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나주 김씨(羅州 金氏)의 시조인 김운발(金雲發)은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손자로, 경순왕과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 사이의 둘째 아들인 김굉(金鍠)의 아들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김굉(金鍠)은 신라가 망하자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가 삭발을 하고 법명(法名)을 범공(梵空)으로 하고 불가에 귀의(歸依)하였는데, 그가 입산하기 전 고려조(高麗朝)에서 두 아들을 예우하여 첫째 아들 김운발(金雲發)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나주군(羅州君)에 봉해졌으며, 둘째 아들 김우발(金雨發)은 경주군(慶州君)에 봉했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은 김운발(金雲發)을 시조(始祖)로 삼고 나주(羅州)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본관
나주(羅州)는 전남의 중서부에 위치한 고장으로, 백제시대에는 발라군이었다가, 신라 경덕왕이 금산군으로 고쳤다. 후백제시대에는 견훤이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고, 후에 고려 태조 왕건이 점령하여 나주라 개칭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거란의 침입으로 왕이 일시 이곳에서 피난한 인연이 있어 목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세조 때에 나주목사는 진을 두고 영암 ·영광의 2군과, 함평 ·고창 ·광산 ·장성 ·진원 ·무장 ·남평 ·무안의 8현을 관할하였다. 조선후기 면리제가 정비되면서 나주목은 38개 면과 현 신안군 일대 30여개 이상의 도서를 관할 하는 목사고을로 많은 호구와 전결을 보유하고 교통으로 청암도와 조은으로 영산창을 가진 큰 고을이었다. 1895년 (조선 고종 32)에 지방제도 개혁으로 전국을 23부로 구분하면서 나주부가 되어 관찰사가 주재했다. 이듬해에 다시 전국 행정구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나주부가 폐지되고 나주목이 나주군이 되어 전남의 1등군이 되고, 전남의 행정중심이 광주로 옮겨졌다.
인물
김운발의 아들 김중륜(金重輪)과 김인륜(金仁輪)이 고려에서 각각 시중(侍中)과 원윤(源尹)에 올랐으며, 증손자 김원상(金源相)은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역임하여 명성을 떨쳤다. 1326년(충숙왕 13년) 문과에 급제한 김대경(金臺卿)은 벼슬이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문장(文章)이 당세에 뛰어나 동문선(東文選 :신라 때부터 조선 숙종 때까지의 시문을 모은 책)에 그의 시가 올랐고, 한때 목은 이색과 함께 나주 안로현(安老縣)에서 유배생활을 겪기도 하였다. 김대경(金臺卿)의 아들 김가구(金可久)는 충목왕(忠穆王)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으며, 손자 김정준(金廷儁)은 조선 제2대 정종(定宗) 때 왜구(倭寇) 토벌에 공을 세워 부총제(副摠制)를 지냈으며, 김정준(金廷儁)의 둘째 아들은 김종서(金宗瑞)의 사위가 되었다. 김정준(金廷儁)의 현손(玄孫) 김경석(金景錫)은 중종(中宗) 때 급제하여 명종 10년(1555년) 호남 지방에 왜구가 침입하자 방어사(防禦使)로 종질(從姪) 김적(金適)과 함께 영암포(靈岩浦)에서 무찔렀으며, 김적(金適)의 아들 김충수(金忠秀)는 자는 중심(中心), 호는 귀암(龜巖)으로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撫原從功臣)에 책록되고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부인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여 나라에서 그의 고향 공주에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학자로 이름난 김덕수(金德秀), 공조좌랑(工曹佐郞) 김복남(金福男)을 비롯하여 부호군(副護軍) 김세빈(金世彬)이 유명하며 전라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김장송(金長松),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낸 김몽동(金夢東)과 김난익(金蘭益), 현감(縣監)을 지낸 김희징(金禧澄)과 김원동, 이등공신(原從二等功臣) 김언호(金彦浩)와 함께 명성을 떨쳐 가문을 빛냈다
집성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