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일자리를 얻기는 하였으나, 최종 결정을 위해서는 고민 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집에서부터 새로운 직장까지의 거리였다. 그 거리는 장장 편도 62mile(100Km), 왕복 200Km니 되는 먼 거리로 그 중 고속도로가 약 20마일, 하이웨이가 약 37마일, 그리고 나머지 5마일 정도는 일반도로였다. 운전 시간은 항상 속도를 약간 초과하며 운전을 하고 다녀도 한 시간하고도 십분 이상이 걸리는 거리였다. 하루에 3시간 정도는 차 안에서 보내야 했던 것이었다.
부연해서 잠깐 설명하면, 한국어로 번역하면 Freeway와 Highway가 다 고속도로로 번역되지만, 정확하게는 Freeway만이 한국의 고속도로에 해당하고, Highway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로서 신호등과 인적이 뜸해서 비교적 빨리 달릴 수 있는 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도로에서 운전할 때10%나 또는 10mile정도의 과속은 묵인해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두 번째 문제는 급여였다. 난 사장에게 ‘처음에는 사장이 제시하는 대로 하루 $100씩을 주급으로 받겠으나 내가 일하는 것을 보고 급여를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기간에 관계없이 새로 결정해서 올려 달라’고 제안 했다. 한국에서 한번 이 같은 제안을 했다 (http://blog.daum.net/dahamgge :인생5-“화불단행과 극복”)가 피해를 본 경험이 있었지만, 난 인생에서 두 번째로 같은 제안을 다른 사장에게 또 해본 것이었다. 뭘 믿었는지 모르지만 그만큼 성실함과 능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나의 새로운 직장은 나이키, 팀벌랜드, 리복, K-Swiss등 유명메이커의 의류와 신발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사장은 버지니아의 Warsaw라는 시골에 있는 작은 Shopping Mall을 임대해서 그 안에 신발과 의류 가게를 차리고 뷰티 서플라이와 미용실, 이발소등을 다른 사람에게 임대해 주고 있었다.
2001년 9월 11일 항공기 납치 동시다발 자살 테러로 미국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911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는, 그 지역에 리바이스 청바지 공장과 여러 사업체들이 있어서 장사가 잘 되었지만, 911사건 이후에는 미국의 전반적인 경기침체로 공장들이 철수를 하면서 지역경제가 몰락하고, 옆에 있던 슈퍼마켓도 몰 안의 식당도 문을 닫게 되어서 썰렁한 분위기까지 감돌고 있었다.
사장은 Flea Market에서부터 고생하며 사업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시골경기가 하락하자 리치몬드 시내에 다른 가게 또 하나를 막 오픈 한 상태여서 믿을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태라는 게 처음간 나의 눈에도 보였다.
처음으로 내가 같이 근무하게 된 직원은 나보다 서너 살 더 많은 흑인 이었다. 사실 처음으로 일터에서 접해 본 흑인영어라 처음엔 소통하는데 쉽지 않았다. 예를 들면 샌드위치를 ‘새무치’라 발음하고, 월마트는 ‘월막’이라 발음을 해대니 그걸 처음에 어찌 알아듣겠는가?
내게 주어진 업무는 들어온 신발과 의류 등을 체크하고 관리하는 것 이었다. 사장은 나에게 매장 일은 다른 직원들이 알아서 하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물건 관리하는 일만 신경 쓰라고 하였다. 첫날은 분위기 익힌다고 온종일 매장에 서 있었다. 매장에는 직원용 의자가 없었기에 나의 새로운 첫 직장에 대한 첫날 기억은 허리가 몹시 아팠다는 것이다.
몇 일 지나지 않아서, 난 사장이 컴퓨터와 다기능 프린터를 오가며 열심히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보았다. 난 다가가서 물었다. “뭐해? 세일 사인 만드는 것 같은데. 내가 좀 해볼까?” “형님이 컴퓨터 잘 할 줄 아세요.’ “그럼, 내가 명색이 프린팅 컴퍼니 이사를 한 사람인데. 내가 해 볼께”
요즈음 읽었던 책 ‘안철수의 생각’중의 글이 생각난다. ‘ 잡스는 “열심히 살다 보면 옛날에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경험들이 모두 연결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했어요. 그게 영어 표현으로’connected dot(연결된 점)’라는 것이죠. …’
스티브 잡스의 말대로 열심히 살다 보니, 과거의 경험이 연결이 되어서, 그날부터는 하루 종일 서있어서 허리 아플 일은 없어졌다. 매장에 있던 컴퓨터 앞에 내 의자가 놓여졌기 때문이었다. 업무도 완전히 바뀌어서 입고되는 물건의 관리뿐만 아니라 회사 전반적인 관리임무가 내게 주어졌다.
주급도 바로 몇 일 지나지 오르고 또 올라서 바로 내가 받고 싶었던 수준으로 올랐다. 처음 면접 보았던 그로서리 카운터앞의 아저씨가 5년 걸려서 받은 그 주급을 한 두 달 정도인가 만에 내가 받게 된 것이었다.
주급 $1000을 받아도 생활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니, 아무리 미국에서는 고등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라 학비는 들지 않는다 해도 아이 셋 키우는데 어찌 밥만 먹이며 키울 수 있는가 말이다. 한국처럼 전세제도가 없으니, 월세 내랴 게다가 출퇴근 비용이 많이 들어 이사를 고려해 보기까지 하였으나, 자녀 교육을 위해 미국에 온 이상 상대적으로 교육환경이 좋지 않은 시골지역으로의 이사는 절대 고려 할 수 없었다.
2005년 당시만 해도 기름값은 갤론 당 $1.70 ~$1.80정도로 지금 2013년의 $3.60과 비교하면 절반에 불과한 수준이었으나, 역시 거리가 머니, 한 달에 수 백 달러는 기름값과 오일교환 등의 차량유지비로 들어갔고, 남편 잘못 만난 죄를 지닌 내 마누라는 미안하게도 비린내 열심히 풍기며, 생선가게에서 생선 다듬는 일을 하게 되었다.
사실 생선가게 아르바이트를 먼저 시작한 것은 나였다.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는 생각으로 학교에서 만난 젊은 P에게 일주일에 몇 시간이라도 Part time으로 일할 자리가 없는지 물어 보았다. P는 자신이 알고 있는 생선가게 A사장님이 사람을 찾고 있다며 소개해 주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칼을 잡고 생선을 다듬는 일을 해보게 되었다. 아침 8시부터 1시 30분경까지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끝나면 바로 생선가게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고 6시까지 일을 했다. 그 다음 청소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새벽 2시.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철인도 아닌데 어떻게 그 시간들을 감당해 냈었는지 모르겠다. 학교 안가는 날과 일요일에 힘을 보충하며 견뎌 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일도 그리 오래 지속할 수가 없었으니, 힘들어서도 아니고, 일에 꽤가 난 것도 아니고, 한마디로 ‘짤렸던 것’이다. 사실 난 평소에 밖에서 일한답시고 아내의 부엌일을 많이 도와준 편이 아니었다. 생선가게의 일 이라는 게 물론 생선을 다듬어 파는 일도 있지만, 레이크트라우트라는 일종의 명태의 비닐을 벗기고, 살만 분리해내서는 튀김 옷을 입혀 기름에 튀겨낸 후, 그것을 빵 사이에 넣어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파는 일이 제일 많았다. P가 소개해 주었던 가게는 장사가 잘되고 있었기에 내 업무는 일하는 시간 내내 샌드위치 만들 생선 비닐을 벗겨내는 일 이었다.
많은 가게들이 그 생선 다듬는 일이 귀찮아서, 이미 살만 발라져서 냉동으로 들어오는 생선으로 샌드위치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직접 다듬어서 만든 샌드위치와는 근본적으로 맛의 차이가 확연하기에 그 가게 A사장님은 힘들지만 그 과정을 고집하고 계셨다, 그러니 장사가 잘 될 수밖에.
어느 날 A사장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먼저 오랫동안 일하다가 그만둔 스패니쉬 친구가 다시 오기로 했다'고 말씀하셨다. 나름대로는 나도 최선을 다했지만 어찌 서툰 내 칼 솜씨가 맘에 드셨으랴. 그렇게 해서 난 잘렸는데, 몇 달 후에 다시 그 스패니쉬 친구가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내도 일 할 자리를 찾고 있던 중에 그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아내는 자기가 한번 가 보겠단다. 난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고 보통 힘든 일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말렸지만, 평소 요리솜씨만큼은 자신 있었던 아내는 생선 다루는 일은 자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고집을 피웠다. 다행히도 A사장님께 보여 드렸던 내 인상이 나쁘지는 않았었나 보다. (칼은 잘 못다뤘어도,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 드렸었기에) 전화를 걸어 아내를 보내도 되겠냐고 했더니 선뜻 오라고 하셨다.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아내의 칼 솜씨로 아내가 Fish가게에 취직이 되었지만 문제는 또 하나가 있었다. 집에 차가 단 한 대뿐 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와서 이런 소도시에 살기 전에는 미국사람들이 집에 차가 여러 대 있는 이유가 부자여서 인줄 알았다. 하지만 살아보니, 미국에선 차가 없으면, 완전 감옥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중소도시는 대부분 대중교통이 발달되어 있지도 않고, 상업지구와 주거지구가 분명히 구분되어 있어서, 동네에는 구멍가게 조차 없는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차가 없이는 슈퍼마켓에 가서 장보는 일 조차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거의 식구수대로 차가 여러 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차 갈아야 할 때 된 것 아니야?” 난 사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왜요?” 사장이 물었다. 난 상황을 설명하고 ‘내차는 새 차인데, 이 먼 거리를 매일 다니면, 할부금을 다 갚기도 전에 내차가 멈춰 서 버릴 거’라며, ‘지금 사장이 타고 다니는 차도 오래 되었으니 내게 싸게 팔라’고 했다. (속으론 아니면 그냥 주 던가. 이러다 대머리 까지겠네) 사장은 고맙게도 ‘차를 바꾸려고 생각을 했었고, 오래된 차이니 돈은 받을 수 없다’며 공짜로 나에게 차를 넘겨 주었다.
이런걸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이겠지! “아빠! 정말 사장님이 차를 줬어? 정말이야?” 아이들이 놀라며 묻는다. “그래,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많은 거야.” 아마도 아빠와 함께 살아오면서 아빠가 사람들을 잘 못 만나서 힘들어 하는 모습만 봐 왔기에 그때의 상황이 믿겨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내는 일주일에 3일이나 4일 정도를 생선가게에서 일 했다. A사장님은 우리가족에게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많이 주셨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면 거의 매번 생선을 한 보따리씩 싸주신 덕에 아내가 생선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반찬걱정은 크게 덜며 생활했던 것 같다.
이렇게 나의 마국이민생활 2막은 시작되었다.
첫댓글 highway는 interstate highway를 줄여 말하는 것으로 굳이 번역하자면, 주(State)연결 고속도로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고속도로라고 해도 맞습니다. 그리고, freeway는 highway와 같은 말이므로 같이 혼용해서 쓰셔도 됩니다. 교통공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아닌 이상 두 단어의 정의를 따로 생각해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역시 노력이 기회를 만나면 운이 된다는 말이 맞습니다. 많은걸 배웠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정밀 중요한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올린지 몇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보잘 것없는 글솜씨의 글을 이렇게 많이 들 읽어 주시고, 댓글까지 달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미사모에서 받은 도움이 많으니, 단 한분이라도 제글을 읽고 이민생활에 도움과 작은 희망이 되시길 바라며 글을 써 봅니다. 읽어 주시는 분들 그리고 특별히 댓글로 힘을 보태주시는 분들께 다시한번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사셨던것 같네요 한국이나 미국이나 열심히 살면 희망이 생기는것 같네요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네요 ``~~~~~~ㅎ
불혹님의 글을 읽으며 나의 이민 초기 생활이 생각 나는군요.열심히 살면 그 댓가는 분명히 있습니다.삶에 잔꾀를 부리기보다 정석으로 뚫으면 길이 보인다는것을 알려주는 글에 감동입니다.
정말 흥미진진 기대됩니다..한편의 소설을 보는듯 감동적이네요..다음글 기다립니다.홧팅 ~
소설같은 내용인데요. 열심히 사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이 이민 초보자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됩니다.
희망을 잃지않게하는 끈이랄까.
생생한 경험담에 감사드립니다
저와 비슷한 코스를 가고 있는 듯해서 제가 별도로 수기 올리지 않아도 될것 같습니다..동병상린 이라고 했던가요..
대단하십니다..ㅉㅉㅉ
속으론 아니면 그냥 주 던가. 이러다 대머리 까지겠네 ㅎㅎㅎ아이 웃어서 죄송합니다.
경험담이 너무 리얼하고 진솔하여 가슴에 와 닿습니다.
고생이 많으셨네요...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저도 미국으로 가려고 고민중인데 일자리가 걱정이군요.. 한국에서 화이트 칼라였는데, 뭘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오늘 가입해서 쓰신 글들 계속 읽고 있습니다. 대단하신 분 이세요. 존경 스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