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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권 두 언
제97회 총회주제는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다시 희망이 되겠습니다”(마
25:40, 레 19:18)입니다. 총회주제를 결정하기까지 총회주제위원들과 여러 번
의 세미나를 가졌는데 그중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교회 밖에서 본 한국교회’에 대
한 발제였습니다. 언론의 2/3가 한국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글을 기고하
고, 교회를 다니는 청년들을 포함하여 절반이상의청년들이교회를 신뢰할 수없
다는반응, 수년내에한국사회에교회 부동산이 매물로 쏟아져 나올것이라는발
제의 내용들은 다소 과격하지만 오늘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목회자
들에게 큰 충격과 안타까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한국교회100년역사속에서초기에선교사들로부터전달된복음의씨앗은한국
에서놀랍게성장하여숲을이루었습니다. 복음의능력으로미개지같았던조선에
교회와 더불어 병원, 고아원, 학교 등이 설립되었고, 한국 사회 속에서 예수 그리
스도는 이 땅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개 교회 중심과 교회물량주의, 분열과 갈등 등으로 지탄의
대상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예수의복음을 들고 사회를향한섬김
과 말씀의 고백을 통해 세상의 산 소망이신 예수를 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고백들을 모아 제97회총회주제로“그리스도인, 작은이들의벗”으로정
4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하고 가난한 이들, 다음세대, 장애인, 다문화가족, 북한동포의 벗, 친구가 되는
것을 부제로 정했습니다. 올해는 특별히 교회현장에서 이러한 작은 이들을 위해
교회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제시하기 위해 「주제적용 지침서」를 함께 출판할 것입
니다. 한국교회가 보여 준 놀라운 부흥과 역사가 다시 한번 나타날 수 있도록 예
수 그리스도의 섬김과 겸손을 통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2012년 총
회 창립 100주년을맞이하도록 인도해주신하나님의은혜에 부끄럽지 않도록 새
로운 100년을 향해 작은 이들을 섬기며 세상에 희망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총회는2013년개최될제10차세계교회협의회(WCC) 부산총회를준비하는
한편, 한국교회의분열과 갈등을중재하고화합과협력으로그리스도의일치를이
루며, 세계교회에한국교회의가시적인성장의모습뿐만아니라 내실이다져진성
숙한모습을 보여 주어야할 것입니다. 여전히 남겨진 분단의숙제가운데 민족의
통일을 위해 기도하며 고난받고 있는 형제들을 향한 나눔과 섬김의 소명을 감당하
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신 것을 기억하며 민족과 세계의
희망이 되기 위하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한 회기 동안 제97회 총회주제를 정하고,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와 세계 속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며, 소명을 잘 감당하기 위한 안내서인 「총회주제해
설집」을집필한 총회주제연구위원들과 이 책을발행하기 위해수고하신 한국장로
교출판사 관계자 여러분들에게 총회와 전국 교회를 대신하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
니다.
2012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장 손달익 목사
5
발 행 사
년 제네바 1541 시의회가종교개혁자칼뱅(John Calvin)을다시초청했을때, 제
네바에 돌아 온 칼뱅은 시의회 의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
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심으로 나를 다시 부르는 것이라면 여러분 가운데 만연해
있는범죄와성적방탕함을청산하십시오. 내생각에‘복음의가장큰적들’은교황
도, 이단도, 유혹하는 자들도, 독재자도 아니고 ‘나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착한
행실이 없는 죽은 믿음이 무슨 쓸 데가 있겠습니까?”
이 말은 지금으로부터 470년 전, 칼뱅이 했던 말이지만 이 말을 오늘의 우리에
게 적용한다면 오늘 한국교회의 가장 큰 적은 부정과 불의를 일삼는 정치계나 경제
계도, 사이비 이단도, 타 종교도 아니고, 바로 한국교회 안에 복음이 지닌 ‘공적
신앙과 도덕성’이 결여된 교회 지도자와 교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때문에한국교회가사회적인냉소와지탄의대상이되고있습니다. 목회자와교인
들이예수그리스도의정신을따르지않는데문제가있습니다. 목회자는물론이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만일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면, 분명
히세상사람들과는‘다르게’ 살아야합니다. 교회와그리스도인은‘타자를위한존
재’(Being for others)로서세상과이웃을섬기도록요청받고있습니다. 그런데왜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합니까?
6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닐 앤더슨에 의하면, 행위 이전에 신앙의 ‘정체성’ 문제로 귀착됩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갱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닌 정체성 회복에 우선과제를 두어
야할것입니다. 이과제 수행을염두에두고서, 지난해총회에서는‘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회복’에 역점을 두기로 하고, 향후 5년간 ‘그리스도인’ 제하의 총회주제를
연속시리즈로지속하기를결의하고, “그리스도인, 세상의소금과빛”을제96회총
회주제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총회의 의지를 반영하기 위해 금년도 총회주제연구
위원회는3차에걸친세미나와6차의모임으로다음과같이제97회총회에제안하
기로 결의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마 25:40, 레 19:18, 참
고:요 15:13-15)을 주제로 설정하고, 하위 영역으로 (1) 가난한 이들의 벗, (2)
다음세대의 벗, (3) 장애인의 벗, (4) 다문화가족의 벗, (5) 북한동포의 벗을 부제
로 채택했습니다. 그리고 교회표어를 “다시 희망이 되겠습니다”로 정했습니다.
자료개발과 관련해서 본 위원회는 주제에 부합한 이론과 실제로 구분해서 본
「총회주제해설집」과함께목회현장에서응용할수있는「주제적용지침서」를따로
출판하기로 하고, 본서와 같이 집필진을 구성했습니다.
본 「총회주제해설집」과 「주제적용 지침서」를 위해 수고해 주신 집필자 여러분
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본해설집과적용 지침서의 출간을 위해애써주신한
국장로교출판사 사장 채형욱 목사, 그리고 총회 실무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2012년 9월
총회주제연구위원장 고용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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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제97회 총회주제해설서
C ‧ O ‧ N ‧ T ‧ E ‧ N ‧ T ‧ S
권두언 _ 3
발행사 _ 5
제1장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고용수 / 8
제2장 주제성구의 성경적 이해 민경진 / 20
제3장 주제의 신학적 이해 신재식 / 26
제4장 한국교회사적 고찰을 통해 본 오늘의 현실과 과제
:한국교회 100년, 한민족의 벗이 되었던 한국교회 이야기 안교성 / 34
제5장 교회의 사회윤리학적 책임과 교회의 방향 임성빈 / 41
제6장 교회의 교육목회적 과제와 방향 박봉수 / 49
제7장 교회의 선교론적 과제와 방향 한국일 / 57
제8장 목회자가 본 한국교회의 현주소와 목회방향 1 조재호 / 64
제9장 목회자가 본 한국교회의 현주소와 목회방향 2 박진석 / 71
제10장 목회실천을 위한 적용지침: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 오창우 / 79
주제설교 작은 이를 위한 그리스도인 손달익 / 88
8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제1장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1. 들어가는 말
총회창립100주년을앞두고, 주제연구위원회는제97회총회주제를“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주제성구 마 25:40, 레 19:18, 참고:요 15:13-15)으로, 부제
로 (1) 가난한 이들의 벗, (2) 다음세대의 벗, (3) 장애인의 벗, (4) 다문화가족의
벗, (5) 북한동포의 벗을, 그리고 교회표어를 “다시 희망이 되겠습니다”로 정했다.
주제 선정의 배경은 현 한국교회가 직면한 위기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회복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2. 위기의 한국교회
최근 한국교회는 양적으로 정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사회적 공신
력을크게상실하여쇠퇴일로의총체적인위기를맞고있다. 교회에들어오는사람
은 줄고, 교회를떠나가는 사람은 늘고있기 때문이다. 왜그럴까? 교회가 교회답
지못하고, 교인이교인답지 못하다는불신감, 곧‘세상의소금’과‘세상의빛’이라
고용수 목사
제1장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9
는 그리스도인 됨의 정체성의 부재 내지 빈곤 때문이다. “왜 개신교가 타 종교에
비해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더 잃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한미준(한국교회미래를
준비하는모임)과한국갤럽이공동으로조사한결과의분석자료(한미준, 한국갤
럽, 「한국교회 미래 리포트」, 두란노, 2005)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지난 2월 주제위원회 2차세미나에서 권혁률(CBS) 선교기획국장이 “밖에서보
는 오늘의 한국교회” 제목으로 발표한 내용 일부를 여기 소개한다. “2011년 이후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시련의 시기를 겪어 오고 있다.
지난해 말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 가운데 개신교를 신뢰
한다고 응답한 사람은17.6%에 불과해 6명당한 명 꼴이었으며, 해마다신뢰도가
하락하고있는것으로 나타났고, 특히 젊은 층 사이에는 더 심각하다.” “한국교회
언론회가 1월초부터 3월 23일까지 중앙 일간지(국민, 경향, 동아, 문화, 서울, 조
선, 중앙, 한겨레, 한국, 한국경제)의종교와관련된 보도내용을분석한자료에의
하면, 개신교에 대한 보도를 분석한 결과 총 159건의 보도 가운데 긍정적 보도는
4.4%, 사실 보도는 32.7%인 반면에 부정적 보도는 무려 62.9%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기껏해야20% 남짓하던개신교에대한 부정적인보도가이렇게수
직상승한 것은 충격적이 아닐 수 없다.”
3. ‘아래에서’ 작은 이들을 섬기는 교회
기독교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 사건에서 구체화되었
다. 하늘보좌를비우시고사람의몸으로오신아기예수가누워있던비천한말구
유는 예배의 자리가 되었고, 그의 복음사역(ministry)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가난
한 자, 억눌린 자, 멸시받는 자, 목마른 자, 병든 자 등 작은 이들의 벗이 되고자
하는 그들을 향한 긍휼과 사랑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에 몸소 달리심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심고자 하신 하나님 나라 문화의 실체가 온전히 계시되었다.
이 같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섬김의 공생애 사역, 그리고 죽으심의 자리는 그
리스도의정신을이어갈그의몸인오늘의교회가서서, 관심을가져야할선교의
터전이다.
오늘의 한국사회 속에 자리한 아기 예수를 만나 경배해야 할 구유는 과연 어디
일까? 오늘 우리가 섬겨야할 자리, 즉 갈릴리는 어디이며교회가세워야 할십자
10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가의 언덕인 골고다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이 물음들에 대한 응답의 자리는 곧
오늘의한국교회가서서예배해야할구체적인삶의자리이며, 곧사역의현장이기
에 이질문들은오늘의한국교회가반드시응답해야할 물음이다. 그리고 이물음
은 오늘의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교회갱신을 향한 창조적인 물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올바른 자화상을 세우기 위해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가치를 명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공생애 사역 중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
상의 명예와 권력을 꿈꿀 때마다 ‘가장 큰 자’는 ‘섬기는 자’임을 일깨워 주셨다.
제자들 사이에‘누가 큰자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을 때(눅 9:46) 예수님은
그에 대한 응답으로 어린아이를 앞에 두고서 하나님 나라의 상징으로 소개하셨다
(마 18:3-4).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다”(마 19:14)라고 말씀하
셨다.
그레고리 A. 보이드는 그의 저서「기독교국가의신화」에는 세상의통치방식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을 비교하여 ‘위에 서는 힘’과 ‘아래에서 섬기는 힘’으로 구
분하니 교회의 존재 양태와 삶의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교회는 이웃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위에
서는 힘’ 보다 ‘아래에서 섬기는 힘’을 더 신뢰하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처럼 고
통을 감수하고 ‘아래의 힘’을 택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곧 교회이다. 세상은
칼의 힘(무력, 지배)을믿지만, 교회는십자가(희생, 섬김)의 힘을 믿는다. 세상
권력자는‘눈에는눈, 이에는이’라는복수의칼을 뽑아든다. 그러나 교회에 속
한 사람은 칼이 아닌 십자가를 손에 들고 은혜를 베푼다.
이같이 교회가 보여 주는 ‘아래에서 섬기는 힘’은 우리가 알기 어려운 모호한 개
념이아니다. 그것은 골고다 언덕위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예수님의 자기희
생적인‘사랑의힘’이다. 예수님은오직 아버지 하나님께서부여하신‘아래에서섬
기는 힘’에서 우러나는 유일한 권위만을 행사하고자 하셨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골고다언덕위에세워진십자가의길을선택하셨던것이다. 그십자가에달리심으
로 예수님은 ‘아래에서 섬기는’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완벽하게 집약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따라서예수님을따르는교회의존재방식에는언제나골고다언덕에
서보여주신예수님의희생과사랑의본성이그바탕에깔려있다. 골고다의‘십자
제1장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11
가’는 존 하워드 요더가 지적했듯이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에 놓인 우회도로가 아
니고,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 그 자체’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유감스럽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방
식을따르지 않고, 예수님이 거부하신 마귀의유혹에쉽게 끌려가고 있다. 눈앞의
성장에 급급한 나머지 즉각적이고 덜 희생적인 세상의 방식을 따라간다.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보다 세상 나라 기업의 경영원리를 더 선호하고 모방하려고 한다. ‘위에서 서는 힘’에 의존해서 세상을 움직이고 싶어한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의
희생적인죽음을통해‘아래에서섬기는힘’의진리를보여주셨는데, 교회는‘아직’
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 현실에 대한 깊은
불신감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스위스의사폴투르니에는그의저서「죄책감과은혜」에서자기를찾아온환자
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는 오랜 옛날에 지은 죄로 인해 죄책감을 품고
사는남자, 10년전에행한낙태를마음에서떨치지못하는여자등이러한환자들
이교회를찾아진정으로 구하는것은‘은혜’라고말한다. 그러나교회에서이들이
경험하게되는것은수치심, 정죄의식, 형벌에대한위협등이다. 한마디로은혜를
찾아들어온이들이 교회에서‘비은혜’만받고교회를떠나간다는것이다. 은혜의
향기를 발하도록 부름 받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비 은혜의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으니 이것은 성령께서 탄식할 일이다.
4. 작은 이들의 벗
1) 작은 이들
“네이웃을네자신같이사랑하라”(레19:18). 이말씀은‘하나님사랑’(신6:5)
의명령과함께구약의율법가운데가장큰계명이요(마22:38) 예수님께서주신
새 계명(요 13:34)이다.
구약의 율법에 나타난 이웃 사랑의 계명이 의미하는 ‘이웃’의 개념은 당시 사회
적약자의대명사로알려진‘고아, 과부, 나그네, 가난한이들’을지칭하고있다(레
19:13-14, 신 10:17-19, 15:11). 그리고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새 계명에서 사
랑의 대상인 이웃을 ‘강도 만나 약탈당하고 실신 상태에서 신음하고 있는 자’(눅
10:30), 곧‘돌봄이필요한자’를이웃의개념으로 해석했다. 이같이신구약성경
에서보는이웃이란 사회적인약자를의미하고, 그러한자들을 ‘작은이’로규정하
12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고 있다.
작은 이들을 위한 관심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
중에 하나이다. 물론 여기서 큰 자, 작은 자의 개념을 예수님은 인격적인 의미가
아닌사회적용납의폭으로사용하신다. 사회적으로존중받고인정받는사람이‘큰
자’라면, 사회적으로버림받고소외당하는사람을‘작은자’라고규정한것이다. 예
수님은 자신을 ‘작은 자’와 동일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 서
게 될 사람들에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5장의 문맥(마 25:
35-36)에따르면, ‘작은이’들이란병든자, 감옥에갇혀있는자, 가난한자, 나그
네, 헐벗은자들을말한다. 이같이작은이들에대한관심과사랑은바로예수님의
삶과사역의중심이었다. 기독교는언제나사회적약자들, 곧작은이들을돕는일
에 열심이었다. 물론 교회가 역사적으로 사회의 강자 편에서 약자를 괴롭힌 적도
많았지만, 교회가어려운사람들을돕는일에앞장서온것도부인할수없는사실
이다.
예수님의 새 계명(마 22:37-39)의 정신에서볼 때, 작은 이들의 벗이 되어 섬
기는사랑의행위를 ‘하나님사랑’의명령에부차적인것으로나, 혹은그것과 분리
된 것으로 보질않는다. 오히려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하나님을사랑하지않
는것으로간주한다(요일4:20). 따라서작은이들을향한사랑의행위는곧신앙
적인행위임을의미한다. 그러므로작은 이들속에숨어 있는아픔들을읽어내는
신앙의 눈을 통해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경청하고 응답해야 한다.
마더테레사는이렇게말했다. “몸져누운병자들, 쓸모없다고생각되는사람들,
사랑받지못하는사람들, 알코올중독자들, 죽어가는사람들, 자포자기한사람들,
외로운사람들, 버림받은사람들, 병으로신음하는사람들, 인생에서 모든 희망과
신념을 잃어버린 사람들, 미소 짓기를 잊어버린 사람들, 사랑과 우정의 따뜻함을
잃어버린 사람들, 이들은 우리에게 위로받고 사랑받고, 도움받기를 기대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등을 돌린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께 등을 돌릴 것입니다.” 작
은 이들의 벗이 되어 함께 나누고 돌보는 한국교회의 섬김이야말로 한국의 사회
속에 다시 새롭게 희망을 줄 수 있다.
2) 벗됨(친구)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제1장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13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
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으니 내가 내 아버지
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3-15).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기독교 복음은 예수님의 벗(친구)됨이고 그 우정의
절정은 곧 자기희생이다.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일러
주시는것은우리를 당신의친구로여기시기때문이다. 성자예수님께서는죄인인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시기 위해 희생의 제물로 이 땅에 오셨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종이 아닌 벗(친구)이라면 우리 역시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위해 기꺼
이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좋은 벗(친구)이 되
어야함을 인식한다면, 그리스도인은자기보다잘난사람과도친구가되어야하지
만,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도 친구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7)를 통해 비록 자신과 적
대관계의사람(강도만난유대인)일지라도‘긍휼의마음으로’ 상처를싸매어주고,
돌보아 주었던 것처럼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 진정으로 다가가 필요한 도움을 줄
때에만 우리가 그들의 참된 벗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친구를 위해 목숨
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으로친히 우리에게 벗이 되어주셨다. 이같
이 벗(친구)됨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5.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1) 가난한 이들의 벗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
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
니라”(신 15:11). ‘가난’이란 물질적인 의미뿐 아니라 힘없고 궁핍하고 억압받고, 소외된 온갖 어
려운 처지에 있는 모든 상황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이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웃사랑’의 교훈을 실천하는 공동체
였다. 이들은회개와용서뿐만아니라연합, 사랑, 나눔, 섬김의공동체였다. 그들
의 간소한 생활양식과 나눔을 통한 ‘서로 돌봄’은 신앙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에
게도 칭송을 받았다(행 2:47).
14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하나님 은혜의 가시적 표시는 경제적 나눔과 직결된다. 예컨대, 삭개오는 개인
회심자들의모범이 되었고(눅19:8),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은기독교신앙공동체
의 모형이었다(행 2:44-46). 최후의 심판 비유(마 25:31-46)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의 기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신앙고백이 언어가 아니라 도
덕적인행위로표현되어있다는것이다. 이비유는작은이들에게도움을줌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인자’를 섬기는 자들에게 구원을 약속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난한 이들 가운데 현존한다는 것의 의미는 명백히 종말론적인 차원
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볼 때, 그 안에 있는 ‘작은 이’를 보지 못하면 예수를 바로
본것이아니며, 역시가난한자를돌보면서그안에있는예수를보지못하면바른
섬김일 수 없다. 가난한 이에게서 예수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예수에게서 가난한
자를볼수있어야한다. 가난한이들의벗됨은지극히높으신인자가형제중지극
히 작은 자 곧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가운데 숨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이들을 개인적으로 도울뿐 아니라, 교회는 불의한 사회제
도를개선하려는제도적인노력도함께해야한다. 부자와나사로의이야기(눅16:
19-31)에서부자는자기집문앞에앉아있는거지에대해무관심했고, 그에대한
어떠한조치도하지 않았다. 부자는나사로를학대해서가아니라무관심과무자비
함때문에음부로내려갔다. 따라서한국교회는“네게한가지부족한것이있으니”
지적하시는 예수님의 충고에서부터 다시시작해야할 것같다. 그것은“가서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와서나를따르라”(막10:21)는말씀이다. 그러므로그리스도의몸인교회
는 이웃사랑의 섬김 정신으로 가진 자들에게 그들의 부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물질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합당하게 사용하라고 가르쳐야 한다.
서로를향한무제한의책임의식이공동체(코이노니아)의본질이다. 내가부유한
삶을 살고 있다면 그들이 내 대신 가난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필요하
다. 예수의대속적인고난말고도이땅에는이웃들의작은대속적인 아픔이있다.
내가 건강한 것은 누가 내 대신 아프기 때문이요, 내가 행복한 것은 누가 내 대신
불행을짊어졌기때문인지도모른다. 그들의 아픔을대속적인것으로보고우리가
그들의아픔에공감하며동참할때, 서로연대감을가질수있고서로함께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이와 같이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윤리는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는 나눔과 섬김이다.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이 가난한 이로 오셨고, 실제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셨
제1장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15
다. 예수님의가난을통해우리를풍요롭게하신모범을따라교회와그리스도인들
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참된 벗이 되어 주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2) 다음세대의 벗
광야 40년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모세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세대와 그 다
음세대를위해준 교육명령(신6:4-9)이가나안입국 이후 여호수아시대까지는
잘지켜졌으나, 사사시대에들어서면서단두세대만에하나님을잊어버리기시작
했음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세대(가나안 입국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
어난다른세대(가나안에정착한2세대)는여호와를 알지 못하며여호와께서 이스
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10).
여기 ‘다른세대’란이전의세대(가나안입국세대)와는질적으로완전히다른 세
대로 변질되었다는 뜻이다. 사사기 이전의 세대는 그들이 직접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고, 체험한 세대로서 은혜와 감격이 있는 세대였는데, 그들 다음세대에 와서
는 쉐마의 내용(신 6:4-9)을 중심으로 한 교육명령을 준행하지 못했다. 그 결과
다음세대가 ‘다른 세대’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당면문제는 우리의 세대가 끝나고 우리의 다음세대가 과연 신
앙을 계승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다른 세대’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다음세대의 벗이 되는 일에 교회의 목회자들과 기독교 가정의 부모들
이 힘을 모아하나님의교육명령을준행해야할 것이다. 지금유럽의교회는위기
에 직면해 있다. 과거의영국교회는개신교회의 모태가된 교회였고, 세계 선교를
주도했던 청교도적 신앙의 소유자들로서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한국 장로교회의
모태가된 교회이기도 하다. 이러한영국교회가 이제는힘을잃고 무너져 가고있
다. 그이유가무엇일까? 그것은교회와가정이다음세대의벗이되는일에실패했
기때문이다. 다음세대를 위한신앙교육을소홀히함으로인하여그들의자녀들이
하나님을떠나신앙의대가끊어져버린것이영국교회의현주소이다. 내일의한국
교회가 이와 같지 않다고 누가 단언하여 말할 수 있을까?
교회교육의중심기관인 교회학교가주5일수업의실시에 발맞추어주말을포함
한교회학교의교육구조를과감하게바꾸어야한다. 부모와함께하는교육목회패
러다임으로 변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학교 학생들이 ‘교육의 대상’
이기 이전에 ‘목회의 대상’으로, 그리고 성인 부모들이 ‘목회의 대상’이기 이전에
16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교육의대상’으로보는인식의전환이요청된다. 따라서교회학교 교사의헌신못
지않게 부모와 함께하는 가정의 쉐마교육이 이루어지도록 교육목회 차원에서 부모
교육이철저히이루어져야 할것이다. 한가정, 한가정이작은교회로세워질때,
교회활동들도 활력을 얻게될 것이다. 따라서각 가정이 작은교회로서역할을충
실히 감당하고, 교회가 큰 가족으로서의 신앙의 울타리가 되어서 서로 협력할 수
있어야한다. 다음세대 부흥을 위해교회와가정의유기적 협력관계 못지않게, 교
회는 학교(기독교 학교)와의 상호 협력 체제도 더욱 강화해야 한다.
3) 장애인의 벗
일반적으로 장애인은 신체 또는 정신의 장애로 인해 생활에 불편을 겪는 사람으로
이해된다. 보건복지부에등록된장애인의숫자는2010년12월기준으로2,520,000
명으로2009년보다91,000명증가했다. 그러나고용노동부의보고에의하면, 우
리나라장애인(시각, 청각, 심장, 신장, 언어장애, 발달장애, 정신지체인, 지체장
애인, 만성질환자) 수를400만 명으로추산하고있다. 장애인 실태조사에따르면
장애인의84.2%가가족에의지하고있다. 사후장애자녀가어떻게될지몰라부모
들은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고 죽고 싶다.”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세계인권선언을비롯해우리나라헌법과장애인차별금지법, 장애인인권협약
에서는정신장애인의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 정치, 경제, 사회문화의각 영역에
서 차별을 받지 않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인구고령화로
50~60대 장애인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장애 조기발견을 비롯해 장애예방을 위
해 건강관리 및 사고예방을 위한 대책이 시급하다.
예수님의관심과사역의대상을살필때, 작은이들속에는장애인들도함께포
함되고있음이분명하다. 복음서를읽어 보면, 예수님의치유사역 가운데 대부분
은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언어장애인, 신체장애인, 정서장애인등을대상으
로 한 그분의 긍휼하심과 사랑의 결과였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앞장서서그들의벗이되어야한다. 그들의벗이되기위해서는‘장애인이나와다
르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교회 안팎의 장애
인들의 벗이 되어 구체적인 돌봄을 통한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4) 다문화가족의 벗
한국에서의 다문화가족은 우리와 다른 민족 또는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
제1장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17
들이포함된가정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그리고다문화가족이란 결혼이민자또는
귀화허가를받은자와대한민국국적자로이루어진가족을말한다. 한국인남성과
결혼한이주여성가족, 한국인여성과결혼한이주남성가족, 이주민가족(노동자,
유학생)을 포함한다. 더불어 혼혈아로 불리던 한국인과 결혼한 이주자 가족의 자
녀들에 대해서도 다문화가족의 자녀로 부르고 있다. 행정안전부의 통계자료에 의
하면, 2010년 1월 현재 결혼 이민자 및 혼인 귀화자 181,671명(혼인 귀화자:
56,584명, 결혼이민자125,087명)으로전체외국인주민의15.9%에해당된다. 다
문화가족 자녀들은 121,935명으로 2009년도에 비해 14,246명 증가했다.
국내 거주 외국인이130만 명을 돌파함으로써 이제는단일민족국가라는용어를
자랑으로 삼아 왔던 시대를 벗어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통합의 시대가 열린 셈이
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와 피부색이 다르다고 배척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한국
국민의정체성을부여하고, 그들이이웃의 동질감을 갖도록 돕는게 우선이다. 그
러나 다문화가족의 삶은 여전히 열악하다.
유네스코가2001년선언한‘세계문화다양성선언’ 제2조에서‘다른문화적정체
성을 지닌 사람들과 집단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을 보장’하도록 되어 있다. 2005년 ‘문화적표현의 다양성보호와증진협약’에의하면, 소수민족의문화및약소국의
문화보호와 다양성 확보를 위한 노력을 경주토록 하고 있다는 점은 국적에 기초한
다문화가족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총회가지난‘생명살리기10년운동’을통해외국인근로자및이주노동자선교와
생명살림 실천을 위해노회별로교회를선정해서분야별(한글교실, 상담, 성경공
부, 여성노동자, 결혼이주여성, 자녀교육등)로집중지원한실천사례들은다문화
가족의벗됨의좋은 모델이된다. 이같이다문화가족들을향한벗됨은한국교회로
하여금 다문화, 다민족 공동체로 가게 하는 일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5) 북한동포의 벗
북한에서는지금도절망스러운상황이계속되고있다. 전해오는소식에의하면
북한땅에는현재300만명이기아로 고통당하고있다. 마치10여년전에수많은
탈북자가 증언한 ‘고난의 행군’ 시기와 비슷한 북한의 사회상을 다시 듣고 있다.
의학전문가에의하면, 출생후 3세까지는 뇌세포의90%가형성되는중요한시기
이다. 이 시기에 충분히 영양섭취를 하지 못하면 인지능력이 저하되어 만성적인
정신장애와성장장애를겪게된다. 이는삼대에이르기까지유전적인영향을미치
18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게된다. 이문제는미래통일시대에서의남북한주민통합과도연계될때에야기될
수 있는 사회문제이므로 한국교회는 이들의 벗이 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우리는사상이나이념을초월하여한형제로서한동포로서바라만
볼 수가 없다.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 거주하는 북한이탈주민(새터민)은 2009년 5월
16,241명이다. 그러나다른통계에의하면, 2011년현재25,000명을돌파했고, 제
3국가에서 대기하는 탈북자 수는 약 2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동안 정부의 지원하에 많은 단체들이 이들의 복지와 교육 및 취업 등을 열심
히 돕고 있으나이들이자립, 정착하기에걸림돌이되는 여러가지사회적인문제
점들이노출되고있다. 그중가장심각한문제는현재우리사회가‘새터민’ 개인의
문화관습등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그들을 품을수있는여력도, 능력도, 마음도,
자세도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는 상황이란 점이다.
한국교회는 이들의 벗이 되어 통일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 총회가 앞장서서 복
지형 인간이 아니라 자립형 인간으로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도록 인식을 전환해서
신앙으로 이들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가족 공동체성을 현장화하는 사역에 네트워
크의 허브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
에 갇혔을 때에와서보았느니라”(마25:35-36)라는말씀에귀 기울이면서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북한동포를 도우라고 부탁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
답해야 한다.
6. 나가는 말:“다시 희망이 되겠습니다”
지난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는 빛과 소금으로 한국사회에 희망을 주어 왔다. 초
기에는 학교와 병원을 통해 계몽운동에, 일제 치하에서는 애국운동에, 6·25전쟁
이후에는 구제와 봉사를 통한 사회복지운동에, 1970~1980년대는 인권운동에 앞
장서서이민족의벗이되었다. 그러나지난20년동안한국교회는 신뢰성상실로
인한대사회적영향력의약화와 사회적 비판을 받아오고 있다. 그러나아직한국
교회에는희망이있다. 그희망의근거는첫째,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속에서 볼
수 있는 신앙의열정이다. 예배, 기도, 전도, 성경 읽기와공부, 헌금등의 신앙적
제1장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19
인열정은세계어느교회도추종할수없을것이다. 둘째, 한국교회와그리스도인
이보여주는희생과봉사의정신이다. 그러나이것만으로사회적신뢰성을회복하
기는 어렵다.
이제 한국인의벗이 되기 위해 한국교회가회복해야할과제가남아있다. 그것
은교회와그리스도인의정체성을회복하는일이다. 이정체성회복을위해다음의
세가지과제가남아 있다. 첫째, 영성의회복이다. 영적인성향 곧세상보다하나
님을사랑하는삶의태도를확립하는일이다. 현재한국교회는이신앙(영성)의본
질을잃고 있다. 오늘의한국교회는영적인것을 찾고 있는이들에게그들이싫어
하는위선적인영성, 곧종교적인것만을가지고 계속 답하거나, 강요하려 해서는
안된다. 둘째, 도덕성의회복이다. 교인들의정직한삶, 의로운삶, 그리고베푸는
선한 삶을 통한 ‘빛의 열매’(엡 5:8-9)를 맺음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 받을
수있어야한다. 그리고셋째, 공동체성(코이노니아)의회복이다. 한국교회는엄청
난인적, 물적자원과잠재력을지니고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아직도충분히나
누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요소는 개교회주의, 개교파주의 속
에자리하고있는 파벌의식, 우월의식, 그리고 이기주의이다. 이들 장애요소가공
동체운동과 연합운동을 해치고 그 결과 사회로부터 신뢰성을 잃게 하는 주된 요인
으로 작용한다.
오늘의한국교회가위기인것은사실이다. 그러나그희망은한국교회와그리스
도인 된 우리의 삶의 태도에 달려 있다. ‘아래에서’ 나누고 섬기는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영성, 도덕성, 그리고 공동체성을회복할 수만 있다면, 내일의한국교회는
분명히한국사회속에다시 새롭게 희망이 될수 있다. 한국교회는 21세기에하나
님께서 지구촌에 남겨 두신 남은 자, 하나님의 그루터기임에 틀림없다. 한국교회
의미래! 그것은우리의손안에있지않다. 그것은온전히하나님의손 안에 있기
때문에(시31:15), 우리는겸허히예수그리스도안에서오고있는하나님나라를
직시하면서 회개에 합당한 삶(열매)으로 다시 출발해야 할 것이다.
20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제2장
주제성구의 성경적 이해
<주제성구>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
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
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참고구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
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
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3-47).
1. 주제성구 이해
제97회총회주제는“그리스도인, 작은이들의벗”이다. 이주제는마태복음25:
민경진 목사
제2장 주제성구의 성경적 이해 21
40과 레위기 19:18을 근거로 정해졌다.
마태복음 25:40은 최후심판 비유에나오는말씀이다. 최후의 날, 임금이 보좌
에 앉아 오른편에 서 있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임금이 주릴 때에먹을것을주었고, 목마를때 마시게했고, 나그네 되었을때 영
접해주었으며, 헐벗었을때 옷입혀주었고, 병들었을 때돌보아주고, 옥에갇혔
을 때 와서 보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해 준다. 듣고 있던 이들이 반문한다.
자신들은 임금께서 주리시거나 목마르신 것을 본 적도 없는데 우리가 대접했다고
말씀하시니이해가되지않는다고말이다. 이들의질문에대해임금께서하신말씀
이40절이다. “너희가여기내형제중에지극히작은자하나에게한것이곧내게
한 것이니라”
무슨말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최후에 심판하실 때분명한 기준이 있는데 그
것은 지극히 작은 자를 정성껏 도와주었는가의 여부이다. 이 기준은 우리가 쉽게
수긍할수있고, 우리에게잘알려져있기도하지만, 본문에서말하고자하는핵심
을 좀 더 살펴보자.
우선본문은‘작은 자’를주린 자, 목마른자, 나그네, 헐벗은자, 병든 자, 옥에
갇힌자들로정의해주고있다. 요컨대경제적약자들이요, 사회적약자들이다. 약
자가된데는그이유가있을것이다. 게으름일 수도 있고, 자기관리부족일수도
있다. 또한사회적환경의문제나모함과억울함때문일수도있다. 하지만본문은
이에대해 어떠한 설명도하지않는다. 약자가 된과거의과정에 대해 변호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현재이다. 현재, 약자의 위치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다. 이 약자들이 홀로 살아가기에는 힘든 세상이므
로, 이들의필요를채워주는것이성도의마땅한삶이라는것이다. 거대담론이나
헛된 이상을 제시함으로써 약자들을 돕는 책임을 미루거나 방기하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약자가 가장필요로하는 것을 공급하라는 것이다. 주려있는 이에게
는 ‘밥’을,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주고, 나그네는 따뜻하게 ‘영접’해 주라는 것이
다. 요컨대, 구체적이면서도실용적인필요를채워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고보
가경고한대로헐벗고양식이없는자에게“평안히가라. 배부르길바란다”(약2:
14-16)는식의답변은결코대안이될수없다. 한국교회가작은이의참벗이되려
면 ‘추상적’인 구호 백 개의 나열보다는 한두 개라도 ‘실제적’인 방안을 모색해 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이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작은 자’들이 넘쳐나는데 어떻게
22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다도울수있을까? 이것은어찌보면유토피아적발상처럼무책임해 보이기도한
다. 하지만 본문이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는 대상은 단순히 ‘작은 자’가 아니라 ‘지
극히작은자’(40절)이다. 이에해당하는헬라어‘엘라키스토스’(evla.cistoj)는‘작
은’, ‘어린’, 혹은‘비중없는’ 등을뜻하는‘미크로스’(mikro,j)의최상급이다. 곧‘가
장 작은자’, ‘가장 어수룩한자’, 혹은 ‘가장 비중없는 자’란 뜻이다. 따라서 본문
은 약자들 중에서도 가장 약한 자, 주린 자들 중에서도 가장 주린 자, 병든 이들
중에서도최악의상태에있는환자를우선적으로칭하고있다. 물론본문이세상의
최(最)약자만 돌보면 되고보통 약자는돌봄의대상에서 열외될 수있음을 말하는
것은아니다. 하지만 따져보면일시에 모든 약자들을 치유할수는없으므로우리
가 더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들이 ‘가장 작은 자’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
다. 가장 작은 자는 자신이 당면하고 있는 지점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없기때문이다. 작은자를돕되, 가장도움을필요로하는이들이누구인가를
잘 선별하는 것은 지혜이며,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여기서한가지더생각해볼점이있다. 작은자를 돕는우리의자세이다. 본문
에서 오른편에 있던 자들은 자신들이 도왔던 자가 임금인 줄 전혀 몰랐다고 답변한
다. 곧 이들의 섬김과 봉사는 보상을 전혀 바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임금이었
기 때문에 훗날의 포상을은근히기대하며도운 것이 아니라, 약자를향한 긍휼의
마음과이들을향해 솟구치는 사랑때문에돌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사회적약
자를섬길때, 혹우리의선행이훗날구원의어떤긍정적인영향을미친다고생각
하며 돕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본문은 우리가 이 본문 ‘안’의 그 선행을 베푼
자들의 자세 ― 대가를 전제하지 않은 사랑의 마음으로 돌보는 것 ― 를 배우고
실천하라는 것이지, 이런 선행을 해야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을 것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은 한편 두려운 본문이다. 우리 곁에 늘 있지만
쉽게 외면하게 되는 ‘지극히 작은 자’와 임금, 곧 주님이 동일시되고 있기 때문이
다. 그동안 주로수직적신앙에몰두해 온우리성도들과한국교회에게경종을울
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주제성구중구약의레위기19:18은예수님께서여러차례인용한유명한말씀
이다(마19:19;22:39;막12:31;눅10:27 등). 레위기의전체주제는‘거
룩’이다. 상술(詳述)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하셨다. 곧 이스라엘은 ‘성민’(聖民)이요, ‘선민’(選民)이 되었다. 이에 이스라
엘백성들이왜자신들을선택하시는은혜를베푸시느냐고묻는다. 이에대해하나
제2장 주제성구의 성경적 이해 23
님께서는너희들이가장‘연약’하기때문에선택하셨다고답변하신다. 여기에덧붙
여이것이은혜라고 생각한다면, 왜 은혜를베풀었는지묻지 말고 ― 그것은 전적
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이었으므로 ―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삶, 곧 하
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 것을 요구하신다(신 7:6-11 참조).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길인가? 이에 대해 답해 주는 것이 레
위기서이다. 곧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다워지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는데, 하
나는 ‘예배’이고(레 1-16장), 다른 하나는 올바른‘윤리적 삶’이다(레 17-27장). 특
히19장전체는여호와께서거룩하시므로우리도거룩할것을요청한후에(2절), 이
웃과의관계에서어떻게살아야할것인지에대한 지침을제공한다(3-37절). 본문
인18절말씀도이런맥락에서주어진것이다. 이구절은이스라엘백성들과마찬가
지로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우리들 역시 깊이 생각해 볼 말씀이다.
본문은 해서는 안 될 것과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을 구분하고 있다. 우선 ‘원수
갚는일’과‘동포를 원망하는일’은하지말것을명한다. 이 부분을히브리어 성경
그대로직역하면 “너의 백성의자손들에 복수하거나 원한을 품지 말라”이다. 요컨
대동포에게보복하지말라는말이다. 반면, 본문은적극적으로해야할것을명한
다. 곧“네이웃사랑하기를네자신과같이사랑하라”는것이다. 이구절은히브리
어에서 흔히 사용되는 평행형식(A, B / ~A, ~B)으로 되어 있으므로, 보복하지
말아야 할 ‘동포’는 곧 ‘이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18절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웃에게 보복하지 말고, 오히려 더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본문은 이
명령이 다름 아닌 ‘여호와’의 명령이라는 점을 각인시키고 마친다. 사실 레위기
19장은 15개의 소단락을 통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실천하기 위한 강령들을 전해
주고 있는데, 거의 모든 단락이 “나는 여호와”라는 선언으로 끝나고 있다. 이것은
거룩은사회적실천을통해서 반드시구현되어야 하며, 여호와께서이를주시하고
계심을 보여 준다.
좀 더 부연해 보자.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보복하지 말 것을 명하고 있
다. 보복의 주체는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시94:1; 나1:2). 원수는 하나님께
서 당신의 시간에 반드시 벌주실 것이므로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
다(신 32:35). 우리의 경험을 반추해 보면, 악에 대한 보복과 응징은 결국 또 다
른 보복을 가져오는 악순환에 빠지게 됨을알게 된다. 성경은이런악순환의사슬
에서벗어나는길을 제시한다. 오히려 원수가주리면먹이고, 목마르면마시게 할
것을 명하신다(롬 12:20). 우리를 괴롭게 하는 원수를 오히려 ‘사랑’하라는 것이
24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다. 사랑하되, 우리가 우리자신을사랑하고아끼는정도로 사랑할 것을명하신다
(레19:18). 악을‘악’으로갚는것이 아니라‘선’으로 갚는것이라는 한차원 높은
신앙의 윤리를 요구한 것이다(롬 12:21). 사랑이야말로 보복의 악순환을 선순환
으로 승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 원수를 향해서도 사랑할 것을 명한다. ‘원수’를 향해서도 이
런 자세를 지녀야 함이 마땅하다면, 우리와 함께 사는 이 시대 ‘이웃’을 향해서는
두말할나위가없다. 둘러보면 우리의 사랑을필요로하는 곳천지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있다. 깊어지는 양극화로 가난을 극복할 희망은 사라지고 가난을
대물림해야 하는 운명 속에 사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경쟁사회에서 늘 공부에
쫓겨사는 청소년들이 있다. 참가르침의산실인 교실이 붕괴되고 왕따로 인해자
살하는학생들이급증하고있다. 북한에는기아와반인권에시달리는우리의동포
가 있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장애를 지니고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외국인근로자들도우리곁에어느덧많아졌다. 그뿐인가? 집에도교회에도
이런저런이유로주변인으로살아가는가족과교우들이있다. 이들을향해우리의
손을펴서사랑을베풀어야한다(신 15:11). 사랑을 베풀되, 자기 목숨을 버릴정
도로 사랑할 각오를 해야 한다(요 15:13-14). 나도 너도 그래야 하며, 주의이름
으로 모인 이 땅의 교회들 모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이번주제는“그리스도(=기독)인, 작은이들의벗”이다. 생각해보자. 누가기독
인인가? ‘기독’이라는 말은 가차문자이다. 영어 크리스트/크라이스트(Christ)를
한자로基利斯督(기리사독)이라고 옮겼고, 중국말로는 ‘지리스뚜’라고 발음했다가
축약형으로 基督(지뚜)로 쓴 것을 우리식으로 발음해서 ‘기독’이 된 것이다. 따라
서기독이란그리스도요, 영어로는Christ인 셈이다. 이 ‘Christ’라는단어는헬라
어‘크리스토스’(cristo.j)에서온말인데, 이말에해당하는히브리어는 마시아흐
חי ש מ) )이다(이에대한아람어발음은메시야이다). 곧그리스도인이란말은메시야
(messiah)라는 뜻으로서, ‘내가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은내가 이시대의 메시야
와 같은 존재로서 살겠다는 자기 선언이 되는 것이다.
주지하는바와같이‘메시야’라는말은‘기름부음받은자’(the anointed)라는뜻
이다. 기름부음받는것은구약에서성별(聖別)됨을의미한다. 그래서성별된직책
제2장 주제성구의 성경적 이해 25
인‘왕’, ‘제사장’, ‘예언자’를세울경우에만이의식이행해졌다. 기름을부어성별
된 직책을 부여받은메시야들은응당 각각의 직책에 맞게살아야했다. 참메시야
(the Messiah)이신 예수님 역시 이 직책의 의무를 다하셨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
령의 기름부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도 역시 ‘그리스도’라는 의미에 걸맞게 이
세가지기능을다하며살아가야할책임이있다. 곧우리는왕으로서, 예언자로서,
제사장으로서의책무를해야 한다. 왕은누구인가? 백성을보살피는자였다. 하나
님의창조세계를잘관리하고창조질서가혹훼손됨이없는지, 공의와정의가왜곡
됨이없는지살필책임이있다. 예언자(預言者)는하나님의말씀의대언자(代言者)
이다. 어그러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앙망하며기다리는자에게진리의말씀
을선포하여길을내는직책이다. 제사장은하나님과인간사이의화해자이자중재
자이다. 백성의 어려움을 살펴 하나님께 호소하는 자다.
우리가 이와 같은 세 기능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참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반대로참그리스도인은 세상을향한책무를 다해야 한다. 특히성경은 가
난한 자들, 약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명히 보여 준다(습 3:12 등). 따라
서우리그리스도인들은예수께서무리를보시고불쌍히여기신그마음(마9:36)
을 본받아, ‘작은 자’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들을위한즉각적 필요를 제공해야 하며, 이들이복음을접해 새생명을얻을
기회를 앗아가는 사회적 병폐와 불의에 항거해야 한다. 이처럼 약자들을 돌보는
사회적책임을다하는‘작은자들의벗’이되는그리스도인이될때, 우리주님께서
한국교회를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며 구원 받는 자가 날마다 더해졌던 초대교회
(행 2:47)처럼 사용해 주시리라 믿는다.
26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제3장
주제의 신학적 이해
1. 왜 작은 이들인가?
올해 우리 총회주제는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이다. 그리스도인이 ‘작은
이’들의‘벗’이라는말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그런데도이 말이 새삼스레
묵직하게 다가온 까닭은, 100이라는 숫자와 한국교회가 처한 그다지 녹록치 않은
현실때문이다. 올해는교단 총회가 설립된 지100년되는해다. 지난 100년을되
돌아보고새로운100년을시작하는역사적인시점에서장밋빛미래를그리기는그
리 쉽지 않아보인다. 개신교에대한 사회적 평판이하락하고교회성장이 정체되
는상황에서, 교회가직면하고풀어야할교회현실이나한국사회의문제가간단하
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나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는 다양한 형태의 양극화와 관련되
어 있다. 대형교회와 개척교회의 사이의 교회양극화, 부유한사람과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경제 양극화, 기성세대와 다음세대 사이의 세대 양극화, 일반인과 장애인
사이의건강 양극화, 남한과 북한사이의이념 양극화, 순수민족문화와다문화 사
이의 문화 양극화 등이 그것이다. 이런 다양한 형태의 양극화가 홀로 또는 다른
양극화와 결합하면서 우리 시대와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신재식 목사
제3장 주제의 신학적 이해 27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다양한 양극화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이분법적인
편가르기의 결과이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특정 기준에 따라 경계를 만들고 담을
쌓아하나를둘로나눈다. 대형교회와소형교회, 부유한사람과가난한사람, 기성
세대와다음세대, 건강한사람과장애를가진 사람, 남한과북한, 단일민족문화와
다문화는편가르기의결과로생긴양극화형태이다. 이런양극화는좋은것과좋지
못한 것이라는 이분법적 가치평가를 적용하고, ‘중심부’와 ‘주변부’라는 우열의 계
층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형교회, 부유한 사람, 기성세대, 건강한 사람, 순수혈통
주의등은 이원론적 양극화에서 우월한 가치를 갖고중심부에자리 잡고 있다. 이
에 반해 소형교회, 가난한 사람들, 다음세대, 장애인, 북한동포나 새터민, 다문화
가족은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어 변두리로 밀려나 있다.
올해 주제인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다시 희망이 되겠습니다”라는 이런
양극화로 인한 문제를 성찰하면서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본질과 나아가야 할 방향
과 역할을 고민한 결과이다. ‘작은 이’들은 우리 사회의 양극화의 틀에서 중심부에
있는존재들이아니라, 주변부에있는변두리존재들이다. 이제‘작은이’들을교회
와그리스도인이품어야할대상으로주목하고, 그구체적인당사자로가난한이들
과 다음세대, 장애인, 북한동포와 다문화가족을 적시한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이라는 주제는 단순히 한국사회가 경험하
는어려움을그리스도인과교회가해결하기위한차원에서나온것은아니다. 더더
욱우리가‘크기’ 때문에‘작은’ 이들을돌보는것도아니다. 오히려이주제는그리
스도인과 교회가 그 본질을 깨달아 원래부터 머물러야 하는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
이다. 즉, 신앙의 본래 자리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2. ‘벗’의 소통 방식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을 주제로 삼은 것은 주변부에 머물러 있는 ‘작은’
사람들의 ‘벗’이 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벗’의 의미는 무엇인가? ‘벗’들 사이에는
우열 관계나 위계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 ‘벗’은 중앙에서는 지시하고 변두리에
서는 복종하는 그런 사람들의 관계가 아니다. 우리가 ‘작은 이’들의 ‘벗’이 되겠다
는 것은 우열이나, 중심부와 주변부, 명령과복종과같은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넘
어서겠다는 것이다. ‘벗’이란 공감하고 나누는 관계이지, 계층적으로 서열화된 관
28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만들어지고 고착된 경계선인 중심과
주변이라는사고방식과부유한사람과가난한사람, 기성세대와 다음세대, 일반인
과장애인, 남한과북한, 우리민족과다른민족사이에그은경계선을없애겠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작은 이’들이라고 부르는 대상 자체도 중심과 주변
이라는 이원론적 도식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이것 또한 넘어서야 한다. ‘작은 이’들의 벗이 되겠다는 주제는 우리 사이에 있을지도 모를 편 가르기의 경
계를 넘어서서 우리 사회의 변두리에 있는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겠다는 것이다.
경제적 경계를 넘어서 가난한 이들에게, 시간적 경계를 넘어서 다음세대에게, 신
체적 경계를 넘어서 장애인에게, 이념적 경계를 넘어서 북한 동포들에게,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 이방인들에게 나가서 벗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작은 이’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것으로, 우리와 ‘작은 이’들이 둘이 아니
라 하나이며,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며 교회의 능동적인 주체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데이것이어떤방식으로가능한가? 경계를넘는과정은그리스도인과교회
가 더이상중심부에머물러 있는 것이아니라, 주변부로나가고 변두리에 머무르
겠다는것이다. 이 다짐은상당한결심을요구한다. 우리에게익숙한 자리를 떠날
것이요구되기때문이다. 기독교가공인되고로마 제국의 국교가된 이래, 교회는
섬기는자리에서세상을지배하는자리에앉게된다. 변두리에서중심부로진입한
것이다. 교회가 중심에 서고 중심부가 주는 혜택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의 포로가
되면서, 교회는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국기독교도이런 경향
에서완전히자유스럽지못하다. 100년이넘는선교역사를지나오면서, 기독교는
한국사회에서중심에선권력집단이되었다. 이과정에서초기선교사들과신앙의
선배들이한국사회를섬기던아름다운모습들을적잖이놓쳐버렸다. 오늘날한국
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향한 따가운 시선의 상당 부분은 이로 인해서다.
올해주제인“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은 이런 맥락에서 한국 그리스도인과
교회의제자리 찾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의핵심은 우리가 ‘작은 이’들을 초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작은 이’들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다. 현재 위치에서 ‘작은이’들에게베푸는것이아니라, 지금가진것을내려놓고그들이있는변두리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다. 우리가 변두리에 머무르고, 주변부에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작은 이들의 벗’이 되는 ‘소통’ 방식이다.
왜 꼭 내려놓고 주변부로 내려가야 하는가?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제3장 주제의 신학적 이해 29
우리를 ‘벗’이라고 부른 그분이 우리의 ‘벗’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고 변두리로
내려왔기때문이다. 하늘 중심의하나님이낮은인간의모습으로내려와서종으로
섬겼기때문이다. 이것이주님께서직접보여주신‘작은이들에게벗’이되고이들
과소통하는방식이다. 그리스도인과교회가‘작은이들의벗’이되기위해자기를
비우는 것은 예수께서 본을 보이신 자기 비움을 뒤따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동안간과하거나잊고있었을 지도 모르는복음의자리를다시 찾는것이다. 주
변부로 내려가 변두리에 머무르면서 ‘작은 이들의 벗’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에대한이해, 교회의 본질에대한이해, 제자도에대한바른이해를 통해 보다 분
명하게 드러난다.
3. 예수 그리스도, 작은 이
“그리스도인, 작은이들의벗”에대한 신학적 전거는 무엇보다도예수그리스도
자신에게서발견된다. 그런데기독교가국교가되고서구역사와문화에서절대적
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배 종교가되면서, 주로 교회의 중심에 있는사람들이예
수에대한이해와설명을제시했다. 예수그리스도에대한이야기가중심부의시선
으로 읽혀진 까닭에 그분이 섬기기 위해 ‘종’으로 오신 것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다
스리는‘왕’이며‘주인’이라는것에더주목하고강조했다. 하지만복음서가증언하
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은 철저하게 ‘작은 이’들과 함께 변두리에서 이루어
졌다. 더 나아가예수그리스도는철저하게변두리에있었던주변부 사람으로, 그
자신이 바로 ‘작은 이’였다. ‘작은 이’로서 주변부 인간이었던 예수의 삶과 사역은
성육신부터, 출생과 공생애, 죽음과 부활까지 일관되게 이어진다.
성육신의 과정은예수 그리스도가 중심부에서변두리로 내려오는 것이다. 빌립
보서 2장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스스로 보좌에서 신성과 권위와 영광을 버리고 사
람의형태로육화한다. 하나님으로서예수그리스도가 종의모습을취하면서변두
리에머무르는 ‘작은 인간’이된다. 이렇게예수그리스도는자기를비움으로써사
람들의‘벗’이되었다. 사람과소통하기위해예수그리스도는변두리인생중에서
도 변두리 인생이 된 것이다.
이렇게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는 출생부터 공생애 전체를 변두리 인간으로 살
아간다. 복음서에서보여주는예수의삶은주변부인생그자체였다. 결혼하지않
은여인, 즉미혼모의아들로이스라엘의수도나왕궁이아니라타향의마구간에서
30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태어났다. 그를경배한것도왕족이나고위사제와같은국가지도층이아닌이방인
동방박사들이었다. 이스라엘의권력중심에있던헤롯의박해를 피해이집트로도
피하여이방인으로살았다. 공생애를시작하기전에 예수가 속해있던계급적, 경
제적, 정치적, 사회적, 인종적경향을볼때, 예수그리스도 자신은철저히주변부
사람이었다.
자신을 섬기는 종으로 규정한 예수 그리스도는 한순간도 중심부에 속해 본 적이
없는 사람, 우리의 용어로 그 시대의 ‘작은 이’였다. 그는 경제적인 풍요를 누린
적이없던‘가난한사람’이었으며, 자신이 현재 누리던것을지키고자했던헤롯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렸던 ‘다음세대’였으며, 문화와 종교와 혈통이 다른 낯선 곳에
던져진‘이방인’이었다. 이런예수그리스도였던탓에, 그의공생애동안삶의자리
는주로주변부였으며, 사역의대상은대부분 ‘작은 이’들이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역 장소들 대부분은 중앙 예루살렘에서 떨어진 변두리나 이방인의 땅이었으며,
그주위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주변으로던져진 소외된사람들로가득했다. 종교
법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된 사람들, 이방인들, 병자들, 여인들, 어린이들은 그 어
느누구도자신의권리를정당하게주장할수없었다. 예수그리스도는스스로‘작
은 이’가 되어 이들의 벗이 되어 이들과 함께 머물렀다. 물론 예수가 권력이나 금
력, 종교적 권위를 가진 중심부 사람에게 문을 닫은 적은 없지만, 중심부 사람이
그의 주변에 머문 적은 거의 없다.
이렇게 하늘 중심에서 하나님이었던 예수는 자발적으로 신성의 경계 밖으로 내
려와주변부사람으로살아가면서하나님과사람을, 사람과사람을화해시키는놀
라운 일을 행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무르던 변두리에서 경제적 장벽이, 세대의
장벽이, 신체적장벽이, 이념의장벽이, 문화적 장벽이, 종교적장벽이, 성적 장벽
이무너지는역사가 일어났다. 사람들사이에서계층, 국적, 나이, 건강, 성, 인종,
문화에 따라 담을 쌓고 서로 적대하고 갈등하던 관계를 하나로 화해시키고 회복시
킨그예수는피조세계를창조적으로변혁하는새로운‘벗’이었다. “그리스도인, 작
은 이들의 벗”은 ‘작은 이’로 살면서 우리를 구원하고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 그 자체에 대한 고백이다.
4. 교회, 작은 이들의 공동체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의 또 다른 당위성은 교회의 본질로부터 온다. 예
제3장 주제의 신학적 이해 31
수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의핵심이주변부 사람들인‘작은이’들에게 있다면, 오
늘교회의삶과가르침역시주변부의‘작은이’들에있어야한다. 교회는주변부에
머물러있던‘작은이’들로부터출발했다. 교회가주변부사람들이 모인 다른 일반
공동체와 다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공동체 안에 현존해 있다는 인식이다.
공동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한 사람들은 주변부에 머물러 있지만,
이전과는다른새로운‘작은이’다. 예수그리스도의삶과사역을매개로해서공동
체안에서경제적경계, 세대적경계, 신체적경계, 이념적경계, 문화적경계없이
서로형제와 자매가 되는경험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공동체안에서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삶과 가르침도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의 핵심이었던 ‘작
은 이’들의 공동체를 모범 삼아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최고의 규범이
라면, 교회는 철저히 이 규범에 따라 형성되고 개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이라는 주제가 새삼스러운 것은, 오늘의 교회가 조직이
나 의식, 신학적 사유의 상당부분에서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인 경계선 때문이다.
교회가 위계적 구조를 중심으로 경제적, 세대적, 신체적, 이념적, 문화적, 교파적
울타리를 치고 특정 사람들을배제한다면, 그것은이미‘작은이’들의공동체가가
야 할 길에서 벗어난 것이다. 물론 교회가 죄인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한, 스
스로 권력이나 부나 명예를 가지고 중심에 서고자 하는 동기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중심에서 머무르고자 하는 욕망을 벗어서 교회
가 만들어졌던 주변으로, 변두리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변두리에 머물렀던 ‘작은 이’ 자체였던 것처럼, 교회도 예수의 ‘작은 이’와 그 주변성을 규범으로 삼고 따라야 하는 것이 당연한 본질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과 사역을 통해 보여 준 주변부의 가치는 ‘사랑’과 ‘자기 비움’과 ‘섬김’이었다. 우리가‘작은이들의벗’으로다시돌아가는것은콘스탄티누스이래
교회에 들어온 권력과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중심부의 욕망 대신,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이 보여 준 ‘섬김’과 ‘비움’과 ‘낮아짐’이라는
본래 모습을 회복하려는 시도이다.
이렇게 교회의 본래 자리가 주변부이며, 원래 그 구성원이 ‘작은 이’들이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성장주의나 성공주의는 교회가 가진 본래적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또한 올해 주제인“그리스도인, 작은이들의벗”은현재개교회 중심
의 교회 활동을 상징하는 ‘건물로서의 그리스도교’를 지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32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가르침을 따르는 사역을 중심으로 온 교회들이 하나가 되는 ‘보편적인 공교회’ 역
할을지향하는것이다. 이때 교회는그 출발부터 안팎을 구별해서 교회안에속한
사람들의고통만돌보는것이아니라, 하나님의형상으로지음받은모든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섬기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작은 이’들
의 벗이 되겠다는 주제에는 한국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옹호하고 돌봐
주어야하며, 우리 사회속에서하나님의정의와 평화 추구의노력에동참하는청
지기직사명을지켜나가면서, 다시한국의희망이되겠다는다짐이들어있다. 다
시 말해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은 교회의 원래 자리와 본질을 회복하고자
하는 결단을 담고 있는 선언이다.
5. 제자의 길, 코이노니아의 삶
올해 주제인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작은 이’들
의 벗으로서 온전한 제자의 길을 걷겠다는 결단이 담겨 있다. 그 삶의 실천에서
가장 중요한 에토스가 ‘코이노니아’다. ‘코이노니아’는 원래 개별 기독교 공동체 안
에서믿는 사람들의 상호작용이나나눔을의미한다. 바울사도가예루살렘의가난
한 사람들을 위해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하는 그 행위는 코이노니아의 ‘징표’일 뿐
만 아니라 그 자체가 ‘코이노니아’였다. 또한 바울은 다른 여러 도시들 안에 있는
교회들의관계를묘사하기위해서‘코이노니아’라는용어를사용하는데, 이것은신
앙 안에서 다른 다양한 공동체들을 연결하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그는 ‘코이노니
아’라는 용어를 통해 소수민족과 이방인 가족까지 포함하는 신앙공동체를 강조하
고 있는 것이다. 이 공동체는 인종과 문화와 이념의경계를넘어서서복음만을초
석으로 삼는 하나의 신앙공동체이다.
우리가 ‘작은 이’들의 ‘벗’이라는 것은 결국 교회 자체 내의 코이노니아(친교)와
일상적인 삶과 선교와 전도 차원의 코이노니아(참여)의 이원화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작은 이’가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를 통해 전 인류
와 창조세계 전체를 하나님과 화해시켰고, ‘코이노니아’를 회복했다는 사실은 그리
스도인이머물러야할 장소와 취해야 할행동을 지시하고 있다. 제자의삶은스스
로주변인이되고변두리에머무르면서우리와소통한예수그리스도를따라, 중심
에서 벗어나 주변부에 머무르면서 ‘작은 이’들과 ‘코이노니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작은이들의벗”이되겠다는고백은예수그리스도로인해얻은새
제3장 주제의 신학적 이해 33
로운삶을 낮아지고, 비우고, 섬기는제자도를실천하면서하나님의코이노니아를
실현하겠다는 다짐이다. 이다짐에서세상에대한‘코이노니아’(참여)와 ‘디아코니
아’(섬김)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하나님이 만든 창조세계 전체는 하나님과
사람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이 ‘코이노니아’를 누릴 때에만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코이노니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신체적으로, 이념적으로, 문화적으로만든경계선을무너뜨리고그경계선너머로
나아가 변두리에 머물러있는 가난한 사람들, 다음세대들, 장애인들, 북한동포들,
다문화가족들과 복음을 기초로 하나가 되려는 것이다.
우리총회가보낸100년의역사는하나님의은혜이고감사해야할일이다. 이제
또 다른 출발을 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이 되겠다고 선언하
고 있다. 이 다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의 본질과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본질, 그리고 제자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다시 주목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이라는 주제를 통해 지난 100년의 성장과
발전 과정에서 혹시 갖고 있을지 모르는 한국교회의 ‘자고’함을 내려놓고 이제 다
시 우리주님의 자리로 돌아가고자한다. 그 자신이 바로 ‘작은이’가 되어 변두리
에 있는 ‘작은 이’들의 ‘벗’이 되어 소통하면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기 위해
스스로 버리고 비우면서 종으로 낮아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작은 이’
들의 벗이 되겠다는 다짐은 우리 주변의 ‘작은 이’들, 가난한 사람들, 다음세대들,
장애인들, 북한동포들, 다문화가족들이머무는그곳에예수 그리스도가함께있다
는 것을 고백하고 신앙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신앙회복운동이다.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워지고, 교회가 교회다워지겠다는
개혁신앙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작은 이’들과 진정한 ‘벗’이 됨으로써, 우리
한국교회가 하나님과 코이노니아를 회복하고, 한국사회 전체와 코이노니아를 회
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34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제4장
한국교회사적 고찰을 통해 본
오늘의 현실과 과제:
한국교회 100년, 한민족의 벗이 되었던 한국교회 이야기
1. 서론:벗됨 혹은 우정
벗(친구)됨혹은우정은기독교의가장중요한덕목가운데하나이다. 예수그리
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5:13~15에서 기독교의 제자직의 절정을 벗(친구)이 되는
것, 곧 우정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우정의 절정은 자기희생이라고 말씀하
셨다. 즉우정은희생이라는것이다. 이런예수님의말씀은본단원의기준으로삼
을 수있을 것이다. 본단원에서는한국개신교회(이하한국교회)가어떻게 한민족
의 벗이 되어왔는가를살펴보려고한다. 결론적으로말해서, 이 일은한국교회가
한국(한민족, 한국사회)을어떻게 친구로 여기고, 그를위하여 희생했는가를살펴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단원의본론에앞서, 비교를위하여한가지주제를간단히설명하겠다. 그것
은 친구로서의 선교사라는 개념이다. 통상 선교사는 신앙의 아버지, 혹은 스승으
로 불리는데, 한국 역사를 보면 몇몇 선교사는 친구라고 불린다. 가령 헐버트
(Homer B. Hulbert)는 그의 묘비명을 보면 “Man of Vision and Friend of
Korea”(비전의사람, 한국의벗)이라고새겨져 있다. 그 이유는무엇일까? 한마디
로 말하면 한국을 위한 그의 사랑과 희생 때문이다.
안교성 목사
제 장 4 한국교회사적 고찰을 통해 본 오늘의 현실과 과제 35
2. 본 론
1) 초대교회의 성공
기독교 선교에있어서가장중요한과제가운데하나는, 새로복음이전파된곳
에서 어떻게 외래적 성격(foreignness)을 불식하고, 민족적인 종교로 정착하는가
이다. 한국교회의경우 단적으로 말해 성공적이었다고할 수있다. 적어도 초대교
회의경우 크게성공적이었다. 초창기에한국사회와기독교간에갈등기가있었지
만, 기독교는 곧 한국사회에 정착하였고, 회심자들이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으며,
사회적으로도지도력을발휘하였다. 그결과 초대교회는민족적인교회, 개혁적인
교회, 지도자적인 교회가 되었다. 특히 「한국종교사」를 저술한 그레이슨(James
H. Grayson)은한국종교사의 각시기마다주도적인종교가있었는데― 즉불교,
유교순서로 ―과연기독교가그 뒤를이을 것인가라는질문을 던진다. 한국기독
교에얼마전만해도그런기대가있었던것이사실이다. 그러나오늘날한국가톨
릭교회의 지도력은 점차 인정되는 분위기이나, 한국교회의 이미지는 급속도로 실
추되고 있다. 그렇다면,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고,
이런 이미지가 급속도로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독교는 한국민족의 격동기에한국에 전파되었다. 한국은반봉건주의, 반제국
주의의과제를안고 있었지만, 결국그 과제를 실현하지 못한채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이런 격변기에 한국인들이 교회를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국교회는 민족의 문제에 투신하였고, 희망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몇 가지로 나눠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정치적 이유
흔히 한국교회를 전반적으로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교회라고 하지만, 초대
교회의모습은그와 달랐다. 물론한국교회는성경을중시하는성경기독교적인특
색을가졌지만, 보수적이고소극적인교회만은아니었다. 오히려초대교회는출애
굽의 메시지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정치적인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령
한일강제병합 이후105인사건이 벌어졌는데, 김형균의연구에따르면, 당시사건
에 연루된 목사 6명의 행적을 추적해 볼 때, 그들이 3·1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하고, 지속적으로정치적, 사회적책임을감당했던모습을알수있다. 따라서
1907년 대부흥운동으로 인하여 한국교회가 과격하게 비정치화되었다는 일반적인
36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주장은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이런정치적성향은후에몇가지결과를낳았다. 첫째, 한국교회는강력한
정치적함의를띠는교회가되었다. 가령3·1독립운동의현장이교회가된사례도
있다. 이로인하여정치적인목적을가진사람들은항상교회에머물렀고, 이런목
적을이루지 못할 때는결국 교회를 떠났다. 이런맥락에서교회는교회가 정치화
되는것을 방지하려고노력하기도하였다. 그러나애국과정치의구분은모호하기
때문에문제의소지가있다. 한국교회역사전반을볼때, 초대교회는애국적인교
회로 평가되는 반면, 20세기 후반 특히 최근의 교회는 정치적인 교회로 평가되고
있다. 그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 역시 한국에 대한 사랑과 희생이다.
둘째, 한국기독교는한국종교의전통인호국종교의면모를공유하며, 특히강력
한 호국종교, 민족주의적종교가 되었다. 그로인하여한국교회는민족의생존 혹
은국가안보(national security)를최우선시하는성향을띠게되었다. 이런성향이
이민족 정부와의 관계에서는 애국적인 종교의 모습을 보였지만, 자민족 정부와의
관계에서는자칫친정부적이고반민주적인종교의모습을보이게되었다. 바로이
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교회에 대한 세대 간의 입장차는 정치에 대한 세대 간의
입장차와 병행되는 것으로 보인다.
(2) 사회적 이유
기독교의복음은긍정적인개인적자아의발견의메시지가되었다. 이것은계급
으로는 천민 특히 백정의 전도로 이어졌다. 성별로는 여성의 개종으로 이어졌다.
당시 백정과 여성의 회심 및 교회 참여야말로 기독교 복음의 해방의 혁명적인 능력
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백정의경우, 한국교회는 양반교회와백정을 수용한 교회
로 갈라지고, 결국 백정은 한국교회에서 사라지고 만다. 여성의 경우 한국교회는
한국사회가운데가장가부장적인집단으로변하여, 여성의가능성, 능력, 참여등
이질식되는양상을 보였다. 당시한국사회에서의초대교회는가장진보적이고혁
신적인 집단이었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와는 정반대의 극단에 위치해 있다.
과연 이런 상황에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고, 한국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3) 문화적 이유
초대교회 당시 한국인이 실제적으로 기독교에 근접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문화적 이유이다. 이것은 소위 기독교선교의 근대화 혹은 문명화사역(civilizing
제 장 4 한국교회사적 고찰을 통해 본 오늘의 현실과 과제 37
mission)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것이 교육사역과 의료사역이다. 교육사역은 한국
교회와선교부가역할을나눠함께감당하였고, 의료사역은주로선교부가맡았다.
그러나 이런 문명화사역은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사회의 발전에 따라
사회가이런 사역을 스스로 감당하게 될때, 교회및 선교부의 역할은 제한되거나
위축될 수밖에 없다. 즉, 기독교선교의 문명화사역은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그러
나 문화적 수요와 문화개혁의필요성은계속되기때문에, 소위 문화선교의가능
성과 당위성이 항상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둘째, 기독교선교는문명화사역의발전과정가운데세속화현상을나타내게된
다. 따라서 최초의 목적을상실하거나 망각하는 결과를낳기도한다. 오늘날 이런
현상은비일비재하다. 가령연세의료원의료선교센터안신기소장에따르면, 최근
들어세브란스병원이자체의이미지에대하여각계의반응을조사해본결과, 사람
들이 세브란스병원과 관련하여 가장 인상적인 단어로 손꼽은 것은 막상 의료의 탁
월성이아니라, 바로 하나님과의 사랑이었다. 이런 상황은 결국사회도기독교 사
역의본질을중시한다는것을 말해준다. 이로 말미암아 세브란스병원이선교병원
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나아가 선교공동체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4) 교회의 대사회 지도력
초대교회, 특히목사와장로등의교회지도자들은한국사회의지도자로인정되
었다. 그들은 학력 등자격 면에서나 사회적 영향력과 기능면에서지역사회는물
론한국전체의지도자로인정되었다. 그러나오늘날한국교회는교회주의를벗어
나지못하고, 교회 지도자도 교회유지에몰두한 종교인으로위축되었다. 이런 점
에서 한국교회의 성장 혹은 성공은 축복의 통로가 아니라, 축복의 종착점이 되었
고, 심지어 저주가 되는 경향까지 보인다. 이런 교회 내면화 내지 축소화 현상은
유경재의 주장대로,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교회일치는 물론이고 대사회적 관심
을 보이는 에큐메니칼 정신에 소홀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2) 초대교회 이후의 이야기
초대교회이후한국사회에선한영향력을보인사례들을몇가지들어보자. 첫째,
3·1독립운동의 참여이다. 기독교는 천도교가 주도한 운동에 동참하면서, 3·1독
립운동에 기독교정신을 반영하는 한편, 교회의 조직을 활용하여 가장 큰 희생의
38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집단이되었다. 따라서3·1독립운동직후에는두려움으로인하여교회가일시 쇠
퇴하였지만, 결국 민족적인 집단으로 인정되어 성장을 맞이하였다. 민족적 대사
앞에, 종교연대를 통해, 희생에 앞장선 유산을 남겼던 것이다.
둘째, 신사참배거부가 있다. 당시에는 일차적으로 종교적 이유에서 비롯되었지
만, 점차적으로민족적함의를지니게되었다. 그러나이일은교회의저항기질에
서비롯되었다는것을잊지말아야한다. 물론이런저항기질은교회가오직하나
님만의종이라는강한신앙적 확신에서 가능하다. 3·1독립운동도이미이런성향
을보여주었다. 20세기후반교회가 민주화에기여한것도이런기질에서가능했
다. 따라서오늘날한국교회는어떻게긍정적인저항세력이될것인가가중요하다.
그러나오늘날한국교회는기득권층으로, 심지어희생적인애국적집단이 아닌자
기 이익 수호에급급한이익집단의모습으로비춰지고있다. 바로 이런인식때문
에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사회 발언이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다.
셋째, 6·25전쟁 때 한국교회는 가장 큰 구호단체의 모습을 보였다. 당시 한국
교회의도움을입지 않은사람이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교회는그런 구호의
우선적인대상이되려고하거나, 그런구호금을분배하는과정등에서추태를보이
기도 했다. 이것은 섬기는 청지기의 모습을 스스로 배반하는 형국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사회봉사등에크게기여하면서도, 인정받지못하는이유중가장중요
한 것은 한국교회의 신뢰성 상실이다.
넷째, 1970~1980년대까지는 한국교회의이미지가좋았다. 사람들은교회가하
는일에관심을 가졌다. 그래서대형집회도성공할수 있었고, 수많은개척교회들
도 성장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한국의 성장 열기에 좋은 예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점차 교회의 성장과 성공은 사회의 성장 및 성공과는 무관하게
여겨졌다. 김영재는 이런 현상을 ‘자본주의적 개인적 교회주의’라고 비판한 바 있
다. 더구나 교회의 성장과 성공이 소위 ‘있는 자’의 힘의 과시욕으로 여겨지는 이
때, 한국교회는 비사회적일 뿐 아니라 반사회적인 단체로 비쳐지고 있다. 우리의
성공을 다른 사람도 함께 기뻐하게 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나눔
이다.
다섯째,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20세기 후반의 한국의 민주화에 한국교
회가일부나마기여한 것은 아무리강조해도부족한일이다. 특히 본교단의기여
도가매우 크지만, 아쉽게도 이는제대로알려지거나인식되지못하였다. 이런 민
주화에대한교회의 기여는매우중요한데, 왜냐하면선진국은산업화와민주화가
제 장 4 한국교회사적 고찰을 통해 본 오늘의 현실과 과제 39
동시에이뤄져야가능하기때문이다. 또한한국교회는 오늘날먼저교회내적으로
교회민주화에앞장서야한다. 한국교회는스스로가한국에가장먼저민주주의를
소개하고실천했던조직이라는 점을한시도잊어서는안 된다. 최근 들어 교회민
주화의문제로인하여, 교회를이탈하는사람들, 그중에서도소위신앙의2, 3세대
가 많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는 사회
민주화에도 선도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의 민주화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한국교회는 그 여정에 희망을 가지고, 희망을 보이고, 희망을 북돋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3) 오늘의 이야기:본 교단이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선교
성경에는 소위지상명령이라는 것이 두개가 나온다. 첫째는잘 알려진 것으로,
마태복음 28장의 것이다. 이를한마디로말하면 세계선교이다. 즉, 불신자에대한
선교요땅끝까지가는 선교이다. 둘째도 이에못지않게중요한것으로, 바로 마태
복음25장의것이다. 이는작은자를향한선교요우리자신을돌아보는선교이다.
마태복음25장은분명히심판에대한 이야기이고따라서구원론적 함의가담겨있
다. 아직까지 마태복음 25장의 구원론적 의의와마태복음25장 및 마태복음 28장
의 상관관계, 즉 세계선교와 작은 자를 향한 선교의 상관관계에 대하여는 연구할
여지가많이남아있다. 이자리에서이에대한신학적논의를전개할수는없지만,
한가지중요한사실을지적하고자한다. 세계선교현장은특히성공적인세계선교
현장은언제나이두가지지상명령이동시에준행되었다. 즉, 세계선교는작은자
를 향한 선교로 나타났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해서
는 이미 위에서 살펴보았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 어느새 한국교회는 다수자의 교
회, 기득권층의교회의모습에안주하면서, 초기전통을잊고있다. 그러나한국교
회가 사랑받은 것은 바로 믿음과 사랑이 함께 나타날 때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와 한국 내의 작은 자를 향한 선교에 있어서, 이 초심을 회복해야 한다.
특히한국은급속도로다인종, 다문화, 다종교사회로진입하고있다. 이에따라새
로운민중, 새로운 이웃이나타나고있다. 더구나 통일이 되면한국사회는 분단되
었던 한민족을 다시 하나로 만드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가난한 자, 장애인, 다문
화가족, 북한동포, 나아가위축되고있는 우리의 차세대를 하나로품는일은 바로
40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우리가누구의벗인가”, 특히“우리가과연작은자의벗인가” 하는질문에어떻게
답하는가에 달렸다.
3. 나가는 말:십자가의 길, 기독교의 본질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후예이다. 종교개혁은성공이나 성장을 위한 운동이 아
니었다. 그것은 본질 회복 운동이었다. 한국교회는 바로 이 점을 명심하고, 이 길
로 나서야 한다. 성공 같은 실패가 아닌, 비록 실패 같은 성공일지라도 그것이 진
정한 성공이라면 그 길로 가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왜
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직한 종,
무익한 종의 모습이 필요한 시기이다.
오늘 우리가 왜 이런 주제에 관심을 쏟는지에 대해 보다 깊은 차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한국교회는 본질에 충실했을 때, 즉 사랑
하고희생했을때, 십자가의 길에 섰을 때, 부활의영광으로 나아갈수있었다. 예
수를따르고자할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뒤를따라야한다.
그런데이 길은개인적인제자뿐만아니라, 제자들의공동체인교회도가야 할길
이다. 이를 위해교회는개교회주의를 넘어공교회성을회복해야할 것이다. 그리
고진정한지도자의면모를갖출때, 비로소한국교회는다시한번한민족의진정
한 벗으로서의 역사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제5장 교회의 사회윤리학적 책임과 교회의 방향 41
제5장
교회의 사회윤리학적 책임과 교회의 방향
1. 오늘의 문화와 사회갈등
우리의 근대사는 여느 인간 사회가 그러하듯이 다양한 종류의 갈등으로 이어진
역사였다. 19세기말부터본격화되기시작한서구문화와의교류는조선사회의 전
통적유교 가치관과 새로운 서구적가치관사이의갈등을 유발했다. 그후 대표적
제국주의 세력이 된 일본의 침략야욕에 맞서 불붙기 시작한 민족주의는 제국주의
에굴복한 식민주의 세력과의 사회적갈등을가져왔다. 광복이후에는공산주의와
민주적 자본주의와의 이데올로기 갈등이 시작되었고, 그 갈등은 한국전쟁을 정점
으로 심화되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또한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 안에서는 급속한 압축적 경제성장의 후유증으로
기업과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강력한 경제개발을 정치적으
로 뒷받침한다는 미명 아래 시도된 군사정권의 독재화와 이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를 위한 정치적갈등이더욱 심화되어 갔다. 이른바노사간의 갈등은 이데올로기
갈등, 나아가 정치적 갈등과 혼재되어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갈등의 구조적 복
합화를 이루게 되었다.
임성빈 목사
42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그러나6·29선언과뒤이은문민정부의출현으로정치적갈등은새로운양상을
보이기시작했다. 더이상민주대반민주의갈등이아니라지역간의갈등이주요
갈등 요소로 부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군부정권의 집권연장을 위하여 심화되기
시작한 지역 간의 갈등은 각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의 출현으로 인하여 더욱
노골화되었다. 오늘날이러한지역 간의갈등은비단정치적영역에서만목격되지
않는다. 학계와 종교계에 이르기까지우리사회의광범위한영역에서지역적갈등
이 목격되고 있다. 그러나 2002년 말에있었던 16대 대선을 기점으로 한국사회는
세대간의 갈등을 심각한시선으로주목하게됐다. 또한 진보와 보수간의 갈등도
지금까지와는다른차원에서대두되었다고볼수 있다. 종전에는보수가주류세력
을 차지하고 진보는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제는 진보가 새로운 세대의 주류에
서게 됨으로써 새로운 갈등이 부각된 것이다.
사회적 갈등은 권력의 획득과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들과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다. 저명한사회학자인코저(Coser)는사회적 갈등은“가치혹은지위, 권력, 희
소자원에 대한 요구를 둘러싸고 벌이는 여러 형태의 싸움들”이라고 정의한 바 있
다. 이러한의미에서사회적갈등이란곧정치적, 경제적사회문화전영역에있어
서의대립상태를말한다. 이러한 대립상태를바라보는사람들의관점은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갈등은 본질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조화로운 사회기능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일 뿐이라는 낙관적인 견해를 갖기도 한다.
우리는이러한견해를사회갈등에대한기능론적견해라고일컫는다. 그러나이
와는대조적으로이러한사회적갈등은 불평등으로부터오는것이며, 이러한불평
등은 사회의 해체로 이르게 하는 위협적인 요인임을 강조하는 갈등론적 견해를 펴
는이들도있다. 1970년대이후부각된노사갈등은이러한 갈등론적견해에힘을
실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특히 문제의식을 가진 젊은이들은 이 사회를 능력 이상으로
특혜를 누리는 수탈계층과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지불 받지 못하고 있는 피수탈계
층으로 이분화하는 갈등론적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갈등론적 시각은 우리
사회의불평등이경제적인문제일뿐아니라정치적인문제임을지적하고, 한국사
회의 정치적 민주화가 사회불평등 해소에 결정적 요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1980년대이후의민주화과정을겪으면서우리는정치적민주화가곧사
회 불평등의 해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또한 어느
정도의 산업화를 이루어도 사회적 갈등이 곧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제5장 교회의 사회윤리학적 책임과 교회의 방향 43
되었다. 즉, 갈등론적 시각과 기능론적 시각도 모두 나름대로의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갈등론적 시각은 이른바 포스트모던 사회 안에서는 그렇게 쉽게 수탈자와 피수
탈자의 이분법적인 계급적 차별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적 모호함에
부딪히게되었다. 또한기능주의적 시각은우리사회의갈등은산업화가성숙함으
로써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기는커녕 가속화되는 지구화 과정 속에서 더욱 심화
되며 복잡한 양태의 갈등양상을 띠게 되는 오늘의 현실을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경험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갈등은 우리가 결코 단순한 ‘우리’가 아님을 자각케 한다.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견해와 이익을 정
당화하고 절대화하려는 시도가 이제는 불가능한 시대임을 우리는 직시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사회 안에 갈등이 있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는
그만큼우리 사회가 건강하다는 반증이 될수도 있다. 반면그러한사회갈등이집
단이기주의에 힘입어 사회의 도덕적 합의를 붕괴시키게 된다면 도덕적 무질서
(anomie)로 상징되는 사회해체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
아야 할 것이다.
2. 다문화사회를 섬기는 교회의 역할
일반적인 의미에서 한 사회에 대한 종교의 사회윤리적 공헌도는 그 사회를 건강
하게 결속·발전케 하는 가치관 및 문화적 토대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의 통합성을
극대화하는종교적순기능의정도를기준으로평가될수있다. 21세기한국사회통
합의 도전요인들인 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문화와 세대 간의 역사적 경험의 차이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사회문화적 섬김을
모색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1) 통합적인 윤리가치관의 제공이라는 관점에서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 통합적인 윤리적 가치관을 제공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논의의 초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통합을 할 수 있는 ‘가치관의 제공’이라는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한국사회를 초월하고 있는 가치관을 전제하고 있다. 예컨대
포스트모더니즘적 상대주의, 소비문화에서파생하는물질주의와 함께 무교, 불교,
유교, 도교, 자본주의, 사회주의등의가치관들이서로경쟁하는다원적인사회안
44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에서 사회통합을 가능케 하는 가치관의 근원이 한국사회 내부로부터 온전히 찾아
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통합을 위한 가치관은 기존의 가치관들을 모두 상대화하면서 동시
에포괄할수있는초월적인근원을요청한다. 이러한관점에서하나님의초월성을
탁월하게 강조하는 기독교가 다원주의적인 한국사회의 통합을 위한 공헌의 가능성
이크다고 볼수있다. 그러므로한국교회는사회통합적인윤리가치관의제공이라
는 관점에서도더욱 교회다운 교회가 되어야할 것이다. 즉, 기독교적인정체성이
삶 속에서 실현된다고 하는 것은 곧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한국사회의
삶 한가운데에 내재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주장하는 윤리가치관, 즉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무엇인가?
또한 그러한 가치관이 과연 한국사회의 통합에 유용한 것인지 실용적이며 공리적
인 관점에서의 질문도 함께 물어져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기독교가이야기하는윤리적가치관을명확히할필요를가진다. 성경은하나
님나라의윤리적가치관에대하여많은증언을하고있지만, 그중‘하나님사랑·
이웃 사랑’과 ‘작은 자와 함께하는 삶’이 가장 대표적인 것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이러한 기독교적인 윤리가치관은 한국사회를 위하여서도 매우 유용한 것들
이라는동의를받을수있을것이다. 그러므로우리는기독교적인정체성과사회적
인 책무를 다하는 것이 결코 배타적인 명제들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2) 전통문화 및 대중문화와의 관계성이라는 관점에서
윤리가치관의 제공과 사회의 통합성을 극대화함에 있어서 전제가 되어야 할 것
은 한국교회의 한국사회에 대한 공감대 형성의 문제이다. 한국사회라는 한정된
시·공간을 함께하는 교회와 사회는 문화라는 매개를 통하여 서로 만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화가 한국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논하는 자리에서
차지하는비중은결정적이라고 할수 있다.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은 곧문화를통
하여 한국사회로 매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의 한국교회는 한국문화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
적을받고있다. 이러한지적은아직도많은한국인들이한국교회를한국의종교로
서 이해하기보다는 서양종교로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농후하다는 것으로 뒷받침된
다. 이러한양상은1980년대이후에더욱본격적으로대두되기시작한민족주의적
정서와 문화를 강조하는 사회적 추세에서 기독교를 주변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
제5장 교회의 사회윤리학적 책임과 교회의 방향 45
다고 본다.
전통문화와의 관계설정이 그러하였듯이 한국교회는 대중문화와의 관계에 있어
서도어려움을겪고 있다. 전통문화와한국교회의관계가역사적인의미에서의신
앙의 모판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대중문화는 매우 현재적이
고 미래적인 의미에서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통문화가 어제의 우리
선조들이신앙을해석하고실천하는데에영향을 끼쳤다면, 대중문화는오늘의사
람들이신앙을해석하고살아가는데에 점차로 큰변수의 역할을 하고있다. 미래
의 한국교회와 한국 기독교인의 틀은 전통문화와 대중문화와의 만남을 통하여서
그기본적인성격이 형성되고 있다고 볼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21세기대
중문화의 모판을 형성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문화 등에 대하여서도 매우
적극적인 대응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21세기 사회통합을 위한한국교회의역할이라는과제는 교회에다음과 같은질
문을던지고 있다. 과연오늘의한국교회는한국의어제와 오늘의 문화안에서어
떠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가? (기독교문화가 주변문화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
까?) 많은 한국인들과 충분한 접촉점을 마련하고 있는가? 또한 교회는 문화의 복
음화를 위하여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3) 세대갈등 극복의 단초 제공이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세대의 새로움은 하나님의 역사적 섭리 가운데 계속되는 창조의 맥락에
서 그리고 새로운 현실에대응해나가는것에서 발견된다. 새로운 현실에 대한적
극적인 응답의 정도가 새로운 세대를 기성세대와 차별화시킬 수 있는 기준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새로운 세대는 구속의 은총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면에서 기성세대
와의 연속성이 발견된다. 소멸되지 않는 인간의 죄성이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
모두에게문제가되고, 그렇기때문에절실하게요청되는하나님의구속의은총에
대한 인식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 사이의 차별성을 무색케 할 정도로 양 세대
모두의 공통된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두 세대 간의 차별성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새
로운 세대의 문화와 시대정신은 기존 세대들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형태라는
점에서 충격적인 당혹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양 세대 간에 존재하는 이질감은
세대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세대 간의 갈등의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상대에대한 몰이해와 적대감이다. 이 갈등을해소하기위해먼저 서로를 향한이
46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해의 폭을 넓히기 위한 열린 마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기성세대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해할 수
있는열린 마음이다. 앞에서 이미밝힌 바대로 새롭게 전개되는 세계와새로이등
장하는세대의출현은하나님의섭리하심속에위치하고있다. 기성세대는신세대
들의 삶의 발생적 뿌리가 자신들의 물신주의와 성장주의, 그리고 경건과 절제를
상실한과소비에있었음을겸허히비판하여야한다. 나아가보다적극적이고긍정
적인 태도로 새로운 세대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아니함’에는익숙한기성세대들이지만‘마음의 변화를받음’(롬12:2)에는미숙한
세대들이라는 것을 직시하여야 한다.
동시에 새로운 세대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성세대들의 자신들을 위한 역사적
희생과 노고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마음의 변화를 받음’에는 익숙한
자신들이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서 ‘이 세대를 본받음’에까지 이르고 마는 자신들
임도직시하여야한다. 그러므로 두세대는서로가서로에게배워야 한다. 서로에
게 배운다는 것은 서로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구속의 은총을 발견
할수있어야함을뜻한다. 결국두세대모두한공동체로서서로협력하고합심하
여 선을 이룰 상대임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
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
니라”(롬 8:28). 이해와 포용을 바탕으로 한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일이 모든 세대를 향한 부르심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3. 나가는 말
우리는 다가오는 21세기 다문화사회로서의 한국사회 통합을 위한 교회의 역할
을 모색함에 있어서 도전이 되는요소들을예상, 분석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더
니즘과 소비문화의 부상이 한국사회 통합을 위협하는 주요한 도전적 요인들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극단적인상대주의와 해체주의로인하여21세기한국사회 통합
에 매우 심각한 도전적 존재이다. 또한 소비문화의 도전에 대해서도 더욱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소비문화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하
여 이른바 하층계급을 이루었던 사람들이 보다 평등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도
무시할수는없는사실이다. 그러나기본적인사회·경제적삶의정황을좌우한다
고 보여지는 소비문화에 대한 분석은 21세기 사회에서의 인간의 가치는 구매력에
제5장 교회의 사회윤리학적 책임과 교회의 방향 47
의하여결정될지도모른다는불안감을준다. 또한인간향락의극대화를위한재생
산의 다양화·대량화를 위한 자본의 축적에 대한 욕망은 결국에는 인간의 기본적
인삶의필요를위한경제가아닌, 자본의축적그자체를목적으로하는매우소비
적인 경제구조를 갖게 함으로써 생태계의 파괴에도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칠 것이
라는 불안한 전망도 갖게 한다.
무엇보다도 거미줄과 같이 인간의 삶의 기본정황을 누비고 있는 소비문화의 상
업주의적 기호체계는 일종의 대체종교로서 기존의 전통적 종교의 기호들을 상업주
의화 내지는 무력화시키고 있다는 점이 근본적인 도전이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
다. 이러한소비문화에대한분석은더이상하늘에있는‘하늘나라’를기다리기보
다는풍요한이땅의나라를위하여살아가는삶의내재화경향이21세기에는극성
을 부릴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케 한다.
이렇게 초월성을 상실한 소비문화의 틀 속에서 ‘다원성의 추구’와 ‘억압에의 저
항’으로 상징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양상들이 더욱 어우러져 나타날 21세기의 삶
의정황은참으로기독교인으로서의정체성(Christian Identity)을가지고책임있
는 사회인(Social Responsibility) 됨을 함께 추구하려는 이들에게 엄청난 과제로
도전하여온다. 나아가기독교인을 포함한한국사회의 통합이라는과제는 더욱벅
찬 과제로 다가옴이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한국교회의 사회통합적 역할은 교회의 교회다움으로부터 시작되며
마무리되는과제이다. 물론보다지혜로운책임의수행을위하여사회분석이필수
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평신도사역의활성화와시민사회안의교회로서
의자각을필요로한다. 소수의목회자를포함한교회의지도층인사들의관점만으
로는 우리의 사회적 책임의 대상영역과 우선순위가 왜곡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교회의교회다움은시민의기독교인됨을전제로할뿐아니라, 기독
교인의 시민 됨도 요구한다.
여기에서의 시민이란 한 사회의책임적인 구성원을 의미한다. 한국교회가사회
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은 바로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인답지 못함
과 시민답지 못함을 동시에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신앙인 됨의
기초를점검하여야한다. 신앙과삶의일치의당위성, 하나님의주권에대한새로운
고백, 뿌리 깊은 죄성에 대한 통찰에 기초한 계속적인 자기개혁 등은 한국교회가
사회적책임을더욱충실히하기위한전제적요소들이다. 이러한기본적인신앙적
내용들의확인과점검, 즉신학적작업은우리들로하여금복음을개방적으로수용
48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할수있는삶의태도를갖게할것이다. 이러한복음에대한개방적수용은한국교
회로 하여금 “개혁되어진 교회라도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라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도록 할 것이다. 또한 시민으
로서의 기독교인들 각자에게도 자신의 삶과 태도만을 절대시하지 아니하고, ‘하나
님 사랑, 이웃사랑의 삶’ 과 ‘작은 자와 함께하는삶’을 의식케 하여, 더욱 책임적
인 사회인으로서의 삶으로 초대할 것이다.
나아가 나날이 심각하게 부각되는 세대 간의 갈등에 대해서도 교회는 서로를 존
중하는 가운데 ‘세상을 본받지 아니하는’ 기성세대의 지혜와 ‘마음을 새롭게 함으
로 변화를 받는’ 데에 익숙한 신세대의 용기를 사랑 안에서 조화시킬 수 있는 사회
통합적역량을발휘하여야한다. 이를통해세상의권력갈등적시각으로는도저히
이룰 수 없는 세대통합의 가능성을 그리스도의 사랑에 바탕을 둔 교회의 화평케
함의 사역을 통하여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제6장 교회의 교육목회적 과제와 방향 49
제6장
교회의 교육목회적 과제와 방향
오늘의한국교회에대한교회안팎의시각은대체로부정적이다. 각종설문조사
와 여론조사에서 확인되고 있듯이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와 호감도가 실망스러운
수준으로나타나고있다. 이것은 타종교나과거의한국교회와비교해볼 때더욱
그렇다.
이렇게 한국교회에 대한 시각이 부정적으로 바뀐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
다. 그중에가장핵심적인것을한완상교수의책「한국교회여, 낮은곳에서라」에
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에서 한 교수는 “예수는 저 낮은 곳을 바라보고 계시는데,
한국교회는 저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라는 말로 오늘의 한국교회의 문제를 진
단하고 있다. 즉, 오늘의한국교회가있어야할낮은곳에서있지않기때문에 사
랑과 존경 그리고 신뢰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교회는 교인들을 저 높은 곳에 있는 큰 자가 되도록 축복해 왔고,
또한 저 높은 곳에 있는 큰 자들이 복된 자라고 가르쳐 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한국교회는 큰 자들을 좋아하고, 또 큰 자들과 함께하는 교회가 되어 가고 있다.
한국교회가 다시 이 민족으로부터 사랑과 존경, 그리고 신뢰를 되찾으려면 낮은
곳에 서야 하고, 그리고 작은 이들의 벗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본을 보이신 것
처럼, 그리고 한국 초기교회가 했던 것처럼 다시 낮은 곳에 서야 하고, 다시 작은
박봉수 목사
50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이들의 벗이 되어야 한다.
본고는 이 문제를 교육목회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오늘의 한국 그
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작은 이들의 벗이 되도록 교육하고자 할 때 그에 필요한 과제
는 무엇이고, 교육목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교육목회적 과제
한국교회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을 작은 이들의 벗이 되도록 교육하지 못한 이
유가 무엇일까? 본고는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하나는 한국교회가 신앙을 지나치게 편협하게 이해해 왔다는 점이다. 즉, 신앙
을 사적인 영역에 초점을 맞춘 채 이해해 왔다는 것이다. 신앙을 사적인 영역에
초점을맞추다보니 주관심사가 자기가 복을받고, 자기 앞에놓인과제를 해결하
는 일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주변의 작은 이들에 대한 관심이 중요한 이슈가 될
여지는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교회가 신앙과 삶이 분리되는 것을 방치해 두었다는 점이다.
즉, 근대화 이후신앙과삶이 분리되는 상황 속에서이를극복하고자하는 노력을
제대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앙과삶이분리되다보니 작은이들을돌
봐야한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도 이를 실천하지 못했고, 결국작은 이들의 벗이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을 작은 이들의 벗으로 교육하고자 할 때, 이 두
가지 점을 극복해야 한다. 즉, 하나는 사적신앙을 극복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과 삶의 분리를 극복하는 일이다. 이제 이 점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1) 사적신앙의 극복
근자에 신학 일각에서 신앙을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으로 구분하여 설명하
려는경향이나타나고있다. 그것은현대사회의구조적분화로인해삶에서의공적
영역과사적영역이 뚜렷해졌기때문이다. 특히과거공적인영역으로다루어졌던
종교의 영역이 개인의 삶과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나면서 더욱 이런 구분이 필요하
게 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로버트 키건(Robert Kegan)은 삶의 과제를 중심으로 신앙의 공적
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구분하여 설명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면서 해
제6장 교회의 교육목회적 과제와 방향 51
결해 가야 할 삶의 과제 중 주로 자신을 위한 과제들을 신앙적으로 다루어 가는
것을 신앙의 사적인 영역으로, 그리고 공공과 세계를 위한 과제들을 신앙적으로
다루어 가는 것을 신앙의 공적인 영역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존 콜만(John
Coleman)은 하나님과 개인 간의 사적인 문제이자 내면의 문제를 주로 다루는 제
자직(discipleship), 즉사적인영역과하나님의 백성으로서공적인문제들을주로
다루는 시민직(citizenship), 즉공적인영역으로구분했다. 이런학자들의구분을
정리해 보면 사적신앙은 한 개인에게 실존적으로 고백되며 사적 관계 영역에 초점
이 맞춰 있는신앙 형태를 말한다. 이에비해 공적신앙은세계적이며역사적인차
원에서신앙이구현되는것이며, 공적 관계영역에초점이 맞춰 있는신앙의양태
를 말한다.
이런 신학자들이 굳이 신앙을 사적신앙과 공적신앙으로 구분해서 설명하고자
하는이유는따로있다. 바로현대사회에들어와신앙의양태가사적신앙으로치우
치고있다는점을지적하고자함이다. 사실현대사회의종교와관련된특징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종교의 사유화’(privatization of religion) 현상이다. 즉, 더 이상
종교를국가나공동체 전체의 공적관심사에두려고하지 않고, 개인의사적관심
사로 치부하려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종교는 개인의
주관적이며사적인욕구충족에초점을 맞추는방향으로선회하게되었다. 기독교
역시이런 흐름속에서신앙의초점을 사적인 영역에 맞추어온 것이다. 학자들은
바로 이 점을 분석하고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신앙의 영역을 구분해서 설명했던
것이다.
분명한것은신앙의이두영역은명확하게분리될수없다는점이다. 비록이해
를 위해 구분해 볼 수는 있다고 해도, 이 둘은 상호 침투적이며 또한 상호 의존적
관계에있기 때문에 결코분리될수는 없다. 그래서교회교육은 올바른신앙에관
해다루어야한다. 현대사조때문에어쩔수없이신앙을사적신앙과공적신앙으로
구분해서설명해야한다고해도, 이둘은분리될수없는것이며상호긴밀한관계
에있음을가르쳐야한다. 그래서사적신앙과공적신앙이서로긴밀한연관을맺도
록 하여 사적신앙과 공적신앙 모두올바른모습을찾도록 해야 할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둘은 서로 균형을맞추어야함을가르쳐야한다. 그래서 사적신앙에
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사적신앙과 공적신앙이 상호 조화와 균형을 맞추어 전체적
으로 올바른 신앙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개인의 사적인 욕구를 뛰어넘어 타인에 대한
52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관심을가질수있게될것이다. 그리고더나아가이웃의작은이들에대한문제를
신앙의 주요 관심사로 다루어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2) 신앙과 삶의 일치
작가이범선의 중편소설 「피해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치부를 예리하게파
헤치고있다. 이소설의주인공최요한의아버지 최장로는평양에서고아의아버
지로칭송을 받는다. 요한은 다른고아와똑같이 자랐다. 아들이라고 더먹이거나
더 입히는 법이없었다. 요한은이런 아버지가 너무자랑스러웠고 편견없이자기
와 다른 고아들을 똑같이대해주는 것을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같은고
아원에서자란양명숙을사랑하고그녀를자기의아내로삼고자했다. 요한은당연
히 아버지의 축복과 칭찬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아버지최 장로는 펄펄뛰
며 반대를 했다. “아무리 명숙이가 똑똑하다고 해도 고아를 며느리로 삼을 수 없
다.”는이유때문이었다. 상상도못했던아버지의반대로결국두사람은헤어지게
되었다.
이사건을통해요한은아버지최장로의신앙의실상을보게된다. 그는지극히
이기적인신앙의소유자로, 고아를위해고아원을운영한것이아니라자신의만족
을 위해 고아의아버지가되었던것이다. 그는 고아에 대한사명을가지고 있었지
만가장중요한고아에대한사랑은없었던것이다. 그결과최장로는신앙과삶이
일치되지못한모습을 보이게 된것이다. 작가 이범선은 이렇게 신앙과삶이일치
되지 못한 기독교를 가리켜 ‘구두 속의 돌멩이’라고 말했다. 결코 자의로는 꺼낼
수 없고, 일평생 절고 다니게 만드는 존재라는 것이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구두 속의 돌멩이를 하나씩 가지고 살아가고 있
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구두 속의 돌멩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작은 이들의
벗이어야함을알면서도작은 이들의 벗으로살지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교
회교육은 우선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이런 구두 속의 돌멩이를
인식하도록가르쳐야한다. 자신의 신앙과삶이어떻게분리되어있는지를정확하
게 깨닫고, 또한 이것을 진솔하게 고백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주변의 작은 이들에 대한 자신의 잘못된 태도를 깊이 성찰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현대를 대표하는 영성신학자 중 하나인 폴 스티븐슨 박사는 현대를 사는 그리스
도인에게 필요한 영성을 ‘시장 영성’(Marketplace Spirituality)이라고 지칭한 바
제6장 교회의 교육목회적 과제와 방향 53
가있다. 그리스도인이가져야할영성은단지교회당안에서예배드리고기도하는
것만이아닌삶전체와깊이연관된것이어야한다는뜻이다. 그리고“영성은소리
없이 우리 생활의 중심에 들어와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일에서보다는 구체적인 현
실에서하나님을발견하도록이끈다.”라고말한바가있다. 바로이런영성이신앙
과 삶의 분리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고 할 수 있다.
교회교육은 교인들에게 이런 시장영성을 가르쳐야 한다. 교회당 안에서만작동
하는 영성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도 여전히 역동적으로 작동하는 영성
을 훈련시켜야한다. 그렇게 될때 그리스도인들이자기 주변의 작은이들에게벗
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2. 교육목회의 방향
위에서 살핀 교육목회의 과제는 교육목회 자체의 변화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
기존의교육목회가소위 ‘학교식체계’(schooling system) 안에서 지식 전달위주
의교육을해왔기때문이다. 지식전달위주의교육으로삶과연결되지못한앎을
양산하게되었고, 그리고사적인 영역 안에갇힌 실천만을 다룰 수밖에없게되었
다. 그래서 교육목회 자체가 ‘올바른 앎’(orthodoxy)과 ‘올바른 삶’(orthopraxis)
을 다룰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1) 올바른 앎
그리스도인들이 작은 이들의 벗임을 깨닫고 그렇게 살도록 교육함에 있어서 우
선 중요한 것은 올바른 앎(orthodoxy)을 갖도록 이끌어 주는 일이다.
이 올바른 앎에 관한 통찰은 파커 팔머(Parker Palmer)에게서 배울 수 있다.
그는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이라는 책에서 현대 지식교육의 문제를 객관주의적
지식론에서 찾는다. 즉, 기존의 지식이 가치중립적사실에서시작하고있고, 또한
지식자체에열정이나목적이없다는점을지적한다. 그리고교육이이렇게객관주
의적 지식론에 지배를 받다 보니 호기심과 지배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고비판한다. 즉, 호기심은 순수 이론지식 같은지식 자체가 목적인 지식에
해당되고, 지배욕은응용과학과같은실용적 목적을위한수단으로서의지식을말
한다.
팔머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랑에서 발원한 지식을 추구하고자 한다. 이 사랑
54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에서 발원한 지식은 창조 세계의 착취와 조작이 아니라 세계와 자신의 화해이다.
그리고 사랑을 동기로 한 지성은 마음이 사랑을 향해 뻗어 가듯 지식을 향해 뻗어
간다. 여기서앎의행위는곧사랑의행위이며, 타자의실재속으로들어가그것을
포용하는행위, 타자로하여금자신의실재속으로들어와그것을포용하도록하는
행위이다. 이런앎에서 우리는 하나된 공동체의 지체들로서남을 알고나를알리
며, 우리의 앎은 공동체의 유대를 다시 엮어 주는 방법이 된다.
팔머의 이런 통찰을 바탕으로 우리는 교육의 자리에서 학습자들로 하여금 올바
른 앎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 수 있게 될 것이다. 즉, 교육은 학습자를 성육신적,
인격적진리로이끌수있게된다. 이런교육안에서자아는세계를단순히논리적
으로 결합된 경험적 대상들의 객관화된 체계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맺고반응하는유기적몸으로서창조성과자비가있는살아있고, 성장하는
공동체로서 인식하게 된다. 교육은 자신의 목적대로 삶을 조작하기 위해 사실을
가르치고 논리를 배우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를 향한 인격적 반응
과 책임성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올바른 앎을 추구하는 교육을 실시하게 될 때 학습자들은 눈을 뜨게 된다.
지성의눈을떠서사실과이성의세계를보고, 마음의눈을떠서사랑의힘을통해
따뜻해지고변화되는세계, 지성으로 볼수없는공동체에대한비전을보게된다.
특히교인들을‘작은이들의벗’임을깨닫게하고, 또한작은이들의벗으로살도록
교육하고자할때, 이 올바른앎은대단히중요한의미를갖는다고할 수있다. 우
선작은이들이누구인가를알게할때, 지성의눈으로작은이들의현주소를사실
과 이성의 세계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떻게 그들이 작은 이들이 되었고,
작은이들로살아가는현실의 고달픔은 무엇이며, 그리고저들이어떻게소외당하
고있는지를정확하게볼수있게해줄것이다. 그리고마음의눈으로그들을진심
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하고, 그들과 더불어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볼 수 있게 이끌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교육목회는 교인들로 하여금 객관적 지식을 뛰어넘어 올바른 앎을 가질 수
있도록이끌어주어야한다. 그래서교인들로하여금지성의눈을뜨게해서 주변
의 작은 이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왜 그들의 벗인지를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교인들로하여금마음의 눈을 떠서주님의마음으로저들
을 보고 저들을향한사랑을 느끼게 하고, 나아가저들을사랑하며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해야 할 것이다.
제6장 교회의 교육목회적 과제와 방향 55
2) 올바른 실천
그리스도인들이 작은 이들의 벗임을 깨닫고 그렇게 살도록 교육함에 있어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올바른 실천을 하도록 이끌어 주는 일이다.
이 ‘올바른 실천’은 단순한 ‘실천’(practice)과는 다르다. 실천이 진리나 이론을
단순히 적용하는것이라면올바른실천(orthopraxis)은이와는다르다. 그차이를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동유형이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인간의 행동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하
나는‘포이에시스’(poiesis)이다. 이것은목수가장롱을짠다든지건축가가집을짓
는 것과 같이결과물을산출하는행동을뜻한다. 장차 그것이어떻게쓰일 것인가
는 관계없이 단지 설계에 따라 결과물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춘 채 작업을 진행해
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때 그 결과물의 장래의 쓰임새와 목적을 가리켜 ‘텔로
스’(telos)라고 부르는데, 텔로스는 포이에시스의 과정에는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프락시스’(praxis)이다. 이 유형은 단순히 설계에 따라 결과물을
생산하는것에서부터훨씬더 나아간다. 프락시스에서는텔로스 혹은행동의궁극
적 목적이나 가치가 행동의 일부분이 된다. 설계가 행동으로 하여금 최종 목적을
향하게하는 반면, 궁극적목적또는 텔로스는 행동에게 궁극적 목적을위해필요
할 때는 설계를바꾸도록알려준다. 따라서 프락시스에 관련되어 있는사람은기
술을 사용하여 설계를 이행할 뿐 아니라 분별력을 통하여 텔로스를 발견해야 할
책임을가진다. 결국이프락시스는어떤목적이진행되어가는과정에서계속적인
행동 수정을 통하여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결국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동유형의 통찰은 우리의 신앙적 실천에도 매우 유효
하다. 우선 신앙적 실천에서 단순한 실천이란 포이에시스와 같은 것이고, 올바른
실천이란바로프락시스와같은것이라는점을일깨워준다. 그리고우리의신앙적
실천이단순한실천, 즉포이에시스를뛰어넘어올바른실천인프락시스로나아가
야 할 것임을 가르쳐 준다.
이런 올바른 실천의 구체적인예를성경의여러곳에서발견할수있다. 대표적
인 예로 사도행전 10:1~48을 들 수 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궁극적
목적인 텔로스는 세계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셨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에 대
56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한심한편견을갖고있었다. 주님께서는유대인들의그런부정적인인식과인간적
인한계를아시고유대인들의행동을수정해가신다. 그첫번째작업이당시유대
그리스도인의 최고 수장인 베드로의 행동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베드로가기도하려고할때, 주님께서베드로에게환상 중에 부정한 네발가진
짐승과기는것과공중에나는것들을나타나게하시고, 베드로에게일어나잡아먹
으라고 하셨다. 동일한 환상이 세 번이나 반복되자 베드로가 의아해 하고 있었다.
그때베드로는백부장고넬료가보낸사람들을만나게되었고, 성령의지시를받아
고넬료의집에가서 복음을 전하게되었다. 이때 성령의 감동을 받은베드로가하
나님의텔로스를깨닫게된다. 그리고 이후하나씩자신의 행동을 바꾸어 가게된
다. 그래서 결국이방인에게 복음을전하게되었고, 더 나아가교회가이방세계로
뻗어나가는 데에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교육목회는 단순한 이론이나 진리를 삶에 적용하는 실천에서 지속적
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삶을 변화시켜가는 올바른 실천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
다. 이렇게될때편견과선입관에사로잡혀작은이들을벗으로보지못하는자리
에서, 하나님의뜻을따라작은이들을벗으로볼뿐아니라저들을벗으로섬기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리스도인을 올바로 세우지 못한 점에 있다. 이제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인을 작은
이의벗으로 올바로 세워야 할시대적 사명을 깨닫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그리
스도인을 작은 이의 벗으로 올바로 세우기 위해 교육목회적 과제를 명확하게 깨닫
고 올바른 교육목회의 방향을 설정해 가기를 기대해 본다.
제7장 교회의 선교론적 과제와 방향 57
제7장
교회의 선교론적 과제와 방향
1. 들어가는 말:피할 수 없는 질문
총회주제인“그리스도인, 작은이들의벗”은교회의사명을매우구체적으로제
시하는표현이다. 교회는세상을위해세상안으로부름을받았다. 교회의존재역
시세상속에있으며, 교회가전하는그리스도의복음은언제나세상과의관계에서
만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된다.
복음서에 묘사되어 있는 예수님의 활동은 매우 구체적이며역사적이다. 예수님
은하나님의나라를선포와삶을통해구체화하였다. 배고픈자를먹이고, 병든자
를 고치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 마태복음
은 이러한 예수님의 활동을 기록하면서 25:31~46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제기한다.
예수님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구원
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주린 자와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갇힌자”들을 돌아보았는가를질문하신다. 예수님은이러한 ‘작은이’들과 자
신을 동일시한다. 더구나 이 본문은 ‘최후의 심판’이라는 배경에서 언급되고 있으
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이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이 피할 수
한국일 목사
58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없는 질문은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향해 우리의 신앙과 선교활동이 예수 그
리스도의 복음에 근본적으로 충실한가를 묻고 있다.
본 글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신앙과 선교의 사명을 실천하기 위
해 주제와 관련한 선교관을 제시하고 그러한 선교관에 비추어 총회주제에서 제시
한 다섯 가지 범주의 작은 이들을 위한 선교활동의 방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작은 자를 위한 선교
교회가 작은 자의 벗이 되는 선교를 하기 위해 필요한 선교이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세계를품는선교’이다. 에베소서1:23에서 “교회는그의몸이니만물안
에서만물을 충만하게 하는이의 충만함”으로정의한다. 이 짧은구절에서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교회가 이 땅에서 수행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가 매우 잘 요
약하여전하고있다. 교회는그리스도의몸으로존재하면서그의충만함을세상에
증거하고실현하려는목적으로세워졌다. 교회의존재 이유와목적은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의충만함을드러내는것이다. 하나님의약속으로인해 교회는자신이속
한세상으로부터속성상구분된동시에세상전체를품어야한다. 왜냐하면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교회를 통해 이루어 가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 약속에 근거하여 세상과 역사 속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선교적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해야한다. 교회는이러한하나님의약속에근거하여‘방주적교회관’ 또는‘도
피처’와 같은 편협하고 분리된 교회관을 극복하고 세계를 품는 교회가 되어 하나님
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사람들과함께하는선교’이다. 작은자들의벗이되는선교는그들과 함께
하는삶으로 시작해야 한다. 흔히선교는교회가 주체가 되며다른사람들을선교
의대상으로간주한다. 선교의대상은언제나주체가 되는교회밖에 머물게된다.
많은교회들이이런 방식으로 이주노동자 선교, 탈북자선교, 가난한 사람을 위한
선교활동을수행하고있다. 그렇기때문에선교의대상이되는사람들은교회안에
들어오지못하고교회밖의선교의대상으로남게된다. 예수님은사람들을하나님
나라에 초청하기 위해 그들을 대상화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당시
사람들에게멸시와천대를받는사람들과함께생활하셨다. 예수의선교는그들에
게 무엇을 행하기 전에 그들과 함께함으로 진행된다.
제7장 교회의 선교론적 과제와 방향 59
순더마이어는선교를‘콘비벤츠’(Konvivenz)란용어로설명한다. 이말은“함께
한다”는 의미이다. 교회가 누구와 함께한다(church with others)는 것은 누구를
위하는 것(church for others)보다 우선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는 작은 자들
을 위한 어떤 활동을 하기에 앞서 그들을 교회 안으로 초청하여 친구로서 함께하면
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을 전해야 할 것이다.
셋째‘경계선을넘어가는선교활동’이다. 앤드류월스(A. F. Walls)를비롯한여
러 선교학자들은 선교는 ‘경계선을 넘어가는 활동’으로 이해한다. 보쉬(D. J.
Bosch) 역시선교는이세상에존재하는다양한경계선을넘어하나님의초월적인
사랑을 증거하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성경에서 증거하는 선교개념을 보
면 복음으로 넘어야 할 경계선이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다.
사도행전1:8은그경계선이중심부에서주변으로, 사회적신분이나인종의차
이를 넘어가고 궁극적으로 인종과 종교, 원수 사이까지도 넘어서서 증인이 되며
화해의사신이되리라고말씀하고있다. 복음서에기록된예수님의사역은이러한
경계선을넘어가는활동이다. 바울은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을한마디로사람들사
이에 막힌 담을 허무는 중재사역(엡 2:14), 화해의 사역(고후 5:18-20)으로 묘
사한다. 이와 같이 선교는모든사회적 장벽과 담을헐고사람들을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청하는 사랑의 활동이며 교회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3. 작은 이들과 함께하는 선교
1) 가난한 사람과 함께하는 선교
축복과 성장을 지향하는 선교는 가난을 피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이러한 신
앙형태는 믿음이 강화될수록 세상의 가난한 현실을 정죄하고 물질적 축복을 하나
님의은혜로더욱강조하게된다. 가난은죄의결과이거나적어도하나님의은혜를
받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신앙을 가진 후 가능한 빨리 가난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는 것이 신앙의목표이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 안에이러한신앙관, 구원관에 근
거한 선교이해가 지배적이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선포한 첫 메시지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전하는
하나님나라의복음에관한 말씀을 하셨다(눅 7:22). 예수님의하나님나라 활동
은 한마디로 약한 자들과 함께하는 선교였다. 그 안에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활동의 중심에 있었다.
60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복음서에서 분명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부자들과 함께하지 않고 오히
려가난한 자들과함께하셨다는사실이다. 이런내용은부자의시각으로는보이지
않는다. 가난한자의 입장에 서지않고는하나님 나라의 핵심을 온전히이해할수
없다. 오늘의 선교가 넘어야 할 장벽은 바로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를 막고 있는
경제적 장벽이다. 가난을 저주로, 부유함을 축복으로 단순하게 구분하는 도식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며 사랑을 나누고 섬기는 신
앙적삶을 훼방한다. 부자와 가난한자를하나님 나라의 한식탁으로초청하여함
께 축제에 참여하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선교의 바른 이해를
필요로 한다.
2) 다음세대와 함께하는 선교
세대간의 관계는교회에 주어진중요한 선교현장이다. 서구교회의 약화현상의
가장중요한 원인 중하나는 믿음의 계승에 실패한것이다. 믿음을다음세대에계
승하려면 먼저 부모의 확고한 신앙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자녀는 부모의 신앙을
그의말보다 삶을 통해서영향을받는다. 보이지 않는 영향으로 나타난부모의삶
이야말로다음세대에가장중요한교육현장이다. 또한현재성인중심으로형성된
교회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다음세대를 위한 교회는 ‘미전도 세대’를 위한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는 풍부한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다. 교회 안에는 온갖 종류의 직업과
은사와재능을가진 성도들이 모여있다. 가장 예민한 시기인사춘기에속한청소
년들은학교나사회에서그들의진정한고민을들어줄사람들을찾고있다. 교회는
세상에서찾을수 없는가장 귀중한 보화를 가지고있다. 방황기에있는 청소년들
의 상담자로 교회 안의어른들을멘토로활용할 수있다. 그것은 사랑이며 진실함
이다. 교회 어른들이 아이들과 진정성을 경험하는 관계 속에서 만남을 갖는 것은
다음세대를 위한 중요한 교육의 장이 될 것이다.
공교육을실행하고있는학교는다음세대를위한중요한선교현장이다. 교사직
업을 가진 성도들은 다음세대를 위한 분명한 선교적 소명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
지역교회들은 지역사회에서 다음세대 교육에 다양한 방식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참
여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학교, 유치원, 어린이집 등 공교육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
는 모든 교사들을 통해 복음의 선한 능력이 다음세대에 전달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제7장 교회의 선교론적 과제와 방향 61
3) 장애인과 함께하는 선교
인간이 당하는 고난은 대부분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장애인은 몸과 정신의
장애를 자신 안에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로 인해 겪게
되는 불편과 고통은 더욱 심하고 장애인 자신은 물론 가족도 함께 어려움을 겪는
다. 선천적으로장애를가지고태어나는경우도있지만사고등으로인해후천적으
로장애를얻는경우가더많다. 그런점에서우리모두는잠재적장애인이라말할
수 있다. 교회는 장애인에 대하여 어떤 이해와 태도를 가져야 할까?
장애인은 선교의 우선적 대상이 되어야 한다. 장애인을 동정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장애인들을 하나님 나라의 표지로서 우선적으
로 대해야 하는것이다. 장애로인해 좌절과 절망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수님
을 만나면서 새로운 자기 이해와 삶을 시작하였다. 교회는 장애인을 위한 별도의
모임을만드는것보다비장애인과통합적관점에서신앙으로인도해야한다. 장애
인이 가진 어려움을 인식하여 그들의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해 시설개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교회 안에서 어떠한 차별의식도 느끼지 않도록 모든 점에서 함께
하는 태도와 교회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장애인에게 가장 격려가 되는 것은 비록
몸은 불편함을 가지고 있으나 교회생활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는 주체적인 참여의 기회를 갖는 것이다.
교회는 장애인이 겪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구체적인 복지활동과 제도의 개
선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의식의 개선을 위한 노력에도 앞장
서야한다. 교회는하나님의형상대로창조된인간이장애로차별당하거나소외되
지 않도록 장애인의 인권에 대한 예민한 의식을 가지고 그들의 변호자가 되어야
한다.
4) 북한동포와 함께하는 선교
작은 자중에가장작은자는북한에살고있는주민들이다. 북한주민은우리와
같은 민족이며 같은 나라에 살고 있지만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다. 남한 교회가 북한을 위해 할 수 있는 활동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북한선교를
하는 교회와 기관은 많이 있지만 접촉의 제한 때문에 활동이 소극적이거나 주변적
인 사항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재한국교회는다양한관점과방식으로북한선교를수행하고있다. 북한의지
하교회 성도들에게 성경이나 방송을 통해 복음을 전하려는 선교단체로부터 시작하
62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여, 북한에교회를세우려는북한교회재건운동, 남북한의갈등을극복하고평화를
우선적과제로인식하면서통일을추구하는입장, 그리고북한의식량난의어려움
을 보면서 디아코니아 활동을 시급한 과제로 실천하는 교회와 단체들이 있다. 이
과정에서 어떤 특정한 방식이나 활동만이 아니라 참여하는 모든 기관과 기구들이
서로 연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북한동포를 돕는 것은 남한에 거주하는 탈북민들을 돕는 활동으로 나타나야 한
다. 교회는탈북민을위한선교로다양한프로그램으로진행하고있지만진정으로
그들을 위한 것보다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교회 자신을 위한 경우가 많다. 또한
탈북민들을 교회 안으로 통합하지 않고 별개의 부서로 분리시켜 인도하는 것도 바
람직하지않다. 이들을교회의선교대상으로 간주하지 말고동일한교회의지체로
서 교회 안으로 받아들이며 그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을 위한 활동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5) 다문화가족과 함께하는 선교
다문화가족은최근에한국사회에새롭게등장한가족형태이다. 20세기후반부
터 전 세계는 다문화사회로 이동하고 있으며 한국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처음에
이주노동자로 시작한 다문화사회로의 변화는 다문화가족의 증가현상으로 정착하
고 있다. 선교적 관심을 국내에도 갖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다문화가족과 함께하는 선교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그들을 대하는
인식과태도에변화가필요하다. 다문화가족은선교의 대상이기 전에하나님의형
상으로 창조되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이
해가필요하다. 그들을 단지 선교의대상으로여기게될 때우리와그들이라는이
중적도식의관계로대하게되며, 우리중심의선교를하게된다. 그들을사랑하는
하나님의 넓은 시각, 즉 하나님의 선교로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삶의 태도가
우선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다른문화와전통을존중하고이해하는것이필요하다. 인도의시인
타고르는 “이해란 사랑의 또 다른 별명”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사랑한다는것은불가능하다. 그들을한국사회에동화시키는것이아니라 서로다
른 문화들이 함께 존중 받으며 더불어 살아갈 때 하나님 나라의 다양성과 풍요로움
을 경험하게 된다.
다문화가족을 위한 선교는 한국교회의 새로운선교적 과제이다. 해외선교에 높
제7장 교회의 선교론적 과제와 방향 63
은 열정을 가진 한국교회는 국내의 선교적 과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 넓게는한국에정착하는이주민들을위한한글교육이나문화교육, 자녀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학교와 사회적 인식을 넓히는 일 등 폭넓게, 교회들이 연합하여
추진해야할 과제가 있다. 특히농어촌 지역에 적지않은다문화가족이있다는사
실을 고려할 때 지역교회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지역교회들은
교회학교의 교육과정에 다문화사회에 필요한 내용들을 포함시키며 총회 차원에서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4. 나가는 말
선교는 어떤 활동이나 프로그램 이전에 세상 속에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존
재로부터 시작한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다”(마 5:
13-16)라는 예수님의 말씀은복음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존재와분리될 수없음
을 언급한 것이다. 지역교회는 주민들을 교회의 선교 대상으로 여기기 전에 먼저
지역사회와 함께 살아가는 생명공동체로서의 자기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
의 몸을세운다는것(엡4:12)은단지 가시적인 교회 건물을 세우는것을 의미하
지않는다. 모든그리스도인들이세상에서살아가고활동하는모든존재양식이곧
세상 안에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가는 것이다. 그동안 교회가 자신 안에 머물고
있었고 중심부를 지향해 왔다면 이번 총회를 기점으로 하여 세상 속에서 작은 이들
로살아가는사람들과의사이에놓인장벽을헐고, 그들과함께살아가며그리스도
의 사랑의 복음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64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제8장
목회자가 본
한국교회의 현주소와 목회방향 1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한국교회를 둘러싼 사회적인 분위기들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다. 교회
의대사회적신뢰도가추락하여그이미지역시긍정적이지못하다. 이제는비기독
교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반기독교적인 성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사회 속에서 모
두가한국교회의위기를이야기하고있다. 이러한급격한변화의급류속에서한국
교회는 목회 패러다임의 변화와 갱신을 요구받고 있으며 그에 따른 교회의 목회적
접근이나그 내용을 새롭게 해야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바로지금이지역사회밀
착형 목회, 신뢰와 희망의 표상으로서의 교회상을 다시 찾아야 하는 시점이다.
2. 교회와 지역사회
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다. 교회의목회는세상가운데서이루어진다. 그러나세
상을 섬기기 위해서는 그 존재 방식과 목회적 정신에 있어서 세상과의 구별이 요구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본질을잃어버리지않으면서끊임없는갱신을통해서시대
적 소명을 찾아나가야한다. 새로운 사회환경이요구하는시대적목회를 감당하
조재호 목사
제8장 목회자가 본 한국교회의 현주소와 목회방향 1 65
기위해서교회는어떻게접근을해야 하는가? 첫째로오늘의교회가 자리한사회
적인상황과그속에서의교회의위치를지난역사를통해자문해봐야한다. 이는
한국교회의 유산에 대하여 신중하고 건설적인 비판의 자세로 접근하는 것을 의미
한다. 둘째로 우리는 교회를 둘러싼현 상황에 대하여 명철한통찰력을가지고현
미경적인접근을해야 한다. 포스트모던적 문화 상황속에서교회는 이시대의작
은 모습으로 드러나는 구성원들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새로운 접근과 결단을 도
출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언어적 증인으로서 복음의 선포적 방식에서 섬김과
긍휼, 그리고 복음의 역동적 힘을 드러내는방식으로 삶의 방식을 추구해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지역사회와 강력한 연대 의식을 가지고 지역의 모자이크적
삶의 패턴을 고려한 다양한 친구의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3. 작은 이들을 위한 목회적 접근
우리 총회는 사회 속에서 작은 이들을 다시 살피고, 그들과어깨를나란히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목양적인 마음으로 실천적 주제를 선정했다.
그러면 교회가벗이되고자하는작은 이들은과연누구인가? 사회적 약자라는개
념은 말 그대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힘이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사회 구조
가운데서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으로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해서 언제나 소외되
고뒤쳐질수밖에없는사람들이다. 우리총회는인간의기본권을넘어서서사회적
약자를 보듬어 안고 다시 이 사회의 희망의 등불이 되어 사회 구성원과 더불어 사
는 목회적 접근을 하고자 한다.
1) 가난한 사람들
우리나라는 지난 1970~1980년대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의
생활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는 세계 10대 경제규모를 갖는 나라가 되었
다. 그러나지난1997년국가외환위기사태를 겪으면서중산층의 격감, 경제적빈
곤층의 확대로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빈부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면서 그로 인한 사
회적 갈등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현실에 처해 있다.
신구약 성경에는 가난(poverty), 가난한 이들(the poor)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
한다. 그리고 특별히 그들을 향한하나님의배려와사랑,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어
떻게 해야 하며, 공동체 안에서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아와 과부로 지칭되는
66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가난한이들을어떻게대해야하는지를말씀해주고있다. 하나님은특히선지자들
을통하여가난한이들의권리를보호할것을말씀하셨다. 하나님의백성은가난한
이들을돌볼 신앙적 책임을 가지고있으며, 이들을돌보는 것은 곧하나님에대한
신앙의 증거이기도 했다.
현재 국가나 지방자치 차원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 따른 저소득층에 대한
빈곤대책에서부터 차상위계층에 이르기까지 자립 자활 서비스, 의료, 교육, 생계
급여등 다양한복지정책이 펼쳐지고 있으며, 이는점차확대되고다양화되어갈
것이다. 그러나 목회적인 차원에가난한사람들의물질적필요를실제적으로채워
주는 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지역교회에서 접근하기 쉬운 프로그램
인 푸드뱅크(Food Bank)를 소개하려고 한다. 푸드뱅크란 여유 식품을 무상으로
기탁받아 음식이 부족하여 굶거나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역할을 담
당하는 기관 및 사회 복지체계를 통칭한다. 1967년 미국에서 시작된 푸드뱅크는
세계각국에서활발하게운영되고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경제위기(IMF) 이후실
직자 및끼니조차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증가로1998년부터푸드뱅크 사업을
도입하여운영하고있다. 고척교회 ‘희망의복지재단’에서는2010년 2월부터‘희망
푸드뱅크센터’를 설립하여 빈곤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저소득층 가정에 음식을
나눔으로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나누고 있다. 설립당시1곳의 식당에서후원받
아 30가정의 지원을시작으로현재대형음식업체10개로부터매주 화요일과 목요
일에음식을공급받아재조리과정을거쳐서870개의반찬도시락으로포장하여 전
달하는것으로발전되었다. 이는지역의20여개의작은교회들을통해370가정에
배급되고있다. 푸드뱅크를 통해 집행교회와 지역의 작은교회 간의 연합과일치,
공공기관이나 식품민간업체 간의 파트너십 강화로 사업의 활성화가 도모된다. 이
를 통해 단순히 시혜적인 도시락 공급 차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찾아가는 섬김,
벗으로서의 동반자 의식이 강화된다.
2) 다음세대
우리나라의인구는2010년11월기준으로총4천858만명이다. 이는5년전보다
2.8% 증가한것이고연평균증가율은0.5%정도이다. 반면65세이상의고령인구
비중은 총 인구의 11.3%로 5년 전보다 24.5%로 급속히 증가했으며, 우리나라는
이제 고령화사회에서 고령사회로 진입 중이다. 이는 한국교회의 미래와 직결되는
문제라할 수있는 교회학교의축소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각 교단은 마찬가지
제8장 목회자가 본 한국교회의 현주소와 목회방향 1 67
이고, 우리 교단도예외는 아니어서2000년40만4천 명에서2010년37만8천 명
으로 2만 6천 명 가량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교회의 교회학교 성장세가 감소로 돌아선 것은 두 가지, 즉 우리나라의 출
산률 저하라는 자연발생적 요인과 더불어 교회의 교육목회 전략적 차원의 접근 부
재를말해 주고있는것이다. 우리 교단에서는 교회학교의 학생 수저하와 더불어
교육의질저하를강하게지적하고있다. 이런시점에다음세대를적극적으로품는
대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교회학교 자체가 위태롭고 교회의 연령구조가 왜곡되어
교회의 미래 역동성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다음세대 부흥전략을 위한 3가지 방향에서의 접근을 보면, 첫째로는 지역교회
목회자들의 방향전환이다. 지역 교회에서부터 교회교육에 대한 전교회적인 영적 ‧물적‧인적 투자와 기독교교육적 환경 조성과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는 문화적 접
근이 필요하다. 둘째로는 총회 차원에서의 지원이다. 지역교회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주 5일제의 확대에 따라
다양한콘텐츠개발이나교사 교육훈련 등이다. 그리고신학생위주의교육전도사
가아니라 전문교육사를통한기독교교육의갱신도요구된다. 마지막으로는교단
을초월해 한국교회가대처하는것이다. 예를들면, 출산장려운동이나다문화가족
의자녀들에대한교육문제들이라고할수있다. 다음세대를품는목회적접근이야
말로 한국교회 미래의 청사진이다.
3) 장애인
장애인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으며 오늘날도 장애인들은 우리 사회의 소중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에 등록된 장애인 수가 2010년 말 현재 2백
51만7천명에이른다. 등록되지않은수까지 합치면20명 가운데1명이 장애인이
고, 8가구당1가구꼴로가족구성원중에장애인이포함되어있다. 교회공동체안
에도 그 숫자나 분포에 있어서 예외는 아니다.
장애는 그들의 생활에 많은 제약과 실질적인 불편을 초래한다. 일상에 있어서
사람들과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가져오기도 하고, 원만한 대인관계의 정립에 벽이
생기기도 한다. 신체적 장애인은 이동 자체를 힘겨워하기도 하고, 사회 적응력이
현저하게떨어지기도한다. 이들을위한생존권보장이나삶의질향상, 그리고사
회의 일원으로서의 균등한 생활을 위한 국가나 지방자치 단체의 정책적 차원의 접
근이 요구된다. 그러나 재정의 투자와 정책적 프로그램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68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더불어사는 이웃의 공감적 회복이필요하다. 바로이 부분이목회적접근이요구
되는자리인것이다. 장애인은태어날때부터선천적으로장애를가지고태어나는
경우가있는반면, 살다가질병과사고로인하여후천적장애를입는 경우도있다.
우리나라전체장애인의80~90%는이런 후천적 장애인이다. 통계에따른장애의
가장큰특징중의하나는보편성이다. 누구나장애를입을수있고누구나장애인
이 될 수 있다. 장애는 멀리 있지 않고 장애인은 멀리 살지 않는다. 같은 공간과
활동 영역 속에 함께 살아가는 장애인을 잘 알아야 그들에 대한 신앙적 차원의 배
려와 사랑을 더 넓혀 나갈 수 있다.
조사에의하면사복음서에기록된장애관련내용은95건이고, 성경구절은571개
나된다. 이것은분량으로하면전체약15% 정도이다. 예수님은공생애3년동안
수많은계층과여러부류의사람들을만났지만, 제자들을제외하고가장많이만났
던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장애인들이다. 예수님은 장애인이 찾아왔을 때 한 번도
거부하신적이없으셨으며, 장애인들에게깊은연민과 사랑을나타내셨고 천국복
음을 전하셨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들 것에 매고 온 친구들을 보시고 잘했다고
칭찬하셨다. 시각장애인을보고누구의죄때문이냐고접근하는제자들의태도가
잘못되었음을 바로잡아 주시기도 하셨다. 교회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장애인들
을 향한 목회적 접근을 적극적으로 행해야 한다.
4) 다문화가족(이주노동자)
우리나라는동남아저개발국가들로부터140만명이넘는이주민노동자들이유
입되고있다. 이제 이주민을 위한한국교회의역할이대단히중요한 시점에 와있
으며, 지금이야말로 이들을 잘 섬기기 위한노력과 제도적 접근이 필요한 때이다.
이것은어느단체에만해당되는것이아니며, 모든지역교회들이시대적긴급성을
인식하여 목회적 접근을 펼쳐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몇 가지일반적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먼저는교인들의인식개
선이다. 우리 사회는 더이상 단일민족이라는표현을쓰기를꺼려한다. 우리 가운
데 이미 다양한 삶의 패턴과 다양한 문화와 언어들이 유입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추이가 이상하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교회는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보다 먼저 교회 구성원들이 다문화 혹은 이주민 노동자들을
보는 인식을 전환하는 데 힘써야 한다. 그리고 국가별, 종교별, 그리고 문화적 차
원에서 다양한 이주민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총회적으로 개발하고, 효율적인 목
제8장 목회자가 본 한국교회의 현주소와 목회방향 1 69
회사역협력을위해지역교회에공급하는것이바람직하다. 이를전문적으로뒷받
침하기 위한 다문화 전문사역자의 양성도 신학교와 교단 차원에서 추진해야 할 것
이다.
특별히 우리 사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결혼이주민 여성을 위한 배려가 지역교
회 목회에서도 나타나야 한다. 2010년 통계에 의하면 16만 8천 명의 이주여성이
한국남성과 결혼하여가정을 이루었으며이는전체결혼의12%나된다. 특히전체
다문화가족의40%가 농어촌지역에 집중되어있다. 이들의언어습득과문화이해를
위한 다양한 배려와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잘 동화될 수 있도록 고려
하는목회가절실하다. 교회는한사람의인생의전환점에서단순한생존의문제뿐
만아니라, 더나은삶을추구하는욕구가신앙안에서잘증진되고추구되도록도
와야하는것이다. 따라서이들을위한각별한관심과목회적이고정책적인접근이
필요하다. 그들이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가정, 복지,
교육, 노동, 문화에서 그들이 지니는 고유한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을 인정하면서
그들을 한국사회로 통합시키기 위하여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5) 북한동포(북한이탈주민)
2012년 2월 현재 북한이탈주민의 총입국자 수는 2만 3천 4백 명이다. 이중 여
성의 비율은 72%이다. 이를 연령별 유형으로보면 20~30대가1만 3천 명으로약
58%이고, 40대가 3천 6백 명(16%), 10대가 2천 6백 명(12%)이다. 이들의 북한에
서의 학력은 고등중학교 출신이 1만 5천 7백 명(70%)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그 다음으로 전문대 2천 명(9%), 대학 이상 1천 6백 명(8%) 등으로, 중간
이상 고학력자들이 많다고 할 수 있다.
탈북자들은 남북분단이라는 우리 사회의 특별한 구성원으로 작은 자 중에 작은
자이다. 이들은 통일이 오기 전 한국교회에 섬김의 기회로 주신 하나님의 계획이
다. 그러나이들을대상으로하는한국교회의선교와섬김의현주소는그리크다고
할수없다. 주지하는바와같이많은수의탈북자들이교회나선교단체의직간접
적인 도움으로 한국에 들어오지만 교회의 적응과 정착 과정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형편이다. 어느 연구 조사 결과에 의하면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잘 유지하는
사람은고작20% 정도로추정된다. 이런결과를만들어내는몇가지원인중하나
는 그들의 경험이나 몸에 익어 왔던 삶의 방식 혹은 문화를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
주입식 신앙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탈북자를 섬기는 방식도 변화해야 할
70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시점이다.
이런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대안들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나가야한다. 가장먼저이루어져야하는것은탈북자들에대한한국사회와교회의
인식전환이다. 특히교회는그들이지나온삶의여정들이지구상에서는어느누구
도 경험할 수 없는 아주 극단적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단순한 감정적 공감 차원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직접 살피고 마음으로
공감하는차원까지이르러야한다. 그래야만그들의진정한벗이될수있다. 더불
어 우리 사회와 교회 공동체의 이러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그들의 영적인 필요와
현실적인필요를채워주기위한목회적배려와노력이요구된다. 탈북자들이우리
나라에정착하면서참여하는종교활동은기독교가가장많다(기독교66%, 천주교
3.6%, 불교2.9%, 무교27.5%). 이런분포를볼때, 교회의역할이얼마나중요한
지를 알 수 있다. 교회는 이들을 신앙적으로 잡아주고 삶의 안정과 질적 향상을
위해여러 가지방안을강구해야한다. 탈북자들이이 사회에서 경제적혹은사회
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잘 정착하도록 교회가 적극적인 배려의 모습을 보일
때, 통일 후북한에서의선교와밀착형 섬김이 그시행착오를최소화하며 진행될
것으로 사료된다.
4. 나가는 말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복음의 가장 큰 힘은 사랑
이다. 그사랑은신학적으로는전능자하나님이죄인된인간을사랑하신다는신적
인사랑과용서받은죄인이하나님을사랑해야한다는명령적사랑이다. 이시대의
목회는교회가자리하고있는사회안에서변혁적동력으로존재해야한다. 기독교
의 사랑은 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받는 이웃을 향한 긍휼의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
이고, 그 사랑의 정신은 사회를 지탱하고 정화시키며 희망을 불어넣는 힘이 되는
것이다. 현 시대 안에서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은 봉사의 현장에서 나타나기도 하
고, 화해의 현장에서 나타나기도 하며, 정의가 필요한 현장에서도 나타나기도 한
다. 이렇게 삶의현장에서기독교의사랑이나타날때 교회를바라보고교회와함
께 살아가고자 하는 수많은 작은 이들의 진정한 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제9장 목회자가 본 한국교회의 현주소와 목회방향 2 71
제9장
목회자가 본
한국교회의 현주소와 목회방향 2
1. 들어가는 말
목회는종합적이고통전적이다. 그러나목회적실천은시대마다그초점이조금
씩 달라질 수밖에 없다. 급성장기인 1970~1980년대의 한국교회의 화두는 오직 ‘성장’이라고해도과언이아닐것이다. 물론그렇다고해서그 시대의한국교회가
다른 목회적 주제들을 무시했다는 말은 아니다. ‘성장’이라는 단순한 목표에 총력
을 기울일 때 나오는 집중된 힘을 통하여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우리가 알듯이 1990년대 중반이후부터한국교회는정체와후퇴를 거듭하
고 있다. 한국교회의 위기의식은 이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 시대가 변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불변하는 복음의 진리를 효과적으로 소통하고 실천하기 위
한 심각한 신학적, 목회적성찰이필요해진것이다. 이미 의식있는신학자들이나
선각적인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이런 신학적 고민이 폭넓게 진행되어 온 것이 사실
이다. 이제 더나아가이러한 고민의 산물들을 목회현장과성도들의삶의 현장에
효과적으로광범위하게적용하는과제가주어져있다. 이런맥락에서최근수년간
의 총회의 주제들은 이러한 고민들을 잘 반영하고 있는 참으로 시의적절한 주제들
박진석 목사
72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이라고 생각한다. 제97회의 주제인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도 이런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도출되어진 주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변화된 목회 환경의
요구에더민첩하게대응할필요가있다. 그런의미에서성장에성숙을, 양에질을,
신념에 관계를 더해야 할 것이다. 신선한 신학적 상상력을 제공하고 있는 미국의
신학자레너드스위트는그의책「관계의영성」에서관계를잃고신념만남은현대
기독교에대한 반성적 성찰을 시도하고있다. 그는 “관계에 기초한교회는 신조를
제시하고 신봉자들을 모집하는 곳이라기보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피차 간에 소통
할 수 있고 신앙 여정에 격려와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계적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한다면 복음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
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벗, 특별히 작은 자의 벗이라고 하는 주제는 복음의 관계적 측면, 화목케 하는 측
면을강조하는주제이다. 이 주제를삶의현장에 적용하기 위하여 우리모두가마
음속에 깊이 간직해야 할 기본 개념은 다름 아닌 ‘관계’이다.
2. 목회자와 성도상에 대한 새로운 정립
작은 이들의 벗이라고 하는 주제를 신앙의 현장에 적용하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은자기정체성을정립하는일이라고할수있을것이다. 즉, 이주제하에서목회
자의정체성, 성도의정체성, 교회의정체성을새롭게정리하고이해하는일이필요
하다. 실천은 정체성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삶은 존재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교회라고 하는 배의 선장은 목회자다. 목회자의 자기 정체성과 그 신학적 성향
이 어떠한가는 필연적으로 교회의 방향과 비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목회자에 대한정의와이해는 매우다양하다. 그러나관계적 개념에서
본다면 목회자는 벗이다. 목회자는 먼저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의 벗이 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15:15에서 주님은이러한 관계의가능성을 제시해 주셨다. “이제
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
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예수님의 벗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꾸어 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일차적인 목회자
의 역할이다. 기독교의 제일 계명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인 것처럼 예수님의
벗이 된 목회자는 하나님의 벗인동시에사람들의벗이 되어야 한다. 예수안에서
제9장 목회자가 본 한국교회의 현주소와 목회방향 2 73
한가족 된 성도들의 벗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벗으로서의 목회자는 권
위주의적인 자기 정체성을 벗어 버리고 성도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아래에 서는
(understanding) 겸손한 목회 리더십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더나아가 목회자는
세상사람들의벗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믿지 않는사람들과의 관계적측면을말
하는것이다. 특별히작은자들의벗이되어야한다. 작은자들이란복음의수용성
이높은도움이필요한가난한심령을가진사람들이라고할수있을것이다. 작은
자들의 벗이 되기 위해서는 더더욱 주님께서 친히 보여 주신 겸손의 도를 행해야
할 것이다.
성도는 주님을 본받지만 우선은 눈에 보이는 지도자인 목회자를 본받을 수밖에
없다. 바울도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했다. 그것은 자신을 본받음을 통하여 궁극적
으로는그리스도를본받으라는말이다. 목회자가일상의삶을통하여예수님의벗
으로, 작은자들의벗으로서의모습을보여주게되면성도들은자연스럽게벗으로
서의삶을 본받게 될것이다. 이와 같이관계에능한 목회자와 성도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교회 그 자체로 하나님과 사람들의 벗으로서의 교회의 본래적 정체성과 이
미지를 든든하게 세워 가게 될 것이다. 이 시대야말로 벗으로서의 교회 이미지와
정체성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대이다.
3. 목회적 이해와 적용 방안
1) 영적인 기초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의 공생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면서 공식적으로 선포
하신말씀이 누가복음 4:18~19에 나타난다. “주의성령이내게 임하셨으니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자에게자유를, 눈먼자에게다시보게함을전파하며눌린자를자유롭게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복음은 일차적으로 어떤 사람
들에게선포되고수용되어지는가? 가난한자, 포로된자, 눈먼자, 눌린자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작은 자들이다. 복음은 스스로를 크다고 여기는 자들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작은자의벗이되기위해서는도움이필요한자들의다양한
필요에 민감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나친 자기중심성을 극복해야 한다. 어거
스틴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알맞게 사랑할 수 있게 된다.”라
고 말했다. 이처럼 하나님을 가장사랑하는성도는지나친 자기 사랑의집착을이
74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기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바라볼 수 있는 나눔과 섬김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
는 사람이다.
교회가 작은 자들의 벗으로서 그들을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기 위한 근본적인 능
력의출발점은성령의기름부으심이다. 예수님이작은자들을향한메시야적사명
으로 나설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은 다름 아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다. 예수님의
사역을이어받은모든성도들에게성령의기름부음은필수적이다. 작은자들의벗
으로서의섬김과소통은철저하게성령 주도적으로진행되어져야한다. 이것이인
본적인 사회복지나 정의·사회운동과 근본적인 차이가 생겨나는 이유이다. 성령
의 충만한 능력과 기름 부으심을 덧입게 될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영의 주도하심
을 따라 물 흐르듯이 세상을 향한 섬김, 작은 자들의 벗으로서의 나눔과 소통의
사역으로나아갈수 있게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작은자들의벗이
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우선적인 영적인 기초는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덧입는 일이다.
2) 교회 내적 이해와 적용 방안
(1) 예배
도날드 밀러와 테쓰나오 야마모리 두 학자는 개발도상국의 급성장하면서도 적
극적인 사회봉사와 섬김을 감당하고 있는 교회들을 집중적으로 연구 조사한 이후
에 그 결과를 「왜 섬기는 교회에 세계가 열광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하
였다. 그들의 연구결과에서 가장 인상적인 내용이 있다면 이들 교회들이 다양한
사회봉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은 다름 아닌 예배 시간에 그들이
집단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강력한 성령의 능력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이
었다. 이러한연구결과를토대로그들은이런교회들의성령운동을이전의자기중
심적이고 교회 안에만 국한된 다소 폐쇄적인 성령운동과 비교하여 선진적 성령운
동, 성숙한 성령운동이라고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들의 연구결과는 우리
가 작은 자들의 벗으로서 섬기는 목회적 실천을 할 때에 우선적으로 더욱 집중해야
할사역이무엇인지를분명하게보여준다. 그것은다름아닌예배이다. 성령의강
력한 능력과 임재가 나타나는 예배가 없이는 성령주도적인 작은 자들을 향한 지속
적인섬김과 나눔은 어려울 수밖에없다. 특별히 모든 성도들이 다함께 동참하는
주일예배는 전 성도들이 다시 한번 성령의 능력과 힘을 공급받아 세상을 향한 적극
제9장 목회자가 본 한국교회의 현주소와 목회방향 2 75
적인 섬김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깨달음을 공급받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배의 구심적 방향 못지않게 교회 바깥을 지향하는 예배의 원심적 방향성
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2) 다양한 소그룹
교회 안의 다양한 소그룹은 평신도들의 은사와 역량을 사역에 동참시키는 효과
적인장을제공한다. 교회안에는저마다나름대로의소그룹에기초한목회시스템
과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교회안에는다양한 성격의 소그룹이 형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구역, 속회, 남여 전도회, 선교회, 다락방, 진, 순, 셀, 가정 교회
등이 그것이다. 이들 소그룹들은 저마다 이름이 다르고 활동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하더라도분명한공통분모가있다. 그것은바로평신도들이좀더적극적으
로 사역의 주체요 동역자로서 참여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준다는 점이다. 작은
자들의 벗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가진 성도들이 이 정체성을 자신의 사역 속에서
실천하기위한가장 실제적이고, 일상적인 장은 다름아닌 교회 안의다양한소그
룹이라고할 수있다. 먼저는 이들 소그룹안에서서로가그리스도안에서 진정한
영적교제를통하여벗이되기위한노력과훈련을해야할것이다. 더나아가목회
자는 이들 소그룹이 자기 자신들만을 위한 행복 공동체를 넘어서서 세상의 작은
자들을 향하여 구체적인 섬김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전하고 지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소그룹 단위로 특정 선교지의 선교사역을 후원한다든지, 결손
가정의 자녀들을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격려한다든지, 정기적으로 양로원을 방문
한다든지 하는 일들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3) 양육과 훈련의 방향성
많은 교회들이 설교와 심방에 더하여 성경적인 양육과 훈련 프로그램들을 지속
적으로 실천하여 성도들을 성숙케 하고 일꾼들을 배출하는 일들을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참으로바람직한일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자칫이러한 양육과 훈련들이
교회 안의 일꾼들만을 배출하는 프로그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것이다. 신앙의성숙은 결국 교회안에서의신앙을넘어서서세상 속에서의
관계를통하여검증되어질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교회의각종양육과훈련에
있어서 세상의 작은 자들의 벗으로서의 관계 개념을 지속적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
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성경적인 양육과 훈련을 통하여 교회의 일꾼을 배출하는
76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것은 기본이요 더 나아가 세상을 향한 섬김의 책임을 다하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요 작은 자들의 벗으로서의 목표를 지향할 필요가 있다.
3) 교회 외적 이해와 적용 방안
(1) 교회론의 재정립
고 옥한흠 목사는 그동안 실제로 한국교회를 지배해 온 교회론에 대하여 세상과
구별되어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론으로 설명하였다. 이런 교회론이 교회의 순결성
을 강조한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잘 이어받아 세상과의 성별을 강조한 것까지는
좋은데, 이로 말미암아 세상과 성실하게 소통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문제의식에서옥한흠목사는세상을 향한사명을회복해야한다
는 의미에서의 사도적 교회론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생겨난 그의 교회론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지상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또
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다.” 이와 같이 교회 안에서 세상을 향해
파송 받은 사도성을 회복하기 위한 목회전략의 핵심으로 등장한 제자훈련이 과연
교회의 사도성을 회복하는 데 얼마만큼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룰 문제
는 아니라고 본다. 다만세상을향하여 보냄 받은교회상을회복하고자하는그의
문제의식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당면한 중요한 목회적 과제를 잘 지적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교회는 세상으로어떤모습으로보냄을받은것인가? 정복자로서,
거룩한의인으로서, 나눌 것이풍요로운자로서보냄을받았다기보다는겸손한종
으로, 섬기는자로, 작은자들의벗으로보냄을받았다. 세상으로나아가는주님의
제자들은 작은 자의 벗이라는 겸손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함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2) 목회적 목표의 재정립
많은 목회자들의 목회의 일차적인 관심을 여전히 ‘끌어모음’(gathering)에 무
게를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유지, 존속, 발전을
위한 정당한 관심이다. 그러나 이런 관심사가 지나치게 되어 집착으로 나타나게
될 때‘끌어모음’에도실패할 뿐만 아니라‘나눔’에도 실패하게 될것이다. 이 시대
를 향한 하나님의마음을깊이 헤아려보고, 시대의 민심과 변화를예민하게관찰
해 본다면 우리는 깨어 있는 의지적인 노력을 통하여 ‘나눔’(sharing)과 ‘흘려보
제9장 목회자가 본 한국교회의 현주소와 목회방향 2 77
냄’(flowing)이라는목회적목표와과제를새롭게발견할필요가있음을절감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이 많이 모여서 무엇을 할 것인가? 성장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 진지한 대답과 성찰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성전 제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비전은 폐쇄되고
정적인 비전이라기보다는 나눔과 흘려보냄이라는 역동적인 교회의 비전을 우리에
게 보여 주고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목회자들이성장과부흥은커녕생존의위
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나눔과 흘려보냄의 목회적 비전을 논한다는 것이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생존인가? 무엇
을 위한 성장인가? 이런 질문들을 통하여 우리의 목회함의 의미와 권위의 근거가
어떤목회적 비전에서 오는지를 다시 한번진지하게생각해보아야 할것이다. 교
회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이 그 어떤 시대보다도 고조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영향
력이 강한 한국사회 안에서 미래의 활로를 열어 갈 한국교회는 분명 ‘모음’과 ‘흘려
보냄’의 이 두 기본 과제를 조화롭고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교회라야 할 것이다.
(3) 선택과 집중, 그리고 연합
세상을 향하여, 특별히 작은 자들을 향하여 교회의 축복과 자원을 나누고 흘려
보낼때 조심해야 할것은 효율성이라는과제이다. 실제로 여러 좋은일들이피상
적이고 일시적으로 진행되거나 비슷한 성격의 비효율적인 중복투자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즉, 작은자들의벗이되어살아가는일, 또한그들을적극적으로섬
기는 사역들은 또 다른 지혜와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를위하여먼저생각해볼전략적개념이바로‘선택과집중’이다. 교회가모든
좋은일을 다 감당할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는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효율적이
고열매맺을수있는사역과섬김에집중할필요가있다. 수년전에외국인노동자
를 섬기는 사역을 교회적으로 시도해 보려고 했다가 다른 쪽으로 방향을 수정한
일이있었다. 이유는 이웃교회가외국인노동자 상담 사역을잘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외국인 노동자를 섬기는 일은수요에비해 공급이 부족하지만, 중
복투자나경쟁이될 수도있기때문에 방향을 바꾼것이다. 그래서아직도 적절한
사역이 마련되지 못한 다문화가족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기본
실태조사를하고있는중이다. 교회의상황, 지역의필요, 성령의인도등여러가
지 요소를 고려하면서 세상을 섬기는 일에 지혜로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또한 이 일을 위하여 연합이라는 개념에 눈을 뜰 필요가 있다. 개교회 차원을
78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넘어서서, 여러 교회들이 힘을 합쳐 어떤 프로젝트를 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필요하다면 노회나 기독교 연합체가 독특한 나눔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감당할 수
도있을것이다. 또는정부, 지방자치단체, 주민자치센터, 사회적 기업, 사회복지
기관 또는 NGO 단체들과의 연합과 연대를 이루어 감당할 수 있는 일들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4. 나가는 말
한국계경영학자로사전의「평판을경영하라」는책에서저자는좋은평판을얻
기 위한 5가지 평판 요소를 언급하고 있다. 선(善), 흥(興), 능(能), 격(格), 권(權)
이그것이다. 쉽게말하면좋은평판은착하고, 신나고, 능력있고, 세련되고, 권위
적이지않을 때생겨날수 있다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좋은평판을얻는다는것은
이와 같이 다양한 요소들을 계속 챙기면서 자기 관리를 해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제
임을 알 수 있다. 요즈음 이 사회의 비극적인 유행어가 있다면 ‘꼼수’라는 단어일
것이다. 믿을 수없는치사한 짓거리가 바로 꼼수이다. 오늘날한국교회를 바라보
는세상의평판도이‘꼼수’라는 단어에서그리자유롭지는못할것이다. 꼼수라는
단어가 유행하는 이 시대에 한국교회가 다시금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가장 집중해
야 할 평판 요소는 다름 아닌 선(善), 즉 진정성, 진실성의 요소일 것이다. “그리스도인, 작은이들의벗”이라고하는주제와이에대한목회적관심도그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또 다른 이벤트나 꼼수로 드러
난다면우리는세상으로부터더 많은 불신을받게될 것이다. 결국한국교회가작
은 자의 벗이 되기를 원한다면 진정성 있는 지속적인 실천과 노력을 해야 할 것이
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2:47은 우리의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좋은 지침을
제공해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
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제10장 목회실천을 위한 적용지침 79
제10장
목회실천을 위한 적용지침
: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
1. 서론 : 왜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인가?
필자가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 ‘지역사회를 위한 교회’, ‘지역의 중심이 되
는 교회’를 주창한 것은 그 당시는 그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부터27년전, 1985년 겨울에한남제일교회에부임했다. 같은서울하늘아래
에 살았지만 이태원이라는곳에 와본 것은 그때가처음이었다. 놀라웠던 것은정
말 인산인해라 할 정도의 젊은이들이 해가 지고 날이 저물기 시작하니 이태원 네온
싸인불빛아래로모여드는것이었다. 서울 어디에도없는24시간영업을 써붙인
유흥업소들에서 나온 술집의 호객꾼들이 가는 길을 막아서고는 뭔지는 모르지만
잘해 주겠다는 소리를 외치며 끈질기게 따라 붙어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기까
지 “이들을 어떻게 물리치고 가나?” 걱정을 할 정도로 그 요란스러움이 정말 대단
했다. 그때는이태원의교통편도좋지않아집에오는길에택시를타고“이태원이
요.” 하면 운전기사들이 백미러로 이상하게 쳐다본다고 가정주부들은 이태원에 사
는 것을 그리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길거리를 바라보면 밤새 술을 먹고 춤추다 나온 이들이 길거리를 메우고 서울의
택시란 택시는 다 이태원에 온 것 같은데도 택시 잡는 전쟁이 한바탕 벌어지는 일
오창우 목사
80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당대 최고의 유흥가로 이름하던 이태원 술집의 주인들은 이 지역에 살기보다는
강남등지에살았고, 술집을삶의터전으로삼고사는종업원들과주방에서일하는
사람들만이이곳에살았다. 미8군이가까운곳에있으니미군과그가족들, 그리고
이들을주 고객으로 하는식당과가게들은거의 새벽까지 장사를 했다. 밤에는먹
을것, 술, 인형, 꽃등을파는포장마차가성행을했고낮에는사람들이별로다니
지 않는 유령도시 같은 그런 동네, 바로 그곳에서 나는 뭔가 다른 모습의 삶들을
보게되었다. 이태원의주민들도이렇게사는것을좋아할리없었다. 사실생활이
갑자기 어려워져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사람들이 쉽게 정착할 수 있는 곳이 이
지역이다. 밤에 나가서 접시라도 닦으면 그래도 월세를 내고 아이들하고 먹고살
수는있으니말이다. 내가봐도이곳은자식을가진부모라면살고싶지않은곳이
다. 부끄럽고 신세한탄 할 일은 아니지만 주변에 널린 유흥업소들과 이웃에 사는
유흥업소 종사자들, 게다가 여장 남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
결코 권하거나 자랑스럽지도 않은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 교회가 세워져 꿋꿋하게 복음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하지만 이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수고하기를 마다하지 않
는신앙이좋은어른들이있었기때문이다. 대부분의중직자들은먼곳으로이사를
가서도본 교회를 사랑하고 예배에도 거의빠지지않고 섬김의 삶을살았다. 그리
고 교회 인근에 살고 있는 교인들 역시 이분들의 사랑과 수고를 먹고 신앙생활을
잘하고있었다. 하지만 부임하는 날부터 듣게된 것은 예배당을 이전하는 것이어
떻겠는가라는 담론이었다. 벌써 강남으로 갔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이제라도
가야한다는사람들도있었고, 그후에도강남은아니더라도구체적으로이전문제
를 의논했던 적은 있었지만 결국에는 이전할 형편이 안 되어 현재의 자리에 만족해
야 했다.
교인들도 이 지역에 살고 있으면서도 지역에 대한 관심보다는 지역을 벗어나는
것이꿈이었다. 대다수의사람들이자신이 살고 있는지역을떠나고자한다면, 그
것은 너무 불행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교회에 부임한 이후 교회 성장의 관심과
함께사랑할수있고애착이가는지역, 교회때문에잘사는마을을만들자는것이
자연스럽게 교회존재의 목적, 목회의 방향이 되었다. 이처럼 지역사회에 대한 관
심은 지역을 살리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하였다.
제10장 목회실천을 위한 적용지침 81
2. 선교적 목회:‘마을지기’가 되어!
나는한남제일교회에부임한것이아니라한남동, 이태원지역에부임했다고말
한다. 멀리서 오는 교인들에게도 “당신들은 이곳 한남동을 복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파송 받은선교사이다”라고 한다. 교회의사명인 선교는 멀리가서 이방인들
을 구원하는 일과 함께 지역의 주민들은 물론 한남동을 책임지는 일이라고 생각한
다. 소박한마음으로는교회때문에지역의땅값이올랐으면한다. 나는보다선교
적인목회의사명을가지고지역을대한다. 정부시책에따라한남동에도주민자치
위원회가구성이되었다. 초대위원장으로누가책임을 맡아야하는가는동리의관
심사였다. 동네의유지들이한마음으로찾아와목사님이이일을맡아주셔야한다
고해서초대주민자치위원회위원장 노릇을하기도했다. 6년전에는 뉴타운대책
이후한남동인구가 현저하게 줄어들어한남 1동과2동을 합하게 되었다. 어느동
으로합쳐지는가또한주민들의관심사였다. 내가살고있는2동으로1동이합쳐지
도록 2동의 주민대표로 요청받아서 2동으로 동사무실을 합치기도 했다.
수년 전 서울시와 용산구에서 각 동마다 특화된 주민봉사활동을 한 가지씩 하라
고 해서 동장이 “청소하여 깨끗한 마을 만들기”를 하겠다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
를 듣고 단순히청소만하지 말고 청소를발전시켜서 청소해서 깨끗한마을, 깨끗
해진곳에 화단을 만들어아름다운마을, 청소의 부산물인 폐품을 팔아얻은수익
으로어려운 사람을 돕는정다운마을을만들자고제안을 했고, 그대로시행을했
다. 엊그제는 동장에게 교회에서 하는 효도관광을 의논하러 갔다가 향후 어떻게
하면 살고 싶은 마을로 만들 것인가를 의논하자 직원들도 합세하여 협력하는 사업
의 일환으로 노인들의 잔치를 관광, 잔치, 선물 등으로 구분해서 골고루드리기로
의견을나누기도했다. 뿐만아니라어려운가정을구제하는일도단순히‘쌀20kg
을 와서 가져가라’고 하지 말고 쌀 양을 줄여 더 많은 분들이 자주 새 쌀로 찧어서
가져갈 수 있도록 하고, 중고등학생들과 같은 봉사자들을 모집하여 갖다드리도록
했다. 그야말로 나는마을의 잔소리꾼(?)이 되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내
는 마을지기로 인정해 주니 이 또한 감사한 일이다.
마을지기로 선교적 목회에 대한 평가는 주민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교회가예배당건축을위해주변의땅을구입하게되었다. 처음에182평의저택(?)
을구입하고, 그주변의땅500여평을예배당부지로했으면좋겠다고 굵게동그
라미를쳤다. 더할수도있었지만형편상그것도크다고생각했기때문이다. 놀라
82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운 일은 해당지역의 주인들이 집이라도 팔려고 부동산중개소를 찾아가면 “그 집은
목사님이 금을 그어 놓은 땅이니 집을 파시려면 교회로 가세요.”라고 해서 놀랍게
도그주변의땅은직접구입을하게되었다. 그것도돈이없어일시불로주지못한
다고 하자 몇 년 분할해서 갚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 “교회는 좋은 일을 많이 하니까 비싸게 팔지 말고 좀 싸게 팔라.”고 권면들을 해
주셔서시세보다저렴하게구입할수 있었던것은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더감사
한 것은 주민들이 교회를 단순히 교인들만의 것이 아닌 우리 마을의 자산으로 여기
고사랑해주니이보다더감사한일이어디있겠는가? 마을지기정신은보다적극
적인 선교적 목회로 이어져 지역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지역사회와함께하는주요사역은주민자치위원회위원활동, 용산구사
회단체 보조금 심의위원, 용산구교구협의회 회장 등이다.
3. 나눔의 신앙: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누구나교회가어떻게지역사회의중심이되었는지궁금해할것이다. 동사무소
가교회 가까이 세워지고한남동의시작이었던1동까지이사를왔다. 그리고공영
주차장까지 교회 옆에 만들어졌으니 교회가 지역사회의 중심이 된 것으로 여겨진
다. 물론 지리적인 중심이라고 해서교회가지역사회의중심이되는 것은 아닐것
이다.
1)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예배당 건축계획을 하다
현재의 예배당을 헐고 다시 짓기로 했을 때, 대지는 작고 더 늘릴 곳이 없으니
건물 안에 모든 시설을 두어야 했다. 유치, 아동, 중고등, 청년, 주부, 노인 등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시설을 구상하는 가운데 ‘복지센터’라는 다목적교회 건물을 제
안했다. 약20년전에교회건물을중심으로하는“지역사회안에서의교회와사회
의 접촉점”이라는목회학박사 논문을쓴 적이있다. 교회건물은단순히 교인들만
의 전유물이 아니므로 교회는 지역사회와 함께하고 동시에 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사회를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생각이 아니다. 신학교를 다닐 때부터 교회는 성전이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몸이어
야한다는생각이있었다. 그리스도께서우리를위해죽으시기까지몸과피를나누
어 주신 것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나누는 삶을 통해 빛과 소금이 되어야
제10장 목회실천을 위한 적용지침 83
한다는 것이 목회관이었다. 나누는 삶! 그렇게 살고 싶었다. 아주 어려서 중학교
다닐때쯤이었다. 있는집아이들을더대우해주는것을보고교회도사회와다를
바없다고생각을했다. 지금돌아보면그때상처도받은것같다. 그래서“이다음
에 내가 목사가 되면, 아니 크면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예수님은 다 사랑해 주셨
는데……가난한사람도 말이야.”라고다짐하고다짐했던 것이 그리스도의 몸, 나
누어주는 몸으로의 교회였다. 하지만 교인들의 형편은지역을섬길 수있을만큼
시간적이고 물질적인 여력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생활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이태원 지역에 사는 이들만큼 각박하고 힘든 삶이 많지 않을 것이다. 정말
시간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는 것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다.
나 같으면 저렇게 잘 할 수 없기 때문에 정말 사랑스럽고 고마웠다. 어떻게 밤새
일을 하고, 잠자기도 바쁠 시간에 눈을 비비며 새벽예배, 1부 예배를 드리고 가실
수 있을까?
예배당 건축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내가 믿음이 없기도 했지만 어려운 교인
들에게삼십억이상의헌금을하자고할수가없었다. 장로님들도결정을해놓고
도 다시 번복을 할 정도로 힘들어하셨고 나는 그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래서
지금의 교육관 부지를 5백여 평 구입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뉴타운 건설로 땅이
묶여아무것도하지못한 채벌써10여년이지나버렸으니때로는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2) 참여 복지를 이루는 몸 된 교회를 향하여
도시 교회에서 그것도 우리 같은 처지에서 지역사회를 섬기고 지역사회의 중심
이된다는것은결코쉬운일이아니다. 하지만다목적예배당건축대신에교육관
을 구입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가 어느덧 주민자치에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 적
잖은프로그램을진행하게되었다. 이글을쓰기위해동사무소에가서동사무소나
구청에서 하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이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았더니 자료가 쇼핑백으
로 한가득되었다. 나도모르는프로그램들이홍수처럼, 아니쓰나미처럼우리 곁
으로 달려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이를 보고 동장실을 찾아가서
내가 교인들에게 홍보를 할 수 있게 프로그램들을 더 자세히 소개할 수 있도록 리
포트를 해 달라고 했더니 담당직원이 흔쾌히 준비하겠다고 했다. 오히려 우리가
너무 바빠서 못 챙겨드린 것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자기의 일을 도와주는 일이라
고인사를했다. 언젠가 동장과구청직원이찾아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 제발교
84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회에서 이 일을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무슨 돈이라도 달라는 줄 알고
움찔했더니 그런 것이 아니고 구청에서 김장축제를 하는데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김장재료는 구청에서 다 준비를 할 터이니 교인들만 동원해서 보내 주시면 감사하
겠다는것이다. 교회에서는김장축제에참석하는이들에게직접 끓인생강차를대
접했더니 구청장님이 직접 찾아와서 고맙다고 하면서 수고하신 분들에게 김장에
쓰시라고 배추를나누어주셨고, 구청홍보지에도교회의참가소식을실어주었다.
이제는 무슨 일을 하기보다는 시나 구의 마을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 주는
것만으로도감사해하고있으니참으로세상이많이변했다싶었다. 교회가지역사
회의중심이 될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지역사회가 하는일에열심히 참여를
해주었더니이젠VIP 고객이된것이다. 건물이나예산이없어도 일이 있을때마
다불러준다면지역사회의중심이아니겠는가? 그리고 지역을위해말을하면들
어 주는 것도 지역사회의 중심이 아니겠는가?
참여 복지를 위한 주요사역으로는 용산구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참여, 서울 크
린데이 청소, 김장축제 참가, 푸드뱅크를 위한 봉사축제, 자원 봉사대운영:어린
이 자원봉사대, 청소년자원봉사대, 은빛봉사단, 주변학교 초청 자원봉사축제 등
이 있다.
4. 협력하는 섬김:숨은 자세로!
우리나라 광고회사 중에 가장 큰 제일기획 직원들이 ‘방과 후 교실’로 찾아왔다.
용산구청과 함께하는 방과 후 교실이 맞느냐고 물어보더니 그 다음날부터 직원들
이찾아와봉사를해 주었다. 영어, 연극, 그림 그리기를가르쳐 주었는데이직원
들은 대부분 외국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라 실력도 있었다. 회사에서 예산이
책정되었다고 하더니 한 학생에 한 명의 직원들이 함께 용인의 테마파크에 데려가
주고때에따라연극, 오페라, 극장, 난타등상상도 하지 못했던일들을경험하게
해주었다. 걸어서10분거리에있는서울시노인복지관의 어른들에게는서예, 바
둑, 종이접기 등의 반을 만들어서 개인지도로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파리크라상
본부의 직원들은 맛있는 다과를 가져와서 같이 놀아 주기도 한다. 방과 후 교실
학생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는데 동사무소의 컴퓨터실을 빌려 매일같이 한 시간씩
전문 강사에게 교육을 받으니 학생들이 워드나 그래픽 자격증을 따서 부모들이 기
뻐한다. 봉사할강사들은구청에서직접보내주니강사걱정은한번도해본일이
제10장 목회실천을 위한 적용지침 85
없다. 매일 같이생협에서구입한간식을주니 강의하러 왔던분들도놀라면서오
히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간다. 방과 후 교실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니까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은 좋다.
지역주민들을구제하는 일, 효도관광, 결식노인식당운영등 교회가지역 사회
를 위해서 하는일에는교회가나서지 않고 동직원들이 주체가 되고, 교회는준비
하고 섬기는 일만 하고 가능하면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섬기는 일만해도 마을 사람
들은 다 교회에서 하는 것을 알기에 인사를 마다하지 않는다. 봉사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것이다.
구제에도 원칙이 있다. 언제나 좋은 쌀에 좋은 음식을 대접하는 일이다. 돈이
조금 더 들어가도 내가 먹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대접을 하니까 마음이 더 잘
통하는것을 보았다. 요즘에는 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해서 하고있는 일들 중에바
이올린교실, 발레교실, 토요공부방, 플롯교실, 미술교실등은대기명단이있을정
도로인기가많다. 필리핀이주노동자들을위한교회를설립했지만지역에서오는
분들이 적어 최근에는 용두동으로 이사를 보내고 생활비 지원만 하고 있다. 물론
이런 일들은 구청이나 동에서 하지 않는 것들 중에 부모들의 요청에 부응하여 이루
는 것이다.
주요사역으로는사랑의 쌀 나누기행사,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효도관광, 수요경
로식당,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위한 엘림미션 센터, 불우이웃돕기 지역주민초청음
악회, 북한 어린이 돕기 자선음악회, 푸드 뱅크지원 모금 등이 있다.
5. 지역교회 관계:지역교회운동으로!
지역교회운동은개교회, 개교파중심에서 지역의 교회들이교파와 크기를초월
해서개교회와교파들이가진자원들을하나로묶어내는것이다. 용산구에는16개
동에 등록된 165개의 교회도 있지만 통일교, 구원파 등과 같은 이단들의 본부도
있기때문에영적으로이들과 맞서기위해서는지역교회운동이필요하다. 지역교
회로 돌아가는 지역교회운동을 위해 각 동마다 교동협의회를 조직하고 교동협의회
를 중심으로 교구협의회를 조직하여 교회가 하나가 되고 협력하는 시스템을 운영
하는것이다. 이런지역교회운동을 가능하게 한것은현재우리나라의지방정치가
주민자치제이기 때문에 구 단위의 교회연합운동이 교회만의 잔치가 아니라 구와
동그리고주민들과함께할수있는기반이마련되어있다는것이다. 후암동교동협
86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의회는 전국에서도 소문난 지역 교회운동의 사례이다. 9개 교회의 목회자가 교파
를 초월하여 한 형제처럼 지내면서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들을 하나하나
같이해나간다. 전도지하나에각교회를소개하고구제, 경로잔치, 의료봉사, 성
탄절 연합예배도 같이 한다. 우리 교회가 속한 한남동에는 6개 교회 목사님들이
효도관광, 구제등을함께하고있는데이제는각동마다그리고용산구의교회들이
함께하는일을위해꿈을이루어내기시작했다. 2011년6월에, 용산구교구협의회
주관으로 구청 직원들과 지역주민이 함께하는 아버지학교를 개설했다. 구청에서
는 미리 세워 놓은 예산이 없다고 다음에 하자고 했지만 지역 교회와 주민들의 요
청, 그리고우리교단의“다음세대와함께가는교회”라는총회주제를시행하기위
해 노회가 기획한 일가운데 하나라서 밀어붙였다. 물론 예산은 교회가책임을지
기로했다. 앞으로는아버지학교뿐 아니라어머니학교 등도진행하려고하는데가
능하면 구청이나 동사무소의 강당을 빌려서 하려고 한다. 그래야 교회와 구청이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고 구청의 복지사업뿐 아니라 지역의 민원까지도 함께
의논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2011년 새해 용산구를 위한 조찬기도회에 300여 명의 직원과 교회의 식구들이
참석했고, 2012년올해에는1,000여명이모였다. 우리교회가소속된서울서노회
용산시찰회에서도 큰 역할을 감당했다. 이전만 해도 100여 명이 참석하면 대단한
일이었지만교회가지역사회에더가까이가야한다는의지가있기때문이다. 필자
는 교구협의회 회장을 자진해서 맡았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공동체를 만들고
자한다. 용산구교회협의회는구청에서운영하는복지관을위탁받아운영하는주
체가 되어 지역교회와 복지기관을 통한 섬김활동을 감당하고 있다.
필자의 주요사역으로는 교구협의회 회장, 교동협의회 위원, 용산구교회 연합예
배운영, 복지관위탁운영 등이 있다.
6. 나가는 말:지역과 함께하는 교회를 지향하며
지역사회와함께하는한남제일교회의키워드는 소통이다. 소통은“좋은친구한
남제일교회(요15:15)”의모습으로세 가지지향점이있다. 하나님말씀대로사는
좋은 친구(하나님과의 소통),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좋은 친구(이웃과의 소통), 사
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좋은 친구(자신과의 소통)이다. 지역사회는 지역과 함께하
는 목회자의 마음을 헤아려 지역주민들이 나서서 목사에게 용산구에서 주민대상을
제10장 목회실천을 위한 적용지침 87
받게하였고, 서울시주민대상후보까지갔지만스펙이부족하고종교인이라서상
을 받지는 못했다. 그래도아쉬운것은 없다. 사람들은 종교인은 당연히지역사회
는 물론 어디서나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교회 역시 그렇다고 생각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꼭 무슨 스펙이 있을 정도로 누구에게나 보여 줄 수 있는
건물과 예산이 필요하다면 과연 우리의 교회들은 어느 세월에 지역사회와 함께하
는 지역의 중심이 되는 교회를 만들 수 있겠는가?
오래 목회를 하다 보니 깨닫게 된 것이 있다. 교인들, 주민들 구분할 것 없이
다내가족처럼여기고, 있으면나눠주고없으면때론도움을받기도하고그러면
서 같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지역사회를 위한 교회를 만들어 가는 목회자의 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이젠 더 이상 교회가 서로 경쟁상대가 아니라 지역에
헌신하고 세상을 변화시켜 우리가 사는 지역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가는 상생의
동역자로 살기를 소망한다.
88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주제설교
작은 이를 위한 그리스도인
마태복음 25:31~40
1. 서두
올해2012년은우리 교단과총회에무척뜻깊은해입니다. 바로우리총회가세
워진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7개 노회가 모여 총회를 구성한 것이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2년이었습니다.
선교100년을 맞으면서 우리 총회가 정한 주제는 “그리스도인, 작은이들의 벗”
입니다. 주제성구가두개있는데, 하나가 오늘본문에포함된마태복음25:40이
며, 다른 하나가 레위기 19:18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런성경구절을주제구절로삼으면서‘작은이’들을, 특별히더관심을가져야
하는작은이들을가난한 사람들, 다음세대들, 장애인들, 북한동포들, 다문화가족
들로 정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의 성장과 복음의 확산은 철저하게 작은 이들을 통해서 이
루어졌습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작은 이들을 위한 선교에서 시작되었습
니다. 작은이들을위한복음전파를통해복음이확장되었습니다. 그런데이제세
계에자랑할만한교회로성장하면서, 한국교회는가진것을자랑하는큰사람들의
손달익 목사
주제설교 89
교회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 100년을맞이하면서이제다시 신앙의초심을, 교회의
초심을, 목회의 초심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교회와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과 복음 확장의 사명을 제대로 실천
하기위해,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어떤목회적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2. 본문 내용
본문의 이야기인 마태복음25장은 최후심판비유에나오는말씀입니다. 최후의
날에 임금이 보좌에 앉아서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처럼 모든 민족을 모아
놓고 구분하겠다고 합니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는데, 임금은 오른편
에 서 있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이들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임금이 그 이유를 설
명해줍니다. 임금이배가고파허기질 때에먹을것을주었고, 목이 마를 때에 물
을 주어 마시게 했고, 나그네가 되었을 때 반갑게 맞이해 주었으며,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주었고, 병이 들었을 때 간호하고 돌보아 주고, 감옥에 갇혔을 때 와서
돌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오른편에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반문합니다. “저희들은 임금님께
서 주리시거나 목마르신 것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임금님을 대접했
다고 말씀하시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들의 질문에 대한 임금의 대답이 바로
25:40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것입니다.
도대체무슨말입니까? 하나님께서우리를마지막에심판하실때분명한기준을
가지고심판하신다는말입니다. 그기준은무엇일까요? 오늘본문은, “지극히작은
사람들을 정성껏 도와주었는가?”라는 질문이 심판의 여부라는 것입니다. 이 기준
은우리가쉽게수긍할수있고, 우리에게잘알려져있습니다. 그렇지만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작은 자’를어떻게말하고 있습니까? 성경은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옥에 갇힌 자들을 ‘작은 자’라고 말합니다. 이들
은재산이나, 권력이나, 명예나건강과는거리가먼사람들입니다. 돈도권력도명
예도, 건강도없는사람들이기때문에경제적으로약자들이면서, 사회적으로약한
90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관심 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약자가 된 데는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게을러서 그렇게 될 수도 있
고, 자기스스로생활을제대로못해서그럴수도있습니다. 또한사회적환경이나
억울한 일을 겪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본문은 이에 대해서 어떤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약한 자, 작은 자가 된 과거의 과정에 대해 변호하거나 비
난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현재
약자의위치에서살 수밖에 없는이들이우리 곁에있다는것입니다. 약한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것입니다. 혼자 살아가기 어려운 이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이
성도로서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은 이런 약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나 핑계를 대지 말라
고이야기합니다. 이런것은국가가해결해야지, 이런것은병원에서나할수있지
등의 이유를 들어 작은 자들을 돕는 책임을 미루거나 회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자리에서 약자들이 가장필요로하는 것을주라고말씀하는것입니다. 굶
주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
니다. 나그네나이방인들은따뜻하게 ‘영접’해주라는것입니다. 작은이들의 구체
적이면서도 실용적인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이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작은 자’들이 넘쳐나는데 어떻게
다 도울 수 있을까요? 성경 본문이 우선적으로 관심갖는 대상은 단순히‘작은 자’
가아니라‘지극히 작은자’(40절)입니다. 성경의헬라어는‘작은’, ‘어린’, 혹은‘비
중 없는’ 등을 뜻하는 말을 가장 최상급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냥 작은 자가
아니라 ‘가장 작은 자’, ‘가장 어린 자’, 혹은 ‘가장 비중 없는 자’, ‘가장 별 볼일
없는 자’란 뜻입니다.
따라서 본문은약자들중에서도가장약한자, 배고픈사람중에서도가장주린
자, 병든 이들 중에서도 최악의 상태에 있는환자를 우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이 세상에서 최고로 약한 사람만 돌보면 되고, 보통 약한 사람이나
좀 덜 약한 사람은 우리가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일시에 모든 작은 자들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들을 ‘가장 작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작은 자를
돕되, 가장도움을필요로하는이들이누구인가를잘선별하는것은지혜이며, 한
국교회와 성도들이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입니다.
주제설교 91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작은 자를 돕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본문
에서오른편에있던사람들은, 임금의말을듣고깜짝놀랍니다. 왜냐하면자신들
이 도왔던 사람이 임금인줄 전혀 몰랐기때문입니다. 이들은작은이들을 섬기고
봉사할 때, 어떤 보상이나 기대를 가지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도와주는
이 사람이 바로 임금이니 내가 도와준다면, 나중에 나에게 큰 상을 주겠지.” 이렇
게 은근히 기대하고 도운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을 볼 때마다, 밥을 주었고,
물을주었고, 옷을주었고, 치료해주었고, 감옥에 가서 갇힌사람을위로했고, 나
그네가 오면 집으로 환영하고 머무르도록 한 것입니다. 약한 사람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돌본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모든 상황에서 어려운 사람을 볼 때마다 도와야 할 것을 말합
니다. 본문의 35절과 36절은 처음 네 가지 약한 사람들, 즉 주리고, 목마르고, 나
그네되고, 헐벗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찾아온경우이며, 나머지병들었을때와 옥
에 갇혔을 때는내가어려움에처한 사람을 찾아간것입니다. 작은이들이 우리에
게 오는 경우는소극적이고 의무적인 돌봄이지만, 어려움에 처한사람을볼 때그
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돌봄입니다. 이렇게 본문은 우리에게
작은이들이우리들에게오는것을볼때마다, 우리가작은이들을알게될때마다,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가리지 않고 돌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처럼 우리가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을 섬길 때, 훗날 구원받을
때 좋은 결과를가져올 것을 생각하면서 돕는것은 적절한태도가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본문에서 여러 가지 선행을 베푼 사람들의 자세를 배우고 실천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대가를 전제하지 않고 사랑의 마음으로 돌보라는 것입
니다. 이런 자세로 선행을 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는 것입니다. 그래
서 한편으로 오늘본문은조심스러운본문입니다. 우리 곁에늘 있지만 쉽게외면
하게 되는‘지극히 작은자’와 임금, 곧 주님이동일시되고 있기때문입니다. 그동
안 하늘의 하나님만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우리 주변에 있는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3. 작은 이를 위한 목회적용
이제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서 우리가 ‘작은 이를 위한 목회’를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간략히나누어 보겠습니다. 교회가 작은 자의벗이 되기 위해요청되는목
92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회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세계를 품는 목회이며, 둘째는 함께하는 목회이며, 셋째는 경계선을 넘
어 가는 목회입니다.
본문에서말하는목회는세계를품는목회입니다. 즉, 교회와 교회 밖을 구별하
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은임금의 오른편에 있던 사람들이 교회안에서섬겼
는지, 교회 밖에서 섬겼는지 이런 것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들은 일상생활속에서약한이들을섬겼습니다. 주변에있는약한 사람들, 외
부에서온 나그네들, 때로는 감옥까지 찾아가서 돌보고섬겼던것입니다. 이는 성
도들과교회는세상과교회를둘로나누는것이아니라는것을의미합니다. 좁게는
교회가자리잡고있는 지역을 품고, 넓게는 세상전체를품는것을말합니다. ‘작
은 이들을 위한 목회’는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들이기보다는 교회 밖에서 세계를
품는목회를말합니다. 교회는지역을품고, 하나님이만든세계전체를품는것입
니다.
둘째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목회입니다.
작은 이들의 벗이 되는 목회는 그들과 함께하는 삶에서 시작됩니다. 흔히 복음
의 확장은교회가 주체가 되며, 다른 사람들을 복음 확장의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교회가 복음 전파의 주체가 되면 그의 대상은 언제나 교회 밖에 머물게 됩니다.
이때교회가 중심이 되고, 복음전파의 대상은 교회변두리에있다고생각하기쉽
습니다. 이 경우에 목회의대상이되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들어오지못하고교회
의 복음 전파의대상으로남게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그렇게말하지않습
니다. 먼저 가서 음식과 물, 옷을 함께 나누고 사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작은 이들은 우리의 목회 대상이 아닌 그리스도와 함께 사귀는
것으로초청하여함께교제를나누는사람들입니다. 함께먹고마시고나누는벗이
되는목회는내가주체가되어중심이되고, 작은이들이객체로혜택을받는대상
으로 구분하는 그런 목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 자체가 낮아진 것입
니다. 예수님은세상에오셔서당시사람들에게멸시와천대를받는부류의사람들
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이들과 함께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늘 중심에서 육신을 입고 종으로 낮아진 ‘작은 이’의 모범이 되었으며,
자신의 공생애를 작은 이들과 함께하였습니다. ‘작은 이들을 위한 목회’는 교회나 성도들이 “누구에게 무엇을 베푼다.”, “누구를
주제설교 93
위한다.”가 아니라 교회가 누구와 , 함께한다는것을 우선시합니다. 본문에서 하나
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사람들은 기다리기보다는 그들에게 먼저 찾아가 함께
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작은 자들을 위한 어떤 활동을 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교회 안으로 초청하여 친구로서 함께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을 전
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작은 이를 위한 목회는 경계선을 넘어가는 활동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볼 때, 그리스도인의 삶과 복음 전파의 활동은 경계선을 넘어서
는활동입니다. 목회는이세상에존재하는다양한경계선을넘어하나님의초월적
인 사랑을 증거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넘어야 할 경계선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은 여러 가지 영역
을통해넘어야할담과경계선이어떤것인가를묘사합니다. 복음전파는예루살렘
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즉, 중심부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의 경계를 넘어 온 유대
땅으로 확장됩니다. 그 후 유대인은 가지도 않는 사마리아 지역을 향해 넘어갑니
다. 그리고 땅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복음전파가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데 중심부에서 주변
으로, 궁극적으로인종과종교, 원수사이까지도 넘어서증인이되며 화해의 사신
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은 이러한 경계선을 넘어가는 활동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속에서 당시 존재하던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
열심당 등 다양한 종파적 담을 넘어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불렀습니다. 더욱이
사람들의편견과선입견을넘어세리, 창녀, 불치병환자, 가난한사람들과함께하
면서그들을하나님 나라의주역으로세웠습니다. 바울은이러한예수님의사역을
한마디로사람들 사이에 막힌 담을허무는 중재사역(엡 2:14), 화해의 사역(고후
5:18-20)으로 묘사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도 이런 목회 사역의 연장입니다. 배고픈자와배부른자사이
의 경계선을 넘어섭니다. 건강한 자와 아픈자의 경계선을 넘어섭니다. 감옥에 있
는 사람과 감옥 밖에 있는 담벼락의 경계선을 넘어섭니다. 본토민과 이방인이나
나그네사이의혈통과문화의경계를넘어섭니다. 주님이보여주신목회는사회적
장벽과 담을 헐고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청하는 사랑의 활동이었
으며, 지금 우리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94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4. 마무리
복음 전파는 어떤 활동이나 프로그램 이전에 세상 속에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
의 존재로부터 시작합니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다”(마
5:13-16)라는예수님의말씀은복음이교회와그리스도인의존재와분리될수없
음을언급한것입니다. 소금처럼스스로녹아없어지면서남을잘드러내고조화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또한 빛처럼 스스로를 태우면서 다른 이들을 밝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100년의활동을통해우리 총회는한국사회와세상을섬기는사역
을잘감당해왔습니다. 이런섬김의활동이더욱새로운100년을맞이하면서더욱
활발해지기를 기대합니다.
오늘본문을 통해서 주님은 총회설립 100년을 맞는 우리에게질문합니다.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아들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받았다고 말하면서, “주린 자와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갇힌자들을돌아보았는가?” 이렇게묻고있습니다. 또이렇게묻고있습
니다. “가난한이들, 다음세대들, 장애인들, 북한동포들, 다문화가족들, 이들이찾
아올 때 돌봐 주었으며, 이들에게 다가가 돌보아 주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예,
주님저희는 그렇습니다.”라고자신 있게 대답하는,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우리 총회와 한국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역대총회주제
제58회 1973년 선교하는 교회
제59회 1974년 선교하는 교회–교회개척의 해
제60회 1975년 선교하는 교회–계속 300교회 개척
제61회 1976년 교회신설과 개척–매년 300교회 목표
제62회 1977년 교회성장과 개척
1. 구체적인 교회성장 및 개척 세미나
2. 교회성장을 위한 자료제공
3. 교회신설과 개척의 강화
4. 매년 300교회 목표달성 추진
5. 폭넓게 개혁하는 교회
제63회 1978년 한국을 위한 교회
1. 사회개발과 선교권 강화 2. 교회개척과 평신도훈련
3. 교회성장과 신학교육 강화
제64회 1979년 세계를 위한 교회
제65회 1980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정의, 일치, 복음화, 평화
제66회 1981년 나는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5)
실천목표 1. 교회성장과 협력 2. 개척전도와 선교
3. 성서교육과 경건 4. 사회정의와 참여
제67회 1982년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마 8:7)
실천목표 1. 교회성장과 일치 2. 교회갱신과 치유
3. 100주년사업의 적극 참여
제68회 1983년 든든히 서 가는 교회(행 9:31)
실천목표 1. 100주년사업의 완성 2. 5천 교회와 150만 성도 달성
3. 적극적인 사회봉사
제69회 1984년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사 60:1)
실천목표 1. 100주년의 해
2. 개척교회 목표 달성의 해
3. 국제선교운동 착수의 해
제70회 1985년 세계를 향한 교회(행 1:8)
제71회 1986년 역사를 새롭게 하는 교회
제72회 1987년 정의, 평화, 일치를 향한 교회
제73회 1988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74회 1989년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
–공의, 사랑, 겸손
제75회 1990년 선교공동체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교회(행 1:8)
제76회 1991년 화해와 평화를 실천하는 교회(약 1:18)
제77회 1992년 선교·통일·평화
제78회 1993년 시대에 앞장서는 교회(시 34:14)
제79회 1994년 새롭게 하는 교회(행 21:7–14)
제80회 1995년 세계와 함께 나누는 교회(사 40:9–11)
제81회 1996년 화평케 하시는 그리스도(엡 2:14)
제82회 1997년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고후 5:17)
제83회 1998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마 8:7)
제84회 1999년 인류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딤전 1:1)
제85회 2000년 임하소서, 성령이여!(행 1:8, 엡 4:2–3)
제86회 2001년 성령이여 교통케 하소서(고후 13:13)
제87회 2002년 생명의 성령이여 삶의 주인이 되소서
(롬 14:17 하)
제88회 2003년 보혜사 성령이여 깨끗케 하소서(시 51:10)
제89회 2004년 교회, 세상의 소망(벧전 2:9–12)
제90회 2005년 교회, 백성의 위로자(사 40:1)
제91회 2006년 교회여,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라
(사 51`:17, 롬 13:11)
제92회 2007년 교회여, 생명을 잉태하라(요 10`:10 하)
제93회 2008년 섬겨야 합니다(갈 5`:13, 전 11:1)
제94회 2009년 하나님을 기쁘시게(요 8`:29, 시 37:4)
제95회 2010년 다음 세대와 함께 가는 교회
(신 6:4–9, 마 28:18–20, 행 2:17)
제96회 2011년 그리스도인, 세상의 소금과 빛
(마 5:13–16, 벧전 2:11–12)
제97회 2012년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마 25:40, 레 19:18)
* 제58회 총회 이전에는 주제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