 삶의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화전으로 곡식을 얻고 산나물 산과일 골짜기의 물고기와 짐승 사냥으로 생활을 해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긴 겨울을 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럴때 마을로 내려가 부자집이나 관아를 터는 화적이 된다. 명화적이라고도 부른다. 화전민이 도적떼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기도 하고, 횃불을 밝혀가며 도적질을 한다고 부르기도 한 이름이다.
산은 또 나무꾼 사냥꾼 약초꾼의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그리고 소극적인 저항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거사’를 모의하는 거점이기도 했고, 적극적인 항쟁을 벌이다 자기가 살던 촌락사회 보금자리에서 살 수 없어 쫓겨난 민중들을 받아 품어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는 민중의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지리산에 얽힌 민중의 역사를 간단히 한번 훑어보기로 한다.
『삼국유사』에 보면 성품이 활달하고 재물에 얽매이지 않는 영재 스님이 있었다. 만년에 장차 은거하려고 남악(지리산) 대현령에 이르렀을 때 도둑 60여명을 만났다. 도둑들이 그를 해하려 하였으나 영재는 칼날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향가를 지어 불렀다. 도둑들이 감동하여 도리어 비단을 내주었으나 영재가 웃으며 “궁벽한 산중으로 들어가 일생을 살려고 하는데 재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였다. 이에 도둑들은 칼과 창을 버리고 머리를 깎아 영재의 제자가 되어 함께 지리산에 숨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김유신, 고려의 왕건이 지리산 산적을 토벌하거나, 잡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미 신라시대 때도 지리산은 도둑들의 근거지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난을 모의하고 일으켰던 정여립과 이몽학, 이인좌가 지리산 세력과 손을 잡고 거사를 도모하려 했다.
1862년 2월 4일 단성에서 봉화를 지핀 농민항쟁은 2월 6일 진주로 번졌다. 수곡 장날을 이용하여 읍회를 개최한 농민들이 먼저 덕산장시를 치고 본격적으로 항쟁을 시작하였다. 남명 조식의 덕천서원과 산천재가 자리잡고 있는 바로 그곳이다. 지리산과 가까운 자락이다.
1870년 이필제가 역시 덕산장터와 대원암을 근거지로 삼아 변란을 도모하였다. 밀고자의 고변으로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이필제는 네 차례나 농민항쟁과 변란을 일으켰거나 일으키려고 했던, 요즘식으로 말하면 직업적 변혁꾼이었다.
다시 1894년 농민전쟁에서 지리산은 농민군 2대 장군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개남과 관계를 맺게 된다. 제1차 농민전쟁과 ‘전주화약’을 맺고 집강소 체제에 들어갔을 때 김개남은 남원을 근거로 하여 지리산 산적과 화적 그리고 창우 재인을 묶어 용맹한 ‘천안부대’를 만들었다. 흩어져 있던 지리산 주변의 소외된 민중들이 새 세상 건설을 위한 ‘농민전쟁’ 과정에서 하나로 묶여지게 된 것이다. 지금부터 100여년전 반봉건 반침략 투쟁으로 일어났던 농민전쟁은 그 자체로서는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지만 이후 우리 근현대 변혁운동에서 커다란 정신적 지주가 된 역사의 사건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지리산은 또한 외적이 침범했을 때 나라를 지키려던 이들이 치열하게 싸웠던 터전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가 그렇고,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의병전쟁 때도 그랬다. 대표적인 사람이 을사조약이후 지리산을 근거로 싸웠던 의병장 고광순이다. 그의 비가 지금 연곡사 뒷쪽 수풀속 저만치에 세워져 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체제가 말기로 가면서 ‘민족말살정책’과 ‘병참기지화정책’을 쓰며 민족의 존재를 말살시키고 이 땅의 젊은이들을 강제노동 수용소로, 전쟁터로, 정신대로 몰아 넣었다. 그 때도 지리산은 뜻 있는 젊은이들을 품어 주어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을 준비하게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되었지만 그 해방은 우리의 힘으로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며 이룬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또 다시 해결하여야 할 커다란 과제를 안게 된 불완전한 것이었다. 식민지 질서를 청산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일, 토지를 개혁하고 우리의 피 땀으로 이룬 일본인들의 재산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민족경제의 토대를 튼튼히 마련하는 일, 민족해방운동에 앞장섰던 민족지도자들과 민중의 대표들이 자주적인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일 등을 수행하여야 했다. 자주적인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민족해방운동에 앞장섰던 지도자들과 민중은 이 과제를 해결하려고 치열하게 노력하였다. 그러나 38선을 중심으로 남북에는 각각 미소 군정이 수립되었고, 청산되었어야 할 친일 민족 반역 세력은 미군정 비호아래 일제시대 그들이 차지했던 지위와 경제력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남한에서 만이라도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 확대하려고 단독선거 단독정부 분단정권을 획책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를 저지하고 자주적인 민족국가를 수립하고자 일어났던 것이 1948년 제주 4.3항쟁이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14연대는 제주 4.3항쟁 진압을 거부하고 여순봉기를 일으켰다. 14연대 ‘반란군’은 김지회, 홍순석 중위의 지휘로 광양, 벌교, 구례, 곡성을 점령했지만 토벌군의 반격을 받아 지리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1946년 ‘10월 항쟁’ 이후 경찰의 탄압을 피해 입산한 사람들, 단선반대투쟁을 수행하면서 조직된 야산대들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투쟁을 벌였다. 그로부터 지난한 투쟁은 피와 좌절, 염원과 전망이 섞이며 계속되었고, 당국은 55년 5월 23일 지리산에서 빨치산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발표를 하였다.
아주 간략하게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역사를 훑어보았다. 이렇게 보면 지리산은 그냥 산이 아니라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이 땅의 민중이 좀더 나은 삶의 조건을 만들고 나아가 조국과 민중의 자유롭고 해방된 세상을 위해 젊음을 바친 죽음의 무덤이라고도 할 수 있다.
힘들게 지리산 자락과 계곡 능선을 밟고 오르며, 지리산 갈피 갈피에서 흘러 내려 강을 이루고 주변에 마을을 이루면서 살아온 이 땅 민중의 삶과 치열한 민중의 역사와 함께 지리산이 주는 자연의 아름다움, 전망이 확 트일 때의 시원함 또한 놓치지 말고 생생하게 보고 느껴야 할 소중한 것들이다. 민중적 미의식 또한 사람답게 사는 삶의 중요한 가치이며,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필요한 커다란 힘이다. 나아가 사람이 자연과 동화되어 어떻게 가장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삶을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또한 사회적 문제와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구례읍. 마산면
구례의 중심지역인 구례읍과 마산지역은 당시 구례지역의 좌익 활동을 펼치던 남로당의 간부들이 많이 있어 그 주변 인물들의 피해가 많았다. 당시 군당 위원장이었던 양순규를 비롯하여 마산면당위원장 손진식, 장덕수 민청위원장 정원모, 좌익활동가 선태섭 형제 등이 중심 인물이었다.
여순사건이 발발하고 10월 21일 새벽 구례까지 그 영향이 미치자 당시 구례경찰서에 수감되어있던 일반 수감자들을 사건에 관계없이 모두 처형하는 사건이 일어나 사건초기에 70여명이 학살되었다. 아직 누구에 의해서 왜 이런 명령이 하달되었는지 밝혀지지 않은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현재 봉성산에 집단 매장되어 있다.
구례 지역의 민간인 학살자의 대부분도 여순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들로 여순사건이 진압된 후 학살되었는데 초기에는 좌익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많았으며 후기에는 빨치산 활동가와 의용대 활동을 하면서 빨치산에 의한 희생자와 <전봇대 사건>과 같이 보초를 섰다가 군인들에 의해 내통하였다는 이유 등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많았다.
마산면 청내리의 경우는 한 마을 청년 백여명 이상이 희생되고 마을이 없어지기까지 하였는데 대부분이 빨치산에 동조하거나 좌익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구례 지역에서 희생자가 많이 발생 하였던 것은 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이 희생된 뒤 진압차 내려온 가족인 백인엽씨의 무리한 진압작전을 이유로 들고 있다. 마산 지역의 증언자 대부분도 무고한 사람을 백인엽이 죽였다고 증언을 하는데 간전이나 문척 지역도 마찬가지로 알려져 있다.
① 산동면
구례군 산동면은 1948년 당시 인구는 10,000명 정도로 추정되며, 구례군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남원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여순사건 당시 산동면은 마을 증언자들의 증언들을 토대로 하면, 반군 14연대가 1948년 11월초 산동면 상위마을에 잠시 주둔하다가, 남원으로 진격하던 진압군 국방경비대 12연대와 조우하면서 상황이 발생하였다.
1948년 11월 4일 구례 주둔 진압군 제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은 남원 전투사령부작전 회의 참석차 15시 30분경 구례읍을 출발 산동면을 경유하여 남원으로 가는 도중 산동지서 부근에 매복 대기중이던 반군의 불의의 기습 공격을 받아 전사하게 된다. 구례의 비극적인 사태는 진압군 제12연대 연대장 백인기 중령의 전사를 시작으로 구례의 사태는 급전직하면서 험악한 상황으로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이에 진압군은 반군 14연대가 잠시 주둔한 산동의 중동국민학교 교정에 계엄사령부를 설치하고 곧 바로 산동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진압 소탕작전에 나섰다. 또한 이를 계기로 반군 14연대가 직접 주둔한 상회마을을 전격 소개하고 전소시키는 등 초토화작전도 동시에 병행하였다.
이후 진압군은 임시 계엄사령부인 중동국민학교로 산동주민 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좌익 혐의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숫자 미상의 수백 명을 농협 창고에 발가벗겨 가다놓고 수용하였다 한다(겨울철에 10여일을 이렇게 가다놓아 얼어 죽기도 하였다). 그리고 1년여 동안 주둔하면서 산동지서 산록에서 형식적인 조사로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을 수십 차례에 걸쳐 감행하였으며, 지리산 일대에서 토벌 되어 끌려온 2천여명 이상의 사람을 ‘꽂쟁이’ ‘신방모퉁이’ 등에 집단 매장하였다. 특히 꽃쟁이의 경우는 1천 5백여명이 집단으로 매장되어 있어 시급히 유골발굴을 해야할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떄 산동지역에서 여맹활동을 하던 백부전씨가 오빠를 대신하여 처형장에 끌려가면서 부른 자작곡 노래는 지금도 듣는 이로 하여금 처연한 그때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는데, 그 노래가 바로「산동애가」이다. 지금도 구전되어 오는 터라 여기에 전문을 실어 본다.
山洞 哀歌
1. 잘 있거라 山洞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어보지도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골을
멍든 다리 절어 절어
다리머리 들어오는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없이 쓰러졌네
대사 : 살기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열아홉 꽃봉우리 피어보지도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곳에 나는 간다
노고단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너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
2. 잘 있거라 山洞아
山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情을 맺어놓고
회오리 찬 바람에
부모효성 다 못하고
갈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없이 쓰러졌네
※ 위의 노래는 트롯트 풍으로 여순사건 당시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 상관마을에서 여성동맹 활동을 하며 살던 ‘백부전’(여성, 19세)씨가 1948년 12월경 총살 현장에 끌려가며 지어 부른 노래이다. 그러나 이 노래는 당시에 완성된 노래는 아니고 이후 구전되어 레코드 판으로도 출판되었다가 금지곡이 되었다 하며, 지금도 산동마을 촌로들은 곧잘 이 노래를 기억하며 부르고 있다 한다. 대표적으로 홍순례씨(61세)가 노래를 잘한다고 한다. 또한 이 노래는 작가 유기수의 소설 「지리산에 피는 꽃은 시들지 않는다」상, 하권에 실려있기도 한다.
② 광의면
구례군 광의면은 구례군 서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산동면과 용방면, 남쪽으로는 구례읍과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마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비교적 구례군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부터 한국전쟁이 끝나는 빨치산 토벌 종료시까지 당시 광의면은 마을 증언자들과 인민위원회 면당 조사 자료들을 종합하여 보면, 아직 정확한 피해 상황은 알 수 없으나 대략 200여명 정도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이 지역은 지리적 위치상 지리산 산록과 길게 접한 마을이 많아 좌우익 양측에 의한 피해 상황이 속출하고 있어서 이데올로기에 의한 희생이 큰 지역으로 보인다.
오죽하면 ‘낮에는 국군, 밤에는 빨치산’이라는 말이 회자되었겠는가? 빨치산은 보급투쟁을 위해 주로 밤중에 양민들의 식량 약탈과 강제부역을 일삼았으며, 이로 인해 낮이 되면 토벌대인 국군은 이를 좌익 동조자라 하여 학교와 같은 운동장에서 마을 단위로 전 주민을 모아놓고 재판없이 공개 처형을 하였다. 이에 대해 빨치산은 마을 입구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대한청년단 무장대를 급습하여 어김없이 보복을 가하는 형태를 취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토벌대인 국군은 지리산 산록 마을인 난동․온동․당동․방광․수월․당촌․월곡․용전마을에서 빨치산에 식량을 빼앗기고 강제로 짐을 날라준 억울한 양민들을 빨치산 동조자라 하여 방광국민학교에서 수십명을 몇차례에 걸쳐 공개적으로 학살하였으며, 광의국민학교에서는 대한청년단 무장대가 빨치산을 생포하여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만행의 극치를 보인 것이다. 이는 모두 재판없이 현장에서 즉결처분하는 형태로 이루워 졌다.
간전, 문척 현장
구례군 간전면은 사건 당시 인구 4,000명으로 이루워진 구례군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광양 백운산을 뒤로, 남쪽으로는 순천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1948년 11월 중순경 여순사건 토벌 당시 간전면은 마을 증언자들의 증언과 인민위원회 면당 조사 자료들을 종합하여 보면, 반군 지창수 부대가 백운산을 넘어 이 지역에 잠시 주둔하면서 군인가족이나 순경가족, 친일파 등 30여명을 총살하였으며, 이때에 주민들이 양곡과 부역에 동조하였다 하여 토벌대인 국군으로부터 처참하고도 혹독한 상황을 당하게 된다.
또한 토벌대인 국군은 구례 주둔 진압군 제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이 남원 전투사령부 작전회의 참석차 남원으로 가던 도중 산동지역에서 반군의 기습에 의해 전사하게 되자, 그 후임으로 백인엽 소령이 연대 지휘권을 인수받아 구례중앙국민학교에 연대 CP를 두고 구례지구 전투를 지휘하면서부터 백인엽식 토벌작전이 구례전역에 걸쳐 전개되었다.
이 상황에서 간전과 문척도 그 상황의 예외일수는 없었다.
토벌군은 간전에 진입하여서 곧 바로 그 보복작전의 일환으로 애꿎은 주민들을 호명이나 조사도 전혀없이 마을 단위로 전 주민을 간전국민등학교 후천 천변으로 끌고 나와 소총과 기관총을 난사하여 80여명의 양민학살을 자행하였으며, 동방천 다리에서도 13명 정도가 같은 상황에 처해졌다고 한다.
또한 백운산과 인접한 5개 마을 주민들을 인근 논에 집합시켜 놓고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을을 전소하였다 한다.
구례군 문척면은 구례군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간전면과 나란히, 남쪽으로는 순천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1948년 11월 중순경 여순사건 토벌 당시 문척면은 마을 증언자들의 증언과 인민위원회 면당 조사 자료들을 종합하여 보면, 이 역시 간전면과 거의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토벌대인 국군은 주민들을 호명이나 조사도 전혀없이 마을단위로 전 주민을 끌고 나와 구례경찰서 후정 연병장에서 소총을 난사하여 100여명의 양민학살을 자행하였다 한다.
대 성 골
- 지리산 대성골 전투(52.1.17)
ㅇ 빨치산 몰살의 비운을 간직한 협곡
1952년 1월 17일은 지리산 온 골짜기를 가득 메워버릴 것처럼 함박눈이 내렸다. 그날 날이 저물면서 빗점골, 거림골, 신흥 등지의 방면에서 빨치산이 대성골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음날 새벽쯤에는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눈 덮힌 대성골 전체가 빨치산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순덕(정순덕)이 가늠하기에도 1만 명의 대병력이 대성골에 빽빽히 들어찬 것이다. ...... 빗점골 의신부락 뒤쪽에서 토벌대들이 언제 야포를 끌어다 놓았는지 금세 대성골로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스무 발 이상이 동시에 작렬했다. 귀청이 찢어질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달아나는 것 같았다. .......
시간이 지날수록 희생자는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토벌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훤히 내려다보며 토끼몰이를 하듯 포위망을 좁히며 포격을 퍼부어 대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동작이 빠른 지휘관이나 전사들은 토벌대와 정면으로 부딪치며 포위망을 뚫고 나갔지만 대다수는 독 안에 든 쥐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어 자빠졌다. 발에 걸리는 것이 시체들이었다. 하루종일 퍼부어 대던 포격도 총격도 해가 지면서 주춤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쪽 하늘에서부터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 ...... 머리 위에 떨어지는 시커먼 물체는 휘발유가 가득 차 있는 '드럼통'이었다. 비행기 편대는 네 번 아니 다섯 번쯤인가 대성골 골짜기에 마개가 빠져 있는 드럼통을 삐라처럼 뿌리고 다녔다. 그러다 마지막 편대에서는 주먹만한 것을 골짜기 곳곳에 날려보냈다. 바로 소이탄(燒夷彈)이었다. 그 순간부터 하얀 눈으로 덮혀 있던 대성골은 시뻘건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정충제 기록, [실록 정순덕], 상권, 272~276쪽 발췌 인용)
쫓겨 지친 대원, 소대, 비무장이 속속 박다내골(일명 의신골, 하동군 화개면)로 모여들었다.
박다내골은 험한 바위가 우뚝우뚝 솟은 험상궂은 골짝
저마다 배낭을 털어 비상 쌀알을 씹는다 나눠준다.
지휘관들은 수군수군 머리를 짰다.
박다내골을 눈치챈 토벌대는
사단병력을 총동원
박다내골을 몽땅 포위
쥐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않을 태세
포탄과 총알이 나무뿌리를 날리고 바위를 쪼갰다.
악, 악, 여기 저기서 육박전
아, 처참한 비명 아우성
굉음
눈보라
흙보라
피보라
비행기는 가끔 소이탄을 떨어뜨려
빨치산을 태워 죽인다.
포위 나흘째
올가미는 바작바작 좁혀왔다.
박다내골 마지막은 비장해
딴 도리가 없다고 판단한
팔로군 출신 인민군 장교 5연대장 김모는
'조국과 인민이 주는 마지막 훈장'이라며
동료 여섯을 그들 소원대로 차례로 쏘고
남은 한 방으로 자기의 심장을 쐈다.
1952년 1월 18일의 일이다.
죽은 자 가운데는
노영호 사령관을 따라
짧은 생애나마 노사령관을 그렇게도 사모해마지 않던
구빨치 허귀연이 끼어 있었다.
이때 단 한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이 있었으니
5연대장의 연락병 임창해(당시 20세)다.
허리에 총을 맞고 신음중 국군에 구출되었다.
이 '죽음의 골'에서
이영회와 노영호 두 지휘관은
각각 다른 방향에서 약간의 대원을 이끌고
필사적,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갔다.
1952년 9월 광주형무소에서
노영호의 동생 노영수는
우연히도 임창해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허리부상을 앓고 있었다.
둘은 꿈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예, 수백 명은 죽었을기라요."
"경냄이 녹아난기가......비무장까지 합치모온 8백은
넘을끼더."
<이기형 지음, {죽음의 골}, [실록 연작시 지리산], 일부 인용>
이상의 기록은 1952년 1월 18일 소위 백야전(白野戰) 사령부 제3기 토벌작전 때 이곳 대성골에 사면초가격으로 몰린 빨치산 수백 명이 처절한 죽음을 맞이했던 사실을 적은 것이다.
의신마을 정윤균(鄭允均, 59세)씨는 전후 대성골은 마치 숫더미와 같았는데 여기에 서캐가 낀 것처럼 하얀 인골들이 널려 있었다고 증언하고 후에 나병환자들이 몰려와 나병에 인골이 어떤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추스려 가져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성골 상류인 '폭포수골'과 세석 서쪽 병풍바위 아래쪽 일대에서 인골을 목격한 사람은 많다. 당시 아비규환의 협곡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빨치산들의 유해임이 틀림없다. 지금도 대성골을 등반하다보면 큰 거목이 별로 눈에 안 띄고 대체로 팔뚝 굵기의 잡목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당시의 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의 빨치산 투쟁에 있어서 커다란 분기점을 이룬 백야전 사령부의 강력한 토벌작전 중 가장 큰 작전이자 전투였던 이 대성골에서의 '빨치산 몰살 사건'은 이처럼 여러모로 확인된다.
그런데 '실록 정순덕'에서는 대성골이 그후 닷새 동안 불길에 휩싸였다고 적으면서 빨치산들의 대화형식을 빌어 약 칠팔천명이 몰살한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정순덕이 약 만명 정도의 빨치산들이 몰려들었다는 얘기와 함께 이것은 상당한 의문이 따른다. 과연 그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었을까? 부질없는 숫자놀음 같지만 기록의 정확성을 기한다는 의미에서 한번 검토해보기로 한다.
우선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을 군경측 기록인 '공비연혁'을 보면 1952년 1월 5일 현재, 즉 대성골 참극이 벌어지기 전 지리산 일대 잔존 공비수를 1,250명으로 추정하고 있고 그 사건 두 달 후인 3월 31일 현재에 잔존 공비수를 332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결국 1,000명 정도의 인원감소를 말해주고 있으며 그것도 대성골에서 뿐만 아니라 지리산 전역에 해당되는 얘기이기 때문에 '실록 정순덕'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실제 군경측 기록을 보면 대성골 참극이 과연 있었는지조차 의문시될 정도로 대성골에서의 지대한 전공기록에 무관심한 듯한데 이런 분위기는 '남부군'에서도 마찬가지다. '남부군' 하권을 보면 당시(남부군에서는 백야전 사령부가 3기 작전기간을 1952년 1월 9일~31일까지로 잡고 있어 시기적 차이가 있다) 남부군 주력부대가 대성골에서 크게 벗어난 곳을 이동하지 않았는데도 (중산리 - 삼신봉 - 한신골 - 벽송사골 - 백무골 - 중산리골 - 세석 - 칠선봉 - 대성골 - 삼정골 - 빗점골) 빨치산 투쟁의 중요한 획을 그은 대성골의 비극에 대해서는 따로 적고 있지 않다('남부군' 하권, 138~166쪽 참조).
다만 백야전 사령부가 설치될 때, 즉 1951년 11월 지리산을 포함한 소백산맥 일대의 잔존 빨치산 수를 1,500~1,6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어 역시 같은 빨치산 기록인 '실록 정순덕'과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 숫자도 그나마 악양보투때와 수도사단 제1차 대공세 때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실록 정순덕'에서는 엄청남 과장과 착각을 범하고 있는 셈이다. 이기형 씨의 '죽음의 골'이란 시에서 나오는 수백 명(혹은 800명 이상)의 사망자 수가 그런 대로 정확한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박다내골'과 '대성골'은 지명상으로나 실제상으로 다소 차이가 있음은 굳이 생략하기로 한다.
피 아 골
피아골은 아름다운 계곡이다. 특히 피아골의 아름다움은 봄철 진달래, 여름철 우거진 녹음, 가을철 단풍, 겨울철 설화로 이어지는데 그 가운데 가을의 단풍은 지리산에서 으뜸이다. 눈이 시리도록 선명하고 고운 피아골의 단풍은 찾는 이를 매료시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피아골의 단풍은 삼홍(三紅)이라 하여 산이 붉게 불타는 산홍(山紅), 붉은 단풍이 맑은 담소에 비치는 수홍(水紅), 사람이 들어서면 사람도 붉게 물드는 인홍(人紅)이 절경이다. 그 가운데 표고막터에서 삼홍소 간 1km사이의 빼어난 풍경이 피아골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그토록 아름다운 단풍을 빚어내는 피아골은 연곡천의 상류인 연곡사로 부터 주릉을 향해 40여리에 걸쳐 이어져 있다. 반야봉 중턱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주릉과 불무장등릉, 그리고 노고단과 왕시루봉릉 사이의 원시림지대를 누비며 서남으로 돌고 돌아 왕시루봉을 따라 내려가 섬진강에 이른다. 노고단과 반야봉 사이 주릉에서 빚어지는 피아골의 물은 울창한 수림과 아름다운 수석을 감돌아 늘 청정함이 깃들여 있다. 즉 반야봉의 중턱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삼도봉과 노루목, 임걸령, 불무장등 사이의 원시림지대와 기암괴석을 감돌아 내려오다 노고단과 질매재에서 흘러내린 계류와 하나가 되면서 웅장하고 깊고 깊은 계곡을 만든다.
피아골의 어원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계곡 중간의 직전마을이란 지명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연곡사에서 2km정도 오르면 조그마한 마을이 나오는데 바로 직전(稷田)마을이다. 이는 오곡 중의 하나인 식용 피(稷)를 가꾸는 밭, 즉 피밭이 있던 마을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옛날부터 이곳에서 오곡 중 하나인 피를 많이 재배했다는 의미가 바로 피아골의 어원이다. 처음에 피밭골(稷田谷)이던 것이 피아골로 전화된 것이다. 피아골은 장장 40여리에 이르지만 차량이 직전마을까지 들어갈 수 있는 탓에 그 깊이를 그렇게 크게 느낄 수는 없다. 피아골 등반은 차량이 들어가는 직전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직전마을에서 선유교까지는 30분 정도 걸리는 비포장의 넓은 길이다. 왼쪽의 아름다운 계곡미를 맛보며 거닐면 상큼한 기분이 압도한다.
선유교를 건너면 비교적 너른 야영장이 나온다. 표고막터라 부른다. 일제시대 때 이곳에서 표고버섯을 재배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름철에 한해 이곳에서 야영이 가능하다는 국립공원 안내 입간판이 이색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지리산 어느 곳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야영장으로 둔갑해 있는 현 시점에서 구태여 이곳에 한해 여름철 한철만 야영을 허가한다니... 화장실 시설과 함께 잘 다져진 야영장 바로 아래 큰 나무 밑을 살펴보면 그물망을 쳐놓은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서울대 농대에서 만들어 놓은 채종장이다. 종자를 받기 위해 조그마한 그물을 나무 아래에 설치해 놓은 것이다. 표고막터에서 부터는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선유교를 건너지 않고 그대로 계곡 오른편으로도 등산로가 이어져 있으나 잘 이용되지 않고 선유교를 건너 표고 막터를 거쳐 계곡 왼쪽길이 많이 애용된다. 울창한 활엽수림에서 내뿜어는 상큼한 산소를 마시며 잘 다듬어진 돌길을 걷는 기분이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평탄하며 완만한 길을 흠뻑 물든 단풍의 정취에다 계류의 청아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피아골 단풍의 백미로 산홍, 수홍, 인홍 등 삼홍을 맛볼 수는 삼홍소까지는 30분 정도면 당도한다. 86년에 가설된 삼홍교가 주변경관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삼홍소에서 10여분 오르면 구계포다리가 나오고 여기서 바라보는 피아골의 경치는 극치를 이룬다. 완만한 암반위로 영롱한 오색의 구슬들이 층층 계단을 타고 쏟아지는 장관은 탄성을 절로 나게 만든다. 절경을 뒤로 하고 다시 10여분정도 오르면 남매폭포가 기다린다. 3~4m의 아담한 쌍폭이다. 여기서 다시 조금 오르면 와폭이 있고 기다리던 피아골 산장이 나타난다.
인골 한 트럭분이 나왔던 피아골산장터 피아골산장은 지리산의 뭇 산장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계곡변에 위치하고 있다. 좌우로 물이 흘러서 산장 앞에서 만나는 그리고 양쪽으로는 능선이 둘러쳐 있어 금방 풍수지리상으로 명당임을 느끼게 한다. 지난 1984년 82평방미터, 60명 수용규모로 이 산장이 지어졌는데 온통 돌투성이인 주변과는 달리 지금 산장터는 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산장 앞 50m 전방에 있는 화장실 건물터도 마찬가지(함태식씨의 설명에 의하면 풍수지리상 산장에서 앞의 합수물이 안보여야 천혜의 명당인데 바로 화장실 건물이 그 역할을 한다고). 1984년경 산장을 지을 때 유일한 흙지대인 지금의 산장터에서 거의 한 트럭분의 매장된 인골이 나왔다. 옛 빨치산들의 유해인데 지리산 여타 지역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누렇게 잘 썩은 이 뼈들은 그후 무슨 특효가 있다고 믿은 나병환자들 차지가 되었다. 아직껏 역사적으로 복권되지 못한 불명예스런 이름으로, 영혼마저 올바로 천도되지 못하고 구천에 맴돌아야 하는, 비참하게 이 골짜기에서 죽어간 역사의 패배자들을 잠시 생각해본다.
문수골 현장
문수골은 구례군 토지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 마산면과 인접해 있는 지역이다.
문수골은 임진왜란을 피하여 김해 김씨가 정착하여 개척한 후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밤재 불당 중대(영암촌) 상죽의 작은부락이 형성되었다.
문수보살이 문수암에서 수년간 수도한 결과 성불하였다 하여 문수리라 되었으며, 밤재는 옛부터 밤나무가 많아서이고 불당은 문수암이 있어서이며, 중대마을은 영암에서 이주한 장씨가 들어와 부락을 형성하였다 하여 문수리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였고, 중대마을은 대가 많다하여 중대라고 칭하였다.
불당마을은 옛부터 전해오는 전설로는 암행어사 박문수가 민정을 살피기 위해 문수리에 들렀다가 주위 경관의 아름다움에 도치되어 용소의 맑은물에 속세의 마음을 씻는다는 뜻으로 세심이라는 글자를 혼신의 힘을 다하여 새겼다고 전하며, 지금도 뚜렷하게 두 글자가 원형대로 보전되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골짜기에 1948년 10월경부터 빨치산들이 산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이곳주민들의 생활이 비참해지게 된다. 특히 지리산은 적어도 51년 3월까지는 완전한 해방구였다.
그 해방구 중에서도 문수골은 빨치산 유격대의 사단본부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특히 방앗간을 설치하면서 쌀을 찧었고 심지어는 총탄까지도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문수골에는 전투원보다는 비전투요원들이 훨씬 많았다고 한다. 약 3000여명정도…, 그런데 상황이 급전된 것은 51년 12월 수도사단이 지리산으로 집결되면서 문수골 주변에 있는 자연부락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수도사단 본부가 있었던 밤재를 비롯하여 불당마을 중대 등은 특히 피해가 컸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들에게는 총알이 아깝다고 총으로 죽이지도 않고 중대마을에서 대를 비어서 죽창을 만들어 새끼줄로 묶어놓고 아무데나 찔러 죽였다고 한다. 자세한 상황은 앞으로 잘 조사해 보아야 하겠지만 각 마을별로 적게는 몇명에서 많게는 수십명에 이르는 피해자가 속출하였고 사단본부가 있었던 자리에서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참고로 당시 구례 유격대의 참모장이었던 장을수(73세, 광의면 연파리 공부마을)씨의 증언에 따른 구례 유격대의 조직 편제는 다음과 같다.
<구례 유격대 조직 편제>
대 장
교 육 대
정치위원
참모장
병 기 과
의 무 과
부대장
후 방 과
투쟁인민과
여성단체과
1연대
2연대
3연대
성 삼 재
천은사를 기점으로 구절양장처럼 굽이치며 노고단까지 이어진 20㎞의 비경의 관광도로 그 옛날 성이 다른 3명의 장군이 지켰던 고개라 하여 성삼재(1,102m)라 했다. 아슬아슬한 도로와 까마득한 벼랑 위로 길이 나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 백미다. 특히 천은사에서 6㎞ 지점엔 거의 360°를 도는 코너가 있어 아찔하다. 시암재와 성삼재에 주차장과 휴게소, 전망대가 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 도보로 40분 거리로 어린이나 노약자들도 천천히 걸어올라 갈 수 있다. 휴가철에 성삼재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자정부터 새벽 사이의 야음을 틈타 움직이는 것이 극심한 정체를 피하는 길이다
노 고 단
천왕봉과 더불어 노고단은 우리 민족의 영원한 믿음의 성지로 전해져 오고 있다. 동서로 1백리라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솟아 있으면서 지리산이란 큰 궤를 같이하며 우리 민중의 추앙을 받아온 민족신앙의 영지로 남아있는 이들 두 봉우리는 높이면에서는 해발 1,507m로 천왕봉의 그것과 비교해 다소 큰 차이를 보이지만 역사 이래로 우리 민중에게 부여해온 의미는 천왕봉에 비해 결코 뒤짐이 없다. 일명 고선봉으로 불리는 노고단은 서남방향으로 17~18도의 완만한 경사지대로 대략 35만평 규모의 고원지대다. 이 곳은 신라시대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사는 선도성모의 사당인 남악사를 세워 올렸는데 지금은 화엄사 앞으로 옮겨져 와 구례군민들이 해마다 곡우절을 기해 약수제와 함께 산신제를 올리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다. 남악사의 유래는 「삼국사기」제사 부분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삼산과 오악 이하의 명산대천에 대사 중사 소사의 제사를 나누어 지냈는데 중사를 지내는 오악은 동쪽 토함산, 남쪽 지리산, 서쪽 계룡산, 북쪽 태백산, 중앙부악 (부악․지금의 팔공산) 이었다고 적혀 있어 지리산에서 남악으로 정해져 제사를 올리던 명산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제사를 올리던 곳은 노고단이며, 남악사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처럼 국가차원에서 제사를 올린 의미는 무엇인가. 사학자들은 당시 이같은 국가의식을 민중들이 받들던 성모신앙과는 그 의미가 다른 것으로 풀이하고 노고단에 남악사를 세워 국가차원에서 의식을 진행한 것은 한편으로는 민중들의 별도 성모사당인 성모사를 위압하려는 측면도 게재했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신라 시조의 어머니를 모시는 남악사를 세워 민중 차원의 성모신앙(무속신앙의 큰 흐름)을 국가차원에서 흡수하려 했던 것으로 보아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례는 신라이후 고려 조선을 거쳐 변함없이 면면히 이어져 왔으나 한말 융희 2년 (1908)에 폐사된 것으로 전해진다.
남악사는 지난 69년 12월 전남도와 구례군에 의해 화엄사 앞에 복원됐다. 신라시대 이래로 우리민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해 온 노고단은 또한 화랑의 심신수련장으로 널리 활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멀리 세석고원까지 오가며 심신을 수련하던 화랑의 드높은 기상이 아직도 노고단 언저리에 남아 있는 듯 하다.
우리 민족의 안식처이며, 기개를 단련하던 노고단은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수난의 아픔을 겪는다. 민족신앙의 성지이며, 낙원이던 이 곳이 일제시대 외국인 선교사들의 피서용 별장으로 둔갑한 것이다. 한 여름에도 시원하고 맑은 물이 샘솟아 내를 이루며 빼어난 절경을 간직한 이곳에는 당시 외국인 별장이 52동이나 들어섰다 한다. 더욱이 구례지방에서 조선인 인부들은 벽안의 선교사들을 가마에 태워 이곳 별장까지 오르내렸다 하니 당시의 서글픈 시대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노고단 외국인 별장은 그후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발발하면서 반란군들의 근거지로 이용됐다가 국군 토벌대에 의해 점령됐으나 이후 빨치산의 거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두 불태워져 지금은 옛 건물의 흔적과 잔해만 남아 아팠던 현대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 건물이 불태워지면서 당시 노고단 일원의 울창한 수목들도 때아닌 화마에 휩싸여 지금도 노고단 일대는 큰 수목은 좀체 보이지 않고 싸리 등 관목류만 남아있다. 노고단은 잘 알려진 비경의 운해 이외에도 숱한 명승지를 같이하고 있으며, 탁 트인 시계로 멀리 무등산을 확연히 볼 수 있는가 하면 다도해의 장관도 조망할 수 있는 아름답고 신비한 곳이다. 예부터 노고단 주변에는 종석대 관을 만복대 집선대 문수대 청련대 등 명승지가 산재해 있다고 전해져 오는데 주위에 크고 작은 바위군들이 찾는 이를 감탄케 한다.
지금은 노고단 턱밑까지 도로가 뚫려 연간 찾는 이가 수십만을 헤아리고 있으나 모두들 이들 명승지를 미쳐 보기도 전에 다도해에서 실려온 운무가 산허리를 감싸고 흐르면서 운해만리 구름바다를 이루다 다시 점점이 흩어지는 비경에 홀리고 만다.
겨울철에는 백설이 천하를 감싸안은 풍광을 연출해 내 또 다른 노고단의 모습을 선사한다. 화엄사 경내에 들어서기에 앞서 고개를 들어 노고단을 향하면 상록수 위로 은가루를 뿌린 듯 덮여 있는 노고정상의 설경은 노고단의 진면목을 새삼 실감케 해준다. 햐얀 겨울속의 노고단 진풍경은 이듬해 봄 늦게까지 계속된다. 고원 지대의 겨울은 좀체로 떠나려 하지 않으면서 새봄 진달래가 움틀 무렵 끝났다 싶으며 아쉬운 듯 다시 눈과 함께 왔다.
지리산 悲歌
- 최수희 작사/ 작곡/ 노래
1. 철쭉잎 피고지는 반야봉 기슭엔
오늘도 옛 같이 안개만이 서렸구나
피아골 바람속엔 연하천 가슴속엔
아직도 맺힌 한을 풀길없어 헤매누나
아-아- 그 꿈을 안고 희망을 안고
한마디 말도 없이 쓰러져간 푸른 님아
오늘도 반야봉엔 궂은 비만 내리누나
2. 써래봉 단풍속엔 치밭목 산중턱엔
눈을 뜬채 묻혀져 간 잊지못할 동무들아
시루봉 바라보며 떠있는 쑥밭재야
잊었느냐 적에 노래 통곡하는 물소리를
아-아- 그 옛날 검은 꽃 희망의 꽃
한마디 말도 없이 쓰러져간 푸른 님아
오늘도 써래봉엔 단풍잎만 휘날린다.
3. 추성동 감도는 칠선의 여울속에
굽이굽이 서린 한이 깊이도 잠겼구나
거림아 대성골아 잔돌의 넓은 들아
너는 알지 눈보라가 울부짖는 그 밤들을
아-아- 그 옛날 꿈을 안고 희망을 안고
한마디 말도 없이 쓰러져 간 푸른 님아
오늘도 천왕봉엔 하염없이 눈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