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原梁氏 08-05-2313:16:27
김포시 통계에 의하면 김포 관내에 거주하는 성(姓)씨는 모두 139성(姓)에 이르고 있다.
실로 그 다기함에 놀라지 않을수 없다. 또한 과거 김포를 본관으로 한 姓씨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나타나있다(세종실록 지리지, 여지승람).
조선시대 대 가족제 에서는 관념상 같은 문중(門中) 사람들이 특정지역에 모여 사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태는 많이 변해 씨족(氏族)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사례가 그리 흔지않다.
하지만 전통 농촌과 도시를 함께 포용하고있는 都,農 복합도시 김포시에는 씨족이 수백년간 지역별로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世居)하며 선영(先塋)을 중심으로 제례를 지내면서 씨족간의 유대를 돈독히 해나가며 살아가고 있는 문중이 상당히 많다.
김포에서 대대손손 살아가는 명문 성(姓)씨들의 고향(故鄕)과 입향내역, 배출 인물을 살펴 보기로 한다.
(편집注) 남원양씨 -문양공(文襄公)대종회 시조는 탐라국의 개국왕으로
양(良), 고(高), 부(夫) 3성중 1성인 양을나(梁乙那)며 후손인 양탕(梁宕)은 신라 내물왕(奈勿王) 19년에 광순주사(廣巡州使)가 되어
왕으로부터 작록(爵祿)을 받고 양성(良姓)을 양성(梁姓)으로 고치고 본관을 제주(濟州)로 삼았다.
중시조(中始祖) 우량(友諒)이 757년(경덕왕16년)공을 세우고 남원백(南原伯)에 봉해 짐으로서 남원(南原)으로 관적(貫籍)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세수(世數)를 헤아리지 못하고
병부공(능양)파(兵部公(能讓)派), 고성군(능길)파(藁城君(能吉)派), 청주(성준)파(淸州(聖俊)派) 대방군(수정)파(帶方郡(水精)派),
용성군(주운)파(龍城君(朱雲)派), 장영공(윤위)파(章榮公(潤渭)派)를 각 파의 1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남원 양씨는 양씨 전체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중 병부공파(兵部公派)와 용성군파(龍城君派)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분포지역은 병부공파가 남원(南原)을 비롯하여 경남 동래,통영,고성,삼천포 지방과 경기도 양평,김포 일대이고
용성조파는 전북 남원,장수 지방과 충남 금산,경북 청도 지방 등에 집중 되어있다.
남원 양씨는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 45명과 청백리 2명, 공신1명, 장신 1명을 배출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양성지(梁誠之), 양연(梁淵), 양헌수(梁憲洙) 등을 들 수 있다.
병부공파(兵部公派) 1세인 능양(能讓)공은 976년(성종1년) 봉사(奉使)로 송나라에 들어가 국자감에서 김행성(金行成)과 같이
전례(典禮)와 경의(經義)를 강의 하였고 빈공과(賓貢科)에 급제 하였으며 환국하여 학교를 설립, 영재교육에 힘썼다.
성종 때 중봉대부(中奉大夫), 병부낭중(兵部郎中)를 거쳐 동궁내시강학사(東宮內侍講學師)에 올랐으며 용장서원(龍章書院)에 제향 되었다.
10세손 우(祐)는 문과에 급제한후 여러 벼슬을 거쳐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라 판도판서(版圖判書)로 집현전 대제학(集賢殿 大提學)을 겸하였는데
이성계(李成桂)가 권세를 잡아 조정이 위태롭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니 세인이 동국(東國)의 백이숙제(伯夷叔齊)라 하였다.
입향조는 13세손 성지(誠之)인데 공은 1441년 진사(進士), 생원(生員) 양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 출사(出仕)하여 집현전에 들어가
부수찬(副修撰), 교리(校理) 등을 지내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 겸 수사관으로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 했다.
이어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에 승진, 1453년(단종1년) 임금의 명으로 조선도도(朝鮮都圖), 팔도각도(八道各圖)를 작성했고
다음해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찬진 했으며 1455년(세조1년)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편찬 하였다.
이듬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고 1463년 왕명으로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하고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도록 건의 하여 역대의 서적을 보관하게 하였다. 제학(提學)으로 취임 이듬해 구현시(求賢試)에 급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재직 중 오륜록(五倫錄)을 찬진했다.
이듬해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급제,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을 찬진했다.
1469년(예종1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직하여 세종실록(世宗實錄), 1470년(성종1년)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참여했고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
1477년 대사헌(大司憲)에 재임됐다가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었고 1481년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으로 여지승람(輿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어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1482년 서적의 인간(印刊)수장(收藏)에 대해 12조의 건의문을 올렸다.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문양공파(文襄公派) 1세조인 눌제(訥齊) 성지(誠之)공은 김포시 양촌면 대포리에 형 경지(敬之)와 조카 감( )이 살고 있었으므로 관직 생활 중에 공신전(功臣田)을 김포에 받았다. 재직 중 이곳 김포 대포곡(大浦谷)에 아들 4형제의 집과 선생의 별서(別墅)인 지족당(止足堂·永 齋)과 목안정(木雁亭)을 짓고 정주 하였는데 이곳에 유택(幽宅)과 신도비, 사당인 수안사(守安祠), 대포서원(大浦書院)이 있다.
고려 우왕3년(1376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청풍(淸風), 옥천군수(沃川郡守) 예빈사윤(禮賓寺尹)을 지낸 구주(九疇)공은 아들 문양공(文襄公)의 공훈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지고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숭정대부(崇政大夫)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左贊成 兼 判義禁府事)에 증직 되었다.
문양공(文襄公)은 4형제를 두었는데, 장자인 원(瑗)은 양지현감(陽智縣監)과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을 지냈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중되고
차자인 수(琇)는 정선군수(旌善郡守)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이며
제3자인 찬(瓚)은 무과에 급제하여 삼척(三陟) 수원(水原) 등의 부사(府使)를 거쳐 제주목사(濟州牧使)를 지냈으며 대호군(大護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 경연 참찬관(經筵 參贊官)으로 청백리에 뽑혔다.
제4자인 호(琥)는 증산현감(甑山縣監)을 지냈고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左贊成 兼 判義禁府事)에 증직 되었다.
문양공(文襄公)의 장손 치(治)는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금성(金城), 삭녕군수(朔寧郡守)를 역임 하였으며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되었다.
손자 연(淵)은 1524년(중종19년) 별시 문과에 급제, 장령(掌令), 집의(執義), 직제학(直提學)등을 거쳐 1535년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7년 대사헌(大司憲)에, 뒤에 좌승지(左承旨),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등을 거쳐 1541년 우참찬(右參贊)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증손 윤원(允元)은 문과에 급제, 삼등(三登)현감을 지냈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되고 윤형(允亨)은 무과에 급제, 대호군(大護軍)을 지냈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 되었다. 5대손 지(誌)는 음보(蔭補)로 적성(積城)현감에 이르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삭녕(朔寧)에 와있던 경기도 관찰사(觀察使) 심대(沈垈)의 종사관으로서 적의 야습을 받아 끝까지 항전하다가 순절했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삭녕(朔寧) 표절사(表節祠)와 충남 청양 표절사(表節祠), 동래(東萊) 삼절사(三節祠)에 제향되었다.
문양공(文襄公)의 14세 손인 충장공(忠壯公) 헌수(憲洙)는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866년(고종3년) 병인양요 때 천총(千摠)으로 좌선봉장(左先峰壯)이 되어 강화도(江華島)에 침입한 프랑스 함대를 대파하고 무기다수를 노획한 공으로 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에 특진했다.
그 뒤 어영대장(御營大將), 금위대장(禁衛大將) 포도대장(捕盜大將)등을 거쳐 1875년 형조판서(刑曹判書), 1884년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했다.
후손 들이 번창하여 전국 각지에 수만여 호가 살고 있고 김포시에도 100여 세대가 주거하고 있다.
후손들의 활약상을 보면 양재동 문양공대종회 회장이 문양공의 부조묘인 수안사(守安祠)를 갱건(更建)하여 영정을 다시 제작 봉안하였고, 아울러 신도비각,대포서원 동.서재, 눌재회관을 건축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 - 눌재 양성지편], [역사인물교재 양성지편], [눌재 양성지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제작 배포하였다.
또한 눌재 선생 추모 전국학술대회 및 전국서예술대전을 개최, 눌재사상연구소(소장 김기열)를 설립하고 눌재사상 선양사업에 힘섰으며, 이와함께 눌재 선조의 유적인 대포서원을 김포시 향토유적 제1호, 산소 및 신도비를 제9호, 부조묘인 수안사를 제10호 향토문화재로 지정받음으로써 교육 및 관광자원화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