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낯선 곳을 향하여
정 성 천
온통 사막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풀하나 자라지 않는 회백색의 황무지이다. 사진 상으로 보던 중동 모래사막과는 또 다른 사막이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부드러운 모래언덕이 있는 그런 사막이 아니라 풀하나 자라지 못하는 푸석푸석한 회백색 흙무더기가 거대하게 솟아나 산이 되고 평지가 된 그런 사막이다. 비가 오지 않는 곳이라 산의 형태로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만약에 세찬 비가 한 번이라도 내린다면 단번에 씻겨 허물어져 내릴 듯한 그런 황무지 산이다. 산이라고 불쑥 솟아는 있지만 어디를 둘러 봐도 생명의 색인 녹색을 찾을 수가 없다. 마치 황량한 달 표면을 달리고 있는 듯 착각이 들 정도이다.
데니스라는 영어선생님이 따끄나 공항까지 자동차를 끌고 마중 나와 주었다. 그의 차를 타고 따끄나에서 뽀오얀 먼지를 일으키며 모케구아를 향해 달려 온지 두 시간이 다 되어 간다. 앞 조수석에 앉은 백선생은 커브를 돌 때마다 떨어져 내리는 자동차 앞 유리 밑에 깔아 논 깔개를 연신 끌어 올리느라 정신이 없다. 햇볕이 너무 강렬해서 자동차를 보호하기 위해 깔아 논 보호 덮개인 것 같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다. 자동차 밖 풍경도 너무 생소하지만 차안의 비주얼도 너무 낯 설기만 하다.
여기까지 오는 여정도 만만치는 않았다. 한국에서 비행기 티켓을 예약 할 때 처음에는 가장 빈번한 노선인 한국에서 미국 LA를 경유하는 리마행 노선을 택했었다. LA까지는 대한항공으로 LA에서 리마까지는 페루항공인 란 항공을 이용하는 노선이었다. 그런데 페루의 란 항공료가 터무니없이 비쌌다. 나의 항공료는 교육부에서 부담하니까 상관없지만 동반하는 아내의 항공료는 내가 부담해야 하니 부득불 조금 더 저렴한 애틀란타를 경유하는 델타항공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었던 것인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이 문제가 되어 제 날짜에 리마행 비행기를 탑승치 못하고 하루 밤을 애틀랜타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교육부에서 왕복 항공권을 구매했기 때문에 돌아오는 날자가 1년 뒤의 날짜로 예정되어 있었다. 양국 간 MOU가 아직 체결되지 않은 상황이라 일단 관광무비자 3개월을 활용하여 페루에 입국하고 추후 MOU가 체결되면 현지에서 1년 체제 비자를 발급 받는다는 교육부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비자 당사국도 아닌 경유 국가인 미국에서 문제가 되었다. 미국인들의 오만과 일등국가라는 과도한 자부심이 빚어내는 어처구니없는 태클에 내가 재수 없게 걸려 든 꼴이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수가 없었다. 미국과는 아무상관이 없는 페루 1년 체제비자를 받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애틀랜타 공항의 델타 항공 검표직원이 완고하게 탑승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여러 번 사정도 해 보았지만 막무가내여서 할 수 없이 제 날짜에 탑승치 못하고 말았다. 다행히 델타항공에 근무하는 한국동포의 도움으로 하룻밤을 공항 인근 호텔에서 묵고 우여곡절 끝에 하루 늦은 날짜에 리마행 비행기를 가까스로 탈 수 있었다.
리마에 밤 12시에 도착하니 대사관에서 영사 한 분이 마중 나와 숙소까지 픽업을 해주었다. 미리 정해 두었던 숙소에 짐을 푸니 새벽 2시가 넘었다. 주위를 헤아릴 경황도 없이 잠이 들었다. 그 다음 날 한 달 전에 미리 와 있었던 두 분 선생님들이 찾아 와 인사를 한다. 그런데 의외의 소식을 들고 왔다. 우리의 근무지가 수도 리마가 아닌 페루의 남부지방 모케구아라는 중소도시로 정해 졌다고 한다. 리마에서 모케구아까지는 버스로는 21시간 걸리고, 비행기를 이용하려면 그곳에는 공항이 없어 가까운 공항이 있는 도시인 따끄나까지 2시간여 비행기를 타고 가서 다시 자동차로 2시간 반 정도 가야하는 곳이란다. 한국에서 리마까지 오는 여정도 어려움이 있었지만 리마에서 근무지인 모케구아까지의 더 멀고도 험한 여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모케구아로 내려가지 못하고 리마에 9일간 머물러야 했다. APEC준비를 위해 때마침 이곳에 온 교육 부총리의 대사관저 만찬에 참석하여 부총리 면담을 해야 하는 등 매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루에 대한 정보를 그나마 미리 알 수 있는 알찬 시간들이었다. 10여년전 브라질 한국교육원장으로 상파울루 총영사관에서 근무할 때가 생각났다. 난생 처음 경험했던 대통령 특사 관저만찬이라 너무 긴장되어 무얼 먹었는지, 맛이 좋았는지 어떤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고 소화 불량에 걸렸던 일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극도의 긴장은 없었고 집중하기 좋을 정도의 긴장으로 한결 마음 가볍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교육부총리님의 자상한 배려의 말씀 때문이리라. 한국의 교육을 통해 이 나라에 도움을 주고자 오신 분들이고 한국을 대표하고 한국교육을 대표하시는 분들이니 잘 부탁을 드립니다. 특히 자문관선생님께서는 연륜이 있으시니까 일도 중요하지만 항시 건강에 유의하시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때의 그 분위기에서 오래간만에 뿌듯한 충만감을 맛보았다. 약간 긴장되면서도 세상 돌아가는 것에 무언가 한 몫을 하고 있다는 느낌, 경기장 밖에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경기장 안에서 세상과 함께 뛰고 있다는 느낌, 아무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리마에서 모케구아로 떠나오는 날도 그렇게 느긋하거나 편하지 않았다. 외국생활이라는 것이 이렇게 긴장감과 단호함의 연속이라는 걸 오랜 만에 피부로 직접 느껴 보는 시간이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리마공항으로 허겁지겁 가서 5시 30분 따끄나행 국내선 비행기를 타야 했으니 말이다. 비행시간동안만은 설친 잠 때문에 쉽게 잠들고 인사불성이 되어 골아 떨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의식은 더 또렷해진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페루생활 그것도 대도시의 리마가 아니라 모케구아라는 중소도시에서의 생활에 대한 걱정 반, 기대 반의 설레임은 나의 의식을 더욱 더 말똥말똥하게 만들어 버렸다.
비행기 창밖으로 밝아오는 페루의 해안지대를 내려다보았다. 리마에서도 미라도르라는 높은 전망대에서 리마시가지외곽 풍경을 잠시 내려다 본 적이 있었다. 도심을 벗어 난 외곽지대는 빈민촌이 이어지고 그 너머에는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 황무지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 때도 그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었지만 비행기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는 페루 태평양 연안의 풍경은 더욱더 이해 할 수 없는 황무지의 연속이었다. 바닷가라서 비가 더 자주 올 법도 한데 이렇게 메마른 이유가 참으로 궁금했다. 온갖 지구과학 지식을 동원 해봐도 열대 지방의 작열하는 태양열과 지척에 있는 5,6천 미터 높이의 안데스 산맥의 영향 때문일 것 같다는 어렴풋한 답변 밖에는 얻을 수가 없었다.
2년 전에 정년퇴직을 했다. 40여 년 간 몸 담아 왔던 교직을 떠나자니 다소 섭섭한 감정이 들었으나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제 얽어 메인 생활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데로 책도 좀 읽고, 글도 좀 쓰고, 여행도 좀하고, 골프도 좀 치고, 탐석도 좀 다니고, 붓글씨도 좀 배우고 등 등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1년이 지날 정도까지는 그런 데로 무언가 하고 있다는 충만한 의식 속에서 생활했었다. 하지만 점차 이 세상의 중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고 사회의 아웃사이드가 되어 간다는 소외의식을 깨닫기에는 1년이라는 세월은 나에게 충분한 시간이었다. 뭔가 물속 저 밑으로 자꾸만 가라앉는 듯한 느낌, 이대로 가라앉으면 다시는 세상위로 떠오를 수 없고 심연의 고요 속에 영원히 침잠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 다시 한 번 더 수면위로 떠오르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저 뜨거운 태양도 다시 한 번 바라보고 신선한 공기로 심호흡도 한 번 하고 세상과 함께 뛰고 싶었다.
그래 마지막 발버둥이라도 쳐보자. 발버둥이라도 쳐야 가라앉는 속도도 줄일 수 있을 것이고 혹시라도 운이 좋으면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밧줄이라도 손에 걸릴 줄 누가 알겠는가? 그런데 정말 운이 좋았다. 해외로 나가는 굵은 밧줄이 발버둥치는 나의 손에 걸려든 것이다. 교육부가 처음으로 실시하는 퇴직자대상 해외교육자문관 파견 시험이 있었고 그 중 남미 유일의 페루 교육자문관에 내가 선발된 것이다. 2007년 브라질 한국교육원장으로 귀국한 후 9년 만에 다시 해외 근무를 하게 된 것이다.
2시간 남짓 산 중턱에 난 길을 달려 온 자동차가 이제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산모퉁이를 돌자 저 아래 계곡에 푸른 녹색의 들판이 갑자기 보이기 시작하더니만 그 크기가 점차적으로 넓어진다. 산은 풀하나 자라지 않는 회백색 황무지이고 계곡은 푸른 초원지대로 두 지역의 색깔이 극명하게 대비가 된다. 마치 사막속의 오아시스와 같다고나 할까? 차츰 거리가 가까워지자 나무와 집들도 보이고 건물들이 보이는 시가지가 나타난다. 데니스가 저곳이 바로 목적지인 모케구아라고 일러 준다. 너무 황량한 풍경에 말을 잃었던 동료 선생님들이 한결 마음이 놓이는지 말이 많아진다. 이제껏 말없이 굳어 있던 아내도 한 마디 거든다. “푸른 나무와 초원을 보니 살 것 같네.”
카톨릭 교회에서는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라는 구호를 자주 사용한다. 신자들의 성화를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씩 꾸준히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는 구호이리라. 나이 듦으로 인해 침체되어 가는 나의 의식을 꾸준히 일깨워 줄 방향을 정하고 나만의 구호를 하나 외쳐 본다. “저 낯 선 곳을 향하여”
어느 듯 푸른 오아시스의 도시, 그 미지의 땅으로 자동차는 미끄러지듯 빠르게 들어가고 있다.
첫댓글 아주 멋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