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108 사찰 순례(2009년 8월 22일 ~ 8월 23일)는 1박2일 일정으로 하여 경기도 지역의 고찰들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낙동초등학교앞에서 오전 6시 10분에 출발한다고 하여 부랴부랴 준비를 하여 갔는데 멀리서 오는 분이 6시 20분까지 도착을 한다고 하여 조금은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1박2일을 준비하느라 마님은 밤 늦게까지 부산하게 뭔가를 싸고 있었습니다. 버스가 출발하여 낙동강변을 따라 대동을 거쳐 신부산대구고속도로에 오르자 더욱 힘차게 달려갔습니다. 첫 사찰인 전등사까지는 5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습니다. 중간에 두 번이나 쉬면서 달려서 강화대교를 지난 호젓한 곳에서 나물 비빔밥으로 점심을 들고 곧바로 전등사로 향했습니다.
<전등사 들어가지 전에 호젓하게 점심을 든 곳>
전등사는 서기 381년에 세워진 현존 최고의 고찰(古刹)로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 진종사라고 했다고 합니다. 전등사는 고려시대 때 강화에서 호국불교의 결경체였던 팔만대장경 조성의 정신적인 지주 역활을 했다고 하며, 전등이란 "불법의 등불을 전한다."라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전등사의 대웅전은 보물 178호이며 도라지와 일출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전등사 입구의 소나무 숲과 호젓한 입구 길이 인상적이었고, 입구의 전통찻집에 아름다운 꽃들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그러나 어느 사찰을 가나 벌어지고 있는 공사며 질서없이 걸쳐져 있는 현수막이 좋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전등사의 연꽃>
<전등사의 수련>
<전등사 앞 찻집에서 본 노랑꽃>
전등사에서 나오니 빗방울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지만 구름 낀 날씨는 나들이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외포리 선착장으로 가서 보문사로 가는 배를 타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직도 여름철이 끝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주말이라서 그런지 많은 차들 특히 자가용들이 줄을 지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외포리 선착장에도 석모도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차들이 많았습니다. 1박은 보문사에서 한다고 하여 전지를 준비했는데, 전지의 전구가 나가는 바람에 그 전구를 구하려고 했지만 구할만한 곳이 보이지 않아 여기저기 기웃거렸습니다. 결국 전구가 작동하지 않는 전지를 들고 배를 탔습니다. 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받아서 버스를 타고 바로 배로 들어가지 못하고 사람들은 내려서 타야 했습니다.
배에 잔뜩 차와 승객들을 싣고 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갈매기들이 덩달아 함께 날아오르면서 승객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을 받아먹기에 바쁜듯 했습니다. 서해라서 그런지 바닷물의 색깔이 황토(뻘색)색이었습니다. 10여분만에 보문사가 있는 석모도에 도착을 하여 다시 버스에 올라 보문사로 향하는데 강화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석모도도 넓이가 웬만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차들이 연이어 달리고 있고 이런 차들이나 관광객들이 저녁 무렵이라서 다시 강화도로 나가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행렬이 장관이었습니다. 보문사 입구 주차장에서 보문사까지는 가파른 오르막이었습니다. 짐들을 챙겨서 보문사에 도착하여 대웅전 앞에 서서 서해를 바라보니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고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를 따라오고 있는 갈매기>
<보문사 대웅전 앞에서 서해를 등에 엎고>
보문사는 양양 낙산사와 금산 보리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기도도량이라고 하며 낙가산에 위치하는 1300년(서기 635년에 창건) 된 고찰이라고 합니다. 신라 선덕여왕 때 한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졌는데 사람 모양의 돌덩이 22개가 한꺼번에 걸려 올라와서 실망을 하고 돌덩이를 바다에 버리고 다시 그물을 쳤는데 이번에도 똑같이 22개의 그 돌덩이가 걸려올라오자 어부는 실망을 하여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날 밤에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낮에 그물에 걸렸던 돌덩이는 천축국에서 보낸 귀중한 불상이며 내일 다시 그곳에 가서 불상을 건져 명산에 봉안하라고 당부를 했답니다. 다음 날 어부가 불상을 다시 건져 올려 노승이 당부한 대로 낙가산으로 불상을 옮겼는데, 현재 보문사 석굴앞에 이르렀을 때 불상이 더 옮겨지지 않아 그곳에 불상을 안치하고 단을 만들어 모셨다고 합니다.
보문사에는 이외에도 마애관음좌상이 대웅전과 관음전 사이에 있는 계단(419 계단)을 따라 10여분 올라가면 서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낙가산 중턱 눈썹바위 아래에 새겨져 있는데 특이했습니다. 크기는 높이 920cm, 너비 330cm에 달하는 거상으로 1928년에 배선주 주지스님이 금강산 표훈사의 이화응 스님과 더불어 관음 성지임을 나타내기 위해 이곳에 새겼다고 합니다. 저녁 공양을 들고 곧바로 이곳에 올라 서해의 낙조를 바라보면서 예불을 드리고 내려오는데, 높이 때문인지 어질어질 했습니다. 다음 날에도 아침 일찍 올라보니 밤새 기도를 드렸는지 서울 말씨의 두 노 보살께서 여기 와서 겨울에 기도를 할 때는 발이 시리고 아침에 동이 틀 때는 등이 따뜻했다고 하시며, 여기에서 빌어 아들이 서울대에 들어갔다고 하셨습니다. 자식을 위하는 모심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낙가산 중턱의 눈썹바위 아래에 있는 마애석불좌상>
<확대 시켜 본 마애석불좌상>
보문사의 밤은 목탁소리와 바람소리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늘은 구름 때문인지 별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예불소리로 절간에 와 있다는 실감이 났습니다. 보문사에 일반인들이 기도를 하기 위해 묵는 숙소는 수십 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어 남녀만 구분될 뿐, 어디서 왔는지는 상관없이 합숙을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님과 다른 한 부부와 함께 우리는 새로 지어진 와불전에서 기도를 하다가 거기서 1박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밤이 되니 나방과 모기가 기승을 부려서 작은 불만 켜고 밤을 재촉하였습니다. 잠깐 눈을 붙이는가 했는데, 덜컹 문이 열리면서 와불전을 맡고 있는 보살님이 새벽 예불시간이라고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새벽 3시가 되지 않은 시각이었습니다. 놀란 두 부부는 눈을 부비며 일어나 앉아 다시 와불 앞에 정좌를 하였습니다.
<보문사 대웅전과 전경>
<보문사 와불전의 와불>
혹시나 하여 가지고 왔던 대금은 소리도 한 번 내어보지 못하고 밤을 지샜습니다. 어디 독주를 할만한 곳이 있나 하여 세수를 하고 나서 다시 마애석불쪽으로 올라가 보았지만, 적당한 곳이 없어 삼배만 하고 내려왔습니다. 다시 와불전에서 잠시 명상에 잠겼다가 아침 공양을 하고 올라오는데 총무님께서 보살님들이 대금연주를 들어야 하겠다니 하니 대웅전 앞에서 연주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대금을 펼치는데 조금전에 스님들께서 눈을 붙이셨다고 연주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문사를 뒤로 하고 내려오다가 입구 바로 옆에 있는 찻집 2층에서 "상령산"과 "약속" 두 곡을 연주하고 버스를 탔습니다. 그래도 강화도 석모도까지 와서 대금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만족했습니다. 아직은 안방대금이지만 언젠가는 멋진 연주를 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석모도를 벗어나 강화도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세번 째로 들릴 용주사로 향했습니다. 용주사는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화산(花山)에 위치하는 사찰로, 원래는 신라 문성왕(854년) 길양사로 창건 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되어 폐사되었다가 조선 22대 정조대왕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현륭원)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지금의 용주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용주사란 이름은 낙성식하는 날 밤에 정조대왕의 꿈에 여의주를 문 용이 승천했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합니다. 결국 용주사는 불심과 효심이 어우러진 고찰이라고 합니다. 용주사의 대웅전은 "대영웅 석가모니불을 모시 보배로운 전각"이라고 하여 대웅보전이라고 칭하고 있었습니다. 용주사 입구의 일주문과 용주사 삼문이 특이했고, 삼문옆에는 박물관이 있었고 박물관 앞의 꽃밭에는 맨드라미와 연꽃과 봉숭아 등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습니다.
<용주사 삼문 앞에서>
<용주사의 도라지꽃>
원래 한 번의 사찰 순례에 세 절씩 다니기로 했는데, 1박2일 일정이다 보니 한 곳을 더 들리게 되었는데, 바로 칠현산 아래에 있는 칠장사였습니다. 칠장사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에 위치하는 고찰로, 용주사의 말사로 경기도 문화재 자료 25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칠장사는 신라 진덕여왕(648년경)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고 고려 헌종(1014년) 때 혜소국사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에 의해 더욱 크게 중수되었다고 합니다. 칠장사와 관련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중에 궁예가 어린 시절을 여기서 보내며 활쏘기를 배웠다고 하고, 임꺽정의 스승인 갓바치 병해대사가 머무렀다고 하며, 어사 박문수가 이곳에 있는 나한전에 기도를 하여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입시를 둔 부모나 고시를 앞에 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칠장사 대웅전>
<임꺽정 벽화>
<궁예 벽화>
마지막으로 들러는 사찰이라서 그런지 햇볕이 너무 뜨거웠지만, 해설을 해주시는 분의 구수한 이야기에 모두들 시장기도 잊고 열심히들 듣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부도가 특히나 많아 45기나 있다고 합니다. 대웅전과 나한전 그리고 삼성각을 들러 내려왔는데, 해설하시는 분의 나한전 이야기를 듣고는 마님이 다시 나한전에 가서 우리 공주(첫째)와 왕자(둘째)를 위해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갔습니다. 또한 칠장사에는 임꺾정이 병해대사의 유지를 따라 목수를 고용하여 조성한 불상이 있는데 이것을 꺽정불이라고 하며 모시고 있었습니다.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버스를 다시 타고 점심을 먹으러 근처 식당으로 갔는데, 아침 6시에 아침을 했으니 무려 8시간만의 밥 구경이라 모두들 허겁지겁 돌솥밥이 들어가는지 반찬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모자라는 반찬들을 시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칠장사 꺽정불>
<칠장사 입구에서>
<칠장사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
배를 든든히 채운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올라 집으로 향했습니다. 어젯밤 보문사에서 회의가 잠깐 있었는데 그때 각자의 소개를 하는 시간을 갖자고 했는데, 출발하자마자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를 하였습니다. 우리 부부도 차례가 되어 이번 아니 108 사찰 순례가 아주 유익하고 배우는 것이 많다고 하면서 간단하게 소개를 했습니다. 모두들 사는 것이 고만고만 하면서도 서로를 위하는 정과 나눔을 아는 마음들을 가지고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음 번에도 기회가 되면 동행을 하겠지만, 총무님이며 이런 행사를 준비하는 분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에 감사를 드리고 함께 1박2일을 무사히 보내고 오는 일행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일찍 출발해서 그런지 오후 6시 30분 정도가 되어 출발했던 낙동초등학교 앞에 도착을 했고 다음 번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서로 손을 흔들면서 밝은 표정으로 모두들 집으로 향했습니다. <합장>